배움의 즐거움

부모님이 나에게 어려서부터 익히 말씀하신 건, 부모님으로서 주고 싶은 건 물고기가 아니라 물고기를 잡는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연배가 드심에 따라 이것 저것 주고 싶은 마음과, 주고 싶은 만큼 주지 못하심으로 인해 생각이 다소 변하신 바도 있겠지만, 나의 성장기동안에는 항상 그를 주지시키셨다. 그리고 나에게 여러 종류의 배움의 기회를 주셔서 그 과정을 통해 배움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배움에 대한 다소의 강박이 생겼긴 했지만, 그건 내 성격 탓이고. 

내가 하나에게 주고 싶은 것을 꼽자면 바로 그 배움의 즐거움이다. 배움에는 시기가 없고 배움의 종류에도 제한이 없다는 것도 함께. 

테니스와 배드민턴, 탁구 등 부모님과 함께 했던, 또는 부모님의 권유로 시작했던 (전혀 진지하지 않게 취미/가족 스포츠로서) 운동에서 운동의 재미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부모님의 권유로 시작했던 피아노에서 (한때는 속으로 몰래 싫어하면서 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참 긴 시간) 클래식 음악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사실 발레를 좋아하게 된 건 이런 것들이 다 결합된 취향일 지 모르겠다.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의 선율에 맞추어 정교한 몸의 움직임을 통제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발레라는 예술이자 운동이 나에게 얼마나 큰 배움을 주고 있는지 모른다. 끊임없는 노력, 미미하지만 끊임없는 발견과 발전, 나의 한계에 대한 인지,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넓히려는 또 다른 노력, 내 몸의 구조와 근육에 대한 이해. 내가 몸담고 있지 않은 예술 직종에 대한 간접적 노출과 이해 등… 

이에 더불어 부모님의 도움으로 일찍부터 시작한 영어나 중국어 학습을 통해 내가 언어에 평균보다 좋은 감각이 있다는 것도 알았고 그로 인해 새로운 언어에 대한 관심도 갖게 되었다. 그로 인해 찔끔찔끔 공부한 여러 유럽언어들이 다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지금 덴마크어를 공부함에도 도움을 주고 있기도 하고. 앞으로 덴마크어가 영어보다 더 유창한 언어가 되는 시점에는 또 새로운 언어를 공부하고자 하지 않을까 싶다. 배움이 주는 즐거움을 아니까. (물론 이게 인스턴트한 즐거움이 아니다보니 즉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리지 않게 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긴 하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해, 배움은 평생을 이어가도 닿을 수 없는, 영원이 풀어가야할 숙제임도 알고 있다. 이 또한 즐겁다는 것도.

하나에게 물려주고 싶은 건 바로 이러한 배움의 즐거움을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그리 해주셨듯이. 남들보다 잘해야 하는 게 아니라 어제보다 더 잘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연습밖에 없다는 것. 배워봐야 좋고 싫음도 알 수 있다는 것을. 작은 실패와 성공이 자기에게 어떻게 힘이 되는 지를. 얼마나 내가 이걸 잘 알려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뭘 알려주고 싶은지 아는 것만으로도 좋은 출발이라 생각해본다.

음악에서 찾는 일상의 행복

일하면서 스포티파이에서 만들어준 내가 자주 듣는 클래식음악 리스트를 듣는데 어찌나 내 취향에 쏙 맞는지. 물론 자주 들은 것에서 뽑은 거니까 잘 맞는 것도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잘 맞는 것들을 추린 것이 놀랍다.

내가 좋아하는 드뷔시 곡과 푸치니 곡이 최근에 내가 본 발레, 동백아가씨와 브릭슨에서 연주되었는데, 그 곡들을 듣는 순간 (특히 드뷔시 곡들!) 발레에서 본 장면과 안무가 떠올랐다. 작지만 행복한 추억의 순간!

