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디 긴 명절이 끝났다.

24, 25, 26, 28일. 4일간에 걸친 뻑적지근한 가족행사가 모두 끝났다. 다행히 마지막 날이었던 오늘은 요리하는 거 없이 외식하는 거라서 크게 힘들 거 없이 즐기기만 하면 되었다.

원래 가까운 가족 율리아픈(Juleaften)은 24일 한번에 하는데, 올해만큼은 시누네 가족이 곧 돌아가실 시누이 시아버지와 함께 하기 위해 24일을 율란 시댁에서 보내고 우리와는 25일에 따로 보내고 싶다 해서 이틀에 걸쳐 하기로 했다. 24일 율리아픈에 먹을 네가지 음식을 위해 23일 디저트 만들기부터 요리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디저트로 먹을 리살라망(risalamande)을 만들기 위해 23일 밤 우유로 만드는 쌀죽인 리슨그뢸(risengrød)을 한시간동안 불옆을 지키고 서서 저어가며 만들어서 베란다에 밤새 내어놔 차갑게 만들어 두었다. 24일엔 오후 1시 반부터 저녁 6시 반까지 부엌에서 종종거리며 적양배추 무화과 샐러드와 생오렌지잼으로 글레이징한 오리가슴살구이, 삶아 손으로 살짝 으깨 꿀과 버터를 발라 오븐에 구운 감자요리, 미리 껍질을 벗겨둔 아몬드를 으깨고 생크림을 잘 휘핑해 바닐라씨앗과 함께 리슨그뢸을 잘 접듯이 섞어 리살라망도 만들었다. 그렇게해서 먹는 건 또 순식간…

그리고 25일은 일주일간 쌓인 빨래를 아침부터 바삐 돌려대고 구워가기로 한 루브뢸(rugbrød) 2개를 구워 하나와 함께 시부모님과 시누이네 별장에 갔다. 중간에 반죽하다가 옷에 쏟고 난리를 치느라 더 정신이 없었다. 여러가지 부엌내 소소한 사건사고가 많았던 날. 안그래도 바쁜데 말이다. 엎친데 덮쳐 옌스는 눈에 생긴 다래끼가 오래되어도 낫지를 않아 갑작스레 간신히 병원에 약속을 잡느라 아쉽게도 나 혼자 가게 되었다. 사실 나혼자면 가지 않을까 싶었는데 지하실 빨래 건조실에서 빨래를 널고 있는 나에게 시어머니가 따로 전화를 하셔서 시누네 애들이 하나 보고 싶다고 너무 아쉬워한다며 하나랑 나만이라도 가지 않겠냐 하시길래 못간다 하기 좀 그래서 다소 지친 몸을 이끌고 갔다. 즐겁긴 했지만 점심도 요기처럼 아주 간단히 하고 가서 저녁까지 기다려 밥을 먹은 거라 기력도 좀 딸리고 지쳤다. 하나가 시누네 애들과 너무 잘 놀고 저녁도 잘 먹어줘서 기쁘긴 했다.

26일은 시아버지네 가족들과 그 직계가족까지 24명이 모이는 날이었는데, 각자 한가지 요리를 해가기로 해서 나는 잡채를 해갔다. 시어머니도 음식 준비를 우리 집에서 하셔야 해서 그 전까지 요리해서 부엌을 비워드리려니 새벽같이 일어났어야 했는데 늦잠을 자서 9시까지 자버렸다. 으아… 그나마 잡채에 들어갈 고기는 미리 재어두었으니 망정이지. 간신히 11시 15분까지 자리를 비워드리고 나도 나갈 채비를 했다. 도저히 화장은 할 시간도 없고 힘도 없어서 패스. 애들이 많으니까 하나도 잘 놀아서 우리는 그냥 눈으로 감독하다가 하나가 계단 오르내리고 싶어할 때만 손잡고 이동하는 식으로 보면 되어서 옌스와 교대해가며 먹고 이야기하고 즐길 수 있었다. 5시 즈음 되어서 시부모님이 이제 가겠냐고 해주셔서 적당한 시간에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오고 나니 긴장이 풀려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머리고 아프고 몸살기운도 있어서 움직이기 참 힘들었다. 나는 배가 안고팠지만 저녁은 준비해야지 하면서 반조리된 빵을 굽고 그위에 얹어먹을 것들만 좀 팬에 데워 내고 나니 정말 몸 컨디션이 안좋아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대로 침대에 누워서 다음날까지 잤다. 중간에야 깨서 옌스와 잠깐 이야기도 하고 하긴 했지만 침대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렇게 27일이 찾아와서 여유로운 하루를 보내고 나니 28일. 11시 반엔 다 준비하고 나서야 했는데 아침 늦잠으로 8시 반까지 자고 나니 은근히 바빴다. 별로 한 것도 없지만… 그래도 호텔에서 하는 시부모님 금혼식 식사인데 화장이라도 잘 하고 가야할 것 같아서 말이다. 하나의 낮잠이 좀 꼬여서 한명이 밖에서 애 자는 동안 대기하고 한명만 식당에 들어가있는 식으로 첫 한시간은 이상하게 되었지만 1시부터 5시 반까지 이어진 점-저 같은 식사라 상관없었다. 시누 애들이 하나를 잘 봐주기도 하고 식사 도중엔 자기 식사 끝날 때까지 크게 어렵지 않게 잘 먹어주는 애이기도 해서 이제 이렇게 밖에 데리고 가도 어렵지 않고 괜찮다. 중간에 봐줄 사람이 많아진 셈이니까. 오늘은 요리하는 것도 없고 먹고 이야기만 하면 되다보니 크게 힘들건 없었는데, 그래도 끝나고 집에 오니 운동할 힘 따윈 남아있지가 않았다. 그런데 아차. 불고기 좀 재워둔다고 양지를 사왔었구나. 며칠 전에 사왔는데 자꾸 미루게되네. 아차. 내일 송년회가 하나 또 있구나. 사이드디쉬 하나 해가기로 했는데… 결국 다시 나가서 장을 봐와서 감자와 계란을 삶아두고 미뤄뒀던 불고기도 재워뒀다. 이제 정말 있는 에너지를 다 끌어모아 쓴 기분.

