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사는 다 선택이다.

요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기분이다. 아이의 첫겨울과 보육원 생활이 겹칠 때 애가 얼마나 자주 아플 지를 고려하지 않고 너무 많은 플래닝을 한 것일까? 남편에게 자주 짜증을 내게 된다. 사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 짜증은 결국 나에게 나는 것일 뿐인데 말이다. 조금만 더 플랜을 잘 했더라면, 조금만 더 플랜을 잘 지켰더라면, 변수가 생겼을 때 기존의 플랜을 조금 더 잘 끼워넣었더라면… 이라는 생각이, 그때 옌스가 이렇게 해주었더라면 조금 더 좋아졌을텐데, 그렇게 해주지 않아서 그래… 라는 말도 안되는 형태로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잠깐 심통을 내곤 한다. 잠깐 다른 일을 하다보면 말도 안되게 심통을 부렸구나, 유도리있게 이렇게 했으면 되었을텐데 하고 돌아와서 짜증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옌스가 받아주고 풀곤 한다. 자꾸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 오늘은 제대로 이러저러했던 상황에 대해 나의 생각의 전개 및 감정을 설명하고 제대로 사과했다.

논문도 다 끝나지 않았지만 취직 준비를 서서히 해야하는 탓에 더 조급해지는 것 같다. 다음주 금요일엔 취업박람회가 있어 거기에 갖고갈 요량으로 덴마크어 이력서를 준비하고 있다. 졸업은 8월이지만 대충 6월이면 상반기 채용이 끝나는 탓이다. 오늘 대충 드래프트를 끝냈고 옌스가 잠깐 훑어봐준 결과를 토대로 추가 작성해서 내일 봐달라고 해야한다. 오래된 이력서를 들쳐보고 이를 덴마크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번역이라는 작업 자체도 그렇지만 여기 채용시장의 이력서 유형에 맞춰 쓰느라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원래 뭐든 처음이 힘든 거니까…

 

대학원 동기 한명이 자살했다. 가까운 동기는 아니어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자친구도 자살을 예상할 수는 없었던 걸 보면 그 속사정을 깊게 털어놓을 수 없어 더 힘들어하던 게 아닌가 싶다. 살면서 자살을 생각해보는 게 아주 드물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걸 실행으로 옮기는 데에는 그만큼 큰 용기(?)와 좌절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막상 그를 실행해 옮긴 그의 힘듦을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내 주변에서 자살한 건 그가 처음인데, 자살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해볼 계기가 되었다. 그를 추모하러 그가 자살한 기차역에 갔을 땐 그렇게 많이 보았던 열차의 주행이 새삼 섬뜩하고 무섭게 보였고, 또한 무심하게 보였다. 그의 죽음을 추모하러 모였지만 서로의 안부를 묻고 소소한 농담도 나눌 수 있는 우리에게서 어쩔 수 없는 무심함을 보았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그 순간 그렇게 스치는 생각이었다. 덴마크에서 직장을 관두기 전에 나도 과도한 스트레스로 극단적인 생각들을 조금 구체적으로 했던 탓에 이번 일이 완전히 남일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는 하나가 있어 더욱 그런 생각을 하면 안되겠지만, 사람이 참 힘들다보면 이성적이지 않은 극단적 결정도 할 수 있기에… 남겨질 사람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던 그 친구는 이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죽음의 길을 선택했기에 이제 최소한 자유로워졌을테지. 그런 자유를 희망했을 것이리라. 그의 죽음에 찬동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그가 원했던 것을 얻었을 것이기라 믿으며 위로의 마음을 띄워보낸다.

세상 일이 너무 힘들다고 생각될 때, 어디에도 “그래야만 했다”는 당위는 없음을 기억해야한다. 항상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나도 지금처럼 힘들다고 끙끙대며 주변인을 상처입힐 땐, 이 모든 상황은 우리가 다시 프레이밍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연말연시 일상 기록

학교에 다시 나가기 시작한 건 11월이지만 데이터 수집에도 시간이 걸렸고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것도 시간이 조금 걸렸다. 12월엔 하나가 보육원 시작하면서 자주 아픈 탓에 집에 머무느라, 나도 같이 아프느라, 또 연말연시 연휴로 가족행사가 있느라 거의 날아가 버렸다. 다행히 가장 중요한 데이터를 연초까지 수집할 수 있어서 좀 본격적으로 일하나 했는데, 하나의 중이염과 낡은 컴퓨터와 빅데이터의 안좋은 궁합으로 인해 시간만 까먹었다. 그나마 위안을 하자면 낡은 컴퓨터를 갖고 씨름하느라 컴퓨터 메모리 칩에 대해, 큰 데이터를 로딩하느라 다양한 데이터 포맷과 그에 따르는 R의 데이터 로딩 함수를 이것 저것 익힐 수 있었다는 것이다. 중간에 컴퓨터를 새로 사면서 맥에서 Windows로 갈아타는 동안 같은 코딩도 달리 읽힐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를 해결하느라 하루동안 씨름했다. 수업을 듣는 동안 꾸준히 써왔던 R이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R과 많이 가까워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Spatial data 쪽 분석에서 말이다. 많이 배우는 건 역시 노가다를 통해서인가보다. 오랜 시간을 투여하고 힘들게 익힌 만큼 각인도 더 되는 거랄까? 엄청 삽질한 뒤 교수와의 면담을 통해 같은 결과도 더 짧고 효율적으로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거나 아니면 더 좋은 결과물을 뽑아내는 것을 볼 때, 그게 탁 머리에 꽂힌다.

대학원 친구들이 서서히 직장을 구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덴마크 친구들만 구하더니 이제 슬슬 비덴마크 친구들도 직업을 구한다.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친구도 있지만, 그래도 많이들 여기에서 정착하는 것 같아서 좋다. 최근에는 임신한 친구도 생겨서 우리의 두번째 ENRE baby를 맞이할 생각에 나도 들뜬다. 나도 직업을 잘 구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은 간간히 엄습해오긴 하지만, 불안함을 갖는다고 직업이 잘 구해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지금에 충실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

저녁에는 덴마크어 학원을 가는데, 선생님이 아주 좋으신 분이다. 가르치기도 정말 잘 가르치시고 학생 개인별 수준과 강점, 약점에 맞춰 조언을 따로 해주시는 것도 많다. 숙제는 너무 많지 않아서 바쁜 와중에 수업을 끼워넣기 좋은 편이다. 요즘은 정말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바쁜데 그중엔 덴마크어도 한몫을 하고 있다. 그래도 덴마크어는 미뤄둘 수 없을 만큼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다. 다른 것 바쁘다고 미뤄두기엔 항상 가까이 둬야하는 존재… 최대한 일상생활 속에 덴마크어를 녹여야 해서 오늘은 드디어 교수님 면담을 덴마크어로 했다. 그 전엔 슬쩍 인사말을 덴마크어로 해도 지도교수님이 영어로 바꾸시길래, ‘아… 아무래도 역시 영어가 학교 공식 언어라 그렇신가?’ 했었다. 지난번 남편이 덴마크인이라 대화는 다 덴마크어로 한다고 흘려뒀던 탓일까? 오늘은 인사 뒤에 따르는 말도 덴마크어로 하시는 거다. 조금 더 집중을 요하긴 했지만 괜찮았다. 내 논문에 대해 옌스와 평소에 많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고, 시댁 가족과 친척에게 논문을 설명하느라 덴마크어로 이래저래 이야기한 적도 많아서 그런 것도 있을 것이고, 또 컨텍스트를 정확히 아는 내 논문이고, 테크니컬한 이야기를 나누는 바라 복잡한 뉘앙스를 다룰 필요가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앞으로는 덴마크어로 지도를 받기로 했다.