차별과 편견 사이에서

인종, 성별, 종교, 성적지향 등 여러가지 주제에 대해 차별과 편견에 대한 토론은 나라를 가리지 않고 뜨겁게 벌어지고 있다. 덴마크에서는 성별이나 인종과 관련한 편견을 넘어서 사실에 대한 표현을 포함해 이에 대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토론이 꾸준히 이뤄진다. 스웨덴은 그와 그녀라는 인칭대명사가 누군가에게는 부적절한 표현이 될 수 있다 해서 성중립적인 인칭대명사를 만들기도 했다. 심지어 크리스마스에 해당하는 단어인 율(jul)이 붙은 크리스마스빵, 크리스마스소세지, 이런 것도 비기독교인을 소외시키는 표현이 될 수 있다 해서 겨울로 단어를 바꾸는 일도 생기고, 그 또한 부적절하다면서 논쟁이 붙기도 하고 있다. 

덴마크식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에 대한 고민은 때로는 너무 멀리간 것 같다 생각한다. 옛날 노래에 쓰인 당시에 생각없이 쓰이던 인종차별적인 표현이 쓰인 노래를 새로운 개정판에서 아예 빼버린다는 사례가 있었다. 또 학교노래책에 나온 “덴마크 소녀는 금발머리 소녀”라는 표현이 금발머리가 아닌, 이민자나 이민자의 후손인 사람들을 소외시켰다 하여 해당 노래를 부르지 않게 하겠다는 어느 대학교의 발표 사례도 있었고. 또한 공공장소에 가족 구역을 표시하는 표시도안을 두고 남녀로 구성된 부모와 엄마 손을 잡고 있는 아이가 성적인 편견을 고착화시킨다며 문제시되는 사례도 있었다. 심지어 어떤 대학교에서는 학생이 법적 이름을 쓰는 것을 꺼릴 수 있으니 교수에게 수업 시작 전, 그런 예민한 사안에 대해 학생들과 미리 교감해서 실수하지 않게 하라거나, 여학생이나 남학생 표현을 써서 성별로 구분을 하지 말라는 지침이 나왔음이 알려지기도 했다. 옛날 노래에 나온 인종차별적인 표현은 잘못된 과거의 표현의 과오를 돌아보는 사례로 쓸 수도 있는데 무조건 덮는 것 같기도 하고, 차이에 대한 인식이 차별로 이어질까 두려워 미리 그런 기회조차 막으려는 게 나에겐 과하게 비쳐지기도 한다. 나뿐 아니라 이에 대해서는 양론으로 갈리는 듯 하다.  

그러나 이는 사회 전체적 차원의 고민이고 개인적 수준에서는 이런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높은 감수성과 상반된 상황을 간간히 접할 수 있다. 인종에 대한 편견이나 아시아에 대한 무지 등으로 인해 빈정상하는 상황 말이다. 덴마크인의 냉소적인 농담은 자기 비하를 담는 경우도 많고 농담일 경우 우리 모두는 동등하게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평등의식하에 조롱성 농담의 대상에 성역이 없어서 정치인, 종교적 지도자 등 할 것 없이 다 조롱성 농담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농담에 성역이 없다는 의식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농담이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예를 들어 백인이 기독교인에 대한 조롱성 농담을 하는 것처럼 특권을 가진 사람이나 평소 편견의 대상에서 배제되는 사람이 자기에 대해서 아니면 비슷한 상황의 사람에 대해 조롱성 농담을 할 경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백인이 무슬림에 대한 조롱성 농담을 하면 문제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생김새가 다르기 때문에 대우상 차별을 받거나 놀림을 당한다거나 하는 두드러지는 차별적 상황이 있다. 이처럼 편견과 차별이 다 얽혀있는 경우 상황이 명료하다. 하지만 애매한 경우도 종종 생긴다. 아시아인이라고 무조건 중국어로 인사를 한다거나, 두 손을 모아 합장하는 인사를 한다거나, 아시아인은 이렇지? 라며 어디서 유래한 건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한다거나. 국제커플이 가입한 카페에 근근히 올라오기도 하고 지인들에게 듣기도 하는 기분 나쁜 상황들. 이게 기분나쁠 일인지, 아닌지, 짜증이 약간 나는데 현지 서양인 지인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싶어 물어봤을 때 그들이 그냥 친밀감의 표현이라 넘기면 팔은 안으로 굽는건가, 아니면 내가 예민한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오랜시간 곰곰히 생각해본 결과 편견은 편견이고 차별과 구분해야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차별과 편견을 혼용해서 쓰면 논점이 흐려지고 토론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는 일이 생길 것이고, 실제 이런 일은 왕왕 벌어진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편견에 부딪히게 되고 그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한다. 편견은 좋지 않은 것이고 바꿔갈 노력이 필요하지만 편견 자체가 차별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편견 자체는 사람의 머리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이를 바꾸도록 강제할 방법이 없지만 차별은 시정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 채널이 존재할 수 있다는 데에서 차이를 갖는다.

