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를 살기.

“덴마크인마저 여기 날씨를 싫어하던데, 넌 여기 날씨도 괜찮다면서 좋아하는게 참 신기해.”

대학원에서 알게 된 크로아티아 친구가 급작스레 찾아온 추위에 불평하며 말했다. 크로아티아에서는 맑은 날이 많고 흐리고 비가 오더라도 덴마크처럼 강풍을 동반하지 않아 여기처럼 우산을 써도 거센 빗방울이 얼굴을 때리는 일은 겪을 수 없으니, 그 곳에서 평생을 살다온 내가 여기 날씨을 좋아할 수 있겠느냐고. 일리가 있다. 델리의 날씨를 끔찍하게 싫어했던 바가 있기에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짧은 겨울이 지나고나면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오르기 시작해 4~5월이 되면 낮기온이 50도에 이르고, 습도가 높은 탓에 건물 밖으로 한발만 내딛으면 숨이 턱 막힌다. 에어콘으로 차갑게 유지된 공기속에 있다가 습하고 뜨거운 공기속으로 움직이면 갑자기 피부와 옷이 축축해지는 느낌과 함께 약간의 현기증마저 느껴진다. 2~3개월에 불과한 우기를 제외하고는 비는 오지 않아 땅은 항상 건조하다. 서쪽에서 간간히 오는 강풍은 그 건조한 흙을 훑으며 모래폭풍을 일으키는데, 열악한 건축마감 기술탓에 창문이 꼭 닫히지 않아 18층 아파트 실내까지 모래가 덮치곤 한다. 하루는 들판에서 내 차를 향해 불어오는 모래 바람이 보여 황급히 차창을 닫은 적이 있다. 창문을 다 닫자마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모래가 차를 덮쳤는데 순간의 안도감이 지나자마자 짜증이 나를 휘감는 기분이 들었다. 나무들은 더운 기후에도 생존할 수 있는 잎이 작은 활엽수가 주종을 차지하는데 그나마 있는 그 작은 잎사귀에 흙먼지가 뽀얗게 앉아 초록생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겨울 3개월을 제외하고는 밤낮에 상관없이 에어콘을 달고 살아야 했는데, 전기세가 비싼 건 차치하고서라도 적정온도를 찾기 어려워 밤에 잘 잘 수 없다는 것이 삶을 더 피곤하게 한다.

그곳을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기에 시간은 더디게 갔고 2년반이 10년의 세월만큼이나 길게 느껴졌다. 인도에 사는 외국인은 그를 사랑하거나 싫어하는 두 부류로 나뉜다는데, 나는 싫어하는 편에 속해있었고 여행은 몰라도 다시는 이곳에 살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다. 덴마크에서 평생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그녀 이상으로 인도에서 사는 것을 싫어했기에 말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것은 내 몫이었다. 내가 아무리 시간이 흐르기를 바란들 더 빨리 흘러갈 시간이 아니라면 그 순간을 잘 살든 못 살든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몫인데… 다시금 한국으로 돌아가기만을 바라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불쌍히 여기던 것은 아쉽다. 자주 여행도 다니고, 다양한 음식도 접하고, 언어를 배우고, 현지인과 교류하는 등 그 경험을 더 풍부하게 만들 수 있었는데…

머리로는 알지만 행하지못하는 것은 사실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현재를 살라, 갖고 있는 것을 감사하고 소중히 여기라, 어떤 감정을 느끼느냐는 것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지 타인에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 류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은 ‘나도 다 알아. 아느네 그렇게 하는 게 힘든 것을 어떡해?’ 였다. 같은 상황을 두고 누구는 웃고 넘어갈 수 있고 누구는 마음상할 수 있고, 누구는 화를 내고 누구는 용서할 수 있는 것처럼 결국 그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반응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이 결정하는 일이다.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내가 영향을 받을 때 부처나 예수가 아닌 이상 감정이 동하고 일희일비할 수 있지만 삶의 흐름이 외부에 빈번히 흔들리면 사는 것 자체가 피곤하고 힘들어진다.

우산장수와 부채장수를 아들로 둔 노모의 이야기처럼 매사를 걱정할지 아니면 기뻐할지를 선택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건 아무리 남이 이야기해준다 해서 바뀔 일이 아니고 동전의 양면과 같은 삶의 순간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을 때의 기쁨을 직접 느끼고나서 실천해가기 시작해야 바뀔 일이다.

해가 짧아지고 비가 자주오고 바람이 몰아치는 계절이 되면, 해가 나오는 그 짧은 순간이 아름다워져서 좋고, 짙은 회색구름 틈새로 살짝 비쳐 보이곤 하는 파란 구멍을 발견했을 때 반가워서 좋다. 저녁이면 깜깜해져서 일찍부터 초를 키고 그 아늑함을 즐길 수 있어서 좋고, 비가 올 때면 땅이 촉촉해져서 좋다. 바람이 거세게 불면 상쾌하고 신선한 공기가 도시의 오염물질을 불어내줘서 좋고, 하늘의 구름이 빠르게 움직이는 생동감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몸이 젖어 으슬으슬하면 집이나 실내에 들어와서 몸을 녹일때 느껴지는 부르르하는 감각과 함께 찾아오는 온기가 좋다. 파랗던 나뭇잎이 단풍으로 색을 갈아입으면 그게 아름다워서 좋고, 떨어질 땐 그 아름다움이 좋다. 낙엽이 지고 앙상해진 나무는 수종마다 다른 가지의 구조를 알게 되어 흥미롭고, 나무 끝에 월둥준비를 하며 준비해 둔 새순이 피어날 날을 기대할 수 있어서 좋다. 봄이 오면 어느새 연녹색 새순이 터지며 하루가 다르게 짙은 색깔로 빈 공간을 채워가는 것이 놀랍다.

변하는 것은 변화에서 오는 새로움을 찾을 수 있어서, 변하지 안는 것은 그 항상성 때문에 좋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반대로 생각할 수 있다. 주변환경의 동력을 내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내가 좋은 대로 하면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에 끊임없이 불평한다면 내 삶이 불행해지는 것은 그간의 경험으로 충분히 느꼈다.

그 일이 얼마나 작고 크냐에 따라 그 변화에 내가 어떻게 적응하느냐와 그에 걸리는 시간과 노력은 달라질 것이다. 앞으로도 그 노력은 계속될 것이고 이를 행함이 어려운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머리로만이 아니라 경험으로 알고 있기에 그 방향으로 나를 이끌어갈 수 있고, 그렇게 믿는다.

시험 성적이 나왔는데 평균보다는 잘 했지만 내가 원한만큼 결과가 따라주지 않았다. 많이 속상했다. 그렇지만 속상한 마음은 그 날 저녁에 느낀 다소간의 울적함으로 충분하다. 이미 나온 결과에 승복하고 다음 과목 공부에 집중하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렇게 해서 성적을 잘 내야지 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냥 지금 하는 공부가 나에게 가져올 도전과 그 결과물로 쌓일 지식을 받아들이며 공부하면 난 이 순간을 즐길 수 있다.

현재 삶의 순간에서 작은 것을 발견하고 경험하고 느끼는 것, 그리고 그 순간을 살아내는 일이 소중하고 행복함을 느낀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감사하다.

엄마, 아빠. 사랑합니다.

