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말의 의미

내 주변 친구들보다 연애에 호기심을 일찍부터 갖기 시작한 나는 은근히 말썽을 많이 부리는 아이였다. 딱히 불량한 것도 아니었지만 내 준거집단의 친구들에 비해서는 파격의 반항을 일삼았으니 말이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하이텔 채팅 한번 한 적 없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컴퓨터에 관심이 많은 연년생 오빠를 둔 덕에 하이텔과 같은 PC 통신 도입시점부터 채팅을 하면서 낯선 이들과 동호회 모임도 하는 등 공부 이외의 딴 짓을 많이 했었다. 연애도 마찬가지였다.

왈가닥으로 소문났던 나이기에 연애는 거리가 멀어보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어려서부터 난 이성을 좋아했다. 초등학교때는 반에서 똑똑하고 곱게 생긴 남자애들을 좋아했었는데, 그런 남자애들에겐 내가 딱히 어필하진 못했었던 것 같다. 아니면 걔들은 공부에만 관심이 있었거나 아직 너무 어려 연애에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중학교는 여중을 나왔기에 남자를 볼 수 있는 곳이라곤 학원밖에 없었는데, 거기서도 속으로만 홀로 좋아했던 아이가 있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방산중학교를 나왔던 것이 기억나는 거 보면 그 때 나름의 속앓이를 하긴 했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으로 보자면 과거의 이런 짝사랑은 공부 이외에 뭔가 발산할 곳이 필요했던 나의 딴 짓이었으리라.

외고를 다녔던 나는 정말 공부만 열심히 하는 바른 학생들로 촘촘히 둘러쌓여있었다. 아마 일반고였으면 나는 큰 문제아는 아니었겠지만, 외고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불량학생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지금의 내 생각으로 불량했다는 것은 아니고, 주변 친구들에게 나는 항상 일탈을 하는 친구였으니 말이다. 우리 학교엔 신문을 만드는 편집부, 방송을 하는 방송부, 그리고 선도부로 3개의 학생조직이 있었다. 나는 편집부에 속했는데, 딱히 다른 능력은 없었고, 집에서 채팅을 많이 한 덕에 빠른 타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내가 편집부에서 한 역할은 주로 타자 친 것밖에 없다. 그러나 역할은 별로 없어도 거기서 많은 일탈을 경험했는데, 연애도 그 중 하나였다.

대학교때부터 옌스를 만나기까지도 또 많은 연애를 했다. 몇 번 만나다만 사람부터 꽤나 많은 정이 들었던 사람까지하면, 연애 전문가에게 비교하면 발톱의 떼같은 경험이었겠지만 충분히 겪을만치 겪었다 할 정도의 수였다. 몇 번 만나면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한다는 우리네 연애문화 덕에 그 연애경험을 통해 나 또한 사랑한다는 말을 쉽게 내뱉어왔다. 그렇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제대로 알지 못해 항상 궁금해왔다.

한번은 상견례까지 한 사람이 있었다. 결혼에 대한 확신도 전혀 없었고, 내 나이는 만 나이로 25살이었으니 많이 어렸다. KOTRA를 다니면서 해외로 발령을 나가야하는 탓에 결혼 시기를 놓치면 결혼을 못할 수 있다는 경고를 주위에서 자주 들었고, 나도 조바심이 들었다. 남자친구는 나보다 5살이 많았고 결혼을 빨리 하고 싶어했다. 같은 직장을 다니다가 내가 이직을 하면서 불안했을지도 모르겠다. 결혼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온 그 해 신년을 알리는 보신각 타종을 들은 후 그가 빈 소원을 나에게 알려주었는데, 올해는 결혼이 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그 전부터 은근히 압력을 가하고 있었으나, 은근한 압력이기에 은근히 무시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급작스러운 폭탄발언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다들 그렇게 어하게 하는 거라고, 알 것 다 알면 결혼 못한다고, 결혼 하자는 사람 있을 때 하라고 했다. 그래서 양가 인사를 다녔는데, 영 불안했다. 뭔가 인사를 드리러 간 순간부터 더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미 결정한 일 무르기 어려울 것 같아서 상견례까지 했는데, 부모님이 상견례 이후 반대를 하셨다. 그 사람에 대한 사생활이므로 밝히긴 어렵지만, 내가 우려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하셨고 반대를 하신 것이다. 그간 쌓아온 정에 마음이 많이 아프긴 했지만, 1주일 후 나 또한 관계를 정리하기로 했다. 헤어지고도 그 정에 못이겨 몇번은 만나긴 했지만,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결정을 했다는 사실을 그가 이해한 이후 더이상 본 적은 없다.

결혼을 하기로 결심한 순간에도 사랑이라는 것을 난 모른다고 생각했고, 난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좋아하긴 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마음으로, 비록 취소하긴 했지만, 결혼을 결심했던 것이다.

책에서 읽는 위대한 사랑은 아니더라도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을 확신에 차서 할 수 있는 사람은 도대체 어떠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일까 하는 궁금함을 마음에 담아두고 살아왔다. 특히 서양에서는 love라는 말을 L-word라고 하여 남녀가 그 말을 꺼내기까지 오랫동안 뜸을 들이고, 그 말을 하고, 듣는 순간을 아주 특별하게 여기던데, 그 감정은 어떻게 정의하는지 궁금해졌다. 이런 궁금함은 나만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구글을 검색해보면 알 수 있다.

어느날 읽은 글에서 머리를 탁하고 치는 내용을 발견했다. 다음과 같은 세 문장으로 사랑의 단계를 요약한 것이다.

  • I am falling in love with you.(나는 당신과 사랑에 빠지고 있다.)
  • I am in love with you.(나는 당신과의 사랑에 빠져있다.)
  • I love you.(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마지막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전의 두 단계인 감정에 휩쓸리는 단계에서 상대를 사랑하는 행위의 단계로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내 의지로 당신을 사랑하겠다는 행위의 발로이기에 단순히 달뜨고 두근거리는 로맨틱함만의 감정이 아니라 달고 쓴 맛을 다 갖고 있을 앞으로의 시간을 포함해, 상대의 장점과 단점을 다 포용하며 사랑하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받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기로 했기에 사랑하는 것이며, 그 자체로 기쁜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생활에서 생기는 작은 일에 감사하고, 감사와 사랑은 표현하고, 갈등과 문제가 생기면 대화하고 풀어가게 된다.

이러한 사랑의 의미를 알고 난 뒤 옌스를 만나고 나니 지난 근 2년의 시간동안 작고 큰 어려움이 있어도 잘 헤쳐올 수 있었고, 자신이 힘들다는 이유로 상대에게 상채기를 내는 일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잘 지내올 수 있었다. 옌스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나를 사랑함을 알고 있기에 일말의 불안 없이 결혼을 결심할 수 있었다.

어느새 결혼한지 한달이 지났다. 이제 쇠털같이 많은 날을 함께 하면서 여러 일들을 많이 겪겠지. 어려운 순간이 오더라도 아무말 없이 큰 품에 안아주는 옌스와 함께라면 잘 헤쳐갈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든다.

코펜하겐 대학교 환경자원경제학 수학 중간소감 정리

블로그에 글을 쓴 지도 어느새 한달이 넘어간다. 주당 22시간의 학교수업과 7시간의 덴마크어 수업, 이에 따르는 숙제와 읽을거리, 프로젝트 등으로 인해 잠을 줄여도 모든 것을 할 수가 없는지라, 흐르는 것을 찬찬히 보고 정리할 시간이 없어졌다. 그저 흐르는 물결속에 방향을 잃지 않도록 균형만 잡고 가는 형국이다.

코펜하겐 대학교의 SCIENCE Faculty는 1년 2학기제가 아닌 4블록제를 택하고 있다. 겨울방학은 단 2주에 불과하고, 여름방학은 한국과 동일하다. 물론 지금과 같이 가을에 1주의 방학이 있고, 블록 사이 한주간의 방학이 있지만 그걸 다 합쳐도 한국의 방학엔 비할 수가 없고, 휴일도 부활절 주간 외엔 학기중 휴일도 없으니 학업 강도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우리 프로그램엔 2명의 덴마크인 외에는 나머지 18명이 외국인인데, 다들 덴마크 수업 방식에 상당히 놀랄 정도로 학업 강도가 세다.

학교마다, 단대마다, 프로그램마다 커리큘럼이 매우 다양하고 수업의 강도가 매우 다양하기에 이를 일반화해서 말할 수는 없지만, SCIENCE Faculty에 있는 다른 프로그램 친구들을 보면 대부분 강도높은 수업과 읽을 거리, 프로젝트에 스트레스를 크게 받고 있다. 실례로 내가 아는 사람만 두 명, 학업 스트레스로 인해 중도 하차했다. 이는 SCIENCE 단대에 많은 자원이 분배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고, 인문쪽 단대는 자원 부족으로 수업시수가 너무 부족해서 불만인 경우도 있다기에 불평은 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외부인으로서 다른 나의 관점이 2년의 학업을 통해 덴마크화되어 이 차이점을 느끼지 못하게 되기 전에, 첫번째 블록의 2/3가 끝난 이 시점에서 우리 프로그램에 대해 간단히 느낀 바를 정리해보려고 한다.

  • 주도적인 학습이 없으면 배울 수 없다.

첫 수업일로부터 한달 이전에 이미 읽을 거리와 교재목록, 수업일정이 배포되며, 읽을 거리를 다 읽어왔다는 가정 하에 수업이 진행된다. 한 블록에 한국 기준으로 6학점에 해당하는 과목 2개를 배우게 되기에 한 과목 당 한주에 배우는 양이 한국에서의 배가 된다. 논문을 포함해 읽을 거리를 인터넷으로 사전에 제공하기에 못찾아서 못읽어왔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또한 읽어왔다는 가정하에 수업이 빠르게 진행되고, 토론과 수업 내 프로젝트가 진행되기에 준비가 부족해지면 긴 수업시간이 다 낭비가 된다. 석사과정에 진학한 사람들은 학업에 뜻이 있어서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동기부여가 전반적으로 남달라, 다들 열심히 해온다.

