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wedding speech :)

I would do my speech both in English and Korean as I have guests from different backgrounds. So it will be exceptionally long for a bride’s speech. It is okay to fall asleep.

Undskyld mig for ikke at tale også på dansk. Det er min brudens tale og jeg vil gerne udtrykke mine tanker og følelse fuldtud. Men mit dansk er ikke så godt nok til at gøre det. Så jeg vil bare tale på engelsk og koreansk. Måske allerede er der nogle gramatiske fejl.

First of all, thank you so much for everyone once again who came all the way from different parts of Denmark and the world. I am very grateful that I could share this precious moment in life with people that I care about.

우선 먼 곳에서 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제 인생의 소중한 이 순간을 제가 아끼는 분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고 있어요.

I met Jens at an online dating site. As an economist, I wanted to be most efficient and effective even in terms of dating someone. Jens was my first date at the site, and he became my husband. It cost only 100 kroner to find my husband and he has been the most amazing and the best man that I have ever known! So, that 100 kroner was very cheap but the most efficient and the most valuable investment in my life.  

저는 옌스를 온라인 데이팅 사이트에서 만났어요. 경제학자로서 저는 누군가를 데이트하는 순간마저도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이고 싶어했지요. 옌스는 거기에서 만난 첫번째 데이트였고, 제 남편이 되었어요. 제 남편을 찾기까진 단돈 100 크로나가 들었을 뿐인데, 그는 제가 여태껏 알아온 중 가장 훌륭하고 놀라운 남자였답니다. 그러니 이 100 크로나는 아주 쌌지만, 제 인생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가치있는 투자였어요.

Since there are some of guests, who didn’t have enough time to get to know him well, I would like to introduce him a little bit. Maybe this proud introduction would be against Janteloven in Denmark, unwritten rule telling people not to be proud, but I would do it anyway as it is my wedding dinner. 🙂 Jens is an incredibly sweet, caring, loving, artistic, hard-working, good-looking, keeping house clean, intelligent, humorous, calm, relaxed, down-to-earth, humble, tall, lean, no-smoking, not-drinking-heavily man. I should cut it here, because it will take nearly this whole night to descibe good things about him.

He didn’t make me nervous by playing games, and has made me smile or laugh by sending me some witty SMS’es from the beginning. One day after our first date, he sent an SMS starting like this, “The rules said that guys should wait 2-3 days before contacting a girl for the next date, otherwise the guy would look too desperate. And I was desperate.”

옌스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간단히 소개해드릴께요. 이런 자랑스러운 소개를 하는 것이 자만하는 것을 금하는 덴마크의 얀테법에는 다소 어긋나겠지만, 오늘은 제 결혼파티날이니까요. 옌스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다정하고, 잘 챙기고, 사랑하며, 예술적이고, 근면하고, 잘생겼고, 집을 깨끗이 관리하고, 명석하고, 유머러스하고, 침착하고, 여유가 있으며, 현실적이고, 겸손하고, 키크고, 잘생겼으며, 담배도 안피우고 술도 과하게 마시지 않는 남자에요. 여기까지만 할께요. 옌스의 좋은 면을 다 설명하려다가는 오늘 밤이 다 가 버릴테니까요.

그는 한번도 밀당 게임을 하는 식으로 저를 불안하게 한 적이 없었고, 처음부터 아주 위트있는 메세지를 보내며 저를 미소짓거나 웃게 만들었죠. 첫 데이트 이후 바로 다음날, 그는 이렇게 시작하는 문자메세지를 보낸 적이 있어요. “데이팅 법칙에 따르면, 남자가 여자랑 다음 데이트를 정하기까지 2~3일은 기다려야 절박하게 보이지 않는다고들 하지요. 그런데 저는 절박했어요.”

Jens. Thank you for being you and being with me, accepting me as your life partner to spend the rest of our life together. Thank you for being patient. I still remember our first walk around our neighborhood, trying to talk only in Danish, though it was even before for me to have a proper Danish education. That one hour was incredibly long, mostly filled with Umm… Jeg… umm… You have been patient always to listen to what I was trying to say. It was not just my Danish. But my feelings, my ideas, how my life is in Denmark, how my study is. You have not just been my partner, but have also taken over the roles that my parents had taken for me, and have been so much more than I could have imagined what a partner could be like.

I love our childish moments and jokes, and our economists’ dance turning into judo or wrestling. I love our small rituals such as three kisses or kyskyskys. I will love you until we cannot properly walk, and until the only sports we could play together is balloon tennis at a nursing home. You will always have your husband’s rights to have massages every four hours as you demand. I will complain just a little bit like, saying okay, okay, okay. I love you. Jeg elsker dig.

옌스. 당신이어서, 나와 함께 해줘서, 나를 여생을 함께 보낼 인생의 반려자로 맞이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항상 인내심을 가져줘서 고마워요. 나는 아직도 덴마크어로만 말하며 걸었던, 우리 동네에서의 첫 산책을 기억해요. 그땐 아직 제대로된 덴마크어 수업을 받기도 전이었죠. 그 한 시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길었고, 대부분이 음. 나는. 음으로 채워졌었죠. 당신은 항상 내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듣기위해 인내심을 가져줬어요. 그건 단순히 덴마크어뿐 아니라, 내 감정, 생각, 덴마크에서 내 삶이 어떤지, 내 공부는 어떤지 말이죠. 당신은 단순히 내 파트너일 뿐 아니라, 내 부모님이 나에게 해주셨던 역할도 이어받았으며,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파트너란 어때야 하는 것인가 이상의 사람이 되어주었어요. 나는 우리의 유치한 순간과 농담들, 유도와 레슬링으로 바뀌곤 하는 우리 경제학자간의 춤을 사랑해요. 그리고 우리만의 삼세번의 키스와 같은 의식들도 사랑하죠. 나는 우리가 제대로 걸을 수 없을 때까지,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스포츠라곤 양로원에서 하는 풍선 테니스가 될 때까지 당신을 사랑할께요. 당신은 당신이 요구하는대로 매 네시간에 한번씩 마사지를 받을 수 있는 남편의 권리를 항상 가질 수 있으며, 나는 알았어요, 알았어요, 알았어요, 하는 작은 불평을 할 거에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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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are my king! 😀

Thank you so much mor og far for bringing up your son to this fantastic man and letting me be his life partner. And thank you also for being my another parents in Denmark. New family is a beautiful by-product of the marriage. I now have amazing family members on top of my loving family in Korea. Mor, far, Gry, Frederik and all the other family members, thank you for welcoming me to your family. I would be your another loving daughter and sister. Tusind tak!

어머님, 아버님, 당신의 아들을 지금의 아주 훌륭한 남자로 키워주셔서, 그리고 덴마크에서 제 또다른 부모님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로운 가족은 결혼의 아름다운 부산물이에요. 저는 한국의 제 사랑하는 가족에 더해 어머님, 아버님, 아가씨와 아주버님, 그리고 다른 친척까지 좋은 가족을 얻게 되었어요. 저를 가족의 일원으로 환영해주셔서 감사하고, 저 또한 사랑하는 딸과 여동생이 될께요.

I am happy to have my parents and aunt all the way from Korea, and Sunse and Dennis from Switzerland. Thank you for flying over to Denmark only to celebrate our wedding in this dready time of the year. This long distance sucks, but that does not mean that our distance in mind is also long. Even though I am away from you, and may not be in touch with you as frequent as before, I am caring and loving you my family and friends, missing you even more.

한국에서 여기까지 먼 길 와주신 부모님과 이모, 스위스에서 온 순재언니와 데니스 형부, 이 음울한 계절에 단지 제 결혼을 축하해주러 덴마크까지 먼길 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이 장거리는 참 몹쓸 것이지만, 그 거리가 마음의 거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에요. 멀리 떨어져있고, 그 전처럼 연락을 자주 하지는 못하더라도, 제가 여전히 제 가족과 친구를 사랑하고,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고, 오히려 더하답니다.

Sometimes, it feels like I am an undutiful daughter leaving my own country flying half way around the world in distance, not being able to be next to you mom and dad, but I know that you are happy for me that I met my Mr. Right, the perfect match and that you bless me and this marriage. Thank you for being my parents. You brought me up to have my life full of happiness, enlightened my life with your loving care, lessons of life and the education. You have been my mentors and you will always be. I will always dream, pursue, learn, love and be considerate or at least try to do or be so as you have taught me to. And I will be happy, I promise.

