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모님의 방문 단상

시부모님이 이틀밤을 주무시고 가시게 되었다. 원래는 하루였는데 이틀이 되었다. 사실 하루는 너무 짧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람이 너무 많이 들어 페리 타시는 게 힘드실 것 같다하여 하루 연장이 되었다. 하나가 시부모님 오시면 좋아하고, 우리도 우리끼리만 있는 일상에 사람이 늘면 대화도 늘고 간혹 도움도 받고 좋다. 물론 손님이 늘면 일이 늘어나지만 덜어지는 일도 생각하면 그냥 더 힘들 것도 덜 힘들 것도 없다. 그냥 사람이 늘어나서 일상이 풍성해지는 것 뿐.

어제는 다진 로즈마리와 올리브오일로 마리네이드한 아구를 팬에 구워서 새우와 팬에 살짝 볶은 시금치와 함께 냈는데 너무 맛있었고 반응도 참 좋았다. (레시피 링크) 오늘은 닭고기와 감자, 고구마를 오븐에 함께 구워내는 요리를 했는데 이 또한 좋아하셨다. 손님이 오시면 좋은 점은 그 참에 우리도 평소에 자주 안해먹을 요리를 해먹는다는 점이다. 특히 아구를 집에서 조리해본 적이 없어서 아구 필레를 보고도 한번도 사보지 않았는데 계속 벼르고 벼르던 것을 오늘 산 건데 너무 잘 했다.

시부모님이 설겆이를 하시는 동안 나는 하나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 다음, 하나 침대보를 새로 갈았다. 아침에 빤다고 빼두고 새로 껴두는 것을 깜빡했다. 그리고 옌스가 하나를 재우기 위해 방에 들어가 있는 동안 나는 블로그를 열었다. 시부모님이 부엌에서 설겆이를 하고 계시지만 이제 나도 적당히 시부모님께도 하실 일을 드릴 내공이 생겼다. 한국식 마음가짐으로는 그런 게 너무 불편했는데, 막상 내가 혼자 일을 도맡아 다 하면 시부모님도 마음이 불편하시니까 일을 드린다. 가족은 약간은 손님이지만 사실 완전히 손님은 아니지 않는가.

시부모님은 원래 토요일에 오셔서 하루 주무시고 가시기로 한 거였는데, 시누이의 시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이 금요일에 있던 탓에 거기 들렀다가 하루 먼저 오시기로 하셨다. 장례식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시누이 남편이 교회 장례식이 끝나고 간단히 다과를 나누는 자리에서 간단히 한마디 하다가 눈물을 흘렸다면서 이야기를 하시더라. 시누이 남편은 평소에 그런 개인적인 감정은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라 일상생활에서도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유지하는데, 시부모님도 그의 그런 모습은 처음 봤다하셨다. 시누이 시아버님은 피부암이 피부 겉으로도 보일 정도로 심해져서 마지막 1년은 너무 고생하셨던 터였다. 연말에 만났을 때 시누이 남편에게 당신은 어떻냐고 물었을 때도 괜찮다고, 아버지가 너무 고생하셔서 이제는 편안히 쉬셨으면 좋겠다며 담담히 터놓던 그였는데. 또 그렇게 한번 눈물을 한껏 흘리고 나서는 사람들과 기분 좋게 이야기도 나누고 간혹 농담도 주고 받았다고 한다. 여기서는 참 사람들이 우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다. 장례식에서조차. 상주가 안우는데 손님이 우는 건 오버같아서일까.

그에 비하면 결혼식 때 신부 스피치를 하며 엄마 아빠에게 감사를 표하며 울컥해서 눈물을 흘릴 뻔 한 나는 여기 기준으로는 감정을 잘 못 숨기는 사람일 지도 모른다. 아니면 여기는 눈물을 흘리는 학습된 기준점이 더 높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눈물을 흘리기 위한 감정의 역치가 높다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시부모님이 오시고 나니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든다. 우리 엄마와 아빠도 가까이에 계셨으면 이렇게 자주 왕래를 할 수 있을텐데 싶어서 아쉽고. 인생이란 게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게 이런 건가 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국땅 출신이다보니 부모님과의 거리가 멀어질 수 밖에 없구나. 어차피 코트라 다녔으면 해외생활이 길었을테니 그것과 엄청 다르지는 않을 거다 하면서 위로하는 수 밖에.

이놈의 덴마크어는 언제까지 나를 긴장시키려나

덴마크어와 스웨덴어, 노르웨이어는 뿌리가 같은 스칸디나비아언어라 비슷한 부분이 많다. 노르웨이어는 특히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쓰인 것으로만 보면 대부분을 이해할 수 있고 유럽 제품 안내문에 노르웨이어와 덴마크어는 간혹 함께 표기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또 스웨덴어와 노르웨이어가 발음으로는 꽤나 비슷해서 서로 잘 알아듣는다. 코펜하겐 바로 옆에 붙은 스웨덴의 스코네지방은 덴마크 방송을 많이 봐서 스코네 사람들은 덴마크 말을 잘 알아듣는데, 덴마크 사람들은 스코네 억양을 잘 못알아 듣는다. 그런데 스톡홀름 스웨덴어는 덴마크 사람들이 알아듣기 꽤나 쉬운데, 반대로 스톡홀름 사람들은 덴마크어를 상시로 접할 기회가 없어서 덴마크어를 잘 못알아듣는다. 재미있는 것은 서로 형제의 나라이고 말의 뿌리가 같으니 만큼 서로 알아들어야 한다는 압박이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서로의 말을 못알아듣는 것을 부끄러워해서 이 나라 사람들이 만나면 서로 각자 나라의 말을 하고 대화를 하는데 문제는 서로 항상 그렇게 잘 알아듣는 건 아니라는 데 있다.

옌스와 내가 살림을 합치고 아직 결혼은 하기 전이었던 2015년 상반기, 4개월동안 옌스는 스웨덴 스코네지방에 있는 3대 도시인 말뫼에서 장기 출장형식으로 근무했다. 간혹 같은 단어지만 완전히 다른 뜻을 의미하는 몇가지 단어를 제외하고는 업무 상 쓰이는 말은 이해하는 데 어렵지 않았다 한다. 뭘 대화할지도 알고 업무의 흐름도 아니까 더욱 그랬는데 점심시간만 되면 자기한테 뭘 물어보거나 말을 걸지 않았으면 할 정도로 이해도 잘 안되고 대화에도 끼기 힘들었다고 한다. 서로 대화가 이사람 저사람 범위를 바꾸어 이뤄지고 주변도 시끄러워서 잘 안들리는데다가 주제도 예상치 못하게 다양하게 넘나드니 말이다.