주재원 생활을 빼면 내 덴마크 생활이 학교를 중심으로 돌아가다보니 학교에서의 만족도가 정말 중요한데 그 점에서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 교수님들도 정말 좋고, 수평적인 분위기라 질문하고 연락하고 하는데 어려움이 없고, 특히 내 지도교수님은 막상 가까이 지내보니 더 허물없고 열심히 도와주신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찌나 좋은지. 모든 수업에 대해 100% 만족할 수는 없겠지만, 누가 내 프로그램에 대해서 추천하겠냐고 물어본다면 100% 망설임 없이 강력히 추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감사한 마음으로 학교에 다니고 있다. 거기에 나라에서 주는 용돈을 받고 등록금도 안내고 학교를 다니니 더욱 감사한 일이다.

이번 주 토요일은 하나 생일이다. 1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휙 지나가버렸다. 생일 케이크는 집에서 만드는 게 대부분인지라 나도 집에서 만들건데, 스폰지 케이크를 빵집에서 주문할 수 있다고 해서 그건 3장 주문해뒀다. 내가 할 건 레이어 사이에 바를 바닐라 크림을 만들어서 레이어 위에 잼과 함께 얹고 마지판을 사서 밀대로 밀어서 얇고 길게 만들어 케이크 사이드를 두르는 것, 케이크 표면에 초콜렛 글레이징 하는 것이다. 바닐라 크림은 어제 하루 하나를 봐주러 보언홀름에서 먼길 와주신 시어머니께서 시간을 내어 가르쳐주셨다. 하루 전날 만들어서 차갑게 식혀야 하는 크림이라 오신 김에 직접 보여주시며 가르쳐주시겠다는데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만들고 보니 카스타드 크림 같은 것이었다. 어째 생크림과 다르다 했는데, 생크림은 맛이 나지 않아서 바닐라 크림을 만들어야 한다셨다. 시어머니의 어머니 레시피라는데, 집집마다 크게 차이나는 것 같지는 않다. 옥수수 전분이 들어간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의외로 설탕은 별로 안들어가고 단맛은 우유와 계란에서 오는 부분도 많았다.

보육원에 하나 생일이라고 뭘 가져가야 하는데, 생일이 토요일이라 월요일에 하겠다고 했다. 도저히 금요일에 뭘 하기는 힘들 것 같고… 아마 빵을 구워가야할 것 같다. 보육원엔 단 건 갖고 가면 안된다고 하니 덴마크 생일에 보편적으로 먹는 우리 모닝빵 같은 걸 구워가야겠다. 흠흠… 믹스 사갖고 이스트랑 버터나 섞어 만들어가야지… 학부모는 역시 바쁘구나. 으흑. 하나 생일 장식도 사야하는데… 한국 부모의 돌잔치에 비하면 별로 하는 일도 없지만, 다 직접 하다보니 손이 가는 일이 좀 있다. 시부모님과 시이모, 이모부님이 와서 축하해주시기로 하셨다. 시누이는 먼 두바이에서 축전만 보내주는 것으로… 아쉬워라… 하나를 엄청 이뻐해주는 고모와 사촌 오누이가 와주면 진짜 좋을텐데… 우리가 4월에 가서 보는 것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하나가 자주 아픈데 옌스는 직장을 다니니 내가 좀 더 유연하다는 이유로 계속 내 일이 뒤로 밀리니 이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야겠다고 이야기했더니 내가 진짜 직업을 구하기 전까진 내가 하나 아픈 날 집에서 애를 보는 게 낫다고 이야기를 하더라. 헉. 아니…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이렇게 아둥바둥 열심히 공부할 이유가 있는거냐, 내 학업은 진짜가 아니라는 건데, 대충 해도 되는 거였냐 하니까, 그건 아니란다. 내가 유연해서 하나가 아플 때 내가 다 돌봐야 하면 이건 유연함이 아니라 절대적인 거니 뭔가 좀 아닌 것 같다고 하니 자기도 아차 싶었던가보다. 그날부로 적극성을 발휘해 시어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해 일요일 밤에 날아오신 것이다. 평소 하나가 보육원에 갔을 시간 내내 어머니가 애를 돌봐주셨는데, 그 덕분에 일도 진척시킬 수 있었다. 오늘 혹시 하나가 보육원에서 많이 칭얼거려 중간에 픽업해야 할 일이 있을가 싶어 저녁까지 같이 계셔주시고 밤 비행기로 돌아가셨는데, 죄송한 마음도 있지만 도움이 필요할 땐 청하기로 했다.

요즘은 천천히 앉아서 뭔가를 할 시간도 별로 없고, 그냥 하루하루 바삐 사는지라 상념에 잠길 시간이 없어 블로그에 생각을 정리하기도 어렵다. 하나가 크는 모습을 좀 더 차분히 앉아서 기록하고 정리하고 싶은데… 그냥 사진과 비디오를 찍는 것으로 대체하고 있으니 아쉽기 짝이 없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급히 써두지 않으면 내가 이 시점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것 같아 어수선히 정리도 되지 않지만 휘리릭 써내려간다. 학원을 간 날이라 11시 가까이 되서 집에 돌아오고 나니 눈도 풀리고 머리도 몽롱하다. 그만 덮고 가서 자야겠다. 내일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타지에서 아플 때 – 친구가 너무나 고마운 순간

나는 전형적인 서울 깍쟁이다. 물론 살면서 도움 주고 받을 일 없겠냐만은 거의 도움을 요청해본 적이 없다. 스스로 어떻게든 버티거나 부모님에게 손 뻗는 거 외엔 도움 요청하는 일이 거의 없다. 4년전 옌스가 중국에서 옮겨다준 플루에 1차로 아프고 나서 2주 뒤 거의다 나았다가 신종 플루에 2차로 연속 감염되어 40도로 고열이 나고 합병증으로 급성기도염에 걸렸을 때도 응급실 여는 아침 7시에 맞춰 (내가 사는 동네 응급실이 24시간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기다렸다.) 간신히 운전을 해 병원에 갔더랬다.

