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덴마크인이 아니었어?

작년에 논문을 발표했던 컨퍼런스에 이번엔 그냥 참가자 자격으로 왔다. 나중에 기후변화 대응과 관련된 정책 패키지가 통과되면 수자원관리 분야 경제분석을 내가 담당하게 될 관계로 관련분야 전문가와도 네트워킹도 해야하니까. 환경경제학 하는 사람 풀이 크지 않아서 여기 일년이 한번만 와도 아는 사람들과 근황 업데이트 하기는 좋겠더라. 지난번보다 이번에 또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애를 낳고 직장을 구하니 새로운 사람 만나서 할 이야기가 많아졌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 네트워킹 하는게 부담스럽지 않다.

올해는 재미있었던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애 낳는 것에 대한 생각이 바뀐 계기를 이야기하며 내 생물학적 시계가 얼마 안남았다는 생각이 서른 중반 들면서 들었던 게 하나의 요소인 것 같다고 했더니 내 앞에 있던 사람이 화듦짝 놀랐다. 자기랑 같은 개월수의 애를 키우는 엄마이니 또래일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기함을 하던 모습에 나도 엄청 웃었다.

같은 사람이 오늘 자기는 호텔에서 자야 한다 했다. 오후스에서 와서 출산이후 처음 외박하는 건데 긴장된다고. 나도 외박은 한 적 없는데 돌 전에 덴마크어 학원 다시 다니기 시작했을 때 애가 제법 울어서 집에 돌아오기 전 한시간을 내리 울었던 때가 종종 있었다 했다. 그러자 그녀가 또 한번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덴마크어 학원을 왜 다녀오고 묻는거다. 외국인이니 다녔던 거라 답하자, 너 덴마크인이 아니야? 라고 묻는게 아닌가!!!! 덴마크어 배운 지 오년만에 네이티브로 와인을 받다니 살짝 감동했다. 물론 길게 이야기하면 다 알게되는 순간이 오겠지만 직장 다니면서 덴마크어가 진짜 많이 늘었다. 역시 실전이 최고의 연습은 모양이다. ㅠㅠ 감동의 기억을 기록해야지…

발레, 내 몸을 알아가는 여정

올해 늦봄부터 발레를 다시 시작했다. 자동차를 산 덕에 저녁준비를 해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고도 집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클래스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임신 중기 이후 휴식을 하면서 그 사이 너무나 그리웠는데 그 갈증을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2012년부터 시작한 발레이니 발레와 연을 맺은지도 만으로 7년이 되었구나. 휴식을 취했어도 운동을 할 때도 플리에와 탕듀 등 기초 동작을 트레이닝해왔으니 그 끈을 완전히 놓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정도 뿐이었다. 


거기에다가 중간에 오른쪽 고관절에 문제가 생겨서 물리치료도 받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내 골반이 왼쪽으로 약간 돌아간 탓이었다. 그건 발레와 상관은 없이 오래된 자세의 문제였는데 잘못된 체형에 장기간의 발레와 덴마크 와서 장거리를 뛰곤 한 자전거 페달밟기가 얹어서 문제가 불거진 거였다. 


발레를 시작한 지 오래되면서 내 몸의 목소리가 의미하는 바를 읽기 시작했다. 급성이 아닌 만성 부상은 뭔가 잘못된 자세에 부담이 오랜시간 얹어지면서 발생하는 바, 만성 부상이 생기면 뭔가 고칠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건 대부분 고칠 수 있다는 것도. 


왼다리로 섰을 때 턴아웃이 잘 안되어 자세가 풀리는 것이 왼다리의 문제라 생각했다. 그로 인해 오른쪽 다리를 드는 자세에서 고관절에 자꾸만 부담이 되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두 문제는 인과의 관계가 아니라 같이 생기는 문제임을 알게 되었다. 오른쪽 골반을 잡아주는 근육이 약해서 그게 밀리니 아무리 왼쪽의 턴아웃을 잡으려 해도 자꾸만 풀리는 거였다. 오른쪽 다리로 서는 건 안정적인데 왼쪽 다리로 서는 건 이 이유로 불안정하고 자꾸만 흔들리고 옆으로 무너지고, 간신히 서게 되도 종아리와 발에 부담을 많이 줘야나 가능했는데, 오른쪽 골반을 안정시키는 데 같이 신경을 쓰니 자연히 왼쪽을 축으로 하는 동작이 안정되는 거다.
남이 몸을 보고 교정해주는 것만으로는 맞는 자세를 찾을 수 없다. 각자 해부학적인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님도 보기에 맞아보이는 자세를 찾아주면서도 맞는 동작은 이런 느낌이어야 한다며 움직일 때 느낌을 시각화해서 설명해주는 것이다. 즉 누구에게나 완벽하게 들어맞는 동작의 공식이 아니라 원칙적 공식에 각자 자기의 몸에 맞게 오차 보정을 해야하는 거다. 


여러 선생님을 거쳐오며 선생님들이 설명해준 내용을 조합해보고 내 몸의 소리를 들어가다보니 그간 고생해오던 고관절 부상은 없어졌다. 어깨도 그렇고. 의외로 내 몸의 오른쪽 소속 관절들이 왼쪽보다 불안정한 것 같다. 이런 불안정성을 교정하면 할 수록 몸의 근육부피 차이도 줄어든다. 짝짝이 가슴도 거의 같아졌고.