그 비슷한 감정을 내가 느낀다. 업무는 대충 이야기할 게 뻔하고 이해 못하면 다시 물어보고 확인하면 되고, 주변이 시끄럽지 않아 잘 들리고, 한명 한명 순서를 지켜가며 이야기를 하니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다. 그런데 점심 때는 도대체 무슨 주제를 이야기할 지 알 수 없다. 자기 가족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영화나 스포츠 이야기를 하다가 일 이야기도 했다가 여행도 이야기하고.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는 럭비공 같다. 그리고 서로 말을 끊기도 하고 큰 구내식당의 울림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도 않고 음식을 씹으면서 우물우물 말하기도 하고 꽤나 어렵다. 중간에 몇 단어만 못알아들으면 그 다음 대화에 포인트를 못잡겠어서 이해가 어려워지기도 하니 바보처럼 간혹 씩 웃고 아무런 말 없이 듣기 평가 하면서 밥만 먹기도 한다.

오늘 모니터링 그룹 회의가 있어서 청장님을 처음 개인적으로 마주하며 보고할 일이 생겼다. 시작부터 조금 웃겼던 것은 부청장님은 지난 월요일에 내 이름을 처음에 어떻게 발음해냐 하면서 물어보시길래 해인이라고 가르쳐 드렸는데, 그 날 이미 하인으로 잘못 부르기 시작하시더라, 이제 그 이름으로 완전히 잘 못 외우셨다. 그냥 하도 하인으로 부르는 사람이 많아서 그러시려거니 했다. Ha-ein으로 읽는 모양이다. 모음이 너무 많아서 문제… Hæin으로 개명하기엔 너무 늦었다. 논문을 Haein으로 내서… 이름을 보고 받아 적을 때는 대부분이 Haien으로 쓰고 말이다.

아무튼 보고회의에서 발표하는 건 센터장님을 제외하고는 나와 내 동료 두명이었는데, 동료가 먼저 발표하고 내가 뒤를 잇는 순서였다. 동료가 수행하는 보고서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주제만 알고 있었는데 동료와 청장님이 이런저런 질의응답을 나누는데 간간히 못알아듣는 게 나오는 거다. 과연 내 업무에 대한 내용을 잘 설명하고 질의에 답변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면서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게 심장에서 느껴졌다. 귀에 들릴 것처럼 심장이 쿵쾅쿵쾅하는데, 어찌나 긴장되고 손에 땀이 나던지. 심호흡을 하면서 차분해지자며 회의실 안에서 혼자 속으로 명상을 했다.

결론적으로는 다행히잘 끝났다.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내용으로 배경지식이 없으니 놓치는 단어도 많고 알아듣기 힘든 거였다. 덴마크어는 앞으로도 간간히 나를 긴장하게 만들 거 같다. 항상 뭐든 간에 첫번째 것들은… 예를 들어 업체들 앞에서 발표를 한다거나 그런 거…

오늘 있던 미팅이 중요한 미팅이었어서 남편도 결과가 궁금했는지 회사에 있는데 전화를 했더라. 나도 너무 잘 끝나서 기뻤는데, 남편이 내일 이상으로 기뻐해줘서 더 행복했다. 앞으로 일이 잘 안되는 때도 있을 거고, 새로운 사람이 보스로 와서 안맞는 보스와 일하거나 저평가가 되는 시점도 있을 수 있지만, 잘한 경험이 있으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을 크게 갖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이번 경험이 소중했다.

2월 1일, 전직원 월 조회에서 1월 중 입사한 직원들과 함께 자기 소개도 해서 데뷔고 하고, 청장과의 미팅에서 내 개인적인 소개도 구체적으로 하면서 업무적으로 경영진 앞에 데뷔도 한 큰 날이다. 음력으로 2018년 마무리를 잘 한 기분이랄까? 이제 음력이고 양력이고 모두 새해가 될 다음주부터 또 새롭게 시작을 잘 해봐야겠다. 으샤으샤!

첫 급여, 근무 한달 평가

어제 급여명세서를 받았다. 매월 마지막 근무일에 급여가 통장으로 들어오니 내일이면 통장에 돈이 들어올 거다. 그동안 부모님에게 드리지 못하던 용돈도 다시 드릴 수 있게 되서 너무 기쁘다.

이번 주 부청장 회의와 이를 토대로 최종작성한 사업착수 보고서 모두에서 나 스스로도 좋은 느낌을 받고, 동료와 상사의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제 출퇴근길과 근무 모두 일상으로 자리잡기 시작해서 낯선 게 많이 없어졌다. 덴마크어로 인터뷰를 보는 게 가능한지, 혼자 이력서를 쓰는 게 가능한지 스스로 의구심을 품었던 게 불과 몇달 전인데 막상 닥치면 다 하게 되는 거 보니 나 스스로도 놀랍고, 옌스도 너무 놀라워한다. 사실 보고서 수정은 한국에서 상사의 수정을 받은 것보다 덜 받고 있으니. (물론 이는 문화 차이에 기인하는 것도 있겠지만.)

이번에 새로 채용할 다른 이코노미스트 포지션에 (우리 부서엔 økonom/jurist,영어로 economist/jurist 등 아카데믹 포지션만 있다.) 뽑힌 사람은 연봉 협상중이라 (연봉 협상이라 하지만 경력 인정에 따른 근속연수 협상이라 하는게 맞을 것 같다. 공무원은 연봉 협상 여지가 거의 없다.) 아직 언제 들어올 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나는 채용 결정을 듣자마자 냉큼 급여 및 근로조건도 안듣고 (풀타임 정직원 조건은 공고에 나서 알고 있었지만) 바로 오케이 했던 것과 달라서 웃음이 나왔다. 내가 얼마나 다급하게 보였으려나 하는 실소 말이다. 센터장이 채용통보 전화를 하자마자 바로 내가 수락을 하니, 일말의 망설임이나 형식적인 고려도 없어서 그랬는지 다소 당황하며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난 2년 경력 인정해준 것도 긴장했었다. 뭘 얼마나 기대하고 있으려나 했던 것에.

부서장이 부하직원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그런 건 리더의 능력 부족이라고 인식이 되고 모든 직원에게 긍정적인 태도가 강하게 요구되서 그런지 조직 분위기는 진짜 좋다. 일이 적은 건 아닌데, 불합리한 야근같은 것도 없고 비계획적인 원치않는 회식 같은 게 없어서 좋다.

