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데이트 5주년

오늘은 우리가 첫 데이트를 한지 5년이 되는 날이다. 사실 27일에 우리가 무슨 관계냐며 이야기를 주고 받았기에 그날을 기념일로 하는데, 그래도 또 첫 데이트는 첫데이트 대로 좋은 기억이라 떠올리면 항상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서로 메세지만 주고 받다가 백화점 1층에서 만나 어색하게 포옹을 나누며 인사를 했었는데… 옌스가 좋아하던 단골 카페에 나를 데리고 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중간에 공짜로 나눠주는 초콜렛들도 받아가며 걸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발렌타인데이 전날이라 초콜렛의 상업성이 정점을 찍는 타이밍이었던 거 같다.

한참을 이야기하며 옌스는 커피를, 나는 차를 마셨었는데 공통점이 있는 부분도 많고 유머코드도 잘 맞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더랬다. 사실 두번째 데이트는 그날 핸드폰도 잃어버려 다시 사고 좀 기분이 안좋았던 날이라 서로 상대가 자기가 마음에 안들었나 긴가민가했었지만.

내가 무슨 복이 있어서 이런 남자를 만났나 싶을만큼 훌륭한 남자지만 내가 항상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함으로써 옌스도 나와 만난 걸 항상 기쁘게 생각할 수 있게 하려한다.

난 별로 로맨틱한 사람은 아니라 옌스에게 간간히 핀잔도 듣는데 로맨스가 많이 사라진 애를 둔 부모라도 역시나 이런 기념일에 꽃을 챙기는 옌스덕에 로맨스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다. 그런데 선물을 준비한 건 반칙. 우리 기념일은 27일인데다가 기념일엔 아주 작은 선물만 하기로 해놓고. 시부모님 오셨을 때 시어머님의 도움을 받아서 목걸이를 샀단다. 그리고 오늘 준 건 그래야 나를 놀래켜줄 수 있어서였단다. 콩알만하지만 다이아몬드도 박힌. 선물의 가액이나 그런건 전혀 중요하진 않지만 나를 생각하며 선물을 샀다는 것과, 지난 5년이 자기 삶에서 가장 행복한 5년이었다며 앞으로의 50년도 이렇게 보내자고 적은 작은 쪽지가 너무 좋았다.

지난 5년이 어찌 보면 너무 후딱 간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한 것 같은데 5년 밖에 안갔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내 인생에 이렇게 누군가가 깊게 파고들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랍다. 앞으로 50년이라. 그 긴 시간도 어느샌지 모르게 훅 지나가 있을 거 같다. 그 사이 경험할 많은 일들과 함께 나눌 희로애락, 모든 것이 다 기대된다.

오랫만에 g.o.d

블로그 이웃님이 g.o.d에 대해 쓰신 걸 보고 대학교때 약간 뒷북치면서 남들보다 늦게 열심히 들었던 기억이 나서 (그분 블로그 댓글엔 고등학교 때라고 썼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데뷔 자체를 내가 대학생이 되던 때에 했던 그룹이었다. 흠… ) 스포티파이를 찾아보니 g.o.d 플레이리스트가 있었다. 길이란 노래를 얼마나 많이 돌려들었던지… 그땐 가사가 참 와닿았는데, 지금은 그런 느낌은 아니지만 그때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싶어서 씨익 웃음을 지었다.

난 사실 멜로디 중심으로 노래를 듣고 가사엔 크게 신경을 쓰는 타입은 아닌데, 그때 그들의 노래는 멜로디가 좋아서 듣기 시작했는데 마침 그때의 나에게 그들의 노래가사가 정말 와 닿았다. 아마 멤버들이 내 또래이다보니 그때 그들이 했던 고민이 비슷한 시기의 나에게도 적용되서 그랬던 것 같다. 요즘은 그냥 일할 때 음악을 백그라운드로 깔아놓는 편이라 더욱 가사를 듣기 어려워서 그런걸까? 아니면 그냥 스포티파이에서 내가 원하는 장르로 그냥 가수 구분없이 틀어서 그런거일지 모르겠지만 최근 수년내 새로이 좋아하고 간간히 노래를 찾아듣게 되는 건 Adele외엔 없었던 것 같다.

음악이 재미있는 건 그 때의 감성에 대한 기억을 살려준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기억은 안나도 그때 공감하면서 들었던 고민의 흔적같은 것 말이다. 마치 어떤 특정 향을 맡으면 그 향기의 주인공이 생각나는 것처럼.

