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개월의 하나 in Dubai

시어머니의 생신을 두바이 시누네에서 하신다 하여 우리도 이때 아니면 또 언제 두바이에 갈 지 몰라 같이 방문했다. 6시간의 비행동안 하나는 한숨도 자지 않았는데 안그래도 오전 45분 낮잠외엔 자지 않았던 터라 긴장이 엄청 되었다. 다행히 덴마크 시각으로 1시 정도에 큰 무리없이 잠이 들었다. 그렇게 맞이한 15개월의 날. 비행기에서 Hvad er det? (이건 뭐예요?)를 상황에 맞게 두번이나 해서 우리를 놀래켰던 날이다.

두바이는 많이 덥지만 대충 40도 이내라 못견딜 정도는 아니다. 조금 더 지나면 라마단인데다가 더 더워지면 정말 다닐 수도 없다해서 그나마 괜찮을 때 온 건데 잘 온 것 같다. 도시도 깔끔하고 좋더라. 물론 더워서 난 여기서 살라면 그닥 살 고 싶지 않겠지만애가 있어서 어차피 여기저기 많이 다니기도 어려워서 하루 한군데 정도 소화하는 게 전부인데 집에 풀장이 있어 오전 오후엔 여기서 주로 시간을 보내게 될 것 같다. 하나도 덕분에 수영하는 것에 익숙해질 듯.

시어머니 생일 점심으로 아랍의 탑 (burj al arab) 에 있는 캐주얼한 식당에 갔는데 사람이 아주 많지 않아 하나도 사촌들과 많이 돌아다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초등학교 다니는 사촌 세명이 모두 하나를 이뻐하고 잘 놀아줘서 참 좋았다. 금방 사촌들을 좋아해서 가서 안기기도 하던 하나. 이집에 있는 고양이 엘비스를 통해 고양이를 처음 본 하나는 만져 보고 싶은 마음 반, 무서운 마음 반에 가까이 다가가다가 울곤 했다.

시누이네는 시누이 남편이 주재원으로 나와있어서 여기 최소 3년을 살 계획으로 나온 건데, 기름 1리터에 500원 정도밖에 안하고 차값도 다른 나라에 비해 싼 이곳에서 아니면 이렇게 좋은 차를 못탄다고 해서 시누이 남편은 마세라티를, 시누이는 랜드로버를 샀단다. 일생에 나도 이때 아니면 마세라티를 타볼 일 있겠나 싶어서 타봤는데, 엄청난 출력을 가졌긴 한 모양이다. 안에 소재도 엄청 좋고. 아랍의 탑 호텔에서 나올 때 앞에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손을 흔들고 해서 웃음이 터졌다. 모르는 사람이지만 유명한 사람이겠거니 했나보다.

집에 오는 길에 시누이 남편의 직원이 우리 바로 뒤에 멈춰섰다며 신호 정차시에 잠시 나갔다왔다.  그가 차로 돌아온 후 그 직원이 인사한다며 정차중 엔진소리를 세게 내었는데, 돌아보니 페라리였다. 두바이엔 진짜 비싼 차들이 널려있더라. 나름 덴마크 회사 다닌다고 조심스러웠는지 차를 사기 전에 시누이 남편에게 자기 아무 차나 사도 되냐고 묻더란다. 아마 사장이 마세라티를 몰고 있으니 덜 조심스러웠을 것 같다만…

이제 이틀 남았다. 4박 5일이지만 밤에 와서 오전 일찍 가는 여정이라 사실상 4박 3일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하나가 사촌들과 유대관계도 조금 다지고 즐겁게 놀다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남은 날들도 기대가 된다. 비행은 은근 스트레스였지만, 잘 온 듯.

진짜 오랫만에 한국이 아닌 곳으로 여행 온 것 같다. 3년 조금 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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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덴마크를 방문하시고 나서

시간이 정신없이 간다. 어느새 하나가 태어난 지도 50일이 지났다. 왠지 모르게 더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애가 50일이나 되었다는게 놀랍기도 하다. 부모님이 주말에 떠나셨다. 지난 여름, 입덧이 가장 심한 시기를 넘기고 한국을 방문했는데, 내내 불볕더위를 겪으며 에어콘 없는 방에서 밤잠을 설치느라 2주가 마치 두 달 같았다. 부모님이 계셨던 이번 2주는 마치 이틀밖에 안되었던 마냥 꿈같이 느껴진다. 애가 있으니 어디 나갔다오는 것만으로 하루가 다 가버리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틈틈히 젖 먹이고 기저귀 갈다보면 뭘 했는지도 모르게 하루가 후딱 가버리니까.

마지막 이틀을 남기고 약한 감기에 걸리고 애한테 감기가 옮은 건 아닌가 불안한 상황에 애 데리고 공항에 나가는 건 무리일 것 같아 집에서 작별을 했다. 옌스가 부모님을 무사히 공항에 모셔다 드리고 안에 들어가시는 것까지 배웅하고 왔다하니 마음이 놓였다. 지난 부활절 때 한참 날다가 헬싱키로 회항한 것과 같은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기만을 바랬는데 짐 하나가 도착하지 않은 것만 빼고는 무사히 도착하셨단다. 몰랐는데 듣고 보니 요즘 핀에어가 파업이 잦단다. 잘 도착하신 게 참 다행이다.

집에 하나와 혼자 있으니 이렇게 앉아서 글을 쓸 짬이 생겼다. 부모님이 계신 기간에도 물론 시간은 있었지만 그 짧은 기간 뭔가 진득히 앉아서 다른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이 계신 2주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나는 진짜 웃음을 보여주었고, 손발을 가누는 모양새도 많이 바뀌었다. 무게도 많이 늘고 키도 커졌으며, 옷과 기저귀 사이즈도 바뀌었다. 용쓰기는 여전하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줄었다. 성대에서 나는 소리가 아닌 이상한 소리만 내더니 이제는 자기의 목소리를 내며 옹알이를 한다. 눈을 잘 맞추고 움직이는 사물과 얼굴에 반응하며 마치 대화라도 하는 양 눈을 보고 하는 말에 뭐라뭐라 옹알이를 한다.