이제 뉴스에 나오는 소식이 내 업무와도 관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뉴스에 관심을 더 기울이게 되었다. 티비 뉴스와 신문 헤드라인 탐색은 필수. 어느 나라나 공공기관에서 일하면 비슷한 모양이다. 이제 뉴스가 실제 나와 관련이 있으니 보는 것도 재미가 있고, 우리 청이 뉴스에서 많이 다룰 만한 일에 두루두루 연관이 되어 있다보니 해당 내용을 팔로우업 해 보는 재미도 있다. 오늘은 우리 센터 담당 부청장이 티비에 생방송 인터뷰로 나왔던데…

한 달 후 평가로는 너무 좋은 조직에 운이 좋게도 잘 들어왔다는 생각이다. 아카데믹 포지션 답게 저널 아티클들을 읽으면서 분석보고서를 쓸 일도 많고. 앞으로 얼마나 오래 이 곳에 있게 될 지 모르겠지만 즐겁게 지금처럼 계속 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덴마크의 야근, 근로문화, 생산성

덴마크라고 야근이 없을리가. 빈번히 야근을 하는 옌스를 봐서 야근이 없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청에도 야근이 있다. 우선 기본으로 한분기당 20시간은 기본으로 깔고 가서 급여에 반영이 되어 있다. 이보다 적게 일한다고 토해내지는 않는데, 이 이상을 안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는 것 같다.

직장에 따라 탄력근무의 가능 정도는 다른데 내가 일하는 곳은 탄력근무가 가능하다. 우리 청 같은 경우 근퇴규정에 따라 9시 이후 출근의 경우 직속상사에게 사전 보고를 해야하지만 그 전에는 개인 상황에 맞춰 시작하고 퇴근하는 게 가능하다. 주 평균 37시간을 일해야 하지만 해당 월에 부족한 시간은 다른 달에 채우면 된다. 야근을 하면 그걸 모아서 휴가로도 쓸 수 있는데, 그 쌓을 수 있는 한도가 있다. 그걸 넘으면 해당 센터장과 협의해 휴가를 실제 사용해야 한다. 물론 이 또한 회사나 부서마다도 다른데, 옌스네 같은 경우 야근한다고 우리처럼 휴가일수를 쌓을 수 있고 그런 건 아니다. 급여가 높은 만큼 결과를 기준으로 일하는 거다보니 근무 시간은 별로 신경을 안쓴다. 야근을 안하고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는 구조이니만큼.

우리 청 시스템 중 근로 시간관리 시스템이 있는데 매일 써야하는 시스템 중 하나이다. 출퇴근 시간을 기록하고 내가 일한 시간을 사업이나 활동별로 나눠 분배해 입력해야 한다. 그걸로 해당 조직의 인력자원이 어떤 사업에 얼마만큼 배분되었는지를 보게 된다. (우리 조직은 진짜 사업예산이라고는 거의 인건비 예산이 대부분이다.) 출퇴근 시간을 입력하긴 하지만, 부서장의 허가를 받아 집에서 일하는 경우도 있고 야근한 내역도 집에서 해당 시스템에 입력하면 된다. 가벼운 시스템이라 입력하느라 번거로운 것도 없다.

요즘 바로 이 시스템에 야근을 꽤나 자주 넣고 있는데, 이번 금요일에 있는 모니터링 그룹 회의 준비 때문이다. 내가 현재 시작한 프로젝트는 내년 상반기에 마무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대충 한달-한달 반에 한번 정도 청장, 부청장, 센터장, 담당자로 구성된 모니터링 그룹 회의가 진행된다. 세 개의 세부사업이 모여 하나의 큰 분석사업을 이루고 있는데, 각 담당자 세명까지 하면 총 6명이 참석하는 회의이다. 회의 자료는 항상 회의가 있는 날 전날 낮 12시까지가 데드라인으로 잡혀있으니 내일 오전까지 마무리가 되어야 한다. 나는 오늘 오전까지 우리 센터장에게 넘겼고 센터장이 내일오전까지 검토를 해서 넘길 예정이다. 그 과정까지 우리 청 내외부 유관담당자들과 회의도 있었고 내부 사업 착수 보고에 대한 협의를 거쳐 보고서 초안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받고, 1차로 이번주 월요일 부청장 보고회의를 했다. 그 이후 회의 결과에 맞춰 보고서를 최종 작성한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금요일에 모니터링 그룹에 착수보고를 하게 된다. 일 시작한지 4주 되었으니 꽤나 가쁘게 뛰어온 것 같다. 그러다보니 저녁에 퇴근 직전에 일을 지시 받아 아침 9시까지 모여 회의를 할 일도 여러차례 있었고 나도 보고서를 보내면 상사나 선임 컨설턴트가 저녁에 읽어보고 오전에 회의를 할 일도 있었다. 서로 야근에 대해서는 안되는 상황을 특별히 제시하는 게 아니면 쉽게 기대하는 문화임을 느낄 수 있었다. 다들 애가 있으니 집에 가면 애 픽업해서 밥 하고 집 좀 치우고 먹이고 씻기고 재운 이후 8시 쯤부터 일을 시작하는 거 같다. 그 때쯤부터 이메일이 오고가는 거 보면 말이다.

사회의 평균으로 보면 이렇게 야근하는 게 일상은 아닌 거 같다. 그렇지만 여기도 대학원 나와 큰 기업이나 정부기관에서 단순 행정직 이상의 일을 하는 경우는 야근이 일상으로 기대되는 경우가 많다.

나같은 경우 오전 7시 반부터 일을 시작해서 점심시간 30분 포함해 하루 8시간을 회사에서 일한다. 7시~7시 반 사이부터 일하기 시작하는 사람은 대충 3명. 점심은 회사 구내식당에서 동료들이랑 같이 서둘러 밥 먹고 올라오는 게 일상이다. 회의에 잡담은 없고 미리 정해진 시간 이내에 맞춰 회의하는 걸 매우 중시한다. 업무용 전화로 아이폰을 모두 받는데, 따로 전화 부스가 있다. 업무 전화가 와도 대부분 자기 컴퓨터를 들고 이 전화 부스로 들어가서 전화를 한다. 사무실에 대부분 적막이 흐르고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사무실을 채운다. 자리에서 받아도 되는데 이 적막을 깨는게 좀 어색한 모양이다.

생산성은 꽤나 높은 것 같다. 그 이유로는 한국에서보다 형식적인 요소들이 일에서 크게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고서를 고칠 게 있으면 구체적인 피드백이 문서에 코멘트로 오고 사전에 작성에 대해 큰 틀을 명료하게 지시해 주기 때문에 버전이 늘어지는 경우가 적다. 그리고 최종으로 부서장이 수정하는 경우는 나에게 이렇게 저렇게 고치라는 대신에 직접 고치기 때문에 불필요한 낭비가 줄어든다. 적은 시간을 일해도 자원 낭비 요소를 줄여 같은 성과를 내는 게 가능해지니 생산성이 높은 나라로 되어 있는 것 같다.