  • 학업의 목표가 뚜렷하다.

전공 프로그램 및 각 과목별 학업 목표가 뚜렷하다. 따라서 학생들은 이 수업을 통해 자기가 얻어가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전체 프로그램을 통해 자기가 어떤 길을 갈 수 있는지 배울 수 있다. 수업 이외의 세미나 등을 통해, 아카데믹 라이팅, 프레젠테이션, 데이터베이스 서치 방법 등 학업을 위해 필요한 툴을 사용할 방법을 함께 배울 수 있다. 학생들이 학업 프로그램 중 길을 잃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꾸준한 정보와 교육이 주어진다. 한국에서 학사와 석사를 했었을 때 내가 다른 학생 또는 선배와의 교류를 통해 스스로 찾아서 나아가야 했던 길을, 이곳에서는 시스템을 통해 꾸준히 제공해주니, 이 툴을 사용해 보다 체계적으로 학업에 집중할 수 있다.

  • 교수과 학생간의 거리가 가깝고 교수의 수업 준비가 철저하다.

교수님을 그냥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처음엔 그리도 낯설더니만, 이제는 편하게 이름으로만 부를 수 있다. 많은 학생들이 이 부분을 놀라워한다. 수업에 질문을 적극적으로 하라고 꾸준히 유도하며, 질문에 명확한 답이 다 제공되지 않는 경우 별도로 연구해 답변을 제공한다. 또한 오래된 노트를 들고와서 수업을 하는 경우는 없다. 학생의 질문과 그 전 시간 진도, 학생들의 이해 수준 등에 따라 수업 슬라이드 변경, 추가자료 제공 등 피드백이 온오프라인을 통해 제공된다. 너무 많은게 제공되서 다 읽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어 마음이 불편해지는 경우는 있어도, 교수의 학업준비가 소홀하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다. 과제를 제출하고 나면 오래지 않아 교수가 항목 하나하나 검토해 구체적인 피드백을 제공한다. 그리고 교수 연구실로의 방문을 매우 장려한다.

  • 연습시간이 있어서 배운 내용을 수업 내 프로젝트를 통해 실생활에 적용하는 연습을 할 수 있다.

수업 시간 중 1/3은 연습에 할애된다. 교수는 학생의 질문에 답을 하면서 각 그룹의 수업내 프로젝트 수행을 돕는다.

  • 과제를 다 내고 통과해야만 시험을 치룰 수 있고, 과제를 다 통과한 사람은 대부분 시험에 합격한다.

대부분 한 과목당 과제가 2~3개 정도가 주어진다. 이 과제를 모두 제출해서 통과를 해야만 최종 시험을 치를 수 있다. 시험은 구두시험이 되는 경우도 있고, 필기시험이 되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시험은 모든 가용 자원을 활용해 풀 수 있게 되어있으나, 내용을 모르면 어차피 풀 수 없게 되어 있기에 컨닝은 있을 수가 없다. 과제를 통해 수업을 충분히 이해하고 가면 충분히 통과할 수 있다. 6주 동안 2~3개의 과제를 제출하기 위해서는 항상 한국에서의 중간/기말고사와 같은 긴장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기에 시험기간이라 특별히 난리칠 이유가 없다. 과제는 대부분 팀 과제 형태로 제출이 되기에 동료들끼리 돕는 문화가 형성된다. 혹여나 시험에 불합격할 경우, 한 학기 후와 또 한학기 후로 해서 2번 재시험 기회가 있다. 어떻게 해서든 학생들이 이해하고 통과를 하게 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주도적 학습이 없이는 통과하기 어렵기에 중도 탈락이 발생하지 않을 수가 없다.

  • 외부 시험 감독관이 동석해 평가하기에 교수가 학점 부여에 독점적 권한을 행사함으로써 발생하는 부작용이 줄어든다.

교수의 전권이라는 것은 없다. 외부 시험 감독관이 동석해 시험 채점을 함께 한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와서 채점을 하는 것이고, 시험의 장소도 학교가 아니라 외부의 장소가 되기도 하는 등 상당히 공정한 성과 평가가 이뤄진다.

대충 정리해보니 이정도인 것 같다. 전체적인 소감을 평가해보자면, 정말 만족스럽다. 예전에는 내가 이것을 배우면 과연 앞으로 이를 써먹고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 학사와 석사를 마쳤다면, 지금 생각으로는 이렇게 2년을 채우고 졸업하면 충분히 이 분야의 전문가로 나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회사 생활을 12년 넘게 하다가 학교로 돌아와, 따끈따끈한 지식으로 무장한 파릇파릇한 젊은 이들과 경쟁을 과연 할 수 있을까 엄청 긴장하고 왔는데, 공부에 꼭 때가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간만에 공부를 하는 나는 그들과 달리 학업에 대한 갈망이 있기에, 그리고 또 다른 경험을 토대로 이해의 폭이 넓어져 있기에 오히려 유리한 점도 있다. 그리고 몇년전 파트타임으로 야간에 다시 했던 석사과정 중 존경하는 이학배 교수님께 통계학에 대해 꽤나 탄탄한 기반을 쌓았고, 다시한번 경제수학과 미시경제를 공부하면서 오래되었던 지식에 기름칠을 조금이나마 했기에 이 모든게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여러모로 그간 이래저래 쌓아온 일들이 헛된 것은 없다는 생각에 지금 주어진 것도 열심히 하면 다 피가되고 살이될 것이라 생각한다. 늦깎이 공부가 부끄러울 것도 없으며, 늦은 것도 없다. 오히려 이 늦은 시기에 의식주 걱정 없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이 특권과 같은 것이라 생각하며 감사하고 축제처럼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항상 전문가가 되지 못한 것, 뭔가 내가 이 땅에 본질적인 측면에서 기여하지 못하는 것으로 많은 갈등을 해가며 지난 12년 직장생활을 해왔는데, 환경경제학자가 됨으로써 그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에 남은 2년 잘 해나갈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들기 시작한다. 이 초심을 앞으로도 이어갈 수 있기를…

학생으로서 새롭게 시작하는 인생 2막

나만은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았던 어린 시절 나의 기억은 여느 누구와 다를 바 없이 단편의 조각으로 토막나 그 중 아주 일부만이 남아있다. 그 일부 중 하나는 학교 가는 첫날이다. 부모님이 사주신 책가방을 몇번이고 만져보고 필통에서 연필과 지우개를 꺼냈다 넣었다 반복하며 등교할 첫날만을 얼마나 기다렸던지. 막상 내 등교 첫날의 기억은 혼돈이다. 입학 전 수시로 들락날락 거라며 놀았던 운동장에서 있을 입학식인지라 엄마는 혼자 가서도 잘 할거라고 생각해서 학교에 날 보내셨고, 어려서부터 독립심이 넘쳤던 나는 그런 상황에 더 신나 등교를 했었다. 하지만 대규모 인파가 몰린 곳에 혼자 가는 것은 처음이었던지라 맞는 반에 찾아가고 다른 학생과 줄을 맞춰 교실로 가는 것이 의외로 정신없었고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조차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다른 학생들이 엄마와 함께 있어서 더욱 위축되어 자신이 없어졌던 것도 같다. 다행히도 큰 문제는 없었고, 하교 길엔 항상 다니던 길로 잘 돌아왔던 것 같다. 사실 하교 길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 그 당시는 국민학교였다. – 입학 이후엔 입학이라는 일이 그렇게 설레는 일이 아니고 졸업이 큰 일이었다. 대학교 입학도 자유로운 세상이라는 생각에 설레긴 했지만, 계속 하던 공부를 더 하는 거라 그랬는지 크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처럼 새로운 학교에서의 공부라는 것이 쭈욱 아무런 감흥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일상적 일이었기에 대학원 입학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어제는 외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한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의 첫날이었다. 전날 저녁부터 가방을 싸고 아침 일찍 일어나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아 캠퍼스에 도착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때까지는 그냥 즐거운 하루의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그간 집에서 혼자 공부하며 지냈던 탓에 사람 냄새를 별로 못맡아 그런지 뭔가 어색한 듯 했지만, 금방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시작하며 어색함의 벽은 허물어졌다.

10시가 되어 사람들이 서서히 대강의실로 이동했고, 나도 그 무리의 꼬리를 밟고 거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강의실에 들어섰다. 연대 강의실은 별로 가파르지 않았기에 가파르게 설계된 강의실의 큰 규모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거의 마지막줄에 앉고 나니 큰 화면과 칠판, 앞을 메운 학생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아… 내가 정말 풀타임 학생이 되는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앞으로 덴마크에서 새롭게 꾸려갈 인생 2막이 시작된다는 생각이 들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오랜 기간 직장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느끼기 어려운 감정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이제 시작이다. 미래에 대한 고민은 꾸준히 해야겠지만, 지금은 그냥 이 순간에 집중하며 즐기고 열심히 공부하련다. 어린 학생들과 친구가 되고 경쟁도 하며 즐거운 2년의 시간을 꾸려갈 마음에 설렘과 걱정이 교차하지만 이 모든 것에 감사하다.

변화에 익숙해지기

손님을 집에 초대하는 일이 예전처럼 부담스럽지 않다. 손님을 초대하는 일이 왜 부담스러웠는가 곰곰히 생각을 해봤다. 결국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데, 무엇이 익숙하지 않았었나?

