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던 텔레비전 시리즈들이 시즌을 거듭하며 지루해지고 좋아하던 음악들도 계속 반복해서 듣다보니 질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때마침 눈과 귀에 띄는 것들이 생겼다.
첫째로는 DR에서 새로이 시작한 드라마 시리즈인 Carmen Curlers라고 머리에 고정해두고 기다리면 컬이 생기는 고데기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악셀이라는 사람을 그렸다.
딱히 꼬집어 이야기 어려운데 좀 새로운 방식으로 영상을 담았다. 중간중간 자기 세계에 몰입하는 인물들의 상상과 현실이 뒤섞인 환타지스러운 영상기법이 DR에서 평소에 볼 수 있던 시대극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호기심이 더 가는 극이라고 할까?
둘째로는 Shu-bi-dua의 음악이다. 1970~80년대에 가장 전성기를 구가했던 팝락그룹인데, 사실 그 중 리드싱어였던 Michael Bundesen의 음악이 마음에 들었다는 게 보다 정확하겠다. 덴마크 어린이 노래는 어른들이 어른의 목소리로 부른 게 많은데 특히 60~80년대 음반 중에 좋은 게 진짜 많다. 그 중 한 노래가 매우 마음에 들어서 찾아봤더니 말로 엄청 많이 들어봤던 Shu-bi-dua의 리드싱어였던 것. 애들이 들으면 웃긴게 아닌 그냥 노래인데, 어른이 들으면 무슨 저런 걸로 노래를 만드나 싶어 웃음을 터지게 만드는 가사라던가, 아니면 손발가락이 오그라들만큼 찌질함을 너무 편안한 목소리로 불러서 마음이 짠하기도 하고 속이 오글거리는 가사라던가 하는게 귀를 즐겁게 한다. 내 귀를 처음 사로잡은 노래는 Røde hunde. 이는 질병인 풍진을 뜻한다. 예비임산부들이 예방접종을 맞는 바로 그 풍진.
나는 풍진에 걸렸어. 나는 꽤나 아파. 내가 너무 불쌍해 라는 가사로 시작해서 중간에 열이 얼마나 나고 진통제랑 페니실린을 먹고 있다는 내용 등 가사를 들어보면 무슨 이런 걸 노래로 부르나 싶은데, 목소리만 들으면 그런 내용일지 모르겠는 노래라는 데에서 컨트라스트가 두드러져 재미있게 들었다.
옌스가 슈비두아를 듣고 마음에 든다면 정말 덴마크인 다된거라 하더라. 사실 한 삼분절은 덴마크인이 되어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거 같긴 하다.
덴마크에 산다는 것은 길고, 어둡고, 음습한 겨울을 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11월부터 4월까지 6개월은 거의 겨울이라고 봐도 무방하니까. 추분을 지나가면 어두운 시간이 급격히 늘어나고, 해가 떨어지고 나면 급격히 어두워진다. 여름엔 해 자체가 엄청 늦게 떨어지는데다가 떨어지고 나서도 진짜 어두워지기까지 한참 걸렸는데 말이다.
이번주는 유독 흐리고 비가 자주, 꾸준히 왔다. 본격적으로 습도가 올라가는 가을은 원래 10월 세넷째주쯤에 시작되는데, 올핸 그 직전 이렇게 저기압이 찾아온 탓에 뭔가 가을이 일찍 찾아온 느낌이다.
해가 짧게 떴는데, 책상에 내려쬐는 햇살에 순간 너무 기분이 좋고 감사했다. 여름이면 덥고 뜨겁다고 불평하는 햇살이 이렇게 감사할 수가. 불과 5분도 안되어 사라진 햇살 한줌에 불과했지만 그 조차도 소중하다.
이제부터 들어설 본격적 가을과 겨울에 대한 마음 준비가 필요하다. 덴마크에 산 지 9년이 넘었지만 이 겨울은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 내가 즐기는 활동들이 실내 활동들이라 겨울에도 꾸준히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을 감사히 여겨야지. 옌스의 활동은 주로 야외에서 이뤄지는 거라 날씨와 일조시간에 영향을 많이 받아서 겨울엔 제약이 큰 편이다. 그래도 올 해는 일주일에 한번이나마 실내에서 외줄타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겠지.
