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육/초등교육 우선정상화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의 골자는 그대로 유지하되 어린 자녀를 둔 부모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 보육원과 유치원, 초등학교 5학년까지의 아동 보육/교육 정상화가 시행된다. 부활휴가 이후 하루의 준비기간을 거쳐 당장 다음주 수요일부터 시작이다. 아이들의 경우 대부분 심하지 않게 넘어간다 하니 옌스와 나는 사실 하나에 대하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총리의 발표를 듣자마자 만세를 불렀다. 회사가 닫지 않는 이상 일은 일대로 해야하고 애는 봐야 하니 24시간 중 애보고 밥해먹이고 자는 시간 제외하면 계속 일을 해야하는 상황에 처하니 지난 삼주간 다들 스트레스와 피로가 쌓이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우리 입장에선 숨통이 터진 거였다.

각자 입장마다 생각이 다를 거다. 이번 조치가 너무 이르다는 사람, 사회 개방이 너무 느리다는 사람… 모두를 만족시킬 수도 없고 뭐가 정답인지 알 수도 없는 탓에 어찌보면 그냥 따를 수 밖에 없다. 전세계가 동시에 휩쓸려 그 누구도 계획했던 일들을 원하는 대로 제대로 행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참 어렵고 힘들다. 뭐가 더 중요하다 급하다 이런 판단을 하기 힘들다.

오늘 하나에게 다음주에 보육원에 갈 수 있다 하니 너무 좋아한다. 거의 한달 가까이 못 본 친구들을 보려니 얼마나 좋을까. 일말의 걱정은 있으면서도 우선은 보낸다. 정부 방침은 나에겐 고용주의 방침이기 때문에, 애가 아플까봐 걱정된다고 애를 집에 두고 나에게만 업무적 비효율성이나 비유연성을 배려해달라고는 할 수가 없다. 그냥 잘 건강히 다녀주길 바라는 수 밖에.

이 모든 게 끝나고도 사람들간에 거리를 두는 새로운 습관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네 생활 방식에 흔적을 남길 것 같다. 정말 이상하고 적응 안되는 의식적 거리두기… 이 순간 같이 나와 살을 부빌 수 있는 딸과 남편이 있다는 게 얼마나 안도가 되는 지 모르겠다. 올해 한국은 가볼 수 없겠지? 이미 이 또한 마음을 거의 접었다. 마음 아프지만… 언제 우리는 다시 여행을 할 수 있을까?

[덴마크 협업문화] 경제분과 국무위원회 상정 안건 생산

코로나 시대의 새로운 근로문화. 업무 시간의 경계가 흐려진다. 방금 업무가 끝났다. 열시 반. 오늘도 아침 7시에 일을 시작했는데… 다들 애가 있으니까 긴급한 사안이 있는 경우, 애 없는 시간에 협업이 이뤄지게 된다. 상반기에는 부활절 휴가기간이 있어서 이 전후로 많이 바쁜데 거기에 특별히 급한 프로젝트가 떨어졌다. 하수도기업의 기후변화대응 파이낸싱 방안에 대한 법안이 내년 1월부로 발효되어야 한다는 결정이 이번주에 결정되면서 그간 부처간의 의견 차이로 다소 미적거리던 프로젝트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부처간 이해관계 및 오너십 문제 등에서 미묘한 갈등이 있어왔는데 이제는 그걸 아주 적극적으로 부딪혀서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안그래도 여러모로 바쁘고 내가 발표하거나 리드를 해야하는 회의가 있어서 긴장레벨이 높았는데, 법안 상정을 위한 모델 페이퍼를 금요일 센터장급 부처간 회의 전에 급히 만들어야 한다는 상황에 멘탈이 나갈 지경이었다. 이번주에 옌스가 지난주처럼 바빴으면 정말 끔찍했을 것 같다. 애와 놀아주느라 회의들 사이사이 밖으로 나가 주기도 하고 일과 육아를 열심히 병행해준 옌스 덕에 이번주의 일들이 가능했다.

현재 법안과 제도 부분을 토대로 안건의 제도적인 모델 부분은 나와의 회의를 통해 합의된 내용을 토대로 선임이 쓰고, 나는 경제분석방법에서 테크니컬한 부분을 써서 초안을 마련했다. 그걸 토대로 우리 센터장이 코멘트를 해 초안을 1차로 보강한 후, 센터장의 커뮤니케이션 전략에 따라 수정 초안을 대대적으로 재배치하고 전략적으로 표현을 수정해 2차 수정 초안을 마련했다. 거기에 우리가 수정하거나 보충할 것을 더한 후 상사가 컨펌을 함으로서 최종안이 나왔는데, 진짜 센터장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탁월하다는 걸 다시한번 느꼈다.

이번처럼 엄청 타이트한 데드라인 압박속에서 중요 문건을 여러명의 협업을 거쳐 생성하는 과정을 거치며 정말 많이 배웠다. 덴마크어 공부는 덤. 타이트한 데드라인 압박속에서 일하는 거야 익숙하지만, 그 과정에서 협업을 효율적으로 하는 법은 익숙하지 않는데 말이다.

현재 내가 하는 일이 입법으로 연결되야 하는 게 두개나 걸려있어서, 법안 초안 작업 전 작성하는 고려사항문서에 어떻게 내가 하는 일이 반영되는지, 그래서 그게 어떻게 법안과 시행령에 들어가게 되는지, 직접 참여하고 보면서 많이 배우게 될 것 같다. 한국과 달리 내각책임제 시스템인데다가 대부분의 법안은 국회에 상정되기 전에 정당간 협상을 통해 법안이 통과될지 여부가 결정되기에 부처에서 먼저 만들지 않은 안건이 야당의 입법제안을 통해 상정되는 케이스는 없는 것 같다. 한국의 프로세스를 잘 모르는데다가 덴마크의 프로세스도 사실 나에게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이를 비교하는 건 가능하지 않지만, 오랜 시간 공기업에 근무하면서도 사실상 멀게만 느껴지던 일련의 프로세스를 덴마크에 와서 배우게 되는 것도 신기하다.