이렇게 길디 긴 명절이 끝났다. 아마 이렇게 에너지가 고갈된 건 아마 명절 전주 수요일에 만두피까지 밀어 만두를 빚고 (역시 만두피는 힘들다) 목요일에 치즈케이크를 만들고 금요일에 파티를 다녀온 탓일게다. 그 사이 빈 일정에 율 선물 쇼핑을 틈틈히 껴서 쉴틈없이 돌아다닌 것도 있을게지. 내일 파티 하나 다녀오고 31일 우리 세식구 송년만찬만 하고나면 이 한해도 끝난다. 그러면 3일부터 출근 시작이구나. 갑자기 뱃속이 간질간질한게 긴장이 되는가보다. 남은 며칠동안 신년계획 좀 세워봐야겠다. 아주 간결하게 한 세가지 정도만 말이다.

몸이 엄청 힘들었던 것과는 달리 마음은 그냥 내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인 마냥 즐겁고 편했다. 나도 그들을 잘 알고, 그들도 나를 잘 아니 뭘 이야기해야할 지 생각하느라 뻘쭘한 것도 없어지고. 조카들도 나를 아주 편하게 여기고 장난도 치고. 내년에는 또 더 가까워지겠지. 가랑비에 옷 젖듯…

크리스마스 준비

드디어 이번 주말만 지나면 크리스마스다. 부활절도 명절이긴 하지만 덴마크에서 가장 중요한 명절이라 하면 역시 크리스마스를 꼽는다. 사실 크리스마스는 동지를 기념하는 Germanic 계열 인종들의 축제를 기독교에서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로 택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덴마크에서는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쓰지 않고 율 (Jul) 이라고 한다. 하지는 Sankt Hans Aften으로 기념하듯 동지는 Jul로 기념한다.

아무튼 가장 큰 명절이니만큼 안그래도 서로 집으로 초대하기 바쁜 덴마크인의 일상은 11월부터 엄청 바빠진다. 회사, 친구, 친지, 가족 등 서로 초대해서 커피를 즐기든, 밥을 먹든, 파티를 하든 할 일이 많다. 나처럼 옌스의 네트워크와 나의 대학원 네트워크처럼 좁은 인간관계만 유지하는 경우에도 옌스의 보스의 보스로부터 가족단위 초대를 받아 꽤나 시끌벅적한 캐주얼한 저녁에 다녀왔고 (우린 8시 전에 애를 재워야 하는 관계로 간단하게 식사 전에 먹은 æbleskiver만 먹고 왔다. 우리네 호두과자에서 호두속을 뺀 빵같은 거라고 할까? 아니면 팬케이크를 그런 모양으로 구웠다고 해야하려나? 옛날엔 사과를 속에 넣었어서 æbleskiver라고 했다는데 요즘은 아무것도 안넣고, 베리류 젬과 파우더설탕을 뿌려 먹는다.) 대학원 친구들 파티를 포함해 이것저것 다녀왔으니 네트워크 넓은 사람은 정말 정신없이 바쁘다. 한국사람들 연말 연시 바쁜 것과 다를 바 없는 분위기인데 서로 오고가는 집 초대가 주를 이룬다 생각하면 다들 그 요리와 집 정리 및 청소까지 얼마나 바쁠 것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OMG…

우린 24일 우리집, 25일 시누이네 별장 (두바이 주재중이라 집은 세를 줘 덴마크에 잠시 돌아올 때면 별장에 머문다), 26일 둘째 시고모님네 집에서 명절을 치르고 28일 시부모님의 금혼식 파티가 있다. 헉. 24일은 풀코스 요리 준비가 있고, 25일과 26일엔 각자 나눠 맡은 음식만 하면 된다. 25일은 아직 메뉴 결정이 안되었고 (아직도!) 26일엔 잡채를 하기로 했다. 오늘 고기를 양념에 미리 재워뒀으니 26일엔 나머지 일만 하면 된다. 좁디 좁은 우리집 부엌에서는 손님 두 명이면 딱이다. 이번에 큰 팬을 사서 네 명까지 커버 가능은 한데, 이상적인 건 두 명 손님.

재료는 오리가슴살만 빼면 다 샀다. 오늘 간 수퍼마켓 두 군데엔 가슴살이 다 팔린 걸로 봐, 통오리의 오븐요리가 (나중에 있을 오븐 청소로 인해… 기름이 엄청 많은 오리고기) 부담스러운 사람이 꽤나 되는 게 아닌가 추측해본다. 내일 가보고 없으면 냉동고기를 사는 걸로 해야겠다. 지난번 해보니 냉동도 나쁘진 않았으니.

요리는 미리 할 수가 없으니 뭘 할 수 있나 하다가 아몬드 껍질을 까야겠다 싶어서 유튜브를 찾아봤다. 껍질을 미리 깐 아몬드도 파는데, 원래도 비싼 아몬드 가격이 확 뛰길래 그냥 직접 해보기로 했다. 시어머니께서 그게 어렵지 않다고 하셨던 기억이 있어서. 진짜 간단했다. 1분정도 끓는 물에 넣고 끓인 뒤 껍질이 살짝 들뜬 것 같으면 이를 꺼내서 둥근 부분을 잡고 조금 힘을 줘 누르면 아몬드 속살이 뾱 하고 빠져나온다. 이걸 그렇게 비싸게 받다니!

아무튼 오늘까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내일 저녁엔 우유쌀죽을 끓이고 그 다음날엔 요리 세가지. 사실 그렇게 보면 크게 차리는 건 아닌데 그래도 뭔가 나도 즐기면서 요리도 하고 하려다보면 미리 준비할 것도 많고 타임플랜도 잘 해야하니까 은근 마음 한자락에 부담이 된다.

그래도 이 부담이라는 게 내가 잘 하고 싶어서 그런 거고 아무도 시키는 사람도 없으며 (시부모님은 와서 같이 하자고 하시기도 하고 실제 오셔서 같이 도와주실 거다.) 나도 즐겁게 즐긴다는 점에서 한국에서 며느리들이 느낀다는 명절스트레스와는 많이 다른 스트레스다. 다들 손님차림 멋드러지게 해내니까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서 생기는 부담이라고나 할까? 그나마 다행인 건 손님초대도 하면 할 수록 는다는 것.