아직 청장회의는 참석해 보지 않았으니 모르겠지만 부청장과 회의를 해본 결과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시도 명료하고 여러가지 좋은 인사이트와 인풋도 받아왔다. 여기도 조직서열은 느껴지는 게 아무리 수평적이고 서로 성 없이 이름만으로 부르더라도 태도면에서 선임컨설턴트가 부청장을 대하는 것과 센터장을 대하는 게 미묘하게 달랐다. 조금 더 조심스럽고 깍듯한 느낌.

오늘은 자료를 이미 센터장에게 넘겨둔 터라 간만에 야근에서 해방되었다. 아… 조금 쉬어야지. 주말에 못본 드라마도 한편 보고. 뉴스도 보고. 포스트 한편 더 쓰고. 🙂

석사 논문

내 논문을 토대로 해서 박사과정을 시작한 사람이 있다한다. 그래서 나 프로젝트할 때 나에게 기초 핵심 데이터인 홍수 데이터를 준 우리 청 사람한테 듣기로 내 지도교수가 데이터 처리 협약을 맺어서 보다 구체적인 데이터를 받아갔다고 한다. 석사 논문이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누군가의 연구를 위해 쓰인다는 건 기쁜 일이다. 혹여나 그밖에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까 싶어 여기에 공개한다.

제목: Economic Assessment of Flooding in Denmark – Inference of the non-material cost of flooding due to storm surge on housing prices using the hedonic pricing method based on a spatial difference-in-differences framework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stimate the willingness to pay to avoid flooding after a storm surge in the coastal area. I conducted a first stage hedonic house prices study using a difference-in-differences approach. The analysis covers single-family houses located within the 3-kilometre buffer strip zone along the coastlines in 6 municipalities in Zealand, Denmark. More than 12,000 house sales transactions are included for the study during the period between 2007 and 2016. I used a historic storm, Bodil, which harshly hit Denmark in 2013, as a treatment for the setting of the difference-in-differences approach. Structural variables and environmental variables entered the estimation as control variables, and spatial and temporal autocorrelations were accounted for by spatial fixed effects and year dummies.

I found that the value of the houses flooded in 2013 is 19.4% lower than the unflooded houses, which is equivalent to DKK 115,219,540 for the flooded houses transacted during the study period. Moreover, the applied results of all houses in the study area based on the predicted sales prices show that the total economic value is DKK 528,705,356. This difference was observed even though the material damage costs were reimbursed from the Danish Storm Council when a storm surge floods the houses. Flooded houses and unflooded houses did not show any systematic differences in their price development before the treatment. These results could be evidence that there is non-material cost of flooding reflected in the house values.

덴마크 석사유학 후 정착이민?

덴마크에서 살려면, 덴마크 유학, 덴마크 이민… 요즘 눈에 띄는 유입검색어다. 덴마크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었나 했는데 또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덴마크에 사는 건 어떤가? 난 덴마크에서의 삶이 만족스럽다. 다만 지금 좋아하는 덴마크의 모습이 처음부터 좋았던 건 아니다. 여기식의 삶의 모습은 현지 여건에 맞춰 살기 적합한 형태이다. 여기의 장점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단점도 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살면서 좋다고 느꼈던 걸 여기로 다 갖고 오면서 덴마크의 좋은 점을 같이 취해서 살 수 있고 그런 건 없는 거다. 그게 가능하려면 엄청 부자이면서 여기 비자를 획득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사람이어야 할 것 같다. 아니 그래도 한국에서 좋았던 모든 것을 여기서 그대로 누릴 수는 없다. 돈으로 대접을 사는 게 힘드니까. 한국식 고객의 까다로움을 갖고 오면 스스로도 피곤하고 경멸의 눈길도 받을 수 있다.

유학으로 이민을 올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불가능한 건 아닌데 꽤나 챌린징한 것 같다. 그전엔 좀 상대적으로 쉬웠는데 시간이 갈 수록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덴마크어가 안되면 직업을 구하기 어려워서 더 그렇다. 영어만으로 취직을 하려면 글로벌 기업에 취업을 해야하는데, 대부분 아주 유창한 영어실력을 요구한다. 그런데 글로벌 기업이라고 해도 한국에서 대기업이 채용하듯 대규모로 채용하는 것도 아니고,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거나 그게 아니라도 영어를 모국어수준으로 사용하는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그런 자리를 지원하니까 경쟁이 치열한 편이다. 따라서 취업 가능성을 올리려면 덴마크어를 활용해서 일할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이게 유학기간 내에 학업과 병행해서 이 수준으로 올리기엔 대학원 학업 강도가 상당히 세다.

여기 사람에겐 취업에 있어 학점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은 아닌 거 같은데 유학 온 외국인에게는 학점이 중요한 것 같다. 특히 덴마크에서의 학업 후 유관분야로 신입 자리를 노리는 경우에는 더 그런 듯 하다. 내 한국에서의 이력이나 학력의 수준을 이들이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에 덴마크 학교내에서 보여주는 경쟁력으로 기존의 성과도 같이 평가되는 경향이 있는 거 같다. 그러니 덴마크어 공부하면서 학업을 잘 관리한다는 게 쉽지 않다. 나도 학교 다니는 와중에는 덴마크어를 손에서 거의 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냥 등하교길 신문 읽고, 라디오 듣고, 주말이나 저녁에 아주 간혹 티비 보고, 집에서 남편이랑 이야기하고 그런 거 외에는 말이다. 학원도 잠깐 다녀봐도 학교공부에 치여서 숙제를 몇번 못하고 자꾸 수업도 빠지다 보면 그만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원래 go against all odds, 불도저 같은 사람이다, 실패도 상관없이 도전하다보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라고 말할 유형의 사람이라면 사실 어떻게든 여기서 자리잡고 잘 살 수 있을 거 같다. 그러나 그런 타입이 아니라면, 녹록하진 않다. 나처럼 처음 일자리를 잡고 여기에 와서 덴마크어를 공부할 시간도 갖고, 현지인인 남편과 결혼해서 학비 없이 대학원 다니고 (그냥 유학생은 돈 내야한다.) 몇개월 실업기간동안 버틸 돈도 있고 직장다니고 있는 남편이 있어서 비빌 언덕이 있으면 좀 모를까.