요즘 정신적으로 사실 피로하기도 하고 육체적으로도 피로하긴 하지만 배우는 건 많고 힘든 와중 즐겁기도 하고 그렇다. 내일 하루 버티면 또 주말이 오고 곧 또 부활절 휴가가 오겠지. 조금만 버티자.

첫 MUS를 마치고

MUS (Medarbejderudviklingssamtale, 직원계발면담)은 1. 전반적 직장생활 만족도를 평가하고, 2. 연간 실적을 정리하고, 3. 내년 목표는 무엇인지, 4. 현재 역량의 상황을 평가한 후 5.계발해야 할 역량은 뭐가 있는지, 6. 미래 계획은 뭐가 있는지, 7. 직속상사에게 역량계발지원을 위해 요청할 건 뭔지, 8. 직속상사가 리더로서 개선할 점은 뭐가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미리 해당 내용에 대해 생각해보고 적어가야 한다. 그래야 일년에 두 번 (두번째인 mini-MUS는 MUS에 이야기한 항목에 대해 점검하고 연봉협상을 겸한다.) 있는 이 기회에 상사의 나에 대한 기대와 부응수준, 내가 회사에 나의 발전을 위해 요청할 것 등을 효과적으로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준비해간 내용을 차분하게 이야기하고 상사의 평가에 대해 듣고 대화를 나누었는데, 약간 긴장했던 것과 달리 너무나 좋은 평가를 받았고 내가 요청하는 사항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사실 지난 8개월이란 시간동안 말도 글쓰기도 많이 늘었다고는 해도 내가 한국어나 영어로 일할 때보다 효율적일 수 없다는 한계 속에, 혹시 나에게 말은 하지 않지만 상사가 채용을 후회하거나 하는 건 없을까 하는 막연한 걱정도 살짝 했었다. 오늘의 면담을 통해 그런 걱정은 싹 털어버렸다. 


다만 상사의 마지막 조언 한마디가 내 마음에 확 와닿았다. Be compassionate to yourself. 내가 나 스스로의 발전에 대해서 야심도 있고 자기에게 엄격한 기준을 갖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결과를 내면 인내심을 갖지 못하는 성향인 것 같다며, 남에게 대하듯 나에게 좀 더 너그러워지면 좋겠다고 하더라. 이게 발전의 동력이긴 하지만 밸런스를 맞추는 게 중요함을 나도 느껴서 고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는데,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그렇게 지금껏 살아왔던 터라.


이번을 계기로 직장안정성에 대한 이유없는 불안은 완전히 떨쳐버렸다. 얼마나 안도되는지….

3주의 휴가

휴가 3주차에 접어들었다. 첫주의 시작은 집안 페인트칠로 땀을 빼는 육체노동이었지만 둘째주에는 시댁에서 먹고, 쉬고, 자고, 하나와 화끈하게 놀아주는 가족의 시간이었다. 마지막주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하나와 재미있게 놀아줄 수 있으면서도 우리도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성인이 된 후 이렇게 여유로운 휴가를 보내본 적이 없다. 아니 그보다 일찍으로 시간을 돌려 중학생이 된 이후 이렇게 3주의 시간을 연속으로 여유롭게 보내본 적이 있던가.

덕분에 일상으로 돌아갈 힘이 나는 모양이다. 다소 긴 시간 쉰 탓에 돌아갈 걱정이 안되는 건 아니지만, 이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3주간의 여름휴가라는 게 아주 적당한 시간이 아닌가 싶다.

하나는 무섭게 크고 있고 한마디로 경이롭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경험이다. 애를 일반적으로 좋아하지 않던 내가 다른 애들도 좋아하게 되고, 다른 부모들이 애들 자랑하는 걸 이해하지 못해하던 내가 그게 너무나 이해가 되고 애들의 성장 하나하나가 너무나 놀랍게 느껴진다. 기적같은 것이라 할까. 애들이 뛰어노는 혼돈의 상황이 평화로 느껴지게 바뀌는 기적. 관계의 축이 바뀌고 관심의 초점이 바뀐다.

이번 휴가는 그런 하나와 살갑게 부대끼는 그런 기간이다. 육아 초기, 사회생활이 없어지는 변화 속에 나의 시간을 간절히 그리워했다면, 그리고 육아가 제일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가장 힘든 시기가 지난 지금, 아이가 너무 이쁘고 같이 보내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하다.

이제 다시 가을 한국 방문휴가를 가질 때까지, 연말 연시 연휴를 맞이할 때까지 하나와의 집중적인 시간은 미뤄둘 수 밖에 없지만, 그 때를 기다리며 일상을 열심히 달릴 수 있게 되었다.

내 사랑 하나

덴마크 직장생활의 중요한 일부 – 금요일 아침식사

매주 금요일이면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30분 아침식사를 함께 하고 나머지 30분엔 회의할 게 있으면 하고, 아니면 해산한다. 직원들 수가 늘어나면서 20명에 다다르니 준비할 것의 무게도 너무 늘어나서 두명이 같이 준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식사로 먹을 빵으로는 큰 덩어리의 빵이나 일인용 분량의 작은 덩어리빵을 섞어서든 큰 덩어리 빵만이나 작은 덩어리 빵만으로 양을 맞춰서 준비한다. 또 그 후에 후식으로 먹을만한 wienerbrød (영어로는 Danish pastry이나 사실 오스트리아에서 이민온 제빵사가 만든데에서 기인한 탓에 비너브횔이라고 한다)을 준비한다.