옌스는 부모님과 매일 저녁 한국어로 대화를 하고 공부를 했다. 아빠는 나보다도 인내심이 뛰어나 참으로 장시간 옌스의 한국어 동사변형 연습 상대가 되어주셨다. 2년동안 혼자 공부를 하며 느릿느릿 진도가 나가는 듯 하더니 그동안 차근차근 쌓아온 문법에 최근 늘려가는 어휘가 결합하니 말이 트이는 듯 하다. 아직까지 복잡한 문형은 구사하지 못하지만 모든 문장을 단문으로 끊어 이야기해주면 자기가 아는 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를 결합해 깜짝 놀랄 만큼 많은 문장을 구사한다. 또한 천천히 이야기하면 많은 것을 이해하고. 국제결혼을 하면 영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가족, 친척, 친구와의 의사소통에서 불편함이 생겨 아쉬운 경우가 생기는데, 이를 극복하려는 옌스가 정말 대견하다. 한국어 공부를 취미라고 여기는 그가 어찌나 훌륭하다는 생각이 드는지. 이번 가을 두달간 한국가서 생활을 할텐데 그 때 한국어 실력이 일취월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언어공부는 본인의 열정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번 방문기간 중 시부모님과 부모님이 만나신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웨딩 디너때 처음 만나서 긴 이야기 나누지 못하셨던 양가 부모님이 어제 오덴세 가시는 길에 들르셔서 커피를 한 잔 하고 가셨다. 뭘 이야기하셨는지 기억이 잘 안난다.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셔서 그런가 보다. 옌스 한국어 이야기, 시누이네가 두바이로 발령나 이주한 이야기 등만이 기억난다. 한국어와 덴마크어와 영어가 버무러진 복잡한 시간이었지만 참 자연스럽고 좋았다.

한동안 엄마가 살림을 도맡아 해주셔서 내가 한 것이라곤 두끼 저녁 차려드린 것, 화장실 청소 한 번이 전부이다. 애 먹이고 기저귀 갈아주고 그런 것만 하니 정말 편하더라. 그런 편안함에 길들여지는 것이 두려울만큼. 그러나 또 다시 하면 하게 되어 있는 것이니. 그리고 엄마표 식사를 매일 했더니 살도 살짝 붙어서 이제는 다시 자제하며 먹어야 할 형편이다. 흠흠.

한동안 부모님을 못보는 것이 아쉽지만 그래도 육개월 후엔 두달이나 같이 지낼테니 너무 상심하지 말아야지. 그때면 하나도 엄청 커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교류도 가능할테지. 그때까지 시간이 후딱 갈 거라는 생각이다. 가기 전 보른홀름에도 한 번 다녀오고, 여름 휴가도 보내고 하면 정말 눈깜짝할 새에 가버리겠지. 하나의 성장모습을 잘 새겨두어야겠다. 다들 하는 이야기처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순간일테니

출산 후 첫 공식 외출

동네 산책이나 병원 방문 등을 제외하고 제대로 된 외출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목적이 있는 외출 말이다. 남편과 매주 하던 주말 커피데이트가 그리웠다. 수퍼에 장보러가거나 산책을 겸해 남편 안경 맞추는 거 디자인 같이 보러 나가고, 커피 한잔 테이크아웃해 돌아온 것 외엔 제대로 나가서 일반적인 활동을 해본지가 보름이 되었더니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병원 외출과 동네 산책으로 외출 준비는 해본 적이 있기에 한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이런 외출은 몰링이 최고라는 결론을 내리고 몇 개 없는 몰 중 어디로 갈 지 선택을 했다. Fisketorvet는 S tog로 한번에 가지만 내려서 플랫폼이 지상에 있는데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리위로 올라가 좁고 긴 인도를 유모차를 밀며 걸어야 한다는 게 영 불편하게 느껴져서 제외. Field’s는 메트로가 붐비는 쪽 방면으로 오래 가야돼서 제외. S tog에서 메트로로 한번 갈아타야 하지만 붐비지 않는 방향으로 가는 메트로인데다가 환승시 지상으로 나올 일 없이 쉽게 갈 수 있는 Frederiksberg Centret로 가기로 했다. 항상 상대적으로 덜 붐비고 괜찮은 샵들이 적당히 분포되어 있는 이 곳이 그나마 애 데리고 가기에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가서 한 것이라고는 스타벅스에 앉아 커피 한잔 하고 하나 먹을 비타민 D과 손톱깎이, 기타 옌스가 필요한 것을 산 것 뿐이다. 약간의 윈도우쇼핑과 함께. 그렇지만 그냥 그런 게 필요했다. 그리고 그 첫번째 시도는 옌스가 있을 때 하는 것이 조금 더 수월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미 2주간의 출산휴가를 썼기에 옌스는 2주 후면 회사로 돌아가야 하고 말이다.

수유 한 번 하고 기저귀 한 번 갈아주는 정도였으니 크게 어렵진 않았지만, 커피마시는 때와 집으로 돌아오는 열차 길을 제외하곤 내내 안아주어야 해서 (우는 탓에) 팔이 조금 힘들었다. 그래도 결론적으로는 성공적인 외출이었어서 주말 커피데이트는 우리와 하나의 컨디션이 허락하는 한 다시 시작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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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외출 인증샷. 아직 화장까지 할 여유는 없었다. 목에는 수유용 커버를 두르고… 

3주~한달 된 아기들의 외출은 봤으나 우리도 2주 갓넘은 아기의 외출은 본 바가 없으니 여기에서도 아주 흔한 건 아닌 모양이다. 몰에 애를 데리고 이 시기에 나오는 것이. 물론 여기 아기들은 1주일만 넘어도 다 밖에서 낮잠을 재우니 외출 자체가 드문 건 아니지만, 이런 몰 산책 말이다. 좀 오래 집에 박혀있었더니 생각보다 답답했던 모양이다. 다녀오고 나니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은 걸 보니.

