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누의 50살 생일파티

시누이 마흔살 생일파티에 초대받았던 게 엊그제 같았는데, 이번엔 쉰살 생일파티에 다녀왔다. 호텔에서 뻑적지근한 파티를 했는데,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듬뿍 받고 사랑을 받는 모습을 받는게 정말 좋아보였다. 사람들이 정성스레 준비한 스피치, 시누이에 맞춰 개사한 노래를 준비한 친구들, 친구들이 준비한 공연 등은 그들이 갖고 온 선물보다도 훨씬 감동적이었을 것이다. 시누네는 파티여는 것을 좋아하고, 멋진 파티를 기획할 줄 알고, 진정 파티를 즐긴다.

시누네와 우리는 성향이 여러모로 다른데, 옌스나 나는 큰 파티 이런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가서 적당히 즐겁게 시간을 잘 보낼 수는 있지만, 가기 전 약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오자고 마음을 다잡고 가야하고, 마음 편하게 붙들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 필요하다. 다행히 파트너를 찢어놓는 자리배치를 하지 않은 덕에 처음부터 끝까지 옌스와 함께 있을 수 있었다. 내가 아이를 맡기기 어렵다는 것을 핑계로 집에 남으면 어떻겠냐 했더니, 옌스도 나같은 성향인지라 가급적이면 나랑 가고 싶다고 하더라. 누가 말을 걸면 대화를 하는 게 어렵지 않지만, 직접 가서 먼저 말을 걸고 싶진 않다. 늦게 가면 내가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해야하니, 가급적 일찍 가서 남들이 인사를 오게 하려고 하고 피곤한 면들이 없잖아 있다. 그러니 우리 생일에 우리가 파티를 하고 싶지 않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냥 친구 몇이랑 밥먹고 이야기하면 그게 제일 좋다.

남들 댄스파티 시작할 때 우리는 집에 간다고 인사하고 돌아왔다. 집에 오니 열두시가 약간 넘은 시간. 와인 두잔. 취기가 느껴지지 않는 적절한 수준. 옆에 앉은 사람과 즐겁게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다행히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왔으며, 덕분에 기가 확 빨려 진이 다 빠진 일도 없었다. 다음달에 시누네 막네의 견진성사 때 파티 한번 하면 오랫동안 이런 파티는 없을텐데, 나도 파티에 쓸 수 있는 에너지는 이미 다 써버린 것 같다.

어른들만 초대받은 파티라 하나는 친구네 집에 가서 처음으로 밤을 보내고 돌아왔다. 이제 애가 많이 커서 밤에 깨지도 않거니와, 깨도 다시 혼자서 조용히 잠에 들 수 있는 나이라 마음 편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중간에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은 있었는데,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아이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지만, 자기도 파티에 갔었으면 좋았겠다고 한다. 워낙 늦은 시간이라 하나를 데리고 갈 수 없기도 했거니와 아이에게 지루했을 시간이라고 했지만, 자기는 지루해도 좋으니 엄마랑 같이 있고 싶다고 한다. 아이고… 이렇게 귀한 녀석.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 아이

한국어에 대한 자기 평가가 야박한 아이. 아무래도 다른 건 자기가 노력하는 만큼 금방 느는데 반해 한국어는 그렇지 않아 유독 그런 것 같다. 딱히 평소에 자기 평가가 야박한 아이는 아닐지언데, 한국어에 대해서만큼은 그런 것이니, 나에게 말을 안해서 그렇지 나름 자기 마음 속에 한국어와 관련된 힘듦이 있는 것 같다.

한글학교에서 이번학기에 윗반으로 아이를 올려보냈다. 처음 시작한 방울새반은 말도 잘 못하고 한글도 못읽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덴마크어로 강의를 하는 반인데, 거기서 1년 반 정도 수업을 듣다가 이번에는 한글을 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종달새반으로 올라갔다. 한글을 뗐다는 건 능숙하게 읽는다는 것이 아니라, 한글자 한글자 씨름을 하며 실수도 하면서 읽을 수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글을 떼면서부터는 한국어 습득이 다른 양상을 띌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을 가진다. 이미 모국어로서의 한국어 습득시기는 놓친 아이이기에 외국어로서 한국어 습득을 해야하는데, 글을 통해서 문장을 뜯어보고 자신의 모국어와 비교해가며 이해를 해볼 수 있게 된다.