오늘 생일인 직원이 있어서 그 직원이 구워온 초콜렛 케이크를 먹으며 20분정도 담소를 나눴는데, (생일인 사람이 케이크나 초콜렛이나 간식을 갖고 와서 나눠 먹으며 축하를 받는 기묘한 문화가 있다.) 나 채용할 때 같이 채용되어 들어온 다른 덴마크 직원 두명은 인성 검사만 받았고, 나만 적성검사(라 하고 아이큐 검사 비스무레한…)와 인성검사를 다 받았더라. 누군가는 적성검사만 보고, 누군가는 인성검사만 보고, 또는 다 보는 사람도 있는데, 채용하는 사람 입장에서 조금 확인해보고 싶은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 개별로 필요한 시험 타입을 정해서 알려준다고 한다. 오늘 보아하니 전체 센터에서 우리 청에 들어오기 위해 적성검사를 한 건 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인적성 검사는 우리 청에서 우리 센터가 가장 많이 활용한다고 한다. 농담으로 “내 지능에 의문을 가졌군! 다행히 내가 살아남았네!”라고 말했는데, 돌아서서 생각해보는데 외국인에게는 진입장벽이 알게모르게 존재하는구나 싶었다. 덴마크 직장에 첫 발을 들이고 나면 그걸 기반으로 해서 다른 덴마크 직장으로 이직하는 건 수월해지지만 이런 진입장벽으로 인해 첫 발 딛는게 아무래도 더 어려울 수 있겠다. 집에 와서 옌스랑도 이야기해보는데, 아무래도 외국인은 어떤 생각을 갖고 일하는지 서로 잘 알지 못하니 불안함이 더 크고, 확인해보고 싶은 게 많지 않겠느냐 한다.

결론은 아무런 비빌 언덕 없이 2년동안 석사해서 바로 취직하는 걸 머리에 그리고 오는 유학이라면 별로 추천하고 싶진 않다. 박사자리 오퍼받고 오는 건 다른 이야기다. 그건 한국과 달리 취직해서 오는 거니까. 물론 박사자리가 끝나서 무조건 스테이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석사보다는 훨씬 높은 확률로 자리를 잡을 수 있다. 그리고 월급도 아주 풍족하진 않아도 먹고 사는 데 지장없을 정도로는 나오니까. 그리고 학계는 덴마크어가 모자라도 장기적으로 덴마크어를 배우면서 정착하기에 괜찮은 국제적인 환경이니까.

이 나라 사람들 영어 참 잘하는데, 그래도 모국어가 더 편하고, 영어가 그닥 안편한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일을 하는데 굳이 영어로 일할 이유가 없다. 거기에 고객 업무가 있을 경우 고객을 불편하게 하기 싫을 거다. 그런 이유로 한국에서 한국말 못하는 사람 안뽑듯이 여기도 덴마크어 안되는 외국인은 잘 안뽑는다. 영어를 잘하면 덴마크어 배우기 많이 수월해지지만, 그래도 분명 다른 언어도 배우는 데 시간이 또 걸린다. ‘덴마크 사람들이 영어 잘 하니까, 대학원 대부분의 과정이 영어로 되어 있으니까, 거기서 석사 유학하고 나면 취직하는 것도 어렵지 않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한국에서 다른 나라 외국인이 한국어 없이 우리나라에서 취업하려는 것과 진배 없는 어려움에 부딪히게 만든다.

그냥 별다른 이유 없이 한국을 떠나고 싶어서, 덴마크가 행복한 나라라기에 유학 이민을 꿈꾸는 사람일 경우라면 이런 이유로 매우 비추라고 말해주고 싶다. 올 경우 이런 상황에 대한 인지 후 엄청 노력해서 살아남을 각오를 하고 올 것을 추천한다.

신입사원 졸업

내일부로 학생직원이 한 명 새로 들어온다. 점심 먹으러 구내식당 내려가는데 동료 중 한명이, “신입사원 지위를 누릴 수 있을 때 마음껏 누리세요. 내일부터는 모르는 거 질문하기 없기!”라고 했다. ‘아. 맞다. 내일 아침 환영다과가 있었지.’ 싶었다.

나랑 같이 면접을 봤지만 2018년 계속 사업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되어 나보다 1개월 먼저 일을 시작했던 직원 두 명이 있다. 나를 환영하는 다과회에서 그 중 한명이 “나도 얼마전에 신입사원이었는데, 이렇게 너를 환영하는 다과에 와서 자기 소개를 하니 어느 새 마치 오래된 기존 직원인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라고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기분을 내가 느낀다.

3일부터 일을 시작했으니까 일 시작한지 거의 만 3주 되었나보다. 내가 맡은 분석사업도 슬슬 발동이 걸리고 있다. 다음주 월요일 부청장 미팅이 있어서 그 보고에 앞선 보고서를 작성하는 중이다. 일 시작한 첫주에 내가 과연 보고서를 덴마크어로 쓰고 관려된 내용을 보고할 수 있을지, 과연 그들이 내 덴마크어 업무수행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잘못 뽑은 건 아닌지 스트레스를 제법 받았었다. 수습기간 3개월에 자르는 경우는 진짜 특별한 경우라며 그런 걸 생각하는 건 말도 안된다고 옌스가 말했지만, 그게 내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도대체 나를 왜 뽑았을까? 경력을 2년 인정해 준다고 했는데, 도대체 왜 그랬을까? 언제 적응할 수 있을까? 여러가지 생각이 많았다. 원래 신입사원은 그런거야 라면서 자위하기도 했지만 또 다시금 밤에 침대에 누우면 불안한 생각이 엄습해와 깊은 잠이 들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그 모든 게 적응의 일부분이었던 것 같다.

첫주엔 정말 내 뒤에 보는 사람이 없는 구석자리에 앉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나게 자주 사전을 찾았다. 그간 대충 감으로 알고 있었지만, 딱 한단어로 번역해봐라 하면 그렇게 하기 어려웠던 단어들부터 새로운 단어까지 다 찾아내려다보니 읽는 자료마다 단어 뜻이 누덕누덕 적혀있었다. 내용을 정리하면서 읽기보다는 우선 닥치는 대로 읽었다. 중간중간 궁금한 점만 적어내려가며 담당자별 인트로 미팅을 할 때 질문을 해서 내 업무와 그들의 업무가 어떻게 연결될 지 최대한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유사 제도에 대한 경험이 있는 다른 센터와의 미팅 두 건을 마친 후 센터장과 선임컨설턴트와 현황미팅을 가졌다. 그리고 센터장으로부터 보고서를 하나 만들어 현재 우리가 가장 많이 참고해야할 섹터의 제도 도입 내용을 정리해보고 우리 섹터에 적용할 수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을 나눠 정책적 고려사항을 도출하라는 주문을 받았다.

어떤 식으로 보고서를 만들어야 할 지 아주 러프하게만 틀을 정해준 거라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가 우선 그냥 한국에서 였으면 어떻게 일했을까를 생각하고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었다. 다만 덴마크어로. 보고서 작성 메뉴얼도 대충 훑어봤었는데다가 관련 보고서를 2-300 페이지를 읽고 났더니 대충 어떤 문체를 쓰는지 알 수 있었고, 무지막지하게 단어를 많이 (그중 같은 단어도 잘 기억 안나는 것을 두세번도 찾아봤었다.) 찾아본 게 다 도움이 되서 생각했던 것이랑 달리 빨리 보고서를 써내려갈 수 있었다. 최종은 아니지만 보고서 서론만 남겨두고 작성한 보고서를 갖고 센터장과 선임컨설턴트를 대상으로 한시간 정도 브리핑과 토의를 했는데, 아주 의미가 있었다. 우선 내가 작성한 방향에 대해서 매우 좋게 생각을 했고, 이번 브리핑을 연습삼아 다음주에 있을 부청장 미팅의 브리핑에 대한 부담을 덜을 수 있었다. 또한 2월 초에 내 담당 사업에 대한 모니터링 그룹 미팅이 있어 청장 주재하에 진행 내용을 발표해야 해서 이 작은 스텝 하나하나가 연습이고 경험이 된다.