엘니뇨 현상으로 올 겨울은 온화한 계절이 예상된다고 한 것을 들은 지 오래지 않았는데 갑작스레 북풍한파가 닥쳤다. 거센 바람과 함께 눈폭풍이 들이치기 전에 부모님이 타신 비행기는 한국을 향해 떴다. 아슬아슬하게 한파를 피해가신 탓에 늦가을의 끝자락을 겨울이 오기 직전까지 함께하고서야 돌아가신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무서운 눈폭풍이 가라앉고 난 뒤 통상 찾아드는 고요함과 함께 밝은 햇살이 겨울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부모님의 빈자리가 갑자기 느껴진다. 계신 동안 학교 수업이 시작되며 바빠져 제대로 마지막 한 주를 보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지만, 일상은 계속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엄마가 떠나기직전 남기고 가신 편지 한 장이 내 마음을 크게 울린다. 이를 쓴 엄마의 마음이 한 글자, 한 글자 온전히 마음에 다가오기에 이를 읽을때마다 눈물이 난다. 내 진짜 독립은 지금 이 순간이 아닌가한다. 이미 독립했다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또 다른 가정을 꾸려가야 하는 이 순간을 맞이해 나를 떠나보내는 마음과 인생을 살아가다 지칠 때 나를 다시 추스를 수 있도록 하는 그 글에서 더이상 내가 부모님 품 안의 자식이 아님을 느낀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고 날기 싫은 마음마저 갑자기 들지만, 그간 무수히 연습만 해왔던 비행은 앞으로 떠날 긴 진짜 여정의 시작이 되었다.

이 편지는 깊고도 소중한 곳에 묻어둔다. 언젠가 타국의 삶이 힘들고 나를 지치게, 주저앉게 할 땐 이를 꺼내 마음의 위안을 얻으리라. 지금은 그 마음에 울며 읽지만, 지금 알 수 없는 미래의 힘든 그 순간엔 이 종이 한 장이 참으로 따뜻한 마음의 울림을 주리라. 그리고 난 다시금 용기와 힘을 내어 그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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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wedding speech :)

I would do my speech both in English and Korean as I have guests from different backgrounds. So it will be exceptionally long for a bride’s speech. It is okay to fall asleep.

Undskyld mig for ikke at tale også på dansk. Det er min brudens tale og jeg vil gerne udtrykke mine tanker og følelse fuldtud. Men mit dansk er ikke så godt nok til at gøre det. Så jeg vil bare tale på engelsk og koreansk. Måske allerede er der nogle gramatiske fejl.

First of all, thank you so much for everyone once again who came all the way from different parts of Denmark and the world. I am very grateful that I could share this precious moment in life with people that I care about.

우선 먼 곳에서 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제 인생의 소중한 이 순간을 제가 아끼는 분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고 있어요.

I met Jens at an online dating site. As an economist, I wanted to be most efficient and effective even in terms of dating someone. Jens was my first date at the site, and he became my husband. It cost only 100 kroner to find my husband and he has been the most amazing and the best man that I have ever known! So, that 100 kroner was very cheap but the most efficient and the most valuable investment in my life.  

저는 옌스를 온라인 데이팅 사이트에서 만났어요. 경제학자로서 저는 누군가를 데이트하는 순간마저도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이고 싶어했지요. 옌스는 거기에서 만난 첫번째 데이트였고, 제 남편이 되었어요. 제 남편을 찾기까진 단돈 100 크로나가 들었을 뿐인데, 그는 제가 여태껏 알아온 중 가장 훌륭하고 놀라운 남자였답니다. 그러니 이 100 크로나는 아주 쌌지만, 제 인생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가치있는 투자였어요.

Since there are some of guests, who didn’t have enough time to get to know him well, I would like to introduce him a little bit. Maybe this proud introduction would be against Janteloven in Denmark, unwritten rule telling people not to be proud, but I would do it anyway as it is my wedding dinner. 🙂 Jens is an incredibly sweet, caring, loving, artistic, hard-working, good-looking, keeping house clean, intelligent, humorous, calm, relaxed, down-to-earth, humble, tall, lean, no-smoking, not-drinking-heavily man. I should cut it here, because it will take nearly this whole night to descibe good things about him.

He didn’t make me nervous by playing games, and has made me smile or laugh by sending me some witty SMS’es from the beginning. One day after our first date, he sent an SMS starting like this, “The rules said that guys should wait 2-3 days before contacting a girl for the next date, otherwise the guy would look too desperate. And I was desperate.”

옌스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간단히 소개해드릴께요. 이런 자랑스러운 소개를 하는 것이 자만하는 것을 금하는 덴마크의 얀테법에는 다소 어긋나겠지만, 오늘은 제 결혼파티날이니까요. 옌스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다정하고, 잘 챙기고, 사랑하며, 예술적이고, 근면하고, 잘생겼고, 집을 깨끗이 관리하고, 명석하고, 유머러스하고, 침착하고, 여유가 있으며, 현실적이고, 겸손하고, 키크고, 잘생겼으며, 담배도 안피우고 술도 과하게 마시지 않는 남자에요. 여기까지만 할께요. 옌스의 좋은 면을 다 설명하려다가는 오늘 밤이 다 가 버릴테니까요.

그는 한번도 밀당 게임을 하는 식으로 저를 불안하게 한 적이 없었고, 처음부터 아주 위트있는 메세지를 보내며 저를 미소짓거나 웃게 만들었죠. 첫 데이트 이후 바로 다음날, 그는 이렇게 시작하는 문자메세지를 보낸 적이 있어요. “데이팅 법칙에 따르면, 남자가 여자랑 다음 데이트를 정하기까지 2~3일은 기다려야 절박하게 보이지 않는다고들 하지요. 그런데 저는 절박했어요.”

Jens. Thank you for being you and being with me, accepting me as your life partner to spend the rest of our life together. Thank you for being patient. I still remember our first walk around our neighborhood, trying to talk only in Danish, though it was even before for me to have a proper Danish education. That one hour was incredibly long, mostly filled with Umm… Jeg… umm… You have been patient always to listen to what I was trying to say. It was not just my Danish. But my feelings, my ideas, how my life is in Denmark, how my study is. You have not just been my partner, but have also taken over the roles that my parents had taken for me, and have been so much more than I could have imagined what a partner could be like.

I love our childish moments and jokes, and our economists’ dance turning into judo or wrestling. I love our small rituals such as three kisses or kyskyskys. I will love you until we cannot properly walk, and until the only sports we could play together is balloon tennis at a nursing home. You will always have your husband’s rights to have massages every four hours as you demand. I will complain just a little bit like, saying okay, okay, okay. I love you. Jeg elsker dig.

옌스. 당신이어서, 나와 함께 해줘서, 나를 여생을 함께 보낼 인생의 반려자로 맞이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항상 인내심을 가져줘서 고마워요. 나는 아직도 덴마크어로만 말하며 걸었던, 우리 동네에서의 첫 산책을 기억해요. 그땐 아직 제대로된 덴마크어 수업을 받기도 전이었죠. 그 한 시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길었고, 대부분이 음. 나는. 음으로 채워졌었죠. 당신은 항상 내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듣기위해 인내심을 가져줬어요. 그건 단순히 덴마크어뿐 아니라, 내 감정, 생각, 덴마크에서 내 삶이 어떤지, 내 공부는 어떤지 말이죠. 당신은 단순히 내 파트너일 뿐 아니라, 내 부모님이 나에게 해주셨던 역할도 이어받았으며,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파트너란 어때야 하는 것인가 이상의 사람이 되어주었어요. 나는 우리의 유치한 순간과 농담들, 유도와 레슬링으로 바뀌곤 하는 우리 경제학자간의 춤을 사랑해요. 그리고 우리만의 삼세번의 키스와 같은 의식들도 사랑하죠. 나는 우리가 제대로 걸을 수 없을 때까지,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스포츠라곤 양로원에서 하는 풍선 테니스가 될 때까지 당신을 사랑할께요. 당신은 당신이 요구하는대로 매 네시간에 한번씩 마사지를 받을 수 있는 남편의 권리를 항상 가질 수 있으며, 나는 알았어요, 알았어요, 알았어요, 하는 작은 불평을 할 거에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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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are my king! 😀

Thank you so much mor og far for bringing up your son to this fantastic man and letting me be his life partner. And thank you also for being my another parents in Denmark. New family is a beautiful by-product of the marriage. I now have amazing family members on top of my loving family in Korea. Mor, far, Gry, Frederik and all the other family members, thank you for welcoming me to your family. I would be your another loving daughter and sister. Tusind tak!