때로는 지구의 반바퀴를 날아와야 하는 곳에 떨어져있다는 사실이 제가 불효녀인 것처럼 느껴지게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운명의 짝을 만나게 된 것을 엄마 아빠가 누구보다 행복해하고 계심을, 저와 이 결혼을 축복해주심을 잘 알아요. 저의 부모님이어 주셔서 감사해요. 제 삶을 행복으로 가득하도록 저를 키워주셨고, 사랑과 삶의 교훈과 교육으로 제 삶을 밝혀주셨죠. 제 인생의 멘토가 되어주셨고, 앞으로도 계속 그리해주시겠죠. 저는 항상 꿈꾸고 그를 추구하며, 배우고, 사랑하고 배려하며 살께요. 그렇게 못되더라도 최소한 그리 노력하고 살께요. 그리고 항상 행복할께요. 약속해요.

제 긴 스피치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Thank you all for being patient to listen to my long speech.
Jeg elsker dig, skat.

대학원 첫 시험을 치르고

홀가분하다. 한 주 후에 다시 시작될 과목을 준비할 것을 생각하면 마냥 홀가분해할 수는 없겠지만, 이번 주말만큼은 친구들과 와인을 앞에 두고 시끌벅적 떠들고, 한국에서 오는 가족들과 상봉도 하고, 산책도 하며 마냥 즐기리라.

시험 전날부터 서서히 시험에 대한 무게가 어깨를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초조함. 시험기간이 되니 괜한 손톱만 괴롭히게된다. 오후 두시. 시험까지 23시간이 남았는데, 아직 미처 읽지 못한 챕터가 남아있고 작년과 제작년 시험문제는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했다. 제한된 시간 내 전체 이론을 충분히 숙지하고 시험을 볼 것이냐, 과년도 시험문제를 중심으로 공부할 것이냐로 고민을 하다가 이론 공부를 우선순위로 택했는데, 프로그램내 다른 학생들은 다들 과년도 시험문제를 푸는 것을 중심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남과 다른 선택을 할 때면 불안함이 엄습한다. 과연 내가 옳은 선택을 한 것인지 확신이 없기에. 그러나 그간 세번의 과제를 무리없이 제출했으니, 시험이라고 다를 바 있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 불안함을 가능한한 멀리 밀쳐둔다.

오전부터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으니, 잠시 산책도 하고 장도 봐오자 싶어 밖으로 나왔다. 오전내내 자욱했던 안개는 사라지고 축축하리만치 이슬이 잔디에 잔뜩 내려앉았다. 조금 걷고나니 신발이 다 젖어버렸다. 넓은 잔디에 사람은 없고 갈매기와 비둘기만 보인다. 바닷가라는 생각은 안하고 살지만, 사실 바다에서 매우 가까운 곳이라 나라 어디에서고 갈매기를 볼 수 있는데, 그게 아직까지도 나에겐 낯설고 신기하다. 아주 큰 갈매기는 거의 매같은 느낌이지만, 작은 갈매기는 다리도 가늘고 길쭉한 게 흰색 깃털로 빼입어 괜히 아는 채 하고 싶어진다.

우리 동네의 잔디밭은 매우 넓지만, 아파트로 잘 숨겨져있어 잘 보이지 않는다. 가장 넓은 쪽으로 걸어들어갔는데, 역시나 나밖에 없어 방해받을 게 없는 기분이다. 아차. 내가 거기에 있는 새들에게는 방해꾼이겠구나 싶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한국보다 위도가 높은 이곳에선 가을부터 해가 아주 낮게 누워서 지나간다. 두시면 해가 눈을 향해 바로 들어와 석양 직전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 때문에 겨울엔 햇볕을 쬐도 추위에 큰 도움이 안되는 듯 하지만 그래도 그 빛깔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시험기간이라고 안에만 처박혀있었더니 낙엽이 많이 져버렸다. 부모님이 오시면 그 끝자락 남은 것 보실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비바람이 남은 기간 남은 단풍을 다 쓸어가버리지 않기만을 빌어봤다. 덴마크에서 많이 보는 수종이 우리와 다른 것도 있고, 나이가 다르고, 가지치기를 하는 방식도 달라서 가로, 잔디밭, 숲에서 보는 상당수의 나무는 밑둥부터 아주 굵고 키가 아주 크거나 옆으로 넓게 퍼져있다. 그래서 잔디밭에 몇그루의 큰 나무가 낙엽을 소복히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녹색 위에 노랗고 빨간 빛깔이 켜켜이 내려앉아 한 폭의 그림과 같은 풍경을 그리곤 한다.

30분의 산책동안 신발은 흠뻑 젖었고, 스트레스로 인한 나의 흥분도 조금은 가라앉았다. 시험기간이라고 라면만 먹지 말고 좋은 음식도 먹어야 뇌도 활동하지, 시험 전엔 좋은 음식을 먹어야겠다 라는 생각으로 동네 수퍼마켓에 들러 특가 할인하는 쇠고기 스테이크를 사갖고 돌아왔다.

마지막 챕터는 가장 최근에 배운 것이고 수업 중 잘 이해를 했으니, 목차만 읽어보고 나머지 시간동안은 과년도 문제를 훑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한 시험세트당 4시간 분량이니 모두 샅샅이 보고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할 수 있는 것만큼만 하기로 했다. 저녁 9시, 더이상은 읽을 수가 없었다. 공부 더이상 못하겠다고 스트레스 받는다고 하자, 옌스는 어차피 지금 모르는 건 읽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거 없으니, 스스로 여태까지 해온 것을 믿고 푹 쉬라고 한다. 기억도 나지 않는 쓸데없는 농으로 나를 박장대소하게 했고, 그 덕에 나는 마음 편히 공부를 접을 수 있었다.

시험 당일, 4시간 동안 집중해서 문제를 풀어야 하니 공부는 안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챕터 소제목과 정리노트를 눈으로 가볍게 훑어내린 후 모든 것을 덮었다. 오픈북 시험이니만큼 관련 자료를 바리바리 쌓긴 했지만, 4시간 동안 약 30문제를 과연 얼마나 자료를 보고 쓸 수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도 몇번은 아주 요긴하게 활용할 거란 생각에 소중하게 챙겨뒀다.

컴퓨터 시험인데, 내 디지털 펜이 시험시간 5분전에서야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일부러 미리가서 다 세팅도 하고 준비했는데, 왜 펜 테스트는 안했지 하는 자책감도 들었지만, 컴퓨터를 리부팅하고 펜이 작동하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시험 폴더가 컴퓨터에 나타났다. 데이터와 배경 상황만 거의 반페이지가 넘는데, 난 반도 미처 못읽은 상황에 컴퓨터 타자소리가 홀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금방 타닥타닥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괜히 초조함만 가중되었다. 마침 갖고 온 귀마개가 생각나 이를 귀에 꼽고나니 소음이 가라앉으면서 마음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도 금방 시험에 몰입해들어갔다. 갖고 온 자료도 많이는 아니더라도 몇가지 공식과 가정 등을 확인하는 중요한 순간에 요긴하게 써먹었고, 내가 다 읽지 못한 챕터에서 많이 출제되었지만, 한문제 빼놓고는 무리없이 풀어냈다. 네시간 동안의 시험동안 대부분의 학생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문제를 푸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6시, 못풀었던 문제를 풀려고 하는 순간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닫힌다. 제출 버튼을 누르고 일어나니 각자의 얼굴에서 희비가 갈린다. 학생들 모두 나름의 기준과 기대를 갖고 오늘의 시험에 임했으리라. 누구는 통과만 하기를 바라며 본 사람도 있고, 누구는 좋은 성적을 받기를 바라며 본 사람도 있다. 어차피 성적이 앞날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에 점수에 일희일비할 것도 없지만, 혹시나 나중에 공부를 더하려고 하면 성적도 중요하니 초조한 마음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시험 전날 마지막까지 집중하지 못하는 나를 보고 실망스러움도 일면 들었으나, 그게 나인 것을 받아들여야지 어쩌나 하며 넘어갔다.

7시. 내가 제출했던 시험의 pdf 사본이 메일로 날아들었다. 어떻게 썼는지 읽어보려고 했지만, 집중도 되지 않아서 접어두었다. 혹여나 성적이 영 이상하면 그때 다시 열어나봐야지 하며 보관함으로 넘겨버렸다.