하나가 태어나고 나서 삶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내 성격의 단점도 나오고 반성하게도 되고. 옌스가 집안일에 있어 나보다 서툰데, 좀 더 꼼꼼하거나 빠릿하게 일을 해주지 못하는 것으로 조금 더 못해주나 하는 마음에 짜증이 났다. 생각해보니 사실 일을 그렇게 꼭 잘 해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집을 내내 깔끔하게 유지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내 페이스대로 해주지 않는 옌스에게 짜증을 내는 것은 진짜 중요한 것, 즉 우리 관계와 우리 삶을 간과하고 별 것 아닌 것에 집중하는 격이 아니던가. 갑자기 옌스가 내 로맨틱한 대상인 남편에서 내 아이의 아빠로 변하면서 관계의 축과 동력이 다 바뀌고 옌스에 대한 마음도 많이 바뀌었다. 진짜 가족이라는 강력한 유대감 같은 것이랄까? 그 전에도 이미 그렇다고 느끼고 있었다 생각했지만, 완전히 다른 새로운 차원의 그것이다.

외출을 하고 보니 그전보다 아기와 함께 있는 가족이 그렇게 눈에 많이 들어오더라. 또한 커플이 단 둘이 온 경우를 보니 우리가 그랬듯이 눈과 몸짓에서 로맨틱한 사랑이 묻어나오는 게 눈에 띄던데, 우리도 그런 로맨틱함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족이라는 생각으로 그런 것들을 놓치지 않도록 말이다.

 

2016년 크리스마스 가족모임 후기

일년에 한 번, 두 분의 시고모님 중 한 분의 댁에서 돌아가면서 두번째 크리스마스 오찬이 열린다. 덴마크에서는 25일과 26일을 각각 첫번째 크리스마스와 두번째 크리스마스라고 부르고, 첫번째 크리스마스 오찬과 만찬은 24일 이브에 하고, 두번째 크리스마스 오찬은 26일에 한다. 올 해는 Faxe Ladeplads의 첫째 고모님 댁에서 하는 거였는데, 막판에 고모님 손목이 부러지면서 작년과 마찬가지로 Roskilde에서 하게 되었다.

26일 저녁에 태풍이 예보되어, 페리를 타고 돌아가셔야 하는 시부모님은 참석을 못하시게 되었고, 따라서 우리도 열차를 타고 움직여야 되었다. 이번 오찬을 호스트였던 도리스 고모님과 크눌 고모부님은 칠십년대 히피의 삶을 사셨다는데 사실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그냥 봐서는 점잖은 보통의 어른들인데 히피셨다니. 옌스 왈 고모님네 서가에 히피의 삶에 대한 책도 꽂혀있다고 했다. 언젠가 두분의 소시적 사진을 보고싶다.

두분은 초반에 나와 별로 말을 섞지 않으셨다. 내가 마음에 안드시거나 영어가 편치 않으시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란 생각을 했으나, 그게 후자의 이유였음을 알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내가 덴마크어를 더듬거리며 하기 시작하자 조금씩 말을 걸기 시작하셨고, 어느 타이밍부터는 내가 영어로 말하더라도 덴마크어로 답을 하셨다. 그리고 크눌고모부님은 특히나 내 덴마크어의 변천사에 유독 관심을 많이 보이고 표현하셨다.

이 날도 나를 보자마자 몇마디 섞으시더니, 이제 정말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거의 없다하시며 놀라움을 표하셨다. 더이상 다른 가족들도 나를 위해 말을 천천히하거나 영어로 말하는 수고로움을 피해도 되게되니, 나 또한 부담스러움이 사라졌다. 다른 것보다도 이제 대그룹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포함될 수 있고, 대부분의 주제를 자연스럽게 다루고 이해하게 되어서, 소외감이나 지루함이 없어졌다. 꼬맹이들의 말도 알아듣고 그들과의 친밀도도 높아져서 그들이 나와도 놀기시작하고, 내가 준비한 명절 음식들도 항상 완판되니 소속감이 더 커진다고 할까?

올해는 새우를 다져 약간의 당근과 양파를 넣어 뭉쳐만든 새우전을 준비해갔는데, 여기 음식 중 피스크프리카델라라는 생전요리와 유사한점이 많아서 그런지 생소함 없이 사람들이 smørrebrød의 토핑으로 얹어먹더라. 한국에서도 애들이 새우전 좋아하는 것처럼 여기 애들도 좋아하더라.

각자 음식 한가지씩 또는 디저트나 음료 등을 분담해서 준비하고 나눠먹는 명절은 꽤나 유쾌하다. 집에 오면 하루가 다 가 피곤하기도 하지만, 자주 돌아오는 명절도 아니고 일년에 한 번 뿐이니 즐겁게 준비할 수 있다. 내년엔 하나가 나오니 또 느낌이 완전히 다르겠지. 돌 가까이 되는 타이밍이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정신없게 하겠지.

관계는 장담그듯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옌스의 3주간의 휴가가 거의 끝나간다. 나는 한 주 더 길게 썼으니 딱 한달이다. 4주간 정말 내 생애에 없을만큼 잉여로운 생활을 했다. 여행 다니며 먹고 쉬고 공부나 어떤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한달. 입덧 때문에 뭔가 열정적으로 할 여건은 안되기도 했고, 입덧과 함께 찾아온 피로로 하루에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방학이 때맞춰 찾아와준 것은 정말 축복이었다고 할 수 밖에.