아이가 파괴된 형태의 문장을 구성해서라도 나에게 한국말을 하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말을 잘하고 싶다고 이야기도 하고. 나의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인 것 같다. 아이에게 한국말을 잘 가르치지 못한 것은 내가 덴마크어를 잘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어서기도 해서, 아이가 나에게 덴마크어로 대답을 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서서히 나도 한국어를 놓아버린 탓이다. 나를 앞에 두어서 그랬는데, 아이가 하고 싶어하는 것과 내가 생각하기에 아이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겹치는 이 순간을 놓쳐버리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

아이의 양육에 내 품이 들어가는게 줄어들면서 나의 시간을 충분히 가졌는데, 아이에게 시간을 더 할애해야할 시기가 온 것 같다. 학습이나 놀이 등 에 있어서 짧은 시간이나마 에너지를 할애해 아이가 원하는 것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간 말이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이. 어쩌면 이런 아이가 내 세상으로 들어왔누…

덴마크 사람들 / 수다쟁이 츤데레

그린랜드 사람들이 덴마크로 넘어와 살게되면 받게되는 오해가 말수가 적다는 거란다. 그린랜드 래퍼가 그린란드의 문화를 자랑스러워하는 그런 노래를 발표했다며 라디오에서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한 말이다. (스톡홀름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처럼 그린랜드사람들은 덴마크 문화가 우월하다고 느끼며 그린랜드의 뿌리를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싫어하거나 하는 복잡한 심경을 갖는 사람들이 많기에 그린랜드의 문화를 자랑스러워하는 노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덴마크 사람들은 대화에 참여하는 대상이 말을 완전히 끝낸게 아닌데, 마침표와 다음 문장 사이에 빠르게 치고들어와서 말을 하는데, 상대의 말이 다 끝낼때까지 기다리는게 미덕인 그린랜드 사람들은 자신 이야기를 할 차례를 기다리다 주제가 바뀌어서 대화에서 조용하게 있는 경우가 많아 생긴 오해란다.

그러고 보면 그게 정말 맞다. 길에서 만나는 덴마크인들 참 시크한 것 같고 별로 말 많이 안할 것 같은데, 가까워지면 어찌나 수다스럽고 말하는 걸 그렇게 좋아하는지. 정말 별의별 주제로 대화를 다 한다. 그리고 대화에 낄려면 중간에 잘 치고 들어가야한다. 덴마크사람들 전반적으로 말이 빨라서 직장생활 초반 그게 참 힘들었다. 주제를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중간에 잘 치고 빠르게 비집어 들어가려면 내가 할말에 대한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걸 포기하고 듣는데에 집중하거나 아예 그냥 혼자만의 버블속에서 공상을 하기도 했더랬다. 물론 중간에 나를 참여시키기 위한 질문이라도 던져지면, 나는 맥락을 다 잘라먹고 있었기에 “뭐라고? 나 앞에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못들었는데?”라고 대답을 해야했다.

물론 개인차는 있다. 그중 유독 대화를 지배하며 너무 말이 많은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조용한 사람도 있다. 조용한 경우는 순발력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중간에 치고들어오는게 부담스러운 사람들.