어머님, 아버님, 당신의 아들을 지금의 아주 훌륭한 남자로 키워주셔서, 그리고 덴마크에서 제 또다른 부모님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로운 가족은 결혼의 아름다운 부산물이에요. 저는 한국의 제 사랑하는 가족에 더해 어머님, 아버님, 아가씨와 아주버님, 그리고 다른 친척까지 좋은 가족을 얻게 되었어요. 저를 가족의 일원으로 환영해주셔서 감사하고, 저 또한 사랑하는 딸과 여동생이 될께요.

I am happy to have my parents and aunt all the way from Korea, and Sunse and Dennis from Switzerland. Thank you for flying over to Denmark only to celebrate our wedding in this dready time of the year. This long distance sucks, but that does not mean that our distance in mind is also long. Even though I am away from you, and may not be in touch with you as frequent as before, I am caring and loving you my family and friends, missing you even more.

한국에서 여기까지 먼 길 와주신 부모님과 이모, 스위스에서 온 순재언니와 데니스 형부, 이 음울한 계절에 단지 제 결혼을 축하해주러 덴마크까지 먼길 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이 장거리는 참 몹쓸 것이지만, 그 거리가 마음의 거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에요. 멀리 떨어져있고, 그 전처럼 연락을 자주 하지는 못하더라도, 제가 여전히 제 가족과 친구를 사랑하고,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고, 오히려 더하답니다.

Sometimes, it feels like I am an undutiful daughter leaving my own country flying half way around the world in distance, not being able to be next to you mom and dad, but I know that you are happy for me that I met my Mr. Right, the perfect match and that you bless me and this marriage. Thank you for being my parents. You brought me up to have my life full of happiness, enlightened my life with your loving care, lessons of life and the education. You have been my mentors and you will always be. I will always dream, pursue, learn, love and be considerate or at least try to do or be so as you have taught me to. And I will be happy, I promise.

때로는 지구의 반바퀴를 날아와야 하는 곳에 떨어져있다는 사실이 제가 불효녀인 것처럼 느껴지게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운명의 짝을 만나게 된 것을 엄마 아빠가 누구보다 행복해하고 계심을, 저와 이 결혼을 축복해주심을 잘 알아요. 저의 부모님이어 주셔서 감사해요. 제 삶을 행복으로 가득하도록 저를 키워주셨고, 사랑과 삶의 교훈과 교육으로 제 삶을 밝혀주셨죠. 제 인생의 멘토가 되어주셨고, 앞으로도 계속 그리해주시겠죠. 저는 항상 꿈꾸고 그를 추구하며, 배우고, 사랑하고 배려하며 살께요. 그렇게 못되더라도 최소한 그리 노력하고 살께요. 그리고 항상 행복할께요. 약속해요.

제 긴 스피치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Thank you all for being patient to listen to my long speech.
Jeg elsker dig, skat.

대학원 첫 시험을 치르고

홀가분하다. 한 주 후에 다시 시작될 과목을 준비할 것을 생각하면 마냥 홀가분해할 수는 없겠지만, 이번 주말만큼은 친구들과 와인을 앞에 두고 시끌벅적 떠들고, 한국에서 오는 가족들과 상봉도 하고, 산책도 하며 마냥 즐기리라.

시험 전날부터 서서히 시험에 대한 무게가 어깨를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초조함. 시험기간이 되니 괜한 손톱만 괴롭히게된다. 오후 두시. 시험까지 23시간이 남았는데, 아직 미처 읽지 못한 챕터가 남아있고 작년과 제작년 시험문제는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했다. 제한된 시간 내 전체 이론을 충분히 숙지하고 시험을 볼 것이냐, 과년도 시험문제를 중심으로 공부할 것이냐로 고민을 하다가 이론 공부를 우선순위로 택했는데, 프로그램내 다른 학생들은 다들 과년도 시험문제를 푸는 것을 중심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남과 다른 선택을 할 때면 불안함이 엄습한다. 과연 내가 옳은 선택을 한 것인지 확신이 없기에. 그러나 그간 세번의 과제를 무리없이 제출했으니, 시험이라고 다를 바 있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 불안함을 가능한한 멀리 밀쳐둔다.

오전부터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으니, 잠시 산책도 하고 장도 봐오자 싶어 밖으로 나왔다. 오전내내 자욱했던 안개는 사라지고 축축하리만치 이슬이 잔디에 잔뜩 내려앉았다. 조금 걷고나니 신발이 다 젖어버렸다. 넓은 잔디에 사람은 없고 갈매기와 비둘기만 보인다. 바닷가라는 생각은 안하고 살지만, 사실 바다에서 매우 가까운 곳이라 나라 어디에서고 갈매기를 볼 수 있는데, 그게 아직까지도 나에겐 낯설고 신기하다. 아주 큰 갈매기는 거의 매같은 느낌이지만, 작은 갈매기는 다리도 가늘고 길쭉한 게 흰색 깃털로 빼입어 괜히 아는 채 하고 싶어진다.

우리 동네의 잔디밭은 매우 넓지만, 아파트로 잘 숨겨져있어 잘 보이지 않는다. 가장 넓은 쪽으로 걸어들어갔는데, 역시나 나밖에 없어 방해받을 게 없는 기분이다. 아차. 내가 거기에 있는 새들에게는 방해꾼이겠구나 싶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한국보다 위도가 높은 이곳에선 가을부터 해가 아주 낮게 누워서 지나간다. 두시면 해가 눈을 향해 바로 들어와 석양 직전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 때문에 겨울엔 햇볕을 쬐도 추위에 큰 도움이 안되는 듯 하지만 그래도 그 빛깔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시험기간이라고 안에만 처박혀있었더니 낙엽이 많이 져버렸다. 부모님이 오시면 그 끝자락 남은 것 보실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비바람이 남은 기간 남은 단풍을 다 쓸어가버리지 않기만을 빌어봤다. 덴마크에서 많이 보는 수종이 우리와 다른 것도 있고, 나이가 다르고, 가지치기를 하는 방식도 달라서 가로, 잔디밭, 숲에서 보는 상당수의 나무는 밑둥부터 아주 굵고 키가 아주 크거나 옆으로 넓게 퍼져있다. 그래서 잔디밭에 몇그루의 큰 나무가 낙엽을 소복히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녹색 위에 노랗고 빨간 빛깔이 켜켜이 내려앉아 한 폭의 그림과 같은 풍경을 그리곤 한다.

30분의 산책동안 신발은 흠뻑 젖었고, 스트레스로 인한 나의 흥분도 조금은 가라앉았다. 시험기간이라고 라면만 먹지 말고 좋은 음식도 먹어야 뇌도 활동하지, 시험 전엔 좋은 음식을 먹어야겠다 라는 생각으로 동네 수퍼마켓에 들러 특가 할인하는 쇠고기 스테이크를 사갖고 돌아왔다.

마지막 챕터는 가장 최근에 배운 것이고 수업 중 잘 이해를 했으니, 목차만 읽어보고 나머지 시간동안은 과년도 문제를 훑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한 시험세트당 4시간 분량이니 모두 샅샅이 보고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할 수 있는 것만큼만 하기로 했다. 저녁 9시, 더이상은 읽을 수가 없었다. 공부 더이상 못하겠다고 스트레스 받는다고 하자, 옌스는 어차피 지금 모르는 건 읽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거 없으니, 스스로 여태까지 해온 것을 믿고 푹 쉬라고 한다. 기억도 나지 않는 쓸데없는 농으로 나를 박장대소하게 했고, 그 덕에 나는 마음 편히 공부를 접을 수 있었다.