겉머리는 까만데, 머리를 뒤적뒤적 들춰보면 들춘 곳마다 서너가닥씩 흰머리가 보인다. 얼굴색도 딱히 찝어 말하긴 어렵지만 조금 칙칙해져 보이는데, 아마 피부의 탱탱함이 줄어듦에 따라 조금씩 얼굴이 쳐지기도 하고 해서 그래 보이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두꺼워서 불만이던 눈두덩이는 가면 갈수록 얇아져서 눈을 부릅뜨면 쌍꺼풀이 만들어질 것 같은 기세다.
원래도 화장이라 함은 어디 갈때나 하는 것이었기에 이곳에서도 똑같이 하고 살지만, 요즘은 어디 갈때도 정말 큰 행사가 아니고서는 (그나마도 회사에서 하는 행사 등은 제외하고) 화장을 하지를 않으니 일년에 화장을 한번 할까 말까한다. 그나마 화장을 하다 안했을 땐 안한 얼굴이 칙칙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요즘 화장을 정말 드물게 하다보니 맨얼굴이 나쁘지 않게 보인다.
나이가 들면서 쫙 붙여 묶어 틀어올린 머리가 나에게 잘 어울리고, 상체는 적당히 타이트하게 붙는 옷, 하체는 루스하게 여유가 있는 옷이 잘 맡는다는 것 등을 알면서 옷을 사는 것이 쉬워졌다. 중앙부처가 아닌 이상 옷을 상당히 캐주얼하게 입어도 되는 공공부문에서 일을 하다보니 옷을 특별히 많이 갖고 있을 필요도 없다. 신발은 변호사나, 컨설팅 이런데 일하는 거 아니면 운동화를 신는 게 전혀 흠이 되지 않는 문화인 이상 더이상 구두를 신지 않는다. 입고 나를 치장하는 부분에서 시간이나 노력을 별로 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편해졌는지…
체력도 예전같지는 않고, 조금만 다쳐도 낫는게 오래걸리는 걸 보면 나이가 드는 걸 느끼는데, 생각의 면에서 갖게 되는 많은 여유를 따져보면 나이가 드는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발레를 꾸준히 오래 하다보니 이 바닥 좁은 덴마크 성인 취미발레계에 알게 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취미가 같다보니 할 이야기도 많고 다들 발레에 큰 열정을 갖고 있다보니 그 공통점에 가까워지게 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이번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나흘간 두시간반에 걸친 발레 여름캠프에 참가하면서 새롭게 알게된 사람도 있고 또 알던 사람과도 더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그 중에 사람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하나 있어서 저녁도 같이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며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알게되는 시간을 가졌는데 발레 공연도 같이 보기로 했다.
재미있는 건 전혀 K-pop이나 드라마의 팬이 아닌데 한국 음식과, 문화, 역사 등에 관심을 갖고 여행을 벌써 두어차례 다녀오고 요리도 레시피를 찾아서 해먹는 사람도 있고, 그냥 재미있을 것 같다며 한국 여행 가보겠다고 한국어를 자습하기 시작한 사람도 있다. 한국어 배우는 건 요즘 좀 힙한 일 아니냐며… 음? 뭐라고??? 언제 그랬지?
한국 요리를 나에게 배워보고 싶다는 말을 지나가는 듯이 한 적이 있는데, 그럼 한번 우리집에 초대할 테니 같이 만들어보자고 했다. 오늘 종강저녁을 같이한 친구들 모두 너무 좋다며 9월에 자리를 한번 마련하다고 하고 으쌰으쌰 마무리했는데 기대가 된다.
외국인인 것이 언젠가부터 덜 특별할 만큼 국제화 되어가고 있는 코펜하겐이지만 오히려 그게 친구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고 있음을 이제사 느낀다. 나때문에 영어로 모든 대화를 바꿔줘야 했을 땐 뭔가 내 스스로 장벽을 느꼈지만 이게 해결되고 나니 옌스가 말한대로 취미활동을 통해, 나만의 특이점을 통해 친구를 사귈 수 있게 되었다.
뭐랄까… 한국인이라 덕 봤다는 건 살면서 별로 느껴본 적 없는데 요즘 좀 느낀다. 이런 기분도 나쁘지 않구나.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했다는 뜻이겠지.