내일 하루만 더 보내면 창문에 쌓인 선물을 트리 아래로 내리고 (지금 내리면 하나가 다 뜯어볼 것이기에) 선물을 개봉하며 기뻐하는 하나를 볼 수 있겠구나. 나도 옌스가 올 해 내 선물은 몇달이나 미리 샀다는 데 뭔지 도대체 알 수 없어 궁금하다.

껍질을 벗긴 아몬드와 껍질의 잔해
Julestemning i vores lille lejlighed

15개월의 하나 in Dubai

시어머니의 생신을 두바이 시누네에서 하신다 하여 우리도 이때 아니면 또 언제 두바이에 갈 지 몰라 같이 방문했다. 6시간의 비행동안 하나는 한숨도 자지 않았는데 안그래도 오전 45분 낮잠외엔 자지 않았던 터라 긴장이 엄청 되었다. 다행히 덴마크 시각으로 1시 정도에 큰 무리없이 잠이 들었다. 그렇게 맞이한 15개월의 날. 비행기에서 Hvad er det? (이건 뭐예요?)를 상황에 맞게 두번이나 해서 우리를 놀래켰던 날이다.

두바이는 많이 덥지만 대충 40도 이내라 못견딜 정도는 아니다. 조금 더 지나면 라마단인데다가 더 더워지면 정말 다닐 수도 없다해서 그나마 괜찮을 때 온 건데 잘 온 것 같다. 도시도 깔끔하고 좋더라. 물론 더워서 난 여기서 살라면 그닥 살 고 싶지 않겠지만애가 있어서 어차피 여기저기 많이 다니기도 어려워서 하루 한군데 정도 소화하는 게 전부인데 집에 풀장이 있어 오전 오후엔 여기서 주로 시간을 보내게 될 것 같다. 하나도 덕분에 수영하는 것에 익숙해질 듯.

시어머니 생일 점심으로 아랍의 탑 (burj al arab) 에 있는 캐주얼한 식당에 갔는데 사람이 아주 많지 않아 하나도 사촌들과 많이 돌아다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초등학교 다니는 사촌 세명이 모두 하나를 이뻐하고 잘 놀아줘서 참 좋았다. 금방 사촌들을 좋아해서 가서 안기기도 하던 하나. 이집에 있는 고양이 엘비스를 통해 고양이를 처음 본 하나는 만져 보고 싶은 마음 반, 무서운 마음 반에 가까이 다가가다가 울곤 했다.

시누이네는 시누이 남편이 주재원으로 나와있어서 여기 최소 3년을 살 계획으로 나온 건데, 기름 1리터에 500원 정도밖에 안하고 차값도 다른 나라에 비해 싼 이곳에서 아니면 이렇게 좋은 차를 못탄다고 해서 시누이 남편은 마세라티를, 시누이는 랜드로버를 샀단다. 일생에 나도 이때 아니면 마세라티를 타볼 일 있겠나 싶어서 타봤는데, 엄청난 출력을 가졌긴 한 모양이다. 안에 소재도 엄청 좋고. 아랍의 탑 호텔에서 나올 때 앞에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손을 흔들고 해서 웃음이 터졌다. 모르는 사람이지만 유명한 사람이겠거니 했나보다.

집에 오는 길에 시누이 남편의 직원이 우리 바로 뒤에 멈춰섰다며 신호 정차시에 잠시 나갔다왔다.  그가 차로 돌아온 후 그 직원이 인사한다며 정차중 엔진소리를 세게 내었는데, 돌아보니 페라리였다. 두바이엔 진짜 비싼 차들이 널려있더라. 나름 덴마크 회사 다닌다고 조심스러웠는지 차를 사기 전에 시누이 남편에게 자기 아무 차나 사도 되냐고 묻더란다. 아마 사장이 마세라티를 몰고 있으니 덜 조심스러웠을 것 같다만…

이제 이틀 남았다. 4박 5일이지만 밤에 와서 오전 일찍 가는 여정이라 사실상 4박 3일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하나가 사촌들과 유대관계도 조금 다지고 즐겁게 놀다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남은 날들도 기대가 된다. 비행은 은근 스트레스였지만, 잘 온 듯.

진짜 오랫만에 한국이 아닌 곳으로 여행 온 것 같다. 3년 조금 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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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덴마크를 방문하시고 나서

시간이 정신없이 간다. 어느새 하나가 태어난 지도 50일이 지났다. 왠지 모르게 더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애가 50일이나 되었다는게 놀랍기도 하다. 부모님이 주말에 떠나셨다. 지난 여름, 입덧이 가장 심한 시기를 넘기고 한국을 방문했는데, 내내 불볕더위를 겪으며 에어콘 없는 방에서 밤잠을 설치느라 2주가 마치 두 달 같았다. 부모님이 계셨던 이번 2주는 마치 이틀밖에 안되었던 마냥 꿈같이 느껴진다. 애가 있으니 어디 나갔다오는 것만으로 하루가 다 가버리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틈틈히 젖 먹이고 기저귀 갈다보면 뭘 했는지도 모르게 하루가 후딱 가버리니까.

마지막 이틀을 남기고 약한 감기에 걸리고 애한테 감기가 옮은 건 아닌가 불안한 상황에 애 데리고 공항에 나가는 건 무리일 것 같아 집에서 작별을 했다. 옌스가 부모님을 무사히 공항에 모셔다 드리고 안에 들어가시는 것까지 배웅하고 왔다하니 마음이 놓였다. 지난 부활절 때 한참 날다가 헬싱키로 회항한 것과 같은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기만을 바랬는데 짐 하나가 도착하지 않은 것만 빼고는 무사히 도착하셨단다. 몰랐는데 듣고 보니 요즘 핀에어가 파업이 잦단다. 잘 도착하신 게 참 다행이다.

