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rigtig fed klatresession

I dag klatrede jeg med Hannah, min gode makker. Vi klatrede to ruter på slab-væggen, to på overhang-væggen og flere på bouldervæggen. Det van en rigtig stærk session med nogle fede oplevelser. Flere forsøg med lidt tvist hver gang førte mig til at sende et par projekter. Hvor er det sejt. Jeg er også meget glad for, at Hannah også klatrede stærk, samt at hendes sikring er blevet meget sikker, hvilket er rigt vigtigt ved lead-klatring. Det er bare mega dejligt, at vi deler en fælles passion.

Bøger fra Korea

I dag fik jeg leveret bøger fra Korea, som jeg har bestilt til nytår. En gang i mellem bestiller jeg bøger hos Kyobo boghandel i Korea. Som jeg har forstået har boghandlen en sær aftale med FedEx, som gør leveringen utrolig billigt ift. dens hurtige levering og pakkens vægt, som er ret tung. (Det handler om relativiteten, ikke? Det er ikke bare billigt, men billigt ift. ydelsen.) Jeg glæder mig rigtig meget til at læse dem i de kommende måneder.

Kamp mod frygt

Når man klatrer op ad en høj klatrevæg, mens man skal sikre sig undervejs ved at klippe sit reb ind i karabinhager, kommer man en gang i mellem til at tænke på det værst mulige scenarie om fald. Hvad nu hvis jeg bliver flippet rundt og rammer hovedet eller kroppen i væggen eller grebet? Hvad hvis faldet er så voldsomt og hårdt med en pendulbevægelse, at jeg får min ankel eller fod forstuvet?

Præstation ved leadklatring bliver utrolig meget påvirket af mentalitet, hvordan man håndterer frygten, som løbende trænger igennem huden. Frygten opstår typisk lige der, hvor jeg står over for det sidste klip, eller jeg skal lige klippe. Mine håndoverflader bliver våde. De sveder. Åh, nej. Nej. Nej……

Efter de kommentarer, jeg har fået fra mange andre gode klatrere, har jeg prøvet at trække vejret dybere og sige til mig selv, “Det er okay. Min makker har mig. Jeg har øvet mig med at falde. Jeg har det! Jeg kan klare det!”

Der er ikke sket noget særligt hårdt på nær små skader i ankelen i starten af min leadklatreerfaring. Den gang var min makker markant tungere end mig, og han tog mig vist nok hårdt en del gange. Men jeg klatrer nu med andre makkere, som enten er gode til sikring eller ligger i samme vægtklasse, hvilket har løst problemet. Så reelt set behøver jeg ikke at være så bange og skal bare kaste mig ud i klatring, som mine trænere gentagne gange sagde, “I skal klatre til, I falder!”

Bangebuks er jeg stadig. Av, av, av. Efterhånden er jeg alligevel blevet bedre til at håndtere frygten. Det er blot en konstant kamp mod frygten. Frygten er der nok for at beskytte mig. Men den skal ikke tage over. Jeg har det. Det skal jeg bare huske på væggen.

Et kort skriv

I 2025 som mit nytårsforsæt har jeg besluttet mig at skrive hver dag et kort skriv på dansk. Hvad det skal være, har jeg ikke besluttet mig om endnu. Formålet er at få min skriveglæde tilbage, som lige nu er meget aftaget – nærmest forsvundet, samt at få min mentale barrier til at skrive på dansk ned. Her vil jeg gerne prøve at skrive varierende tekster end faglige tekster, som jeg er vant til. Forskellige sætningskonstruktioner vil jeg også gerne prøve dertil. For fokusset ligger i skriveglæden, vil jeg ikke tænke så meget på at skrive 100 pct. grammatisk korrekt. I stedet vil jeg prioritere at skrive et eller andet stykke skriv – i det mindste én sætning – om dagen.

2024 정리 2025 맞이

2024년은 아파서 쉰 날이 한손에 꼽을 수 있을만큼 건강한 한 해였다. 애매한 감기기운은 잦았지만, 또 그렇다고 아프다고 할만큼 한 건 속한번 뒤집어진 것 한번 있었으니 정말 건강한 한해였다. 격년으로 병치레가 돌아오던 것을 생각해보면 올해는 조금 더 자주 아프지 않을까 예상되기도 한다.