2주 반만 지나면 다음 시즌 발레가 시작되는데 너무 기대된다… 요즘 많이 늘어서 더 추고 싶은 발레… 이제 피루엣도 더블턴을 시작했고… 주 3회로 한번 더 늘려볼까?
동료와는 사적으로 만나는 일이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드문 이곳에서 옌스의 동료가 아닌 내 동료와 같이 사적으로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자기 일상이 바쁘고, 기존 친구 만날 시간이 더 중요하니까.
전 직장 동료와 비슷한 시점에 같은 동네로 이사한 사실을 알게되어 연락을 하고 애들과 함께 만나기로 이야기가 되었다. 밖에서 보려다가 우리 집에서 보는 것으로 계획이 좀 바뀌고, 잠깐 티타임만 가지려던 것이 밥도 같이 먹자고 즉흥적으로 바뀌어 그녀의 남편도 불러서 밥을 먹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와 그집 하나와 동갑내기 딸이 같은 유치원, 같은 반에 다닌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여기 유치원도 많고 유리 유치원에 반도 하나가 아닌데…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간 일상도 조금 업데이트하고, 요즘 나는 무슨일 하는지도 이야기하고 전직장 이야기도 하고. 하나가 잘 노는 친구의 엄마이기도 해서 더욱 마음이 좋은 게, 나도 좋아하는 동갑내기 동료였어서 같이 만나기도 마음이 참 편해서 말이다.
앞으로 좋은 동네친구가 생겼다. 남편도 말로만 많이 들었던 사람인데 드디어 얼굴도 직접 보고 이름에 매칭도 하고. 너무 좋구나~~~
글을 쓰면 내 스스로 교정을 볼 수 있어 그 글을 받아 읽는 사람은 최종본만 일게 되지만, 말은 한번 뱉고 나면 주어담을 수 없어서 상대가 내 실수를 다 들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외국어를 배우다보면 쓰기보다 말하기가 더 쉽기도 하면서 더 어렵기도 하고 그런 거 같다. 맞는지 틀리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말하느라 정신없어서 뱉어버리고 나서 내가 무슨말을 했는 지 기억도 잘 나는 단계면 쓰기가 더 부담스럽고 – 교정을 잘 볼 수 없는 단계라 화석처럼 남아있게 되는 실수가 두려워서 – 교정을 볼 수 있는 단계가 어느정도 되면 말로 하면 글처럼 수정을 볼 수 없어 실수를 남에게 보이게 되는 게 두려워서 말이다.
이제는 그 단계를 지나가는 것 같다. 실수를 아예 안해서가 아니라, 내가 말을 하면서 만드는 실수를 사후적이나마 빨리 고칠 수 있게 되었으며, 실수 자체를 크게 줄였으니 말이다. 요즘 느끼는 건 전 직장은 나에게 언어적 측면에서 트레이닝의 장이었고, 덕분에 엄청 늘었지만, 당시의 내 실력으로는 참 힘든 곳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직장에서 수월하게 기능하려면 지금 수준의 언어가 필요했던 거다. 아직도 부족함을 느끼지만, 이제는 두려움은 떨쳐내었다. 듣기에서 추측을 하는 부분이 없어진 것과 어떤 상황에서건 필요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떄문이다.
언어실력이 좋아지려면 그 언어와 친해져야 한다. 문화화도 친해져야 하고.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그 구석구석의 메커니즘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익힐 수 있으니까. 그러다보면 내 사고회로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 내게 새겨진 문화와 새로운 문화가 나도 알 수 없는 새에 내 안에서 얽히고 섥혀 융화가 되면 내가 원래 그런 줄 알았었던 것마냥 나도 모르는 새에 내가 바뀐다.