이와 함께 빵 위에 발라먹을 버터와 얹어먹을 치즈, 잼, 햄, 폴랙(pålæg) 초콜렛(빵에 얹어먹도록 나온 얇은 판형의 초콜렛. 스프레드 대신 빵에 바로 얹어먹는다.)를 준비한다. 우리 센터 직원들의 취향을 반영해 버터는 락토스 없는 것도 하나 준비해가고 잼은 최소 두가지 종류로, 햄은 파마햄 종류, 치즈는 아주 전형적인 mellemlagret danbo와 함께 크리미한 브리타입의 치즈를 준비한다. 폴랙 초콜렛은 다크가 중요하다. 과일을 함께 준비하기도 하는데 요즘은 딸기 철이라 딸기를 가져가볼까 생각도 하고 있다.

음료수로는 주스 세병을 준비하는데 오렌지, 사과에 다른 주스 한종류 섞어가는 게 보통이다.

두명으로 분량을 나눈 이후 한 명은 빵, 한명은 기타 같은 식으로 나누기로 했는데 나는 집 근처에서 회사가는 방향에 빵집을 찾기가 애매해서 항상 그 나머지를 사는 것으로 한다. 원래 다음달 생일 전날 아침식사 담당이었는데 동료가 이번주 아침식사 담당일에 휴가를 쓰려고 한다며 바꿔줄 수 없냐고 물었다. 마침 생일날 케이크도 사야하는데 아침식사도 준비해오려면 참 뭐가 많겠다 싶었기에 흔쾌히 승락했다.

저녁에 잦은 회식이 없고 점심시간도 자리 떴다 돌아오기까지 30분에 불과한 탓에 생일자가 가져오는 케이크를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30분, 이렇게 회의를 겸한 금요일 아침식사 30분이 직원간 네트워킹에 중요하다. 각자 뭐하는지 이야기도 나누고 아이디어도 주고받고, 또 사생활에 대해서도 담소를 나누며 서로에 대한 이해도 높이고 말이다.

내일 저녁엔 빨래를 하고 (공동빨래 공간 금요일 오후 예약이 내가 예약하기 전에 차버려서 할 수 없이 내일 예약했다.) 하나도 재워야 해서 (옌스와 매일 번갈아가며 애를 재운다.) 장을 보러 가기 어려울 것 같아 오늘 미리 금요일 아침식사 장을 봤는데,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덴마크 직장생활 만 4개월 평가

요즘 언론에 초점을 받는 업체들이 조금 있는데, 그와 관련해서 우리도 영향이 있을 거 같아서 주시하다가 사안을 조금 깊게 파고 들어봤는데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경영진의 관심이 쏠린 사안이라 급히 목요일 오후부터 금요일 오후까지 급히 작업을 해서 보고서를 만든 후에 경영진에 자료를 송부했다. 자료를 미리 보내둬야 주말에 경영진들도 자료를 읽고 월요일에 회의를 할 수 있으니까. 금요일은 그덕에 점심도 스킵하며 일하고 서둘러 퇴근했는데, 오늘 회의도 열두시 반에 잡힌 탓에 한시 반이 넘어 간신히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일이 커져서 그 일을 내가 본격적으로 담당하게 되었는데 재미있을 것 같다.

지난 4개월 조금 넘은 기간 동안 느낀 걸 몇 개 뽑아보니 참 신선하면서도 은근히 금방 익숙해지는 것 같다.

첫째로 보고서에 대해서 절대 막 수정하지 않는다. 보고서를 검토, 수정해서 나에게 보고서가 돌아올 때도, 그 분량이 많지 않고, 내용이 내가 의도하던 내용에 부합하는지 등을 확인하고 수정이 괜찮은지 봐달라고 표현하는 게 참 신선했다. 내가 외국인이니 나는 문법 틀린 거는 매우 환영하며 고쳐달라고 하는데, 그게 혹시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는지를 확인하는 것부터 좋은 의미로 얼마나 이상하던지.

그리고 잘 한 부분은 정말 열심히 칭찬해준다. 덴마크도 겸양을 중시하는 터라 칭찬에 반응하는 방법이 우리랑 크게 다르지 않은데, 칭찬은 적극적으로 하는 편인 것 같다. 우리 센터장이 특별히 그런 타입인 것 같긴 한데.

직군별 이동이 없다. 행정직은 행정업무만 한다. 행정직이 오래 근무를 했다 해서 전문직군 업무를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이코노미스트 (økonom) 포지션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해당 학위가 있어야만 한다. 이를 대체할만한 이력이 있으면 모를까 짧은 행정 관련 직무교육을 받고 비서로 계속 일한 사람은 같은 직장에 계속 있었다고 해서 이코노미스트 포지션에 앉을 수 없다. 각자 자기 자리에 앉아서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을 계속 파는 것 뿐. 부서를 바꿀 수는 있어도 크게 자기가 속한 커리어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공공부문이 이런 건 더욱 강한 것 같다. 민간이야 사실 그런 업무를 할 수 있기만 하면 교육 백그라운드가 중요한 건 아니고, 경력이 길 수록 교육의 의미야 흐려지기도 하니까.

회식은 진짜 없다. 다 각자 바쁘니까. 나도 바빠서 참여하기도 어려우니. 대신 1년에 한번 센터데이를 한단다. 업무시간 중 프로그램은 철저히 업무와 관련해서 짜더라. 우리 같은 경우 우리가 관리하는 하수처리 업체 중 하나를 방문해서 하수처리 프로세스도 보고 설명도 듣고, 예산 관련 애로사항도 청취하는 걸로 짰는데, 대신 저녁에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먹는 걸로 했다. 음… 기대기대. 놀라운 건 이 모든 어레인지를 센터장이 했다는 것. 이게 가장 센터데이에서 가장 놀라운 파트였다. 일정은 두달 전에 이미 전체 직원에게 일정을 물어봐서 조율한 거였다.