간만에 그런 추억을 곱씹어볼 수 있어서 좋았다. 좋은 그룹이었지…

신입사원 졸업

내일부로 학생직원이 한 명 새로 들어온다. 점심 먹으러 구내식당 내려가는데 동료 중 한명이, “신입사원 지위를 누릴 수 있을 때 마음껏 누리세요. 내일부터는 모르는 거 질문하기 없기!”라고 했다. ‘아. 맞다. 내일 아침 환영다과가 있었지.’ 싶었다.

나랑 같이 면접을 봤지만 2018년 계속 사업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되어 나보다 1개월 먼저 일을 시작했던 직원 두 명이 있다. 나를 환영하는 다과회에서 그 중 한명이 “나도 얼마전에 신입사원이었는데, 이렇게 너를 환영하는 다과에 와서 자기 소개를 하니 어느 새 마치 오래된 기존 직원인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라고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기분을 내가 느낀다.

3일부터 일을 시작했으니까 일 시작한지 거의 만 3주 되었나보다. 내가 맡은 분석사업도 슬슬 발동이 걸리고 있다. 다음주 월요일 부청장 미팅이 있어서 그 보고에 앞선 보고서를 작성하는 중이다. 일 시작한 첫주에 내가 과연 보고서를 덴마크어로 쓰고 관려된 내용을 보고할 수 있을지, 과연 그들이 내 덴마크어 업무수행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잘못 뽑은 건 아닌지 스트레스를 제법 받았었다. 수습기간 3개월에 자르는 경우는 진짜 특별한 경우라며 그런 걸 생각하는 건 말도 안된다고 옌스가 말했지만, 그게 내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도대체 나를 왜 뽑았을까? 경력을 2년 인정해 준다고 했는데, 도대체 왜 그랬을까? 언제 적응할 수 있을까? 여러가지 생각이 많았다. 원래 신입사원은 그런거야 라면서 자위하기도 했지만 또 다시금 밤에 침대에 누우면 불안한 생각이 엄습해와 깊은 잠이 들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그 모든 게 적응의 일부분이었던 것 같다.

첫주엔 정말 내 뒤에 보는 사람이 없는 구석자리에 앉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나게 자주 사전을 찾았다. 그간 대충 감으로 알고 있었지만, 딱 한단어로 번역해봐라 하면 그렇게 하기 어려웠던 단어들부터 새로운 단어까지 다 찾아내려다보니 읽는 자료마다 단어 뜻이 누덕누덕 적혀있었다. 내용을 정리하면서 읽기보다는 우선 닥치는 대로 읽었다. 중간중간 궁금한 점만 적어내려가며 담당자별 인트로 미팅을 할 때 질문을 해서 내 업무와 그들의 업무가 어떻게 연결될 지 최대한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유사 제도에 대한 경험이 있는 다른 센터와의 미팅 두 건을 마친 후 센터장과 선임컨설턴트와 현황미팅을 가졌다. 그리고 센터장으로부터 보고서를 하나 만들어 현재 우리가 가장 많이 참고해야할 섹터의 제도 도입 내용을 정리해보고 우리 섹터에 적용할 수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을 나눠 정책적 고려사항을 도출하라는 주문을 받았다.

어떤 식으로 보고서를 만들어야 할 지 아주 러프하게만 틀을 정해준 거라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가 우선 그냥 한국에서 였으면 어떻게 일했을까를 생각하고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었다. 다만 덴마크어로. 보고서 작성 메뉴얼도 대충 훑어봤었는데다가 관련 보고서를 2-300 페이지를 읽고 났더니 대충 어떤 문체를 쓰는지 알 수 있었고, 무지막지하게 단어를 많이 (그중 같은 단어도 잘 기억 안나는 것을 두세번도 찾아봤었다.) 찾아본 게 다 도움이 되서 생각했던 것이랑 달리 빨리 보고서를 써내려갈 수 있었다. 최종은 아니지만 보고서 서론만 남겨두고 작성한 보고서를 갖고 센터장과 선임컨설턴트를 대상으로 한시간 정도 브리핑과 토의를 했는데, 아주 의미가 있었다. 우선 내가 작성한 방향에 대해서 매우 좋게 생각을 했고, 이번 브리핑을 연습삼아 다음주에 있을 부청장 미팅의 브리핑에 대한 부담을 덜을 수 있었다. 또한 2월 초에 내 담당 사업에 대한 모니터링 그룹 미팅이 있어 청장 주재하에 진행 내용을 발표해야 해서 이 작은 스텝 하나하나가 연습이고 경험이 된다.