다른 운동과 달리 발레는 이런 몸의 소리를 세세하게 듣게 만들어준다. 각자 좋아하게 되는 운동과 그 이유가 다르듯이 모두에게 같지는 않겠지만 이런 이유로 나는 발레를 사랑하고 아마 지금 클래스에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 나이가 많이 들어 은퇴할 나이가 되어서도 계속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Bernstorff Slotshave

겐토프트 한 복판에는 베언스토프성과 부속 공원이 자리를 잡고 있다. 사택에 살 때 그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자주 가던 공원인데 거기 사는 동안에는 그 반쪽만 가봤었다. 간혹 자전거를 타고 주변 동네 중 안가봤던 길을 지나가곤 하는데, 삼 주 전인가 살면서 안다니던 길 쪽으로 자전거를 타고 그냥 이끌리는대로 가봤더니 그 반대쪽 끝편에 이런 잘 정리된 정원이 있는게 아닌가!

공원에는 사과나무, 배나무와 자두나무가 가득하고 거기에서 열리는 과일은 마음대로 따먹어도 된다. 문화부에서 관리하는 과거 왕실소유 성인데 이곳 나무는 코펜하겐 대학교 자연과학부에서 관리한다고 한다. 5월부터 10월 여름에는 주말마다 이 정원 가운데에 있는 루이스 여왕의 찻집 (Dronning Louises Tehus)에서 차를 마실 수 있다. 찻집이라 커피는 없는데 간단한 요기거리와 애프터눈 티를 즐길 수 있다. 괜찮은 찻집이었다. 같이 먹은 샌드위치도 굳. 막 빼어나게 맛있다 이런건 아닌데, 여기 산책 온 김에 쉬면서 먹는 걸로는 훌륭하다.

여름에 겐토프트에서 산책할 곳을 찾는다면 여기도 강추!

30개월의 하나

30개월의 하나가 어떤지 기록이 되어 있어야나 나중에 돌아볼 수 있을 거 같다. 일로 가정생활로 정신없이 시간이 흐르지만 짬을 내서 기록해본다. 

하나가 한국말과 덴마크어가 존재한다는 걸 이해한 건 대충 18개월  들어설 때 즈음부터였다. 사물이나 개념에 엄마와 아빠가 다른 표현방식을 쓴다는 것을 알고 그 표현방식에 한국어와 덴마크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덴마크어 어휘와 문장 구성이 한국어에 비해 월등히 낫지만 내가 한국어로 하는 말의 대부분을 이해하고 덴마크어로 표현한 단어에 대해서 그건 한국어로 뭐냐고 물었을 때 한국어 어휘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묻든 대부분 덴마크어로 답하고 간혹 한국어로만 아는 단어 (예를 들어 맵다와 같이 보육원에서 쓸 일이 없는 단어)나 덴마크어 문장에 섞어쓰는 게 일상이다. 언어를 배움에 있어서 듣기를 통해 이해하는 수동적 학습만으로는 부족하고 자기가 말하고 싶은 어휘를 선택해서 문장을 구성하는 능동적 학습이 필요한데, 그걸 강요하자니 한국어를 싫어하게 될 것 같고 쉽지가 않다. 그나마 요즘 한국어로 이게 뭐냐고 묻는 게 늘어나서 한국어 어휘를 넓히는 기회가 생기는게 다행이다. 덴마크어로 의사소통하는 부분만 따지면 미묘한 뉘앙스도 살려가며 대화하고 있어서 이맘때쯤 아이가 이렇게 말을 잘하는 거였구나 놀라곤 한다. 단어 열거로 의사소통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이렇게 말다운 말을 긴 문장으로 하는 건지.

16개월인 친구네 애가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의사소통은 되나 아직 발화를 하지 않고 있다고 해서 하나는 언제 말을 시작했나 봤더니 만 15개월 되었을 때에는 아니오에 해당하는 엄마, 아빠, Hvad er det? (이게 뭐예요?), 하나 (자기 이름), 거북, nej (아니오), hej (안녕), bye 정도 말하고 기타 동물 소리흉내 (멍멍, 미야오, 구구, 꼬꼬 등)을 낼 수 있었다. 만 17개월이 되었을 때는 ja (예)를 사용하면서부터 조금 더 정확한 의사소통을 하는 게 수월해졌다. 두달 사이 어휘가 빠르게 늘어서 할 수 있는 단어를 세는 것이 의미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보육원 애들 이름을 다 기억하고 부정확한 발음이나마 애들 이름을 이야기해서 내가 다른 애들 이름 기억하는 것도 쉬워졌다.  보육원에서 또래 중 가장 말을 잘하는 애 중 하나였는데, 이중언어 하는 애들 중에 발화가 늦은 애도 있지만 하나처럼 오히려 더 잘 하는 애들도 있다고 들었더랬다. 언어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 아이가 맞는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살려줄 지 고민을해봐야겠다.

하나가 만 두살이 되자마자 발레를 시켰다. 어른과 함께 가서 하는 발레인데 하나의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하는데 도움이 될 활동 중 하나로 나도 즐길만할 걸 찾다보니 발레가 되었다. 처음엔 그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어서 발레 수업 내내 노래에 맞춰 뛰려는 애를 잡아 함께하는 활동에 포함시키는 게벅찼다. 단 30분에 불과한 시간인데 말이다. 같이 움직여야 하는 규율에 애를 너무 맞추려다보면 애가 기분이 상해서 발레를 싫어하게 될 수도 있고, 애를 마음대로 풀어놓으면 방해가 되니까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애를 통제하고 활동에 동참시키는 사이에서 균형을 잡느라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진땀을흘린 날이 많았다. 거기다가 발레 수업이 끝나는 시간 때 즈음이 하나가 피곤해하는 타이밍이어서 안아달라는 하나를 안고 나 혼자 춤을 추느라 힘든 경우도 흔했다.