2024는 척추와 골반, 온 몸의 체형의 틀어짐을 많이 개선한 한해였다. 어려서부터 척추측만이 있었는데, 강도높은 운동들을 하다보니 이 문제가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척추측만은 발가락, 발등, 발목, 무릎, 골반, 요추, 흉추, 갈비뼈, 견갑, 어깨, 목, 턱, 팔꿈치, 손목까지 정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를 달리 써보려하면 그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통증신호를 보내오고. 일년간 다양한 교정운동, 일상생활 교정 등을 통해 많은 것을 바꿨다. 2023년부터 2년간 노력해온 부분인데, 첫 일년은 한두군데 고쳐보려 하면서 온 몸에 보상행위로 틀어진 곳곳의 문제를 드러내는 시기였다하면, 2024년은 그걸 어떻게하면 고칠 수 있는지 인지도를 높이고 실제 고치는 한 해였던 것 같다. 우리의 몸은 계속 사용하고 바뀌어가는 것이기에 끝이라는 것은 없겠지만 큰 틀에서 척추측만의 많은 부분을 고칠 수 있었으며, 그와 동시에 고관절의 사용에 대해서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2024년이었다. 이제 거울을 통해 등을 보면 척추가 S라인을 그리지 않고 곧게 서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개선인지.

발레가 강도높은 운동인 것은 맞지만, 몸을 길게 쓰는 운동인지라 그것으로는 부족한 부분이 많았고, 그걸 클라이밍으로 보완해왔다. 코로나 락다운 직전인 2019년 말에 유치원에서 클라이밍벽을 좋아한 하나를 데리고 암장을 처음 찾았는데, 보다 안전한 클라이밍을 시켜주고자 빌레이 코스를 들은 것이 내 클라이밍생활의 시작이었다. 그 전에도 친구 따라 높은 벽을 올라본 경험도 있고, 한국에서도 실내의 작은 암장에 가서 볼더링을 잠깐 해본 적은 있지만, 그게 내 것으로 된 적은 없었는데. 석달 클라이밍 하고 났더니 락다운이 되고, 락다운이 풀리고도 제약이 좀 많았어서 거의 2년정도 완전히 쉬었다. 2022년 봄부터 본격적으로 다시 클라이밍을 시작하고 1년후 한나가 시작하고, 또 반년 후 혜민이 시작했었으니 총 3년정도의 클라이밍에 이 둘이 많은 시간을 함께해주었네. 클라이밍 모임인 쁘게 요한 들이 좀 더 커지긴 했지만, 역시나 같이 한 시간이 길어지고 가까워진만큼 이들 둘과 함께하는 클라이밍이 즐겁다. 함께 성장해가는 시간이 즐겁고, 그와 함께 단단해지는 근육은 보람이자 덤. 2024년은 내가 클라이밍에 있어서 중급의 입문단계에 들어가게 한 시기였다. 2025년에 클라이밍 얼마나 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이제 초보티는 확실히 벗었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고 할까. 클라이밍가면 이제 간간히 보이는 얼굴들도 생겨서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덴마크어는 이제 투자하는 노력에 비해 한계적 발전이 크게 떨어졌다. 정말 미묘한 발전들이다. 그래도 그 중 눈에 띄는 것을 꼽자면, 더이상 신문을 보는데 있어서 사전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고, 속독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보고서를 씀에 있어서도 문법적 실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웅얼거리면서 말하는 습관이 있는 화자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집중해야 하는 정도가 줄어들었고, 빠르게 전환되는 점심식사의 화제에서 간혹 하는 딴소리의 빈도가 줄어들었다. 어디가서 덴마크어로 말하는 것에 있어서 긴장되거나 하는 게 사라졌다. 더이상 내가 표현하지 못할 게 없다는 사실이 편안함의 기반이 되어주었다. 2025년에는 2024년보다 숙어적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하는 데에 초점을 두고자한다. 주로 일을 하면서 덴마크어를 사용하다보니 내 단어는 문어에서 많이 쓰이는 표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좀 더 일상생활에 많이 쓰는 숙어와 섞어보고자 한다. 여름엔 Studieprøven의 말하기 시험도 등록했으니, 그거 완료해서 Studieprøven도 완전히 잊어버리고자 한다. 읽기, 쓰기부분은 이미 2020년에 성적을 받았는데, 구술시험날 아파서 시험을 못봤은게 너무 아쉬웠다. 그 당시는 그냥 학원다니며 덴마크어를 좀 더 공부한 김에 시험을 보려던 것였는데, 이제 시민권 딸 때 요건으로 추가될 가능성도 있어 기왕에 반쯤 한 거 2025년에 끝을 보려고 한다.