시험 당일, 4시간 동안 집중해서 문제를 풀어야 하니 공부는 안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챕터 소제목과 정리노트를 눈으로 가볍게 훑어내린 후 모든 것을 덮었다. 오픈북 시험이니만큼 관련 자료를 바리바리 쌓긴 했지만, 4시간 동안 약 30문제를 과연 얼마나 자료를 보고 쓸 수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도 몇번은 아주 요긴하게 활용할 거란 생각에 소중하게 챙겨뒀다.

컴퓨터 시험인데, 내 디지털 펜이 시험시간 5분전에서야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일부러 미리가서 다 세팅도 하고 준비했는데, 왜 펜 테스트는 안했지 하는 자책감도 들었지만, 컴퓨터를 리부팅하고 펜이 작동하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시험 폴더가 컴퓨터에 나타났다. 데이터와 배경 상황만 거의 반페이지가 넘는데, 난 반도 미처 못읽은 상황에 컴퓨터 타자소리가 홀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금방 타닥타닥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괜히 초조함만 가중되었다. 마침 갖고 온 귀마개가 생각나 이를 귀에 꼽고나니 소음이 가라앉으면서 마음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도 금방 시험에 몰입해들어갔다. 갖고 온 자료도 많이는 아니더라도 몇가지 공식과 가정 등을 확인하는 중요한 순간에 요긴하게 써먹었고, 내가 다 읽지 못한 챕터에서 많이 출제되었지만, 한문제 빼놓고는 무리없이 풀어냈다. 네시간 동안의 시험동안 대부분의 학생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문제를 푸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6시, 못풀었던 문제를 풀려고 하는 순간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닫힌다. 제출 버튼을 누르고 일어나니 각자의 얼굴에서 희비가 갈린다. 학생들 모두 나름의 기준과 기대를 갖고 오늘의 시험에 임했으리라. 누구는 통과만 하기를 바라며 본 사람도 있고, 누구는 좋은 성적을 받기를 바라며 본 사람도 있다. 어차피 성적이 앞날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에 점수에 일희일비할 것도 없지만, 혹시나 나중에 공부를 더하려고 하면 성적도 중요하니 초조한 마음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시험 전날 마지막까지 집중하지 못하는 나를 보고 실망스러움도 일면 들었으나, 그게 나인 것을 받아들여야지 어쩌나 하며 넘어갔다.

7시. 내가 제출했던 시험의 pdf 사본이 메일로 날아들었다. 어떻게 썼는지 읽어보려고 했지만, 집중도 되지 않아서 접어두었다. 혹여나 성적이 영 이상하면 그때 다시 열어나봐야지 하며 보관함으로 넘겨버렸다.

시험은 대충 잘 본 것 같다. 시작이 반이라는 마음으로 첫 스타트를 잘 끊어야겠다 싶어 더욱 열심히 했다. 혹여 결과야 어떻든 내가 그리 싫어했던 과목인 계량경제학을 스스로 만족할만큼 공부하고 이제는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매우 큰 수확을 했으니, 겸허히 받아들여야겠다.

오늘부터 주말은 (밀린 집안일 빼고) 자유다.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같은 분면의 개념이 아니다. 그런데 이 두 개념은 같이 따라다녀야 하는 개념으로 오랜 시간 이해해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들어와서도 내 머리속엔 그 두개의 개념이 혼재했으니 상당히 오랜시간 혼란을 겪었던 것이다. 일반사회를 선택했던 나에겐 정치에 대해서 제대로 배울 시간이 없었고, 대학교에 와서도 경제학과 경영학을 공부하며 정치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일이 없었다.

그나마 공부를 적당히 했던 나는, 내가 기득권층에 속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냥 보수쪽 입장을 취했다. 대학시절 이미 민주화가 충분히 될 만큼 되었는데도 여전히 민주화를 외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빨간색이라고 생각하면서.

태어나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우리 사회가 보다 민주화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표현을 할 수 있는 채널도 기술의 발전에 따라 확대되기도 하고. 그러나 공기업에서 근무하면서 정권의 변화에 따라 정치에 대해 이러저러한 말을 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자체 검열을 하며 일절 공개적으로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게되며, 표현의 자유가 과거에 비해 줄어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비판적으로 파란색을 띄고 있던 내가 중도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선거 때마다 내가 겪는 딜레마는, 이러한 나의 생각을 대변해주는 정당의 부재로 어디를 찍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데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의 이분화된 정당구조가 가져다준 딜레마였다.

이런 양당구조에 익숙해있다가 넓은 정치적 스펙트럼과 다양한 경제, 사회 정책믹스가 존재하는 사회민주주의 국가에 와서 살면서 느낀 것은 분배를 강조한다 하여 “사회를 전복하려는 의도를 가진 좌파”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이 나라가 아니라 다른 나라, 아주 빈국에 태어났어도 지금 갖고 있는 부와 성공을 누릴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사람이 누리고 있는 것은 그 사회가 가져다 준 것이기에 세금을 통해 소득을 재분배하는 것이다. 그 분배의 정도를 얼마로 할 것인가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나라의 분배시스템이 과연 사회에서 얼마나 합의가 된 것인가?

나는 한번도 비정규직이 되 본적이 없지만, 적지않은 비정규직을 채용하고 관리하며, 비정규직 법률은 당초 목적과는 달리 악용이 되고 있음을 피부로 느꼈고, 부당함이 사회에 만연하고 있음 또한 느꼈다. 내가 그들의 대척점에 서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구조상 그렇게 비춰질 수밖에 없었고, 나도 살기 빠듯하고, 공기업에 근무해서 정치적 색깔을 드러낼 수 없으니 그 부당함을 역설할 입장도 아니라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내 나라에서 나는 이제 중간에 서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이국땅, 덴마크에서 나는 상당히 오른쪽에 서있는 사람이다. 사회가 어떤 가치에 합의하고 있느냐에 따라 같은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 속한 사회에 따라 정치스펙트럼에 서있는 위치가 달라진다는 사실은 너무 당연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실제 경험할 때는 그 충격이 크게 다가온다. 최소한 나는 그랬다.

우리나라의 양당구조는 사회를 가르는 데 폭넓게 사용된다고 생각한다. 내 입장을 조금이나마 더 대변해주는 정당을 통해 정치성향이 대변되다보면, 이 당 아니면 저 당으로 소속이 바로 나뉜다. 사실 그 정당이 내 입장을 제대로 대변해 주는 것도 아니고, 상대도 같은 상황인데, 두 사람이 마치 큰 입장 차이를 가진 것처럼 양쪽으로 나뉜다.

나는 정당이 지금보다 많이 생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려 각자의 당이 각자의 색깔에 맞는 정책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너무 넓은 스펙트럼을 커버하기위해 우왕좌왕하며 이도저도 아닌 정책으로 지지자에게 호소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가 큰 나라는 아니지만, 이보다 작으면서도 성공적으로 다수의 정당을 운영하고 있는 나라가 많다. 이 사회가 너무 힘들어 헬조선을 외치는 사람들에게서도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이 나오기를 바라며,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해서 빨갱이나 종북좌파라는 딱지를 붙이지 않기를 바란다.

내나라를 떠나 이국에서 평생을 살게 될 나이지만, 앞으로 이곳에서 태어날 내 아이들이 엄마의 나라를 봤을 때, 다양성(“창조”가 인정되는)이 존중되는 사회로 인식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이는 내 결혼이 이미 한국에서는 표준에 벗어나 있고, 내 아이들은 단일민족이 아닌 두 민족이 만나서 생긴 아이일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고 마냥 믿기보다는 각자 행동해야 변한다는 사실, 씨앗을 뿌려야 열매가 맺는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식하고 조금씩이나마 각자의 영역에서 실천해나가기를 바란다.