내가 아시아인이라 아시안누들과 간장소스, 밥 등을 좋아할 거라 상대가 믿는 건 편견이다. 내가 아시아여자라 순종적일 거라 생각하는 것도 편견이다. 내가 아시아인이니까 수학을 잘할 거라 믿는 것도, 영어를 못할 거라 믿는 것도 편견이다. 여자는 밥을 잘할 거라 믿는 것도 편견이다. 여자는 히스테리컬하다고 믿는 것도 편견이다. 아시아 여자는 여성스럽고 작고 내 말 잘 듣고 착할 것 같아서 아시아 여자만 좋다는 것 (소위 옐로우 피버)도 편견이다. 

하지만 이건 차별이 아니다. 차별은 일련의 편견으로 인해 남들과 달리 나에게 어떤 권리나 기회가 배제되는 경우를 말한다. 따라서 내가 아시아인이라 영어를 못할 것이라 믿어 서류 검토도 안하고 이력서를 옆으로 재껴두는 것, 아니면 자기가 만난 아시아 부인에게 상대가 서양인이었으면 요구하지 않았을 부당한 것을 당연히 요구하고 이에 불응시 불이익을 주는 것이다. 

물론 차별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 편견을 가질 때 문제의 발생 가능성이 높아진다.

사회적으로 편견이 널리 퍼져있을 경우, 그게 차별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편견을 깨려는 노력을 한다. 하지만 편견을 가진 모든 사람을 나쁘다고 할 수 없다. 그게 그 사람이 받은 교육의 수준일 수 있고, 주변 상황에서 오는 한계 때문일 수 있다. 시골에서 살면서 딱 한번 외국인을 만나보고 그 외에 보고 들을 일이 없었으며, 일반화의 오류 등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 한명의 외국인에게서 가진 편견을 다른 외국인에게 적용한다 하면, 그걸 교육받지 못한 당신 탓이고 나쁘다, 이렇게 말하기 어렵다는 거다.

외국살이하면 편견을 겪을 일도 종종 있고 굳이 그렇지 않아도 한국은 편견이 넘치는 사회라 이를 경험할 일이 많은데 이 편견 모두를 차별이다 라고 외치는 것도 잘못이라 생각한다. 편견에서 상처를 받는 건 사실 어찌보면 내 선택이다. 편견을 편견으로 치부하고 남의 머리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왈가왈부하지 않겠다고 하고 갈 수 있는 일을 자기가 상처받겠다고 선택한 거란 이야기다. 편견을 해소하는데 일조할 수 있다면 물론 더 좋지만, 그 편견에 차별이라 외치며 혼자 상처받을 필요도 없다.

상처받거나 싸우는 건 차별에 초점을 맞추자. 나와 남의 권리가 편견으로 인해 제한되었을 때 말이다. 

나의 모습을 그려가기

옛날에 교과서에서 큰바위얼굴을 읽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큰바위얼굴을 닮은 사람을 찾아오던 소년이 나중에 그 바위와 닮은 얼굴을 갖게 되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예전의 나는 참으로 내가 아닌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에게 없으면서 내가 갖고 싶은 것을 갖고 있던 사람을 볼 때마다 내가 작게 느껴지고, 왜 나는 그런 면모를 갖지 못하는가, 왜 나는 내가 싫어하는 모습을 버리지 못하는가 하는 생각으로 나를 많이도 괴롭혔다.

지금의 내 모습이 내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모습에 가깝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고 여전히 많이 멀다. 아니 이제는 이상으로 생각하는 모습이라는 게 딱히 없어진 것 같다. 그렇지만 예전에 내가 나를 싫어하던 모습에서는 벗어난 것 같다. 