아이는 너무 잘 크고 있고, 아이와 남편 모두 건강하고, 우리 모두 행복하고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다. 여러 일상에 부침이 있더라도 가족의 베이스가 단단해서 흔들리지 않는 것 같다. 살면서 일상에 대해 감사를 크게 갖지 않고 살아왔는데, 지루할 수 있는 일상도 감사하게 만드는 것이 내 가족이라는 단단한 뿌리 덕이다. 일상의 힘을 느끼게 된다고 할까. 앞으로도 이 일상을 굳건히 키워가기 위해 더 사랑하고 더 노력해야지. 아이와 클라이밍을 좀 더 같이 해봐야겠다. 좋아하는 것을 나누는 다른 가족들을 암장에서 보면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회사에서 지금 하는 프로젝트는 여러모로 힘들고 지치지만 4월이면 끝난다. 같이 하는 동료들과 함께 으쌰으쌰하면서 잘 버텨봐야지. 그러고 나면 또 한층 성장해있을 거라는 믿음을 굳게 갖고. 내 업무의 지식의 깊이를 더하는 한해가 되길.

부부관계

유튜브에서 우연히 이혼사유에 대한 동영상을 보았다. 섹스리스가 이혼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부분이는데, 사람들이 이혼을 하게 되는데 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 소위 성격차이 등을 이유로 헤어지는 경우에 그 기저에 섹스리스가 깔려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그걸 본격적인 이유로 꼽기는 주위의 시선 등 여러가지 까닭으로 저어하지만, 섹스가 부부관계의 역학에 미치는 영향력이 엄청 크다고 했다. 그렇다면 섹스리스가 이혼의 배경이 된 사람들은 왜 섹스를 하지 않게 되었을까?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아서 섹스를 하지 않게 되는 것인가? 그건 각자에게 너무나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특정한 답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면 반대로 성생활이 원활한 부부는 어떤것일까? 과연 배우자가 좋고 사랑해서 섹스를 하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섹스관계도 좋기 때문에 배우자가 계속 좋고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 동영상에서는 섹스관계가 좋으면 엄청 큰 문제가 아닌 이상 작은 갈등은 섹스를 통해 쉽게 풀 수 있다고 했다.

40대 중반의 나와 50대 초반의 옌스는 결혼 초기나 지금이나 성적인 욕구나 관계 빈도 그런 것들이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큰 갈등 없이 잘 지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반대로 원만한 성관계 덕에 갈등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과거의 관계들을 돌아보자면 성관계는 서로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 싶다.

과거의 나는 그닥 많은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 모든 연인관계에서 성관계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안할 수 있으면 안하는게 제일이고 해도 좋은지도 모르겠고, 더러운 느낌도 들고. 또한 그 좋지 않음 자체가 나의 결함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불안함을 안겨주었다. 굳이 좋지도 않은 것을 하고 싶지는 않으니 피하다 보면 그게 또 상대에게도 거절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하고 간혹은 상대의 수동공격적인 반응을 유도하기도 했다. 내가 원치않음을 받아들여주지 않는 상대에게 실망도 느끼고, 혹여나 그런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는 무드 조성을 피하게 하기도 하는 등 괜한 피곤함마저 생겼다.