시험은 대충 잘 본 것 같다. 시작이 반이라는 마음으로 첫 스타트를 잘 끊어야겠다 싶어 더욱 열심히 했다. 혹여 결과야 어떻든 내가 그리 싫어했던 과목인 계량경제학을 스스로 만족할만큼 공부하고 이제는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매우 큰 수확을 했으니, 겸허히 받아들여야겠다.

오늘부터 주말은 (밀린 집안일 빼고) 자유다.

이젠 정말 가족이다.

옌스네 조카 생일이 있어서 생일파티에 갔다. 작년부터 조카들 생일에 두번씩 갔으니 생일로는 6번 갔고, 기타 이래저래 간것까지 여동생네 집에 열번 이상은 간 것 같다. 항상 함박웃음을 띄는 가족들은 처음부터 나를 따스하게 맞아주었지만, 10명 이상이 모이면 간간히 대화가 덴마크어로 전환될 때도 있었고, 그럴때면 옌스만 바라보고 있기도 애매하고 뻘쭘하지 않은 듯 뻘쭘하게 있어야 했다. 꼭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만이 아니라 그들이 아무리 따뜻하게 대해줘도 친해지는데 걸리는 물리적 시간이 걸려서였을 것이다.

갈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편해지고 있음을 느끼긴 했지만, 오늘 처음으로 우리 가족 모임에 간것만큼 편하게 있다 왔다. 결혼을 통해 옌스의 여자친구가 아닌 아내가 되어서 그런지, 이모님네 가족과 옌스 사돈댁 어르신들 모두 그전보다 훨씬 편하게 대해주셨고, 조카들도 더이상 나를 어려워하지 않는다. 아직 모든 대화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간혹 상황을 놓치면 옌스에게 조금씩만 도움을 받으면 되니, 대화에서 소외되는 기분이 없어졌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긴장감도, 상황에 익숙해지고 나니 다 없어진 모양이다. 만날 때 이름을 꼭 불러주고, 대화 중간중간 이름을 불러가며 대화한다던가, 서로 안아주며 인사하는 방식, 어떤 타이밍에 뭘 하는지 등 소소한 것 같지만 모르면 약간 주춤하게 되는 것들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몸에 익었다.

내 마음안의 변화도 크게 한 몫을 한 것이리라. 예전엔 옌스의 여자친구의 입장에서 간 것이라면, 이제는 진짜 가족의 테두리 안에 들어선 입장으로 갔기에 보다 자연스러워져서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었을 게다.

무엇때문이든간에 덴마크에서 내가 잘 정착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해주는 가족들의 마음이 느껴져서 시댁에 놀러가는 일이 참 즐겁다. 시누이네 집에는 맨날 초대만 받아 놀러가서 미안한과 고마운 마음이 크다. 웨딩 디너로 드디어 그들을 우리가 초대하는 일이 생겨 마음이 조금이나마 놓인다.

우리 부모님이 멀리 사시기에 시댁과 친정간의 교류가 잦기 어렵다는 점은 시누이네 가족 행사때 자주 만나시는 그분들을 볼 때마다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이번 웨딩 디너로 만나서 인사도 하시고, 부모님이 덴마크에 놀러오실때나, 내후년 쯤 시부모님이 한국가실 때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아쉬운대로 자리를 마련해야겠다.

옌스의 총각파티 준비 에피소드

결혼은 했지만 가족, 친척, 친구를 대상으로 결혼을 알리는 정식 파티는 나의 대학원 일정 등의 문제로 1주간의 방학기간 중 하려고, 아직 하지 않았다. 파티를 2주도 채 남기지 않은 오늘, 남편의 친구들과 사촌이 총각파티를 해주기 위해 찾아왔다. 미리 신랑의 일정을 빈 일정을 확인하고 참석대상자의 연락처를 파악하는데 협조를 이미 요청해왔기에 총각파티를 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뭘 어떻게 할 지는 자세히 듣지 못했었다. 연락처 파악하느라, 한번도 한 적 없는 옌스의 핸드폰을 해킹할 수밖에 없었는데, 핸드폰 비밀번호는 서로 모르기에, 옌스가 청소기를 돌리던 중 핸드폰에서 문자를 확인하고 충전기에 꼽아둔 것을 화면이 잠기기 전에 얼른 빼내어 방에 들어가 전화번호부를 신속하게 뒤졌다. 원래는 하객 리스트의 이름을 갖고 덴마크 인터넷 전화번호부를 검색해 찾아보려 했는데, 다들 개인정보 보호차원에서 이름을 지워둔 탓에 실패했고, 항상 이메일을 로그아웃하는 치밀함 덕에 컴퓨터를 뒤지는 것도 소득없이 끝이 나버렸다. 옌스가 방문을 열고 청소하러 들어올까봐, 혹여나 중간에 핸드폰을 찾아헤맬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못 알아챈 듯 했다.

원래는 친구들이 토요일로 계획을 해두었기에 그 날 일정이 없도록 해두었으나, 가장 많은 사람이 되는 날에 잡으려다보니 갑자기 금요일로 일정을 바꾸면서 일이 살짝 꼬였다. 옌스는 금요일 수영을 가려고 했었고, 다음주말에 출장을 가야하는 일정상 이번 주말이 아니면 안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블록도 끝나고 시험까지 시간 조금 있으니, 수영 가지 말고 나랑 밖에 저녁먹으러 가자고 했는데, 나 때문에 일정을 바꾸라고 한 적이 없어서 혹시나 눈치챌까 신경이 쓰였다. 다행히도 아무런 의심없이 그렇게 하자고 했던 옌스는 오늘 오후 회사에서 퇴근하기 얼마 전, 빨리 퇴근하고 저녁 같이 먹고 주말을 즐기고 싶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아이고 미안해라.

샴페인 한병과 맥주 몇병, 과자 두봉지를 사갖고 온 옌스의 친구(또는 동료)들과 옌스와 참 닮은 옌스의 사촌 세명과 함께 옌스가 올 것을 기다리면서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남자들이 생각하는 숨막히는 여자상에 대해서도 듣고 (결혼을 앞둔 옌스를 위해 나에게 숨막히는 아내가 되지 말라는 조언. 동감하고, 또 그렇게 쓸데없는데 뺄 힘과 열정도 없다.) 나를 만난지 얼마 안되서 한 친구(이자 직장동료)에게 다가가, 이번엔 뭔가 다르다면서 옌스답지 않게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관계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옌스의 가족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도 듣게 되었다. 옌스가 나를 만나기 전보다 편안해지고, 안정되어 보인다고, 가족들도 함께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쉽게 가족처럼 녹아들어 나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안그래도 가깝게 느껴지던 시가족들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그 얘기를 듣고, 옌스의 다른 친구(이자 또 동료)가 “옌스가 당신을 만나고서는 예전보다 일찍 퇴근해요. 제일 늦게가던 옌스가 남들과 비슷한 시간에 퇴근하기도 하고, 주말 출근이 눈에 띄게 줄었어요. 가정적으로 변하는거죠.”라고 이야기해줬다. 정말 옌스의 주말 출근이 눈에 띄게 줄었다.

옌스 없이 옌스의 동료와 사촌과 대화를 한시간 반 가까이 하게되니, 그들이 보는, 내가 보지 못한, 회사에서의, 어린시절의 옌스에 대해 들을 수 있어서 참 좋더라. 항상 나에게 그는 “나는 똑똑한 사람은 아니고 그냥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누누히 이야기하지만, 내가 아는 그는 노력할 뿐 아니라 많이 알고 쌓아가는 사람이다. 회사 동료들은 그가 많은 것을 알고 경험도 풍부하지만 결코 그를 드러내지 않으며, 남이 조언을 구해서 이야기해줄 때, 자신이 아주 잘 알고 상대가 잘못하고 있는 것 아는 순간 조차도, “제가 이런이런 것을 해본 결과로는 이렇기에 당신이 한 것과는 다르네요. 이렇게 해보면서 어떤게 더 좋은 결과를 내는지 확인해보는 것은 어떨까요?”라고 물어보는 식으로 상대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 내가 아는 옌스와 같지만, 실례로서 일터에서 어떻게 일하는지 듣는 것은 또 다른 기분이었다.