이 작은 경험을 통해 얻은 건, 우리 청에서 나를 괜히 뽑은 건 아니고 내가 기여할 바가 있었다는 확인이다. 기후변화적응과 관련한 범정부차원 정책 이니셔티브가 수립중에 있는데, 환경식품부와 에너지유틸리티기후부가 부처간 이견을 조율하는 단계에 있다. 이 부처간 이견이 조율되고 나면 수자원관리 기능을 담당하는 우리 센터에 경제적비용편익에 대한 분석업무가 떨어질 거라 이걸 수행하기 위한 사람을 2019년 중에 채용하고자 하고 있었다 한다. 다만 이 업무는 착수 시점이 애매해서 이 업무를 수행할 수 있으면서 지금 내가 담당하는 업무를 수행할 사람을 2019년 1월부터 바로 일할 수 있게 채용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기후변화와 관련한 비용편익분석은 내 논문을 통해 했던 것과 매우 깊게 연관되어 있었는데, 거기에 내 학부 전공의 경영학과 은행 재무기획팀 근무 경력을 보고 아주 딱 맞다 생각했던 것이다. 학부때 별로 좋은 성적을 거두진 못했지만 투자 관련 수업도 많이 듣고, 결국 다 중도에 포기하긴 했었어도 은행 다니며 CFA와 FRM도 끄적끄적 공부도 하고, 재무기획팀에서 예산 (및 약간의 관리회계) 기획과 성과평가 업무를 하며 이래저래 머리에 쌓아왔던 먼지쌓인 지식이 도움이 되는 때가 온 것이다. CAPM이며 WACC이며 기업재무에 손을 댈 날이 이렇게 뒤에 올 지는 전혀 몰랐는데. 힘들었던 은행업무시절, 금융은 뒤도 안돌아보겠다 했던 걸 지금 손바닥 뒤집듯 갑자기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어차피 전문가의 손이 필요한 경우 외부에 손을 뻗어야 하지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면 제도 도입이 어렵기에 그걸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히지만 우리 센터 안에 할 사람이 없는 걸 내가 할 수 있다는 걸 오늘 보고하고 느낀 후에 자신감과 안도감이 버무러진 감정을 느꼈다.

보고서 작성이야 코트라에서 끊임없이 하던 것이었으니 그냥 언어만 바뀐 것 뿐이고. 선임 컨설턴트가 경력직을 채용하면 이런 거 설명 안해줘도 되서 너무 편하다고 하던데 나도 나라가 달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들이 있구나 싶은 생각에 다행이다 생각했다.

오늘부로 신입사원은 졸업한 느낌인데 공식적으로도 내일부로 신입사원은 졸업이다. 오늘 보육원에서 하나를 2월 18일부로 다음단계 보육원으로 이동시킨다고 들었는데 나뿐이 아니라 하나도 졸업이구나. 세상으로 나가는 전체 교육과정 중 가장 이른 단계를 졸업하는 거니 세상의 신입사원 졸업이라고나 할까?

내일 얼른 보고서를 마무리 짓고 다음 단계 일을 시작하도록 해야겠다. 얼른 공을 선임컨설턴트에게도 넘겨야 문법 검토도 받고 최종 마무리도 될테니까. 우선 오늘은 밀린 드라마 한편 보고 잠을 자야겠다. 아이 피곤해…

조직내에서 느끼는 덴마크인의 사회적 성향

덴마크 사람들은 가까워지기까지는 좀 무뚝뚝해 보이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했던 게 기억난다. 알고 보면 참 진솔하고 담백한 사람들인데. 시간이 지나다보니 첫인상이 무뚝뚝해 보인다는 생각도 다 없어졌다. 그냥 참 솔직하고 친절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다. 첫인상에 대한 인상이 무뎌진 건 그냥 너무 다 익숙해져서 이렇다, 저렇다 생각이 아예 안드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건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곳에서의 인상이었고 서로를 알고 지내는 조직내에서 사람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관계를 맺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보니 여기 사람들은 상냥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이 있는 것 같다. 갈등을 최대한 피하고 싶어하고. 채용 단계에서부터 “유쾌한 기분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고”라는 조항이 없는 공고를 못 봤다. “다른 조직원과 협력을 잘 할 수 있어야 하고”와 같은 조항이 꼭 있는 걸로 보아 팀웍에 저해가 되는 사람들 받는 걸 지극히 꺼려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실제 일하면서도 보니 서로 바쁜 와중에도 도움을 청하면 기꺼이 도와주려하고 바쁜 티를 간혹 내더라도 미안해하면서 비는 시간을 따로 알려준다거나 하는데 항상 서로 웃는다. 그게 너무나 중요한 요소라는 인상이다. 물론 사람 사는 곳 어디나 같은데 여기라고 이상한 사람이 없겠는가? 그런데 그런 사람을 받는 걸 제일 무서워하는 것 같다. 부정적인 사람은 경쟁력이 없다는 걸로 인식된다고 한다.