내 못난 점이 훗날 드러날까 싶어 그런 못난 부분을 미리 한껏 꺼내보이는 것이 하나의 예다. 아마도 일련의 드러낸 단점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왜곡된 마음의 결과였던 것 같다. 내 단점을 굳이 감추자는 것도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상대가 관찰하고 발견할 수 있도록 놔두지 않고 그런 점을 불필요하게 다 미리 볼 수 있게 다 끄집어내서 설명하거나 보여줬다. 이런 내 모습이 참 싫으면서도 그렇게 하곤 했다. 그리고 장점은 항상 겸양의 탈을 쓰고 과하게 그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말이다. 아마 내가 노력을 해서 장점을 보여줬는데도 거절당하는 상황을 방지하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30대 초반까지의 나는 컴플렉스 덩어리였다. 외모도 별로고, 왈가닥에 할 줄 아는 건 일밖에 없는 사람인 것 같았다. 언어에 감각이 있다곤 해도 해외에서 살다온 사람에 비할 바도 아니고. 뭔가 눈에 띄게 뛰어난 게 없던 것 같았다. 오히려 못난 것에 초점을 맞추면서.

어려서 들었던 코가 조금만 높았다면 더 예뻤을텐데, 이빨만 교정이 잘 되었어도 (내가 인내심을 갖지 못하고 고등학교 때 관뒀다.) 더 이뻤을텐데. (결국 30대에 들어 턱관절 문제의 악화로 내돈 들여 다시 교정했다.) 주변에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만 안들었어도 아마 내 이나 코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다.

성격적으로는 내 왈가닥같은 성격으로 좋아하는 애의 관심을 받지 못하자, 그 고민의 결과로 엄마가 성격을 한번 좀 얌전하게 바꿔보자 하고 이야기해주셨는데, 그 성격이 그런다고 바뀔리도 없고, 그냥 내 성격이 단점으로 느껴지게 되는 계기만 된 것 같다. 

그 많은 게 바뀐 건 30대 들어서 심리서에 대해 열심히 읽어가며 나의 감정에 대해 이성적, 분석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하면서, 옌스를 만나기 시작하면서였다. 외모와 성격을 포함해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고 기뻐해주고, 단점에 대해 조차 장점으로 봐주는 옌스와 함께하며 나에 대한 불안을 떨쳐내기 시작했다. 내 모습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기뻐해주는 사람이 있다보니, 나에 대한 나의 불만족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변화라는 건 꾸준한 노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것도 머리속에서 만이 아니라 마음속으로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그냥 나는 나의 장점이 있음을 안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다 내 것으로 할 수 없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음도 알고. 또 그래서 이제 나를 과도하게 깎아내리거나 칭찬을 과하게 거부한다거나 남을 좋게 평가해주기 위해 나를 깎아내리지 않는다. 

우아함을 항상 갖고 싶었는데, 그건 나와 너무나 멀리 있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나를 희화화하고 익살스러운 행동을 하면서 그렇게 하는 나를 혐오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나에게도 그러한 면이 있음을 발견했고 그걸 평소 생활에서도 체화하고자 노력했더니 나를 익살스러운 사람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예전엔 이런 체화의 노력을 가식이라 평했을텐데, 그렇지 않음을 깨달았다. 

내가 원하는 모습을 가진 사람을 보면 부러워하지 말고 노력을 해야 함을 깨달았다. 꾸준함만이 답이다. 그리고 지금 나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도. 그게 출발선이니까. 그렇게 나는 나를 그려가고 있다. 

직장 생활 속 내 안에 느껴지는 소소한 변화

지금 직장에 다니기 시작한 이래로 어느새 열달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흐르다니.
요즘 들어 내 안의 소소한 변화가 느껴진다. 