행정 업무가 일에서 빠져 있으니까 일에 대한 집중도가 얼마나 올라가는 지 모른다. 자기가 어떤 일을 맡을 줄 알고 지원해서 채용된 포지션에서 다른 이상한 잡무 안하고 관련된 일을 중심으로 담당하면 당연히 집중도가 올라갈 수 밖에 없는 거 아닌가. 가지수가 늘어나면 날 수록 데드라인 점검하는 것으로 머리가 복잡해지니.

직장생활에서 친구 사귀는 건 힘든 일인 건 맞는 거 같다. 내가 내 생활에 여유를 내줄 수 없는 것처럼 타인도 자기 생활의 여유를 내주기 힘들고 그나마 그걸 할 수 있는 젊은 사람들은 또 아침에 회사 헬스장에서 만나서 같이 운동하거나 같이 러닝클럽에서 뛰는 식으로 내가 맞추기 어려운 활동을 하더라.

금요일마다 직원들이 돌아가며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대충 사가는 품목은 큰 틀에서 정해져있지만 자세한 건 자기가 정하면 된다. 인원이 늘어나서 올 3월부터 2인이 분담해 해당 주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으로 바뀌었는데, 주스, 잼, 치즈, 버터, 햄, 과일, 빵, 패스츄리 등을 준비하면 된다. 은근 무겁다. 그래도 이렇게 금요일 아침에 30분 식사를 함께하며 담소를 나누고 센터회의를 뒤이어 하면 서로 공유할 정보도 나누고 친교도 나누고 좋다. 회식이 어려운 덴마크인에겐 회식같은 요소이다. 물론 점심도 있지만 점심보다는 회의실에 앉아서 하는 식사라 좀 더 친목요소가 더 있는 느낌?

4개월이니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지난 기간에 대한 평가는 대만족이다. 오히려 너무 대만족이라 두려운 듯. 상사가 갑자기 바뀐다면 어떨까 등등 이런 생각 말이다. 우리 팀장은 여자인데 내가 만나본 적 없는 유형의 여자 상사로 카리스마, 부드러움, 유머, 강단을 잘 버무린 사람 같다. 쓸데 없는 생각말고 일이나 해야지. 새로운 프로젝트가 하나 떨어졌는데 사안을 과거사부터 깊게 파봐야 하는 일이라 아주 재미있을 것 같다. 분석리포트도 재미있지만 두 프로젝트를 병행하는 것도 하나가 안풀릴 때 다른 걸 하는 식으로 돌릴 수 있어서 더 좋을 것 같다.

다르긴 하지만 여기도 이상향의 천국은 아니다.

내일은 임원진 회의에 처음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실제 데이터를 갖고 모델을 테스트해 본 결과를 보고하는 거라 내용면에서는 긴장할 것이 없긴 하지만 인사해본 적 없는 비담당 임원들도 동석하는 자리에서 발표를 하는 건 어떨런지 모르겠다.

아직도 상사와 임원을 이름으로 부르는 게 익숙하지 않다. 상사나 선임과 이야기하다가 부청장과 청장 (둘다 공교롭게 야콥이다.) 을 칭할 때 야콥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야콥이 이렇게 지시했다, 이렇게 말하는 게 참 불편하다. 뭐랄까… 미스터 할, 미스터 샴부엌 이런식으로 이야기하면 편할 것 같은데 말이다.

대화 중간중간 사람의 이름을 불러가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도 익숙하지 않다. 지난 주 전화로 다른 청 사람과 오랜 시간 통화했을 때 그 사람은 중간중간 내 이름을 불러가며 대화를 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좋은 생각이다, 해인.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해인. 나도 네 생각해 동의한다, 해인. 그래서 그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느냐, 해인. 이처럼 중간중간 이름을 부르니까 나도 애써 마티아스라는 이름을 애써 껴 봤다. 그렇게 하다보면 좀 더 친밀해지는 거 같긴 한데 (앞으로 협업을 많이 해야 하는 사람이라 그래서 나쁠 건 없다.) 그러기까지는 입에 붙이려고 노력 많이 해야할 것 같다.

사람 사는 곳이 다르면 얼마나 다를까? 여기도 직장에 이상한 사람 있고, 그래서 갈등도 다 있게 마련이다. 커리어 컬럼에 “상사가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일 경우 어떻게 해야할까?”, “상사로 인한 스트레스로 직장에 가기 힘들 때 어떻게 해야하나?” 이런 것들이 실리는 게 흔한 일이니 말이다. 물론 그럴 경우 직장에서 문제시 되는 경우가 많아서 한국에서보다 그런 사람을 마주할 확률은 낮지만, 없지는 않다. 옌스는 우리 회사 분위기가 특별하다고 한다. 공공부문인데다가 정치적으로 독립성이 커서 장관이 좌지우지하기 어려운 기관에 전문성이 큰 기관이라 그런 거 같다고 한다. 그 점 감사하게 여기고 있다.

사람 사는 곳 다를 것 없다는 이야기를 하다보니 생각났는데, 덴마크의 평등에 대해 과하게 왜곡된 정보가 한국에 떠돌고 있는 것 같다. 급여 부분에서 청소부를 하든 의사를 하든 급여가 별 차이가 없다든가 하는 정보 말이다. 그럴리가. 여기가 사회주의라는 건 공산주의라는 게 아니다. 나라에서 많은 부분의 복지를 민간에 맡기지 않고 공공에서 책임지고 떠맡는다는 것이고 그를 위해 세금을 많이 걷는다는 것 뿐이지, 경제가 돌아가는 기본 방식은 자본주의다. 신체노동을 수반하는 직업이나 사무직이나 기본적으로 최저 세전 임금수준이 높고, 직업이 없는 사람을 받쳐주는 사회안전망 덕에 빈곤선에 있는 사람이 적다는 거지 그 사람들이 어떤 조직의 위에 앉아 많은 사람들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장기간의 교육이 필요한 전문직만큼 월소득이 높다는 게 아니다. 다만 그런 사람들의 경우 직업전선에 일찍 뛰어들어서 생애 소득 기간이 길어지니까 생애 소득을 기준으로 하면 고연봉자와 소득 차이가 더 줄어들 것이다.