이번의 독감은 다소 독했던 2주간의 목감기 끝에 찾아왔다. 진짜 힘들었지만 다행히 하나가 보육원을 시작했기에 어떻게 버텼는데, 바이러스성으로 추정되는 소화기관계열 감염이 찾아왔다. 토요일은 옌스와 하나가 고열로 시달리고, 나도 독감으로 힘든 와중에 간신히 애 돌보며 하루를 보냈더니 일요일은 나에게마저 증상이 찾아온 것이다. 그나마 옌스가 하루 꼬박 침상에 드러누워 앓고나서는 일요일엔 나와 바톤터치하고 하나를 봐줘서 다행이었다. 문제는 옌스가 요리를 못한다. 그간 독감으로 간신히 한끼 요리해서 가족들과 저녁식사 한 것 외에는 빵 등으로 간단히 끼니만 떼우며 살도 빠지고 기력도 떨어져있었는데 내가 완전 누워버리니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토요일, 마침 셸란 섬에 와계신 시어머니께서 시판 이유식과 오븐에 넣어 구워먹을 수 있는 음식 등을 사다주고 가셔서 그걸로 버티나 했는데, 막상 빈속에 구토를 해서 쓸개즙까지 보고 난 상황에 그런 씹어먹는 서양식은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았다. 옌스에게 죽을 끓여달라고 할 수도 없고. 괜히 쓸데 없이 감정이입해가며 서러워하지 말자는 나였지만, 갑자기 진짜 서러워지는 거였다.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그 서러운 마음을 전하고 나니 – 사실 걱정하실까봐 전화 안하고 싶었는데, 극한의 상황이 되니 엄마가 필요하더라. – 마음이 우선 진정이 되었다. 주변에 도움 청할 사람 없냐고, 이럴 때 사람이 도움의 손길을 요청할 줄도 알아야 된다며, 나중에 도움도 주고 그러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안그래도 친구에게 전화를 할까 말까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주말 안그래도 바쁜 거 아는 친군데 연락하기 그래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연락을 했는데,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정성으로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도움들을 주고 갔다.

흰죽과 그와 함께 먹을 수 있는 짱아찌, 누룽지 끓여먹으라고 자기가 좋아하는 둥글레 향이 나는 누룽지, 생강차와 꿀과 이에 바로 넣어먹을 수 있게 손질한 레몬, 하나 먹으라고 호박고구마죽까지… 정말 양손 무겁게 양도 듬뿍 준비해왔다. 바로 갖고와서 죽은 아직도 뜨뜻하기까지… 미역 불려놨다며 다음날 보자더니 이튿날에는 미역국과 고추장아찌, 밥까지 갖고 왔다.

흰죽을 받아든 날 부엌에서 내용물과 쪽지를 읽어보고서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났다. 아. 이 따뜻한 마음이라니. 참 어떻게 이렇게 정이 넘치나 싶어서 고맙고 또 고마웠다. 너는 도대체 어떻게 생긴 녀석인데 이렇게 정이 넘치냐… 싶어서 그냥 고마웠다.

남편은 아플 때 다른 집안일로는 도움을 줄 지언정 요리로는 큰 도움을 줄 수 없어서 뭔가 사다주는 것으로 대체는 해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어렵다. 특히 자기도 아픈 때가 되니 하나도 있는데 나도 부탁하는 데 한계가 있어서 뭔가 사방이 다 막힌 것만 같았다. 엄마 말마따나 어려울 때 서로 품앗이를 할 수 있어야지 아니면 힘들 때 너무 힘들다. 그리고 이번을 계기로 남을 도울 때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었다. 내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일적인 도움 되에 이런 일상생활의 도움은 주는 것도 너무 몰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도 내 소중한 사람들의 어려움에 있어서 이렇게 선뜻 나서야겠다는 배움을 얻어간다.

이건 정말 평생에 갖고갈 고마운 일이다. 고마워, 윤하야.

습관의 동물화 – 옌스 닮아가기

부부는 닮는다던데.

옌스가 나를 닮아가는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옌스를 닮아가는 건 분명히 있다. 습관을 기르고 습관에 따라 살아가게 된다는 면에서가 그렇다. 나는 옌스를 “습관의 동물”로 묘사할 만큼 무슨 일을 하든 앞으로 계속 해야할 일이면 쉽사리 습관화를 하고 꾸준히 이를 지켜간다. 덕분에 한국에 가서 산 건 두 달 뿐인데 지난 2년이 넘는 시간 동안의 자습을 통해 나와 한국어로도 제법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사람이다.

나는 즉흥의 삶을 살아왔는데, 한 번 꽂힌 일은 짧은 시간동안 주구장창 파고, 실증이 나거나 한번 어떤 이유로 멀어지면 다시 그 길로 잘 들어서지 못하는 사람이다. 한번 망친 일은 다시 들여다보기 싫어서라고나 할까. 완벽”주의”의 대표자이다. 그러다 보니 삶에 있어서도 부침이 큰 편이었는데, 잘 할 때는 엄청 열심히 하고 열정적으로 살다가 번아웃이 오면 관둬버렸고, 살도 엄청 쪘다가 뺐다가를 자주 반복했다. 집도 일주일에 하루 힘을 내서 치울 때만 엄청 깔끔하게 치우고, 한동안은 어지르고 정리하기 싫어하곤 했다. 그랬던 내가 옌스와 함께 지내면서 많이 바뀌었다. 완벽주의를 천천히 버려가고 있다. ‘조금만 더 해보자.’, ‘좀 쉬었어도 안하는 것보다 하는 게 더 나으니 다시 해보자.’와 같은 식으로 말이다.

만났던 첫 해 겨울, 옌스가 퇴근하고 집에 놀러와서 같이 놀다가 산책을 나가자고 하면 어찌나 나가기가 싫던지. 하루에 한번은 꼭 산책을 해야 한다고 믿는 전형적 덴마크인인 옌스는 그래도 나가자고 나를 찔러서 추운 겨울 밤 나를 집 밖으로 끌어냈는데, 막상 나가면 좋은데도 왜그렇게 나가기 싫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중에 내가 싫다고 해도 좀 끌어내달라고 부탁을 한 적이 있다.

옌스는 시간 낭비하는 것을 엄청 싫어한다. 간혹 파워냅이라고 10~30분 낮잠 자는 거 빼고는 뒹굴거나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내가 엄청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환멸을 느끼게 하는 게 뒹굴거리는 것이었는데 그런 바른 모습을 몸소 보여주는 남편이 옆에 있으니 갈 수록 뒹굴거리지를 못하겠더라.