이 작은 경험을 통해 얻은 건, 우리 청에서 나를 괜히 뽑은 건 아니고 내가 기여할 바가 있었다는 확인이다. 기후변화적응과 관련한 범정부차원 정책 이니셔티브가 수립중에 있는데, 환경식품부와 에너지유틸리티기후부가 부처간 이견을 조율하는 단계에 있다. 이 부처간 이견이 조율되고 나면 수자원관리 기능을 담당하는 우리 센터에 경제적비용편익에 대한 분석업무가 떨어질 거라 이걸 수행하기 위한 사람을 2019년 중에 채용하고자 하고 있었다 한다. 다만 이 업무는 착수 시점이 애매해서 이 업무를 수행할 수 있으면서 지금 내가 담당하는 업무를 수행할 사람을 2019년 1월부터 바로 일할 수 있게 채용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기후변화와 관련한 비용편익분석은 내 논문을 통해 했던 것과 매우 깊게 연관되어 있었는데, 거기에 내 학부 전공의 경영학과 은행 재무기획팀 근무 경력을 보고 아주 딱 맞다 생각했던 것이다. 학부때 별로 좋은 성적을 거두진 못했지만 투자 관련 수업도 많이 듣고, 결국 다 중도에 포기하긴 했었어도 은행 다니며 CFA와 FRM도 끄적끄적 공부도 하고, 재무기획팀에서 예산 (및 약간의 관리회계) 기획과 성과평가 업무를 하며 이래저래 머리에 쌓아왔던 먼지쌓인 지식이 도움이 되는 때가 온 것이다. CAPM이며 WACC이며 기업재무에 손을 댈 날이 이렇게 뒤에 올 지는 전혀 몰랐는데. 힘들었던 은행업무시절, 금융은 뒤도 안돌아보겠다 했던 걸 지금 손바닥 뒤집듯 갑자기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어차피 전문가의 손이 필요한 경우 외부에 손을 뻗어야 하지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면 제도 도입이 어렵기에 그걸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히지만 우리 센터 안에 할 사람이 없는 걸 내가 할 수 있다는 걸 오늘 보고하고 느낀 후에 자신감과 안도감이 버무러진 감정을 느꼈다.

보고서 작성이야 코트라에서 끊임없이 하던 것이었으니 그냥 언어만 바뀐 것 뿐이고. 선임 컨설턴트가 경력직을 채용하면 이런 거 설명 안해줘도 되서 너무 편하다고 하던데 나도 나라가 달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들이 있구나 싶은 생각에 다행이다 생각했다.

오늘부로 신입사원은 졸업한 느낌인데 공식적으로도 내일부로 신입사원은 졸업이다. 오늘 보육원에서 하나를 2월 18일부로 다음단계 보육원으로 이동시킨다고 들었는데 나뿐이 아니라 하나도 졸업이구나. 세상으로 나가는 전체 교육과정 중 가장 이른 단계를 졸업하는 거니 세상의 신입사원 졸업이라고나 할까?

내일 얼른 보고서를 마무리 짓고 다음 단계 일을 시작하도록 해야겠다. 얼른 공을 선임컨설턴트에게도 넘겨야 문법 검토도 받고 최종 마무리도 될테니까. 우선 오늘은 밀린 드라마 한편 보고 잠을 자야겠다. 아이 피곤해…

할아버지의 소련군 포로 탈출 이야기에 대한 추억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오래 전이 아니었던 거 같다. 위암 수술 이후 간암으로 전이되었음을 확인하기 전이었던 듯. 아직도 기억나는 건 내 태극기함을 만드는 걸 도와주러 오셨다는 거다. 그 때 살던 아파트 베란다에서 거실에 연결된 부분에 사각형으로 된 마루조각을 깔았었는데, 그 남은 조각으로 태극기 함을 만들어준다 하셨다. 오빠도 그 한해 전에 만들었는데 오빠는 문방구에서 사왔던 표준화된 태극기함을 만들었더랬다. 난 그게 조금 부러웠었다. 남들이 다 만들던 것이라 그랬었을까? 결국은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셨던 내 태극기함은 우리집에서 오랫동안 쓰였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참 좋은 원목으로 만들어진 튼튼하고 좋은 함이었다. 그땐 지금의 안목이 없었으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불평하지 않았던 건 내가 좋아하던 할아버지가 일부러 와서 내 태극기함을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다. 난 못질이나 조금 도왔으려나?

