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의 언어를 나의 모국어로 다시 전환하기

아이가 보육기관을 시작하고 어느정도까지는 한국어 발화단어수가 덴마크어보다 더 많았는데, 아무래도 어린이집에서 가장 다양한 상황을 맞닥뜨리고 깨어있는 시간 중 대부분을 보내다보니, 오래지않아 아이의 덴마크어가 더 뛰어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아이의 모토릭과 호기심도 빠르게 늘면서 아이에게 가르칠 일이 늘다보니 덴마크어로 아이와 소통하는 것이 더 편해지게 되었다. 한국어로 설명하려면 더 돌려 설명해야 하는데, 덴마크어로는 아이가 이미 더 많은 어휘를 이해하니까 더 효율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일상 속 덴마크어를 늘려야 하는 나의 숙제도 있었기에 여러가지 이해가 맞물려 선택한 결과였다.

예전 동영상을 보다보면 아이의 한국어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좋았던 시기가 있었다. 오히려 지금의 아이보다 어휘가 뛰어난 부분도 있었고. 중간중간 아이의 한국어를 늘리기 위해서 한국어 사용 시간을 조금 늘려보던 시기도 있었는데, 그건 잘 안되더라. 식사시간엔 한국어를 사용한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한다 해도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다 보면 옌스에게 덴마크어를 섞어 쓰거나 옌스가 한국어로 표현할 수 없어 덴마크어로 쓴다든지 하면서 다시 흐지부지되기도 했다. 한국어를 쓰는 것에 대해 아이가 강하게 저항하는 날도 있었고 여러모로 쉽지 않았다.

한글학교에 하나처럼 한국어를 거의 사용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반이 개설되었다. 하나처럼 부모 중 한쪽이 한국인인 경우도 있지만, 한국에서 입양된 덴마크인의 자녀도 있다. 어떤 방식으로 배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이의 한국어 학습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주는 것도 있는 것 같고, 한글에 대한 관심을 올려주는 등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즘 하나가 나를 이겨보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기가 할 수 있는게 늘면서 풍차돌리기, 외발자전거 타기 등 엄마가 못하는 것을 자기가 할 수 있게 되는 것에서 어른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 같았다. 엄마는 액센트가 거의 없지만, 간혹 어떤 단어에서 발음을 틀리게 하는 것이 있다면서 미묘한 모음 교정을 해주곤 했는데, 거기서 뭔가 나를 이겨보려고 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다 어느날, 어떤 문장의 문법적인 요소에 대해 자기가 틀린 것을 모르고 내가 옳게 말한 것을 고쳐주려 하길래, “내가 확신이 없는 것이라면 들어보고 네가 맞으면 그를 고치겠는데, 이건 네가 틀린 것이다.” 라고 답을 해준 적이 있다. 그랬더니 계속 우기더니 기분이 팍 상했던 모양이다. 집에 오자마자 방으로 달려가 문을 쾅 닫고 들어 앉았다. 내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면서 탄수화물로 밥과 파스타 중 어느걸 할까 고민하다가 애한테 고르게 해주려고 뭘 먹겠다고 물어봤더니, “엄마가 무슨 말 하는지 못알아 듣겠어!”라는 거다. 그 근래에 이런 일이 몇번 있었던 터라 나도 짜증이 확 오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에게 “내가 한국어로 말해도 잘 못알아 듣겠고, 덴마크어로 말해도 마찬가지면, 나는 앞으로 그냥 한국말로 말하겠다. 그러면 최소한 네가 한국어를 배우겠지.”라고 말하고 그냥 한국어로 바꿔버렸다. 그게 지난주 월요일.

이제 일주일이 지난 지금 돌아보자면 일련의 break down이 있었다. 수영장 가서 제일 즐거워야 할 순간에도 엄마가 한국말을 해서 제대로 놀수가 없다면서 펑펑 울었던 때, 뭘 물어봤는데, 내가 대답하는 것을 못알아들으니까 차분히 설명해 줄래도 엄마가 하는 말을 못알아듣겠는데 못알아 듣는 말로 질문에 답을 해주면 어떡하냐며 엄청 성질을 내더라. 하지만 그 강도로 보자면 거부반응이 차츰 사그러드는 강도로 나타나고 있고, 이제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한 거 같다.

예전보다 아이가 훨씬 커서 좀 더 이해하는 방식이 체계적으로 바뀐 것도 한국어를 제2외국어와 비슷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요즘 글을 읽는 것을 연습하고 있는데, 덴마크어 뿐 아니라 한글도 읽기 시작하고 있다. 내년 2월말에 부모님이 오시는데, 그 때쯤 되면 자기가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할머니, 할아버지께도 설명해드리고, 말씀도 이해할 수 있게 될 거 같다. 그러면 부모님이 아이를 학교에서 하교시키실 수도 있을 거고. 아무튼 주변의 응원을 토대로 마음의 용기를 갖고 아이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마음을 먹었으니 굳게 마음을 먹고 밀고 나가 봐야겠다.