퇴근하고 와서 피곤하다면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한국어를 공부하는 옌스를 보면서 덴마크어 공부하기를 불평할 수 없었고,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많이 먹고 빼는 건 건강한 삶의 습관이 아니라는 그 앞에 확 빼고 찌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직장생활을 한 동안 한번도 병가를 낸 적이 없었다는 옌스 앞에서 아프다고 늘어져있을 수가 없다.

대단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 물론 지금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 이제는 그냥 그렇게 생각만 할 게 아니라 나도 그렇게 하고싶다. 절대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하고 아주 탁월한 재능은 노력으로 이길 수 없을지 몰라도 어설픈 재능은 노력을 이길 수 없다는 그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그리고 예전엔 말이 쉽지, 실천이 어렵다고 하던 것들은 그냥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가 느슨해진 나를 발견하면 나중에 다시 나사를 조여야지 하는게 아니라 바로 나사를 조이곤 한다.

11월 자기가 하나를 보겠다고 하더니, 나보고 바로 공부하라고 재촉이었다. 일 하는 것과 똑같이, 평일엔 친구 만나고 놀지 말고 이제 공부하란다. 원칙주의자. 흠. 갑자기 일상으로 돌아가는 건 쉽지 않았지만, 자기도 갑자기 혼자 애 보기 힘들텐데 나를 뒤에서 밀어준 덕에 어느새 학교에서의 일상이 다시 익숙해지고 탄력이 붙었다.

예전엔 짐 회원권 끊어놓고도 가기 귀찮아서 안가곤 했는데, 요즘은 그런게 어디있는가. 짐에 못가는 날이면 집에서라도 하게된다. 하기 싫은 순간도 하기 싫다는 생각을 길게 할 수록 하지 못하는 것을 알기에 생각이 나면 몸을 움직여 스쿼트라도 몇번 한다. 그러면 몸도 다시 상쾌해져서 목표하던 바를 계속 추진하게 된다.

덴마크어도 마찬가지다. 2014년 8월부터 시작했으니 어느새 3년이 넘었다. 준외교비자로 온 탓에 비자를 바꾸기 전까지 1년은 6주에 100만원씩 내가며 공부했었다. 남들은 나라에서 내주는 돈으로 공짜로 배우는 덴마크어를… 그때까지만 해도 옌스와 결혼까지 하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관계가 유래없이 안정적인 사람이었기에 헤어지게 된다면 관둔다 하더라도 우선은 배워두겠다는 마음이었다. 산책을 나가면 몇 단어를 모르던 시기에서부터 무조건 덴마크어로만 말하기를 한다던가 옌스의 방식대로 우리만의 습관을 만들었었다. 책 읽기 연습을 하면서 옆에서 옌스가 발음을  교정해준다던가 하는 식으로. 내가 쓰는 글에 문법적으로 오류가 있거나 다소 이상한 표현들은 있을지라도 이제는 거의 업무를 할 수 있는 덴마크어에 가까워져가고 있다. 물론 덴마크어사전은 내 베스트프렌드지만.

항상 쉬지 않고 하는게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그가 있었기에 간혹 덴마크어 배우는 게 힘든 순간이 와도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었다. 영어로 하루종일 수업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했던 첫학기, 집에와서 오늘 배운 것을 덴마크어로 말해야하는 게 짜증나던 날도 있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버벅거리는 나를 상대하고 있어야 했던 옌스가 더 짜증났을 지도 모르겠다. 내가 옌스 한국어 공부 도와주는 것이 엄청 인내심을 발휘해야 하는 걸 보면… 계속 시도하지 않으면 늘지 못한다는 그, 자기도 말뿐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어찌 말이 쉽지 실행이 어렵다고 불평할 수 있겠으랴.

덴마크 엄마그룹에 껴서 덴마크어를 할 때 바짝 긴장했던 10개월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이 달라졌다. 알아듣는 폭도 엄청 늘었고, 덴마크어로 말하고 생각하는게 스트레스가 아니다. 매일매일은 느는 걸 못느끼고 발전이 더디다고 생각하지만, 어느날 과거 어떤 날의 내 모습이 기억나는 때가 있는데 그런 때, ‘아하. 엄청 늘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외국인이니 못하는게 부끄러운 게 아니다라며 처음 배운 덴마크어로 무조건 여기저기서 시도해보는 나를 보며 옌스는 간혹 재미있다며 웃기도 했지만 그게 좋은 자세라며 항상 격려해줬다. 그런 그가 있었기에 더욱 더 철판을 깔고 시도했고, 간혹 내가 엉뚱하게 알아듣고 잘못 답하고 상대가 이상한 표정을 짓게 되는 에피소드들도 더해져갔다. ‘아, 내가 외국인이라 잘 못알아 듣고 헛소리를 간혹한다. 미안하다.’로 마무리 되는 에피소드를 집에 와서 전하면 옌스는 배를 잡고 웃곤했는데, 이렇게 틀린 것들은 잘 잊어버리지 않게 되어 오히려 더 좋았다. 외국인인 나를 위해 영어로 바꿔주는 덴마크인들에겐 나 연습 좀 하고싶다고 부탁아닌 부탁까지 해가며 연습을 했는데 간혹은 낯이 뜨겁긴 했어도 다 좋은 경험이었다. 덕분에 하나 보육원을 시작하면서 보육 선생님과 말도 다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오늘은 참 날씨가 별로인데, 그래도 운동을 가야겠다. 짐 회원권도 끊었으니 자주 가야지. 레노베이션도 해서 많이 커지고 좋아졌더라. 열은 내렸지만 컨디션은 여전히 별로인지 하나가 껌딱지처럼 나에게 붙어있는다. 그래도 요즘 운동을 엄청 열심히 했더니 아기띠를 오래하고 있어도 허리가 하나도 안아프네. 그러니 더 해야지. 요즘 옌스가 하나를 재우는 덕에 7시 이후 내 개인 시간도 생기고 너무 좋다. 일 분담도 정해지고 이런 루틴 또한 분명해지니 삶이 편해지는구나.