덴마크에서는 결혼을 해도 시부모님을 어머니, 아버지로 부르지 않는다. 그냥 이름을 부르는 것이 전부. 30년을 한국에서 살아 형성된 시선으로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하니 적응하기 어려운 것들이 몇가지 있는데, 시부모님을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다. 나는 내 문화를 설명하고 엄마, 아빠에 해당하는 mor, far로 호칭을 하기로 했다. 옌스는 처음엔 이상할 거라고 하더니, 막상 시부모님도 정말 좋아하시고, 나와 그분들이 살갑게 지내는 것을 참으로 좋아한다.

부담스러우리만치 잘해주시는 시부모님임에도 나에게 시부모님이라는 존재는 나만의 경험 없이도 그냥 당연히 어려운 존재였기에 항상 행동이 조심스러웠었다. 오덴세에 사시다 보언홀름으로 이사가신 분들이라 거기서 가족이 모이긴 어려워 주로 시누이네 집에서 모이는데, 거기서도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게 좋은지 몰라 최대한 편하게 지내고 오고자 노력했다. 예를 들면 점심, 저녁을 먹는 모임의 경우, 식사가 끝나고 정리를 얼만큼 돕는게 좋은 건지가 매우 애매했다. 손님이 너무 거드는 게 실례가 될 수도 있기도 하고, 또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하자니 애매하고, 부엌도 너무 많은 사람이 있으니 오히려 동선만 복잡해지고. 시댁 가서도 좀 돕자니 이것 저것 하지 말라 하시고, 아무것도 안하자니 마음이 불편하고. 옌스는 그냥 편히 쉬라는데 한국인인 내가 그렇게 하기엔 내 살아온 방식이 그렇지 않아 마음 한구석 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 모든 것은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린 것이 아니었다 싶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사람들이 같은 공간을 공유하다보면 적당히 서로 겹치는 방법을 깨닫게 되고 익숙해지는데, 시부모님이나 나도 그런 것이었다.

시부모님네 별장에 가서 3박을 하고 돌아왔는데, 주시는 음식을 적당히 거절하기 (이것 저것 권하시면 세번이상 거절이 어려워 적당히 먹었었는데, 옌스가 장기적으로 보면 사전에 거절하는 법을 잘 배워야한다며 거절 잘 못하는 나를 교육시킨 바 있다.), 우리가 먹은 것들 설겆이 하고 정리하기, 시부모님 생활습관 파악하고 그를 존중하기 (우리 집보다 깨끗하게 생활하셔서 그거 맞추려면 조금 더 신경 써야한다.), 그 밖에는 그냥 내 가족들 대하듯이 편하게 생활하기 등을 잘 실천하고 왔다.

입덧이 심해서 먹을 수 있는 거 제약이 많으니 알아서 해먹을 거니 내 거는 신경 쓰지 말라고 옌스가 미리 전화하는 것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이것 저것 내가 먹을 수 있는게 뭐 있을지, 아무것도 요리해주실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많이 물어보셨다. 첫날은 다 거절하지 못해 조금 먹다가 결국 토하고나서는 어려워도 아니다 싶은 것은 다 못먹겠다고 말씀드렸고, 한번 그렇게 하고 나니 거절이 쉬워졌다. 샤워하고 나서 샤워부스 건조시키는 일도 그렇고, 설거지 하는 일도 그렇고, 돕겠다고 여쭤보는 거 없이 바로 하겠다고 나서니 잠깐 말리시다가 그냥 놔두시더라. 결국 적극성의 문제였던 것도 있고, 시부모님도 나를 완전히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전까진 손님같은 생각도 드셨기에 그랬었나 싶다. 내가 편해지니 시부모님도 나를 더 편하게 대해주시고 모든 것이 조금씩 더 자연스러워진다.

결론적으로 보면, 가족처럼 되기까지 한 일년은 걸리는 거 같다. 정말 장담그는 것처럼 관계도 시간이 걸리는 것. 물론 임신하면서 관계의 역학도 조금 더 새로운 형태로 바뀌는 것도 있었던 것 같고. 일종의 계기같은게 아닌가 싶다. 우리도 내년에 애 낳고 한국가서 한달정도 (나는 두달정도…) 우리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지내다보면 옌스와 우리 부모님 사이도 조금 더 편해지고 가족같아지겠지.

입덧이라는 미명하에 내가 좋은 엄마는 못되고 있는 것 같지만 (비타민 챙겨먹는거나 등등…) 이제 좀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아마 임신초기에 나처럼 막지내는 엄마도 별로 없을 듯. 이제 배도 – 나만 알 정도지만 – 나오기 시작하고, 진짜 애가 있긴 있나보다. 다음주 초음파를 처음으로 보기전까진 별로 실감이 안날 듯. 손주까지 나오면 또 다시 흐른 시간에 더불어 피가 섞인 손주를 낳은 며느리니 더 가족같이 느껴지겠지. 이제 정확히 30주 남았다. 그 날이 오기까지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임신, 입덧, 덴마크 생활

요며칠 입덧이 심해서 하루에 1~200 그램씩 빠지는 것 같다. 최소한의 먹거리만을 먹고 버티고 있는데, 먹고 토하는 일이 잦아지니까 먹기도 살짝 겁나고 안먹자니 애한테도 좋지는 않을 거 같아서 최소한 먹는 것으로 버티고 있다. 시험은 코앞으로 다가와있는데, 공부도 요며칠 하나도 안하고 놀고 있다. 다행인건 스트레스도 별로 받는게, ‘아, 임신해서 몸이 안좋아서 시험 못치면 어쩔 수 없지.’ 뭐 이런 근거없는 생각 때문이랄까. 그나마 그간 성적을 잘 받아두어서 한두개 좀 못친다고 해도 크게 문제될 것도 없거니와 하나는 내가 쓴 페이퍼를 근거로 시험보는 것이라 이미 고생해서 낸 것에 대한 평가가 시험의 큰 몫을 좌우하기에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도 있다.