내가 할아버지를 참 좋아했던 건 할아버지가 누구보다도 나를 이뻐하셨기 때문이었다. 이는 꽤 오랫동안 지낸 탓이 큰 것 같다. 아주 어려서 아빠가 독일에 1년동안 업무상 파견나가 계셨는데, 돌도 안된 나를 포함해 연년생 두 남매를 혼자 케어하기 어려웠던 엄마가 나를 외탁하시고 매일 외갓집으로 출근하시며 지냈었다. 그 덕에 나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제일 좋아했었고. 아마 그 때는 간간히 나를 훈육하는 엄마보다 나를 항상 싸고 도시는 두 분이 더 좋았던 거 같다. 엄마가 간혹 서운해하셨을 정도였으니. 두분에 대한 사랑을 아낌없이 표현하는 손주인데다가 일정 기간 직접 키우셨으니 그 정이 오죽했을까? 하도 내가 내 할아버지, 할머니다 라고 해대니 외가사촌들이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인 줄로 착각했을 정도로 양방향의 관계는 참으로 돈독했다.

외가집은 버스로 대여섯정거장이 될 정도로 가까웠다. 명일동과 천호동이었으니. 할아버지는 우리 동네에 있는 약수터에서 물을 길어가신다며 우리 집에 자주 오셨고, 자전거 뒤에 묶은 물통 위에 나를 얹어 태우시고 동네 한바퀴를 태워주곤 하셨다. 그때 타일은 요즘과 달리 정사각형의 큰 타일이었다. 네개의 타일을 두개씩 정방형으로 붙이면 큰 원이 그려지게끔 디자인이 된 거였는데, 멋진 여성들은 일자로 걷는다며 타일의 선을 따라 걷는 연습도 시켜주셨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신체 자세에는 참 안좋은 걸음걸이다.) 나보고 항상 여사감이라면서 커서 뭐가 되도 될 거라 하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뭐가 된 건 아니지만 쉬지 않고 뭔가 배워나가는 사람이 되었으니 기대하신 바에는 못미쳐도 나쁘진 않게 된 것 같다.

외할아버지와 관련되서는 내가 초등학교때 돌아가셨는데도 아주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많을 정도로,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나에게 너무나 특별한 분이었다.

해병대를 다녀오시고 그걸 엄청 자랑스럽게 여기셨다는 할아버지. 엄마와 이모들, 삼촌 모두 해병대 군가를 속속들이 외울 정도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해병대, 용맹함 이런 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나에게야 그냥 따뜻한 할아버지일 뿐이었지만 또 그 할아버지는 아버지로 두신 분들에겐 다른 기억과 다른 감정이 있겠지.

그랬던 할아버지가 태극기함을 만들기 위해 톱질과 못질, 사포질, 락카칠을 하시며 풀어내신 이야기 보따리에는 엄마가 태어나서 한번도 듣지 못했던 일제시대때 참전 이야기가 있었다. 엄마에게 직접 하신 이야기가 아니라 베란다에 오빠와 나와 함께 앉아 일을 하시며 우리에게 해주신 이야기를 엄마는 거실에 앉아 귀동냥하신 거였지만.

할아버지는 관동군으로 차출되어 2차대전에 끌려나가셨는데 소련군의 탱크가 줄줄이 남하하고 있는 와중 젊은 청년병인 할아버지는 폭탄을 끌어안고 탱크 아래로 들어가 폭탄을 터뜨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폭탄 옆에 바짝 누우면 살 수 있다는 일본 장교의 거짓말을 들었지만, 그걸 누가 믿는단 말인가. 조선징용군인에게 자살폭탄을 터뜨리라는 명령을 한 것이지. 할아버지는 그 명을 들어도, 안들어도 죽는 입장이었기에 폭탄을 들고 탱크로 다가갔지만 도저히 너무 무서워서 그 아래로 뛰어들 수가 없었고 그대로 기절을 했다. 그리고 깨어났더니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있었다더라.

그리고 얼마 후 일본은 항복을 선언했고, 소련군은 포획한 관동군 포로들을 모두 소련으로 데리고 가기 시작했다. 머리와 옷에 이가 들끌어 너무너무 가려웠는데 잡아도 잡아도 해결되지가 않고, 어찌나 많았는지 옷을 탈탈 털면 이가 날렸다고 한다. 배는 너무나 고팠는지. 할아버지는 이대로 소련땅에 끌려가면 언제 돌아올 수 있을 지, 살아 돌아올 수는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에 탈출의 기회를 끊임없이 보았다. 중간중간 대소변을 볼 수 있게 해주었는데, 어느 날은 작물의 키가 제법 커진 – 벼인지 보리인지 뭐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 들판에서 볼일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단다. 여기에서 도망가지 않으면 언제 더 좋은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싶어 얼른 그 아래로 숨어 그 들판 근처에 보인 똥통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 이유인즉슨 포로수를 다 일일이 셀 수 없었던 상황이라 그런 휴식시간이 끝나고 나면 들판에 총을 드르륵 갈기고 갔었기에 몸을 보호해줄만한 거라곤 똥통 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다. 온몸에 똥독이 올랐지만, 그렇게 포로신세는 탈출했다. 그러고는 달구지에 숨어들고 등등하여 38선으로 나뉜 북녘땅을 통과해 월남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때만해도 물리적인 군사분계선이 없던 때라 정확히 어디가 남한땅인지 알 수 없었지만 멋진 선글라스를 끼고 할아버지를 향해 휘파람을 불며 인사를 하던 연합군 병사를 봤을 때 할아버지는 여기가 남한 땅이구나 하며 그간의 긴장이 사르르 풀렸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 못돌아온 사람들은 지금도 시베리아 등지에서 살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때 할아버지가 탈출하지 않으셨다면 나는 존재하지도 못했을 뻔 했던 것이다.