 

평활함수와 예측불가한 인생

어려서부터 나는 수학을 안좋아하고 영어를 좋아한다고 했다. 오빠는 반대로 수학을 좋아하고 영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수학을 잘하고 싶었지만 이해가 느렸고 아주 쉽게 풀어 설명해줘서 하나하나 이해해야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제일 싫어하는 말이 그냥 받아들이고 외우라는 거였는데, 그 이유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면 머리에 들어가지를 않아서였다. 그래서 나는 수학은 선행학습이 절대 안된다는 것을 이해했다. 다행히 쉽게 설명해주는 과외선생님을 만나서 내 눈높이에 맞는 설명을 들어가며 뒤늦게 수학을 따라잡았다.
대학에 가서도 경제수학과 통계학은 정말 괴로웠다. 고등학교때 배우던 것에서 갑작스레 너무 점프해버렸다고나 할까. 학부때 재수강을 해서 그냥 최소한의 성적을 받고 넘겨버린 두 과목 모두 대학원에 가서야나 이해가 되었다. 참 오래걸렸다. 경제수학은 같은 교수님이었고 비슷한 내용이었는데, 그냥 결국 여러번 반복하고 부딪히면서 이해안되는 건 교수님을 엄청 귀찮게 해서 이해하고 넘어갔다. 통계학은 질문을 엄청 하고 무안도 엄청 주시던 재미있는 교수님이었는데, 이미 무안을 당한 바 무식한 질문도 많이 해가며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이 때 이해한 게 없었으면 지금의 공부도 엄청 힘들었을 듯하다.
이제는 여러 방법론을 리뷰한 저널 아티클 한개를 읽기 위해 다른 레퍼런스 아티클을 읽고 이것저것 뒤적뒤적 거리며 읽어야 한다. 살면서 평활함수를 이해하기 위해 이것저것을 뒤적거리라고는 “나는 수학을 못해. 좋아하지 않아.” 라고 읊고 다니던 시절의 나는 상상못할 일이었는데.
인생은 정말 예상하지 못하게 흘러간다.

Hannah startede i vuggestuen!

 

Hannah er nu lidt over 10 måneder og kan meget mere end før. Det føles som om, hun har været sammen med os for altid, selvom der kun er gået 10 måneder. Tiden er gået meget hurtigt. Det er meget sjovt, at det føles sådan, fordi jeg nogle gange klagede over, at tiden gik rigtigt langsomt efter fødslen. Måske var det fordi, det var ret fysisk hårdt at passe et lille barn, der ikke kunne gøre så meget selv. Jo hun kan stadig ikke så meget – hun er kun 10 måneder – men hun er ikke længere bare en baby. Hun er næsten en tumling!

Hun startede officielt i vuggestuen i går, hvis jeg ikke regner det første uofficielle besøg i mandags som den første gang. Det gik udmærket. Hun havde det sjovt og kravlede hele vejen rundt i vuggestuen. Hun så ud, som om hun godt kunne lide at lege med andre børn eller i hvert fald at være sammen med dem.

Nogle gange kunne jeg mærke, at andre børn udviste lidt aggressiv adfærd, mens pædagogerne ikke kunne mærke det på situationen. Der var, for eksempel, en dreng, der var lidt aggressiv generelt og skubbede Hannah og trådte på hendes fod. Jeg blev nødt til at sige, at han ikke måtte gøre det, og tog hende væk fra ham. Men det kan altid ske, og jeg kan ikke være der altid for at beskytte hende fra den slags situationer. Der er mange af mine venner, der selv har børn, som har fortalt mig, at jeg skal vænne mig til at se hende komme hjem med nogle skader i forskellige grader, store eller små. “Det gør ondt at se hende blive skadet, men det er den måde, man vokser op på.”, sagde de. Ja. Der er også det udtryk, at man bliver klog af skade. Hun vil også blive klog på den måde. (Men det er jo nemmere sagt end gjort!)

 

거절, 덴마크어, 이방인

거절에 익숙해지는 건 연습이 많이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그 거절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또한.

요즘 졸업한 동기들을 보면 스웨덴인과 덴마크인을 제외하고는 직업을 찾지 못했다. 신문에서는 전문직의 구인난이 계속되고 있다는데, 그건 결국 이나라 말을 할 수 있을 때나 해당하는 것인 모양이다. 졸업한지 3개월동안 구직을 하면서 인터뷰 조차 하지 못한 동기들은 꽤나 스트레스를 받는 모양이다. 학업을 하는 동안 덴마크어를 하지 않은 것을 엄청 아쉬워하고 있는데, 덴마크어 수업 등록하는 것도 실업급여 받는 동안 처음으로 강좌신청할 경우 원하는 학원에서 못듣고 잡센터에서 운영하는 학원으로 가서 들으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나마도 듣고 싶다고 신청을 했는데 아직 답도 못듣고 있다면서 분통을 터뜨리는데 마음이 안스러웠다.

덴마크어를 못하면 취업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덴마크어에서 손을 놓지는 않고 있었지만, 그래봐야 중상급. 일터에서 덴마크어를 쓰기엔 부족하다. 그나마 대학원으로 바빠 힘들다면서도 덴마크학원을 꾸준히 다녀놓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힘들 때 밀어부쳐야 오히려 더 하게 되는 거 같아서 2월부터 다시 다녀보려 생각중이다. 1년에 2번 보는 PD3라는 시험이 있는데 이걸 좋은 성적으로 통과해야 마지막 모듈을 들을 수 있다. 그 뒤에 있을 대학입학 요건 같은 Studieprøven이라고 최종 어학시험을 대비하는 모듈인데, 읽기와 쓰기를 인텐시브하게 가르친다고 한다. 여름 후 취직이 바로 안될 확률이 매우 높으니 그 때 이 모듈을 들어놓으려면 5월엔 PD3를 봐야할 것 같다.  옌스한테도 주 2회 저녁 7시 수업은 감당할 수 있겠느냐 물었더니 할 수 있단다.

수업과 시험은 수업과 시험이고. 실생활에서 쓰지 않으면 언어는 늘지 않는다는 것이 경험에서 나온 신조인지라 이제 새로운 레벨로 시도해보기로 했다. 논문 데이터 수집부터 덴마크어로 연락을 하기로 했다. 대충 시나리오를 짜 놓고 전화하긴 했지만, 전화란 게 나 혼자 떠드는 게 아니라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수업자체가 영어로 진행되기에 이에 해당하는 용어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결국 나중에 나에게 피가되고 살이 될 경험이라 생각한다.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 콜드콜을 걸어 나는 어떤 공부하는 학생인데 데이터 필요하다고 도와달라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거절하는 사람이 많은데다가 꼭 친절하게 답한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전화거는 방법도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니 우리말로 해도 긴장될 상황이다. 이 와중에 덴마크어로 이야기를 하다보면 내가 너무 혹시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건 아닌가, 아니면 오히려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려다 너무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머리속이 복잡하다. 누군가는 엄청 차갑게 우리는 그런 데이터가 없고 여기랑 여기 같은데서나 받을 수 있을텐데 네가 그것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답하기도 하고 누구는 도와주겠다고 하기도 한다. 당신이 말한 곳이 어디랑 어딘지 다시 말해주겠느냐, 내가 외국인이라 잘 못알아들었다 라고 재차 물어도 빠르게 말해주면 머쓱해지기도 하지만 아쉬운 건 나니까 철판 깔고 다시 들이밀었다.