1. 업무적으로 팀 안에서 내 위치가 확고해졌다. 원칙적 승인을 받은 모델을 모니터링그룹에 발표했는데 큰 호평을 받았다. 센터 안에서도 크게 칭찬을 받고, 발표를 들은 타부처 동료들에게도 내가 큰 전문성을 갖고 해당 모델을 잘 만들어가고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는 평을 직접 또는 센터장을 통해 들었다. 2021년 입법을 위해 내년까지 모델을 만들고 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 모델이 구체적 형태를 띄기 시작하니 다른 업무와 연계되는 부분에 대한 협의도 늘어나고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자연히 내 위치도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2. 직장 동료들과 친해지고 내안의 내가 만들어낸 소외감이 사라졌다. 사실 업무하느라 바빠서 점심시간이나 회의시간 이외에 다른 동료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많지 않다. 간간히 잘 맞는 동료끼리 커피를 내리러 같이 캔틴에 가곤 하는데, 나는 그냥 혼자 내려가는 편이라 기회가 더 적은 편이다. 딱히 누가 날 소외시킨 것이 아닌데, 내가 스스로를 조금 소외시켰다. 별거 아니지만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고 그로 인해 의도하지 않은 실수를 할 수 있다는 두려움(사실 실수 해도 될텐데)이 마음속 깊은 곳에 스몰토크에 대한 불편함을 심어준 것 같다. 그냥 시간이 지나서인지, 업무적으로 내 영역이 확고해지면서 내 소속감이 강해진 게 기저의 이유가 된 것인지, 뭐가 계기가 된 지는 모르겠지만, 직장동료들과의 관계가 편해지고 다 가깝게 느껴진다.

3. 언어문제가 많이 흐려졌다. 보고서 작성, 내외부 프레젠테이션, 내외부 회의 및 토론, 유무선 비대면 커뮤니케이션, 점심시간이나 다과회에서 일어나는 다대다 커뮤니케이션 등 여러 상황에 끊임없이 노출되다보니 거의 대부분의 상황에서 커뮤니케이션의 문제가 엄청 흐려졌다. 말로 인해 긴장하는 게 많이 흐려지다보니 어디 가서도 크게 위축될 일이 없다. 어쩌면 좁은 네트워크 속에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서로 잘 아는 사람이 한둘씩 끼는 상황들이라 위축이 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상황별 프로토콜에 대한 문화적, 직업적 이해가 늘어나고 언어 문제가 거의 흐려졌다. 특히 어제 회식에서 시끄러운 와중이 이런저런 별의 별 이야기를 다 하는 와중 나도 ‘이게 무슨 이야기지? 나는 어디에 있는거지?’ 하는 백지같은 상태에 빠지지 않고 다 참여할 수 있게 되면서 뭐랄까… 언어면에서 궁극의 테스트를 통과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언어의 발전은 역시 선형적이지 않고 계단식으로 이뤄지는 게 맞다. 한동안 발전이 안느껴졌는데, 지난 일이주 사이에 비약적 변화가 느껴지는 거 보니 말이다.

어제 회식간 레스토랑에서 옌스와 하나와 잠깐 통화한 후 한장

거의 올해를 마무리하는 단계에서의 총평은 여기서 일하게 되서 너무 다행이라는 점, 이건 나에게 큰 네트워크를 선물해주고 성장하게끔 해준 아주 긍정적인 일년이라는 것이다. 작년 이맘때쯤에 지원서를 써내고 서류전형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사실 채용되면 일은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엄청난 성장이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그런 연유로, 공무원이 급여가 높은 것도 아니고 그렇긴 하지만 보람도 있고, 훌륭한 동료들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이곳에서 나는 그냥 오래 일하면 좋을 것 같다고, 옌스에게 이야기를 했다. 옌스도 자기 일이 업무적인 스트레스도 더 크고 바쁘고, 우리는 애도 있고 하니, 아무래도 업무강도가 컨설팅 같은 사기업보다 낮은 공무원이 더 좋을 것 같다고 하더라. 물론 여기도 승진하면 바쁘긴 하지만, 그건 먼 미래의 이야기인 것 같으니 지금 생각할 일은 아니고. 내년이 지나고 나면 더이상 내가 외국인이라 느껴지는 나만의 핸디캡 같은 건 완전히 떨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How wonderful!

발레, 발전

일주일에 두번 수업을 듣기 시작한 후로 발전이 느껴지고 있다. 동시에 유튜브로 발레강의 동영상을 꾸준히 듣고 거기서 배운 팁들을 활용한 것도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골반 중립에 대해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고 서는 다리에 주저앉지 않으면서 수평 골반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 코어근육 중 속근육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등을 알게 되면서 그간 잘 이해되지 않던 고관절을 분리해서 사용하라는 말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풀업도 그렇고.  그와 함께 발레 턴을 위한 중심 이동에 대해 저 위의 문제가 해결되고 동시에 턴과 관련된 몇가지 나쁜 습관을 고쳐가면서 턴도 많이 좋아졌다. 앞뒤와 옆으로 다리를 찢는 스트레칭도 좋아졌고. 