전쟁과 불안함

우크라이니와 러시아간 전쟁이 길어지며 어느새 그게 일상인냥 무뎌져버렸다. 전쟁 초기의 무력감과 이후 이에 무뎌질 걸 예감함에 따른 스스로에 대한 자조와 그런 무뎌짐이 가져다줄 전쟁터의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부채감, 미안함, 두려움 등을 느꼈던 것을 기억한다. 이에 대해 한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며 일련의 감정을 나눴더랬는데…

하마스의 이스라엘 테러로 발발된 내전을 통해 인간의 잔인함을 보고 또 연이어 발생한 발틱해 핀란드-에스토니아간 가스관 테러 사건 등 전쟁의 냄새가 여기저기서 풍겨온다.

다시금 익숙해져 무뎌질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순간은 우리 인간의 역사가 평화기를 지나 전쟁기로 들어서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상은 일상대로 흘러가야겠고 나도 내 일상을 지켜가겠지만 이 씁쓸한 입맛이 길게 남을 것 같다. 언제 갑자기 전쟁이 다가와 우리의 일상이 될 수도 있고. 아무리 전쟁이 지구상의 어딘가에게서 계속되어도 이에 영향을 받지 않고 사는 사람도 많겠지만 그게 내가 될 수 있을지 요즘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 마음이 술렁하구나

체육, 신체능력, 부모의 역할

엄마랑 통화를 하면서 들어보니, 체육을 엄청 많이 시키는 나를 보며 아빠는 아이가 체육쪽으로 가는 거 아니냐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그게 긍정적인 코멘트인지 아닌지는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약간은 우려를 하신게 아닌가 싶다. 사실 나는 아이가 체육쪽으로 가든 아니든 아이가 좋아하는 일이면 상관없다 생각한다. 우리가 길게 살게 되면 될수록 몸을 잘 관리해서 사는 건 중요하기에 신체의 계발과 관련된 쪽의 일에 종사하는 것은 좋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뭐라도 운동과 관련한 것에서 손을 완전히 놓지는 않았던 나지만, 그렇다고 한 종목을 진득하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내 몸의 사용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고 이를 어떻게 해야 더 잘할 수 있는지를 훈련 관점에서 생각해본 적은 한번도 없다. 그래서 내 몸의 사용법을 뒤늦게 배웠고, 잘못된 몸 사용법이 나중에 어떤 식으로 신체 능력에 영향을 미칠지, 부상과는 어떻게 연관될지 등과 같은 건 생각해보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버렸다. 그나마 30대부터 발레를 시작하고 오랫동안 훈련을 한 덕에 크고 작은 부상을 겪었고, 그래서 몸을 바로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공부하게 되었다.

발레와 실내 클라이밍에 더해서 수영까지 더한 요즘 각각 다른 종목의 근육 사용이 어떻게 다른지, 그러면서도 공통적으로 요하는 것에는 어떤것이 있는지, 그래서 그 종목을 오랫동안 해온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체형을 갖는지를 관찰하고 알아가면서 아이들때부터 이렇게 다양한 체육에 노출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된다.

사실 이런 이유로 이미 아기 때부터 아이의 체력 발달과 관련해 부모가 해줄 수 있는 부분들이 뭐가 있는지를 미리 관심있게 봐두었고 양육에 있어서도 초점을 두었다. 가장 중요한 건 코어 훈련. 갓난쟁이때부터 터미타임하기, 자력으로 앉을 수 있을 때까지 범보의자 같은 의자에 앉히지 않기, 바운서나 보행기 사용하지 않기, 아이가 W자로 앉을 경우 다리를 뻗어 앉도록 하기 등 별것 아닌 거 같지만 아이의 운동 능력에 아주 밀접하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들부터 시작했다. 아이가 W자로 앉는데 익숙해 코어가 안좋으면, 또는 코어가 안좋아 W자로 앉는 걸 선호해 코어가 계속 약한 상태로 유지가 되면 아이의 골반이 전방경사가 되며 코어의 조절이 중요한 운동을 잘 하기 어렵다. 뭔가 몸이 휘적휘적한 느낌이랄까?

매일 보육원, 유치원에서도 밖에서 놀고 했지만, 날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꼭 밖에 나가서 짧게는 삼십분에서 길게는 한두시간씩 아이와 적극적으로 놀아주는 것, 여러가지 체육 활동을 도와주는 것 등으로 신체 능력을 키워줬다. 나혼자 하면 못할 일이지만, 남편은 나보다 훨씬 외부활동에 적극적이고, 사람은 하루에 최소 한번은 야외에서 신체활동을 해야한다는 주의라 가능했던 것 같다.

지금은 학교에서도 적극적으로 놀고, 방과후에도 체조, 발레, 수영, 태권도도 하고 우리와도 밖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혼자서도 줄넘기나 훌라후프 등 여러가지 신체활동을 한다.