왜 그 이야기를 그때까지 한번도 안하셨을까? 할아버지에게 그건 수치스러운 일이었을까? 평생의 트라우마로 죽기전에 한번쯤은 이야기하고 가야한다고 생각하셨던 일이었을까? 엄마는 할아버지가 떠나신 후 거실에 앉아, 평생을 해병대 전우를 외쳐온 할아버지에게 이런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고 그걸 이제서 우리에게 이야기하신 것도 너무나 놀랍다 하셨다. 나도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처음 하셨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었기에 놀라웠었고.

어쩌다 나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시부모님이랑 지난 주 저녁 식사 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 이야기가 나왔는데, 아마 그게 할아버지에게는 지우고 싶고, 있었던 일인 것조차 기억하기 싫은 힘든 기억이었을 거라고 시부모님이 이야기하셨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결혼하신 것도 할머니의 위안부 차출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하니 너무 놀래시며 후세를 위해서는 공유가 필요한 이야기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나도 너무 오래간만에 떠올린 기억이라 언젠가 하나에게도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을 거 같아 기록해두려고 남긴다.

멍청한 실수

나이가 들면서 주의가 부족해진 걸까? 지난번 부모님 비행기표 예매에서 직항인 줄 알고 끊었던 표가 새로고침에서 온 실수 탓인지 뭔지 핀란드 스탑오버행으로 바뀌어 있어서 난리 한번 친 게 불과 4개월 전인데 이번엔 시험 날짜를 잘 못 알았다. 구술시험을 보기 전 채용이 결정되면서 구술시험은 정말 보기가 싫어졌었다. 시험 통과하고 나면 이걸로 내가 덴마크 대학에 갈 수준은 된다고 할려는 목적이었기에 채용 결정과 함께 급격히 의지가 사라진 상태였다. 하지만 시험 일자 통보후 그저께까지 열흘 가까이 되는 밤마다 시험을 볼지 말지 고민하다가 드디어 시험을 보겠다고 결심을 했더랬다.

온도는 낮고 바람도 제법 불지만 해가 떠있길래 자전거를 끌고 (시험장 위치가 가까우면서 교통이 애매하다.) 갔는데 고사장 안내가 영 안되어 있었다. 리셉션으로 가서 내 고사실을 못찾겠다 했더니, 오늘은 시험이 없다며 당황한 표정으로 답을 했다. 혹시 내일은 아니냐고 묻는 사람과 그 옆에서 혹시 어제는 아니었냐고 묻는 사람을 앞에 두고 나도 당황해서 이메일을 다시 열어보니, 10.12.2018 이라고 되어있었다. 어떻게 12만 읽고 12일이라 생각했을까? 난 이제 덴마크식 날짜 표기에 익숙해있다 생각했는데, 무의식에는 여전히 미국식이 깊게 남아있었던 것일까? 시험 일자 통보가 12월에 되었으니 그래서 앞에 10이 12이려거니 생각하고 보지도 않았던 걸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귀신에 홀린 기분으로 돌아나왔다. 어찌나 민망하던지. 시험날짜도 모르고 그저께 시험을 보러 이틀 뒤 나타난 모양새가 어찌나 우스꽝스러웠을런지. 안타까웠을 수도 있고.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시험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는 거였다. 

조심하고 살아야지… 앞으로 일할 때 특히… 참 멍청한 실수였다. 쩝.

계약서 사인 및 잡생각

드디어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서로 구속력있는 채용 및 근로의사를 이메일로 표현했기에 근로시작일로부터 한달 이내에만 고용주가 근로계약서를 교부하고 고용인이 이에 서명을 하면 된다고는 했다. 그래도 또 계약서에 서명을 해야 진짜 일이 마무리가 되는 것인지라 지난주 내 측에서 필요한 경력증명서류 등을 보내놓은 후부터 언제 계약서가 오나 오매불망 기다렸는데 오늘 받았다. 받자마자 후다닥 내용을 읽어보고 서류에 서명을 해서 얼른 답신하고 나니 이제 모든 게 정리된 기분이다. (논외로 공무원은 비자를 안해주는 걸까? 계약서 마무리를 위해 필요한 게 노동허가증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아니면 혹시 노동허가증이 없으면 그것부터 만들고 계약서를 써야 하는 거였을까? 다 마무리가 되었는데 내 노동허가증이 없어서 계약서를 못보내주고 있다며 서둘러 보내달라고 했었고, 그걸 보내주자마자 계약서를 송부해줬는데, 정말 노동허가가 없으면 계약서에 사인조차도 할 수가 없는 거인가?)