여러명을 위해 좁은 부엌에서 요리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부엌은 내가 가져본 것 중 가장 작다. 너비가 1미터도 안되는 공간을 활용해 4~5가지 메뉴를 준비하는 것이 힘들다. 그리고 조리법에 숙달되지 않았다. 한식을 준비하는 것은 주로 엄마가 하신 일이었고, 집에서 내가 한 요리라고는 쉬운 단품요리를 제외하고는 다 양식이었던 관계로 재료의 분량을 확인해가면서 만들어야 했다. 특히 한식은 양식과 달리 한상차림이기에 다수의 요리가 제 온도에 맞게 동시에 나가도록 하는 일은 상당히 머리가 아팠다. 좁은 부엌에서 이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상황을 더 복잡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손님맞이가 익숙하지 않았다. 손님을 집으로 초대해 본 경험이 별로 없었기에, 손님을 맞이하고, 요리가 완료되기 전까지 손님이 편하게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잘 모르니 마음이 불편했다. 특히 내 손님이 아니라 옌스의 손님으로 처음 만나는 사람을 맞이하는 것에서 더욱 불편함이 있었다.

무엇이든 자주 해봐야 는다고, 손님을 자주 맞이하다보니 여유가 생긴다. 여유가 생기니 또 초대하겠다는 마음도 먹게된다. 물론 손님 초대하는 일도 돈이 꽤 드는 일이라, 이번 달 손님을 너무 많이 초대했더니 생활비를 너무 많이 써버렸으니, 한동안은 초대는 자재해야겠지만 말이다.

현지에 영구 정착할 목적으로 삶을 셋팅하기 시작한지 이제 반년이 되었다. 이국땅에서, 학교가 시작하기 전까지 어디고 적을 두지 않는 생활을 처음으로 해보면서, 외로움도 느껴보았다. 그러나 이제 현지의 네트워크도 조금씩 구축되고, 말도 조금씩 늘기 시작해 주변인과 친밀도도 높아지면서 조금씩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이 들고 있는 요즘 여름도 막바지에 접어들어간다.

코트라를 다니며 해외 생활의 햇수가 늘어가면서 내 인간관계의 지형이 이미 많이 바뀌긴 했지만, 그곳을 떠나 현지에 정착하면서 그 모습은 더욱 크게 변할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하니까. 그래도 좋은 것은 오래 묵을 수록 좋은 것이니,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변함없이 더 좋을 것이고, 새로운 것은 더하면서 가꿔가면 된다. 정리되는 인간관계엔 서운해할 이유가 없다. 그건 상호작용에 의한 것이니 나에게도 책임이 절반이 있기 때문이고 결국 그 또한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반려를 얻게 되면서 생긴 여러가지 변화는 나에게 모두 중요하고 긍정적인 것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것도 여전히 있지만, 어색하고 힘들었던 손님초대가 반복되면서 즐겁고 익숙해지는 것처럼 내가 겪고 있는 이 모든 변화도 시간이 지나서 익숙해지면 유익할 뿐 아니라 즐거울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나의 첫 미국행과 그에 얽힌 기억들

나의 고등학교 단짝친구는 나의 직장 동료이기도 했다. 이제는 회사를 관뒀으니 더이상 직장 동료는 아니다. 회사 생활 중 힘든 상황이 있을 때나 좋은 일이 있을 때 누구보다 상황을 더 잘 이해해줄 수 있었던 친구다. 우린 비슷하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닮았다. 많은 어려움과 행복함을 나눴던지라 더욱 소중하고, 서로 배려하는 따뜻함이 항상 느껴지는 그녀다.

그녀가 워싱턴 D.C.에 있고 내가 뉴델리에 있던 2008년,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24시간을 날아 그녀를 방문했다. 알았어도 갔겠지만, 그렇게 오래 걸리는 지 잘 모르고 계획한 여행이었다. 비행기의 연발로 공항에 늦게 도착한 탓에 새벽같이 암스테르담에서 나를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던 동기를 만나지 못하고 – 아직도 너무나 미안한 기억이다. – 게이트 앞에서 연결편 비행기를 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 승객이 다른 이에게 비행시간을 물어보니, 8시간이라고 대답하는 걸 들었다. 정확한 시간을 모르니 알아두면 나쁠 것도 없겠다 싶어서였는데, 너무 놀라서 대화에 갑자기 끼어들고 말았다. “4시간이 아니라?” 너무 황당한 질문이라서 그랬는지,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일이 너무 바빠, 간신히 일 마무리하고 비행기 잡아 타느라, 비행시간을 자세히 확인할 여력이 없었다.”고 멋쩍게 답을 하고 내 자리로 돌아앉아 머리를 쥐뜯었던 기억이 난다.

어느새 5년이나 지난 기억이라, 그녀와 공항에서 어떻게 만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수선한 공항에서 공중전화를 찾아 그녀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해서 공항에서 잘 만났는데, 그게 나의 첫 미국방문이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간 것인지라 뭘 봐야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알아보지도 않았던 탓에 모든 것이 즉흥적이었다. D.C.에 둥지를 튼 친구 덕에 차로 뉴욕을 향했다. 그들은 2박을, 나는 3박을 했는데, 나는 하루를 더 묵고 열차를 타고 D.C.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돌아가는 길에 차에 문제가 생겨 새벽에 길 한복판에서 아기와 함께 세 식구가 덜덜 떨었다고 한다. 얼마나 춥고 걱정되었을지, 이 또한 첫 미국 여행에 얽힌 미안한 기억 중 하나이다.

많은 지구촌 여성들에게 그런 것처럼 나에게도 Sex and the City는 나에게 뉴욕 생활의 꿈을 그려줬던 드라마였다. 돈암동에 나가 혼자 살며 여의도 회사생활에 찌들린채로 MBA 가보겠다고 GMAT 책을 펴놓고 딴짓을 하던 나에게, 허황된 뉴욕에서의 – 가능하다면 월가에서의 – 삶을 꿈꾸게 해줬던 드라마였다. 결국 야근만 많이 하다가 이대로는 은행에 주저앉겠다 싶어 이직을 하고 MBA는 마음 구석 깊숙히 접어두었지만, 뉴욕에 대한 로망만은 마음 한구석에 항상 자리잡고 있었다.

그랬던 뉴욕에 가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Sex and the City의 Sarabeth에서 브런치를 먹게 되고, 뉴욕 공립도서관을 지나고 – 보지는 못했다. – 월가의 황소 뿔을 만져보게 되니 감격스러울 지경이었다. 로커펠러센터의 아이스링크를 저녁에 바라보니 내가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다만 인도에서 보던 릭샤가 뉴욕 타임스퀘어에서도 달리기 시작한 것을 보고, 잠시 잊고 싶었던 인도의 시간을 다시 떠올리게 되어 미간에 주름을 잡고 머리를 흔들며 이를 떨쳐내기도 했다.

뉴욕 공립도서관

그러나 사람은 역시나 현재의 노예임이 틀림없다. 인도에서 여러모로 치여살던 나에게 관광은 금방 사치가 되었고, 친구 부부가 D.C.로 떠나자마자 나는 쇼핑을 시작했다. 물건이 귀하고 같은 제품이면 높은 관세로 더 비싼 인도에서 살던 나에게, 세상의 물건이 집결하는 미국의 한복판은 쇼핑의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크리스마스 연휴를 앞두고 거대한 쇼핑장으로 변한 뉴욕에서, 준비없이 여행온 나는 그냥 물욕의 노예가 되어 옷가지를 주워담았다. 그때 산 옷과 신발을 7년이 다되가는 지금도 입고, 신고 있으니 완전 실패했던 쇼핑은 아니었다. 설마 이게 나의 마지막 뉴욕행이 되겠는가 하고 생각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올해 여름 다시 뉴욕을 가게 되었으니, 겨울과는 또 다른 얼굴의 그곳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새로 산 옷가지로 가득찬 무거운 트렁크를 낑낑대고 끌고 다니며, 부가세 환급을 위한 여러 절차까지 마친 나는 Penn station으로 가 D.C.로 갈 기차를 탔다. 준비없이 혼자하는 여행은 하루면 충분하다면서 자리에 앉았는데, 4명이 마주앉는 자리였다. 조금 있어 멀쑥하게 차려입은 두명의 남성이 앉아도 되냐길래, 그렇라고 하고 나는 곧 고개를 벽쪽으로 기대고 잠이 들었다. 덜컹임에 잠에서 깨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자기들 뭐 사마시려고 하는데 뭔가 필요하냐고 묻길래 괜찮다고 했다. 솔직히 낯선 사람을 믿고 살기 어려운 인도에서 6개월동안 치여온 나인지라, 낯선이를 믿을 용기가 없었기에 그렇게 답을 했다. 정말 괜찮냐면서, 뭐 사다주겠다고 하길래, 물을 마시겠노라 했다.  페트병에 담긴 물을 갖고 온, 멀쑥하게 입은 그들을 자세히 보니, 나에게 뭔가 사기를 칠 것 같이 생기진 않았다. 고급스러운 어휘와 유려한 말솜씨를 봐도 크게 걱정을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 고마워하며 마시기로 했다. 얼마냐고 하니 손사래를 치기에 굳이 어거지를 써가며 돈을 주지는 않기로 하고 지갑을 넣어두었다.

필라델피아 소재 로펌에 근무하는 그들은 업무 회의차 뉴욕에 들렀다가 집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한명은 딸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아직도 사지 못했다면서 크리스마스 직전까지 일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라고 했고, 다른 한명은 약혼녀를 크리스마스 쇼핑에 홀로 내보냈다며 구박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어디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려고 여행하는 길인지 물었다. 그 날이 아마 이브날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때까지 일을 하다니, 역시 로펌이라는 생각에 웃음이 샜다.

어쩌다 대화가 그렇게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그 당시 미국에서 매우 인기가 높았고, 나도 좋아했던 The Grey’s Anatomy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면서 중요한 남성 캐릭터였던 McDreamy와 McSteamy중 누가 나의 남성상이냐는 질문에 뭐가 좋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했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다면서 30초 안에 고르라고 재촉을 하길래 McDreamy를 골랐던 기억이 난다. 그 답에 그가 놀라했던 기억이 나는데, 왜 놀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런 저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덕분에 아주 유쾌한 시간을 보냈는데, 그들이 필라델피아에서 내릴 때 아쉬울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즐거운 기억이다. 그간 낯선이와 대화가 그리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껏 이렇게 자세히 기억이 나는 모양이다.