애가 발레를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바는 없지만, 발레가는 시간을 고대하고, 보육원에서 다리를 들고 까치발로 다니고 빙글빙글 돌고, 선생님들이 뭐하냐고 물어보면 발레한다고 해서 선생님들이 하나를 Balletpige (발레소녀)라고 부를 정도기에 좋아하는구나 하고 추정할 뿐이다. 한달 반 정도의 여름방학이 끝나고 다시 이번 주말부터 클래스가 시작되었는데, 가는 길에부터 그전에 배운 걸 기억하고 이야기하길래 신기했다. 이제 꽤나 장기 기억력이 생기는 모양이다.  지금은 2-3세 사이 유아반에서 배우고 있는데, 두살 반이되서 그런지, 이번엔 시키는 것도 제법 따라하고 애 쫓아다니느라 고생하는 거없이 30분을 잘 보내고 왔다. 내년에 3세 반에 올라갈 때면 혼자 들여보내도 걱정이 없겠다 확신이 들었다.

페달 없는 자전거는 발을 땅에 대는 시간이 얼마 안되게끔 쌩쌩 뒤로 밀기 시작해서 우리가 뛰어다녀야만 쫓아다닐 수 있게 능숙해졌다. 정글짐에 기어 올라가서 높은 곳의 미끄럼틀을 타고 씽씽 내려오는 것도 능숙해졌고 아빠가 잡아주는 손에 크게 기대지 않은채로 외줄타기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위에서 반동을 활용해 몸을 위아래로 흔드는 것까지도. 

어디 가서 크게 맞을 걱정은 하지 않는 게, 간간히 맞기는 하는 것 같지만 손바닥을 보이며 힘있게 팔을 뻗으면서 안된다고, 멈추라고 (Stop! Det må man ikke! Man må ikke slå!) 크게 외칠 줄 알아서 주변 어른의 시선을 쉽게 끌어낸다. 장난감이나 놀이터 시설 등에 대해서도 보육원에서 가르친 순서지키기, 적당히 놀고 양보하기 등을 이해하고 있어서 간혹 어른이 중재해야 하는 경우는 있어도 이로 인한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없어졌다. 그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보육원에서 가르쳐서 그런지 빨리 배우더라. 하나가 다른 애를 때리는 경우는 상대가 먼저 때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없는 것 같다. 우리가 본 적도 더 어렸을 때나 있었고, 보육원에 물어봐도 그런 경우는 없다고 한다. 상대가 때린 경우에도 안된다 하고 크게 항의하는 거지 맞서 때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다. 어려서는 애가 워낙 활동적이고 힘이 좋아서 남들 때리면 어쩌나 걱정도 했는데 이제는 그건 크게 걱정을 안하고 지낸다. 

하나는 보육원에서 있던 일들을 이것저것 신나게 말해주는 편인데 궁금한 일 나중에 보육원가서 물어보면 되서 현황 파악이 쉽다. 친구 Feifei의 세살 생일에 케이크를 먹었는데, 자기는 케이크 안먹고 아이스바 먹었다며 시무룩하게 말하길래, 유당제한때문에 그런 거라고 이야기해주고 선생님에게 물어보니 그게 맞다고 이야기해주더라. 그리고 다른 애들이 자기들도 케이크 안먹고 아이스바 먹겠다고 해서 애먹었다는 이야기까지. 이제 생일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자기 생일이 언젠지 자꾸 묻는다 최근 두어달사이에 애들 생일 잔치가 여럿 있었는데, 자기도 생일 주인공이 되고 싶었나보다. 하나 생일 땐 나도 케이크를 준비해야 할텐데 쩝. 그날은 대충 휴가 내고 새벽부터 준비를 하던가 해야할 것 같다. 

요즘은 수줍음을 조금 탄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낯선 남자에게 수줍음을 탄다. 인도에서 낯선 남자가 마주지나가면 내 바지가랑이를 잡고 뒤에 숨는다던가, 유모차에서 얼굴을 돌린다던가 한다. 그리고 나에게 Jeg er lidt genert. (저 조금 수줍어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자는 매우 좋아해서 낯선 할머니나 아줌마 할 것 없이 마치 아는 사람이라도 되는 냥 Hej?! (안녕하세요)하고 크게 외치며 인사한다. 이 시기에 흔히 있는 거라고 하더니 수줍음의 수자도 모를 것 같던 하나도 그러는구나 싶었다.

지난달에 친구가 와서 자고 가면서 자기도 남에 집에 가서 자고 싶기도 하고 그런가보다. 나는 걔네 집에서 언제 자냐고 간간히 묻는다. 우리 집에서 그 친구가 자던 날, 내가 책을 다 읽고 자라고 한 뒤 자는 분위기 조성을 위해 옆에서 자는 척 했다. 그러자 지들끼리 나를 사이에 둔 두 침대에서 서서 대화를 나눈다. 

하나: 네 엄마는 어디에 가셨니?” 

친구: “우리 엄마는 일하러 가셨어.” (집들이 파티 가느라 우리집에 애를 맡긴 거지만 애들은 일하러 간 걸로 오해했다.) 

하나: “너희 엄마는 휴가가셨니?” 

친구: “아니” 

하나: “그러면 Lagkagehuset (체인점 빵집)”에 가셨니?” 