차가운 반응이나 거절의 통화를 하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기분이 조금 그렇다. 그럴 땐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가며, 거절은 원래 당하는 거라며,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자고 중얼거린다. 점심때 만난 대학원 동기들에게 이야기했더니 거절에 곧 익숙해질 거라며 친절한 투로만 말했지, 닥치고 꺼지라는 내용을 들은 일도 많다고 이야기해준다. 엄청 위로가 된다. 거절에 익숙해질 거라니. 강해진다는 내용이잖아.

코트라 다닐 때만 해도 거절을 당하면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다. 내가 뭐 특별한 사람도 아닌데, 살면서 거절을 별로 당해보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 이제는 여기 이민자로 거절 당할 일이 수두룩 빽빽할텐데 하는 마음가짐이라 그런가? 거절에 조금 무뎌지는 거 같기도 하다. 물론 그럴 일을 줄이기 위해 노력은 하겠지만,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다 통제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지 않는가. 직업 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같이 공부해봐서 아는 우수한 친구들도 말이 안되니 인터뷰조차 못보는데.  논문 쓰면서도 그런 트레이닝은 많이 받겠지. 예전엔 거절당할 것 같은 일, 안될 것 같은 일은 하기 정말 싫어하면서 하거나, 피할 수 있으면 피했다. 지금도 그런 성향은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지만, 안될 거 같아도 해보면 되는 일들이 있으니 우선 부딪혀보자고 들어가는 것은 조금 달라졌다. 그리고 예전엔 하다가 중단하면 이미 완벽함에서 망쳐졌으니 다시 시작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안하는 것보다는 하는게 낫다는 주의가 되서 끈기가 조금 늘어난 것 같다.

다시 덴마크어로 돌아와서… 중상급에서 언제까지 안주하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라디오 청취를 다시 시작했다. 어디고 이동할 때는 핸드폰을 보지 않고 라디오를 듣는 것이다. 국영방송 제1라디오를 들으면 주로 뉴스와 시사, 교양프로그램, 토론방송 등을 한다. 텔레비전 드라마가 재미있어서 동기부여가 되긴 하지만, 자막과 그림이 있으니 듣기에 온전히 집중을 하지 않게된다. 그리고 라디오는 끊임없이 떠드니까. 국영방송이라 광고도 하나도 없어서 정말 공부하기엔 최적이다.

신문읽기도 하루에 최소 신문 한면 정도는 보도록 하고있다. 예전보다 읽는 속도가 늘어나서 신문읽기가 수월해졌다. 어휘를 따로 외우려는 노력은 안하고 끊임없이 찾다보면 외우게 되는 식으로 단어를 공부한다.

덴마크어를 가까이할 수록 한국과는 멀어진다. 한동안 엄마아빠가 뭘 이야기해도 대충 한국사정은 꿰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할 시간이 없다. 지진난 이야기도 남이 해줘서 알게되고. 하나가 있고 학업도 있으니 정말 딴 짓 하기 힘들다. 운동도 어디 가서 하긴 어려워서 애 잠들고 나면 화장실가서 스쿼트를 포함해 15분정도 간단한 맨몸을 활용한 트레이닝을 하는 게 전부다.

남의 나라에서 산다는 건 팍팍한 일이다. 그렇지만 모든 거절이 내가 외국인이라서 받은 게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거절은 내 나라에서도 받을 수 있는 것이니까. 거절에 대해 생각해보던 어제 친구에게 언제쯤 이곳에서의 삶이 이방인의 삶으로 느껴지지 않을 거 같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정확히는 답을 할 수 없었다. 아직도 이방인의 삶을 사는 건 틀림없으니까. 그렇지만 처음보다는 지금이 더 여기를 집처럼 느낄 수 있게 되었고, 덜 이방인처럼 느끼게 되는 것도 분명한지라 앞으로 계속 살다보면 여기가 진짜 내 고향 같아지지 않을런지.

 

논문 시작

수면교육을 시작한지 나흘째. 첫날이 가장 힘들었고, 그 다음부터 아주 조금씩이지만 쉬워지고 있다. 오늘은 저녁 먹을 시간에 늦은 낮잠을 잔 터라 막상 잠을 잘 시간에 잠이 깨서 그런지 옌스가 수면의식으로써 책읽어주기가 끝났는데도 영 상쾌해 침대에서 놀고 있었다. 잘 자라고 이야기하고 꺠어있는 하나를 뒤로한 채 옌스는 방을 나왔고, 저글링한다고 산책을 하러 나갔다. 그 사이에 하나는 혼자 놀기, 떠들기, 울기를 번갈아가며 반복하더니 어느새인가 잠이 들었다. 이와 함께 밤에 깨는 횟수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고, 밤중 수유도 줄어들었다. 건강방문사의 조언대로 배가 고파서 젖을 찾는게 아니라 습관이었던 것 같다.

11월 들어 학교에는 나가더라도 밤에 같이 하나를 데리고 자는 덕에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전혀 부족하지 않았는데, 학교도 나가고 하나도 스스로 자다보니 아이와 보내는 질적인 시간이 확 떨어졌다. 주말에 좋은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 먹을 때 독립적으로 먹으려 하는 것부터 해서 이제 앞으로 성인이 될 때까지 작고 크게 하나가 독립해나가는 일들을 경험하게 될텐데 그때마다 대견함과 서운함이 섞인 복잡한 경험을 할 것임을 벌써부터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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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이 부은 하나. 엄마가 가방을 메면 밖으로 나간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했다. “가방을 맡으면 저도 같이 가나요?”

학교를 나가기 시작하면서 옌스와 다툴일이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육아휴직 기간이 길어지면서 힘에 조금씩 부치기 시작했는지 간혹 다툴 일이 있었는데, 사촌이나 엄마가 해주신 조언도 받아들이기도 한 덕도 있지만 우선 온전한 나의 시간이 길게 확보가 되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게 가장 큰 이유이다. 옌스와 같이 한 지 어느덧 4년이 다 되어가는데, 이젠 진짜 겉과 속, 나의 가장 좋은 모습과 못난 모습 다 보여준 피를 나눈 것과 다름 없는 가족이 된 것이다. 서로 부딪혀가며 더 잘 이해하게 되고 결국 더 아끼게 되었으니 하나를 갖게 된 것은 그 자체로도 축복이지만 또 감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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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엔 동네 도서관 탐방도 간혹 하곤 한다. 잠깐씩 나가서 나만의 시간을 갖게 해주는 옌스. 육아휴직을 하더니 집안일도 더 돕고… 많이 늘었네.