친구네 집에서 친구네 가족과 크리스마스를 보낸 것도 처음이었다. 미국 여행은 참으로 많은 첫기억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그 기억의 순간을 나의 소중한 그녀와 함께할 수 있어 기뻤다. 월마트에서 끝도 없이 진열되어 있는 상품의 종류와 양에 기함을 했던 것이나 돌아오는 편에 이민가방을 가득채워 화물을 싣는 과정에 중량 문제로 고생을 한 것, 공항에서 짐을 스캐닝하는 과정에 내 짐에 있는 햄을 보고 공항직원이 박장대소하는 것에 쑥쓰러워했던 것, 미국에서 사온 네스프레소를 인도에서 사용하자마자 전압이 맞지 않아 바로 퓨즈가 날아간 것 등 무수히 많은 소소한 기억들. 순간순간에는 여러가지 감정이 섞였겠지만, 지금 뒤돌아 시간을 되짚어보면 그냥 다 즐겁고 웃음이 나는 작은 기억의 파편들이다.

올해 미국을 방문하면 그녀는 그곳에 있지 않다. 지금은 먼 싱가포르에 있어 과연 언제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항상 내 마음속에 있고 언제고 마음 먹으면 방문할 수 있고, 기술이 우리를 이렇든 저렇든 마음을 전할 수 있게 연결해주기에 서운하지만은 않다. 대신 또다른 친구가 그곳에 있기에 그녀와 다른 추억을 쌓아올 수 있을 것이다.

어제 카톡으로 그녀와 잠깐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한시간도 넘게 이야기를 했다. 마음의 크기만큼 시간은 빠르게 흐르는 것 같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가 피부로 느껴지는 대화시간이다. 잠깐의 대화를 통해 마음 한구석 장롱 한구석에 보관해두었던 추억 한보따리를 꺼내 열어보게 되니 기분이 좋다. 벌써 20년지기 친구이니, 우리가 몰랐던 시간보다 알고지낸 시간이 이제는 더 많아졌다. 그런 친구를 내 마음속에 두고, 그 친구의 마음속에 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렇게 있어줄 수 있었던 그녀가 소중하고 고맙다.

덴마크식 불혹의 생일파티와 초대받은 이방인

어제는 동갑내기 커플의 40번째 생일파티날이었다. 그들은 옌스의 여동생인 그뤼와 그의 남편 프레데릭. 사실 이미 지난 생일이었지만, 그들은 날 좋은 여름에 손님을 집 정원으로 초대해 파티를 하려고 오래전부터 이날을 정해 알려왔다. 덴마크에서 0으로 끝나는 생일은 크게 하지만, 40은 특별히 더 크게 한다. Fyrre(40), fed(fat) og færdig(done). 중년으로 들어서는 전환점이기 때문이다.

‘선물 사야하는데…’를 한달쯤 되뇌이다가 파티 당일이 되어서야나 샀다. 좋은 와인 두병. 그 집에 가면 항상 좋은 와인을 마시곤 했기에, 이런 와인은 소스용으로 쓰이는 거 아니냐면서 농을 주고 받았는데, 실제 소스용으로 쓰기에 좋은 것으로 준비했다고 축하카드에 남겼다는 그. 카드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항상 자신만의 스타일로 위트있는 멘트가 곁들여진 카드를 멋들어지게 만드는 그이기에, 그 집으로 가는 열차안에서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웃음이 피식 나왔다.

홀터(Holte)는 올때마다 느끼지만 좋은 동네다. 한적한 느낌과 함께 아름다운 호수를 중심으로 집들이 늘어서있다. 이런 동네에서는 어느 당이 뽑혔을 지 궁금하다. 집들 사이로 경탄할만한 호수의 풍경이 보이곤 한다. 위치가 아주 좋다. 이런 좋은 동네 살려면 둘다 좋은 직장에서 일해야나 한다기에,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직장 갖도록 노력하겠다고 이야기했다가, 지금 당장 계량경제부터 열심히 공부하라는 이야기에 괜히 본전도 못찾았다. 나름 하고 있다고, 진도가 안나가고 있어서 그렇지 라면서 괜히 항변했지만, 나도 열심히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수능 공부도 80일전부터 한 나였는데, 합격도 다 한 학교에 한참 전부터 여유있게 미리 리뷰를 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가!”라고 외치고 싶지만, 세상은 열심히 하는 자의 몫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냥 또 반성을 할 뿐이다.

열차에서 내려 20분을 걸어 장소에 도착했다. 하이힐로 갈아신고 정원으로 들어가니, 아이들의 장난감이 흩어져있던 놀이터같던 정원이 훌륭한 가든파티 장소로 변신해 있었다. 야외결혼식을 해도 되겠다 하는 생각도 들 정도 였는데, 반대로 이걸 준비하려면 얼마나 고생했어야 했을지 짐작이 갔다.

넓은 장소가 금방 가득찬다. 사람들과 소개를 하고 악수를 나눈다. 이미 여러차례 만난 사람과는 반가움을 포옹으로 나눈다. 이젠 이 인사가 어색하지 않지만 많은 사람과 인사를 하다보면 얼굴 근육에 경련이 날 것 같다. 서양 영화배우 중에 인터뷰하는 도중 시종일관 환한 미소를 띄는 사람들이 있는데,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역시나 외국인은 나 한사람이다. 일부러 생각하려 한 건 아닌데, 바에서 칵테일을 주문하는 데 바텐더가 외국인이냐고 물어보며 대화를 잠깐 하다보니 그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내가 인사한 사람 모두가 덴마크인이었다는 사실을. 누가 차별하는 것도 아니지만, 차이를 인식하는 순간 때로는 피로감이 몰려오곤한다. 이런 쓸데 없는 생각하지 말자고 고개를 잠시 흔들고는 다시 원자리로 돌아온다.

음식을 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는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름 따위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상대도 마찬가지에다가, 이름을 기억하리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야기하다가 자리를 뜰 때 실례하겠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다. 나라마다 상황별 에티켓이 다른데, 이것을 책으로 배울 수는 없다. 우리가 매너라고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관습이니, 나는 걸음마를 처음 떼는 아이처럼 하나 하나씩 눈치로 배워가야 한다. 그리고 그게 맞는지는 주변에 나중에 물어봐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이것을 힘들다고 징징대봐야 소용이 없기에 때로는 피곤하고 힘들지만 익혀나간다. 10년정도 지나면 반대로 한국으로 여행갈 때 큰 문화적 충격을 느낄 것 같다. 매년 한번씩 간다해도 그 충격은 피할 수 없을 것임을 이미 안다.

덴마크인들은 직설적이다. 직설적임의 차이야 사람마다 편차가 크기는 하지만, 사회의 직설적임을 측정할 수 있어서 평균값을 낼 수 있다면, 덴마크인의 직설적임은 전세계적으로도 상위에 놓일 것이라 자신한다. 인도에서도 사람들이 직설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법적으로는 폐지된 카스트제도가 현실적으로 아직도 남아있는 그들에게는 카스트라던가 사회속에 내재된 차별에 대해서는 터부가 존재했다. 그렇지만 덴마크에서는 과연 성역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직설적이다. 일을 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면 왜 일을 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는게 그들이다. 한국이었으면, 본인이 뭐라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다 싶어서, 계면쩍은 표정과 함께 화제를 얼른 돌리겠지만, 이들에겐 그런 것이 없다.

테이블에 앉아 타코를 먹으며 옆에 앉은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테이블 반대 끝편에서 나를 부른다. 옌스와 그뤼와 함께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함께 학교를 다녔다는 여자다.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엉뚱함이 느껴졌는데, 시끄러운 음악을 뚫고 큰 목소리로, 내가 뭘 하는지 묻는다. 테이블을 가로질러 묻는 질문에 모두 나를 쳐다본다. 현재 일을 하지 않고 있고, 9월부터 공부를 할 것이라고, 무슨 공부를 할 것인지 답을 해 주었다. 왜 관뒀는지를 묻는다. 언젠가 관두고 여기서 정착할 것이라면 한살이라도 어릴 때 다시 공부를 시작해서 현지에 정착할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렇다고 답을 하니, 더이상 묻지는 않는다. 나에게 악의를 품고 한 질문이 아니기에 그냥 사실을 이야기 해주지만, 이곳의 문화적 맥락을 모르면 약간은 취조당하는 느낌이 들 수 있다.

한달에 한번이면 충분히 많은 파티를 이주 연속으로 가게 되어 이미 피로도가 높았지만, 파티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건 옌스도 마찬가지고, 어딜 가든 대부분이 가족 동반인 이 곳에선 일종의 책무이기도 하니, 간 김에 즐기는게 최상이다. 최소한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사람 구경이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 했던가.

그뤼 프레데릭 생일

시침이 10을 넘기면서 그뤼가 다가와, 이제 춤을 즐기라고 권유한다. 모두가 자리를 일어나 텐트 안으로 자리를 옮긴다. 안쪽 소파에 담요하나가 보인다. 냉큼 무릎에 덮고 자리를 챙겨 앉으니, 인사만 한번 나눴던 한 여자가 나와서 춤을 추라고 이끈다. 한번 사양했는데도 나오라 하니 거절하기가 어렵다. 기럭지가 긴 옌스가 몸을 흔들고 있는 것을 보면 즐거움에 웃음이 나와 은근 춤출 맛이 난다. 고관절만 괜찮으면 몇곡도 추겠는데, 하이힐을 신고 한곡을 추지 벌써 관절에 신호가 온다. 인근 인대에 생긴 염증이 낫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데, 나 때문에 옆에서 앉아있는 거 아닌가 싶은 마음에, 이야기 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가서 이야기하고 오라고 부추겼다. 그러나 친한 사람과의 유쾌한 대화의 만찬파티나 좋아하는 게으른 우리 둘은 다행히도 죽이 잘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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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갑자기 바뀐다. 그래도 슬로우 댄스 한곡은 춰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손을 이끄는데, 그 말이 맞다 싶어 춤을 춘다. 집 밖에서 제대로 춘 내 생애 첫 슬로우 댄스. 집에서 옌스 발을 많이 밟으면서 춰본 경력으로 발 안밟고, 휘청거리지도 않고 잘 췄다. 우린 집에서 그렇게 춤을 추다가 옌스가 유도 실력을 발휘해 나를 간혹 들쳐업곤 하는데, 제 버릇 남 못준다고, 노래가 끝나자 나를 등에 들쳐업는다. 그런 유치함이 좋은 것은 내가 유치해서인지, 아니면 사랑의 힘인지 나도 모르겠다. 이런 유치함이 60이 되어도 남아있었으면 하는 것은 소녀의 감수성은 아닌 것 같고, 내 안에 남아있는 어린이의 동심인 것 같다.