집에 하나와 혼자 있으니 이렇게 앉아서 글을 쓸 짬이 생겼다. 부모님이 계신 기간에도 물론 시간은 있었지만 그 짧은 기간 뭔가 진득히 앉아서 다른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이 계신 2주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나는 진짜 웃음을 보여주었고, 손발을 가누는 모양새도 많이 바뀌었다. 무게도 많이 늘고 키도 커졌으며, 옷과 기저귀 사이즈도 바뀌었다. 용쓰기는 여전하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줄었다. 성대에서 나는 소리가 아닌 이상한 소리만 내더니 이제는 자기의 목소리를 내며 옹알이를 한다. 눈을 잘 맞추고 움직이는 사물과 얼굴에 반응하며 마치 대화라도 하는 양 눈을 보고 하는 말에 뭐라뭐라 옹알이를 한다.

옌스는 부모님과 매일 저녁 한국어로 대화를 하고 공부를 했다. 아빠는 나보다도 인내심이 뛰어나 참으로 장시간 옌스의 한국어 동사변형 연습 상대가 되어주셨다. 2년동안 혼자 공부를 하며 느릿느릿 진도가 나가는 듯 하더니 그동안 차근차근 쌓아온 문법에 최근 늘려가는 어휘가 결합하니 말이 트이는 듯 하다. 아직까지 복잡한 문형은 구사하지 못하지만 모든 문장을 단문으로 끊어 이야기해주면 자기가 아는 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를 결합해 깜짝 놀랄 만큼 많은 문장을 구사한다. 또한 천천히 이야기하면 많은 것을 이해하고. 국제결혼을 하면 영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가족, 친척, 친구와의 의사소통에서 불편함이 생겨 아쉬운 경우가 생기는데, 이를 극복하려는 옌스가 정말 대견하다. 한국어 공부를 취미라고 여기는 그가 어찌나 훌륭하다는 생각이 드는지. 이번 가을 두달간 한국가서 생활을 할텐데 그 때 한국어 실력이 일취월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언어공부는 본인의 열정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번 방문기간 중 시부모님과 부모님이 만나신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웨딩 디너때 처음 만나서 긴 이야기 나누지 못하셨던 양가 부모님이 어제 오덴세 가시는 길에 들르셔서 커피를 한 잔 하고 가셨다. 뭘 이야기하셨는지 기억이 잘 안난다.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셔서 그런가 보다. 옌스 한국어 이야기, 시누이네가 두바이로 발령나 이주한 이야기 등만이 기억난다. 한국어와 덴마크어와 영어가 버무러진 복잡한 시간이었지만 참 자연스럽고 좋았다.

한동안 엄마가 살림을 도맡아 해주셔서 내가 한 것이라곤 두끼 저녁 차려드린 것, 화장실 청소 한 번이 전부이다. 애 먹이고 기저귀 갈아주고 그런 것만 하니 정말 편하더라. 그런 편안함에 길들여지는 것이 두려울만큼. 그러나 또 다시 하면 하게 되어 있는 것이니. 그리고 엄마표 식사를 매일 했더니 살도 살짝 붙어서 이제는 다시 자제하며 먹어야 할 형편이다. 흠흠.

한동안 부모님을 못보는 것이 아쉽지만 그래도 육개월 후엔 두달이나 같이 지낼테니 너무 상심하지 말아야지. 그때면 하나도 엄청 커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교류도 가능할테지. 그때까지 시간이 후딱 갈 거라는 생각이다. 가기 전 보른홀름에도 한 번 다녀오고, 여름 휴가도 보내고 하면 정말 눈깜짝할 새에 가버리겠지. 하나의 성장모습을 잘 새겨두어야겠다. 다들 하는 이야기처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순간일테니

출산 후 첫 공식 외출

동네 산책이나 병원 방문 등을 제외하고 제대로 된 외출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목적이 있는 외출 말이다. 남편과 매주 하던 주말 커피데이트가 그리웠다. 수퍼에 장보러가거나 산책을 겸해 남편 안경 맞추는 거 디자인 같이 보러 나가고, 커피 한잔 테이크아웃해 돌아온 것 외엔 제대로 나가서 일반적인 활동을 해본지가 보름이 되었더니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병원 외출과 동네 산책으로 외출 준비는 해본 적이 있기에 한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이런 외출은 몰링이 최고라는 결론을 내리고 몇 개 없는 몰 중 어디로 갈 지 선택을 했다. Fisketorvet는 S tog로 한번에 가지만 내려서 플랫폼이 지상에 있는데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리위로 올라가 좁고 긴 인도를 유모차를 밀며 걸어야 한다는 게 영 불편하게 느껴져서 제외. Field’s는 메트로가 붐비는 쪽 방면으로 오래 가야돼서 제외. S tog에서 메트로로 한번 갈아타야 하지만 붐비지 않는 방향으로 가는 메트로인데다가 환승시 지상으로 나올 일 없이 쉽게 갈 수 있는 Frederiksberg Centret로 가기로 했다. 항상 상대적으로 덜 붐비고 괜찮은 샵들이 적당히 분포되어 있는 이 곳이 그나마 애 데리고 가기에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가서 한 것이라고는 스타벅스에 앉아 커피 한잔 하고 하나 먹을 비타민 D과 손톱깎이, 기타 옌스가 필요한 것을 산 것 뿐이다. 약간의 윈도우쇼핑과 함께. 그렇지만 그냥 그런 게 필요했다. 그리고 그 첫번째 시도는 옌스가 있을 때 하는 것이 조금 더 수월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미 2주간의 출산휴가를 썼기에 옌스는 2주 후면 회사로 돌아가야 하고 말이다.

수유 한 번 하고 기저귀 한 번 갈아주는 정도였으니 크게 어렵진 않았지만, 커피마시는 때와 집으로 돌아오는 열차 길을 제외하곤 내내 안아주어야 해서 (우는 탓에) 팔이 조금 힘들었다. 그래도 결론적으로는 성공적인 외출이었어서 주말 커피데이트는 우리와 하나의 컨디션이 허락하는 한 다시 시작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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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외출 인증샷. 아직 화장까지 할 여유는 없었다. 목에는 수유용 커버를 두르고… 

3주~한달 된 아기들의 외출은 봤으나 우리도 2주 갓넘은 아기의 외출은 본 바가 없으니 여기에서도 아주 흔한 건 아닌 모양이다. 몰에 애를 데리고 이 시기에 나오는 것이. 물론 여기 아기들은 1주일만 넘어도 다 밖에서 낮잠을 재우니 외출 자체가 드문 건 아니지만, 이런 몰 산책 말이다. 좀 오래 집에 박혀있었더니 생각보다 답답했던 모양이다. 다녀오고 나니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은 걸 보니.