아이가 있는 사람들은 주중에 대부분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다. 일 끝나고 회식같은 거 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친구와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고. 한국회사생활처럼 끝나고 한잔, 이런건 안하고, 팀빌딩 일년에 몇번 할 때 식사하며 술 한두잔 곁들이는 것이나, 프라이데이바 (금요일에 회사 끝나는 시간 쯤 회사 안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 에서 잠깐 시간 보내는게 대부분이다. 그래도 회사내 사회생활이 부족하지 않은 것은 짧은 점심시간, 탕비실에서의 커피챗 등으로 정말 많은 대화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일상, 가족, 취미, 집에서 진행중인 프로젝트, 관심사, 정치 등 정말 다양하다. (덴마크 사회의 정치적 스펙트럼은 우리나라처럼 양극단의 폭이 넓지 않기도 하고, 아무래도 academic한 사람들을 채용하는 중앙정부기관 사람들의 정치적 스펙트럼은 그중에서도 그닥 넓게 퍼져있지 않아서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는게 그닥 위험하지 않다.) 서로 배우자, 아이들, 반려동물 이름도 다 알고, 집에서 뭐하는지 등등 서로 잘 알고 지낸다. 정말이지 숟가락, 젓가락 개수마저 다 안다고 할 것 같다.

한국에서 살 때는 덴마크인들의 이런 직장사회생활 문화를 상상할 수 없었는데. 아니, 덴마크 직장생활을 하기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는데, 정말 다르다. 직장 동료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누가 이야기했던가? 정말 긴 시간을 함께 보내며 서로를 속속들이 알게 되고, 업무 시간 이외에도 보고 연락하게 되면 그게 친구지. 시간이 걸리는 것 뿐이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 오히려 더 인정이 느껴지는 덴마크 생활 덕에 이방인으로서의 삶도 그닥 팍팍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 같다.

아이들을 향한 인종차별

옌스의 누이 생일파티에 나는 아파서 참석을 못했는데, 거기에 다녀온 그가 거기서 듣고 온 인종차별이야기를 꺼냈다. 여동생 베프의 남편이 한국에서 입양된 덴마크인인데, 딸이 셋이다. 동양적인 느낌이 조금 더 강한 얼굴이지만 양쪽 인종의 특색이 다 드러나게 섞인 아이들로, 학교 생활 잘하고 공부며 운동, 노는 거 할 거 없이 다 참 뛰어나서 애들 건강하고 똑부러지게 잘 키웠다는 생각을 했었다.

파티하면 친구와 가족할거 없이 다 섞어 하는 덴마크인들인지라, 이 커플과 그 아이들을 알게된지도 어느새 십년이 넘었으니 따로 연락하고 가깝게 지낼일은 없다 해도 꾸준히 만나게되고 애들 커가는 모습도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들어왔었다. 그런데 인종차별 경험담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원래도 괜찮게 사는 집이었고, 그런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살던이들이었는데, 돈을 좀 더 많이 벌면서 아주 좋은 동네로 이사를 가 아이들도 학교를 옮기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거기에서 남자애들 몇몇이 아주 노골적이고 수위높은 인종차별적 언사를 하면서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는 학교생활하면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는지를 물었다.

아이들에 대한 인종차별 이야기는 십대 쯤 해서 경험하는 이야기를 가깝게는 아니고 “카거라”식으로 건너건너 들은적만 있다. 나도 인종차별을 경험한 것은 노르웨이 십대들한테 한번정도이고 그 이상은 없다. 편견의 존재를 경험하는 때가 있기는 하지만, 그게 때로는 유리한 편견일 때도 있었고, 아니면 그냥 그게 차별로 이어지지 않는 가벼운 종류의 편견에 그쳤었다. 두드러지지 않으니 얼마나 광범위하게 경험하게 되는 일일지 모르지만,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청소년 사회는 일종의 정글과도 같은 거친 시기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충분히 미루어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행동에 대한 책임의 결과가 어른이 되어서 한 같은 행동에 대한 책임의 결과보다 가볍기 때문에 학교라는 제도안에서, 사회에서 발생하는 일보다 거친 일들이 왕왕 발생하곤 하니까.