시청청소부가 의사와 결혼을 한다던데 청소부 세후 소득이 월 기준 35000크로나(원화 600만원) 쯤 되고 의사는 별로 안번다 이런 글이 돈다고 이에 대한 생각을 묻는 글이 한인회에 올라왔다. 나도 블로그 여기저기에서 본 글이었다. 개인의 세율은 개개인별로 차이가 많이 나서 별로 안내는 사람도 있지만, 세후 소득이 35000크로나쯤 되려면 노동시장분담금, 개인소득세 해서 거의 50%에 가까운 세금을 내야한다. 주변에 물어보니 가족들을 포함에 직원들도 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 한다. 우리 청도 예산 절감에 대한 압박을 상시 받고 있고 그건 시정부도 마찬가지이다. 예산 문제로 여러가지 서비스를 외주로 돌리는 건 덴마크 공공부문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거라 우리 청의 경우 외주로 돌아가 있다. 그리고 청소부문은 난민이나 비서구국가에서 이주온 이민자가 거의 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교, 스포츠센터, 호텔, 기차역, 백화점 등 할 것 없이 청소하는 사람은 다 피부색이 어두운 이민자들이다. 간혹 한국의 단점을 강조하려 복지가 강하다고 이야기되는 덴마크를 예로 들어 사실이 아닌 이야기로 한국을 못살 나라로 돌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만, 이 곳이라고 완전한 천국이 아니라는 거다.

내가 무슨 직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직업에 상관없이 떳떳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 다른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얼굴에 불쾌함을 드러내는 일 없이 (네 따위가 감히? 이런 류의 불쾌함) 말을 섞는다는 점에서 직업에 대한 차별이나 귀천 의식이 드러나지 않는 건 분명하다. 어쩌면 아주 부자가 아닌 한 18세 독립을 하면서 수퍼마켓에서 일하거나 신문을 돌리고, 청소를 하는 등의 아르바이트를 다 해본 경험이 있어서 서로를 이해하는 것일 수도 있다. 즉 서로가 서로를 아껴야 상대가 나를 아껴준다는 의식이 발로한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도 성공하고 싶어하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싶어하고 내 배우자가 비슷한 백그라운드에서 나왔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보다 그런 사람이 적고, 그걸 표현하는 게 부끄러운 일이니까 그게 표면에 드러나는 일이 없을 지는 몰라도 그런게 아예 없는 게 아니다. (그런 걸 표현하는 경우 교양이 없는 사람이 경우나 교육을 잘 못받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나가 클 이나라가 앞으로도 살기 좋은 나라였으면 좋겠지만, 여기도 불평등이 증가하고 있고 자식들의 성공을 위해 잘 사는 부모들이 자식에게 아낌없이 투자하고 부모 세대의 불평등아 자식세대로 고착되는 경향은 서서히 증가하고 있어 안타깝다. 그런 사회의 역동성이 사람들의 희망과 행복을 가져다 주고 사회의 안전성과 시민간의 신뢰도를 높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뀐다고 큰 틀이 바뀌지는 않지만 곧 있을 선거가 (나는 투표권이 없지만) 조금이나마 내가 생각하는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데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

3월 말 회사일상

간만에 집에서 두시간 야근을 했다. 집에 와서 애 픽업해 집 조금 치우고 저녁 요리해서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나오면 8시가 넘으니 두시간 야근이면 자기 조금 전까지 하는 야근이다.

하루 7시간 반에서 8시간 반 사이로 칼같이 일하는 편인데 내일 아침 상사가 출근하기 전까지 보내야 하는 자료가 있어 (정확히는 오늘까지 보내는 건데) 별 수 없이 야근을 했다. 에너지청에서 업무문의로 온 전화가 있어 그걸로 한시간 반을 쓰지 않았다면 거의 회사에서 다 쓸 수 있었겠지만, 또 그 전화협의가 결론적으로는 나에게도 생각 정리에 도움이 되서 불만은 없다. 하필 또 전화가 점심시간 30분을 끼고 와서 혼자 샌드위치를 들고와 자리에서 일하면서 먹었는데 그 덕에 오늘은 아무와도 말을 섞지 못하고 주구장창 일만했다. 내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있는데, 일의 양이 적은 건 아니고 연말 성과평가에 내 보고서 진행상황이 별도 평가 항목으로 잡혀있고 그 비중이 커서 직장에선 정말 바쁘다. 이 와중에 일어난 발목부상이며 교통사고가 일신상에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업무에 지장을 주는 형태가 아니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진짜 이쯤이면 내 운이 진짜 좋은 거 같다.

임원진 보고 자료 송부 시한이 시스템으로 칼같이 정해져 있어서 그 전에 못보내면 보고 일정을 다시 잡아야 한다. 그건 최대한 지양해야 할 일이라 내일은 상사가 봐야 한다. 마음에 드는 보고서가 나왔으니 상사와 임원진 반응이 궁금하다.

요즘 직장에 스크린도어를 두 개나 설치하고 CCTV를 병행해 두 개 설치한단다. 정문 입구와 외부 출입구로 연결된 타워에만 두 개 있는 CCTV이니 총 세 개였는데 총 다섯개로 늘린다는 거다. 공공부문에 개인정보 보호 부문에서 물리적인 보호 강화에 대한 요구수준이 높아져서 취하는 조치라고 한다. 손님 오고가는 부분에서 생기는 문제를 최대한 줄이려고 하는 것 같다. 필요하니까 설치하긴 하는데 CCTV를 설치하는 건 반갑진 않다. 덴마크 사람들은 사생활 보호에서 오는 자유에 대한 가치를 감시로 인한 사건 예방 효과에서 오는 안전에 대한 가치보다 더 높게 쳐서 CCTV를 찾아보기가 힘든 편이다. 사실 뭐 감시당한다 해서 상관없을 삶을 살고 있지만, 이렇게 축적되는 시각정보가 앞으로 어떻게 사용될 지 모르니까 (중국처럼 수퍼스코어 산출한다든지) 이런 감시시설의 설치는 반갑지 않다.