모든 칵테일도 마셔보고, 저녁도 먹고, 떠들고, 춤도 췄으니 집에 갈 시간이 된 것 같다. 아마 사람들은 새벽 4시까지도 놀았겠지만, 12시를 넘기면 우리는 서서히 갈 준비를 한다. 이런 때에는 한국어로 대화한다. “우리 언제 가요?” 항상 물어보는 것은 나… 답은 셋중의 하나다. “나중에, 곧, 지금” 곧 가자는 말에 이제 집에 가겠구나 싶어 신이난다. 택시를 부르고 호스트에게 인사를 한다. 뻑적지근한 생일파티 초대에 감사를 표하며, 휴가 갔다와서 보기로 한다.

차로 10분이면 가는 집이지만, 요금은 300 크로나. 6만원 한다. 이젠 그럼에도 불구하고 택시를 타면서 새삼스레 놀라지 않는 것을 보면 많이 익숙해졌음을 느낀다. 다음에 한국가서 택시 요금을 보면 반대로 놀라겠지. 이렇게 싸다니 하면서…

빨아놓고 널지 않은 수건이 있음이 기억나 피곤에 쩔어 수건을 널더라도, 곧 잘 수 있는 침대가 놓여 있고, 나의 흐트러진 모습을 편히 내 보일 수 있는 이 곳이 바로 내 집이다. 밖에 나가 내가 이방인임을 느끼게 되더라도 저녁에 돌아오면 이방인이 아닌 이 곳이 내 집이다. 간혹 내가 뭐라 해도 다 받아 줄 부모님이 바로 내 곁에 안계시긴 하지만, 그 역할을 앞으로 대신 해 줄 옌스가 있는 이 곳이 내 집이다. 그걸 이제 서서히 받아들이게 된다. 내 집이 속한 이 땅이 앞으로 또 하나의 내 나라가 될 것이고 내 아이의 나라가 될 것이기에 혹은 힘들더라도 받아들이고 품을 수 있다. 그렇게 사는 게 이민자의 마음이다.

예상과 다른 결과로 전국을 흔든 2015년 덴마크 총선 결과

정당별 정책 비교는 한국어로까지 번역하기에 시간이 너무 부족해 포기하고, 총선 결과만 포스팅한다.

이번 덴마크 총선은 뻔한 전개대로 흘러갈 것이라는 많은 이들의 예상과 함께 지루하다는 평을 받아왔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의외의 변수 하나가 전체 선거판을 흔들며 많은 이를 깜짝 놀라게 했다. 대통령제를 채택하는 우리나라는 정부의 구성이 대선을 통해 명료하게 이뤄지기 때문에, 총선이 끝나도 불확실성이 많이 남은 현재의 상황이 매우 놀랍고 재미있다.

< 총선 결과 요약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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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덴마크 국영방송(Danmark Radio, http://www.dr.dk)
주: 선거율 85.8%

이번 총선의 최대 관전 포인트는 노란색으로 표시된 덴마크 국민당(Dansk Folkeparti)의 약진이다. 사회민주당(Socialdemokraterne)와 자유당(Venstre)의 경쟁속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제 3자가 어부지리로 물고기를 낚은 격이다. 덴마크 국민당은 지난 총선대비 8.8% 늘어난 표심을 확보함으로써 여야 교체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난 연정의 책임정당인 사회민주당(Socialdemokraterne) 수장 헬레 토닝 슈미트(Helle Thorning Schmidt) 총리는 소속정당이 지난 선거보다 1.5% 늘어난 표심을 확보하며 선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색블록이 패배한데 따른 책임을 지겠다고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정권 교체가 되어도 꿋꿋이 버티는 라스무슨은 뚝심(?)의 사나이다. 당은 패배했어도 본인은 총리를 하니 일신상의 성과상으로는 분명히 성과다.) 

지난번 포스트에 쓴 것과 같이 덴마크는 정당의 전반적 성향을 기준으로 청색블록과 적색블록으로 구분된다. 바로 이 블록별 총 의석수를 기준으로 어떤 색깔의 블록이 정부를 구성할 것인지가 결정된다. 그러나 이것이 선거에 승리한 블록 내에서 최다 의석수를 확보한 정당이 정부구성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구성에 참여함으로써 책임정당이 된 다는 것은 국정을 잘 이끌어나가야 하기에 때로는 당의 입장만을 적극적으로 내세울 수 없어져 꼭 좋기만 한 것이 아니다.

정부구성에 참여하지 않고 제 2 정당의 위치를 가져갈 수 있다면, 정부와 다른 목소리를 내며 정당의 색깔을 드러내기가 용이하며, 정부를 압박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내기가 용이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처럼 방탄 및 식물국회로 끌어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말이다.

< 청색 블록의 승리와 그에 따른 여야교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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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덴마크 국영방송(Danmark Radio, http://www.dr.dk)

이에 따라 덴마크 국민당이 연정구성에 참여할 지는 아직까지 물음표이다. 실제로 덴마크 국민당은 현재 정부 구성에 있어 망설이며 유보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여러가지 이해득실을 따져 결정을 내릴 것이라 그런지, 덴마크 국민당(Dansk Folkeparti)의 대표인 크리스챤 툴러슨 달(Kristian Thulesen Dahl)은 정부 구성에 대한 견해를 묻는 인터뷰에서, “재미있는 대화가 될 것 같다.”는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런 연유로 지지난 총선으로 구성된 정부의 총리직을 수행했고, 덴마크 자유당(좌파당은 덴마크어 당명 Venstre의 의미로, 영어로는 자유당이라는 의미의 Denmark’s Liberal Party로 표기한다.)이 정부 구성을 이끌며, 그 당의 대표인 라스 뢰게 라스무슨(Lars Løkke Rasmussen, 우리나라에서는 라스무슨으로 자주 언급되나, 덴마크에선 중간이름인 그를 주로 뢰게로 칭한다.)이 총리를 맡을 것이 가장 유력한 안으로 점쳐지고 있다.

총리로 인준되는 것이 달가우면서도 달가울 수 없는 것이, 이번 자유당은 선거에서 참담하게 패했기 때문이다. 참담하게 패한 정당의 대표가 총리직을 수행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것이 이번 선거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총리를 맡을 라스무슨은 우리나라에 설립된 국제기구인 글로벌 녹색성장연구소(GGGI; Global Green Growth Institute)의 의장직을 수행하면서 일등석 항공기를 타고 여행한 것이 문제가 되었고(관련 주간경향 기사 링크), 기타 정당 자금으로 속옷을 값비싼 속옷을 사입는 것이 적절하냐를 두고 속옷 스캔들이 터지며 그의 윤리성이 도마에 오른 바 있다. 당시만 해도 집권정당과 헬레 토닝 슈미트 총리에 대한 지지도 하락으로 조기총선이 실시되느냐 마느냐를 두고 계속 설왕설래하고 있던 타이밍이었던지라, 라스무슨의 차기 정권 승리가 예상되고 있던 타이밍이었는데, 청렴도를 매우 중시하는 덴마크에서 그의 속옷 스캔들의 타격은 컸다. (아래 신문 만평에 뢰게 효과라는 제목으로, 현 총리가 라스무슨의 얼굴을 사람들이 많이 볼 수록 자유당 지지율이 떨어질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자당 청년지부에 라스무슨 선거유세 포스터를 붙이라고 지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가 법을 어긴 것은 아니지만, 평등을 중시하는 덴마크인들에게 그의 행동은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 뢰게 효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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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종합일간지 Berlingske 신문 만평(2015. 6. 12.)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정부구성에 대해 살펴보자. 국민당(Dansk Folkeparti)이 단독으로 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기에 이는 거론되는 대안에 포함되지조차 않고 있다.(아래 그래프와 같이 국민당은 청색블록 안에서도 상당히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어 국민당 입지가 강하지 않다.) 아직까지 정부 구성이 자유당(Venstre) 단독, 자유당과 국민당(Dansk Folkeparti) 연정, 또는 자유당과 청색 블록내 3대 정당인 자유연합당(Liberal Alliance) 연정으로 구성될지를 논하기엔 이르다. 그러나 자유당이 국민당을 배제하고 정부구성을 할 경우, 향후 국정 운영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고 있기에 라스무슨은 국민당을 연정파트너로 영입하고자 노력할 것이 쉽사리 점쳐지고 있다.

< 덴마크 주요 정당별 정치성향 스펙트럼 >

덴마크정치성향분면

덴마크 국민당은(Dansk Folkeparti)은 지난번 포스트에 기재한 바와 같이 청색블록에서도 가장 우측에 서있는 정당이다. 그러나 경제분배적 측면에서 보면 위의 그래프에서 보다시피 청색블록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성향을 띄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가장 포퓰리즘적인 정책을 들고 나온 정당 중 하나다. 이민에 대해서 엄격하고, 공공분야 확장에 있어서도 0.8%의 성장을 지향하며 가장 적극적이며, 보건정책, 서민층 조세부담 경감, 실업급여 재수령 자격요건 완화 등 인기영합에 신경을 많이 쓴 정책이다.