나는 성적으로 청소년기에 트라우마가 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성관계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걸 이야기할만큼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서 이를 해소할 수 없었다. 옌스는 그걸 내가 털어놓을 수 있었던 첫번째 사람이었다. 사실 확신을 할 수는 없었다.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 내 잘못인 일도 아니었지만 트라우마라는 건 그런거 아닌가. 이성적이지 않은 반응일지라도 그게 갖는 의미나 영향력이 컸기에 이를 타인의 일처럼 객관적으로 보고 보듬을 수 없는 그런 것. 옌스는 나의 트라우마를 내 입장에서 잘 듣고 소화해줬고, 나를 보듬어주었다. 그 덕에 이 일이 더이상 트라우마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성관계가 더이상 더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성관계는 사랑의 언어가 되었다.

결혼 10년차 우리는 더이상 예전처럼 설레임에 두근거리고 그렇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서로를 아끼고 보듬고, 서로를 여전히 남자와 여자로 느끼고 원한다. 일상에 무뎌지지만 서로를 무뎌지지 않게 하는 것은 부부관계라는 사랑의 언어 덕인 것 같다. 나를 원하는 그를 보며 우리는 잘 지내고 있음을 확인하고, 상대도 나와 마찬가지의 감정적 상호 인정을 확인한다. 나의 무수한 결점을 그대로 드러내지만 사랑을 받고, 이는 상대도 마찬가지다. 나신을 보이고 살을 섞고 체액을 교환한다는 것은 가장 나약한 순간에 서로를 나와 하나로 받아들인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리움

보름달이 휘영청 뜬 밤, 발레에서 돌아오는 길, 고속도로에서 바라본 보름달과 때마침 스피커에서 흐르는 다소 드라마틱한 음악이 뒤섞이며 갑자기 한국에 계신 부모님이 보고싶었다. 그냥 보고싶은게 아니라 같이 앉아서 시덥지 않은 이야기도 나누고, 엄마가 시키시는 부엌일을 귀찮지만 몸을 일으켜 하는 순간, 아빠도 도우시라며 핀잔도 드리고, 티비에서 재미도 없는 명절특집 프로그램에 깔깔거리는 게스트들의 잡담이 배경음악처럼 깔리고 하는 그런 정말 명절일상. 그런게 그리웠다. 약간의 눈물이 눈동자를 가리려고 하는 것을 애써 다시 욱여넣고 곰곰히 생각을 해봤다. 왜 갑자기 눈물이 나지? 나 정말 잘지내는데.

그리움이 커지면 슬플까봐, 슬프면 잘 지내지 못할까봐, 그리움의 감정이 생길라치면 억누르고 있는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마음의 욕심이라는게 갈증을 하나 채워주면 더이상 같은 걸로 갈증이 채워지지 않고 더 뭔가 큰 것을 얻어야 갈증이 채워지는 것처럼 보고 싶은 것을 보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고, 또 보고 싶고, 만져보고싶고, 더 경험하고 싶어진다. 정말 충분히 봐서 일정 수준이상 만족도가 채워질때까지는 계속 더 원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것을 피하려고 음식도, 사람도, 자연도. 지금 갖고 있는 것에 감사하는 것으로도 부족한데, 또 더 원해? 욕심 아니야? 이런 생각에 스스로를 애써 억누르고 있는 느낌이다.

그립지만 너무 그리워하지 않고, 적당히 그리울 때 그를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균형. 그런 걸 내가 이미 갖고 있다면 한없이 좋으련만, 나는 적당히가 잘 없는 사람이다. 한껏 좋아할 때 흠뻑 빠졌다가 또 멀어졌다가. 어쩌면 그래서 내가 덴마크에 잘 적응했는지도 모르겠다. 덴마크가 좋을 때 언어고 뭐고 한없이 몰아붙여서 그 덕에 내것으로 온전히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일 수도. 하지만 그래서 그리움에 흠뻑 빠진다면 물을 한껏 머금은 스펀지처럼 아주 무겁게 가라앉을 것 같은 두려움이 크다.