부모가 활동적인 라이프스타일을 갖고, 아주 어려서부터 몸을 쓰는 것에 익숙한 아이들은 거의 자동적으로 활동적인 라이프스타일을 갖게 된다. 실제 학교에 가서 어린 아이들을 보면 부모의 라이프스타일을 많이 따라가고, 체형도 그렇다. 사실 십대로 올라가면 또래에 영향을 받아 별도의 노력을 해서 부모와 다른 체형을 갖는 아이들도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성격이고 사소한 습관에서부터 부모의 유전자와 생활환경에서 많은 것을 물려받은데 체형도 이 두가지의 결합의 결과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 중 하나라 그럴 것이다. 거기다가 요즘 아이들은 예전보다 많은 IT기기의 사용으로 인해 정적인 환경에 더욱 익숙해지곤 하는데, 그러다보니 저학년부터 거북목인 아이들도 많이 보인다. 거북목인 아이들은 대부분 어디 기대 앉는 것을 좋아하고 골반이 후방경사인 아이들이 많아서 체중이 뒤로 실리니 뛰고 점프하며 이동하는 운동에서 기능을 잘 하기 어렵다.

나이가 들어서도 바꿀 수 있는 것이니 아이들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겠지만, 어리기 때문에 통증이 없어서 모르고 넘어가고 오히려 일찍부터 나쁜 자세가 시작되서 어른이 되어서 더 문제가 고착될 수 있기에 아이들의 바른 몸사용에 어른들이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러려면 어른부터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이를 라이프스타일로서 아이에게 보여주고, 아이도 적극적으로 동참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그냥 아이만 보내는 것으로는 아이가 운동을 하는 중요성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날씬한 몸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 높은 기능성을 갖는 몸에 대한 추구의 관점에서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물려주는 건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역할이다.

그리고 여기 애들 보면 체력을 엄청 길러서 공부는 고등학교에서 할 녀석들만 바짝 높은 강도로 한다. 대학교도 갈 녀석들만 가고, 가서는 우리 대학보다 훨씬 높은 강도로 한다. 그러니 이 공부를 할 수 있는 체력의 근간을 쌓는게 지금 하는 일중의 중요 요소이다. 한국에서 애들은 벌써 영어학원 다니고 수학학원 다닌다는데, 체육만 시켜서 되겠냐고 하는 걱정에 답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시대에 공부만이 길도 아니고, (이미 그렇지 않기도 하고) 체육 코치들이 정신과 의사가 가장 보기 어려워하는 환자 직업임을 생각한다면 체육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건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왜라는 생각을 버리기

일상에서 타인으로 인해 마음속 번뇌를 맞닥뜨릴 때면 “왜 저 사람은 이렇게 하지/했지?”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 질문은 사실 질문이 아니고, “나라면 이렇게 하지 않을텐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거야?”라는 비판이고, 내가 옳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다만 이런 전제는 무의식속에 숨겨져있고, 비판의 단언이 아니라 질문의 형태를 띄고 있다. 마치 상대를 이해해보려고 하는 노력을 하는 척 하지만,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내 마음속에서는 불평이 줄줄이 소세지처럼 딸려나오고 이미 상대의 입장은 생각해볼 수가 없다. 사실 내가 그 사람이 아닌 이상 그 입장을 아무리 생각해본 들 내 상상속의 시나리오이며 이를 안다고 해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왜라는 질문을 머리에서 삭제하기로 했다. 우선 이런 마음속 갈등은 이미 벌어진 일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경험하게 된다. 만약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중에 해당 상대와 이야기를 한다면 이미 마음속에 부정적으로 증폭된 감정이 실제 대화를 할 때의 어조만 부정적으로 만들어 상대로 방어태세로 들어가게 만들고, 괜시리 번뇌의 시간만 가지며 평화로울 수 있었던 내면만 불편하게 만든다. 이 질문이 머리에 든 순간 ‘왜는 따져봐야 의미가 없지.’ 라고 스스로에게 상기시켜주면 보글보글 끓어오르려던 갈등이 순식간에 사그러든다. 질문의 형태로 생각을 떠올리면 뇌가 바로 반응해 답을 찾고자 하는데, 그 질문이 의미없는 질문임을 인지하는 순간 뇌가 이게 쓸데없는 생각임을 인식하게 된다. 처음엔 좀 시간이 걸렸지만, 몇번 훈련을 하고 나니 뇌도 빠르게 적응을 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집안일을 하는 방식, 집의 어질러진 상태, 도로에서 타인의 공격적이거나 부주의한 운전, 주변의 소음 등 정말 다양하고 자잘한 순간에서 내 머리에 쓸데없이 떠오르는 왜라는 질문은 마음과 머리를 어지럽힌다. 그냥 빠르게 해치우고 말면 될 것들을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마음속 번뇌로 번진다. ‘그냥 다른 사람들은 나와 달라’, 라는 생각은 마술과도 같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나도 그냥 나다. 왜라는 질문보다는 그래서 내가 지금 하기로 한 것을 행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우리는 너무나 생각을 많이 하고 산다. 조금은 생각을 줄이고, 하기로 마음 먹은 것들을 하나씩 하는 것. 그게 제일 중요하다.