여러가지 집중해서 신경쓰던 일에서 자유로워지자 선생님의 동작을 보고 세세한 디테일이나 포드프라에 신경을 쓰는 게 조금 더 쉬워졌다. 여유가 조금이나마 생겼다고나 할까? 그리고 오르쪽 방향으로는 여러 안무에서 춤을 추는 게 좀 더 춤 다워졌다. 

그런 이후 포인트슈즈 클래스가 열리고 두번의 수업을 들었는데, 처음 포인트슈즈를 신는 거지만 그래도 이제 취미발레로나마 춤을 춘 기간이 제법되서 그런지 포인트슈즈를 신고 를르베로 균형을 잡거나 파세를 하는 것, 에샤페를 하는 것 등이 생각처럼 어렵지 않았다. 데미포인트로 발을 꺾을 때 슈즈가 꺾이는 점의 발등이 조금 아픈 것이 가장 힘들지만 그것 빼고는 좋았다. 

언젠가는 작품 연습도 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겠지? 

33개월의 하나

이제 거의 만 33개월이 다 되어가는 하나. 부쩍 큰 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행동과 말, 생각이 모두 부쩍 달라졌다. 


한국에 다녀오며 내가 덴마크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음을 느끼고 내가 한국인인지 묻는 것부터 해서 자기도 한국인인지, 아빠는 한국말을 잘 못하고 덴마크어를 잘한다고 말한다. 한동안 덴마크어를 많이 사용했던 내가 한국행 이후로 한국말을 고수하자, 내가 자기에게 한국말을 한다고 이야기한다. 보육원에서도 한국 다녀온 이야기를 하며 아빠는 한국말을 잘 못한다는 말도 한 모양이다. 하나가 덴마크말을 한국말보다 잘하다보니 나도 하나에게 덴마크어 사용이 너무 늘고 그래서 하나의 한국어 발달이 정체되었는데, 이를 다시 뒤집어보려고 한다. 워낙 언어감각이 뛰어나고 빠른 아이이니 나만 열심히 하면 장기적으로 한국어를 어느 수준까지 올리는 건 가능할 것 같다. 


친구에 대한 인식이 있긴 했지만, 한두달 전부터는 가장 친한 친구를 꼽으라면 나오는 이름이 딱 두명으로 정해졌다. 휴가 기간에도 자기의 장난감 전화를 눌러가며 친구에게 전화해서 자기 일상을 설명하기도 했다. 예전에 전화놀이를 하면 자기 집이다 또는 보육원이다, 또 보자, 혹은 의미없는 중얼거림으로 어른의 전화통화를 흉내냈는데, 이제는 구체적으로 이런 저런 자기 근황을 전하더라. 넘어졌는데 계속 아프다거나, 배가 아프다거나, 자기는 잘 지낸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거기에 말에 뉘앙스를 더하기 시작했고, 숫자는 9까지 세고, 실제 사물의 개수를 세는 건 네 개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상황에 어떤 말을 하는지도 이해하기 시작해서 우스운 상황도 만든다. 예를 들면, 하나와 옌스가 기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는 날이었다. 사람들이 하나에게 인사를 건낼 때 하나가 수줍어하는 때가 간혹 있는데 (주로 체격이 크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아저씨) 그럴 때면 내가 하나가 수줍어서 그렇다고 이야기해주곤 했다. 그 날은 어떤 할머니가 하나에게 인사를 건냈는데, 하나는 인사를 하고 옌스는 인사를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자 하나가 우리 아빠가 수줍어서 그래요.라고 했다는데 옌스가 우스워서 박장대소를 했단다.