그들이 한 말 중 내가 가장 동의하는 건, 그들이 본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옌스는 내가 본 중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에게 등을 돌리지 않을 사람이라는 확신을 주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을 배우자로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이 흘러 옌스가 도착할 쯤, 우리는 복도를 통해 공동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만 들리면 그게 옌스인지 아닌지 숨을 죽여 소리를 들었다. 퇴직 후 집에서 혼자 공부하던 6개월동안 옌스가 퇴근할 시간이 되면 거실 책상에 앉아 같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옌스가 열쇠를 따기 전 문을 열며 “Velkommen til!(환영합니다!)”를 외쳐온 나는 이제 소리만으로 그게 옌스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다. 조금만 소리를 듣고도, “아, 저건 옌스가 아니에요”라고 판단하는 나를 보고, 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침내 옌스가 집에 도착했을 땐, 평소와 다름없이 “Velkommen til!”로 맞이하며 3번의 키스(이건 한국식 삼세번을 가미한 우리만의 인사 의례이다. 한번은 섭섭하고, 두번은 정이 없으니…)로 그를 맞이했고,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그는 긴 한주가 마침내 끝났다며, 레드와인 한잔 마시면서 나랑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서 거실에 들어섰다.

이 무슨 황당한 상황인가 하는 황망한 표정의 그를 보며 그의 친구들이 그를 환영해주었고, 샴페인과 맥주를 들며 오늘 뭐할지 전혀 알지 못하는 옌스에게 괜한 공포심을 조성했다. 와인 테이스팅 하면서 이런저런 것을 할 것이라는데, 한명이 미리 레스토랑에 가서 준비를 하고 있단다. 어디로 갈 지, 뭘 할 지 전혀 모르는 옌스는 눈을 안대로 가리고 택시를 타고 떠났다. 옌스가 그렇게 긴장한 모습은 처음봤다. 지난번 다른 사촌 결혼식때나, 오늘 같이 온 친구 결혼식에 맞춰 했던 총각파티에서 부어라 마셔라 및 무지막지한 야외활동 등을 기억하니 긴장 되는가보다.

옌스가 새벽 언제 올지 모르니 나는 들어가서 자야겠다. 샴페인 두잔 마시고 약간 헤롱거려 공부하기 어려우니 저녁내내 딴짓만 많이 했다. 내일은 시험공부를 본격적으로 해야지.

35년 수영불능자의 수영 강습기

옌스가 카약을 타기 시작한 것은 이제 거의 만 3년전 일이다. 클럽에서 카약 지도자 과정도 들으면서 주니어 강사로 봉사도 하고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덴마크어로만 진행되던 옌스네 클럽 과정이 올해부터는 영어로도 진행하기로 하면서 원하기만 한다면 들을 수 있는 여건은 형성되어 있다. 바다에 나가서 육지를 바라보는 일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일임은 배를 타고 나가서 봤기에 잘 알고있고, 파도가 거칠 때는 파도와 싸워 노를 져 가는 일이 긴장되지만 두근거리는 멋진 경험일 것이라 생각한다. 나도 진작에 올해부터 카약클럽에 가입하고 싶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수영. 나는 수영을 못한다. 바다의 수온이 한여름에도 20도를 넘지 않고, 봄이나 가을에는 5도 내외로 내려가기에 수영을 하기 위한 여건이 수영장보다 열악하기에 수영장에서 수영을 잘해도 추운 바다에서는 더 어렵게 마련이다. 따라서 카약을 홀로 타기 위해서는 600미터를 쉼 없이 수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지역 수영장의 초보자를 위한 코스는 항상 초과등록되어 있어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도 연락이 잘 오지 않고, 오더라도 주중 대낮 한가운데 시간이 잡혀있어 등록하지 못하곤 했었다. 알고 보니 대학내 스포츠 시설이 참 저렴하고 좋더라. 수영 초보자 코스도 충분한 인원을 수용할 수 있게 개설되어 있었고. 물공포증이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코스를 들어야 하는지, 그냥 초보자 코스를 들어야 하는지 고민을 하다가, 초보자 코스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선택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만해도 물이 무서워서 수영을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기에.

대학 수영장에는 다이빙 시설이 되어있는데, 그러다보니 물의 깊이가 일반 수영장보다 훨씬 깊다. 그쪽으로 수영을 하면서 깎아지르듯이 깊어지는 바닥을 보니, 갑자기 가슴이 턱 막히듯 답답해지면서, 그 정도는 크지 않아도 나에게 물공포증이 약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영을 잘 못하니 물이 무서운 것인지, 물이 무서워서 수영을 잘 못하는 것인지는 잘 몰라도 말이다.

어려서부터 그간 수영에 꾸준히 돈을 투자했지만, 자유형으로 10미터 이상을 제대로 가본 적이 없고, 수영 교육의 기초가 자유형에 있다보니 그를 통과하지 못한 나는 어떤 영법도 터득하지 못했다. 그냥 어쩌다보니 등으로 뜨는 것만 터득했을 뿐… 한두달 다니다 관두기를 여러차례, 항상 똑같은 자유형만 반복했는데, 강습의 순서는 어딜 가나 판에 박힌 듯 짜여져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달랐다. 우선 한명이 가르치는 수업과 달리, 학교에서 일주일에 한시간씩 배우는 수영코스는 한 명의 전문 코치와, 또 다른 한 명의 아마추어 코치가 짝을 이뤄 가르치고 있다. 덴마크어로 가르치면 나는 세세한 내용은 이해하지 못하기에, 외국인은 나 혼자 뿐이지만 영어로 수업이 진행된다. 제일 처음 한 것은 입을 벌리고 물에 입의 반 정도가 잠기게끔 한다음 숨을 쉬는 것. 입에 물이 있어도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항상 자유형 하면서 고개는 돌려도 숨을 쉬지 못한 이유는 입에 물이 있어서였는데, 입에 물이 있어도 숨을 쉴 수 있다니! 양치질을 하면서도 숨을 쉴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간 내가 얼마나 물을 무서워하면서 비이성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는지를 알아채며 깜짝 놀랐다.

수영에서 중요한 것은 물 속에서 몸의 균형을 잘 잡는 것이란다. 물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꽤 되자, 우선 배영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균형도 잡아야 하고, 두려움을 뚫고 숨도 쉬어야 한다면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없게 되니 방법을 바꾼 것 같다. 중간중간 사람들의 수준에 따라서 유연하게 과정의 구성을 바꿔주니 내가 이번에는 제대로 할 수 있으려나 하는 자기 불신을 뚫고 매주 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호흡의 리듬을 찾지 못해 중간에 차오르는 숨을 참지 못하고 나오는 사람들이 많자, 그 리듬을 찾게 하고자 물속에서 점프하면서 전진하는 식으로 수영은 하지 않고 숨의 리듬을 찾는 것만 집중하게 하였고, 기타 다양한 방법을 활용해 여러 항목에 조금씩 익숙해질 수 있도록 하였다.

지난 시간까지만 해도 배영을 하면서도 코를 통해 마시게 되는 물이 두려웠는데, 오늘부터 갑자기 배영이 편안해졌다. 그러나 지난시간까지도 자유형은 여전히 그놈의 숨을 쉴 때마다 물을 들이키게 되고, 그러다보면 두려움에 빠져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되곤 했었다.

결국 초급반에서 물을 두려워하고 숨을 잘 못쉬는 4명을 분리해서 얕은 풀에서 가르쳤다. 거기에는 나도 포함되었다. 물속에서 점프해 돌고래처럼 잠수해 바닥을 짚는 식의 트레이닝을 포함해 한국에서는 해본 적 없는 이러저러한 트레이닝을 시키는 대로 따라하다보니 얕은 풀에서 12미터 수영이 가능해진게 아닌가! 막판 5분을 남기고 다시 깊은 풀로 돌아가 25미터를 한번에 가는 연습을 했는데, 마지막 5미터 정도를 남기고 한번 일어났다. 20미터 가까이를 한번에 간 것이다. 내 개인 기록이고, 조금 자신이 붙기 시작한다.

흑. 이번 과정이 끝나고 나면 수영을 하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나면 꾸준히 수영하러 다녀야지… 조금 자신이 붙고 나니 수영이 재미있어진다.

사람은 꿈의 크기만큼 큰다.