 

논문이라는 건 듣기만 해도 뭔가 괴물같고 뿌옇게 시야를 가리는 안개처럼 느껴진다. 막상 쓰기 시작하기 전엔 더 그렇다. 사실 교수를 서둘러 만난 건 천천히 여유있게 하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는데, 이 괴물을 작은 단위로 해체하지 않으면 마음 속에 큰 짐으로 남아있을 것 같아 서둘러 시작했다. 나는 나를 잘 못믿기 때문에 교수가 어떻게 논문 지도를 해줄지 물었을 때, 중간 중간 진행상황을 점검하며 채찍질해달라고 부탁했다. 미니논문 쓸 때도 그렇게 하고나니 진행이 수월했고, 결과물을 제때 도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는 논문 계약서를, 오늘은 프로젝트 플랜과 dissertation statement를 보냈다. 처음엔 지난 1년동안 무뎌진 뇌를 닦고자 계량경제학 노트와 Economic valuation method와 CBA 노트를 읽어보고 그 다음 논문을 준비하려 했는데, 그렇지 않고 바로 논문에 뛰어들기로 했다. 목적없이 전체 노트를 리뷰하는 것보다 중간중간 필요할 때 리뷰하는게 더 집중하기 좋을 것 같아서이다.

이렇게 조금씩 발을 딛고 나니 안개에 휩쌓여 있던 아주아주 큰 괴물같던 녀석이 생각보다는 크지 않을 것 같고 잘 토막을 내 뼈와 살을 발라낼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프로젝트 플랜을 보내고, midway deliverables는 나중에 업데이트하기로 했는데, 그러려면 세부 프로젝트 플랜이 나와야 할 거라서 우선 관련 논문을 닥치는 대로 읽어보며 본격적인 리서치를 하기로 시작했다. 몇개 논문을 읽어보다보니 빈옥명이라는 East Carolina 대학교 교수님께서 쓰신 연구가 연관성도 높고 정리도 잘 되어있어 읽기도 상대적으로 수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외에서 연구를 하며 해외 자료를 찾다가 한국인이 쓴 자료가 나에게 큰 등불이 되어준다는 것을 알게 되서 소소한 놀라움과 기쁨을 얻었다.

옌스가 오늘 좀 조용하다고, 괜찮냐고 묻는다. 나쁜 스트레스는 아니고, 앞으로 쓸 논문과 향후 진로 방향,  논문 뿐 아니라 덴마크어도 잘 공부해야하고 등등 생각하다 보니 그냥 약간의 긴장감이 돈 것 같다고 답했다. 정말 오랫만에 (거의 1년만에) 진득하게 앉아서 집중해야할 긴 읽을 거리가 생기니 좋은 긴장감이 든다. 주말은 잘 쉬고, 다음주엔 또 다음주의 할 일들을 열심히 해야지.

원래의 일상으로 천천히 복귀하는 중

한국에서 돌아온지도 어느새 보름이 되었다. 방안에서는 옌스가 하나 수면교육하느라 하나의 울음소리가 크게 새어나온다. 어제 건강상담사의 방문 이후 오늘부터 다 흐트러진 수면교육을 다시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만 5개월을 지나면서 하나가 서서히 분리불안을 느꼈는데 밤에 처음 재우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중간에 깨면 난리를 치면서 울고 나에게서 떨어지기를 거부하는 탓에 혼자자던 리듬이 다 깨졌었다. 젖 물리는 것과 자는 것은 철저히 분리하라는 것도 그렇고 중간에 깨고 나면 내가 하던 일을 다 중단하고 하나와 같이 자기 시작했는데, 그렇고나니 저녁의 삶은 전혀 예측이 불가능하고 나만의 시간을 누리는게 불가능해졌었다.

한국에 가서도 이러한 일상이 지속되었고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돌발진을 앓으며 고열에 수분 섭취가 중요하다며 입맛 떨어진 애에게 수유를 늘렸는데, 밤중 수유가 늘어나며 낮에 잘 먹던 이유식 양도 줄고 하여간 여러가지가 꼬여있었다.

단호한 수면교육. 쉽지 않았다. 얼마나 울려도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장시간 우는 게 트라우마로 남아 아이의 성격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어 우선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아보고 어떻게 할 지 결정하기로 했다.

건강상담사는 하나의 정서적인 특성을 비롯해 발달상황을 관찰하고 수면 패턴과 수유에 대한 내 관찰사항을 듣고 나더니, 밤중 수유는 습관인 것 같다는 조언을 해주었다. 이건 내가 마음을 먹고 끊으려면 끊을 수 있는 것인데, 꼭 당장 끊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하니 내 편할 대로 결정하라 한다. 다만 밤에 많이 먹으면 낮에 별로 안먹으려하니 그 점을 고려하라고 했다. 수면 부족으로 성장에 저해가 된다며 애의 밤중 수유를 꼭 끊으라는 글 등을 보고 마음이 영 불편했었는데 그건 아니었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밤중 수유는 서서히 줄여보련다.

밤에 악몽을 꾸는 듯 일어나서 우는 것에는 여행으로 인한 중이염 등 문제가 있을 수도 있는데, 우리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흉내낸다했더니 그건 아닌 거 같다고 하고, 그 또한 혼자 스스로를 위로하며 잘 수 있게 해주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애가 새로운 습관에 적응하기까지 14일정도 걸리니 그때까지는 일정한 패턴으로 수면의식을 해주라더라. 14일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오랜 기간이다. 그리고 아빠가 재우는 것이 조금 더 효과적일 수 있다 하여 오늘부터 옌스가 애 잠을 재우는 것으로 한 것이다. 나야 덕분에 7시부터 자유를 누리고 있어 좋지만 방 안에서 20분이 넘도록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영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다.

약 열흘의 적응기간을 거쳐 이제는 하나와 6~7시간을 떨어져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전날 이유식을 준비해두면 오후 4시에 집에 돌아올 때까지 애 밥도 먹이고 놀고 산책도 다니고 하면서 하루를 하나와 함께 보내는 건데, 생각보다 잘 하고 있다. 그 전에 집안 살림과 애 보는 것을 내가 다 하던 것과 달리 자기는 애만 보는 것인데도 힘들어서 그런가, 그러한 일과가 끝나고서도 설겆이며 여러 집안일을 좀 더 꼼꼼히 하고 있다. 자기가 경험해보니 전업주부 하며 애 보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나보다. 역시 사람들은 역할도 바꿔보고 해야 서로를 더 이해할 수 있는 법이지.

아기 보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 옌스는 힘이 들겠지만, 나는 새로운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너무나 좋다. 애 보면서 이것저것 정신없이 처리하던 노동의 일상에 젖어있던 탓에 한 주제에 집중하는 게 좀 힘들었지만 오늘은 다른 날보다 그게 잘 되서 기분도 좋았다. 상쾌한 바람을 느끼며 학교로 통학하자니 비오는 날 조차도 상쾌하고 좋다.