요즘 한국노래를 듣고 있었다. 가사를 안듣고 노래 음정만 듣는 습관이 있어서 별 생각이 없었는데, 친구 생일 때 한국 가요의 감수성에 대해 이야기가 나와서 요며칠 가사에 신경을 써서 들어봤다. 나이가 들어서 생각이 바뀐 것도 있지만, 내가 가슴에 절절히 와닿는다면서 좋아했던 한국가요의 가사를 들으며 creepy하다고 느껴지는 사랑 노래가 너무 많다 느꼈다.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의 남자다움이 폭력으로 느껴지는 이곳에서 살다보니 사랑 노래의 절절한 가사가 스토킹, 나르시즘, 착각, 자기만의 감정에 취한 것, 오지랖, 등등처럼 전혀 그 전의 내가 느낀 바 없는 감정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냥 그당시 내 시간에 얽혀있는 노래를 들으며 즐기는 것은 그와 상관없이 여전히 좋지만, 내가 변해서 그 노래가 더이상 내 감수성에 어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어디 가든 적응하게 되어있지만, 어디 가서도 빠르게 변화하고 적응하는 한국인의 유전자 덕에 내가 이 곳 덴마크의 사회와 문화에 유독 빨리 적응해서 한국의 감수성에서 더울 빨리 멀어진 게 아이러니하다.
하나의 지금 유치원 마지막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10개월부터 시작해서 52개월인 지금까지 약 4년 가까이 다닌 이곳에 나도 정이 엄청 많이 들었다. 가장 정이 많이 들은 선생님과는 내일 픽업 담당인 내 시간이 맞지 않아서 금요일에 인사를 나눴다. 안아도 되겠느냐고 여쭤보고 괜찮다는 답을 들어서 (백신 1차 접종을 완료하셨으니..) 꼭 안고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우리 집에 아이들과 소풍을 나오는 것도 매우 환영이고, 여름 휴가중에 괜찮다면 유치원을 방문해도 되겠는지도 문의하였다. 그전에 선생님한테 하나가 그래도 된다고 했다고 이야기를 들었지만 또 혹시 모르니까.
선생님들께 드릴 초콜렛 한팩과 선생님과 아이들과 함께 나눌 케이크도 한판 구웠다. 지금 오븐에서 초콜렛 케이크의 향기가 솔솔 풍기고 있는데, 하나와 함께 만들어서 더 특별한 케이크. 하나가 원하는 엘사는 내가 만들어줄 수 없지만 – 퐁당으로 만들 수도 있겠지만 지금처럼 이사 사후 작업으로 바쁜 시기에 이 이상 시간을 쓰기는 어렵고… – 하나가 제일 좋아하는 초콜렛 케이크 위에 이쁘게 장식은 해줄 수 있으니까. 어떤 장식인지는 자기도 모르게 서프라이즈로 해달라고 했으니 천천히 생각을 해봐야겠다.
작별은 힘들지만, 또 새로 시작하는 시점에 정신이 팔려서 처음엔 힘든줄도 모르지 않을까 싶다. 그러다가 나중에 그리움이 뒤늦게 몰려오지 않을까 싶다. 하나 친구들도 초대해서 과거의 인연도 잘 아껴 키워나가야지. 이렇게 하나가 이별을 이해하게 되고 또 크겠지.
이번 한 달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후딱 지나갔다. 인사팀의 입사 1개월 면담을 하면서 “아… 어느새 한 달이 지났구나…”하고 알아차렸다. 집 안에도 신경쓸 일 투성이고, 회사에서도 적응하고, 하나를 기존 유치원으로 원거리 통원을 시키다보니 그 어느때보다 시간이 화살같이 지나가버렸다.
회사생활은 아직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기 어려울만큼 짧은 기간이기도 하고, 재택근무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가타부타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지난번 조직에 비해 절반정도로 크기가 작기도 하고, 우리 센터 자체가 7명으로 오붓하게 작은 센터라 가족같은 분위기가 크게 느껴진다는 면에서 좋다. 지난번 직장의 1층 건물에 일부 센터 두고 있었던 터라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제법 있어서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면도 나쁘지 않다. 중순에 한번 전직원 단합대회를 하느라 직원의 절반쯤 나와서 두시간동안 7개의 포스트를 돌면서 미션을 수행했는데, 덕분에 거기에서 익숙한 얼굴 몇에게 인사를 건내고 대화를 할 기회도 있었다. 그걸 떠나서 조직 전체가 서로를 다 알고 지낸다는 느낌이다. 지나가다가 나는 모르는 동료들은 나를 붙들고 새로 온 사람이냐며 자기를 소개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 부서 직원들은 전직장 동료직원들 보다 전반적으로 릴렉스된 느낌이랄까? 아무튼 그 전 동료들도 좋았지만 이번 동료들은 또 다른 느낌으로 좋다는 느낌이다. 좀 더 훈훈하고 털털한 느낌? 성비는 여자가 나를 포함해 두명뿐이라 전 직장 부서의 여자 중심의 환경과는 정반대이다. 일할 때 나는 남자 직원들과 더 케미가 잘 맞는 느낌이다. 내 생각에 직장의 성비는 중요한 거 같다. 균형잡힌 성비가 서로 보완도 해주고 하면서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되는 듯하기 때문이다.