하나가 태어나고 나서 삶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내 성격의 단점도 나오고 반성하게도 되고. 옌스가 집안일에 있어 나보다 서툰데, 좀 더 꼼꼼하거나 빠릿하게 일을 해주지 못하는 것으로 조금 더 못해주나 하는 마음에 짜증이 났다. 생각해보니 사실 일을 그렇게 꼭 잘 해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집을 내내 깔끔하게 유지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내 페이스대로 해주지 않는 옌스에게 짜증을 내는 것은 진짜 중요한 것, 즉 우리 관계와 우리 삶을 간과하고 별 것 아닌 것에 집중하는 격이 아니던가. 갑자기 옌스가 내 로맨틱한 대상인 남편에서 내 아이의 아빠로 변하면서 관계의 축과 동력이 다 바뀌고 옌스에 대한 마음도 많이 바뀌었다. 진짜 가족이라는 강력한 유대감 같은 것이랄까? 그 전에도 이미 그렇다고 느끼고 있었다 생각했지만, 완전히 다른 새로운 차원의 그것이다.

외출을 하고 보니 그전보다 아기와 함께 있는 가족이 그렇게 눈에 많이 들어오더라. 또한 커플이 단 둘이 온 경우를 보니 우리가 그랬듯이 눈과 몸짓에서 로맨틱한 사랑이 묻어나오는 게 눈에 띄던데, 우리도 그런 로맨틱함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족이라는 생각으로 그런 것들을 놓치지 않도록 말이다.

 

2016년 크리스마스 가족모임 후기

일년에 한 번, 두 분의 시고모님 중 한 분의 댁에서 돌아가면서 두번째 크리스마스 오찬이 열린다. 덴마크에서는 25일과 26일을 각각 첫번째 크리스마스와 두번째 크리스마스라고 부르고, 첫번째 크리스마스 오찬과 만찬은 24일 이브에 하고, 두번째 크리스마스 오찬은 26일에 한다. 올 해는 Faxe Ladeplads의 첫째 고모님 댁에서 하는 거였는데, 막판에 고모님 손목이 부러지면서 작년과 마찬가지로 Roskilde에서 하게 되었다.

26일 저녁에 태풍이 예보되어, 페리를 타고 돌아가셔야 하는 시부모님은 참석을 못하시게 되었고, 따라서 우리도 열차를 타고 움직여야 되었다. 이번 오찬을 호스트였던 도리스 고모님과 크눌 고모부님은 칠십년대 히피의 삶을 사셨다는데 사실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그냥 봐서는 점잖은 보통의 어른들인데 히피셨다니. 옌스 왈 고모님네 서가에 히피의 삶에 대한 책도 꽂혀있다고 했다. 언젠가 두분의 소시적 사진을 보고싶다.

두분은 초반에 나와 별로 말을 섞지 않으셨다. 내가 마음에 안드시거나 영어가 편치 않으시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란 생각을 했으나, 그게 후자의 이유였음을 알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내가 덴마크어를 더듬거리며 하기 시작하자 조금씩 말을 걸기 시작하셨고, 어느 타이밍부터는 내가 영어로 말하더라도 덴마크어로 답을 하셨다. 그리고 크눌고모부님은 특히나 내 덴마크어의 변천사에 유독 관심을 많이 보이고 표현하셨다.

이 날도 나를 보자마자 몇마디 섞으시더니, 이제 정말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거의 없다하시며 놀라움을 표하셨다. 더이상 다른 가족들도 나를 위해 말을 천천히하거나 영어로 말하는 수고로움을 피해도 되게되니, 나 또한 부담스러움이 사라졌다. 다른 것보다도 이제 대그룹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포함될 수 있고, 대부분의 주제를 자연스럽게 다루고 이해하게 되어서, 소외감이나 지루함이 없어졌다. 꼬맹이들의 말도 알아듣고 그들과의 친밀도도 높아져서 그들이 나와도 놀기시작하고, 내가 준비한 명절 음식들도 항상 완판되니 소속감이 더 커진다고 할까?

올해는 새우를 다져 약간의 당근과 양파를 넣어 뭉쳐만든 새우전을 준비해갔는데, 여기 음식 중 피스크프리카델라라는 생전요리와 유사한점이 많아서 그런지 생소함 없이 사람들이 smørrebrød의 토핑으로 얹어먹더라. 한국에서도 애들이 새우전 좋아하는 것처럼 여기 애들도 좋아하더라.

각자 음식 한가지씩 또는 디저트나 음료 등을 분담해서 준비하고 나눠먹는 명절은 꽤나 유쾌하다. 집에 오면 하루가 다 가 피곤하기도 하지만, 자주 돌아오는 명절도 아니고 일년에 한 번 뿐이니 즐겁게 준비할 수 있다. 내년엔 하나가 나오니 또 느낌이 완전히 다르겠지. 돌 가까이 되는 타이밍이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정신없게 하겠지.

관계는 장담그듯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옌스의 3주간의 휴가가 거의 끝나간다. 나는 한 주 더 길게 썼으니 딱 한달이다. 4주간 정말 내 생애에 없을만큼 잉여로운 생활을 했다. 여행 다니며 먹고 쉬고 공부나 어떤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한달. 입덧 때문에 뭔가 열정적으로 할 여건은 안되기도 했고, 입덧과 함께 찾아온 피로로 하루에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방학이 때맞춰 찾아와준 것은 정말 축복이었다고 할 수 밖에.

덴마크에서는 결혼을 해도 시부모님을 어머니, 아버지로 부르지 않는다. 그냥 이름을 부르는 것이 전부. 30년을 한국에서 살아 형성된 시선으로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하니 적응하기 어려운 것들이 몇가지 있는데, 시부모님을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다. 나는 내 문화를 설명하고 엄마, 아빠에 해당하는 mor, far로 호칭을 하기로 했다. 옌스는 처음엔 이상할 거라고 하더니, 막상 시부모님도 정말 좋아하시고, 나와 그분들이 살갑게 지내는 것을 참으로 좋아한다.