친구: “아니” 

하나: “히히. 그거 나야. 내가 오늘 lagkagehuset에 다녀왔어” 

이날 하나는 우리와 그 빵집에 다녀왔는데, 이렇게 그걸로 농담까지 할 줄이야. 애들의 대화를 이렇게 들어볼 날이 없었는데 애들이 벌써 말장난도 치면서 노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이미 가까이 잘 노는 친구가 생긴 것도 놀랐고. 

내가 선생님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특정 친구와 놀기보다는 재미있는 걸 하는 친구들과 노는 걸 좋아한다고 하는데, 서서히 친한 친구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 같다. 툭하면 듣는 이름이 대충 열명 안으로 좁혀진 것만 봐도 그렇고. 

밤에는 옌스와 번갈아가며 책 읽어주고 재우는데, 간혹 주인공이 우는 이야기가 나오면 하나도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울고, 티비에서 주인공이 울어도 같이 운다. 공감능력이 좋은 아이라고 보육원에서 들었는데 실제 우리가 느끼기에도 그렇다. 내가 공감능력이 좋은 사람이 아니고 후천적으로 공감능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을 하는 편인지라 그런 걸 볼 때 좋다 싶다.

아이가 태어나서 세살까지 부모를 기쁘게 하는 걸 보답하기 위해 부모가 그 나머지를 키운다는 이야기를 지나가는 이야기로 들은 적이 있다. 그 삼 년의 시간이 벌써 거의 다 흘렀구나. 앞으로도 계속 이쁘고 사랑스러운 딸이겠지만 이 첫 삼 년의 시간은 참으로 기적같은 시간이라고 기억할 것 같다. 작은 핏덩이에서 이렇게 아이같은 아이로 성장한 기적.

해외생활 속 인간관계 맺기

나에게 인터넷에서 우연한 기회로 인사를 나누고 얼굴을 만나는 건 아주 드문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흔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만나고 나서 또 만나고 싶은 연이 되는 건 그보다 더 드물다. 한국에 살았더라면 그런 기회를 만드는 일조차 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해외에 살다보면 그 전에는 안 할 일도 하게 되고, 안 할 일도 하게 되서 그런지 그렇게 만든 연들이 지금의 내 주변을 촘촘히 채우고 있다. 하긴. 내 남편조차 인터넷에서 만났으니 제일 중요한 인연부터 인터넷이 이어주었구나.

해외생활을 시작하면서 내 주변 관계의 지도가 달라졌다. 한국에서 오래되었고 아주 가까웠지만 자주 연락하지는 못하며 마음에 곱게 담아 종종 생각하며, 매우 드물지만 만남이나 깊은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 적당한 거리의 관계로 온라인에서 즉흥적으로 가끔씩 댓글로 말을 주고 받지만 막상 더이상 만나는 일은 거의 없을 친구나 지인, 그리고 내가 사는 곳에 사는 사람들로 새롭게 사귄 친구. 모든 인적관계를 이 분류로 나눌 수는 없지만 큰 틀로 보면 대충 이렇게 나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시차가 있고 생활의 의무가 있다보니 한국에 사는 사람들과는 내 마음의 크기가 어떻든 제대로 된 연락의 빈도는 아주 크게 낮아졌다. 결국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의 사람을 새롭게 사귀어야 한다.

해외생활을 시작한 초기에는 이런 관계 지형의 변화가 씁쓸하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냥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다. 어떤 게 친밀함인가에 대해 내가 정의하는 방식이 바뀌었고, 관계의 변화가 내 거주지의 변동 때문이고, 그 와중에 각자가 많이 다른 길을 걷게 되서 낯설어진 이유도 있을 거다.

이제는 여기서 가까운 사람들을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는데 나이 들어 새롭게 마음에 맞는 친구 사귀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느리지만 차곡차곡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교제하고 있다.

온라인에 올라온 질문에 간단한 답을 하고 전화로 대화를 간단히 나눈 뒤 전격으로 바로 만나게 된 사람이 있다. 아직 한번밖에 보지 않은 친구지만 네시간의 시간이 너무나 훌쩍 흘러갈 만큼 반갑고 유쾌한 만남이었다. 살아온 경로가 다르지만 비슷한 고민을 해보고 비슷한 사고의 변화를 경험해본 그녀와의 만남에 신선한 자극도 되고 앞으로 쌓아갈 인연의 가능성을 생각해보며 설레이기도 했다.

코트라 다니는 동안은 해외에서 한국사람을 만나는 걸 꽤나 꺼려했더랬다. 한국에서도 아무나 친구가 되는 게 아닌데 단지 해외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알게 되고 지나치다보면 괜한 말이 도는 일도 생기고 그닥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재원이라는 입장과 교민이나 유학생의 입장이 다르다 보니 서로 생활의 준거집단이 다르고 생활방식도 달라서 오해나 감정이 쌓이는 일이 생기기도 한 것 같다.

주재원의 틀을 벗고 나니 내 생각도 행동도 조금 더 자유로워졌고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하다보니 관심사도 생각도 많이 바뀌고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의 좋은 경험이 켜켜히 쌓이며, 한국사람 만나는 것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한국사람 모두와 교제할 생각도 없지만 한국사람이라는 이유로 멀리하는 것도 없어졌다.