어느덧 임신 7주. 시어머니와 함께 임신 후 처음으로 병원을 다녀왔다. 멀리 Bornholm에 살고 계시지만 내일 새벽같이 시누이와 첫손녀와 함께 셋이서 떠날 2박 3일의 짧은 런던여행을 위해 Holte에 잠깐 와계셨다. 그 전에 병원 갈 때 혼자 가기 그러면 언제고 이야기해달라고 하셨는데, 비행기로 오셔야 하는 시어머니 일부러 오시라 하기 뭣해서 그냥 혼자가려고 했었다. 그러다가, 혹시 말씀은 드려보는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말씀드렸는데 잘 한 일이었다. 마침 와계시기도 했고 기뻐하시며 같이 가주신다 하셨다.

시어머니와 함께 간 것은 잘한 일이다. 남편 CPR번호도 기억이 안났는데, 시어머니가 기억하고 계셨고 (그런게 필요할 줄이야), 남편 가족 병력 등에 대해서도 문진을 했는데 그 또한 시어머니가 답변해주실 수 있었다. 쌍둥이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우리 가족에는 그런 이력이 전혀 없다 했더니, 시어머니가 자기네에는 이력이 있다 하신다.

앞으로의 병원 일정은 12~13주 중 다운증후군 검사 1차, 25, 32주에 있을 초음파 검사 및 기타 아이에 대한 상세 검진이 거의 다 인것 같다. 나머지는 나의 출산을 담당할 산파와 만나서 할 일들이 있고, 출산 교육 등이 있는 모양인데, 그건 산파가 나에게 연락을 준다고 하니 그냥 기다리면 될 일이다. 아, 의사가 덴마크의 모든 병원 기록이 다 전산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임신과 관련된 것만큼은 문자 그대로 Paperwork이 아직도 살아있다면서 노란 봉투에 관련 내 임신 정보를 기록해서 넣어주었다. 앞으로 모든 진료시 항상 지참하라며. 이 아날로그식이라니. 모든 정보가 다 전산으로 날아오다가 갑자기 이런 노란봉투를 받아드니 월급봉투라도 받은 듯한 느낌이다.

다음 병원 일정에도 시어머니가 가주신다고 하니 이번엔 그냥 마음의 부담 없이 부탁하련다. 같이 가주시면 기쁘겠다고 말씀드리니 Bornholm에서 날아오신다고. 아. 이 감사함. 이 먼 덴마크에 내 부모와 떨어져살며 한켠으로나마 기댈 시댁이라는 구석이 있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시누이가 시어머니께 엽산 꼭 챙겨먹으라고 알려주라 했다는데, 시누이도 뭔가 참견하는 듯하게 보일까봐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나보다. 🙂 궁금한 거 있으면 다 물어보라는데 사실 뭘 물어봐야할지 잘 모르겠고, 책이나 각국 정부 보건당국에서 제공하는 홈페이지도 워낙 자세하게 정보를 담고 있으니 아무래도 먼저 연락하게는 잘 안된다. 참 좋은 시누이인데도 괜히 폐끼칠까봐 어려운 건 한국인이라 그런걸까?

병원을 나와 같이 커피한잔 (나는 초코우유 한잔)을 함께 하고 장을 본 뒤 각자 방향으로 향했다. 옌스랑 대화해도 쓰는 어휘가 한정되어 있는데, 병원에서 의사를 보거나 시어머니와 대화를 한다거나 할 땐 평소엔 잘 안쓰던 어휘도 쓰게 되서 좋다. 요즘 학원도 쉬다보니 듣기는 되도 뭔가 말은 퇴화하는 느낌이 조금씩 들고 있었는데, 역시 집중력의 문제인 것 같다. 꼭 써야된다는 생각이 없으니 요즘 다시 덴마크어 비중이 줄어 반반 정도 쓰는 거 같다. 복잡한 건 대충 영어로 이야기하고 일상 대화만 덴마크어로 하는? 집에서도 다시금 덴마크어 비중을 늘려봐야할 것 같다. 곧 방학도 하니 더욱…

뭔가 약간 퇴보하나 하는 불안이 드는 와중 하나 위안이 되는 건, 대학원 덴마크 친구가 자기는 지방 방언도 좀 심하면 못알아 듣는데 내가 하는 말은 다 알아듣겠다면서 나에게 억양이 별로 없다고 해준 것이다. 옌스가 너 발음 좋다 이렇게 이야기해줘도 뭔가 그냥 자기 아내니까 격려해주려 하는 이야기로 들리고 덜 객관적으로 들렸는데, 그렇게 이야기해주니 나의 덴마크어 미래가 전도유망하다는 착각을 더 하게 해줬다고나 할까? 흠흠.

시간이 지나면서 덴마크에 친구도 서서히 늘고, 이제 내 피를 나누는 가족도 곧 생기고 할테니 뭔가 정말 조금씩 뿌리를 내리는 기분이다. 아직도 나에게 내 나라는 한국이지만 이곳도 이제 내 나라가 될 것이니까.