사람은 꿈의 크기만큼 큰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신 이야기다. 앞글자 하나만 꺼내도 무슨 말씀 하실지 알만큼 반복되었던 이야기들은 잔소리같이 들려서 자꾸 듣기 싫었는데, 거의 세뇌라고 해야하려는지, 그 말들은 마음속과 머릿속에 새겨져서 지워지지 않는다. 각인이 될만큼 자주 하신 말씀들은 나의 삶의 앞길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언젠가는 책 한권을 쓰라는 말씀 – 아직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내지는 못했지만, 인생의 숙제와 같은 마음의 짐이다. – 을 포함해 몇가지 인생의 화두라며 던져주신 단어들. 또 말씀하시냐며 핀잔을 드리곤 했지만, 그 말씀이 옳으면서도 행하기 어려운 말씀이었기에 회피하고 싶어서 그랬던 듯 싶다.

내 꿈은 아직도 그 형상을 주무르고 있는 미완의 형태이기에 그 꿈만큼 컸다 아니다를 말하기엔 어렵지만, 그 꿈이 자라온 방향으로 나도 큰 틀에서는 자라가고 있는 것을 바라보기에 아버지의 말씀이 옳았다는 것을 느낀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나라이긴 했지만 덴마크에 와서 결혼을 하고 정착의 터를 닦고 있는 나를 보며 그 말씀의 힘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난 어려서부터 해외에서 살고 싶었다. 퇴사 후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난 한국 출장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어려서 해외에서 자란 자기는 항상 해외에서 정체성 고민을 많이 했기에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이 어려서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놀랍다고 했는데, 난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누가 뭐가 옳다 그르다는 것을 말해주기 전부터, 난 남녀 양성 불평등에 대해 아주 어려서부터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회사에서 사회인야구 감독을 맡고 계셨는데, 거기에 연년생 오빠를 데리고 가시기로 했었다. 한국 나이로 네살 때 이야기니 두돌 지나서 정도였던 것 같다. 그 장면은 나와 부모님 모두에게 매우 강한 인상을 남겨서 모두가 잘 기억하고 있는데, 왜 오빠는 데려가고 나는 데려가지 않느냐며 거의 지랄을 하다시피 울고불고 난리를 쳤었다. 엄마가 나를 안고 계셔서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나는데, 부모님은 얘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난리를 치나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나는 항상 오빠를 포함해 남자라는 대상과 꾸준히 경쟁을 했다. 엄마 친구의 자녀가 주로 아들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소꿉놀이보다는 공차기를 하고 놀았던 것이 그 대상이 남자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남녀의 역할을 어려서부터 구분짓는 것에 알게 모르게 반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알아주는 왈가닥이었던 나는, 항상 인기있고 이쁜 여자 친구들과는 스스로 비교가 되기도 해서 어차피 그들과 경쟁이 되지 않을 것 그냥 나 하던대로 하자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여성스럽고 싶은 마음과 그렇기 싫은 마음이 묘하게 섞여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던 것 같기도 하고.

중학교때 아버지가 에리카 김 – 지금은 BBK 사건의 김경준씨 누나라는 사실로 더 알려져있다. – 이라는 사람이 쓴 “나는 언제나 한국인”이라는 책을 사들고 오셨다. 명일동에서 살던 그 시절, 서재에 배를 깔고 누워 하루만에 그 책을 다 읽었고, 뭔가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만 해도 여권 갖고 있는 것이 흔치 않은 일이었고, 환전하나 하려해도 여권 뒷면에 환전필이라는 도장과 환전 금액을 적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해외에 다녀온 사촌의 이야기나 친구들의 말이 안 통해 어렵기도 했던 이야기나, 힘들었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바다 건너서 저 먼 땅에서의 미지의 삶이 궁금했고, 소설책에 그려진 다른 나라의 삶을 나도 겪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오히려 더 동경하게 되었다.

여성의 성공기를 다룬 그 책에서 나는 나를 그녀의 모습에 투영하며 해외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게 되었다. 경제학, 경영학을 공부해서 미국으로 유학가고, 거기에서 터를 잡겠다는 생각은 완전히 이뤄지지 않고 커가는 과정 중 방향을 달리 하게 되었지만, 조금은 늦은 지금 덴마크에 와서 유학을 하고 있으며, 터전을 일구게 된 것은 그 때의 씨앗이 싹을 튼 결과이렸다.

창밖을 내다보면 한국에서 보던 것과 다른 생경한 풍경에 간혹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어쩌다 여기에 와있게 되었나?

아무런 행동이 없는 꿈은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해외에 살고 싶은 마음에 해외에서 살 수 있는 직업을 모색하게 되어 이를 일차적으로 이루게 되었고, 이나라 저나라를 노마드처럼 떠도는 생활을 접고 정착하고 싶은 마음 속에 나의 인연을 만나 그 땅에 정착하게 되었다. 직업도 그 당시의 내 고민을 푸는 방식으로 이동하다보니 내가 원하는 일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고 원하는 방향을 찾아 공부하며 옳은 길을 택했다는 생각과 함께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다.

이윤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돈 놓고 돈 먹는 은행에서 일하며 금융권은 내가 일할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뭔가 공익적인 가치를 위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과 유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속에, 유학은 아니더라도 해외에서 살면서 공공의 목적을 위해 일하는 공기업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는 타인의 사업의 가교 역할을 하는 주변인의 역할은 부족하고, 내가 열심히 일해봐야 누군가 돈을 더 버는 일은 내 가슴을 뛰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KOTRA에서 일을 하며 신재생에너지, 환경산업에 대해 자주 관여를 하게 되었는데, 막연하게나마 ‘저런 일을 하면, 일 자체가 사회에 작든 크든 근본적으로 기여한다는 생각이 들어 보람이 들텐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너리즘과 직장내 인간관계 갈등 등으로 직장 생활에 본원적 갈등이 커지고 있던 즈음, 왜 내 마음을 뛰게 하는 일을 하지 않는가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 당시 남자친구에게 이런 생각에 대한 조언을 구하니, 나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고 했다.

어떤 일에 대한 중대한 결단이 필요할 때, 쉽게 용단을 내리는 결단력은 어머니의 성품을 닮았다. 여러가지 중대한 순간, 마음을 굳게 먹고 결정을 내리고 일을 추진하시던 어머니를 보면서 이를 나도 모르게 배웠거나, 그 피가 내 몸안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리라.

중요한 것은 내가 꿈을 꾸는 만큼 내가 자랄 수 있다는 것이다. 원대한 꿈을 꾸지 않는 나이기에 그만큼 자라고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절대 늦은 순간은 없다는 것, 내 마음을 뛰게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걸 위해 뭐라도 한다면, 설령 거기에 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은 짧다면 짧은 내 인생 35년의 경험을 통해 얻은 가르침이다.

다시 커리어를 쌓아가야 하는 나이지만, 돌아서 왔다는 생각은 지금도 없다. 정해진 길이 없는 넓은 땅에서 내 앞길 구불구불하게 닦아가며 즐거우면 즐거운대로, 힘들면 힘드는대로 걸어가는 것이다. 나처럼 늦은 나이에도 새로운 길 개척해나가는 모든 영혼에게 화이팅을 외치고 싶다.

학생으로서 새롭게 시작하는 인생 2막

나만은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았던 어린 시절 나의 기억은 여느 누구와 다를 바 없이 단편의 조각으로 토막나 그 중 아주 일부만이 남아있다. 그 일부 중 하나는 학교 가는 첫날이다. 부모님이 사주신 책가방을 몇번이고 만져보고 필통에서 연필과 지우개를 꺼냈다 넣었다 반복하며 등교할 첫날만을 얼마나 기다렸던지. 막상 내 등교 첫날의 기억은 혼돈이다. 입학 전 수시로 들락날락 거라며 놀았던 운동장에서 있을 입학식인지라 엄마는 혼자 가서도 잘 할거라고 생각해서 학교에 날 보내셨고, 어려서부터 독립심이 넘쳤던 나는 그런 상황에 더 신나 등교를 했었다. 하지만 대규모 인파가 몰린 곳에 혼자 가는 것은 처음이었던지라 맞는 반에 찾아가고 다른 학생과 줄을 맞춰 교실로 가는 것이 의외로 정신없었고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조차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다른 학생들이 엄마와 함께 있어서 더욱 위축되어 자신이 없어졌던 것도 같다. 다행히도 큰 문제는 없었고, 하교 길엔 항상 다니던 길로 잘 돌아왔던 것 같다. 사실 하교 길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 그 당시는 국민학교였다. – 입학 이후엔 입학이라는 일이 그렇게 설레는 일이 아니고 졸업이 큰 일이었다. 대학교 입학도 자유로운 세상이라는 생각에 설레긴 했지만, 계속 하던 공부를 더 하는 거라 그랬는지 크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처럼 새로운 학교에서의 공부라는 것이 쭈욱 아무런 감흥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일상적 일이었기에 대학원 입학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어제는 외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한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의 첫날이었다. 전날 저녁부터 가방을 싸고 아침 일찍 일어나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아 캠퍼스에 도착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때까지는 그냥 즐거운 하루의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그간 집에서 혼자 공부하며 지냈던 탓에 사람 냄새를 별로 못맡아 그런지 뭔가 어색한 듯 했지만, 금방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시작하며 어색함의 벽은 허물어졌다.