리더와 같이 가까이 일하는 동료와 케미가 잘 맞는 건 진짜 중요하다 싶은데, 둘다 좋은 것 같다. 나와 같이 일하는 시니어는 기존에 알고 있으면서 같이 일하기 좋을 거 같은 사람이다 싶었는데, 정말 그렇다. 따뜻하고 인정이 많지만 일 잘하고, 해야될 말은 윗사람에게도 똑부러지게 하는 스타일.
기존 조직에 비해 HR이 직원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정성을 들이는 것 같다. 아마 조직의 크기가 작아서 가능한 부분이 있는 것도 있는 것 같고, 지방이전대상으로 코펜하겐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로 이전하면서 “좋은 직장 만들기”가 중요 전략부문의 하나라 그를 정말 실행에 옮기는 것 같다. 아무튼 근무 첫 달에서 받은 첫인상은 좋다. 앞으로 더 좋게 만들어가는 것은 내 몫이겠지.
집은 큰 틀에서는 정리가 되었고, 아직 좀 더 들일 것들이 남았지만, 그건 살면서 해도 될 부분이라서 대충 6월 중순이면 완전히 정리가 끝날 것 같다. 6월 중순엔 아파트도 열쇠를 건내줘야해서 이번 주말부턴 아파트 청소와 손질을 해야한다. 하… 정말 이사는 엄청 큰 일이구나. 오래오래 이 집에서 잘 가꾸면서 오래 살아야지. 아직 이 집에 대해서 알아갈 것도 많고, 배울 일도 많고. 살면서 알아두면 좋을 기술들을 배우는 감사한 기회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가꿔가봐야지. 젊어선 주택에 대한 로망이 전혀 없었고 생기지도 않았었다. 왜 사서 고생? 하는 느낌? 애가 생기고 자연이 좋아지고, 더이상 도시가 크게 그립지 않을만큼 도시에서 누릴 걸 충분히 누렸더니 이렇게 일하며 집을 가꾸는 게 집에 애정을 붙이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손 타지 않은 곳이 없는 만큼 애정이 곳곳에 서리는 거지.
이제 하나도 하루만 나가면 유치원을 옮긴다. 우리가 정신이 없어서 이전과정이 스무스하지는 않게 되었는데 – 적응기간 없이 바로 유치원을 변경하는 식으로 – 그래도 잘 지내리라 믿으며… 이번 일요일 밤엔 초콜렛케이크를 구워야하는구나. 내일 장 좀 봐야지. 엘사 피규어도 만들어달라는데, 그건 못하겠다고 잘랐다. 만들 방법이 없나. 퐁당으로? 흠흠.
계약서 상으로는 5월 1일이었지만 정식 첫 출근은 오늘이었다. 집 페인트칠이다 이사준비다 뭐다 해서 정신없는 와중에 맞이한 첫 출근이라 그런지 막상 아무런 생각 없이 갔다. 그래도 전날 잠이 잘 안와서 설친 거 보면 흥분이 있었던 것 같다. 마치 늦게 마신 커피의 카페인으로 잠을 못 이루는 것처럼 온 몸에 흥분상태가 유지되는 것 같은 기분. 꿈에 옌스가 무슨 단어의 발음을 교정해주면서 왜 이 발음 자꾸 틀리냐고 하는 것도 나오고, 첫 출근에 상사랑 이야기 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잘 안나오고 혀가 꼬여서 자꾸 말이 틀리는 것도 나온 거 보면, 아무런 생각없이 있던 것 같아도 무의식 저편에는 긴장과 걱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직까지 재택근무라 회사 건물은 거의 텅텅 비어 있었지만, 오늘 여러 센터에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었는지 면접때 쥐 죽은 듯하던 적막은 없고 약간의 생명력이 느껴졌다. 업무 시작을 도와줄 파트너로 지정된 동료직원이 나를 마중나왔고 전체 건물을 돌며 소개를 해줬다. 전체 인원이 125명이라 하는데, 서로 다 이름을 기억하고 부르고 할 만큼 잘 알고 지내는 것 같았다. 나도 오늘 짧은 시간동안 우리 부서 뿐 아니라 지원부서의 동료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몇 몇은 이름을 외우게 되었으니 시간이 흐르면 속속들이 새로운 동료를 알게되리라 본다. 다들 나를 보면, 우리 인사 안나눈 거 같다며 인사를 청하고 이름을 교환했으니 이게 전체 청의 문화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 센터의 장이 새로이 부임해 상당수의 센터장들이 출근을 했는 모양이었다. 청장을 포함해. 우리 센터가 청장과 같은 층에 있는데 도시락의 샌드위치 하나를 다 먹고 다음 샌드위치를 꺼내려는 타이밍에 내 책상이 있는 사무실에 들어와 새로 온 것을 축하한다고 인사를 건내더라. 경쟁소비자청의 절반 조금 넘는 크기의 조직이라 그런지 조직 구조도 더 수평적이고, lean한 것 같았다.