반갑지 않은 공사로 인해 드릴로 바닥과 계단 철근에 구멍을 뚫는 소리가 어제, 오늘 귀를 울렸다. 보고서 쓸 땐 음악을 안듣는 걸 선호하는데, 거리가 꽤 되는데도 은근히 신경을 긁는 소리가 지속되서 이어폰을 귀에 꼽고 엉덩이 꼭 붙이고 앉아있었다. 안그래도 바빠 사람들과 교감할 새가 없긴 하지만 주변 소식에 더욱더 둔해질 수 밖에 없는 하루였다.

옌스는 월요일엔 갈비찜이 오늘은 비빔밥이 점심메뉴 중 하나로 나왔다는데, 우린 아시아 음식으로 가봐야 커리나 조금 더 이국적이어서 굴소스 볶음밥 정도로 끝난다. 음식이야 맛도 좋고 가격도 싸서 만족은 하는데, 그래도 아시아 음식도 조금 더 나오면 더욱 감사하겠다.

이제 회사생활의 적응은 끝난 거 같다. 이번 3월을 끝으로 수습기간이 완전히 끝난다. 덴마크 회사는 해고 기간만 지키면 해고는 매우 자유롭기 때문에 수습이 끝났다고 공무원이 철밥통인 그런 직장은 아니다. 그래도 수습기간은 해고 기간이 진짜 짧아서 수습기간이 끝났다는 건 나에겐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이제 이 회사 들어와서 해볼 건 다 해본 거 같다. 보고서도 쓰고, 보고도 하고, 발표도 하고, 토론도 하고, 전화 상담도 하고, 전화 업무협의도 하고, 남의 전화 받아서 메모도 남겨서 넘겨도 주고. 새로운 게 없으니 긴장은 많이 사라졌다. 그렇지만 아직도 전화받으면서 ‘Forsyningssekretariatet, Det er Haein Lee Gundgaard.’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어색하다. 뭔가 긴 것 같이 느껴지지만 옛날에 ‘안녕하십니까. KOTRA 코펜하겐 무역관 이해인입니다.’라고 말했던 것 생각하면 음절 개수로는 지금이 더 적다.

이제 씻고 자야겠다. 내일 또 여섯시에 일어나야하니까. 그러고보니 이번주말이면 썸머타임이 시작되는구나. 한시간의 시차에 적응기간을 또 가져야 하는구나. 하나는 그 시차에 얼마나 잘 적응해줄까? 흠… Det er et godt spørgsmål…

사무실 낙상 사고

상사와 미팅을 하러 가던 중 사무실 계단에서 굴렀다. 우리 사무실이 1층과 2층 사이의 메자닌같은 층이라 계단이 한 6개, 8개가 기역자 모양으로 해서 총 14개 정도 있는 거 같다. 상사와 잠깐 이야기하고 몸을 돌려 힐끗 계단을 보고 노트에 잠시 눈을 둔 찰나, 난 바닥에 다 내려섰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음을 느꼈다. 허공에 발을 딛으면서 휘청하다가 발가락 끝이 발레에서 포인트를 하든 다음 계단을 딛으며 빠각 소리를 내며 반대로 약간 꺾어지듯 힘을 받았다. 아마 진짜 꺾어진 건 아니었겠지만 방향은 그랬다. 옆으로 꺾어진 게 아니라 앞으로 떨어지며 사지가 땅에 같이 떨어진 것 같다. 경황이 없어서 자세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넘어진 후 바로 취한 자세가 기어가는 자세였으니 말이다. 마루에 카페트까지 깔려있어서 다른 데는 아픈 곳이 하나도 없었는데 발목이 너무 아팠다. 넘어지면 민망해서 아파도 보통 괜찮다고 뱉고 보는데, 얼마나 아프던지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고통을 참아보려 했는데 그게 안되고 상사 앞이라 욕은 안하고 싶었는데 For fanden (이런 지옥같은) 이라는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며칠 전 읽었던 신문기사에 나온 덴마크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욕을 하는 게 당근 (Gulerød) 처럼 의미없는 단어를 내뱉는 것보다 고통을 덜 느껴지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는 말이 생각이 났다. 그래. 그 와중에 욕 안해보려고 당근! 이런 말을 외친다고 생각해보면 짜증만 났을 것 같다.

내가 굴러넘어지는 소리를 들은 위층 사람 한명이 자기 팀에 있는 남자 동료 둘을 데리고 오고, 상사는 응급실에 접수를 해주고 택시를 불러줬다. 건장한 남자 동료 둘이 나를 일으켜 세워서 조금 걸어가다가 바퀴 달린 의자를 옆 팀에 있는 사람이 건내줘서 그걸로 나를 운반해 엘리베이터에 태워줬다. 그리고 택시 타는 데까지는 조금 걸을 수 밖에 없어서 거진 6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나를 양쪽에서 부축해 옮겨줬다. 나도 내가 무거운 걸 한발 띌 때마다 느꼈는데, 그들은 어땠을지 상상이 간다. 감사해라. 초콜렛이라도 사다가 선물을 해야겠다.