부담스러우리만치 잘해주시는 시부모님임에도 나에게 시부모님이라는 존재는 나만의 경험 없이도 그냥 당연히 어려운 존재였기에 항상 행동이 조심스러웠었다. 오덴세에 사시다 보언홀름으로 이사가신 분들이라 거기서 가족이 모이긴 어려워 주로 시누이네 집에서 모이는데, 거기서도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게 좋은지 몰라 최대한 편하게 지내고 오고자 노력했다. 예를 들면 점심, 저녁을 먹는 모임의 경우, 식사가 끝나고 정리를 얼만큼 돕는게 좋은 건지가 매우 애매했다. 손님이 너무 거드는 게 실례가 될 수도 있기도 하고, 또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하자니 애매하고, 부엌도 너무 많은 사람이 있으니 오히려 동선만 복잡해지고. 시댁 가서도 좀 돕자니 이것 저것 하지 말라 하시고, 아무것도 안하자니 마음이 불편하고. 옌스는 그냥 편히 쉬라는데 한국인인 내가 그렇게 하기엔 내 살아온 방식이 그렇지 않아 마음 한구석 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 모든 것은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린 것이 아니었다 싶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사람들이 같은 공간을 공유하다보면 적당히 서로 겹치는 방법을 깨닫게 되고 익숙해지는데, 시부모님이나 나도 그런 것이었다.

시부모님네 별장에 가서 3박을 하고 돌아왔는데, 주시는 음식을 적당히 거절하기 (이것 저것 권하시면 세번이상 거절이 어려워 적당히 먹었었는데, 옌스가 장기적으로 보면 사전에 거절하는 법을 잘 배워야한다며 거절 잘 못하는 나를 교육시킨 바 있다.), 우리가 먹은 것들 설겆이 하고 정리하기, 시부모님 생활습관 파악하고 그를 존중하기 (우리 집보다 깨끗하게 생활하셔서 그거 맞추려면 조금 더 신경 써야한다.), 그 밖에는 그냥 내 가족들 대하듯이 편하게 생활하기 등을 잘 실천하고 왔다.

입덧이 심해서 먹을 수 있는 거 제약이 많으니 알아서 해먹을 거니 내 거는 신경 쓰지 말라고 옌스가 미리 전화하는 것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이것 저것 내가 먹을 수 있는게 뭐 있을지, 아무것도 요리해주실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많이 물어보셨다. 첫날은 다 거절하지 못해 조금 먹다가 결국 토하고나서는 어려워도 아니다 싶은 것은 다 못먹겠다고 말씀드렸고, 한번 그렇게 하고 나니 거절이 쉬워졌다. 샤워하고 나서 샤워부스 건조시키는 일도 그렇고, 설거지 하는 일도 그렇고, 돕겠다고 여쭤보는 거 없이 바로 하겠다고 나서니 잠깐 말리시다가 그냥 놔두시더라. 결국 적극성의 문제였던 것도 있고, 시부모님도 나를 완전히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전까진 손님같은 생각도 드셨기에 그랬었나 싶다. 내가 편해지니 시부모님도 나를 더 편하게 대해주시고 모든 것이 조금씩 더 자연스러워진다.

결론적으로 보면, 가족처럼 되기까지 한 일년은 걸리는 거 같다. 정말 장담그는 것처럼 관계도 시간이 걸리는 것. 물론 임신하면서 관계의 역학도 조금 더 새로운 형태로 바뀌는 것도 있었던 것 같고. 일종의 계기같은게 아닌가 싶다. 우리도 내년에 애 낳고 한국가서 한달정도 (나는 두달정도…) 우리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지내다보면 옌스와 우리 부모님 사이도 조금 더 편해지고 가족같아지겠지.

입덧이라는 미명하에 내가 좋은 엄마는 못되고 있는 것 같지만 (비타민 챙겨먹는거나 등등…) 이제 좀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아마 임신초기에 나처럼 막지내는 엄마도 별로 없을 듯. 이제 배도 – 나만 알 정도지만 – 나오기 시작하고, 진짜 애가 있긴 있나보다. 다음주 초음파를 처음으로 보기전까진 별로 실감이 안날 듯. 손주까지 나오면 또 다시 흐른 시간에 더불어 피가 섞인 손주를 낳은 며느리니 더 가족같이 느껴지겠지. 이제 정확히 30주 남았다. 그 날이 오기까지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임신, 입덧, 덴마크 생활

요며칠 입덧이 심해서 하루에 1~200 그램씩 빠지는 것 같다. 최소한의 먹거리만을 먹고 버티고 있는데, 먹고 토하는 일이 잦아지니까 먹기도 살짝 겁나고 안먹자니 애한테도 좋지는 않을 거 같아서 최소한 먹는 것으로 버티고 있다. 시험은 코앞으로 다가와있는데, 공부도 요며칠 하나도 안하고 놀고 있다. 다행인건 스트레스도 별로 받는게, ‘아, 임신해서 몸이 안좋아서 시험 못치면 어쩔 수 없지.’ 뭐 이런 근거없는 생각 때문이랄까. 그나마 그간 성적을 잘 받아두어서 한두개 좀 못친다고 해도 크게 문제될 것도 없거니와 하나는 내가 쓴 페이퍼를 근거로 시험보는 것이라 이미 고생해서 낸 것에 대한 평가가 시험의 큰 몫을 좌우하기에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도 있다.

어느덧 임신 7주. 시어머니와 함께 임신 후 처음으로 병원을 다녀왔다. 멀리 Bornholm에 살고 계시지만 내일 새벽같이 시누이와 첫손녀와 함께 셋이서 떠날 2박 3일의 짧은 런던여행을 위해 Holte에 잠깐 와계셨다. 그 전에 병원 갈 때 혼자 가기 그러면 언제고 이야기해달라고 하셨는데, 비행기로 오셔야 하는 시어머니 일부러 오시라 하기 뭣해서 그냥 혼자가려고 했었다. 그러다가, 혹시 말씀은 드려보는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말씀드렸는데 잘 한 일이었다. 마침 와계시기도 했고 기뻐하시며 같이 가주신다 하셨다.