이번 한국방문에서 하나와 나의 모습을 보던 오빠가 나보고 엄하다 하더라. 사실 내가 딱히 엄한 사람이라고 덴마크 생활에서는 느껴본 적이 별로 없는데, 아마 한국에서는 그래보일 수도 있는 모양이다. 그냥 소수의 몇가지 정해진 규칙에 있어서 예외가 별로 없고, 해당 사항에 대한 단호한 말투에 하나도 큰 저항없이 따르는 것 뿐인데. 옌스는 그냥 균형잡힌 엄함인 것 같다고 하고 옌스도 나와 비슷한 육아를 하고 있어서 둘다 그렇게 느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그 덕분인지 대충 두돌에서 두돌 반 사이의 시기를 거치며 거세게 떼를 쓰는 일은 이제 없어진 것 같다. 우리와의 대화가 구체적이고 많이 자유로워지면서 떼 쓰는 일이 없어진 것 같다. 타협이 안되는 건 타협이 안된다고 받아들여서 규칙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어쩐지 한국과 덴마크간 7시간 시차를 거슬러 여행함에 있어서도 너무나 잘 짜증내지도 않고 즐겁게 여행하고, 안된다고 하는 것은 하지 않고, 밥도 너무 잘먹고, 놀기도 잘 놀고, 타인과 열린 교류도 잘 하고, 보육원에서도 사랑받고 잘 자라고 있는 하나가 너무나 대견하고 사랑스럽다. 


생일잔치가 하고 싶고 얼른 세살이 되고 싶어 자기 생일만 손꼽고 자기 곰인형에게 선물 주고 받는 놀이를 하는 하나가 세돌이 되는 날이 나도 기대된다. 그땐 또 얼마나 커 있을지. 세돌 반만 되면 이제 거의 대화의 외양 면에서는 그냥 아이와 비슷해진다고 했던 논문지도교수의 말이 생각난다. 그 시기가 그리 오래지 않아 올 거라 했는데, 이제 일년도 채 남지 않았구나. 하나야. 너무 빨리 크지 말아라. 엄마 품 떠날 날이 하루하루 다가온다는 걸 체감할 거다라는 말이 와닿는 요즘이다.

인간관계에서의 내 호불호

만나서 즐거운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 고민을 좀 해봤다. 만남이 쌓이다 보면 같이 물려있는 관계때문에 만남을 끊어낼 수 없어 보는 사람도 생기고, 교제는 유지하지만 그 관계를 가꾸어갈 마음이 사라지거나 그러한 노력이 번거롭고 낭비같이 느껴지는 관계가 있다. 각자 자기가 즐겁다고 느끼는 포인트가 다를테니 이건 전적인 나의 나를 위한 견해일 뿐이다.

첫째. 내가 배우고 싶은 흥미로운 포인트가 없는 사람.

모두가 배울만한 점은 다 갖고 있다. 하지만 자기가 가진 것을 잘 보일 줄 모르거나 그걸 폄하하고, 부정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상대방이 그걸 찾아내기 어렵다. 나에게 질문만 하거나 자신의 일상에서 불만이나 어려움만 하소연하는 경우, 딱히 뭔가 배우고 싶거나 흥미를 유발하는 게 없어져 관계의 동력이 약해진다. 사실 나도 대화를 하면서 상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내 인생의 답을 얻기도 하고 가까운 사람에게 힘이 되어준다는 점에서 꼭 나쁜 건 아닌데,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부정적인 에너지를 나에게 주는 사람들이 해당된다.

둘째.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

각자 자기의 이야기도 풀고 싶을 것인데 그에 대한 고려 없이 화제의 중심이 자기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 나는 호응을 열심해 해주려고 노력을 하는데, 상대가 그러한 노력을 받기만 하면 살짝 지친다. 특별한 이슈가 있을 때면 다른 이야기지만…

반대로 내가 어떤 때 즐거움을 느끼는가 보니, 뭔가 내가 모르는 분야에 대해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때, 무의미한 수사 없이 딱 떨어지게 탁탁 대화가 통할 때. 자기가 말하는 내용이 뭔지 아는 사람이랑 대화할 때 즐겁다. 결국 자기만의 컨텐츠가 있는 사람. 새로운 경험을 나에게 들려줄 수 있는, 내가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고 즐기고 화를 내 줄 수 있는 경험을 공유해주는 사람이 재미있는 사람이다. 나애겐.