덴마크에서 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한국음식에 대한 그리움도 줄어들고 내 모국어가 아닌 말로 생활하는 게 더이상 불편하지 않고 덴마크 사람이나 다른 외국 친구와 한국인과는 또 다른 주제로 다양한 대화를 하는 게 매우 즐겁고 좋다. 그런데 나와 맞는 사람이라면 한국사람과 만나는 게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사람과만 교제하며 사는 건 이제 답답할 것 같은데 그게 완전히 배제되는 것도 싫은 거다. 그래서 한국사람들과의 교제를 보다 능동적으로 찾게 되었나보다. 새로 만나 인사하고 서로를 탐색하는 시간이 때로는 피곤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처음에 만나 클릭하는 것 같은 느낌의 인연도 이런 시도 없이는 맺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또 이런 생각이 어떻게 변할지야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지금은 내 주변에 생긴 관계의 틀이 만족스럽고 삶을 풍요롭고 내가 일상을 끌어나갈 힘을 내게 해 준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두살 반의 하나

7월 첫주부터 3주간 휴가 후 사무실로 돌아오니 사무실 반 이상이 비어있다. 필요하지만 급한 일에 치여 뒤로 밀려나 있던 일을 처리하기에 좋은 기간이다. 한국에서의 휴가를 생각해보면 휴가 가서도 이메일을 완전히 접어둘 수 없고 다녀오면 자잘한 메일이 엄청 쌓여 있고, 일의 처리 기한이 휴가와 상관없이정해져있는데 여기는 그렇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이메일을 한번도 열어보지 않은 건 아니다. 이메일에 뭐가 들어왔는지를 모를 때의 불안함을 해결하기 위해 간간히 메일을 확인했으니까.

3주라는 기간이 꽤 길어서 그런가? 휴가 전과 후의 하나가 부쩍 다르게 느껴진다. 두돌이 지난 이후로 이미 하루하루 다르다 생각했지만 하나는 세살로 향하는 길의 반에 거의 다다라서 그런지 요즘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게 느껴진다. 덴마크어로는 복잡한 문형도 구사하고 발음도 또렷하고, 우리 식으로 ”~하잖아”에 해당하는 뉘앙스를 주는 단어도 여기저기 넣어서 테스트해보고 놀랍울 따름이다. Hvad laver du, mor? (엄마, 뭐하세요?)를 자주 물어보고 그 답에 Hvorfor det? (왜요?)를 끊임없이 붙인다.

지난 주말 스웨덴 당일치기 여행을 갔을 때 하나와 잠시 통화를 했는데, 나보고 뭐하냐고 묻길래 커피 마시면서 루바브 케이크를 먹는다고 답을 했다. 그러자 왜 그러냐는 질문의 연속. 맛이 있어서 먹어요. – 왜요? – 여름의 신선한 맛이니까요. – 왜요? – 여름에만 나는 거니까요. – 왜요? – 다른 날씨에는 너무 추워서 못자라요. – 흐음… 다행히 이 질문 놀이는 여기서 끝났다. 아마 자기가 못알아 들으면 멈추는 거 같다.

그에 비해 한국어 발음은 외국인이 한국어하는 발음이다. 주세요를 주시요 라고 발음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면 이북 발음 같기도 하고. 이거 한국어로는 뭐예요? 하고 물어보면 한국어 단어를 이야기해주긴 하는데 애초 어휘력 차이도 있고 한국어 단어는 헷갈리는 것도 많은 것 같다.

하나는 운동신경이 뛰어나다. 여기는 한국보다 애들 몸을 덜 사리게 한다. 다치고 흉지고 그런 것도 큰 사고가 아닌 이상 더 느긋하게 받아들이고 우리 기준에는 나이에 비해 조금 위험한 일들을 하게끔 놔둔다. 하나는 몸을 잘 쓰는 편이라 그렇다고 했지만 13개월 때 보육원에 하나를 데릴러 가면 혼자 미끄럼틀을 올라가 타고 내려오곤 했었다. 작은 언덕위에 언덕을 따라 미끄럼틀이 설치되어 있어 옆으로 떨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을 구조이긴 했지만 나름 1미터가 넘는 높이의 제대로 된 미끄럼틀이었다. 솔직히 엄청 놀랐고, 혹시 선생님들이 실수로 하나를 방치해둔 건가 싶었지만, 짐짓 놀라지 않은냥, ”하나가 혼자서도 미끄럼틀을 타네요!”라고 선생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저렇게 앉아서도 타고 배로도 타고 엄청 오래 타고 놀고 미끄럼틀 좋아해요. 혼자 타도 되겠다는 판단이 서서 우리 시야 안에서 혼자 놀게 뒀어요.”라고 답을 하는데, 나에겐 사실 엄청 놀라운 일이었다. 두돌 반인 지금, 내 키가 넘는 미끄럼틀에혼자 잘 기어올라가고 (물론 떨어질 리스크라는 건 항상 존재하니 바로 옆에서 잡을 준비하고 대기하긴 하지만) 점프하고 뛰고 페달 없이 발로 미는 두발자전거도 거침없이 밀고 타기 시작했다.

퍼즐도 좋아하는데 벌써 30개짜리 복잡한 퍼즐도 진득하게 앉아서 하기도 한다.

그 밖에 가게놀이도 좋아하는데, 돈을 본 일이 없으니 돈 개념은 모르고 뭐 살거냐 묻고 달라하는 물건을 주는 척 하는 걸 반복한다. 그래서 그런지 물건마다 누가 사준 건지 묻고 기억하곤 한다. 이거 누구누구가 사준거예요? 엄마가 사준거예요? 이런 식으로 말이다. 시부모님이랑 시누이네가 사준 거, 나나 옌스가 사다준 게 대부분일 수밖에 없는 환경. 한국 가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이것 저것 재미있는 것 좀 사주셔야겠다. 그래야 그거 갖고 놀면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자주 떠올릴테니.