너무 깊게 빠지지 말고 아주 잠깐 그리워하자. 덴마크와 한국, 덴마크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것, 한국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것, 모두를 한꺼번에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으니, 지금의 그리움을 잘 받아들이고 소화해 내가 갖고 있는 것을 감사할 수 있도록 하자.

첫 돈벌이

아이가 나가서 돈을 벌어왔다. 자기가 갖고 있던 장난감 몇개를 친구와 함께 길에서 판 결과다. 두 아이가 햇볕이 따사로웠던, 햇살 없이는 쌀쌀할 수 있던 가을날 길가 잔디밭에 앉아 물건을 쫙 늘어놓고 판매한단다. 하나는 대여섯개 들고 나가서 네개를 팔았고, 다른 친구는 아주 한보따리 싸갖고 나가서 비슷하게 판 것 같다. 소득은 35크로나. 7000원을 벌어왔다. 사실 누군가에게 팔지 않는다면 멀쩡한 것은 골라 내가 적십자에 기부를 하기 때문에 이건 가정경제 차원에서도 정말 공돈이 생긴 거 같은 셈이다.

누구한테 팔았냐고 물어봤더니 이웃집 조금 어린 여자애가 하나 사갖고 나머지는 좀 더 몇집 떨어진 곳에 산 할머니가 사셨다고 했다. 뭐하냐고 물어보는 아이들에게 하나가 “안쓰는 물건 팔아요. 할머니는 손주 있으세요?” 하고 여쭤봤단다. 손주가 있다는 대답에 “손주한테 필요한 거 사주세요. 선물 줄만한 거 있나 보세요.”라고 제안을 했는데 “손주들이 다 너무 어른이라 애가 있어서 손주한테 사줄만한게 없네.”는 거절을 또 들었단다. “그럼 증손주한테 사줄 거 보시면 되겠네요!” 라고 말씀드리니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이것저것 사가셨다는 것이다. 결국 그 한 손님 잘 잡아서 둘이서 70크로나어치를 팔았단다.

어느새 아이들이 커서 나름 흥정도 하며 물건을 파는 것이 어찌나 귀엽고도 대견하던지. 앞으로 더 자주 한다더라. 그런거 하고 싶다고 노래를 물러도 하라는 말 외에는 뭔가 행동을 보이지 않는 엄마가 그닥 도와줄 거 같지 않으니 알아서 우물을 파는구나. 그래. 목마른 자가 우물을 직접 파야지. 그렇게 크는 거란다.

남자애라서 그래

간간히 남자애를 가진 한국엄마들에게 듣는 이야기다. 내가 “여자애”답지 않아서, “여성”스럽지 않아서 느꼈던 한국사회속 좌절을 상기시키는 말이라 그 말들이 귀에 꽂혔다. 거슬렸다가 정답인 것 같다. 그게 내 좌절을 다시금 곱씹게 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그때의 프레임을 떠올리게 했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용감하고 과감했으며, 씩씩했다. 활발하고 활동적이었으며, 무리를 주도하고 이야기의 중심에 서는 것을 좋아했다. 어려서는 “걔는 좀 남자같잖아”라는 게 나를 묘사하는 말이었으며, 그게 내 성별의 틀 안에서 벗어나는 이상함인 것처럼 인식되는 것 같아서 상처를 받았다. 성인이 되어서는 “좀 여성스러워져야 남자들이 덜 부담스러워하지. 너무 자신감 넘치고 씩씩하고 그러면 남자들이 부담스러워해.”라는 말로 내가 뭔가 잘못된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지금은 그게 아닌 것을 알고, 그냥 나는 나인 것을 잘 알고 있다. 아이에게도 여자는 어때야 한다거나 하는 말은 하지 않는다. 일부러 생각하고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과거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정리하면서 인간의 개성이 얼마나 넓은 스펙트럼을 보이는가, 또한 이런 프레이밍이 스펙트럼의 외곽에 있는 사람에게 스스로에 대한 의문을 던져줄 수 있다는 생각이 확고해져 자동적으로 그리 행동하게 되는 것 같다.