나에게 맞는 직장 찾기 / 동태적 최적화

나에게 맞는 직장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 같다. 이는 한번 찾았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나와 직장, 같이 일하는 사람들 모두 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는 동태적최적화 문제를 푸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 22세에 직장생활을 시작했기에 내 인생의 절반을 직장생활을 하면서 보낸 것과 마찬가지이니 직장생활은 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왔다. 그리고 깨어있는 시간의 가장 큰 부분을 직장에서 보내니 진정 중요한 요소이다.

나에게 맞는 배우자를 찾기까지 여러번의 실패하는 관계를 토대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가는 과정을 겪는다면, 직장도 나에게 맞는 직장을 찾기까지 여러번의 실패를 겪어야 하는 것 같다. 실패가 쓰린 부분도 있겠지만, 그래서 다음에 더 좋은, 알맞는 선택을 한다면, 그래서 나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가볼가치가 충분한 길이다. 간혹 어떤 부분에서는 맞는 배우자나 직장을 찾고서야 내가 진짜 뭘 원하는지 알게 되기도 하니 운도 많이 따라야 한다. 또 처음에는 안맞았다가 맞게 될 수도 있고, 맞았다가 안맞을 수도 있다.

내가 지금 이 직장을 잡았을 때만 해도 전 직장에서 겪었던 내적 갈등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던 상황이었고, 불안한 마음이 내 속 깊은 곳에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잘 하고 싶었고,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었으며, 빨리 아는 게 많아져 문제를 척척 해결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일의 성격이 그렇게 쉽게 풀리는 것이 아니었다. 호흡이 긴 프로젝트들에 새로운 데이터를 들여다보고 분석해 발간, 발표를 해야했다. 끊임없이 배워야 했는데, 복잡한 것들이 서로 얽혀있어 그 안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허우적대다보니 작은 분야지만 이해도도 조금씩 늘어나고 더이상 빠져죽을 것 같은 느낌은 없어졌다. 누가 나에게 내 프로젝트를 물어보면 답을 하고 나눠줄 수 있게 되었고, 작게나마 도움도 줄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워낙 방대한 분야이기에 배울건 태산이지만, 물어볼 수 있는 동료들이 더이상 부담스러운 대상이 아니고 지식을 공유받을 수 있고 스파링도 할 수 있는 진정한 동료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곳에서 처음으로 내가 하는 일을 진정 즐겁게 할 수 있게 되었고, 회의를 느끼지 않고 할 수 있는 프로젝트들을 손에 쥐게 되었다. 내 직장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으며, 내 동료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나도 부끄럽지 않게 되도록 성장하고 있으며,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커리어의 방향을 맞춰가며 발전시켜가고 있으며, 일할 수록 도태된다거나 하면 어쩔까 하는 쓸데없는 불안함을 내려놓게 되었다.

이전에 언급했듯 내가 내 직장과 잘 맞느냐는 것은 동태적최적화 문제를 푸는 것과 마찬가지라 이 마음은 내가 변하든 환경이 변하든 하는 과정에서 그 방향이 어긋나면서 바뀔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냥 지금의 상황을 누리련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

임윤찬의 피아노독주를 본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페이스북 한인 그룹에 올라온 누군가의 포스트를 보고 친구에게 가보지않겠냐고 물어본 데서 시작했다. 임윤찬이 그렇게 어린 피아니스트인지도, 그가 그렇게 유명한지도 몰랐다. 그냥 조성진에 이어 여러번 미디어에서 스치듯이 본 이름으로 그냥 그가 피아니스트라는 걸 알고 있던 정도였다. 그랬던 그의 연주를 보러갔던 날 티볼리 곳곳에 흩어져 여기저기 보이는 한국인들을 보고 좀 대단한 사람인가보다 하고 감만 잡을 수 있었다. 친구를 보고 이야기를 듣고나서야 그 이름의 유명세가 어느정도인지 뒤늦게 알게 되었다.

티볼리 콘서트홀에 덴마크 대네브로와 함께 힘차게 휘날리던 태극기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 덴마크에는 타국의 국기계양과 관련되어 규제가 타이트한 편이라 이렇게 태극기가 휘날리는 걸 보는게 대사관, 대사관저 인근이 아니고서야 힘든데 한개도 아니고 건물 지붕의 정면 모서리를 따라 대네브로와 하나씩 번갈아가며 여러개가 주욱 늘어서 펄럭이는 건 근사한 경험이었다.