10시가 되어 사람들이 서서히 대강의실로 이동했고, 나도 그 무리의 꼬리를 밟고 거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강의실에 들어섰다. 연대 강의실은 별로 가파르지 않았기에 가파르게 설계된 강의실의 큰 규모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거의 마지막줄에 앉고 나니 큰 화면과 칠판, 앞을 메운 학생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아… 내가 정말 풀타임 학생이 되는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앞으로 덴마크에서 새롭게 꾸려갈 인생 2막이 시작된다는 생각이 들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오랜 기간 직장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느끼기 어려운 감정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이제 시작이다. 미래에 대한 고민은 꾸준히 해야겠지만, 지금은 그냥 이 순간에 집중하며 즐기고 열심히 공부하련다. 어린 학생들과 친구가 되고 경쟁도 하며 즐거운 2년의 시간을 꾸려갈 마음에 설렘과 걱정이 교차하지만 이 모든 것에 감사하다.

변화에 익숙해지기

손님을 집에 초대하는 일이 예전처럼 부담스럽지 않다. 손님을 초대하는 일이 왜 부담스러웠는가 곰곰히 생각을 해봤다. 결국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데, 무엇이 익숙하지 않았었나?

여러명을 위해 좁은 부엌에서 요리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부엌은 내가 가져본 것 중 가장 작다. 너비가 1미터도 안되는 공간을 활용해 4~5가지 메뉴를 준비하는 것이 힘들다. 그리고 조리법에 숙달되지 않았다. 한식을 준비하는 것은 주로 엄마가 하신 일이었고, 집에서 내가 한 요리라고는 쉬운 단품요리를 제외하고는 다 양식이었던 관계로 재료의 분량을 확인해가면서 만들어야 했다. 특히 한식은 양식과 달리 한상차림이기에 다수의 요리가 제 온도에 맞게 동시에 나가도록 하는 일은 상당히 머리가 아팠다. 좁은 부엌에서 이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상황을 더 복잡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손님맞이가 익숙하지 않았다. 손님을 집으로 초대해 본 경험이 별로 없었기에, 손님을 맞이하고, 요리가 완료되기 전까지 손님이 편하게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잘 모르니 마음이 불편했다. 특히 내 손님이 아니라 옌스의 손님으로 처음 만나는 사람을 맞이하는 것에서 더욱 불편함이 있었다.

무엇이든 자주 해봐야 는다고, 손님을 자주 맞이하다보니 여유가 생긴다. 여유가 생기니 또 초대하겠다는 마음도 먹게된다. 물론 손님 초대하는 일도 돈이 꽤 드는 일이라, 이번 달 손님을 너무 많이 초대했더니 생활비를 너무 많이 써버렸으니, 한동안은 초대는 자재해야겠지만 말이다.

현지에 영구 정착할 목적으로 삶을 셋팅하기 시작한지 이제 반년이 되었다. 이국땅에서, 학교가 시작하기 전까지 어디고 적을 두지 않는 생활을 처음으로 해보면서, 외로움도 느껴보았다. 그러나 이제 현지의 네트워크도 조금씩 구축되고, 말도 조금씩 늘기 시작해 주변인과 친밀도도 높아지면서 조금씩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이 들고 있는 요즘 여름도 막바지에 접어들어간다.

코트라를 다니며 해외 생활의 햇수가 늘어가면서 내 인간관계의 지형이 이미 많이 바뀌긴 했지만, 그곳을 떠나 현지에 정착하면서 그 모습은 더욱 크게 변할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하니까. 그래도 좋은 것은 오래 묵을 수록 좋은 것이니,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변함없이 더 좋을 것이고, 새로운 것은 더하면서 가꿔가면 된다. 정리되는 인간관계엔 서운해할 이유가 없다. 그건 상호작용에 의한 것이니 나에게도 책임이 절반이 있기 때문이고 결국 그 또한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반려를 얻게 되면서 생긴 여러가지 변화는 나에게 모두 중요하고 긍정적인 것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것도 여전히 있지만, 어색하고 힘들었던 손님초대가 반복되면서 즐겁고 익숙해지는 것처럼 내가 겪고 있는 이 모든 변화도 시간이 지나서 익숙해지면 유익할 뿐 아니라 즐거울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나의 첫 미국행과 그에 얽힌 기억들

나의 고등학교 단짝친구는 나의 직장 동료이기도 했다. 이제는 회사를 관뒀으니 더이상 직장 동료는 아니다. 회사 생활 중 힘든 상황이 있을 때나 좋은 일이 있을 때 누구보다 상황을 더 잘 이해해줄 수 있었던 친구다. 우린 비슷하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닮았다. 많은 어려움과 행복함을 나눴던지라 더욱 소중하고, 서로 배려하는 따뜻함이 항상 느껴지는 그녀다.

그녀가 워싱턴 D.C.에 있고 내가 뉴델리에 있던 2008년,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24시간을 날아 그녀를 방문했다. 알았어도 갔겠지만, 그렇게 오래 걸리는 지 잘 모르고 계획한 여행이었다. 비행기의 연발로 공항에 늦게 도착한 탓에 새벽같이 암스테르담에서 나를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던 동기를 만나지 못하고 – 아직도 너무나 미안한 기억이다. – 게이트 앞에서 연결편 비행기를 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 승객이 다른 이에게 비행시간을 물어보니, 8시간이라고 대답하는 걸 들었다. 정확한 시간을 모르니 알아두면 나쁠 것도 없겠다 싶어서였는데, 너무 놀라서 대화에 갑자기 끼어들고 말았다. “4시간이 아니라?” 너무 황당한 질문이라서 그랬는지,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일이 너무 바빠, 간신히 일 마무리하고 비행기 잡아 타느라, 비행시간을 자세히 확인할 여력이 없었다.”고 멋쩍게 답을 하고 내 자리로 돌아앉아 머리를 쥐뜯었던 기억이 난다.

어느새 5년이나 지난 기억이라, 그녀와 공항에서 어떻게 만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수선한 공항에서 공중전화를 찾아 그녀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해서 공항에서 잘 만났는데, 그게 나의 첫 미국방문이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간 것인지라 뭘 봐야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알아보지도 않았던 탓에 모든 것이 즉흥적이었다. D.C.에 둥지를 튼 친구 덕에 차로 뉴욕을 향했다. 그들은 2박을, 나는 3박을 했는데, 나는 하루를 더 묵고 열차를 타고 D.C.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돌아가는 길에 차에 문제가 생겨 새벽에 길 한복판에서 아기와 함께 세 식구가 덜덜 떨었다고 한다. 얼마나 춥고 걱정되었을지, 이 또한 첫 미국 여행에 얽힌 미안한 기억 중 하나이다.

많은 지구촌 여성들에게 그런 것처럼 나에게도 Sex and the City는 나에게 뉴욕 생활의 꿈을 그려줬던 드라마였다. 돈암동에 나가 혼자 살며 여의도 회사생활에 찌들린채로 MBA 가보겠다고 GMAT 책을 펴놓고 딴짓을 하던 나에게, 허황된 뉴욕에서의 – 가능하다면 월가에서의 – 삶을 꿈꾸게 해줬던 드라마였다. 결국 야근만 많이 하다가 이대로는 은행에 주저앉겠다 싶어 이직을 하고 MBA는 마음 구석 깊숙히 접어두었지만, 뉴욕에 대한 로망만은 마음 한구석에 항상 자리잡고 있었다.