입덧에 제대로 식사 못하는 아내를 위해 생일 아침상으로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을 차려주는 남편도 있고, 병원간다고 멀리서 와주시는 시어머니도 있고, 다 감사하다. 인생의 많은 일들은 그간 걸어온 일과 우연이 만나 얽히면서 생기는 놀라운 기록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을 떠나 일을 해보고 싶다 했던 아주 초등학교 3학년짜리의 꿈은 내 직장 선택에 있어서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그를 통해 이곳에 와있었고, 그간 잡다하게 해왔던 취미와 한국에선 드세다고 들어왔던 나의 적극적 성격은 옌스가 나에게 관심을 갖게한 동력이 되었다. 많은 연애 실패담은 사람을 볼 수 있는 눈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뭔지를 깨닫게 해주었고, 결혼생활은 어때야 한다는 가치관을 심어주게 되었다. 그리하여 만난 그는 나와 결혼과 인생관이 놀랍도록 흡사하게 닮아있었으며, 또한 다른 부분이 있어 서로 배우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부분이 있다. 우린 스스로의 자유를 갈망하면서 같이 함께 하고 싶은 욕구를 동시에 갖고 있기에 서로 잘 이해해줄 수 있고 지지해줄 수 있다. 애가 생겨서 인생의 많은 변화가 생기고 힘든 순간이 오더라도 잘 헤쳐갈 수 있다는 믿음과 신뢰가 있다. 일부러 상처를 주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 성격덕분에 문제를 차분히 잘 해결해나갈 수 있으니까.

정말 애를 가져도 좋겠다고 확신이 선 순간 이렇게 아이가 찾아와준 점 정말 고맙다. 앞으로 남은 기간 별 문제없이 건강하게 커주고 태어나주기만을 바랄뿐이다.

덴마크 명절 단상

덴마크에 와서 보니 가족 모임이 한국에서보다 훨씬 잦다. 그리고 모였다 하면 밖에서 외식하는 거 없이 대부분 집에서 모여 식사를 하고, 점심, 저녁까지 두끼는 기본이다. 모이는 장소는 자녀의 집에 처가, 시가 식구가 함께 모이는 경우부터 처가나 시가로 때에 따라 바꿔가며 방문한다. 딱히 정해져있는 건 없다. 음식도 나눠서 해가고 뒷정리도 다 같이 한다. 중요한 차이점은 남녀 모두 일을 한다는 점이다. 아니, 오히려 남자가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최소한 우리 시댁은 그렇다.
 
손님을 집에서 치르는 일이 잦은데, 서로 오고가며 그리 하다보니 조금씩 손님맞이가 익숙해지고 좋아진다. 뒤늦게 치우는 일이 조금 번거롭긴 하지만, 부부가 같이 정리하면서 그날의 저녁에 대해 담소를 나누는 일도 즐거움의 일부다.
 
불만은 한쪽이 일을 부담할 때 생긴다. 덴마크의 이런 남녀 평등이 찾아온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여성의 참정권 확보가 불과 100년전이고, 1950년대를 전후로 해서야 여성의 경제참여 비중이 늘어나고 여성의 역할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 학생운동을 시점으로 한 변화가 지금의 사회 모습의 초석이 되었으니 꽤나 최근의 일이다.
 
우리가 덴마크에 비해 민주화나 근대에 들어선 발전의 시작이 늦기는 했으나, 그 시간의 격차가 아주 큰 것은 아니다. 아직도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양성간의 차별은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전통의 이름으로 이러한 차별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도 한다. 
대가족간의 모임이 예전같지 않고 갈수록 핵가족 되어가는 현상이 아쉽다. 현대화가 교류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텐데. 우리 명절 문화가 변화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아주 많이 부족하다. 이제 막 첫 발걸음을 떼는 수준이라 생각한다. 이제는 남자들이 조금 돕는 정도가 아니라 획기적으로 모두가 함께 일하고 먹고 즐기는 기회가 될 때가 충분히 되었다. 불만이 사라지면 교류에서 찾을 수 있는 과실이 눈에 보인다.
집안일을 추가로 더 하더라도 이곳의 명절은 즐거운 날이 되었다. 서로 위해주는 가족들을 만나게 되고, 나 또한 그 일원이 된다는 것, 그리고 미래에 내 아이들에게도 더 큰 가족을 안겨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피로 섞인 내 가족이 아니기에 그와 같을 수 없다하더라도 그건 당연하다. 내가 그들에게 가족과 똑같은 애정을 부어주기엔 우리가 아는 시간이 아직 짧고 아직 더 가까워질 거리가 많이 남았기에 말이다.
물리적인 거리와 언어 문제 등으로 인해 한국의 내 가족과 옌스가 내가 이곳에서 동화되는 만큼 가까워지지 못함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문제일 뿐, 양쪽의 문화를 모두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더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멀지 않은 시기에 나도 우리의 2세를 가질 수 있고, 그 2세에게 두개의 다른 문화와 가족속에서 자랄 수 있게 해주길 바래본다.

이젠 정말 가족이다.

옌스네 조카 생일이 있어서 생일파티에 갔다. 작년부터 조카들 생일에 두번씩 갔으니 생일로는 6번 갔고, 기타 이래저래 간것까지 여동생네 집에 열번 이상은 간 것 같다. 항상 함박웃음을 띄는 가족들은 처음부터 나를 따스하게 맞아주었지만, 10명 이상이 모이면 간간히 대화가 덴마크어로 전환될 때도 있었고, 그럴때면 옌스만 바라보고 있기도 애매하고 뻘쭘하지 않은 듯 뻘쭘하게 있어야 했다. 꼭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만이 아니라 그들이 아무리 따뜻하게 대해줘도 친해지는데 걸리는 물리적 시간이 걸려서였을 것이다.

갈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편해지고 있음을 느끼긴 했지만, 오늘 처음으로 우리 가족 모임에 간것만큼 편하게 있다 왔다. 결혼을 통해 옌스의 여자친구가 아닌 아내가 되어서 그런지, 이모님네 가족과 옌스 사돈댁 어르신들 모두 그전보다 훨씬 편하게 대해주셨고, 조카들도 더이상 나를 어려워하지 않는다. 아직 모든 대화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간혹 상황을 놓치면 옌스에게 조금씩만 도움을 받으면 되니, 대화에서 소외되는 기분이 없어졌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긴장감도, 상황에 익숙해지고 나니 다 없어진 모양이다. 만날 때 이름을 꼭 불러주고, 대화 중간중간 이름을 불러가며 대화한다던가, 서로 안아주며 인사하는 방식, 어떤 타이밍에 뭘 하는지 등 소소한 것 같지만 모르면 약간 주춤하게 되는 것들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몸에 익었다.