올해 있을 하수도사업자 예산규제틀 제정에 앞서 올해 바뀐 규정 등을 안내하고자 설명회가 개최되었는데, 현재 우리와 행정소송이 계류중인 없체에서 날이 날카롭게 솟은 질문(의 탈을 쓴 거센 비판)을 한 모양이다. 그거에 감정이 상한다기 보다는 그 감정을 이해한다면서 그 정도는 예상할만한 것이었다고, 서로 그러면서 배우는 거 아니겠느냐고 하는데 좀 색달랐다. 우리 센터장님은 ‘어우 왜 저래? 약간 정신이 이상한거 아냐?’ 이렇게 생각했다면서 깔깔 웃고 넘어가는데 놀라웠다. 여기 사람들은 참 이성적인 것 같다. 우리 같으면 좀 예민하게 받아들일 것도 ‘뭐 그럴 수 있지.’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흘리는 것 같고. 자기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싶으면 그런 일을 흘려보내는 것에 익숙한 것 같다. 개인주의의 영향일까? 그렇게 커와서? 사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 그렇게 못하는 순간이 많았거늘… 그런 당황스러운 순간에 주변 시선 의식하지 않는다면 나도 별로 흔들리거나 감정 상하지 않고 웃으며 상황에 대처하고 흘려보낼 수 있을까? 좀 그렇게 해봐야 할 거 같다. 나도 올 해 공청회 실시하면 그런 상황들을 조금 맞이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성토의 장이 되더라도 내 덴마크어에 민망해하지 않고 웃으며 당당하게 맞설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할아버지의 소련군 포로 탈출 이야기에 대한 추억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오래 전이 아니었던 거 같다. 위암 수술 이후 간암으로 전이되었음을 확인하기 전이었던 듯. 아직도 기억나는 건 내 태극기함을 만드는 걸 도와주러 오셨다는 거다. 그 때 살던 아파트 베란다에서 거실에 연결된 부분에 사각형으로 된 마루조각을 깔았었는데, 그 남은 조각으로 태극기 함을 만들어준다 하셨다. 오빠도 그 한해 전에 만들었는데 오빠는 문방구에서 사왔던 표준화된 태극기함을 만들었더랬다. 난 그게 조금 부러웠었다. 남들이 다 만들던 것이라 그랬었을까? 결국은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셨던 내 태극기함은 우리집에서 오랫동안 쓰였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참 좋은 원목으로 만들어진 튼튼하고 좋은 함이었다. 그땐 지금의 안목이 없었으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불평하지 않았던 건 내가 좋아하던 할아버지가 일부러 와서 내 태극기함을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다. 난 못질이나 조금 도왔으려나?

내가 할아버지를 참 좋아했던 건 할아버지가 누구보다도 나를 이뻐하셨기 때문이었다. 이는 꽤 오랫동안 지낸 탓이 큰 것 같다. 아주 어려서 아빠가 독일에 1년동안 업무상 파견나가 계셨는데, 돌도 안된 나를 포함해 연년생 두 남매를 혼자 케어하기 어려웠던 엄마가 나를 외탁하시고 매일 외갓집으로 출근하시며 지냈었다. 그 덕에 나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제일 좋아했었고. 아마 그 때는 간간히 나를 훈육하는 엄마보다 나를 항상 싸고 도시는 두 분이 더 좋았던 거 같다. 엄마가 간혹 서운해하셨을 정도였으니. 두분에 대한 사랑을 아낌없이 표현하는 손주인데다가 일정 기간 직접 키우셨으니 그 정이 오죽했을까? 하도 내가 내 할아버지, 할머니다 라고 해대니 외가사촌들이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인 줄로 착각했을 정도로 양방향의 관계는 참으로 돈독했다.

외가집은 버스로 대여섯정거장이 될 정도로 가까웠다. 명일동과 천호동이었으니. 할아버지는 우리 동네에 있는 약수터에서 물을 길어가신다며 우리 집에 자주 오셨고, 자전거 뒤에 묶은 물통 위에 나를 얹어 태우시고 동네 한바퀴를 태워주곤 하셨다. 그때 타일은 요즘과 달리 정사각형의 큰 타일이었다. 네개의 타일을 두개씩 정방형으로 붙이면 큰 원이 그려지게끔 디자인이 된 거였는데, 멋진 여성들은 일자로 걷는다며 타일의 선을 따라 걷는 연습도 시켜주셨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신체 자세에는 참 안좋은 걸음걸이다.) 나보고 항상 여사감이라면서 커서 뭐가 되도 될 거라 하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뭐가 된 건 아니지만 쉬지 않고 뭔가 배워나가는 사람이 되었으니 기대하신 바에는 못미쳐도 나쁘진 않게 된 것 같다.

외할아버지와 관련되서는 내가 초등학교때 돌아가셨는데도 아주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많을 정도로,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나에게 너무나 특별한 분이었다.

해병대를 다녀오시고 그걸 엄청 자랑스럽게 여기셨다는 할아버지. 엄마와 이모들, 삼촌 모두 해병대 군가를 속속들이 외울 정도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해병대, 용맹함 이런 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나에게야 그냥 따뜻한 할아버지일 뿐이었지만 또 그 할아버지는 아버지로 두신 분들에겐 다른 기억과 다른 감정이 있겠지.

그랬던 할아버지가 태극기함을 만들기 위해 톱질과 못질, 사포질, 락카칠을 하시며 풀어내신 이야기 보따리에는 엄마가 태어나서 한번도 듣지 못했던 일제시대때 참전 이야기가 있었다. 엄마에게 직접 하신 이야기가 아니라 베란다에 오빠와 나와 함께 앉아 일을 하시며 우리에게 해주신 이야기를 엄마는 거실에 앉아 귀동냥하신 거였지만.

할아버지는 관동군으로 차출되어 2차대전에 끌려나가셨는데 소련군의 탱크가 줄줄이 남하하고 있는 와중 젊은 청년병인 할아버지는 폭탄을 끌어안고 탱크 아래로 들어가 폭탄을 터뜨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폭탄 옆에 바짝 누우면 살 수 있다는 일본 장교의 거짓말을 들었지만, 그걸 누가 믿는단 말인가. 조선징용군인에게 자살폭탄을 터뜨리라는 명령을 한 것이지. 할아버지는 그 명을 들어도, 안들어도 죽는 입장이었기에 폭탄을 들고 탱크로 다가갔지만 도저히 너무 무서워서 그 아래로 뛰어들 수가 없었고 그대로 기절을 했다. 그리고 깨어났더니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있었다더라.

그리고 얼마 후 일본은 항복을 선언했고, 소련군은 포획한 관동군 포로들을 모두 소련으로 데리고 가기 시작했다. 머리와 옷에 이가 들끌어 너무너무 가려웠는데 잡아도 잡아도 해결되지가 않고, 어찌나 많았는지 옷을 탈탈 털면 이가 날렸다고 한다. 배는 너무나 고팠는지. 할아버지는 이대로 소련땅에 끌려가면 언제 돌아올 수 있을 지, 살아 돌아올 수는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에 탈출의 기회를 끊임없이 보았다. 중간중간 대소변을 볼 수 있게 해주었는데, 어느 날은 작물의 키가 제법 커진 – 벼인지 보리인지 뭐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 들판에서 볼일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단다. 여기에서 도망가지 않으면 언제 더 좋은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싶어 얼른 그 아래로 숨어 그 들판 근처에 보인 똥통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 이유인즉슨 포로수를 다 일일이 셀 수 없었던 상황이라 그런 휴식시간이 끝나고 나면 들판에 총을 드르륵 갈기고 갔었기에 몸을 보호해줄만한 거라곤 똥통 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다. 온몸에 똥독이 올랐지만, 그렇게 포로신세는 탈출했다. 그러고는 달구지에 숨어들고 등등하여 38선으로 나뉜 북녘땅을 통과해 월남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때만해도 물리적인 군사분계선이 없던 때라 정확히 어디가 남한땅인지 알 수 없었지만 멋진 선글라스를 끼고 할아버지를 향해 휘파람을 불며 인사를 하던 연합군 병사를 봤을 때 할아버지는 여기가 남한 땅이구나 하며 그간의 긴장이 사르르 풀렸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 못돌아온 사람들은 지금도 시베리아 등지에서 살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때 할아버지가 탈출하지 않으셨다면 나는 존재하지도 못했을 뻔 했던 것이다.