시어머니와 함께 간 것은 잘한 일이다. 남편 CPR번호도 기억이 안났는데, 시어머니가 기억하고 계셨고 (그런게 필요할 줄이야), 남편 가족 병력 등에 대해서도 문진을 했는데 그 또한 시어머니가 답변해주실 수 있었다. 쌍둥이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우리 가족에는 그런 이력이 전혀 없다 했더니, 시어머니가 자기네에는 이력이 있다 하신다.

앞으로의 병원 일정은 12~13주 중 다운증후군 검사 1차, 25, 32주에 있을 초음파 검사 및 기타 아이에 대한 상세 검진이 거의 다 인것 같다. 나머지는 나의 출산을 담당할 산파와 만나서 할 일들이 있고, 출산 교육 등이 있는 모양인데, 그건 산파가 나에게 연락을 준다고 하니 그냥 기다리면 될 일이다. 아, 의사가 덴마크의 모든 병원 기록이 다 전산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임신과 관련된 것만큼은 문자 그대로 Paperwork이 아직도 살아있다면서 노란 봉투에 관련 내 임신 정보를 기록해서 넣어주었다. 앞으로 모든 진료시 항상 지참하라며. 이 아날로그식이라니. 모든 정보가 다 전산으로 날아오다가 갑자기 이런 노란봉투를 받아드니 월급봉투라도 받은 듯한 느낌이다.

다음 병원 일정에도 시어머니가 가주신다고 하니 이번엔 그냥 마음의 부담 없이 부탁하련다. 같이 가주시면 기쁘겠다고 말씀드리니 Bornholm에서 날아오신다고. 아. 이 감사함. 이 먼 덴마크에 내 부모와 떨어져살며 한켠으로나마 기댈 시댁이라는 구석이 있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시누이가 시어머니께 엽산 꼭 챙겨먹으라고 알려주라 했다는데, 시누이도 뭔가 참견하는 듯하게 보일까봐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나보다. 🙂 궁금한 거 있으면 다 물어보라는데 사실 뭘 물어봐야할지 잘 모르겠고, 책이나 각국 정부 보건당국에서 제공하는 홈페이지도 워낙 자세하게 정보를 담고 있으니 아무래도 먼저 연락하게는 잘 안된다. 참 좋은 시누이인데도 괜히 폐끼칠까봐 어려운 건 한국인이라 그런걸까?

병원을 나와 같이 커피한잔 (나는 초코우유 한잔)을 함께 하고 장을 본 뒤 각자 방향으로 향했다. 옌스랑 대화해도 쓰는 어휘가 한정되어 있는데, 병원에서 의사를 보거나 시어머니와 대화를 한다거나 할 땐 평소엔 잘 안쓰던 어휘도 쓰게 되서 좋다. 요즘 학원도 쉬다보니 듣기는 되도 뭔가 말은 퇴화하는 느낌이 조금씩 들고 있었는데, 역시 집중력의 문제인 것 같다. 꼭 써야된다는 생각이 없으니 요즘 다시 덴마크어 비중이 줄어 반반 정도 쓰는 거 같다. 복잡한 건 대충 영어로 이야기하고 일상 대화만 덴마크어로 하는? 집에서도 다시금 덴마크어 비중을 늘려봐야할 것 같다. 곧 방학도 하니 더욱…

뭔가 약간 퇴보하나 하는 불안이 드는 와중 하나 위안이 되는 건, 대학원 덴마크 친구가 자기는 지방 방언도 좀 심하면 못알아 듣는데 내가 하는 말은 다 알아듣겠다면서 나에게 억양이 별로 없다고 해준 것이다. 옌스가 너 발음 좋다 이렇게 이야기해줘도 뭔가 그냥 자기 아내니까 격려해주려 하는 이야기로 들리고 덜 객관적으로 들렸는데, 그렇게 이야기해주니 나의 덴마크어 미래가 전도유망하다는 착각을 더 하게 해줬다고나 할까? 흠흠.

시간이 지나면서 덴마크에 친구도 서서히 늘고, 이제 내 피를 나누는 가족도 곧 생기고 할테니 뭔가 정말 조금씩 뿌리를 내리는 기분이다. 아직도 나에게 내 나라는 한국이지만 이곳도 이제 내 나라가 될 것이니까.

입덧에 제대로 식사 못하는 아내를 위해 생일 아침상으로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을 차려주는 남편도 있고, 병원간다고 멀리서 와주시는 시어머니도 있고, 다 감사하다. 인생의 많은 일들은 그간 걸어온 일과 우연이 만나 얽히면서 생기는 놀라운 기록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을 떠나 일을 해보고 싶다 했던 아주 초등학교 3학년짜리의 꿈은 내 직장 선택에 있어서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그를 통해 이곳에 와있었고, 그간 잡다하게 해왔던 취미와 한국에선 드세다고 들어왔던 나의 적극적 성격은 옌스가 나에게 관심을 갖게한 동력이 되었다. 많은 연애 실패담은 사람을 볼 수 있는 눈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뭔지를 깨닫게 해주었고, 결혼생활은 어때야 한다는 가치관을 심어주게 되었다. 그리하여 만난 그는 나와 결혼과 인생관이 놀랍도록 흡사하게 닮아있었으며, 또한 다른 부분이 있어 서로 배우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부분이 있다. 우린 스스로의 자유를 갈망하면서 같이 함께 하고 싶은 욕구를 동시에 갖고 있기에 서로 잘 이해해줄 수 있고 지지해줄 수 있다. 애가 생겨서 인생의 많은 변화가 생기고 힘든 순간이 오더라도 잘 헤쳐갈 수 있다는 믿음과 신뢰가 있다. 일부러 상처를 주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 성격덕분에 문제를 차분히 잘 해결해나갈 수 있으니까.

정말 애를 가져도 좋겠다고 확신이 선 순간 이렇게 아이가 찾아와준 점 정말 고맙다. 앞으로 남은 기간 별 문제없이 건강하게 커주고 태어나주기만을 바랄뿐이다.