요즘 하루에 한 두번 씩 애랑 씨름하는 일이 생긴다. 그런 일이 있고나면 동료와 일상을 이야기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중심으로 말하다보니 애 없는 부모들은 애 키우면 힘든 일만 있나 하는 생각을 할 만도 하다 싶다. 확실히 애 발달이 계단 오르듯 비선형적으로 점프한다 느껴지는 시기에 부쩍 더 씨름할 일이생기는것 같다. 보육원에 데려다주기 전 옷 갈아 입고, 양치질 하는 타이밍에서 그런 경우가 많고 (오전은 주로 옌스 담당) 보육원에서 데리고 집에 오는 길에 그런 경우가 또 많다 (이건 주로 내 담당). 한번 떼를 쓰면 정말 악을 쓰고 울고 땅에 드러눕는다. 얼굴에 실핏줄이 터져서 주근깨처럼 보이는 피멍이 들기도 한다. 세상에… 그 힘은 어디서 나온데?

다행히 이렇게 격하게 떼 쓰는 시기가 길지는 않은데 며칠 그러다 말고 또 며칠 그러다 말고 그런다. 세살을 정점으로 조금씩 좋아진다고 하다 다섯살 정도 대면 대부분의 아이가 이런 시기에 안녕을 고한다 하니 기다려봐야지. 매일 그렇지 않는 것만도 다행인 것 같다. 예전 하나 신생아 시절에 우리 아래층 앞집에서 애가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울면서 현관 앞에서 버티면 그냥 엄마 혼자 집에 들어가서 문을 닫는 일이 거의 매일 같이 있었는데, 지금 하나가 대충 그 시기인 것 같다. 그 아이는 좀 심한 편이긴 했지만 아무튼 지금은 조금 그 엄마가 이해된다. 아마 싱글맘에 애가 둘이라 더 정신적으로 지쳐있었을 듯 하다.

이 밖에 우리 가족과 다른 가족이 함께 움직여야 하는 순간에 우리가 원하는 대로 애가 제때 움직여주지 않아 스트레스 받는 등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하루에 한두번 정도 받는 걸 제외하면 애랑 보내는 순간은 참 좋다. 역시 지금도 생각은 첫 1년이, 그다음은 그 다음 1년이 제일 힘들었던 것 같다. 육체적으로힘 쓸 일이 줄어들고 애가 놀이의 컨셉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애랑 있는 시간이 참 좋다.  그래서 이번 휴가가 조금 더 특별했었다.

세살이 되면 어떨까? 그리고 네살이 되면? 생각만 해도 설레고 기대가 된다.

3주의 휴가

휴가 3주차에 접어들었다. 첫주의 시작은 집안 페인트칠로 땀을 빼는 육체노동이었지만 둘째주에는 시댁에서 먹고, 쉬고, 자고, 하나와 화끈하게 놀아주는 가족의 시간이었다. 마지막주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하나와 재미있게 놀아줄 수 있으면서도 우리도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성인이 된 후 이렇게 여유로운 휴가를 보내본 적이 없다. 아니 그보다 일찍으로 시간을 돌려 중학생이 된 이후 이렇게 3주의 시간을 연속으로 여유롭게 보내본 적이 있던가.

덕분에 일상으로 돌아갈 힘이 나는 모양이다. 다소 긴 시간 쉰 탓에 돌아갈 걱정이 안되는 건 아니지만, 이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3주간의 여름휴가라는 게 아주 적당한 시간이 아닌가 싶다.

하나는 무섭게 크고 있고 한마디로 경이롭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경험이다. 애를 일반적으로 좋아하지 않던 내가 다른 애들도 좋아하게 되고, 다른 부모들이 애들 자랑하는 걸 이해하지 못해하던 내가 그게 너무나 이해가 되고 애들의 성장 하나하나가 너무나 놀랍게 느껴진다. 기적같은 것이라 할까. 애들이 뛰어노는 혼돈의 상황이 평화로 느껴지게 바뀌는 기적. 관계의 축이 바뀌고 관심의 초점이 바뀐다.

이번 휴가는 그런 하나와 살갑게 부대끼는 그런 기간이다. 육아 초기, 사회생활이 없어지는 변화 속에 나의 시간을 간절히 그리워했다면, 그리고 육아가 제일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가장 힘든 시기가 지난 지금, 아이가 너무 이쁘고 같이 보내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하다.

이제 다시 가을 한국 방문휴가를 가질 때까지, 연말 연시 연휴를 맞이할 때까지 하나와의 집중적인 시간은 미뤄둘 수 밖에 없지만, 그 때를 기다리며 일상을 열심히 달릴 수 있게 되었다.

내 사랑 하나

세상의 모든 양면

덴마크 남자 만나서 결혼해서 덴마크에서 사니 좋겠다는 이야기를 간혹 듣는다. 시월드 없어서 얼마나 좋겠느냐는 이야기도 많이 듣는다.