내일은 스투디프뢰운 시험의 구술시험이 있는 날. 시험을 볼까 말까 2주일을 고민했으나 결국은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1. 세계화 시대에서의 언어, 2. 덴마크의 청소년 범죄, 3. 예술과 문화, 덴마크의 문화정책, 이렇게 세가지 주제 중에서 랜덤하게 뽑은 주제로 5분간 발표를 하고 25분간 질의응답시간을 갖게 된다. 우선 발표 준비는 안하고 가는 걸로 마음을 먹었다. 진짜 시험을 볼 의지따위는 취직 이후 사라졌지만, 시험을 보다가 구술만 안보는 건 화장실에서 뒤 안닦고 나오는 것 같은 찜찜한 일이라서 말이다. 따라서 5분 발표준비를 안하고 가서 떨어지게 되면 떨어지더라도 시험을 안봐서 떨어졌지만 혹시 봤다면 어땠을지 결과를 모르겠다, 라는 것보다는 기분이 나을 것 같다. 10시부터 10시 30분까지니까 시간도 나쁘진 않고 다행히 내일 비도 안올 거 같아서 자전거 타고 가기도 아주 나쁘진 않다. 시험보러 가는 길 역풍인 것만 빼면…

옌스가 취직도 했으니 옷을 좀 사라며 너무 싼 브랜드에서 말고 좀 더 좋은 브랜드에서 옷을 사란다. 맨날 SPA 브랜드에서 몇개 사서 주구장창 입는 게 돈 많이 안쓰는 측면에선 좋았겠지만, 보기에 아주 좋았던 건 아닌 모양이다. 사실 나도 알긴 했지만, 다른 학생들도 다 수수하게 다니는데 나도 학생으로서 혼자 괜히 화려하게 입고 다닐 이유도 없고, 돈도 안버는 입장에서 괜히 옷에 돈 많이 쓰기도 그랬고. 무엇보다 어린 애가 있으니 하도 옷에 뭐 묻힐 일이 많아서도 그랬다. 이제 하나가 내 옷에 뭘 묻히는 빈도도 낮고, 돈도 벌고 하니 옷장을 조금만 업데이트하려고 한다. 오래간 묵혀뒀던 신발들도 이제 좀 다시 꺼내서 신어줄 수 있겠다 생각하니 그 또한 살짝 두근거리긴 한다. 크리스마스 선물 쇼핑이 다 끝나면 내 것도 좀 사야지. 낡은 옷들도 정리 좀 하고…

시험을 앞두니 피곤하면서도 잠이 안오는구나. 어거지로 잠을  청해봐야겠다.

보언홀름 시댁 방문

회사일이 바쁜 연말 옌스는 함께 할 수 없던 보언홀름 여행을 하기로 결정한 건 하나에게 한두달에 한 번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게 해주고 싶은 때문이었다. 한달도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 시부모님이 그 때 오실 터라 또 오시라 하기도 그렇고, 주로 시부모님이 오시니 간혹은 우리가 주도성을 보일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삼박 사일 여행. 

아침부터 애를 데리고 여행하긴 부담스러워서 오후 4시가 조금 넘은 비행기를 타기로 했고, 낮잠으로 자고 나 하나를 보육원에서 픽업해서 공항으로 가는 플랜이었다. 전날까지 우산식 유모차를 가져갈 지 일반 유모차를 가져갈 지 결정을 못하고 갈등하다가 비오고 바람이 많이 불 거 같아 일반 유모차를 갖고 가기로 막판에 결정했다. 일반 유모차를 갖고 여행하는 건 처음이라 항공사 사이트를 뒤져보니 2세 이하 아이는 유모차가 공짜라고. 다만 파손을 우려해 airshell이라는 커버를 권유하고 있었다. 공항에서 픽업해서 어떻게 부치는지 개괄적인 설명은 나오는데 구체적으로는 안나와서 살짝 긴장했다. 나 혼자 여행이고 뭔가 새로운 프로세스에 시간적 압박까지, 하나가 낮잠으로 좀 갈게 잔 탓에 공항에서 시간이 짧았더랬다. 