이젠 정말 가족이다.

옌스네 조카 생일이 있어서 생일파티에 갔다. 작년부터 조카들 생일에 두번씩 갔으니 생일로는 6번 갔고, 기타 이래저래 간것까지 여동생네 집에 열번 이상은 간 것 같다. 항상 함박웃음을 띄는 가족들은 처음부터 나를 따스하게 맞아주었지만, 10명 이상이 모이면 간간히 대화가 덴마크어로 전환될 때도 있었고, 그럴때면 옌스만 바라보고 있기도 애매하고 뻘쭘하지 않은 듯 뻘쭘하게 있어야 했다. 꼭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만이 아니라 그들이 아무리 따뜻하게 대해줘도 친해지는데 걸리는 물리적 시간이 걸려서였을 것이다.

갈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편해지고 있음을 느끼긴 했지만, 오늘 처음으로 우리 가족 모임에 간것만큼 편하게 있다 왔다. 결혼을 통해 옌스의 여자친구가 아닌 아내가 되어서 그런지, 이모님네 가족과 옌스 사돈댁 어르신들 모두 그전보다 훨씬 편하게 대해주셨고, 조카들도 더이상 나를 어려워하지 않는다. 아직 모든 대화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간혹 상황을 놓치면 옌스에게 조금씩만 도움을 받으면 되니, 대화에서 소외되는 기분이 없어졌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긴장감도, 상황에 익숙해지고 나니 다 없어진 모양이다. 만날 때 이름을 꼭 불러주고, 대화 중간중간 이름을 불러가며 대화한다던가, 서로 안아주며 인사하는 방식, 어떤 타이밍에 뭘 하는지 등 소소한 것 같지만 모르면 약간 주춤하게 되는 것들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몸에 익었다.

내 마음안의 변화도 크게 한 몫을 한 것이리라. 예전엔 옌스의 여자친구의 입장에서 간 것이라면, 이제는 진짜 가족의 테두리 안에 들어선 입장으로 갔기에 보다 자연스러워져서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었을 게다.

무엇때문이든간에 덴마크에서 내가 잘 정착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해주는 가족들의 마음이 느껴져서 시댁에 놀러가는 일이 참 즐겁다. 시누이네 집에는 맨날 초대만 받아 놀러가서 미안한과 고마운 마음이 크다. 웨딩 디너로 드디어 그들을 우리가 초대하는 일이 생겨 마음이 조금이나마 놓인다.

우리 부모님이 멀리 사시기에 시댁과 친정간의 교류가 잦기 어렵다는 점은 시누이네 가족 행사때 자주 만나시는 그분들을 볼 때마다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이번 웨딩 디너로 만나서 인사도 하시고, 부모님이 덴마크에 놀러오실때나, 내후년 쯤 시부모님이 한국가실 때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아쉬운대로 자리를 마련해야겠다.

옌스의 총각파티 준비 에피소드

결혼은 했지만 가족, 친척, 친구를 대상으로 결혼을 알리는 정식 파티는 나의 대학원 일정 등의 문제로 1주간의 방학기간 중 하려고, 아직 하지 않았다. 파티를 2주도 채 남기지 않은 오늘, 남편의 친구들과 사촌이 총각파티를 해주기 위해 찾아왔다. 미리 신랑의 일정을 빈 일정을 확인하고 참석대상자의 연락처를 파악하는데 협조를 이미 요청해왔기에 총각파티를 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뭘 어떻게 할 지는 자세히 듣지 못했었다. 연락처 파악하느라, 한번도 한 적 없는 옌스의 핸드폰을 해킹할 수밖에 없었는데, 핸드폰 비밀번호는 서로 모르기에, 옌스가 청소기를 돌리던 중 핸드폰에서 문자를 확인하고 충전기에 꼽아둔 것을 화면이 잠기기 전에 얼른 빼내어 방에 들어가 전화번호부를 신속하게 뒤졌다. 원래는 하객 리스트의 이름을 갖고 덴마크 인터넷 전화번호부를 검색해 찾아보려 했는데, 다들 개인정보 보호차원에서 이름을 지워둔 탓에 실패했고, 항상 이메일을 로그아웃하는 치밀함 덕에 컴퓨터를 뒤지는 것도 소득없이 끝이 나버렸다. 옌스가 방문을 열고 청소하러 들어올까봐, 혹여나 중간에 핸드폰을 찾아헤맬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못 알아챈 듯 했다.

원래는 친구들이 토요일로 계획을 해두었기에 그 날 일정이 없도록 해두었으나, 가장 많은 사람이 되는 날에 잡으려다보니 갑자기 금요일로 일정을 바꾸면서 일이 살짝 꼬였다. 옌스는 금요일 수영을 가려고 했었고, 다음주말에 출장을 가야하는 일정상 이번 주말이 아니면 안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블록도 끝나고 시험까지 시간 조금 있으니, 수영 가지 말고 나랑 밖에 저녁먹으러 가자고 했는데, 나 때문에 일정을 바꾸라고 한 적이 없어서 혹시나 눈치챌까 신경이 쓰였다. 다행히도 아무런 의심없이 그렇게 하자고 했던 옌스는 오늘 오후 회사에서 퇴근하기 얼마 전, 빨리 퇴근하고 저녁 같이 먹고 주말을 즐기고 싶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아이고 미안해라.

샴페인 한병과 맥주 몇병, 과자 두봉지를 사갖고 온 옌스의 친구(또는 동료)들과 옌스와 참 닮은 옌스의 사촌 세명과 함께 옌스가 올 것을 기다리면서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남자들이 생각하는 숨막히는 여자상에 대해서도 듣고 (결혼을 앞둔 옌스를 위해 나에게 숨막히는 아내가 되지 말라는 조언. 동감하고, 또 그렇게 쓸데없는데 뺄 힘과 열정도 없다.) 나를 만난지 얼마 안되서 한 친구(이자 직장동료)에게 다가가, 이번엔 뭔가 다르다면서 옌스답지 않게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관계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옌스의 가족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도 듣게 되었다. 옌스가 나를 만나기 전보다 편안해지고, 안정되어 보인다고, 가족들도 함께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쉽게 가족처럼 녹아들어 나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안그래도 가깝게 느껴지던 시가족들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그 얘기를 듣고, 옌스의 다른 친구(이자 또 동료)가 “옌스가 당신을 만나고서는 예전보다 일찍 퇴근해요. 제일 늦게가던 옌스가 남들과 비슷한 시간에 퇴근하기도 하고, 주말 출근이 눈에 띄게 줄었어요. 가정적으로 변하는거죠.”라고 이야기해줬다. 정말 옌스의 주말 출근이 눈에 띄게 줄었다.

옌스 없이 옌스의 동료와 사촌과 대화를 한시간 반 가까이 하게되니, 그들이 보는, 내가 보지 못한, 회사에서의, 어린시절의 옌스에 대해 들을 수 있어서 참 좋더라. 항상 나에게 그는 “나는 똑똑한 사람은 아니고 그냥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누누히 이야기하지만, 내가 아는 그는 노력할 뿐 아니라 많이 알고 쌓아가는 사람이다. 회사 동료들은 그가 많은 것을 알고 경험도 풍부하지만 결코 그를 드러내지 않으며, 남이 조언을 구해서 이야기해줄 때, 자신이 아주 잘 알고 상대가 잘못하고 있는 것 아는 순간 조차도, “제가 이런이런 것을 해본 결과로는 이렇기에 당신이 한 것과는 다르네요. 이렇게 해보면서 어떤게 더 좋은 결과를 내는지 확인해보는 것은 어떨까요?”라고 물어보는 식으로 상대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 내가 아는 옌스와 같지만, 실례로서 일터에서 어떻게 일하는지 듣는 것은 또 다른 기분이었다.