왜 그 이야기를 그때까지 한번도 안하셨을까? 할아버지에게 그건 수치스러운 일이었을까? 평생의 트라우마로 죽기전에 한번쯤은 이야기하고 가야한다고 생각하셨던 일이었을까? 엄마는 할아버지가 떠나신 후 거실에 앉아, 평생을 해병대 전우를 외쳐온 할아버지에게 이런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고 그걸 이제서 우리에게 이야기하신 것도 너무나 놀랍다 하셨다. 나도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처음 하셨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었기에 놀라웠었고.

어쩌다 나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시부모님이랑 지난 주 저녁 식사 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 이야기가 나왔는데, 아마 그게 할아버지에게는 지우고 싶고, 있었던 일인 것조차 기억하기 싫은 힘든 기억이었을 거라고 시부모님이 이야기하셨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결혼하신 것도 할머니의 위안부 차출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하니 너무 놀래시며 후세를 위해서는 공유가 필요한 이야기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나도 너무 오래간만에 떠올린 기억이라 언젠가 하나에게도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을 거 같아 기록해두려고 남긴다.

월간 현황 미팅과 채용/업무부장 배경

오늘은 센터장님과 첫 월간 현황 미팅을 했다. 현재까지 직장동료들에 대한 느낌이나 내 경험은 어떤지, 일하는 건 어떤지,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등에 대한 것을 이야기 나눴다. 공개 회의에서는 내가 못알아듣는 부분을 그때그때 물어보기 어려워서 회의가 끝난 후에 따로 이해가 안된 부분을 일대일로 팔로우업 해야하는 게 조금은 어려운 부분이 있고, 아직은 여러 분야별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있어서 큰 그림을 그리기까지는 조각퍼즐을 맞추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지금은 주어진 자료들을 닥치는 대로 읽고 있고, 아무래도 이 또한 남들보다느릴 수밖에 없다고. 그랬더니 그 큰 그림은 오래 있어도 다 알기에는 한계가 있는 게 제도가 살아움직여서 내가 지금 시점에 다 이해해도 또 시간이 지나면 내가 이해한 거에서 또 바뀌어있다고 하시며 걱정 말라고 해주셨다. 또 외부로 발간되는 자료나 장관 보고 자료를 아직은 혼자 쓸 일이 없으니 덴마크어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말고 내 프로젝트의 경제적 분석에만 집중하라고 해주셨다. 또한 아카데믹 트랙으로 뽑는 사람들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핵심 업무에 집중하라고 비서가 있는 거니까 서무업무는 다 비서에게 일을 맡기라고 하시더라. 다들 비서에게 필요한 업무를 주는 것에 약한데, 그 또한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시면서.

동료들은 다들 적극적으로 업무를 도와준다. 문의사항이 있으면 상세히 설명해준다. 바쁜 걸 아니까 나도 물어보는 게 조금 조심스럽지만서도…

매주 월요일마다 현황판 앞에 모여서 단기 데드라인이 있는 프로젝트와 롱텀 프로젝트로 나눠서 진행 상황에 대해 공유한다. 각자 자기의 업무가 나뉘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수자원 기업의 운영에 있어서 소비자에게 청구할 수 있는 예산의 틀을 정하는 게 근본적인 우리 핵심업무로서 그에 각기 다른 기여를 하며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뭘 하고 있는지를 알아두어야 그게 자기 업무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서 진행할 수 있고 또 중간중간 내 업무의 인풋을 위해 팔로우업이 필요한 게 무엇인지 자기가 도와줘야 하는 일은 무엇인지 등을 파악할 수 있다. 나는 이번 주 처음 이게 뭐하는 미팅인지 소개가 없이 그냥 듣다보니 어벙벙하게 앉아서 듣기만 했는데, 해당 미팅을 총괄하는 선임컨설턴트 (직급체계가 간단하다. 나와 같은 섹션헤드 (음… 밑에 아무도 없는데 섹션헤드다. Fuldmægtig라고 직급이 되어있는데 나같이 석사를 졸업하고 아카데믹트랙으로 들어오는 모든 일반 직원은 이 직급으로 시작한다. 오늘 받은 명함을 뒤집이보니 Head of section이라고 써있다.) , 선임컨설턴트, 센터장, 부청장, 청장으로 되어있다.) 가 오늘 오리엔테이션을 해주었다.

그러면서 오늘 오전 회의에 이야기나왔던 새로운 이코노미스트 포지션엔 몇명이 지원했냐고 물었더니 지난번 나 지원했을 때보다 한자리 더 늘려서 두자리에 채용하는데 그때랑 달리 지원자 규모가 확 줄어서 아홉 명이 지원했다고 한다. (아마 연말에 이코노미스트 채용이 많았어서 그런게 아닐까 하는 근거없는 추측…) 두 명 채용을 계획하는데 아홉 명이 지원했다고 하니 많지는 않다. 물론 좋은 지원자들이 있어서 괜찮을 것 같단다. 나 지원했을 때는 몇명이 지원했냐 물으니 40여명이 지원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와 다른 두 명을 채용했단다. 어라? 같이 지원했는데 어째서 그 둘은 나보다 한달이나 먼저 일을 시작했냐 물었더니, 업무가 다른데다가 내 업무는 올해 시작되는 업무라 그랬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는 담당 수자원기업이 따로 없을 거 같다고, 내가 이러저러한 좋은 경력이 많아서 중요 연구 프로젝트 두 개를 맡을 예정이라 그런 걸로 알고 있다고 하더라. 두둥… 은행에서 전행예산 담당했던 이력이 크게 작용하고 기타 코트라 이력도 반영이 되었던 걸로 아는데, 아무튼 덕분에 다소 루틴한 부분이 있는 업무에서 배제된 건 감사한 일이지만 덜컥 부담도 되었다.

이제 서서히 이메일이 오고가고 하면서 조금씩 일이 돌아가고 있는 거 같다. 경영진에게 프로젝트를 킥오프를 보고하는 미팅도 준비하기 시작하고 내외부 미팅도 조금씩 돌아가기 시작한다. 하루하루가 내가 이걸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이렇게 부딪히며 해나가다보면 다 할 수 있는 거야 하는 생각 사이에서 넘어가고 있다. 이렇게 고민하면서 하루하루 생존하다보면 어느새 2020년이 와서 프로젝트 마감을 향해 달리고 있는 날이 갑자기 눈앞에 와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