임윤찬의 기술적인 측면에 대해서 내가 평가하는 건 의미없겠지만, 그 강렬한 연주 바로 뒤에 찾아오는 다음 곡의 여리여리한 피아니시모를 마치 정적속에서 시작한 것마냥 연주하는 그 컨트롤에 놀랐고, 화려하고 빠르게 어우러진 화성 속에 또렷한 울림이 가득한 멜로디가 레이어 바이 레이어 켜켜이 얹어 딜리버리할 수 있는 게 놀라웠다. 콘서트 전 다른 연주자들의 연주 음반을 몇번 듣고 갔는데 콘서트 홀에서 듣는 라이브가 주는 소리의 질적인 차이를 제외하더라도 마음을 깊은 곳부터 동하게 하는 연주더라.

도대체 어떤 재능에 어떤 연습과 지도를 통해야 저런 음악이 가능할까 싶었다. 엄청난 연습이 따랐겠지만, 독보적이고 특출난 재능이 함께 하기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겠지. 거기에다가 아마도 음악이 전부인 그런 일상을 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그도 연습이 싫었던 순간은 있었을까? 인간이니까 있었겠지? 아니면 그나마도 없었을까?

그의 연주를 듣고 나서 오랫동안 먼지만 쌓이게 두었던 피아노를 다시 한번 열어보고 연습을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건반속에 녹던 그 기분이 나쁘진 않았는데 과거에 내가 칠 수 있던 것 대비 실력이 늘지 않는 것에 바쁠 것이 전혀 없는대도 인내심이 사그러들고 손에서 놓게 되더라. 인생에서 쌓아올리는 많은 것은 꾸준함이 기반임을 발레를 통해 배웠기에 앞으로 얼마나 가게 될 진 모르겠지만 한 손가락부터 한번 시작해봐야겠다.

과정을 즐기기

나는 일을 해치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정해진 루트가 있고, 그걸 밟아가며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걸 빨리 해낼 수 있으면 가장 좋다. 어쩌면 인내심이 부족하다고 할 수도 있고. 살다보면 협업을 해야해서 타인을 기다려야 하는 순간도 있고, 여러가지 작업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하는 경우, 한 작업을 중간에 멈춰두고 다른 작업으로 넘어가 하는 동안 그 멈춰진 작업이 남겨둔 흔적이 끊임없이 머리속 뒤에서 괴롭힌다. 저것도 빨리 끝내야 한다고. 뭔가를 끝내는 데 초점을 맞추면 과정을 즐기기 어렵다. 여기서 즐긴다는 것은 정말 즐긴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일에 걸리는 시간과 그게 언제 끝나나를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그 순간의 작업에 집중하는 자체가 꽤나 어렵다.

내가 하는 일들이 대부분 긴 호흡의 프로젝트들이라 짧으면 몇달에서 길게는 일년을 넘어서는 일들이 많은데, 그런 긴 호흡이 주는 유연성의 장점을 좋아하면서도 그게 힘들게 다가올 때가 있다. 바로 언제 이걸 끝내나 하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이 찾아오면 그 과정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다보면 더 초조해지기도 하고. 그런 때면 의식적으로 초조한 마음을 조절해야 한다.

늦봄부터 집을 유지보수하는 여러가지 일들을 해오고 있다. 집 외관의 매지 부분을 미장하는 것부터 테라스 기름칠하기, 집 외부 벽과 담장 등 나무로 된 모든 곳을 페인트질 하는 것 등. 집안 구석구석 실리콘을 교체하는 작업도 남아있고, 자잘하게 손 볼 것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집안일의 특성상 이걸 해치운다고 끝나는게 아니고, 그 기간 중 살면서 쓰면서 새로이 유지보수할 것들이 조금씩 나온다. 이걸 한번에 다 해치워야 한다면 비용을 지불하고 외부의 도움을 빌리는 방법이 있을 것이지만 외부의 도움에 의존하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기회와 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자유를 박탈하는 것일 수 있다. 물론 돈도 들고. 또 한번에 해치운다 해도 언젠가 또 유지보수를 해야하고. 굳이 한번에 해치워야 하는 게 아니라면 천천히 시간을 들여가며 할 수 있다. 여기엔 많은 계획이 필요하고, 이를 시행함에 있어서 착오를 겪을 수도 있고, 과정이 진행되는 도중 정돈되지 않은 혼돈을 옆에 두고 살아야 할 수 있다. 혼돈 속에 사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게 주는 스트레스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이나 법적으로 전문가의 손을 빌려야 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가급적 우리가 다 하기로 했다. 큰 유지보수를 하다보면 그 과정에서 평소에 어떤 곳을 어떻게 유지보수해야하는 지 배울 수 있게 되니까 한번 고생하고 나서 그 다음엔 소소히 손을 보는 식으로 잘 관리할 수 있게 되기도 해서고, 워낙 외부 손을 쓰는 게 비싸기도 해서이다. 덴마크인이 핸디맨이 되는 과정을 이해한다고나 할까? 이렇게 부모가 관리의 노하우를 배우면 아이들도 가르쳐가며 세대를 따라 전수할 수 있게 되니까.