어떤 원인을 개인에게 돌리지 않고 그 개인이 속한 그룹에게 원인을 돌리는 일은 편견의 근간이 될 수 있고 책임을 회피하게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좋은 특성이 개인에게 기인하지 않고 그룹에게 속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좋은 성향이 특정 그룹에 속한다는 편견을 조장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나쁜 특성이 개인이 아니라 특정 그룹에 속한다고 생각한다면, 본인의 책임보다는 그룹의 특성이니 이해해야한다는 식의 책임감 회피성을 조장할 수 있다. 과장해 표현한 것이지만 기본적인 메커니즘은 그렇다.

그 이야기를 듣는 그 타이밍에 그 이야기를 딱히 하지는 않았다. 이게 어떤 의식적인 행동은 아니고 무의식에서 나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를 통해 내가 말하는 것에 들어있는 다른 방면의 프레이밍, 편견 등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얻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빠르게 정보를 처리하며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 끊임없이 구분하고 구분된 카테고리에 이름을 붙인다. 그래야 다음의 비슷한 상황에 빠르게 이를 적용하고 대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게 개개인의 머리속에 있는 프레이밍이다. 따라서 이 자체는 나쁜게 아니다. 다만 이에 대해서 스스로 사유하고 정보를 업데이트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의 능력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남자라서 그래”는 너무 단편적인 프레이밍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싸우기

벽에서 다음 홀드까지 도대체 어떻게 닿을 수 있을지 머리로 그릴 수 없을 때,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날 것 그대로 강렬하게 다가온다. 일상의 작은 순간 여기저기에서도 두려움을 느끼지만 그 두려움은 너무나 미묘하게 다가와서 다른 감정과 섞여 그게 두려움인지 알아차리지조차 못하고 지나가게 된다. 그래서 벽에서 느끼는 날 것의 강렬한 두려움을 통해 내가 어떻게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대응하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다.

물론 벽에서 떨어지는 감각이 유쾌하지만은 않다. 우선 떨어진다는 것은 등반완료를 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떨어질 때의 내 위치와 가장 마지막으로 클립한 볼트의 위치의 상대적 관계에 따라 낙하 후 내가 어떻게 진자운동을 하게 될지가 결정되며, 그게 벽으로 향하는 방향일 경우 발과 다리를 이용해 충격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야 한다. 불확실성. 그게 참 싫다.

그 당시에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부어넣고 최대한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하며 특정 포인트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다음 홀드로 넘어가는 것, 그것이 떨어지기 위해 클라이밍 하는 것이다. 떨어지지 않고 다음 홀드로 넘어갈 수도 있지만, 그런게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 빌레이어에게 나를 거기서 쉬게 해달라고 요청하지 않고 다음 홀드로 넘어가기 위해 시도하기. 거기서 떨어지고 나면 다시금 그보다 아래에서 올라가야 하니 에너지가 쓰이기도 하고 정말 떨어지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백업 플랜을 생각하지 않고 시도하는 것, 그게 실력을 늘린다고 한다. 즉 내 한계선을 밖으로 밀어내는 행위가 실력향상의 지름길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불확실성에 대한 회피, 이게 내 클라이밍을 보여주는 단어였다. 사실 나는 오래 클라이밍을 하고 싶기 때문에 부상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싶어서 그런 두려움과 회피를 키운 것 같다. 부상가능성을 최소화하면서도 낙하시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를 훈련하고 배우는 것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그 자체를 피하고 싶었던 것 뿐인데, 회피가 두려움을 키우고 있었다.

이게 내 일상에서는 어떻게 작용할까로 생각이 미쳤다. 한계를 밀어내는 것. 그게 내 요즘 직장생활에서 부족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냥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한계를 밀어내는 자체를 하지 않다보면 더 그게 두려워져서 자기 계발에 둔해지는 것 같다. 아마 그게 요즘의 나였던 것 같다.

두려움에 직면하고 이를 경험하고, 이에 대응하는 방법을 배우며 성장하는 것, 그것이 클라이밍에서 요즘 새로이 배운 인생의 레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