회사에서 자동차로 10분 이내 거리에 있는 종합병원 응급실에 예약을 넣어뒀던터라 바로 촉진해보고 엑스레이 오더를 받아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정형외과 의사의 진단을 받아보니 뼈는 부러지지 않았고, 삔 거라했다. 내가 들은 빠각 소리에 대한 설명으로는 어쩌면 발목을 이루는 작은 뼈들 중 실금이 간 게 있을 수 있지만 있더라도 사진에 나오지 않는 경미한 수준이니 사용을 자제하면서 자연치유를 기다리는 게 최선이라 했다. 진통제로 파노딜과 이부프로펜을 주고 압박붕대만 감아준 뒤 집에 가라고 했다. 통증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었지만 삔 것에 불과하다니 너무 감사한 마음에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병원에서 나를 응급실에서 촬영실로 운반해주는 사람과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 차분하면서도 에너지가 충만하고 상냥한 사람이길래 잠깐 이야기를 나눴음에도 기분이 좋아졌다. 병원 예산 절감으로 병원 근무 여건이 어려워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드는데, 어떤지, 일은 마음에 드는지 등을 물어봤는데, 자기에겐 참 잘 맞는다고 했다. 사람들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좋고, 자기는 긴 시간 앉아서 공부하는 게 적성에도 안맞았고, 그런 포지션에 일하는 건 안맞는다며. 중간중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보면 지나가면서 빠르게 도와주는데 참 자기 일에 충실하고 열심히다 싶었다. 하긴. 내가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 상냥하고 친철했다. 임신 출산기간에 만난 사람들, 하나 입원했을 때, 시아버지 입원하셨을 때 등등 꽤 여러번 가본 병원들인데 그때마다 마음으로 대한다는 느낌?

사실 더 크게 다쳤을 수 있는데, 삔 것으로 끝나서 너무 다행이다. 거기에다가 동네에 시니어샵이 있어서 옌스가 퇴근길에 바로 사다줘서 발목을 사용하지 않고 온전히 보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부러진 거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나, 수술해야 하면 어쩌나, 하나는? 일은? 엄청 머리가 복잡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물론 주말에 하나 발레 수업도 못갔고, 회사에서 하는 아이들을 위한 fastelavnsfest도 못했지만… 그거야 또 다시 하면 되는 것들이니까. 진짜 참 운도 좋다니까…

점심식사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식판에 음식도 받고, 접시도 치우고, 커피도 마실 수 있었다. 타인에게 이런 도움을 받는 게 익숙하지 않지만 감사히 받고, 나도 나중에 또 기회가 있을 때 타인을 돕는 것으로 갚아야겠다. 친절한 동료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화장실을 가는 길에 그 옆을 지나가던, HR 팀원인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나보고 무슨 일이 있었냐고, 스키여행이라도 다녀왔냐고 묻길래, 사무실 계단에서 지난주 금요일에 굴렀다고 답을 했다. 그랬더니, 그건 산재라며, 리포팅을 했냐고 묻는거다. 아, 이건 내가 그냥 구른거라 산재는 아닌거 같다고 하니, 사무실에서 일어난 모든 사고는 다 산재의 일환이라며 조직은 이런 모든 사고를 산재청에 보고할 의무가 있으니 바로 보고하라고 담당자를 친절히 알려줬다. 혹여나 이 부상이 오래 가면 어쩌냐고 하면서 말이다. 아니 이런 철저한 직업의식이라니! 나야 고맙지.

그리고 일요일에 드디어 차를 주문했는데, 다음주 금요일에 차를 인수하면 한동안 출퇴근을 차로 하면서 발에 휴식을 줄 수 있길 기대해봐야겠다. 이미 그때 다 나아있음 어쩔 수 없이 계속 기차로 출근하고. 🙂 차를 샀으니 사무실에 케이크를 또 한번 사갖고 가야겠구나. 좋은 일이 있을 땐 케이크로 기쁨을 나누는 재미있는 덴마크 문화.

3월 첫 주, 생각의 흐름대로 쓰는 일기

한국행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10월 가을방학 일주일을 포함해 그 전주 약간으로 해서 한국 순수체류일정을 10박 10일로 할 수 있도록. 부모님이 이번주에 홍천으로 이사하시면서 나의 주민등록도 홍천으로 같이 옮겨지게 되었고 이번 한국방문 일정의 대부분은 홍천을 중심으로 해 강원도 방문이 주를 이루게 될 것 같다. 공항에서부터 차를 렌트해 바로 홍천으로 갈 예정이다. 그때면 하나도 엄청 많이 커있을 거고, 비행도 조금 더 수월해질 것 같다. 비행기에서 한번도 걷도록 한 적이 없어서 그런지 비행기에선 자리를 뜨지 않고 잘 앉아있어서 한국 방문 두번 모두가 쉬웠는데 앞으로는 더 쉬울테니 다행이다. 서울 일정은 출국 전 삼일로 잡았는데, 조금 더 길면 좋겠지만서도 아직은 하나가 어려서 같이 할 수 있는 것도 조금 제한되어 있고 돌아다니기 힘드니까 서울 구석구석을 탐방하는 건 하나가 더 큰 뒤로 미뤄두려한다. 한국가면 블루보틀 커피가 성수동에 문을 열었을테니 거기 한번 가보는 게 계획에 들어있고, 그 외엔 호텔 잡은 거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번엔 한국의 자연을 하나에게 많이 보여줄 생각이다.