논문 작성할 수 있는 고정 데스크도 신청해서 자리를 배정받았고, 읽기도 시작하고, 뇌를 조금씩 쓰기 시작하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은 느낌. 아무래도 아이가 아프면 집에 들어앉아 애도 봐야하고 할테니 여유있는 시작이 나에겐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서 빠르게 돌아가는 것인데, 덴마크에선 대부분 생후 1년 이내에 기관에 애를 보내기도 하고 해서 이래저래 내 사정에도 잘 맞다. 오랫동안 영어도 안쓰다 보니 한국에서 옌스 및 친구와 함께 영어할 때 덴마크어가 자꾸 툭툭 튀어나오길래 영어도 퇴화되는 거 아닌가 걱정했었다. 그런데 다시금 아예 영어로 대화하는 환경에 돌아가니 그런 것도 아니어서 다행이다 싶기도 했고. 엄마로서의 내가 아니라 온전히 나로서 있을 수 있는 환경에 돌아간 게 제일 좋은 것 같다.

12월 첫주까지는 옌스가 육아휴직중이라 둘이서 같이 하나를 보육원에 보낼 수 있다. 그 이후엔 1주간 나 혼자 하나의 적응기간을 지켜보고, 다음엔 나도 완전히 워킹맘으로서의 일상으로 복귀해야지.

30분만에 옌스가 하나를 재우고 나왔다. 엄청 울더니… 앞으로 이렇게 하자, 하나야. 엄마도 이제 저녁엔 엄마의 삶을 찾을게. 고마워.

시부모님 오시기 전 한국방문기간을 정리하며

아기와 함께 하는 고국방문은 전혀 다르리라는 것을 고려하지 못했다. 유모차 하나로 대중교통 타고 다니며 여기저기를 싸돌아다니던지라 아기가 하나 있는 게 크리 큰 장애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애가 카시트를 싫어하긴 했지만 금방 적응하리라고, 그전에 그랬듯이 애가 항상 건강할 것이라고, 밥은 항상 잘 먹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동경에도 가볼 수 있지 않겠냐면서 한번 계획해보자고 했던 게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황당무계한 상상이었는지.

시부모님 계시는 한주를 제외하면 거의 한달 반에 달하는 시간이었는데, 가족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보자고 약속을 하고 기대를 한껏 하고 왔던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아쉽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남편이 뭘 쓰느냐고 물어서 답을 해줬더니 자기는 이번 여행은 자기가 예상한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육아휴직여행이지 놀러가는 휴가가 아니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냐한다. 내가 나이브했나?

하나는 도착해서 첫 2주를 감기로 고생하며 신고식을 하더니 지난 며칠은 돌발진이라는 것으로 고생을 했다. 사흘 정도를 고열로 고생을 하더니 갑자기 어제 열꽃이 피는 것이었다. 열꽃을 찾아보니 돌발진이라는 병명을 알 수 있었는데 증상이 정확히 하나와 일치하더라. 병원에 가서 정확한 진단을 받아보니 (혹여나 다른 병일 수도 있어서) 열이 내리면서 발진이 난 거면 돌발진이 맞고 (증상으로 진단을 내릴 수 있는 병이란다.) 그거면 힘든 부분은 다 지난거라며 열이 다시 오르는지와 가려워서 긁는 일이 있는지 등만 관찰하라고 했다. 39도가 넘어 끙끙거리던 밤만은 병원으로 가야하는지를 참 고심했는데, 결국은 안가기를 잘했다. 가봐야 해열제 처방 받는 거 외엔 크게 해줄 수 있는게 없다고 한다.


최근 하나는 부쩍 컸다.

엄마, 아빠를 말하고, 드디어 책은 먹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뚜렷하게 인식한 것 같다. 새로운 단어를 반복해서 이야기해주거나 혀를 차는 것 같은 소리를 들려주면 한참 관찰하다 따라하곤 한다.

애가 이유를 모르게 찡찡댈 때 달래줄 수 있는 방법이 안거나 업어주는 것에서 책을 읽어주는 것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놀아주는 것으로 상당부분 대체되었다. 좋아하는 인형을 주고 안아주는 거는 정말 피곤해서 쉬고싶을 때만 통한다.

숟가락으로 떠먹여주는 이유식은 거의 다 거부한다. 자기가 손가락으로 탐험을 한 음식을 자기가 손으로 먹거나 포크로 먹기를 원하고, 어른들이 먹는 음식을 먹고 싶어한다.

할머니가 안아주면 엄마가 방에 들어가서 쉬거나 외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할머니를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할머니가 안아주는 것을 싫어하는 경우가 생겼다. 물론 아예 내가 외출하는 경우는 아빠보다 할머니가 안아주는 것을 선호하고 할머니를 많이 따른다고 한다.

대문은 사람들이 사라지는 문이라는 것을 알게된 모양이다. 언젠가 그 앞에 가서 손가락질하며 나에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더니, 그리로 누군가 옷을 입고 나가려면 싫다고 운다.

또 누울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는 말이 뭔지를 실감하게 해주는 게, 기저귀를 간다거나 손톱을 깎는 등 하나가 싫어하는 일을 내가 할 때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괜히 울면서 땡깡을 부린다. 구해달라는 듯이. 자기가 울면 애교를 떠는 사람들을 보고 그런 판단을 한 것 같다. 그러면 나 혼자 하겠다고 저리 자리를 비켜달라고 부탁한다. 이러나 저러나 해야한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하고 할 일을 하면 하나는 곧 딴 짓하며 노래를 흥얼거리기까지 한다.

안된다는 말을 이해하는 것 같은데, 안되는 일은 우리가 보지 않는 틈을 노리려는 모습을 보인다. 호시탐탐…

낯을 가리는 것이 얼굴을 보고 우는 것 말고 수다를 멈추는 형태로도 나타난다. 엄청 수다쟁이인 녀석이 낯선 사람이 있으면 말을 별로 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가고 나면 그간 말을 못해 답답했던 듯 터진 둑처럼 수다를 떨기도 하고, 친해지고 나서 말을 많이 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듣던 것처럼 기왕이면 젊은 사람을, 여자를 더 좋아한다. 특히 나이든 남자는 친해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이제 다음주 월요일에 짐 싸고 화요일에 호텔로 옮겨서 시부모님 공항에서 픽업하고 나면 일주일 여러 행사를 마치고 덴마크로 귀국하는 일만 남았다. 아이를 낳고서부터는 인간관계의 지평이 엄청 바뀔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크게 느낀 여행이었다. 왜 아이를 낳은 부모들이 달라지는지는 되고서야 이해하게 되더라. 내 딴엔 타인의 시선으로 이해하려 한다하면서도 그렇지 못했던 과거의 나를 반성하게 된 계기도 되었다. 만나고 싶었지만 만날 수 없었던 내 아끼는 지인들에게 변명 아닌 변명을 하게 된다. 정말 만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