경기가 호전되며 전체 선거가 포퓰리즘적으로 흐르기는 했으나, 덴마크 국민당(Dansk Folkeparti)가 이정도로 선전할 것이라고는 별로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은 경제발전과 교육, 여러가지 측면에서 많이 소외되었던 지역을 중심으로 특정 정당이 이렇게 우세한 성과를 낼 것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던 탓이다. 현재 덴마크 국민의 평균적 정치성향이 중도성향으로 흐르고 있는데, 인구 규모로는 대표성을 적게 갖는 소외지역에서 비경제분배적 정치측면에서 급진보수적 성향을 갖는 정당이 크게 선전한 것이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다. (물론 이 정당을 미국의 민주당과 비교하면, 여전히 좌파정당이라는 점은 짚고 넘어가자. 우리나라 언론에서 극우로 표방하며 엄청 심각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독일의 네오나치와 같은 극우와는 종류가 다르다.) 

앞으로 망명을 통해 유입되는 이민자의 거주허가는 보다 엄격해질 것으로 보인다. 망명자 자녀에게 정부 보조로 모국어 교육을 받을 기회를 주던 것을, 이민자에게 특혜를 줘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이를 폐지하자는 것과 망명국의 정치적 상황이 개선되면 망명자를 본국으로 송환하는 것이 덴마크 국민당(Dansk Folkeparti)의 이민/사회통합정책의 골자다. 이에 따라 가장 타격을 받는 것은 사실 전체 이민자라기보다 망명 이민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무슬림 이민자 집단이다.

다른 이민자 집단보다 덴마크 사회 통합에 적극적이지 않은 사람의 비중이 높은 무슬림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은 시선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그냥 이민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 사회통합 비율은 유사하더라도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눈에 띄는 것 뿐일 수도 있다. 사회통합은 언어를 포함해 덴마크 사회의 전통적 가치로의 통합을 의미한다. 이에 반한 것으로는 돼지고기가 식문화에서 뺴놓을 수 없는 핵심인 덴마크인의 식생활에 있어, 학교 급식에 할랄 음식만을 허용해달라고 무슬림 사회에서 요청한 사례가 있다. 이는 한 때 언론과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가 되며, 정치권에서 반무슬림 정서를 고양시키는데 사례로 빈번히 제시되었다. 또한 망명으로 이민을 오는 비중이 높아 경제적 기반이 약해 자녀 교육에도 상대적으로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데, 이에 따라 문제아가 되는 아동, 청소년 비중이 높아 사회질서를 흐트러뜨린다는 비난을 받고 있기도 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무하마드 만평 사건과 연관되어 최근에 총격테러사건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반무슬림 정서가 더욱 강해졌다.

우리나라보다는 출산률이 높지만, 역시나 고령화되어가는 덴마크 사회에서 사회의 통합수준 강화와 젊은 인구계층의 유입의 필요성을 두고 저울질 할 때, 어떤 것이 옳은 지는 모르겠다. 이에 대해서는 청색블록에서도 충분히 인식을 하고 있어, 무조건적인 반이민정책을 고수하는 것은 아니라 양질의 인력만을 이민 받겠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실제 정책으로는 어떻게 나타날지가 궁금하다. 상대적 저임금 일자리를 동유럽과 무슬림 이민자가 채워주고 있는 상황에, 무조건적으로 이에 반대하는 정책을 고수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경제정책면에서는 일부 진보정당보다도 더 진보적인, 확장적 정책노선을 취하고 있는 국민당(Dansk Folkeparti)가 다소 걱정이 되지만, 전체 선거결과를 놓고 볼 때 덴마크 경제정책이 급격히 확장적인 노선을 걸을 수 없고, 적녹연합당(Enhedshisten)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중도노선을 지향하고 있기에 큰 걱정은 되지 않는다. 실제 그런 이유로 지난 정권이 좌파 정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 정책은 충분히 중도노선을 지켜내며 보수층 유권자를 큰 불안에 빠뜨리지 않은 바 있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국민당(Dansk Folkeparti)의 선전에 참담한 기분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중 한명이 페이스북에 올린 포스트에 매우 많은 사람이 공감의 댓글을 달았는데, 그는 다음과 같다. “이번 선거결과로 덴마크가 극우화되었다고 단정짓고 평가하는 것은 전체 덴마크인을 과하게 평가절하하는 것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극도로 변한 것 같지만 사실 이는 작은 몇퍼센트의 변화에 불과하다. 오늘 밤 쉽사리 잠을 못이루겠지만, 내일이 되면 그 내일은 사실 우리가 마주치는 오늘의 사람과 같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보통의 날들이며, 더욱 치열하게 토론하고 협력해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 또 하나의 날일 뿐이다.” 나도 이민자의 한 사람으로서 주변 사람들의 이러한 인식이 건강하고 고맙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이번 선거는 국민당 지지자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였으나, 그 다음 정국의 운영은 모든 정당에게 달려있다. 윤리적으로는 타격을 입고 인기가 없는 라스무슨이지만 정치력에서는 수완이 뛰어난 만큼, 향후 최대 4년의 기간 동안 어려운 정국을 잘 헤치고 좋은 정국을 만드는데 기여해주기를 기대해본다.

나에게 선물한 게으름의 하루

오늘은 내 생일이다. 옌스가 지난 6개월동안 들어온 MMPI 과정의 마지막 주 첫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부터 3일 동안 다른 도시에 있는 연수원에 가서 수업을 듣고, 과제도 발표하고, 최종 시험도 본다. 덴마크에선 Rounded birthday(Afrundet fødselsdag)라고 0으로 끝나는 생일에나 파티와 함께 크게 기념하고, 나머지 생일은 아주 가까운 사람들끼리나 작은 선물을 주거나 말거나 한다. 오늘은 만 35세가 되는 날. 사실 생일은 쇠털같이 많은 날 중 하루일 뿐이고, 매년 한번씩 돌아오는 날이다. 꼭 특별한 게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소하게 기념해서 나쁠 것도 없는 그런 날.

아침식사으로 왠지 미역국이라도 끓여 먹어야 할 것 같아 냄비를 꺼내려 했지만, 혼자 먹을 미역국을 끓이기도 귀찮거니와 이상하게 여기 쇠고기로 끓이는 미역국은 그냥 그렇기에 애꿎은 찬장문만 열었다 닫았다. 매일 먹는 오트밀을 생일날에도 먹기엔 좀 심심하지 않나 싶어, 어느 날 점심메뉴로 먹어볼까 싶어 샀던 훈제숭어를 꺼내들었다. 아침 식사론 비린 메뉴였지만, 왠지 단백질 식사는 특별하고 화려한 느낌. 크래커와 함께 곁들여먹은 숭어는 예상대로 비렸다. 그래도 좋아하는 크래커가 매진되어 할수없이 새로 시도해본 크래커가 더 맛있어서 그 맛에 먹었다.

입가심하려고 새로 사온 리들(Lidl)판 염가 룽고커피캡슐로 커피를 내려보니, 맛이 꽤나 괜찮다. 개당 250원 꼴이니, 한잔 마시면 500원이다. 실업자가 비싼 캡슐을 소비해야 쓰겠나 해서 정품 네스프레소를 버리고 짝퉁 캡슐을 사본 건데, 크게 불평할 일은 없겠다.

크래커를 우물거리며, 커피로 입가심을 하면서 어제 쓰다만 블로그 포스트를 마무리했다. 집에 혼자 있는 날의 장점은 머리가 헝클어져 있어도, 혹은 떡져있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애벌레가 허물 벗듯이 침대에서 내가 나온 흔적을 그대로 발견할 수 있게 일어나 방은 어수선하고, 나도 지저분하지만, 그래도 좋다.

페이스북에 많인 친구와 지인의 축하 메세지가 온다. 행복한 하루되라거나, 옌스와 즐거운 저녁시간 보내라는 인사들이 많이 보인다. 아쉽게도 옌스와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낼 수는 없지만, 행복한 하루는 보낼 수 있다. 뭘 할까? 내가 좋아하는 갤러리를 가보려고 하니, 아뿔싸. 오늘은 월요일, 휴관일이다. 아침에 쨍하던 해도 어디론가 들어가 사라져서 날씨도 꾸물꾸물하니 밖으로 나갈 의지는 쉽사리 꺾여버렸다.

오늘은 계량경제 공부하는 날인데, 그걸 해야되나 생각하다가, 나에게 주는 선물로 좋은 게 생각났다. 죄책감 없이 게으름을 온전히 즐기는 것이다. 그리고 점심 한끼 맛있는 것을 요리해 나에게 대접하는 것으로 선물을 정했다. 저녁마다 얼굴을 보면서든, 떨어져 있는 날엔 전화로든 그날 무엇을 했는지 서로 자세히 이야기하는데, 게으름을 피운 날엔 그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떄로는 열심히 해야한다는 채찍질을 당하기도 하기 때문에 게으름은 최대한 지양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보내기로 결정해서 아무것도 안하는 것은, 게으름을 게으름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주는 훌륭한 선물인 것이다.

더위를 많이 타는 옌스는 여름엔 꼭 창문을 열고 자야 한다. 그래서 요즘은 창문을 열고 자고 있는데, 그리하여 최근에 알게된 사실은 새들은 생물학적 시계가 아닌 일조량의 시계에 따라 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요즘 세시 반이면 동이 트기 시작해 네시 반에 일출이 있는데, 부지런한 새들은 세시반부터 지저귀기 시작한다. 고용한 새벽에 들리는 울려퍼지는 새소리는 아름답다. 까마귀면 그닥 아름답게 들리지 않겠지만, 다행히 이름 모를 새소리가 귀에 즐거운 소리라 감사할 따름이다. 오늘 새벽에는 꿈에서 새가 지저귀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깨고 보니 새벽 세시 반. 부지런도 하다.