하나도 학교에서 방과후학교 시간에 잘 놀다가 괜히 시비를 거는 2학년생에게 배를 걷어차인 적도 있고, 수업시간중에 화장실 간다더니 교실문을 못여는 친구를 도와주려다가 다쳐가지고 온 적도 있었다. 사실은 그 친구가 괜히 주변의 관심끌려고 자기가 문을 잠그고 쇼를 하는 거였는데 그걸 하나가 방해했다며 얼굴을 팍 밀어서 칠판에 머리를 박고 큰 혹이 나버렸던 거다. 주변에 있는 교사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이미 이렇게 어린 나이부터 이런 아이들이 있는데, 아직 옳고 그름에 대한 윤리적 기준이 확고히 내면화되지는 않고 머리와 몸만 큰 청소년 아이들은 더욱 잔인하고 무서운 형태로 다른 아이들을 괴롭힐 수 있는 거다. 한국에 비해 학교 폭력, 따돌림 문제가 덜 심각한 덴마크이지만 어느 곳이나 사람 사는 곳이면 이런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인종차별이 더 큰 문제일지, 이런 학교에서 가해지는 폭력의 수위가 세졌을 때 그게 더 문제일지 사실 잘 모르겠다. 아이가 부모에게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다 자세히 이야기해줄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일 것이고, 그 다음 부모가 학교와 함께 어떻게 대응할지 잘 논의해가는 과정이 두번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여러 유형의 폭력을 당했을 때 마음을 단단히 먹고 다시 회복탄력성을 보일 수 있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이 된다.

어른이 되면 제도의 보호로 인해 오히려 수면으로 드러나지 않는 일들이 학생일 땐 제도가 문제아동들도 보호해야 해서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된다는 게 아이러니하긴 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냥 잘라버린다고 없어지는게 아니라 위치와 형태만 바뀌는 것이니 이를 제도 안에서 해결하려는 노력을 비난할 수 없고, 아무튼 어렵다.

Børnenes sociale liv

Børnene har deres eget sociale liv. Det, at de er små, gør ikke deres problemer i relationer med venner mindre. I dag sagde min datter, Hannah, at hun ville opføre sig irriterende over for sin veninde, som ofte selv virker irriterende. Jeg var ved at sige, at det ikke er en god måde at reagere på, når andre opfører sig sådan, men jeg lod det ligge. Måske får jeg en anden chance for at snakke med hende om det senere – efter hun selv har prøvet det. Om det var sjovt, om det føltes godt, eller om hun alligevel lod være. På det tidspunkt kan jeg tage udgangspunkt i mit lille råd om hendes relationer.

Hannah har en anden veninde, som hun er så glad for. Hun bor tæt på os, og de kan rende ud af døren og lege sammen, når som helst de har lyst. Det gør mig glad, at hun har fundet en så god veninde så tæt på. Men ifølge Hannah vil veninden bestemme, især i skolen, hvornår Hannah må være med i legen, hvem der ellers må deltage, og hvad de skal lege – eller ikke skal lege. Hun kan hurtigt blive jaloux og sige ting, der gør Hannah ked af det. Der er altid to sider af en historie, men jeg tror på Hannah og det, hun fortæller. Hun er en pige, der prøver at opføre sig så pænt som muligt og er meget lydhør over for voksne, regler og autoritet. Hun har integritet – et alt for tungt ord for et barn på otte år, men ikke desto mindre passer det på hende.

Jeg kan godt mærke, at Hannahs veninde er god til at bruge sin sociale magt over for sine venner, for hun ved jo godt, at hun er populær. Hun har en manipulerende tilgang og kan sige noget nedgørende om de ting, hun bliver jaloux på. Hun vil straffe sine venner, hvis de ikke gør, som hun ønsker, og belønne dem ved at være sød, hvis de til gengæld adlyder hende.

Jeg kan sagtens forestille mig, at Hannah på et tidspunkt vil blive ked af det, hvis deres relation begynder at føles toksisk. Jeg kan også forestille mig, at hun alligevel vil forblive veninde med hende. Jeg skal ikke blande mig i, hvem hun bliver venner med, eller hvordan hun danner relationer. Men jeg kan i det mindste give hende råd om, hvordan hun beskytter sit hjerte i sådan en relation – hvis det ender med at blive nødvendigt. Jeg kan også minde hende om, at relationen fra mit perspektiv virker toksisk, så hun selv kan vurdere, hvor tæt et venskab hun ønsker at have.