덴마크 명절 단상

덴마크에 와서 보니 가족 모임이 한국에서보다 훨씬 잦다. 그리고 모였다 하면 밖에서 외식하는 거 없이 대부분 집에서 모여 식사를 하고, 점심, 저녁까지 두끼는 기본이다. 모이는 장소는 자녀의 집에 처가, 시가 식구가 함께 모이는 경우부터 처가나 시가로 때에 따라 바꿔가며 방문한다. 딱히 정해져있는 건 없다. 음식도 나눠서 해가고 뒷정리도 다 같이 한다. 중요한 차이점은 남녀 모두 일을 한다는 점이다. 아니, 오히려 남자가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최소한 우리 시댁은 그렇다.
 
손님을 집에서 치르는 일이 잦은데, 서로 오고가며 그리 하다보니 조금씩 손님맞이가 익숙해지고 좋아진다. 뒤늦게 치우는 일이 조금 번거롭긴 하지만, 부부가 같이 정리하면서 그날의 저녁에 대해 담소를 나누는 일도 즐거움의 일부다.
 
불만은 한쪽이 일을 부담할 때 생긴다. 덴마크의 이런 남녀 평등이 찾아온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여성의 참정권 확보가 불과 100년전이고, 1950년대를 전후로 해서야 여성의 경제참여 비중이 늘어나고 여성의 역할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 학생운동을 시점으로 한 변화가 지금의 사회 모습의 초석이 되었으니 꽤나 최근의 일이다.
 
우리가 덴마크에 비해 민주화나 근대에 들어선 발전의 시작이 늦기는 했으나, 그 시간의 격차가 아주 큰 것은 아니다. 아직도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양성간의 차별은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전통의 이름으로 이러한 차별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도 한다. 
대가족간의 모임이 예전같지 않고 갈수록 핵가족 되어가는 현상이 아쉽다. 현대화가 교류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텐데. 우리 명절 문화가 변화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아주 많이 부족하다. 이제 막 첫 발걸음을 떼는 수준이라 생각한다. 이제는 남자들이 조금 돕는 정도가 아니라 획기적으로 모두가 함께 일하고 먹고 즐기는 기회가 될 때가 충분히 되었다. 불만이 사라지면 교류에서 찾을 수 있는 과실이 눈에 보인다.
집안일을 추가로 더 하더라도 이곳의 명절은 즐거운 날이 되었다. 서로 위해주는 가족들을 만나게 되고, 나 또한 그 일원이 된다는 것, 그리고 미래에 내 아이들에게도 더 큰 가족을 안겨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피로 섞인 내 가족이 아니기에 그와 같을 수 없다하더라도 그건 당연하다. 내가 그들에게 가족과 똑같은 애정을 부어주기엔 우리가 아는 시간이 아직 짧고 아직 더 가까워질 거리가 많이 남았기에 말이다.
물리적인 거리와 언어 문제 등으로 인해 한국의 내 가족과 옌스가 내가 이곳에서 동화되는 만큼 가까워지지 못함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문제일 뿐, 양쪽의 문화를 모두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더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멀지 않은 시기에 나도 우리의 2세를 가질 수 있고, 그 2세에게 두개의 다른 문화와 가족속에서 자랄 수 있게 해주길 바래본다.

이젠 정말 가족이다.

옌스네 조카 생일이 있어서 생일파티에 갔다. 작년부터 조카들 생일에 두번씩 갔으니 생일로는 6번 갔고, 기타 이래저래 간것까지 여동생네 집에 열번 이상은 간 것 같다. 항상 함박웃음을 띄는 가족들은 처음부터 나를 따스하게 맞아주었지만, 10명 이상이 모이면 간간히 대화가 덴마크어로 전환될 때도 있었고, 그럴때면 옌스만 바라보고 있기도 애매하고 뻘쭘하지 않은 듯 뻘쭘하게 있어야 했다. 꼭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만이 아니라 그들이 아무리 따뜻하게 대해줘도 친해지는데 걸리는 물리적 시간이 걸려서였을 것이다.

갈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편해지고 있음을 느끼긴 했지만, 오늘 처음으로 우리 가족 모임에 간것만큼 편하게 있다 왔다. 결혼을 통해 옌스의 여자친구가 아닌 아내가 되어서 그런지, 이모님네 가족과 옌스 사돈댁 어르신들 모두 그전보다 훨씬 편하게 대해주셨고, 조카들도 더이상 나를 어려워하지 않는다. 아직 모든 대화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간혹 상황을 놓치면 옌스에게 조금씩만 도움을 받으면 되니, 대화에서 소외되는 기분이 없어졌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긴장감도, 상황에 익숙해지고 나니 다 없어진 모양이다. 만날 때 이름을 꼭 불러주고, 대화 중간중간 이름을 불러가며 대화한다던가, 서로 안아주며 인사하는 방식, 어떤 타이밍에 뭘 하는지 등 소소한 것 같지만 모르면 약간 주춤하게 되는 것들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몸에 익었다.

내 마음안의 변화도 크게 한 몫을 한 것이리라. 예전엔 옌스의 여자친구의 입장에서 간 것이라면, 이제는 진짜 가족의 테두리 안에 들어선 입장으로 갔기에 보다 자연스러워져서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었을 게다.

무엇때문이든간에 덴마크에서 내가 잘 정착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해주는 가족들의 마음이 느껴져서 시댁에 놀러가는 일이 참 즐겁다. 시누이네 집에는 맨날 초대만 받아 놀러가서 미안한과 고마운 마음이 크다. 웨딩 디너로 드디어 그들을 우리가 초대하는 일이 생겨 마음이 조금이나마 놓인다.

우리 부모님이 멀리 사시기에 시댁과 친정간의 교류가 잦기 어렵다는 점은 시누이네 가족 행사때 자주 만나시는 그분들을 볼 때마다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이번 웨딩 디너로 만나서 인사도 하시고, 부모님이 덴마크에 놀러오실때나, 내후년 쯤 시부모님이 한국가실 때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아쉬운대로 자리를 마련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