체크인을 하고 짐택을 하나 더 받아 에어쉘을 찾은 후 거기에 유모차를 접고 바퀴를 분해해 넣은 후 잘 포장해 오드사이즈 배기지 체크인 장소에서 짐택 붙여 체크인 하면 되는 거얐다. 애가 하나 옆에 있다는 게 꽤나 챌린징헸다.

어찌어찌 잘 놀고 탑승 직전 기저귀도 갈고 하며 비행을 잘 마쳤다. 유모차도 손상없이 잘 도착했고. 몰랐는데 오늘 바람이 너무 세서 페리가 다 취소되었다더라. 어째 우리 비행기 앞에 게 연착이 된 이유가 강풍이라더니, 우리 비행기 이륙도, 특히 착륙이 엄청 다이내믹헸다. 내가 경험한 가장 무서운 랜딩. 

이젠 자동차 타는 것도 좋아하는 하나를 데리고 시부모님네 잘 도착했다. 하나는 장난감들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 전에 갖고 놀아본 민트껌 통을 들고 와서 냄새 맡겠다고 열어달래는데, 아 다 기억하는구나… 싶어 놀라웠다,

밥도 잘 먹고 즐겁게 놀다가 즐거워서 안자고 싶어하는 애 재우다가 나도 잠깐 잠이 들었다. 한산하신 반이나, 옌스가 전화해서 깼다. 

시부모님은 우리를 위해 일찌감치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셨고, 식사도 준비해두고 계셨다. 거의 바로 먹을 수 있게, 잘 곳도 이미 준비가 되어있었고. 항상 그렇듯 완벽한 준비, 오는 길은 힘들다만 막상 오면 너무 잘 쉬다가서 자주 오고싶은 시댁, 우리 부모님도 가까이 사시면 좋으련만 내가 멀리 사는 거니…

내일은 도서관에 가봐야겠다. 이번엔 하나가 더 좋아할 거 같다. 여기 와서 일 안하고 애랑 놀다만 가는 건 일연민에 처음이니 열심히 즐겨야지. 아자!

취준생활 종료 단상

오늘 합격통보를 받고 세시간만에 합격통보 이메일이 왔다. 그에 대한 승락메일을 보내면 계약서 사인은 아직 없어도 서로에 대한 구두 계약이 완료된 것이므로 기존 직장을 다니는 경우 이 메일을 근거로 사직 통보를 해도 된다는 메일이었다. 계약서는 기존 이력에 대한 경력증명서를 다 보내고 난 뒤 만들어지는데, 근무시작일로부터 한달 이내까지만 작성될 수 있도록 서류를 준비해주면 된다고 한다. 즉 고용주의 계약서 교부 의무기간은 근로시작 한달 이내까지인가 보다. 

이 합격통보메일이 안올 줄 알고 면접을 보러가려했는데, 이미 이를 받고 이에 대한 승락메일까지 보냈으니 면접을 보러가는 건 잘못된 일이라 연락처를 찾아서 이메일로 내일 면접 못가게 되었다고 통보 메일을 보냈다. 

기쁜 마음에 옌스에게, 그리고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시부모님에게도 연락을 드리고 덴마크에 사는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소식을 알렸다. 하나에게도 (알아 듣지야 못하지만) 엄마 취직했으니 축하 뽀뽀를 해주겠냐고 물어봤다. 다른 거에 집중하고 있어서 반응이 없는 듯 하더니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하며 일어나더니 뽀뽀를 하라며 자기 볼을 내주더라. 뽀뽀를 받지는 못했지만 해줄 기회라도 주었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뽀뽀를 해줬다.

새로운 교육을 받아 전문직으로서의 첫발을 내딛는 탓에 경력인정을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23개월을 경력으로 인정해준단다. 공무원이라 그런지 월급 수준은 기대이하이다. 그래도 아이 엄마로서 주당 근로시간이 5-60시간씩도 될 수 있고 고객 데드라인이 끊임없이 있는 컨설팅 업계보다는 급여가 낮더라도 근로형태가 좀 더 유연할 수 있는 공공부문이 더 끌렸었다. 덴마크도 대부분 엄마가 아빠보다 커리어를 많이 희생하는데 실제 옌스가 나보다 커리어면에서 이미 안정적이고 좋은 위치에 있으니 내가 좀 여유가 있는 직업을 구하는 게 맞기도 했다. 그래서 옌스도 내가 공무원이 된 걸 매우 좋아하더라.

사기업에서 경력을 시작해 준공무원 생활을 오래하고 나서 이제는 공무원이 된 게 신기하기도 하고 조금은 우습다. 남의 나라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게 될 줄이야.