다른 나라에 사는 일은 내 나라를 반납하고 그 나라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최악의 상황은 내가 내 나라의 문화와 환경과 사람을 너무 좋아하고 내가 살아야 하는 나라의 그것들을 너무 안좋아하는 경우일 거다. 최고의 상황은 내가 내 나라의 것을 안좋아하고 상대의 것을 좋아하는 경우일 거다. 그렇지만 이런 극단의 상황은 잘 없다. 대부분 자기 나라 것의 일부는 좋아하고 일부는 싫어하고 다른 나라 것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렇지만 이민이라는 건 그런 내 일부에 대한 선호를 반영해 취사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새로운 나라에 사는 이상 받아들여야 하는 규범이나 제도, 생활 여건 등이 존재한다. 내가 싫다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바뀌지 않는다.

다른 나라에 사는 일이라는 건 그런 거다. 그 나라의 것들을 좋든 싫든 받아들이고 거기에 적응하는 것. 그 나라의 싫은 것을 보며 내 나라의 대체제를 그리워하며 한탄을 한 들 바뀌는 건 없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건 틀린 말이 아니다. 물론 자기가 바꿀 수 있는 것도 있을 거고, 피해갈 방법이 있는 것도 있겠지만 전체를 바꿀 수도 없고, 그건 너무 큰 힘이 든다.

시댁이 좋아도 친정이 멀어지고 원하는 시기에 볼 수 없으며, 친구와 가족 모두 마찬가지이다. 세금을 많이 내면서 한국에서 받지 못하는 서비스를 받는 분야도 있겠지만 납부세금대비 한국에서보다 낮은 질의 서비스를 받는 분야도 있을 테다. 또는 한국에서는 무상인 것들, 예를 들어 무상보육, 무상급식 같은 것들이 여기에서는 해당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장바구니 물가는 싸서 집에서 해먹기는 나쁘지 않을 수 있지만 외식물가는 너무 비싸서 외식 자주하며 살기 어려울 수 있다. 공공부문의 재정건전성이 탄탄한 편이지만 공공요금이 한국에 비하지 못하게 비싸다. 내가 제대로 세금 내고 일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하고 있다면 나도 그에 상응하는 급여를 받을 수 있지만 어디고 서비스 물가가 매우 비싸다. 나도 칼퇴근을 할 수 있지만 가게들이 일찍 문을 닫아 퇴근하고 필요한 물건 사는 일이 힘들 수 있다. 나도 갑질이 별로 안당하는 세상에서 살 수 있지만 한국 배송서비스같이 우리 구미에 싹 맞는 서비스들이 잘 없을 수 있고, 불친절하다고 매장에서 컴플레인하는 등의 소소한 갑질은 할 수 없다. 공기는 좋겠지만 겨울이 아주 길고 우울하고 비가 많이 올 수 있다. 서로 평등한 문화를 즐길 수 있겠지만, 이미 한국에서 좋은 지위를 누리던 사람에겐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지는 것일 수 있다.

그냥 다 가질 수 없다.

내 생각엔 그렇다. 한국에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곳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확률이 높고, 한국에서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곳에서도 행복할 수 없을 확률이 높다고.

내가 여기가 좋고 잘 사는 건 다행히 내가 잘 적응했기 때문이고, 이곳의 것들이 한국의 것들보다 잘 맞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들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 있기 때문에 이곳의 좋은 점 이면엔 안좋은 것이 있을 수 있다. 다만 내게 중요한 것이 잘 맞는 곳이 어디냐 하면 운이 좋게 덴마크이고, 이곳에서 만난 인연과 환경이 또 운이 좋게 좋았기 때문에 잘 지내는 것이지 그냥 여기가 좋은 건 아니다.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

내가 보는 덴마크는 얼마나 평균의 덴마크일까? 사실 별로 평균은 아닌 것 같다. 내가 만나는 사람은 대부분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고 좋은 직장에서 고소득을 올리고 좋은 집에서 사는 사람이다.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나는 나와 비슷한 사람만 보고 살게 된다.

예전에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중학생때나 고등학생 때는 세상에 그렇게 내 또래만 보였는데, 직장인이 되었더니 학생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직장인만 보인다고. 물론 다른 사람도 보이지만, 직장인에겐 직장인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 같고, 대학생에겐 대학생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 같다. 그냥 자기 눈에 자기와 비슷한 사람만 정보를 주로 처리해 저장하고 나머지는 흘려보내서 그런 것 같다.

내 주변에 인종차별 하는 사람 없고, 성차별 하는 사람이 없으니 여기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려니 하지만, 또 여기 살면서 이런 저런 경험한 사람들 이야기도 듣게 된다. 내 남편네 가족이 다 화목하고 막상 주변 가까운 곳에 이혼한 사람들이 별로 없지만 통계를 보면 이혼률이 낮지 않다. 다큐멘터리를 보면 이런 저런 사람들도 있구나 생각을 하지만 막상 내 옆에서 부대낄 일 없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그렇게 화면에서만 보고 지낼 사람들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할 지도 모르겠다.

그냥 각자가 보는 그 세상이 그 곳을 전부라고 느끼겠고 그게 정답이라고 타인에게도 설파할 지 모르겠지만, 그냥 우리는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 살고 있을 뿐이다 싶다. 물론 코끼리가 각 나라마다 다르니 어느 나라나 같은 모습이다라는 건 아니다. 여기에 살면 살 수록 “유럽”, “덴마크”라는 단어로 이곳을 설명하는 일이 어려워지고 뭐라 말하기 어려워진다.

독립.

기본 원칙은, 하나가 열여덟살이 되면 독립을 시킨다는 것이다. 돈도 모아서 자기가 살 집 보증금을 마련하고 다달이 월세를 내고 살림을 챙겨가며 혼자 살아가는 진짜 독립. 그러니 그 전부터 아르바이트도 하고 집안 수리하고 페인트칠하는 법도 배우고, 살림도 배워야 할 게다. 여기선 혼자 살아남기 위해 배워야 할 일이 많으니까.