유지보수 프로젝트들을 통해 여러 건자재, 화학제품에 대해서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게 큰 힘을 주는 것 같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인가 아닌가 하는 불확실성 자체가 주는 마음의 부담을 많이 덜어주기 때문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라는 표현은 여기에 쓰기엔 너무 과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뭔가를 안다는 건 어느정도 자유를 주는 게 진정 옳다. 외부의 손을 빌어 대대적 프로젝트를 한다면 기간 중 집이 난장판이 될텐데, 우리가 하면 그 정도를 적당히 통제해가며 진행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는 혼잡함이 생긴다. 이를 보고 고통을 느낄 수 있는데, 최근의 프로젝트를 통해 이 혼잡함과 혼돈을 감내해가며 그 긴 과정을 받아들이고 서둘러 해치워가려는 게 아니라 그 과정에 집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특별한 배움이 있다기 보다는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그걸 거스르려다보면 문제가 생기거나 피로도가 과도해질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중간에 과정을 갈무리하고 휴식을 취하고, 또 다른 날에 갈무리한 지점부터 일을 시작하는 것, 그를 위한 정리와 준비과정 모두 시간 낭비라 생각하지 않고 하나하나 해내 가는 것이 마음에 안정을 준다.

이게 잘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괜한 마음의 불안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는데, 완벽하게 해내려는 것도 아니고, 안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향으로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믿음을 갖고 불안을 떨쳐내는 것이 중요함도 배운다.

과거였으면 싫었을 소위 내 몸을 써서 해야하는 힘든 일들을 직접 하면서 인생의 많은 지혜를 배운다. 이 지혜들은 이런 물리적인 작업 뿐 아니라 회사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들에도 적용되는 것이라 놀라울 뿐이다. 어떤 종류이든 일을 하면 배우는 게 생기고 인생을 해쳐나갈 힘을 얻는다. 그래서 오히려 힘이 나고 행복하다.

집 관리하기: 무지의 두려움과 싸우기

늦은 봄부터 초여름인 지금까지 가뭄이 지속되고 있다. 가뭄의 무서움을 알지만서도 특히나 춥고 비가 많이 오던 봄을 지나고 맞은 햇살 좋은 기간이라 개인적으로는 좋기도 하다.

해가 쨍쨍하게 좋은 기간이 오기 전에 할 일이 있다. 바로 테라스에 기름칠하기. 해가 쨍쨍하기 전에 해야하고, 비가 오지 않는 기간에 해야하기에 대충 부활절 기간이 기름칠하기가 제일 좋은 때인데, 이때 한국에 다녀온지라 돌아와서 해야했다. 최적의 날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하긴 했다. 이제 벌써 세번째 하는 거라서 일이 얼마나 걸리는지, 어떻게 해야하는지 손에 익었다. 오랫동안 관리안한 테라스를 관리하는 건 힘들지만, 관리가 잘 된 테라스를 관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것을 이번의 작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아파트에서 한번, 새로 이사와서 한번 기름칠 할 때 고생을 많이 했는데, 작년에 힘들게 하고 나니까 올해는 훨씬 빠르게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집을 소유한다는 것은, 특히나 지어진지 오래된 집을 소유한다는 것은 살면서 여기저기 손질할 곳이 생긴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지붕도 갈아야겠지만, 이처럼 크고 보험을 들기위해 자격증을 소유한 사람을 고용해서 해야하는 것은 빼고 나머지는 직접 할만한 일들이 많다. 한국같으면 무조건 남에게 맡겼을 일이겠지만, 인건비가 특히나 비싼 이곳에서는 할 수 있는 건 자기가 하는 경우가 많다. 덴마크와서 처음 해본 것 중 하나는 미장일이다. 정원에 두줄짜리 낮은 블록이 우리집 테라스와 공유지 사이 공간을 나누고 이 공유지가 장미과 나무로 된 담장으로 시작된다. 뿌리들의 부피가 커져서 블록을 테라스쪽으로 밀면서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이 블록들 사이를 채우던 모르타르가 이 힘을 못견뎌 블록들이 더이상 같이 붙어있지 않고 따로 떨어져 있게 되었다. 아이가 밟고 돌이 굴러 넘어질 수도 있고 해서 이를 고쳐야했는데, 그게 내 첫 미장 작업이었다.

미리 배합된 모르타르를 사서 작업 했는데, 빠르게 마르는 모르타르를 산 것이 흠이었다. 나의 낮은 작업속도를 생각하면 그렇게 빨리 마르는 것을 사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물을 얼마나 배합하면 되는지 써있긴 했는데, 이게 대략 얼마다 이렇게 나와있고, 작업하는 표면이 너무 젖어도, 말라도 안된다는데, 그게 얼마인지도 잘 모르겠고. 결국 시행착오끝에 잘 하긴 했는데, 대충 어떻게 해야한다는 느낌을 알듯말듯한 정도의 경험을 쌓았다. 그 다음 작업은 우리 카포트 기둥을 바치는 밑돌이 금이가 있었다. 호미로 막을 것 가래로 막아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얼른 작업을 했는데, 금속과 블록을 결합하는 수리에 필요한 것을 모르타르를 사다가 작업했다. 거푸집을 만들고 했어야 하는 작업이었던 것 같다. 결국 거푸집 없이 원하는 결과를 내긴 했지만 이상적이지는 않은 작업과정이었다.