내년 초까지 남은 기간, 덴마크어 남은 오럴시험도 보고 통계프로그램 연습도 하고, 친구 만나고, 크리스마스 명절 보내고 하면 정신없이 시간이 갈 것 같다. 5주밖에 안남았네. 흐미. 진짜 즐겨야겠다!

드디어 취직…

오눌부로 졸업 디펜스를 한지 딱 삼개월이 되었다. 삼개월이 실업 기간 후 취직이 되었다. 내년 1월 3일부 출근. 계약서에 사인은 해야하지만 어차피 공무원 월급은 협상 여지가 별로 없으니 그냥 받아들일 계획이다. 일이 너무 재미있을 거 같아 엄청 기대중이다. 요즘 이력서를 내면 면접에 대부분 불러줘서 예감은 좋았지만 또 이렇게 확장되고 나니 너무 좋다. 내일 볼 면접이 하나 더 있는데 연락처도 없고, 옌스도 그냥 가서 보라고 해서 분위기나 볼 겸 가련다. 일이나 여러 면에서 오늘 된 곳에서 꼭 일하고 싶으나 또 다른데 봐서 나쁠 건 없으니까. 연말 따뜻하게 편한 마음으로 보낼 수 있게 되어 너무 기쁘다. ㅠㅠ

보육원 학부모 면담

학부모 면담을 다녀왔다. 옌스가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 새벽같이 집을 나선 탓에 하나를 보육원에 내가 보내고 바로 이어 면담을 시작했다. 선생님은 하나의 발달에 대한 두페이지짜리 리포트를 준비해두고 있었고, 우리와 선생님의 설문조사에 의거해 외부 컨설팅기관에서 분석한 내용을 도표로 만들어 선생님과 우리의 아이의 발달에 대한 인지상황을 비교해보았다. 우리보다 하나의 발달에 선생님이 더 높이 평가하고 있는 몇가지를 제외하면 아이의 발달에 대해서 양측의 견해가 일치했다. 애들이 집과 보육기관에서 큰 편차를 보이지 않는 건 좋은 일이라고 했다. 

하나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 이상으로 잘 자라고 있었다. 사회성, 신체적 발달 (대근육, 소근육), 정서적 발달, 사회규범에 대한 적응 등 다방면에서 기대 이상의 발달을 보이고 있었다. 독특한 걸로는 신체적 접촉을 두려워하진 않지만 손 잡는 건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제일 탁월한 능력은 언어능력이라고 했는데, 이건 그닥 놀랍지 않았다. 보육원에서도 다른 큰 애들보다 언어능력이 뛰어나다고 대단하다는 말을 거의 매일 듣고 있었는데다가 집에서 매일매일 놀라고 있었으니까. 꽤나 독립적인 아이이지만 간간히 도움을 청하는 걸 보고 좀 더 독립적이 되도록 관심을 기울여야하나 했는데, 집에서보다 보육원에서는 훨씬 독립적인데다가 오히려 도움을 청하는 상황을 판단해서 어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발달단계상에서 후에 나타나는 일이라고 했다. 집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는 적극적으로 도와주라고 했다. 이미 보육원에서 충분히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기에 자기가 의지하고 편히 기댈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며. 그런 부분도 있구나 싶었다.  

앞으로 또 다른 힘듦이 있을 수 있겠지만 처음 1년이 제일 힘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육아휴직도 있는 거겠지만. 요즘은 힘든 것보다는 매일매일이 놀라움인 것 같다. 빠르게 성장하는 아이의 새로운 능력을 마주하는 놀라움. 

오늘 친구네 집에 가서 7개월 근처의 아이들을 보며 놀다 왔는데 그때가 기억이 가물가물할 만큼 지금과 그때는 너무 다르다. 지금의 생각으로 돌아보면 이렇게 빨리 자랄 줄 알았으면 덜 힘들었을 것 같다. 이미 익히 들었던 이야기지만, 그걸 내 시간 감각으로 예상하기엔 경험 없이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그게 끝나면 곧 두돌이 될텐데 그게 얼마나 놀라운 일지. 내가 자는 애를 유모차에 끌고 미팅에 가려 나타났던 날,  지도교수는 세살 반만 되면 정말 다 키운 거라면서 그 다음엔 어휘의 차이일 뿐이지 거의 어른과 대화하듯 대화가 된다고 했는데 진짜 그럴 것 같다. 너무 빨리 자라지 마라는 말을 하지는 않겠지만, 이 순간을 하나하나 내 마음에 아로새기듯이 기억을 하며 키우고 싶다. 그래서 나중에 그 시간이 새록새록 내 기억속에서 살아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