상사에게 부활절 휴가와 가을 휴가를 메일로 승인 받았다. 이 기간 중 휴가를 쓰고 싶은데 괜찮은가? 라고 메일을 보내니, 물론이지! 캘린더에만 마킹해둬! 라고 답이 왔다. 음…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쌈빡하게 승인을 받다니. 참 구질구질하게 설명해가며 휴가를 쓰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며 왜 꼭 그렇게 해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주말엔 행사가 많다. 토요일엔 발레 첫수업이 기다리고 있고 일요일엔 자동차를 사고 회사에서 열리는 fastelavnfest에 갈 예정이다. 오늘 드디어 차고 열쇠를 받았는데, 월 400크로나 내고 빌리는 차고라 그런지 안에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전기자동차이니 매연 걱정도 없고, 앞으로도 안에는 깔끔하게 잘 관리해야겠다. 현대 자동차에서 나온 KONA 전기 자동차가 대형배터리 버전으로 2019년 3대 전기자동차로 선정되었다고 하는데, 그 버전은 너무 인기가 좋고 배터리 수급에 문제가 있어서 1년은 기다려야 한다 해서 패스. 옌스나 나나 내연기관차는 더이상 구입하지 않고 싶기도 하고 해서 전기자동차를 구입하고 싶었는데, 가급적이면 한국차를 구입해야하지 않겠냐는 옌스 의견에 따라 현대로 당첨. 사실 KONA 자동차 디자인이 마음에 든게 큰 몫을 한 것 같다. 다만 우리는 빨리 자동차를 사고 싶은 관계로 소형배터리 버전으로 구입하기로 했다. 그건 색상 및 옵션에 따른 재고 현황에 따라 짧게는 14일, 길게는 한달이면 구할 수 있을 거란다. 자동차 보험은 보험회사마다 가격 차이가 꽤나 큰 것 같다. 우리는 현대차와 손을 잡고 시장을 확대하려는 노르웨이 자동차보험사를 선택할 거 같은데, 덴마크 보험회사의 반값이다. 자동차회사와 서비스센터를 같이 끼고 보험을 제공함으로서 본인-대리인 문제를 상당부분 해결한 걸까? 차 사고 났을 때 차량 렌트를 제공하는 비용 등에서 자동차회사를 끼고 있으면 싸진 걸까? 자세한 보장내역을 봐야 알겠지만 큰 차이가 없을 걸로 예상되는데… 음…

하나는 유아원으로 옮긴 이후 엄청 조잘조잘 하루 있었던 일과를 설명해준다. 한국어는 매우 제한되어있다. 대부분 덴마크어다. 이걸 못알아듣는다고 해야하는 건지 그냥 듣고 한국말로 번역해 내용을 반복해주면서 그냥 듣고 넘겨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우선 후자의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한글학교 다닐 나이가 되어 또래 한국친구들을 조금 더 만나게 되면 달라지려나? 유아원은 마음에 든다. 기존에 보육원에 보육지원을 와서 알던 선생님들도 있고, 반대로 보육원에서 유아원으로 자리를 옮긴 선생님도 있어서 하나에게도 연속성이 느껴져서 좋다. 한 지붕아래 보육원, 유아원, 유치원 등으로 삼단계 구분되어 있는 시스템이라 애들이 서로 잘 알며 클 수 있어서 부모도 안심이 된다. 어느새 옮긴지 2주가 넘었다. 친한 친구들도 생겨서 누구누구랑 뭐하고 놀았다고 이야기도 해주고 참… 세월 참 빠르다. 여긴 이렇게 애들이 어려서부터 같이 쭉 크는 경우가 많아서 깊게 사귀는 오랜 친구들이 많은데 이게 외국인 입장이나 타지에서 이주해온 덴마크인 입장에서 친구를 새로 사귀기 어렵게 만드는 진입장벽 역할도 한다. 다 장단점이 있겠지… 발레학원 시작하면 거기서 또 다른 친구들을 사귈 수 있게될테니 그것도 좋다. 지금은 이미 발레복에 빠져서 이번 토요일을 기대하고 있는 듯하다.

벌써 수요일이 다 지나갔다. 또 일하고 퇴근해서 애 픽업하고 조금 놀다가 밥 해서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치우면 저녁이 다 가겠지. 그러면 또 하루가 가고 하루가 가고… 벌써 3월의 첫주가 다 가는데, 언제 이렇게 시간이 갔는지 모르겠다. 차곡차곡 일이 진척이 되고 있으니 문제야 없지만 너무 시간이 정신없이 간다는 생각이다. 워킹맘이 된 이래로 시간은 다른 속도로 흐르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즈인가 어디에 hygge가 가고 pyt이 뜬다는 기사가 나온 모양이다. 애들이 뭔가 잘 해보려했는데 안되서 속상해 하거나 원하는데로 안풀려서, 아니면 남이 기분 상하게 해서 마음 상해 있으면 어른들이 주로 하는 이야기가 Pyt med det! 다. 작년인가 언제 한번 요즘 애들에게 특히 이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굳이 한국식으로 번역하자면, 다 털어버려. 신경쓰지마. 정도될 거 같다. 교수가 애들 키우다 보면 애들이 자기가 꼭 하고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엄청 좌절하고 분노하는 시기가 온다고 하면서 그때마다 자기가 해주는 이야기가 Pyt med det라고 했는데, 그 때 읽었던 기사를 떠올렸었다. 그런데 그게 또 새로운 단어로 뜨고 있다니 참 덴마크의 행복에 대해 관심을 갖는구나 싶었다. 실패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툭 털어버리라는 건데, 어찌보면 크게 야심차지 않고 그래서 작은데서 행복을 찾는 평균적인 덴마크인의 특성을 보여주는 말인 것 같다. 얼마전에 유아원에서 하나를 픽업하는데, 간식을 먹고 있던 아이들 중 하나가 자기 빵 안먹겠다니까 선생님이 그래도 괜찮아. 라고 하고, 그러다가 빵 다시 먹겠다니까 그래도 괜찮아 라고 하는 걸 봤다. 그러다가 과일을 먹겠다고 하다가 또 안먹겠다고 변덕을 부리는데, 그래도 괜찮다고 참 느긋하게 말을 해주는데,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문제 없다는 그 느긋함에서 Pyt med det의 저변에 흐르는 덴마크인의 여유있는 사고방식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회사에서 잘 안풀리는 일 있을 때 초조해하지 말고 Pyt med det!를 외치며 감정을 리셋하고 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