이번에는 나무로 된 외벽과 벽돌벽 사이의 매지를 교체하는 작업. 오래된 매지를 제거하는 것도, 이를 채우는 작업 모두 큰 작업이었다. 채우는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절반정도 끝나서 이 일에 필요한 경험치를 많이 쌓을 수 있었다. 종류가 다른 자재 사이에서 이를 묶어주는 재료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이 매지가 다른 것보다 빨리 수선을 요하게 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 일은 제거하는 작업도 그렇고, 채우는 작업까지 모두 생각만으로도 스트레스 받는 작업이었다. 물론 일도 힘들지만 머릿속으로 아직 발생하지도 않은 실패 가능성을 생각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았다. 수직으로 매지를 채우는 작업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처음엔 중간에 포기하고 전문가를 불러야하나 생각을 하기도 했는게, 잘 붙지도 않고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모르타르에 수분 함량이 조금 너무 많았고, 작업을 아래부터 해 올라가야 했는데, 위에서부터 해서 내려오려고 했던 점이 초기 난관의 원인이었다. 옌스에게 아무래도 전문가를 불러야할 것 같고, 벽돌 사이 몇군데 매지를 수선해야 하는데, 그것이나 하겠다고 말했다. 이 작은 수리작업을 통해 세로 매지 작업에 대한 이해를 조금이나마 할 수 있었고, 포기하기 전에 한번 다시 해보자 하고 한 게 성공이었다. 작업을 통해 깨끗이 작업하는 방법을 조금씩 배우리 시작했고, 모르타르가 그렇게 위험한 자재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혹여나 어디 튀고 떨어지면 물로 닦아낼 수도 있고 또 염산을 이용해서 닦아낼 수도 있다. 애초에 어디에 튀지 않게 하고 깨끗하게 작업을 할 수는 없고, 정리해가며 작업을 할 수 있었다. 뭔가에 대해 잘 모를때면, 이 무지가 초래할 결과도 잘 모르니, 그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 대상 자체가 무서워지곤 한다. 모르타르가 무서운 건 그래서였다. 흙도 잘 모를 땐 무서워했는데,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흙에 대해 덜 무서워하게 된 것처럼 모르타르도 비슷하게 되었다.

우선 자세히 연구를 하자.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면 시작하자. 잘 안되면 어때. 다시 하지뭐. 안되면 그땐 전문가를 부르자. 무서움은 무지에서 시작된다. 알면 덜 무서워진다.

집은 내가 가꿀 수록 구석구석 더 좋아지는 모양이다. 매지를 바꿨더니 바꾼 매지마저 좋아하게 되니 말이다. 사실 작업이 꽤나 힘들었는데, 내가 아주 나이들어 이런 걸 못하게 되는 때가 아니라면 이렇게 조금씩 배워가는 스킬로 집을 가꿔가면서 더 손떼 묻은 사랑이 넘치는 공간으로 만들어갈 것이다.

새로운 환경을 익숙한 환경으로 바꾸는 기간

코트라 입사동기가 덴마크로 발령이 났단다. 내가 같은 입장으로 덴마크에 온 지 딱 십년이 되는 타이밍에. 참 지난 십년동안 많은 일이 있었구나.

여기 학제로 0학년을 시작해야 하는 둘째 아이와 초등학교를 가야 하는 첫째 아이 둘의 학부형이 되서 오는 거라 내가 경험했던 것과 다른 적응 기간을 거쳐야 할 것이다. 다뤄야 하는 일의 가짓수가 훨씬 많아지는 것이고, 언어 부분에서 엄마보다 힘든 적응 기간을 거쳐야 하는 아이들의 마음도 보듬어야 하니 그 힘듦을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특히 한국 기업에서 일하면서 다른 사람 도움 없이 현지 학교에 아이를 보내야 하는 게 후진국에서 일하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구할 수 있는 환경에 있는 것보다 힘이 들 것 같다.

덴마크가 살기 참 좋은 나라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살기 좋다는 것이 살기 편하다는 말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새로운 환경을 익숙하게 만들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이러는거지? 에 대한 의문이 해결되지 않고는 이미 머리가 굳은 어른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에는 여러 난제가 따른다. 뇌의 가소성이 뛰어난 애들은 질문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를 어른들은 이해가 되고 이를 내재화할 수 있어야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내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어디서나 발견될 보편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배우게 되는 기간이기에 예상치 못했던 일과 비용이 발생될 수 있고, 그러면 화도 나고 보다 꼼꼼하게 챙기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그냥 다른 것이고 배우고 적응해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되면 받아들이게 된다. 과거의 편리함을 버려야 할 수도 있고,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할 수도 있다. 이방인이기에 새로운 터전의 이점이 나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을 수도 있고, 그게 이점임을 깨닫는 순간 떠나야 하는 시간이 올 수도 있다. 빨리 적응하려고 아등바등해봐야 걸리는 시간은 크게 차이나지 않을 수 있기에 그냥 스트레스 받지 말고 천천히 열린 마음으로 관찰을 하고 참여하다보면 서서히 가랑비에 젖어들듯이 적응하게 되는 거 같다.