경쟁소비자청에 첫출근할 때를 기억해보면 진짜 머리에 엄청난 인풋을 우겨 넣는 기분이었다. 덴마크어로 취직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타이밍에 덴마크어로 일을 시작해야 되는 것 하나, 법령, 시행령 등을 포함해 한 무더기의 보고서를 손에 건내 받고 시작했는데, 생소한 분야의 어휘를 통째로 익혀야 하는 부담이 하나 있었다. 또한 덴마크 직장문화, 회의 문화, 조직 구조, 커뮤니케이션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여러 규범을 익히는 것도 큰 도전이었다. 그래서 첫날 정말 머리가 터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화 하나하나 집중해서 들어야 간신히 이해되고, 또 뭘 말하거나 쓸때마다 틀리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회의에서 자기 소개할 때 뭘 어떻게 말해야 하나, 남들은 어떻게 말하나 관찰하고 내가 튀거나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등도 신경쓰이고 등등… 그래서 첫 한달은 집에 오면 너무너무 피곤했더랬다.
그런데 이번 출근은 우선 산업 분야는 달라도 업무는 연관성이 있는 것들이라 완전 생소하지 않다는 점, 더이상 언어가 큰 장벽이 아닌 점 등이 작용해서 그런지, 매끄러운 출발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동료들도 다 차분하고 좋은 것 같고, 같이 일할 게 기대되는 사람들이다. 그 전 직장도 좋은 동료들이 많았지만, 이번이 더 케미가 잘 맞을 것 같은 느낌… 진짜 느낌적 느낌인 근거 없는 느낌이지만 말이다.
이번엔 너무 달리지도, 너무 나에 대해 부담을 주지도 말고, 천천히 내 페이스 찾아가며 롱런하는 것이 목표다. 이사가 마무리 되면 다시금 내 프로젝트들도 다시 천천히 굴리기 시작하고 말이다. 오늘은 좀 푹 잘 수 있을 거 같다.
Cullotesteg(큘로데스타이)는 우둔스테이크 정도가 되는 음식일 거다. 지방질 부위를 정방형 모양으로 살이 드러나기 직전까지의 깊이로 해서 그물처럼 칼집을 내주고 그릴판에 올려 그 그릴판을 물을 부은 깊은 오븐팬 위에 얹어 오븐에서 굽는 요리이다. 지방질에 후추와 소금으로 잘 마사지를 해주고 물이 고기에 닿지 않게 해서 굽는데, 처음엔 230도의 고온에서 15분 굽고, 고기의 중심온도가 56도까지 될때까지 180도에서 (고기 사이즈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충) 20-30분 구워주는 게 전부이다. 처음 고온에서 구울 때 지방이 바삭하게 익고, 남은 시간동안 안이 고르게 익는다. 수분은 놀랍게도 겉은 바삭하고 안은 촉촉하게 굽는데 전반적인 역할을 한다고 한다. (속 촉촉은 이해가 가는데, 겉이 바삭하게 되는 원리는 찾아보기 귀찮아서 찾아보지 않고 있다.) 오븐에서 꺼낸 고기는 그릇에 옮겨 담아서 호일로 덮어 휴지를 시켜주는데, 이때 계속 고기가 익기 때문에 오븐에서 레어 온도까지 다 익히고 나면 나중에 휴지 이후에 잘랐을 때 고기가 생각보다 푹 익어 있게 된다.