그들이 한 말 중 내가 가장 동의하는 건, 그들이 본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옌스는 내가 본 중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에게 등을 돌리지 않을 사람이라는 확신을 주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을 배우자로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이 흘러 옌스가 도착할 쯤, 우리는 복도를 통해 공동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만 들리면 그게 옌스인지 아닌지 숨을 죽여 소리를 들었다. 퇴직 후 집에서 혼자 공부하던 6개월동안 옌스가 퇴근할 시간이 되면 거실 책상에 앉아 같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옌스가 열쇠를 따기 전 문을 열며 “Velkommen til!(환영합니다!)”를 외쳐온 나는 이제 소리만으로 그게 옌스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다. 조금만 소리를 듣고도, “아, 저건 옌스가 아니에요”라고 판단하는 나를 보고, 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침내 옌스가 집에 도착했을 땐, 평소와 다름없이 “Velkommen til!”로 맞이하며 3번의 키스(이건 한국식 삼세번을 가미한 우리만의 인사 의례이다. 한번은 섭섭하고, 두번은 정이 없으니…)로 그를 맞이했고,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그는 긴 한주가 마침내 끝났다며, 레드와인 한잔 마시면서 나랑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서 거실에 들어섰다.

이 무슨 황당한 상황인가 하는 황망한 표정의 그를 보며 그의 친구들이 그를 환영해주었고, 샴페인과 맥주를 들며 오늘 뭐할지 전혀 알지 못하는 옌스에게 괜한 공포심을 조성했다. 와인 테이스팅 하면서 이런저런 것을 할 것이라는데, 한명이 미리 레스토랑에 가서 준비를 하고 있단다. 어디로 갈 지, 뭘 할 지 전혀 모르는 옌스는 눈을 안대로 가리고 택시를 타고 떠났다. 옌스가 그렇게 긴장한 모습은 처음봤다. 지난번 다른 사촌 결혼식때나, 오늘 같이 온 친구 결혼식에 맞춰 했던 총각파티에서 부어라 마셔라 및 무지막지한 야외활동 등을 기억하니 긴장 되는가보다.

옌스가 새벽 언제 올지 모르니 나는 들어가서 자야겠다. 샴페인 두잔 마시고 약간 헤롱거려 공부하기 어려우니 저녁내내 딴짓만 많이 했다. 내일은 시험공부를 본격적으로 해야지.

블록 1 수업을 모두 끝내고 시험을 준비하며 쓰는 잡설

8주간의 수업을 끝으로 블록 1이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시험 뿐. 한 수업이 15ECTS의 큰 과목이라 이 과목은 다음 블록까지 진행되며, 시험은 맨 마지막에 한번만 있다. 학생들 입장에서 공부를 중간중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은 모두 통과해야만 시험을 치를 수 있는 과제가 학기 중 쉴 새 없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첫 3~4주를 보내고 나서 적당히 딴짓을 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긴 것은 첫째로 덴마크어 수업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기로 한 결정과 요령이 늘었기 때문이리라.

다음주 목요일에 있을 계량경제학 시험은 총 4시간에 걸쳐서 치르게 되는데, 인터넷만 사용할 수 없을 뿐 책과 노트, USB에 담은 파일 등 모든 자료를 다 가지고 들어갈 수 있다. 컴퓨터로 진행되는 시험이지만, 수식, 그래프 등 손으로 그리는 게 더 편한 것은 디지털 펜을 이용해서 쓸 수 있다. 시험 프로그램에 익숙해지게 하기 위해 열린 오픈하우스때 테스트해봤는데, 정말 훌륭한 펜이었다. 디지털 펜용 종이에 쓰고싶은 만큼 쓰고 나서 펜을 거치대에 꼽으면 바로 데이터가 컴퓨터로 전송되는 방식인데, 쉽게 캡처해서 워드파일에 옮길 수 있다.

학사때 시절이야 현대의 IT 발전 속도를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물던 시절이라고 해도 무방할만큼 오래된 일이니 비교해서도 안되겠지만, 불과 몇년전 석사때를 생각해봐도, 한국에서 시험이라 하면 극히 제한된 몇 개의 오픈북 시험과정 – 난 겪어본 적이 없지만, 그렇게 치른 친구들이 있었음을 기억할 뿐이다. – 을 제외하고는 펜만 달랑 들고가서, 정해진 1시간의 시간동안 문제를 읽고, 종이에 손가락과 팔뚝이 아플만큼 빠른 속도로 많은 양을 쏟아내고 오는 것이었다. 중간에 손이 너무 아파서 탁탁 털어가며 시험을 치른 것이 추억이라면 추억일까.

오픈북 시험이라 함은, 컨닝할 수 없는 시험이라는 것이고, 지식의 중요성은 암기가 아니라 논리적 추론능력에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의 제한이 있기에 뭐가 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 책을 찾아가면서 풀 수는 없다.

덴마크에서 시험이 갖는 의미는 우리나라나 미국에서 갖는 의미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학생들이 무엇을 모르는지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아는지, 어떻게 추론해 낼 수 있는지, 어디서 추론을 못하는지, 전반적으로 학생들이 부족한 부분은 무엇인지 등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다음번 강의에서 어떤 점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지를 파악해 내고, 그런 결과로 실제 작년 학생들과 우리는 약간 다른 커리큘럼으로 배울 수 있었다. 계량경제학 1을 배운지 오래된 학생들이 기본 가정에 약해 허덕이는 것을 보고, 첫 주는 전 과정의 복습으로 시작한 것인데, 엄청 빠른 속도에 다들 힘들어했지만, 중요한 기초가 되었고 대부분 이점에 동의했다.

물론 여기도 학점이 나오고, 이로써 학생들을 나래비 세운다. 다만, C에 해당하는 점수가 나오지 않은 경우는 총 2번의 재시험의 기회가 주어진다. 바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고, 다음 블록이 끝나고 주어지기에 추가로 공부할 수 있는 두달의 시간이 생기는 셈이다. 이런 학점은 PhD 등 후속 학업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중요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학점이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고, 영 준비가 안되었다 싶으면 포기하고 다음 시험을 치를 수 있기에 학생들이 성적을 낼 수 있도록 기회를 준다. (개인적으로는 다른 과목 공부하기도 바쁜 데 추가시험까지 치르긴 싫기에 죽이되든 밥이되든 그 학기에 끝을 보는게 더 좋다는 생각이지만, 개인적 사유로 그리 할 수 없는 경우라면, 이 제도가 숨통을 틔워줄 것이다.)