내 마음안의 변화도 크게 한 몫을 한 것이리라. 예전엔 옌스의 여자친구의 입장에서 간 것이라면, 이제는 진짜 가족의 테두리 안에 들어선 입장으로 갔기에 보다 자연스러워져서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었을 게다.

무엇때문이든간에 덴마크에서 내가 잘 정착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해주는 가족들의 마음이 느껴져서 시댁에 놀러가는 일이 참 즐겁다. 시누이네 집에는 맨날 초대만 받아 놀러가서 미안한과 고마운 마음이 크다. 웨딩 디너로 드디어 그들을 우리가 초대하는 일이 생겨 마음이 조금이나마 놓인다.

우리 부모님이 멀리 사시기에 시댁과 친정간의 교류가 잦기 어렵다는 점은 시누이네 가족 행사때 자주 만나시는 그분들을 볼 때마다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이번 웨딩 디너로 만나서 인사도 하시고, 부모님이 덴마크에 놀러오실때나, 내후년 쯤 시부모님이 한국가실 때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아쉬운대로 자리를 마련해야겠다.

덴마크에서 가족의 의미와 결혼 그리고 결혼식

덴마크에 온지 벌써 2년이 되어간다. 좋은 시간은 항상 그 순간에 묶어두고 싶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버리고 만다. 그래서 그런지 덴마크에서의 2년이라는 시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인도에서 근무했던 2년반의 시간을 기억하면, 항상 귀임 희망일을 D-day 삼아 매일 손가락으로 꼽았음에도 그리 지나지 않는 길기 긴 시간이었는데, 덴마크에서의 시간은 나를 스쳐지나간 것만 같다.

새롭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항상 꿈꿔오던 유럽에서의 생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옌스를 만나기 전 덴마크의 삶은 사실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겉껍질을 뚫고 들어가 친해지기 정말 어렵고, 한번 친해지면 깊은 속을 내어준다는 덴마크인은 때로는 코코넛으로 비유되는데, 나처럼 뜨내기로 지내다가 돌아가는 외국인은 그들만의 리그를 살아가야 하기에 항상 겉도는 느낌을 갖게 된다. 간신히 한두명 사귀면 친교의 기쁨을 충분히 느끼기도 전에 여러가지 이유로 덴마크를 떠나버리곤 해 허탈함만 남기곤 했다. 이런 공허한 인간관계만으로 4년을 잘 살아갈 수 있을지 두려웠고, 덴마크의 어둡고 음산한 겨울은 유독 마음을 외롭게 했다. 부모님과 보리가 옆에 없었다면 정말 힘들었을 시간이었다.

크리스마스, 새해맞이가 다 끝나고 더이상 기념할 것도, 즐길 것도 없어 덴마크인들이 제일 우울해한다는 2월, 옌스와 만났다. 그 이후의 시간은 소소하면서 즐거운 촘촘한 추억으로 채워졌고, 새로운 것들을 빠르게 흡수할 수 있었다. 덴마크인과 연인이 되고 가족이 되는 것이 그들의 사회로 깊숙히 들어가는 지름길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피부로 느낄 수 있었고 설명으로 듣고 머리로 이해했던 그들의 삶을 체험하며 배울 수 있었다. 전통과 현재, 삶을 대하는 태도, 일과 가정의 양립, 가족관, 지역간 감정, 정치, 사회문제, 외국인에 대해 느끼는 감정 등 많은 것을 말이다. 특히 결혼한 커플들과 만나 교류하거나 그들이 결혼하기 전에 만나 결혼식에 참석할 기회를 가진 두 번의 경험을 통해 덴마크인이 생각하는 가족과 결혼에 대한 의미를 배울 수 있었다.

물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덴마크 전체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이곳도 많은 사회문제를 안고 있는 여느 나라와 같은 한 나라일 뿐이니까. 옌스와 그의 가족도 그렇고, 내 친구들도 대부분 나와 정치나 여러면에서 비슷한 견해를 가진 보수적인 사람들로, 사회에서 안정된 위치에 가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니, 그들을 통해 듣는 덴마크는 편향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 어차피 세상을 중립으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고 내가 속한 곳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며, 실제 내가 느끼고 배우는 것은 지금 내가 서있는 곳과 그 주변인으로 부터이니, 내가 하는 이야기는 바로 내가 느끼는 덴마크일 뿐이다. 이점은 우선 짚고 넘어가자.