그랬던 뉴욕에 가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Sex and the City의 Sarabeth에서 브런치를 먹게 되고, 뉴욕 공립도서관을 지나고 – 보지는 못했다. – 월가의 황소 뿔을 만져보게 되니 감격스러울 지경이었다. 로커펠러센터의 아이스링크를 저녁에 바라보니 내가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다만 인도에서 보던 릭샤가 뉴욕 타임스퀘어에서도 달리기 시작한 것을 보고, 잠시 잊고 싶었던 인도의 시간을 다시 떠올리게 되어 미간에 주름을 잡고 머리를 흔들며 이를 떨쳐내기도 했다.

뉴욕 공립도서관

그러나 사람은 역시나 현재의 노예임이 틀림없다. 인도에서 여러모로 치여살던 나에게 관광은 금방 사치가 되었고, 친구 부부가 D.C.로 떠나자마자 나는 쇼핑을 시작했다. 물건이 귀하고 같은 제품이면 높은 관세로 더 비싼 인도에서 살던 나에게, 세상의 물건이 집결하는 미국의 한복판은 쇼핑의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크리스마스 연휴를 앞두고 거대한 쇼핑장으로 변한 뉴욕에서, 준비없이 여행온 나는 그냥 물욕의 노예가 되어 옷가지를 주워담았다. 그때 산 옷과 신발을 7년이 다되가는 지금도 입고, 신고 있으니 완전 실패했던 쇼핑은 아니었다. 설마 이게 나의 마지막 뉴욕행이 되겠는가 하고 생각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올해 여름 다시 뉴욕을 가게 되었으니, 겨울과는 또 다른 얼굴의 그곳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새로 산 옷가지로 가득찬 무거운 트렁크를 낑낑대고 끌고 다니며, 부가세 환급을 위한 여러 절차까지 마친 나는 Penn station으로 가 D.C.로 갈 기차를 탔다. 준비없이 혼자하는 여행은 하루면 충분하다면서 자리에 앉았는데, 4명이 마주앉는 자리였다. 조금 있어 멀쑥하게 차려입은 두명의 남성이 앉아도 되냐길래, 그렇라고 하고 나는 곧 고개를 벽쪽으로 기대고 잠이 들었다. 덜컹임에 잠에서 깨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자기들 뭐 사마시려고 하는데 뭔가 필요하냐고 묻길래 괜찮다고 했다. 솔직히 낯선 사람을 믿고 살기 어려운 인도에서 6개월동안 치여온 나인지라, 낯선이를 믿을 용기가 없었기에 그렇게 답을 했다. 정말 괜찮냐면서, 뭐 사다주겠다고 하길래, 물을 마시겠노라 했다.  페트병에 담긴 물을 갖고 온, 멀쑥하게 입은 그들을 자세히 보니, 나에게 뭔가 사기를 칠 것 같이 생기진 않았다. 고급스러운 어휘와 유려한 말솜씨를 봐도 크게 걱정을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 고마워하며 마시기로 했다. 얼마냐고 하니 손사래를 치기에 굳이 어거지를 써가며 돈을 주지는 않기로 하고 지갑을 넣어두었다.

필라델피아 소재 로펌에 근무하는 그들은 업무 회의차 뉴욕에 들렀다가 집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한명은 딸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아직도 사지 못했다면서 크리스마스 직전까지 일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라고 했고, 다른 한명은 약혼녀를 크리스마스 쇼핑에 홀로 내보냈다며 구박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어디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려고 여행하는 길인지 물었다. 그 날이 아마 이브날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때까지 일을 하다니, 역시 로펌이라는 생각에 웃음이 샜다.

어쩌다 대화가 그렇게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그 당시 미국에서 매우 인기가 높았고, 나도 좋아했던 The Grey’s Anatomy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면서 중요한 남성 캐릭터였던 McDreamy와 McSteamy중 누가 나의 남성상이냐는 질문에 뭐가 좋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했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다면서 30초 안에 고르라고 재촉을 하길래 McDreamy를 골랐던 기억이 난다. 그 답에 그가 놀라했던 기억이 나는데, 왜 놀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런 저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덕분에 아주 유쾌한 시간을 보냈는데, 그들이 필라델피아에서 내릴 때 아쉬울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즐거운 기억이다. 그간 낯선이와 대화가 그리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껏 이렇게 자세히 기억이 나는 모양이다.

친구네 집에서 친구네 가족과 크리스마스를 보낸 것도 처음이었다. 미국 여행은 참으로 많은 첫기억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그 기억의 순간을 나의 소중한 그녀와 함께할 수 있어 기뻤다. 월마트에서 끝도 없이 진열되어 있는 상품의 종류와 양에 기함을 했던 것이나 돌아오는 편에 이민가방을 가득채워 화물을 싣는 과정에 중량 문제로 고생을 한 것, 공항에서 짐을 스캐닝하는 과정에 내 짐에 있는 햄을 보고 공항직원이 박장대소하는 것에 쑥쓰러워했던 것, 미국에서 사온 네스프레소를 인도에서 사용하자마자 전압이 맞지 않아 바로 퓨즈가 날아간 것 등 무수히 많은 소소한 기억들. 순간순간에는 여러가지 감정이 섞였겠지만, 지금 뒤돌아 시간을 되짚어보면 그냥 다 즐겁고 웃음이 나는 작은 기억의 파편들이다.

올해 미국을 방문하면 그녀는 그곳에 있지 않다. 지금은 먼 싱가포르에 있어 과연 언제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항상 내 마음속에 있고 언제고 마음 먹으면 방문할 수 있고, 기술이 우리를 이렇든 저렇든 마음을 전할 수 있게 연결해주기에 서운하지만은 않다. 대신 또다른 친구가 그곳에 있기에 그녀와 다른 추억을 쌓아올 수 있을 것이다.

어제 카톡으로 그녀와 잠깐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한시간도 넘게 이야기를 했다. 마음의 크기만큼 시간은 빠르게 흐르는 것 같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가 피부로 느껴지는 대화시간이다. 잠깐의 대화를 통해 마음 한구석 장롱 한구석에 보관해두었던 추억 한보따리를 꺼내 열어보게 되니 기분이 좋다. 벌써 20년지기 친구이니, 우리가 몰랐던 시간보다 알고지낸 시간이 이제는 더 많아졌다. 그런 친구를 내 마음속에 두고, 그 친구의 마음속에 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렇게 있어줄 수 있었던 그녀가 소중하고 고맙다.

덴마크식 불혹의 생일파티와 초대받은 이방인

어제는 동갑내기 커플의 40번째 생일파티날이었다. 그들은 옌스의 여동생인 그뤼와 그의 남편 프레데릭. 사실 이미 지난 생일이었지만, 그들은 날 좋은 여름에 손님을 집 정원으로 초대해 파티를 하려고 오래전부터 이날을 정해 알려왔다. 덴마크에서 0으로 끝나는 생일은 크게 하지만, 40은 특별히 더 크게 한다. Fyrre(40), fed(fat) og færdig(done). 중년으로 들어서는 전환점이기 때문이다.

‘선물 사야하는데…’를 한달쯤 되뇌이다가 파티 당일이 되어서야나 샀다. 좋은 와인 두병. 그 집에 가면 항상 좋은 와인을 마시곤 했기에, 이런 와인은 소스용으로 쓰이는 거 아니냐면서 농을 주고 받았는데, 실제 소스용으로 쓰기에 좋은 것으로 준비했다고 축하카드에 남겼다는 그. 카드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항상 자신만의 스타일로 위트있는 멘트가 곁들여진 카드를 멋들어지게 만드는 그이기에, 그 집으로 가는 열차안에서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웃음이 피식 나왔다.

홀터(Holte)는 올때마다 느끼지만 좋은 동네다. 한적한 느낌과 함께 아름다운 호수를 중심으로 집들이 늘어서있다. 이런 동네에서는 어느 당이 뽑혔을 지 궁금하다. 집들 사이로 경탄할만한 호수의 풍경이 보이곤 한다. 위치가 아주 좋다. 이런 좋은 동네 살려면 둘다 좋은 직장에서 일해야나 한다기에,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직장 갖도록 노력하겠다고 이야기했다가, 지금 당장 계량경제부터 열심히 공부하라는 이야기에 괜히 본전도 못찾았다. 나름 하고 있다고, 진도가 안나가고 있어서 그렇지 라면서 괜히 항변했지만, 나도 열심히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수능 공부도 80일전부터 한 나였는데, 합격도 다 한 학교에 한참 전부터 여유있게 미리 리뷰를 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가!”라고 외치고 싶지만, 세상은 열심히 하는 자의 몫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냥 또 반성을 할 뿐이다.