매 주 우리가 배울 내용이 무엇인지, 읽어와야 할 범위와 초점을 맞춰야 하는 부분, 수업 전에 알아두고 와야할 내용 등이 수업 전에 게시되고, 모듈이 바뀔때마다 배운 내용을 30분 정도를 할애해 복습하는 점, 학생들에게 “멍청한” 질문이 없음을 꾸준히 설파하고 질문을 장려하는 점,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변 중 부족한 부분은 추가 자료로 배포하는 등의 모습은 한국에서 공부한 16년 반 동안 한번도 겪어 본 적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교육시스템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동유럽 학교들도 우리처럼 교수의 지식 전달에 초점을 맞추는 모양이다. 그런 익숙함에서 벗어나, 교육 목표에 맞는 스스로 학습과 참여가 중요한 체제에 들어오는 것이 불편하거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학제는 안맞는 옷과 같다. 수업시간은 길지만 그 수업시간 중 연습시간이 차지하는 비중이 꽤 되기에, 배운 것을 실생활에 접목하는 실습을 어떻게 진행해야하는지 몰라 헤메는 사람들은 멍하게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또한 순수 강의 시간에 수업이 진행되는 속도는 빠르기에, 한번 놓치면 허덕이게 마련이고, 아예 포기하고 프로그램을 떠나는 사람도 적지만 있다.  모든 사람을 안고 갈수는 없지만, 최대한 많은 사람을 안고가려는 덴마크 교육시스템은 본인이 노력하고, 참여하면, 그만큼 얻어갈 수 있다. 그렇지만 떠먹여주는 것이 별로 없기에 떠다가 입에 넣어주는 학습방식에 익숙해져 있으면 초반 적응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이 나라의 교육도 요즘 많은 진통을 겪고 있다. 덴마크 정부가 교육예산을 대폭적으로 삭감하고, 교육개혁을 실시하면서, 학생들의 교육 선택의 자유도 예전보다 줄어들고 있으며, 인문학 등 투자대비 효과가 떨어지는 전공은 폐지의 길을 걷게 된다. 어제만 해도 시내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미래의 대학교육 수혜자가 될 중고등학교 학생들도 참여했는데, 우리나라 같으면 정학 등 여러가지 조치가 취해졌을 것이고, 교직원이 참여했으면 징계 처분 등이 있었을 것임을 생각해보면서 씁쓸한 생각도 들었다.

시험기간이 되니 또 이렇게 잠깐 딴짓을 하게 된다. 해야할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오히려 책상정리하고 방정리하는 것과 같은 일이랄까? 이제 일주일만 있으면 시험도 끝나있을 것이고, 부모님도 오실 거고, 또 한주가 지나면 내 웨딩디너파티가 열리겠지. 시간 참 잘 간다. 스피치 써야하는데, 반도 못썼다. 옌스는 뭘 썼을까? 부모님들은 어떤 것을 쓰셨을까? 그리고 앞으로 내 앞날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긴장도 되지만 설렌다. 스트레스를 받는 날도 있겠지만, 성취의 날도 있을 것이고. 공부를 하다보니 박사과정에도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졸업하고 취업의 길을 택할지 공부를 더하는 길을 택할지는 지금 생각하기엔 너무 이른 일이지만, 어떤 길을 택하더라도 옌스는 내 결정을 지지하겠다고 했으니 오롯이 앞으로 남은 기간 공부하면서 잘 생각해봐야겠다.

35년 수영불능자의 수영 강습기

옌스가 카약을 타기 시작한 것은 이제 거의 만 3년전 일이다. 클럽에서 카약 지도자 과정도 들으면서 주니어 강사로 봉사도 하고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덴마크어로만 진행되던 옌스네 클럽 과정이 올해부터는 영어로도 진행하기로 하면서 원하기만 한다면 들을 수 있는 여건은 형성되어 있다. 바다에 나가서 육지를 바라보는 일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일임은 배를 타고 나가서 봤기에 잘 알고있고, 파도가 거칠 때는 파도와 싸워 노를 져 가는 일이 긴장되지만 두근거리는 멋진 경험일 것이라 생각한다. 나도 진작에 올해부터 카약클럽에 가입하고 싶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수영. 나는 수영을 못한다. 바다의 수온이 한여름에도 20도를 넘지 않고, 봄이나 가을에는 5도 내외로 내려가기에 수영을 하기 위한 여건이 수영장보다 열악하기에 수영장에서 수영을 잘해도 추운 바다에서는 더 어렵게 마련이다. 따라서 카약을 홀로 타기 위해서는 600미터를 쉼 없이 수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지역 수영장의 초보자를 위한 코스는 항상 초과등록되어 있어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도 연락이 잘 오지 않고, 오더라도 주중 대낮 한가운데 시간이 잡혀있어 등록하지 못하곤 했었다. 알고 보니 대학내 스포츠 시설이 참 저렴하고 좋더라. 수영 초보자 코스도 충분한 인원을 수용할 수 있게 개설되어 있었고. 물공포증이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코스를 들어야 하는지, 그냥 초보자 코스를 들어야 하는지 고민을 하다가, 초보자 코스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선택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만해도 물이 무서워서 수영을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기에.

대학 수영장에는 다이빙 시설이 되어있는데, 그러다보니 물의 깊이가 일반 수영장보다 훨씬 깊다. 그쪽으로 수영을 하면서 깎아지르듯이 깊어지는 바닥을 보니, 갑자기 가슴이 턱 막히듯 답답해지면서, 그 정도는 크지 않아도 나에게 물공포증이 약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영을 잘 못하니 물이 무서운 것인지, 물이 무서워서 수영을 잘 못하는 것인지는 잘 몰라도 말이다.

어려서부터 그간 수영에 꾸준히 돈을 투자했지만, 자유형으로 10미터 이상을 제대로 가본 적이 없고, 수영 교육의 기초가 자유형에 있다보니 그를 통과하지 못한 나는 어떤 영법도 터득하지 못했다. 그냥 어쩌다보니 등으로 뜨는 것만 터득했을 뿐… 한두달 다니다 관두기를 여러차례, 항상 똑같은 자유형만 반복했는데, 강습의 순서는 어딜 가나 판에 박힌 듯 짜여져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달랐다. 우선 한명이 가르치는 수업과 달리, 학교에서 일주일에 한시간씩 배우는 수영코스는 한 명의 전문 코치와, 또 다른 한 명의 아마추어 코치가 짝을 이뤄 가르치고 있다. 덴마크어로 가르치면 나는 세세한 내용은 이해하지 못하기에, 외국인은 나 혼자 뿐이지만 영어로 수업이 진행된다. 제일 처음 한 것은 입을 벌리고 물에 입의 반 정도가 잠기게끔 한다음 숨을 쉬는 것. 입에 물이 있어도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항상 자유형 하면서 고개는 돌려도 숨을 쉬지 못한 이유는 입에 물이 있어서였는데, 입에 물이 있어도 숨을 쉴 수 있다니! 양치질을 하면서도 숨을 쉴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간 내가 얼마나 물을 무서워하면서 비이성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는지를 알아채며 깜짝 놀랐다.

수영에서 중요한 것은 물 속에서 몸의 균형을 잘 잡는 것이란다. 물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꽤 되자, 우선 배영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균형도 잡아야 하고, 두려움을 뚫고 숨도 쉬어야 한다면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없게 되니 방법을 바꾼 것 같다. 중간중간 사람들의 수준에 따라서 유연하게 과정의 구성을 바꿔주니 내가 이번에는 제대로 할 수 있으려나 하는 자기 불신을 뚫고 매주 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호흡의 리듬을 찾지 못해 중간에 차오르는 숨을 참지 못하고 나오는 사람들이 많자, 그 리듬을 찾게 하고자 물속에서 점프하면서 전진하는 식으로 수영은 하지 않고 숨의 리듬을 찾는 것만 집중하게 하였고, 기타 다양한 방법을 활용해 여러 항목에 조금씩 익숙해질 수 있도록 하였다.

지난 시간까지만 해도 배영을 하면서도 코를 통해 마시게 되는 물이 두려웠는데, 오늘부터 갑자기 배영이 편안해졌다. 그러나 지난시간까지도 자유형은 여전히 그놈의 숨을 쉴 때마다 물을 들이키게 되고, 그러다보면 두려움에 빠져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되곤 했었다.

결국 초급반에서 물을 두려워하고 숨을 잘 못쉬는 4명을 분리해서 얕은 풀에서 가르쳤다. 거기에는 나도 포함되었다. 물속에서 점프해 돌고래처럼 잠수해 바닥을 짚는 식의 트레이닝을 포함해 한국에서는 해본 적 없는 이러저러한 트레이닝을 시키는 대로 따라하다보니 얕은 풀에서 12미터 수영이 가능해진게 아닌가! 막판 5분을 남기고 다시 깊은 풀로 돌아가 25미터를 한번에 가는 연습을 했는데, 마지막 5미터 정도를 남기고 한번 일어났다. 20미터 가까이를 한번에 간 것이다. 내 개인 기록이고, 조금 자신이 붙기 시작한다.