그 다음부터는 깊게 잠이 오지 않아 깜빡깜빡 졸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뒤척거리면서 잠시 눈을 뜬 옌스와 눈이 마주쳤다. Tillykke med din fødselsdag, skat. 생일 축하해 내 사랑. 아침 잠결에 나도 기억못한 생일을 잊지 않고 축하해준다. 그 아침을 여는 한마디와 배경음악처럼 깔린 새소리. 오붓한 저녁식사도 좋지만, 가장 행복한 것은 이런 소소한 기쁨이다.

저녁 9시. 게으름의 하루가 저물고 있다. 하루를 이렇게 보내면 원래 마음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데, 오늘은 그런게 전혀 없어서 특별하다. 이제 내일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겠지.

엄마, 아빠.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덴마크에서 가족의 의미와 결혼 그리고 결혼식

덴마크에 온지 벌써 2년이 되어간다. 좋은 시간은 항상 그 순간에 묶어두고 싶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버리고 만다. 그래서 그런지 덴마크에서의 2년이라는 시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인도에서 근무했던 2년반의 시간을 기억하면, 항상 귀임 희망일을 D-day 삼아 매일 손가락으로 꼽았음에도 그리 지나지 않는 길기 긴 시간이었는데, 덴마크에서의 시간은 나를 스쳐지나간 것만 같다.

새롭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항상 꿈꿔오던 유럽에서의 생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옌스를 만나기 전 덴마크의 삶은 사실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겉껍질을 뚫고 들어가 친해지기 정말 어렵고, 한번 친해지면 깊은 속을 내어준다는 덴마크인은 때로는 코코넛으로 비유되는데, 나처럼 뜨내기로 지내다가 돌아가는 외국인은 그들만의 리그를 살아가야 하기에 항상 겉도는 느낌을 갖게 된다. 간신히 한두명 사귀면 친교의 기쁨을 충분히 느끼기도 전에 여러가지 이유로 덴마크를 떠나버리곤 해 허탈함만 남기곤 했다. 이런 공허한 인간관계만으로 4년을 잘 살아갈 수 있을지 두려웠고, 덴마크의 어둡고 음산한 겨울은 유독 마음을 외롭게 했다. 부모님과 보리가 옆에 없었다면 정말 힘들었을 시간이었다.

크리스마스, 새해맞이가 다 끝나고 더이상 기념할 것도, 즐길 것도 없어 덴마크인들이 제일 우울해한다는 2월, 옌스와 만났다. 그 이후의 시간은 소소하면서 즐거운 촘촘한 추억으로 채워졌고, 새로운 것들을 빠르게 흡수할 수 있었다. 덴마크인과 연인이 되고 가족이 되는 것이 그들의 사회로 깊숙히 들어가는 지름길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피부로 느낄 수 있었고 설명으로 듣고 머리로 이해했던 그들의 삶을 체험하며 배울 수 있었다. 전통과 현재, 삶을 대하는 태도, 일과 가정의 양립, 가족관, 지역간 감정, 정치, 사회문제, 외국인에 대해 느끼는 감정 등 많은 것을 말이다. 특히 결혼한 커플들과 만나 교류하거나 그들이 결혼하기 전에 만나 결혼식에 참석할 기회를 가진 두 번의 경험을 통해 덴마크인이 생각하는 가족과 결혼에 대한 의미를 배울 수 있었다.

물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덴마크 전체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이곳도 많은 사회문제를 안고 있는 여느 나라와 같은 한 나라일 뿐이니까. 옌스와 그의 가족도 그렇고, 내 친구들도 대부분 나와 정치나 여러면에서 비슷한 견해를 가진 보수적인 사람들로, 사회에서 안정된 위치에 가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니, 그들을 통해 듣는 덴마크는 편향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 어차피 세상을 중립으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고 내가 속한 곳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며, 실제 내가 느끼고 배우는 것은 지금 내가 서있는 곳과 그 주변인으로 부터이니, 내가 하는 이야기는 바로 내가 느끼는 덴마크일 뿐이다. 이점은 우선 짚고 넘어가자.

덴마크에선 이혼이 흔하다. 주변에 이혼한 사람들도 많이 있고, 그것이 흠이 될 일도 아니다. 애가 있는 커플들도 마찬가지로 많이 이혼한다. 오래 살다가 애를 하나 둘 낳다가 결혼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면을 보면 결혼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들인 것 같고, 우리나라에선 이들을 가리켜 근본없는 사람들이라 부를 이들도 있을 것이다. 아니 많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곳 부부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나 가족을 대하는 방식을 옆에서 지켜본다면 결코 그렇게 폄하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새 느끼게 될 것이다. 맞지 않는 부부는 인내하며 사는 방식을 택하는 대신에 갈라서는 것이고, 직장내에서나 친구사이에서 혼외 여자친구가 있는 것을 자랑한다면 매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게될 만큼 커플간의 신뢰와 헌신을 중요시한다. 물론 누군가와 연인관계를 맺기 전까지 다른 국가에 비해 열린 성의식을 갖고 있는 것은 맞는 이야기지만, 그건 딱 그때까지이다. 가족과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크리스마스를 중심으로 한 연말이나, 소소한 일에 자주 모이고 서로 초대하기 때문에 가족들과 보고 함께 보낼 시간이 많다. 손주들이나 자식, 며느리, 사위 생일 등에 사돈이 함께 모일 일도 많이 있다. 때로는 그로 인해 여기도 고부갈등이나 장서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그래서 부모자식지간 사이가 멀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부부는 내가 함께하기로 선택한 반려의 입장을 이해하고, 내 부모라고 꼭 좋은 관계를 맺으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같이 잘 지내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라도 그것이 부부간의 갈등을 일으키도록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결혼은 진정한 축하의 장이다. 프로포즈를 받고 우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결혼식은 모두가 행복하게 웃는 곳이다. 자식이 결혼하면 짠하고, 친한 친구가 결혼을 할 때 괜시리 뭉클해지는 마음에 눈을 적시는 것은 우리네 정서이다.  결혼 만찬은 통상 6~7시에 시작해서 신혼부부가 추는 웨딩댄스가 자정 직전에 있기까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는데, 중간중간 부모와 형제, 친한 친구들이 각각 5분에 가까운 결혼 축사를 한다. 부모의 경우, 어린 자녀가 자신에게 주는 의미를 작은 에피소드들과 함께 소개하기도 하고, 얼마나 사랑하고 자랑스러워 하는지 이 또한 여러 에피소드와 함께, 또는 시와 함께 소개하기도 한다. 그들의 만남에 대한 생각과 앞으로 인생에 대한 덕담 등 많은 이야기를 하는데, 덴마크인 특유의 유머감각과 더불어진 축사를 듣자면 참으로 놀랍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전에 옌스가 아버지 칠순잔치에 말할 내용을 미리 써서 연습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보다 훨씬 길게 하는 결혼 축사는 얼마나 정성을 들여 준비하고 연습했을 지 상상이 된다. 우리네 일상이 바쁘고, 뭐든지 효율적으로 빨리빨리 처리하려다 보니 삶이 건조해지고, 표현을 하지 않다보니 마음도 때로는 건조해지는 경우가 많다. 대충 이해해주겠지 하다보면 소홀해지기도 하고. 이 곳의 여러 축하문화는, 선물의 내용이나 가격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돈으로 주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가급적 고민을 해서 준비하고 카드를 쓴다. 마음이 동하면 표현하게 될 수도 있지만, 표현하다보면 마음이 동하고 행동이 마음을 낳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이런 하나하나의 작은 행사가 추억을 만들고 관계를 돈독히 하게 하는 윤활유가 된다.

결혼식엔 많은 전통적 요소가 아직도 남아있다. 결혼식을 마치고 난 신혼부부에게 쌀을 던져주며 축복하는 의례나 하객들이 결혼만찬 중 바닥을 발로 구르면 신혼부부가 테이블 아래로 들어가 키스를 해야 하는 것, 반대로 하객들이 접시를 포크나 칼로 두드려대면 신혼부부는 의자 위에 올라서서 키스를 해야 하는 것들이다. 신부나 화장실을 가느라 자리를 비우면 하객 중 여자들은 모두 일어나 신랑 볼에 키스를 해야 하는 것이나 반대로 신랑이 가면 남자들이 똑같이 하는 것 등도 재미있는 전통이다. 웨딩 댄스가 끝나고 나면 남자들은 신랑을 헹가래 치듯이 들고 신발을 벗겨 양말 끝을 가위로 잘라낸다. 이 밖에도 많은 것들이 있다.

만찬 도중 같은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이 한국에서는 결혼을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는데, 대부분이 하는 현대적 결혼식을 이야기해줘야 하는지, 전통 결혼을 이야기 해야하는지 갈등이 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예전 3일 가량 동네에서 잔치하듯 했던 결혼 전통이 현대에 들어 가정의례준칙의 도입과 함께 어떻게 서구화되었는지, 얼마나 효율적으로 진행되었는지, 또 그래서 요즘 왜 사람들이 작은 결혼에 관심을 갖는지 설명해주었다. (결혼 만찬장으로 가는 차안에서 한국 음식의 매운 맛은 고추가 소개된 나름 최근에 있었던 (Modern introduction) 일임을 이야기했다가, 500년이 최근이라는 이야기에 다들 배를 잡고 웃었는데, 결혼식의 변화도 500년전 있었던 일이냐고 농담을 해서 멋적게 웃었다. 이는 Modern이 아닌 Contemporary 현상이라고 덧붙이면서.) 우리 결혼에 전통 요소가 많이 사라진 것은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세상은 변해가는 것이고 전통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만들어지는 것이니 새로운 시대엔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고, 전통을 재해석해서 더 좋은 것을 만들어가면 될 것이다. 특히 나처럼 이문화에서 온 두명이 한가족을 이루게 되는 경우 문화접변이 일어나고, 세계가 더 긴밀하게 연결되며 나같은 사례가 워낙 많기에, 뭐가 전통이라고 해야 할지 흐려지는 경향도 생길 수 있다.