나는 독립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대학교 등록금을 대주신 이후부터 학비는 학자금 융자로, 용돈은 과외로 충당은 했다지만, 부모님이 마련하신 집에서 숙식을 해결했고, 내 방정리도 잘 안하고 다녔으니 말이다. 미루다보면 보다 못참은 엄마가 정리와 청소를 해주실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게다. 그 당시 핑계는 내가 할 건데 엄마가 너무 미리 해버리셨다는 거였지만 마음속 깊은 곳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청소야 주말에 간혹 청소기를 돌리거나 걸레질을 조금은 했어도 상시 엄마가 해두신 것에 주말에 간혹 한번 돕는 정도였으니 그냥 시늉이라고 해둬야겠다.

조금씩 독립의 연습을 하게된 것은 대학교 다닐 때 사촌인 민정이와 잠깐 같이 살았던 때와 직장생활 시작하면서 나 혼자 이모네 집 근처에서 원룸을 구해 살면서였다. 그렇지만 집 구하는 것도 엄마가 도와주셨고, 자주 엄마의 방문으로 반찬도 얻고 청소의 도움도 받았으며 그냥 사는 장소만 옮겼다 뿐이었지 정신적으로는 진짜 독립의 경험은 아니었다.

만 스물여덟이 되던 해였나? 2008년 해외 발령을 시작으로 해 인도에 나가 살면서 조금 더 독립에 가까워졌던 것 같다. 회사의 주택임차보조로 얻은 집이지만, 그 집은 내가 얻었다는 생각이 있었고 부모님이 이사를 오시기 전에 미리 내가 정착을 준비해두었고, 비자와 생활의 기반을 내가 마련한다는 점에서 독립에 많이 가까워졌던 것 같다.

아마 2010년이었던 것 같다. 당시 인도에서 사귀던 호주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남자친구와 만나 데이트하고 집에 열두시 다되어 왔는데 늦게 왔다는 걸로 엄마에게 혼이 났다. 만 서른의 나이에 외박도 아니고 늦게 오는 문제로 엄마에게 혼을 나야하는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엄마가 걱정하시는 남자와 자는 문제는 굳이 밤이 아니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 늦는 것을 막는다고 막아지는 일은 전혀 아니며, 내 주변 친구들 중 이 나이가 되도록 처녀인 애들은 손가락으로 꼽기도 어려우니 시대와 맞지 않는 걱정을 하시지 말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니 앞으로 외박문제는 터치하시지 말고, 앞으로는 외박을 하고 오는 일도 있을 수 있다 말씀드렸다.

엄마와 큰 갈등과 같은 부딪힘이었지만, 그런 큰 갈등을 서른이 되도록 빚어본 적이 없는 나였기에 아마 부모님도 그러려니 받아들여주셨던 것 같다.

막상 외박을 한 일은 손에 꼽고, 그 다음날 미묘하게 차갑고 다운된 기류를 느낀 것 이외에는 엄마도 나의 입장을 받아들여주셨고, 아빠는 엄마보다 항상 좀 더 느긋하게 받아들여주셨던 것 같다. 아빠 속이야 내가 알 수 있는 건 아니니 어쩌면 엄마보다 아빠가 더 걱정하셨고, 그걸 엄마에게 표현하셔서 엄마가 더 나서서 걱정을 표현하셨는지도 모른다. 그냥 표면 그대로 아빠가 더 잘 받아들여주신 것일 수도 있고. 누가 알테냐.

내가 옌스와의 미래를 그릴 때 가장 걱정이 된 건 부모님이었다. 과연 부모님과 떨어져 먼 이역땅에서 사는 게 괜찮은 일일까? 남겨진 엄마, 아빠의 마음은 어떨까? 나는 죄를 짓는 걸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도움이 필요한 일들이 생기실 수 있는데 나는 그 도움을 드리는 역할을 할 수는 없는데, 어떻게 해야하나? 용돈이라고 드리던 작은 돈도 내가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동안은 드리지 못할텐데 그건 괜찮을까? 많은 것들이 걱정되었다.

엄마, 아빠에게 그런 이유로 옌스와 미래를 그리는 게 걱정이 된다고 했을 때, 엄마 아빠는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씀해주셨다. 다 해쳐나가게 되어있다고. 너의 희생으로 우리가 살려는 거 아니라고.

이기적인 마음이기도 했지만 너무나 감사했고 안도했다. 아마 나는 엄마, 아빠에게서 반쯤 독립만 했었던 것 같다. 내가 새로운 가정의 한축이 되어 진정한 의미의 독립을 하는 데에는 기존 가족이라는 둥지를 완전히 떠나는 게 필요했는데 그걸 못하고 있었던 거였다. 이 말씀으로 나는 둥지를 완전히 떠났다. 훨훨 날아서.

나는 하나를 열여덟에 독립시킬 것이다. 하나에게 언제고 기댈 수 있는 나무가 되어는 주겠지만 때가 되면 둥지에서 밀어내서 날아가게끔 하련다. 그게 가혹한 게 아니라 문화인 이곳에선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아마 나에겐 큰 훈련이 필요한 일일 거다. 앞으로 십육년도 채 남지 않은 일이다. 그 때 나는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모르겠지만 그때도 뭔가 열심히 배우면서 살고 싶다. 그래서 그 때 생길 빈자리를 채울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