흑. 이번 과정이 끝나고 나면 수영을 하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나면 꾸준히 수영하러 다녀야지… 조금 자신이 붙고 나니 수영이 재미있어진다.

사람은 꿈의 크기만큼 큰다.

사람은 꿈의 크기만큼 큰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신 이야기다. 앞글자 하나만 꺼내도 무슨 말씀 하실지 알만큼 반복되었던 이야기들은 잔소리같이 들려서 자꾸 듣기 싫었는데, 거의 세뇌라고 해야하려는지, 그 말들은 마음속과 머릿속에 새겨져서 지워지지 않는다. 각인이 될만큼 자주 하신 말씀들은 나의 삶의 앞길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언젠가는 책 한권을 쓰라는 말씀 – 아직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내지는 못했지만, 인생의 숙제와 같은 마음의 짐이다. – 을 포함해 몇가지 인생의 화두라며 던져주신 단어들. 또 말씀하시냐며 핀잔을 드리곤 했지만, 그 말씀이 옳으면서도 행하기 어려운 말씀이었기에 회피하고 싶어서 그랬던 듯 싶다.

내 꿈은 아직도 그 형상을 주무르고 있는 미완의 형태이기에 그 꿈만큼 컸다 아니다를 말하기엔 어렵지만, 그 꿈이 자라온 방향으로 나도 큰 틀에서는 자라가고 있는 것을 바라보기에 아버지의 말씀이 옳았다는 것을 느낀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나라이긴 했지만 덴마크에 와서 결혼을 하고 정착의 터를 닦고 있는 나를 보며 그 말씀의 힘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난 어려서부터 해외에서 살고 싶었다. 퇴사 후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난 한국 출장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어려서 해외에서 자란 자기는 항상 해외에서 정체성 고민을 많이 했기에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이 어려서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놀랍다고 했는데, 난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누가 뭐가 옳다 그르다는 것을 말해주기 전부터, 난 남녀 양성 불평등에 대해 아주 어려서부터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회사에서 사회인야구 감독을 맡고 계셨는데, 거기에 연년생 오빠를 데리고 가시기로 했었다. 한국 나이로 네살 때 이야기니 두돌 지나서 정도였던 것 같다. 그 장면은 나와 부모님 모두에게 매우 강한 인상을 남겨서 모두가 잘 기억하고 있는데, 왜 오빠는 데려가고 나는 데려가지 않느냐며 거의 지랄을 하다시피 울고불고 난리를 쳤었다. 엄마가 나를 안고 계셔서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나는데, 부모님은 얘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난리를 치나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나는 항상 오빠를 포함해 남자라는 대상과 꾸준히 경쟁을 했다. 엄마 친구의 자녀가 주로 아들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소꿉놀이보다는 공차기를 하고 놀았던 것이 그 대상이 남자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남녀의 역할을 어려서부터 구분짓는 것에 알게 모르게 반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알아주는 왈가닥이었던 나는, 항상 인기있고 이쁜 여자 친구들과는 스스로 비교가 되기도 해서 어차피 그들과 경쟁이 되지 않을 것 그냥 나 하던대로 하자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여성스럽고 싶은 마음과 그렇기 싫은 마음이 묘하게 섞여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던 것 같기도 하고.

중학교때 아버지가 에리카 김 – 지금은 BBK 사건의 김경준씨 누나라는 사실로 더 알려져있다. – 이라는 사람이 쓴 “나는 언제나 한국인”이라는 책을 사들고 오셨다. 명일동에서 살던 그 시절, 서재에 배를 깔고 누워 하루만에 그 책을 다 읽었고, 뭔가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만 해도 여권 갖고 있는 것이 흔치 않은 일이었고, 환전하나 하려해도 여권 뒷면에 환전필이라는 도장과 환전 금액을 적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해외에 다녀온 사촌의 이야기나 친구들의 말이 안 통해 어렵기도 했던 이야기나, 힘들었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바다 건너서 저 먼 땅에서의 미지의 삶이 궁금했고, 소설책에 그려진 다른 나라의 삶을 나도 겪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오히려 더 동경하게 되었다.

여성의 성공기를 다룬 그 책에서 나는 나를 그녀의 모습에 투영하며 해외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게 되었다. 경제학, 경영학을 공부해서 미국으로 유학가고, 거기에서 터를 잡겠다는 생각은 완전히 이뤄지지 않고 커가는 과정 중 방향을 달리 하게 되었지만, 조금은 늦은 지금 덴마크에 와서 유학을 하고 있으며, 터전을 일구게 된 것은 그 때의 씨앗이 싹을 튼 결과이렸다.

창밖을 내다보면 한국에서 보던 것과 다른 생경한 풍경에 간혹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어쩌다 여기에 와있게 되었나?

아무런 행동이 없는 꿈은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해외에 살고 싶은 마음에 해외에서 살 수 있는 직업을 모색하게 되어 이를 일차적으로 이루게 되었고, 이나라 저나라를 노마드처럼 떠도는 생활을 접고 정착하고 싶은 마음 속에 나의 인연을 만나 그 땅에 정착하게 되었다. 직업도 그 당시의 내 고민을 푸는 방식으로 이동하다보니 내가 원하는 일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고 원하는 방향을 찾아 공부하며 옳은 길을 택했다는 생각과 함께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다.

이윤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돈 놓고 돈 먹는 은행에서 일하며 금융권은 내가 일할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뭔가 공익적인 가치를 위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과 유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속에, 유학은 아니더라도 해외에서 살면서 공공의 목적을 위해 일하는 공기업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는 타인의 사업의 가교 역할을 하는 주변인의 역할은 부족하고, 내가 열심히 일해봐야 누군가 돈을 더 버는 일은 내 가슴을 뛰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KOTRA에서 일을 하며 신재생에너지, 환경산업에 대해 자주 관여를 하게 되었는데, 막연하게나마 ‘저런 일을 하면, 일 자체가 사회에 작든 크든 근본적으로 기여한다는 생각이 들어 보람이 들텐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너리즘과 직장내 인간관계 갈등 등으로 직장 생활에 본원적 갈등이 커지고 있던 즈음, 왜 내 마음을 뛰게 하는 일을 하지 않는가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 당시 남자친구에게 이런 생각에 대한 조언을 구하니, 나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고 했다.

어떤 일에 대한 중대한 결단이 필요할 때, 쉽게 용단을 내리는 결단력은 어머니의 성품을 닮았다. 여러가지 중대한 순간, 마음을 굳게 먹고 결정을 내리고 일을 추진하시던 어머니를 보면서 이를 나도 모르게 배웠거나, 그 피가 내 몸안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리라.

중요한 것은 내가 꿈을 꾸는 만큼 내가 자랄 수 있다는 것이다. 원대한 꿈을 꾸지 않는 나이기에 그만큼 자라고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절대 늦은 순간은 없다는 것, 내 마음을 뛰게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걸 위해 뭐라도 한다면, 설령 거기에 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은 짧다면 짧은 내 인생 35년의 경험을 통해 얻은 가르침이다.

다시 커리어를 쌓아가야 하는 나이지만, 돌아서 왔다는 생각은 지금도 없다. 정해진 길이 없는 넓은 땅에서 내 앞길 구불구불하게 닦아가며 즐거우면 즐거운대로, 힘들면 힘드는대로 걸어가는 것이다. 나처럼 늦은 나이에도 새로운 길 개척해나가는 모든 영혼에게 화이팅을 외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