이미 둘이 같이 산지 2년이 된 커플로 8월이면 태어날 아이도 있는 그들의 결혼식에서, 신부 입장을 기다리는 신랑의 바짝 긴장한 모습과 마른 입술과 함께 초조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며, 결혼은 누구에게나 떨리고 긴장되는, 인생의 반려를 맞이하는 소중한 것임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올 연내 결혼을 할 나에게도 간혹, ‘아, 정말 나도 결혼을 곧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그 무게가 불현듯 실감이 나며 설레면서 긴장이 되는 순간이 있다. 재단에 서서 신부를 기다리는 신랑의 마음이야 오죽 더 긴장될까.

이러저러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Regitse(레깃써)와 Michael(미케엘) 커플의 앞날에 좋은 날만 가득하길 빌어본다.

<  Regitse & Michaels Bryllu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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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ren & Sunes Bryllu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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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첫 여름날, 혼자만의 프레덴스보 여행

유난히 해가 쨍하고 뜨거운 날씨. 올해 진정한 여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첫날이었다. 고백하기 부끄럽게도 게으름이 뼛속까지 배어있는 나에게는 아무리 좋은 날씨라고 몸을 추스려 밖으로 나가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직장을 다니면 원하지 않아도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되어 밖으로 나서게 되는데, 그렇지 않은 지금은 자유와 방만함 사이의 줄타기를 하며 지내고 있다. 열심히 지내는 날이 있다가도 정말 손하나 까딱하기 싫은 날이 있으니 그게 우연히 날씨가 좋은 날과 겹치면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집에서 공부를 하는 경우라면 육체적으로는 게을러도 지적으로는 부지런하다며 자위라도 할 수 있는데, 아무 것도 안하면서 나가지도 않다니 한심하기 이를 데가 없다.

그렇지만 어제는 날이 너무 좋았다. 이러저러한 일들로 수학공부를 게을리한지 몇날이 흘렀으니 사실은 연필을 쥐고 책상 앞에 앉았어야 쓰겠으나, 이렇게 좋은 날씨를 나가 찬양하지 않기엔 왠지 모르게 다른 종류의 죄책감이 들었다. 흔하지 않은 날을 기념하지 않고는 이런 날씨가 서운해서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

밖에 나가기를 결심하고 막상 밖으로 나서기까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침 9시, 옌스에게 “나 오늘 짧은 여행을 하고 올거야. 기차타고 자전거 타고 유채꽃이 핀 들판을 찾아 나설거야.”라고 문자를 보냈다. 저녁에 오늘 공부 뭐했냐고 물어보지 않기를 원하는 문자다. 조심하라는 답을 듣고, 사실 진짜 조심하긴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뜬금없는 들판 한가운데서 자전거 바퀴라도 펑크나면 어떻게 해야할 지는 나도 모르니까.

작년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고속도로를 타고 멀리 여행할 때면 유채꽃이 한가득 핀 들판이 끝도 없이 펼쳐진 것을 본 적이 몇 번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와 함께 밀이 누렇게 영글어 있는 들판이 있었음을 기억한다면 늦여름에서 초가을 사이가 최절정에 이르는 시기임을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어제는 그런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열심히 구글 검색을 하느라 쓸데 없이 시간을 낭비하다가, 이러다 또 나가기를 관두겠다 싶어 그냥 외어순스토(Øresundstog)를 타고 올라가자 마음먹고 비스켓 하나, 물 한병, 깔고 앉을 담요를 한장 챙겨서 서둘렀다. 벌써 정오였다.

열차 안에 자전거를 고정시키려다가 자전거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자전거를 실을 수 있는 칸은 소풍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로 가득차있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나를 보고 귓속말을 하는 아이도 있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아이도 있었다. 이런 일에 신경쓰려면 한도 끝도 없는 해외생활이기에 그냥 이어폰을 귀에 꼽고 음악을 들으며 알랑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조금 읽자니 나의 게으름과 그에 따른 죄책감을 그도 똑같이 느꼈다는 사실에 실소를 흘렸다.

“… 이 책들은 각기 다른 방식이지만 입을 모아 바깥에는 마드리드라고 부르는 흥미진진하고 다채로운 현상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곳에는 기념관, 교회, 박물관, 분수, 광장, 쇼핑거리 등이 수도 없이 널려 있다고 외치고 있었다. 나도 그런 유혹적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또 내가 그것을 볼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 자신의 게으름과 좀 더 정상적인 관광객들이 느꼈을 진지함을 비교하며 냉담과 자기혐오가 뒤섞인 느낌에 시달리기만 했다. 나는 그냥 침대에 누워있고 싶은 욕구, 가능하다면 얼른 비행기에 올라타 집에 가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혔다. …” <알랑 드 보통, 여행의 기술>

5페이지도 채 읽지 않은 짧은 기차여행에서 그 부분을 읽었다는 사실이 묘하게 느껴지며, 나서길 잘했다는 생각이 괜히 더 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현대미술관 중의 하나라는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이 위치한 홈르백(Humlebæk)에 내려 왕실의 여름궁전인 프레덴스보(Fredensborg)에 가기로 했다. 그 길로 가는 중엔 유채꽃밭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2년이나 살면서 그곳에 아직 가보지 않았다는게 게으름의 표상인 것 같아, 아무도 비난하지 않지만 스스로 비난받은 듯한 느낌마저 들어 선택한 곳이었다. 남들은 굳이 힘들게 돈과 시간을 들여 오는 여행지중 하나인 유럽에 살면서 주요 관광지를 둘러보지 않는 건 귀한 걸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을 다녀올 때면 흔히 이용하던 고속도로까지 가는 지방도로를 자전거로 달리니 주변 풍경이 사뭇 달랐다. 지방도로가 자전거도로와 높이가 다른데다가 가로수로 가려져 있어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전거도로는 들판 안쪽으로 훨씬 가까이 붙어 차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다.

2시가 거의 다 된 시간. 집에서 나올 때보다 한결 뜨거워진 공기가 느껴졌다. 이날 따라 바람이 덜 부니 22도밖에 되지 않는 온도도 매우 덮게 느껴졌다. 우리나라보다 위도가 높아 해가 더 쨍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시골이라 인적이 드문 길이 많았다. 이름 모를 보라색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길에 잠시 멈춰 한참 사진을 찍다가 다시 페달을 힘차게 밟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공간을 즐기다보니, 아차. 어느 새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리고 바퀴가 큰 자전거임에도 40분은 족히 달려야 할 거리라 빨리 다녀와야 저녁시간에 늦지 않게 집에 돌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진 탓이었다.

갑자기 훅하고 코를 잡는 꽃향기. 라일락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뜨거운 공기 속에 열기인지 향기인지 구분하기 어렵게 자신의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자전거를 달리면서 느끼는 그 기분이 좋아 굳이 멈춰서지 않고 계속 페달을 밟았다.

밀밭은 알이 충분히 영근 밀작물로 짙은 초록색을 뽐내고 있었다. 그 옆의 유채꽃밭은 이제 갓 꽃몽오리가 진 유채꽃 사이에 성급히 터진 어린 꽃들만 조금 보여, 그 노란색이 충분히 느껴지지 않았다. 6월 말에서 7월 정도 사이에 다시 오면 노란 물결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겠다 싶었다. 아쉽다고 느끼는 순간, 그럴 거 없이 또 오면 된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또 한번 이런 여행을 해야겠구나.

간간히 지나가는 차들 빼고는 인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 밭과 멀리보이는 농장을 지나치며, 여기서 타이어 터지면 정말 난감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물지만 가파른 언덕에서 20kg에 달하는 나의 무거운 애마의 페달을 간신히 밟아가며 오르다, 잠깐이지만 내가 이런 고생을 사서 하고 있다니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다음 만나는 내리막길에선 신나게 바람을 즐기며 내려갔지만, 반대로 집에 갈 땐 어쩌나 하는 두려운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그렇게 도착한 프레덴스보 궁전은 여름 별궁답게 소박한 느낌이었다. 관광철이 아니라 그런지 북적임도 없어 궁전 부속 공원을 산책하기엔 더할나위 없이 좋았다. 작은 새들이 조잘거리는 소리는 어찌나 영롱하고 행복한지. 굳이 여기가 아니라도 요즘 흔히 들을 수 있는 새소리이지만, 적막함과 바람소리에 어우러지는 새소리는 메아리까지 쳐서 들려 한차원 다른 소리로 들렸다.

공원의 끝에 접하고 있는 이스훔 호수(Esrum Sø)는 크고 고요했다. 나중에 지도를 살펴보니, 셸란(Sjælland) 섬에서 두번째로 큰 호수이다. 그 큰 공원과 호수를 몇 안되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너무 호사스러울 지경이었다. 관광철에 와서 북적임을 느낀다면 또 다른 느낌으로 즐거울 수 있겠지만, 북적임보다는 적막을 좋아하는 나에겐 이쪽이 훨씬 좋다.

집에서 싸온 비스켓을 우물우물 씹어먹으며 앉아있는데, 예전이면 외롭게도 느껴졌을 수 있던 그런 순간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길지 않은 시간, 땀을 식히며 앉아있는 그 순간이 정말 길게 느껴졌다. 초록색이 가득한 곳이라 그랬을까? 사람들로 북적이는 길거리 까페에서 홀로 앉아있으면, 내 땅에 두고 온 가족과 친구들이 보고싶어 유독 고독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사람들이 별로 없는 그곳에 앉아 있으니, 간혹 산책하는 사람들 한두명과도 눈인사를 나누기도 하며 오히려 혼자가 아님을 느꼈다.

돌아가는 길은 다행히 다른 루트로 운행하는 로컬 열차가 있어 쉽게 돌아왔다. 그 열차 속에 앉아, 그 무수히 많았던 날들처럼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몸을 일으켜 나온 5시간 전의 나에게 감사하며, 또 이런 혼자만의 여행을 나서야 겠다고 마음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