시댁에 가면 꼭 한 번은 먹게 되는 요리인데, 고기 판매 자체가 아무리 작아도 800그램 단위로 팔아서 세식구 메뉴로는 생각하기 어려워 직접 해볼 일은 없었다. 그런데 요즘 이틀에 한번만 저녁 요리를 하고, 다음 날에는 전날 음식을 데워먹는 것으로 하면서 과감히 이 부위를 사 요리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너무나 맛있고, 고기도 부드러워서 완전 마음에 들었다. 시부모님은 조금 더 고기를 익히셔서 내 기준엔 조금만 덜 익히면 좋을텐데…라는 생각을 했다면, 내가 하니까 내 취향에 맞게 레어에 가까운 미디움레어로 구울 수 있어서 좋았다.
오븐에서 조리하니까 기름이 튀는 것이 적고 냄새가 진동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추가 포인트! 그리고 팬에 하게 되면 주로 굽는 부위들이 – 예를 들어 등심 – 가격에 품질의 영향을 제법 받아서 질기고 아니고가 내가 얼마나 돈을 지불했느냐 아니냐에 영향을 받았는데, 이 부위는 그런 차이가 크지 않아서 좋더라. 또 팬에 브라우닝을 하지 않아도 되니 설거지 부담도 덜고. 비슷하게 조리하는 오븐구이 중에서도 로스트비프처럼 겉을 별도로 팬에서 브라우닝 해주라는게 제법 있는데 말이다.
오늘 다만 뭐가 좀 씌었는지, 희석해서 쓰는 육수(fond)를 희석하지 않고 계량해서 넣는 바람에 엄청 짜져서 와인 넣고 한참 끓인 와인과 발사믹식초 등 와인소스 베이스를 거의 다 버리고, 조금 남은 것에 우유랑 분말 제형으로 된 브라운 소스를 넣어서 소스를 만들었다. 너무 아까운 것. – -; 와인 소스였으면 더 좋았을 것을… 그 뿐 아니라 온도계를 고기에 잘못 꼽아서 온도가 상식과 어긋나게 빠르게 올라가고 있음을 발견하고 실수를 정정하는데, 230도 오븐안에서 20분 가량 달궈진 온도계를 맨손가락으로 잡아서 당기다가 손을 데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나름 뜨거울까봐 엄지와 검지만 이용해서 가볍게 당겨보려했다는 사실이 더욱 우습다. 기름처럼 들러붙어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바로 손을 떼면서 화상의 정도는 심각하지 않았지만 (그리고 손가락이라 화상이 덜했다. 마르고 거칠어진 손가락이라.)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고 볼만한 사고였다. 여기서 사고는 정말 황당하게 발생한다는 교훈을 다시한번 얻고, 아이를 키울 때 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전 발목을 살짝 삐는 사고도 그렇고, 소소한 사고가 잇따르는데, 조심해야겠다 싶었다.
큘로데가 덴마크어 설명으로 읽었을 때는 대충 엉덩이 부분이던데, 우리말로는 무슨 부위인가 해서 찾아봤더니 우둔이었다. 어째 질기지 않다 했더니 원래 부드럽고 연한 부위란다. 장조림은 연하지 않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물에 넣어 푹 익힌 고기가 그 정도면 부드러운 거지.. 하는 생각에 닿았다. 부드러운 부위였구나. 앞으로 육회나 산적 등에 도전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거에 쓰는 부위라 한.
요즘 먹어보기만 하고 직접 해보지 않던 덴마크 요리에 도전해보고 있는데, 그를 통해 우리 음식의 재료에 대해서도 다시 알게 되고, 앞으로 더 열심히 도전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위 명칭이 우리 말로 뭐인지 몰라서 (찾아보면 또 알수 있겠지만, 또 귀찮아서 안찾아보는 성정이라..) 사지를 않다보면 앞으로도 계속 제약이 많겠다 싶어서 이것저것 해봐야겠다 싶다. 이제 큘로데스타이는 한국친구 초대 메뉴중 하나로 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