열차에서 내려 20분을 걸어 장소에 도착했다. 하이힐로 갈아신고 정원으로 들어가니, 아이들의 장난감이 흩어져있던 놀이터같던 정원이 훌륭한 가든파티 장소로 변신해 있었다. 야외결혼식을 해도 되겠다 하는 생각도 들 정도 였는데, 반대로 이걸 준비하려면 얼마나 고생했어야 했을지 짐작이 갔다.

넓은 장소가 금방 가득찬다. 사람들과 소개를 하고 악수를 나눈다. 이미 여러차례 만난 사람과는 반가움을 포옹으로 나눈다. 이젠 이 인사가 어색하지 않지만 많은 사람과 인사를 하다보면 얼굴 근육에 경련이 날 것 같다. 서양 영화배우 중에 인터뷰하는 도중 시종일관 환한 미소를 띄는 사람들이 있는데,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역시나 외국인은 나 한사람이다. 일부러 생각하려 한 건 아닌데, 바에서 칵테일을 주문하는 데 바텐더가 외국인이냐고 물어보며 대화를 잠깐 하다보니 그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내가 인사한 사람 모두가 덴마크인이었다는 사실을. 누가 차별하는 것도 아니지만, 차이를 인식하는 순간 때로는 피로감이 몰려오곤한다. 이런 쓸데 없는 생각하지 말자고 고개를 잠시 흔들고는 다시 원자리로 돌아온다.

음식을 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는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름 따위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상대도 마찬가지에다가, 이름을 기억하리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야기하다가 자리를 뜰 때 실례하겠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다. 나라마다 상황별 에티켓이 다른데, 이것을 책으로 배울 수는 없다. 우리가 매너라고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관습이니, 나는 걸음마를 처음 떼는 아이처럼 하나 하나씩 눈치로 배워가야 한다. 그리고 그게 맞는지는 주변에 나중에 물어봐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이것을 힘들다고 징징대봐야 소용이 없기에 때로는 피곤하고 힘들지만 익혀나간다. 10년정도 지나면 반대로 한국으로 여행갈 때 큰 문화적 충격을 느낄 것 같다. 매년 한번씩 간다해도 그 충격은 피할 수 없을 것임을 이미 안다.

덴마크인들은 직설적이다. 직설적임의 차이야 사람마다 편차가 크기는 하지만, 사회의 직설적임을 측정할 수 있어서 평균값을 낼 수 있다면, 덴마크인의 직설적임은 전세계적으로도 상위에 놓일 것이라 자신한다. 인도에서도 사람들이 직설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법적으로는 폐지된 카스트제도가 현실적으로 아직도 남아있는 그들에게는 카스트라던가 사회속에 내재된 차별에 대해서는 터부가 존재했다. 그렇지만 덴마크에서는 과연 성역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직설적이다. 일을 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면 왜 일을 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는게 그들이다. 한국이었으면, 본인이 뭐라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다 싶어서, 계면쩍은 표정과 함께 화제를 얼른 돌리겠지만, 이들에겐 그런 것이 없다.

테이블에 앉아 타코를 먹으며 옆에 앉은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테이블 반대 끝편에서 나를 부른다. 옌스와 그뤼와 함께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함께 학교를 다녔다는 여자다.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엉뚱함이 느껴졌는데, 시끄러운 음악을 뚫고 큰 목소리로, 내가 뭘 하는지 묻는다. 테이블을 가로질러 묻는 질문에 모두 나를 쳐다본다. 현재 일을 하지 않고 있고, 9월부터 공부를 할 것이라고, 무슨 공부를 할 것인지 답을 해 주었다. 왜 관뒀는지를 묻는다. 언젠가 관두고 여기서 정착할 것이라면 한살이라도 어릴 때 다시 공부를 시작해서 현지에 정착할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렇다고 답을 하니, 더이상 묻지는 않는다. 나에게 악의를 품고 한 질문이 아니기에 그냥 사실을 이야기 해주지만, 이곳의 문화적 맥락을 모르면 약간은 취조당하는 느낌이 들 수 있다.

한달에 한번이면 충분히 많은 파티를 이주 연속으로 가게 되어 이미 피로도가 높았지만, 파티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건 옌스도 마찬가지고, 어딜 가든 대부분이 가족 동반인 이 곳에선 일종의 책무이기도 하니, 간 김에 즐기는게 최상이다. 최소한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사람 구경이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 했던가.

그뤼 프레데릭 생일

시침이 10을 넘기면서 그뤼가 다가와, 이제 춤을 즐기라고 권유한다. 모두가 자리를 일어나 텐트 안으로 자리를 옮긴다. 안쪽 소파에 담요하나가 보인다. 냉큼 무릎에 덮고 자리를 챙겨 앉으니, 인사만 한번 나눴던 한 여자가 나와서 춤을 추라고 이끈다. 한번 사양했는데도 나오라 하니 거절하기가 어렵다. 기럭지가 긴 옌스가 몸을 흔들고 있는 것을 보면 즐거움에 웃음이 나와 은근 춤출 맛이 난다. 고관절만 괜찮으면 몇곡도 추겠는데, 하이힐을 신고 한곡을 추지 벌써 관절에 신호가 온다. 인근 인대에 생긴 염증이 낫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데, 나 때문에 옆에서 앉아있는 거 아닌가 싶은 마음에, 이야기 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가서 이야기하고 오라고 부추겼다. 그러나 친한 사람과의 유쾌한 대화의 만찬파티나 좋아하는 게으른 우리 둘은 다행히도 죽이 잘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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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갑자기 바뀐다. 그래도 슬로우 댄스 한곡은 춰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손을 이끄는데, 그 말이 맞다 싶어 춤을 춘다. 집 밖에서 제대로 춘 내 생애 첫 슬로우 댄스. 집에서 옌스 발을 많이 밟으면서 춰본 경력으로 발 안밟고, 휘청거리지도 않고 잘 췄다. 우린 집에서 그렇게 춤을 추다가 옌스가 유도 실력을 발휘해 나를 간혹 들쳐업곤 하는데, 제 버릇 남 못준다고, 노래가 끝나자 나를 등에 들쳐업는다. 그런 유치함이 좋은 것은 내가 유치해서인지, 아니면 사랑의 힘인지 나도 모르겠다. 이런 유치함이 60이 되어도 남아있었으면 하는 것은 소녀의 감수성은 아닌 것 같고, 내 안에 남아있는 어린이의 동심인 것 같다.

모든 칵테일도 마셔보고, 저녁도 먹고, 떠들고, 춤도 췄으니 집에 갈 시간이 된 것 같다. 아마 사람들은 새벽 4시까지도 놀았겠지만, 12시를 넘기면 우리는 서서히 갈 준비를 한다. 이런 때에는 한국어로 대화한다. “우리 언제 가요?” 항상 물어보는 것은 나… 답은 셋중의 하나다. “나중에, 곧, 지금” 곧 가자는 말에 이제 집에 가겠구나 싶어 신이난다. 택시를 부르고 호스트에게 인사를 한다. 뻑적지근한 생일파티 초대에 감사를 표하며, 휴가 갔다와서 보기로 한다.

차로 10분이면 가는 집이지만, 요금은 300 크로나. 6만원 한다. 이젠 그럼에도 불구하고 택시를 타면서 새삼스레 놀라지 않는 것을 보면 많이 익숙해졌음을 느낀다. 다음에 한국가서 택시 요금을 보면 반대로 놀라겠지. 이렇게 싸다니 하면서…

빨아놓고 널지 않은 수건이 있음이 기억나 피곤에 쩔어 수건을 널더라도, 곧 잘 수 있는 침대가 놓여 있고, 나의 흐트러진 모습을 편히 내 보일 수 있는 이 곳이 바로 내 집이다. 밖에 나가 내가 이방인임을 느끼게 되더라도 저녁에 돌아오면 이방인이 아닌 이 곳이 내 집이다. 간혹 내가 뭐라 해도 다 받아 줄 부모님이 바로 내 곁에 안계시긴 하지만, 그 역할을 앞으로 대신 해 줄 옌스가 있는 이 곳이 내 집이다. 그걸 이제 서서히 받아들이게 된다. 내 집이 속한 이 땅이 앞으로 또 하나의 내 나라가 될 것이고 내 아이의 나라가 될 것이기에 혹은 힘들더라도 받아들이고 품을 수 있다. 그렇게 사는 게 이민자의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