그렇게 적응을 하고 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도 너무 많이 변해있어서 과거에 내가 생각했던 것이 지금 생각하는 바와 너무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놀래게도 된다. 다른 점이 어느새 매력으로 다가오면서 내 관점의 지평이 열린다. 때로는 새로운 것이 좋아서, 아니면 그 새로운 것에 통합되고 싶은 갈망에 과거의 것과 관점이 부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헤겔의 정반합이 뭔지를 알게 되는 순간이 올 수 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 지는 사람마다 너무 다르겠지만, 그 또한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거 아닐까 싶기도 하다. 파도처럼. 처음에는 아주 큰 파도가. 그 다음엔 그보다는 작은 큰 파도가. 그렇게 파도가 잔잔히 잦아들긴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십년이 된 지금도 아이를 학교에 보내며 아직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부분에서 새로움을 접하고 경험하고, 느끼고, 배우게 된다. 더이상 급진적인 새로움은 없어도 끊임없이 작은 새로움을 경험하게 될 거 같다. 익숙함이라는 큰 틀 속에서. 그런 새로움이 이국 땅에서의 생활을 힘들지만 즐겁게도 하는 마쌀라 같은 거 아닐까?

홍차생활

홍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거의 물 대신 습관적으로 마시는 블랙커피는 몸을 크게 따뜻하게 해주지도 않고, 회사에서 마시는 블랙커피는 집에서 마시는 것처럼 맛있지 않아서 다 마시지도 못하고 차갑게 식어 낭비가 심하기도 하며, 그 씁쓸한 맛이 단 것을 궁금하게 해 결론적으로 살을 찌게 만들기 때문이다.

살이 올라서 다이어트 겸 먹는 양을 줄이기라도 할라치면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몸이 금방 차가워지고 꼭 아플 것만 같은 게 그렇게 하면 안될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운동을 안해서 살이 찌는 게 아니라 먹는 게 늘어서, 남들보다 많이 먹어서 살이 찐 거라 먹는 걸 줄이긴 해야하는데, 어떻게 줄여야 하나 나중에 생각해보자 하고 미뤄두고 있었다. 발레도 매번 힘에 부치는 강도로 주 2회를 하고, 달리기도 주 1회 하고, 주말이면 하나랑 짧게나마 수영도 가고 하니 운동이 부족한 건 아니다. 위가 늘어나서 그런지 먹는게 줄면 어찌나 허기가 진지. 그러다가 홍차를 마시면서 거기에 꿀 한스푼과 우유를 조금 넣어서 먹기 시작했는데, 이게 포만감과 신체의 온기를 가져다 주고 단 것에 대한 욕구를 없애주는 게 아닌가. 꿀 한스푼도 칼로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설탕과 달리 혈당을 급격히 치솟게 하지 않는다 하고 간식 욕구를 없애주니 결과적으로 낮은 칼로리 섭취를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커피도 마시지만 홍차를 하루에 두번은 즐겨 드시는 시부모님 덕에 간혹 홍차를 마시는데, 난 항상 그냥 아무것도 타지 않은 홍차를 마셨더랬다. 우유를 섞어 마시지 않으면 잔에 침전물이 착 달라붙어 착색을 잃으켜서 잔을 정성스레 빡빡 씻어야 하는데, 그게 치아에도 같은 효과를 준다고 하셨다. (전직 치과의사) 우유를 안섞어 마시고자 하니까 치아 착색도 신경이 쓰이고 우유 없이는 차가 향은 좋지만 그렇게 맛있는지도 모르겠고, 해서 마시지 않았다. 어렸을때 캔으로 나오던 로열밀크티를 참 좋아했는데, 엄청 마셔댄 탓에 살이 찐 기억 때문에 차와 우유, 설탕 조합이 싫었던 것 같다.

이놈의 체중 관리는 평생 가져갈 숙명 같은 존재이지만 한번도 쉬운 적이 없었고, 매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성공적이었던 체중관리는 어땠는지. 그리고 매번 성공했던 방법도 바뀌었던 거 같고. 이번엔 아마 홍차가 같이 해줄 것 같다. 다른 건 기억이 나지 않아도 한가지 기억나는 건 항상 성공적이었던 체중관리경험은 어느 정도 의지와 노력은 필요하지만 이게 너무 힘들지 않을 때 가능했다는 건데, 홍차가 체중 관리의 경험을 힘들지 않게 도와주고 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