아주 중요한 관계를 제외하고는 인간관계를 일부러 딱 자를 필요도, 열심히 붙들 필요도 없다는 게 요즘 들어 느껴지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반대로 이런 즐거움을 주는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도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적극적으로 만남을 추진하는데 요즘 한국인이 늘어서 그런지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것 같다. 예전, 한국인이라면 일적인 관게를 제외하고 꺼리던 나의 모습과 참 달라졌는데 이제 좀 해외생활에 속 내 정체성을 찾은 것 같다. 일은 덴마크회사애서 하고 애때문에 이래저래 덴마크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있으니 친구마저 덴마크인으로 채울려는 노력을 할 필요도 없고 그렇기를 원치도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만 6년의 시간이 흐르고 나니 이젠 진짜 내 생활이 꽉 짜여졌구나. 인생에서 업다운을 피할 수 없가지만, 지금과 같은 좋은 시기가 게속 되면 좋겠다.

균형골반과 발레

오랫동안 잘못 쓰고 있던 골반. 얼마전 한 다리로 섰을 때 수평이 깨지던 골반의 균형을 수정보며 여러 문제가 해결되었는데,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남아있었다. 턴을 할 때 자꾸 등이 뒤로 넘어가려는 것이나, 알라세꽁으로 다리를 들 때 90도 이상으로 다리를 들려할 때 고관절이 아픈 문제 등. 균형골반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앞뒤모양을 기준으로 한 균형골반이 어디인지에 대한 걸 정확히 알기가 어렵다는 게 문제였다. 


그러던 중 릴드당스라는 발레 스튜디오 페이지를 알게 되고 그 동영상을 보면서 그간 선생님들에게 들어왔던 여러가지 코멘트들이 하나로 연결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갑자기 파쎄 를르베로 서는 것도 쉬워지고 알라세꽁으로 데벨로페를 하는 것도 좋아졌다. 물론 그 동영상만은 아니고 발레 클레스를 두군데에서 들으면서 최근에 많은 교정을 한 것도 있다. 하지만 이 균형골반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수평골반 문제 해결과 합쳐지면서 너무 많은 동작이 쉬워졌다. 


등이 뒤로 넘어가는 문제가 골반에서 오는 것임을 알게 되니 그간 등 안뒤집어지게 하려고 노력하던 게 왜 성공하지 못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게 해결되니 피루엣이 쉬워지고 피케턴이나 스트뉴턴 등도 다 쉬워졌다. 또한 체중의 중심을 발끝에 싣는 것도 잘 안되다가 해결이 되면서 센터에서 몸의 방향을 돌리거나 뛰는 것도 안정적이 되었다. 


코어 안정성이 중요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게 어떻게 안정되어야 하는 지를 발레 시작한지 순수하게 춤을 춘 만 4년이란 시간 동안 제대로 깨우치지 못했다는 게 놀랍다. 아무튼 이제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이제 토슈즈도 곧 신을 것인데 말이다.


발레는 정말이지 중독성이 심한 취미임이 분명하다. 쉰 기간을 포함해 7년을 한 취미인데 지금도 이렇게나 발레 가는 날이 기다려지고 발레를 한 날이면 러너스 하이와 같은 상태를 경험할 수 있고 밤에는 잠이 들기 어려울 정도이다. 만으로 33살이 되면서 늦게 시작한 발레이지만 그때라도 시작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내 인생의 취미로 장식될 발레를 이제나마 접했으니 말이다. 

이베리코 세크레토

Irma에 갔더니 본 적 없던 돼지고기 부위를 파는 거다. 이베리코 세크레토. 두껍지 않게 썰린 아주 넓직하게 펼쳐진 부위였다. 삼겹살처럼 지방이 한쪽으로 쏠린 게 아니라 마치 비만 소마냥 마블링이 켜켜이 얇은 선으로 짜르륵 펼쳐져 있었다. 그릴을 하거나 뜨겁게 달궈진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양면을 각각 45초 정도만 구우라고 되어있었다. 안에 살짝 핑크색이 남아있길래, 요즘엔 그래도 된다는 식품당국의 방송을 듣기도 했지만 혹시나 해서 그냥 조금씩 더 구웠는데 세상에나 이렇게 맛있을 수가. 돼지고기 그렇게 구워주면 별로 안먹는 옌스도 소금, 후추 간한게 전부인 그 고기를 척척 먹었다. 나중에 해당 부위 조리법을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핑크색이 보이게 먹더라. 흠.

오늘 먹어본 결과로 이제 해당 부위를 판매하는 경우 사다가 간간히 먹어야겠다. 퍽퍽하지 않아서 하나도 곧잘 먹더라. 돼지고기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애인데. 새로운 고기의 신세계.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