덴마크에선 이혼이 흔하다. 주변에 이혼한 사람들도 많이 있고, 그것이 흠이 될 일도 아니다. 애가 있는 커플들도 마찬가지로 많이 이혼한다. 오래 살다가 애를 하나 둘 낳다가 결혼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면을 보면 결혼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들인 것 같고, 우리나라에선 이들을 가리켜 근본없는 사람들이라 부를 이들도 있을 것이다. 아니 많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곳 부부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나 가족을 대하는 방식을 옆에서 지켜본다면 결코 그렇게 폄하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새 느끼게 될 것이다. 맞지 않는 부부는 인내하며 사는 방식을 택하는 대신에 갈라서는 것이고, 직장내에서나 친구사이에서 혼외 여자친구가 있는 것을 자랑한다면 매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게될 만큼 커플간의 신뢰와 헌신을 중요시한다. 물론 누군가와 연인관계를 맺기 전까지 다른 국가에 비해 열린 성의식을 갖고 있는 것은 맞는 이야기지만, 그건 딱 그때까지이다. 가족과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크리스마스를 중심으로 한 연말이나, 소소한 일에 자주 모이고 서로 초대하기 때문에 가족들과 보고 함께 보낼 시간이 많다. 손주들이나 자식, 며느리, 사위 생일 등에 사돈이 함께 모일 일도 많이 있다. 때로는 그로 인해 여기도 고부갈등이나 장서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그래서 부모자식지간 사이가 멀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부부는 내가 함께하기로 선택한 반려의 입장을 이해하고, 내 부모라고 꼭 좋은 관계를 맺으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같이 잘 지내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라도 그것이 부부간의 갈등을 일으키도록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결혼은 진정한 축하의 장이다. 프로포즈를 받고 우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결혼식은 모두가 행복하게 웃는 곳이다. 자식이 결혼하면 짠하고, 친한 친구가 결혼을 할 때 괜시리 뭉클해지는 마음에 눈을 적시는 것은 우리네 정서이다.  결혼 만찬은 통상 6~7시에 시작해서 신혼부부가 추는 웨딩댄스가 자정 직전에 있기까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는데, 중간중간 부모와 형제, 친한 친구들이 각각 5분에 가까운 결혼 축사를 한다. 부모의 경우, 어린 자녀가 자신에게 주는 의미를 작은 에피소드들과 함께 소개하기도 하고, 얼마나 사랑하고 자랑스러워 하는지 이 또한 여러 에피소드와 함께, 또는 시와 함께 소개하기도 한다. 그들의 만남에 대한 생각과 앞으로 인생에 대한 덕담 등 많은 이야기를 하는데, 덴마크인 특유의 유머감각과 더불어진 축사를 듣자면 참으로 놀랍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전에 옌스가 아버지 칠순잔치에 말할 내용을 미리 써서 연습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보다 훨씬 길게 하는 결혼 축사는 얼마나 정성을 들여 준비하고 연습했을 지 상상이 된다. 우리네 일상이 바쁘고, 뭐든지 효율적으로 빨리빨리 처리하려다 보니 삶이 건조해지고, 표현을 하지 않다보니 마음도 때로는 건조해지는 경우가 많다. 대충 이해해주겠지 하다보면 소홀해지기도 하고. 이 곳의 여러 축하문화는, 선물의 내용이나 가격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돈으로 주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가급적 고민을 해서 준비하고 카드를 쓴다. 마음이 동하면 표현하게 될 수도 있지만, 표현하다보면 마음이 동하고 행동이 마음을 낳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이런 하나하나의 작은 행사가 추억을 만들고 관계를 돈독히 하게 하는 윤활유가 된다.

결혼식엔 많은 전통적 요소가 아직도 남아있다. 결혼식을 마치고 난 신혼부부에게 쌀을 던져주며 축복하는 의례나 하객들이 결혼만찬 중 바닥을 발로 구르면 신혼부부가 테이블 아래로 들어가 키스를 해야 하는 것, 반대로 하객들이 접시를 포크나 칼로 두드려대면 신혼부부는 의자 위에 올라서서 키스를 해야 하는 것들이다. 신부나 화장실을 가느라 자리를 비우면 하객 중 여자들은 모두 일어나 신랑 볼에 키스를 해야 하는 것이나 반대로 신랑이 가면 남자들이 똑같이 하는 것 등도 재미있는 전통이다. 웨딩 댄스가 끝나고 나면 남자들은 신랑을 헹가래 치듯이 들고 신발을 벗겨 양말 끝을 가위로 잘라낸다. 이 밖에도 많은 것들이 있다.

만찬 도중 같은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이 한국에서는 결혼을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는데, 대부분이 하는 현대적 결혼식을 이야기해줘야 하는지, 전통 결혼을 이야기 해야하는지 갈등이 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예전 3일 가량 동네에서 잔치하듯 했던 결혼 전통이 현대에 들어 가정의례준칙의 도입과 함께 어떻게 서구화되었는지, 얼마나 효율적으로 진행되었는지, 또 그래서 요즘 왜 사람들이 작은 결혼에 관심을 갖는지 설명해주었다. (결혼 만찬장으로 가는 차안에서 한국 음식의 매운 맛은 고추가 소개된 나름 최근에 있었던 (Modern introduction) 일임을 이야기했다가, 500년이 최근이라는 이야기에 다들 배를 잡고 웃었는데, 결혼식의 변화도 500년전 있었던 일이냐고 농담을 해서 멋적게 웃었다. 이는 Modern이 아닌 Contemporary 현상이라고 덧붙이면서.) 우리 결혼에 전통 요소가 많이 사라진 것은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세상은 변해가는 것이고 전통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만들어지는 것이니 새로운 시대엔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고, 전통을 재해석해서 더 좋은 것을 만들어가면 될 것이다. 특히 나처럼 이문화에서 온 두명이 한가족을 이루게 되는 경우 문화접변이 일어나고, 세계가 더 긴밀하게 연결되며 나같은 사례가 워낙 많기에, 뭐가 전통이라고 해야 할지 흐려지는 경향도 생길 수 있다.

이미 둘이 같이 산지 2년이 된 커플로 8월이면 태어날 아이도 있는 그들의 결혼식에서, 신부 입장을 기다리는 신랑의 바짝 긴장한 모습과 마른 입술과 함께 초조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며, 결혼은 누구에게나 떨리고 긴장되는, 인생의 반려를 맞이하는 소중한 것임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올 연내 결혼을 할 나에게도 간혹, ‘아, 정말 나도 결혼을 곧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그 무게가 불현듯 실감이 나며 설레면서 긴장이 되는 순간이 있다. 재단에 서서 신부를 기다리는 신랑의 마음이야 오죽 더 긴장될까.

이러저러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Regitse(레깃써)와 Michael(미케엘) 커플의 앞날에 좋은 날만 가득하길 빌어본다.

<  Regitse & Michaels Bryllu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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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ren & Sunes Bryllu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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