낯선사람들과의 교류

클라이밍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클라이밍이랑 상관없이 다른 스포츠도 그럴까? 내가 그렇게 느끼는 걸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낄까? 어느 것도 답은 없지만 클라이밍을 하면서 특히 낯선 사람들과의 교류가 늘어났다. 내가 잘 안풀리는 문제를 타인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저런 문제는 도대체 어떻게 접근하나 싶었던 문제를 누군가가 용을 써가면서 하고 있으면 괜히 응원도 해주게 되고, 그러다가 보면 간혹 작은 대화도 하게 되는 듯 낯선 사람과의 교류가 늘어났다.

한국보다 덴마크는 낯선사람과의 인사나눔이 상대적으로 흔한 편이다. 여기도 예전보다 그런 교류가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길에서 눈이 마주치는 사람이 있으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가벼운 미소를 띄어주는 것이 여전히 흔하고, 이제 나도 그에 맞춰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미소를 활짝 띄어줄 수 있는 순발력을 확보했다. 예전엔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그렇게 빠르게 미소를 짓기에 얼굴 근육도 마음처럼 따라주질 않았고, 애초에 그 순간을 잘 예측하지도 못했다면 이제는 그게 익숙하달까? 모든 건 연습이다.

이제 클라이밍짐에 가면 그런 식으로 인사를 나눴던 사람들과 간간히 마주치기도 하고, 그러다보면 대화도 하고 같이 문제도 풀고 하게 된다. 원체 클라이밍이 재미있어서 혼자 가는 것도 상관없긴 했는데, 그런 식으로 낯선사람과의 사회적 교류가 있다보니 곁가지로 새로운 재미를 즐길 수 있게 된다. 깊은 교류가 없이 그냥 취미만 공유하는 낯선사람과의 가벼운 관계는 즐겁다. 가까워지기 위한 대화나 탐색을 위한 대화가 아니라 그냥 나눌 수 있는 주제가 이미 딱 정해진 대화라 마음의 부담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물론 그런 관계가 지속되다보면 또 새로운 친구가 생기게 되기도 하고. 주제 탐색에서 진빠지기도 하고 그러다보면 사람과의 교류가 그리 좋기만 하지는 않은 나라 외향적인 듯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렇게 사회적 요소를 좋아하는 것을 보면 내가 참 외향적인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다양한 깊이의 인간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 이럴 때 보면 참 다행스럽다.

En funktionel krop

En rigtig tynd krop. Det var min drømme krop, da jeg var ung. Min mor sagde, at det hverken er pæn eller sund, men jeg synes ikke, at det passede. Nu er jeg dog helt enig med hende. Jeg synes, det er vigtigt at have en funktionel krop, det vil sige, at kroppen kan give os et sundt liv samt yde det funktioner, som vi gerne vil opnå med vores krop.

Efter jeg er kommet over 40 år plus en fødsel, kunne jeg mærke tydeligt, at alle de små skævheder i kroppen vil udløse smerter ved heftige eller intense brug. Det er på en måde dårligt, fordi det gør ondt, men på en anden måde er det godt, for jeg kan få øje på de skævheder og undersøge, hvor jeg skal arbejde på for at rette op med dem.

Jeg har haft en skæv ryg i lang tid. Dog var det ikke sådant så dårligt. Måske har det hjulpet meget at danse ballet, for det kræver, at vi forlænge vores ryg, som retter ryggen op. Men min skæv ryg er begyndt at udtrykke sig gennem smerter, siden jeg begyndte at intensivere min klatretræning. Sikring af makker kræver at jeg kigger op på loftet i ca. fem minutter, og træningen kræver styrke og udholdenhed, samt maksimal kraft en gang i mellem. Det afslører alle de steder, hvor mine muskler er svækket og kompenserings mekanisme aktiveret. Det er ikke altid dårligt at få nogle belastningsrelaterede smerter i kroppen, for det indikerer, at jeg skal gribe ind med en anden måde at bruge kroppen på.

Fra nu af, allerede siden før, skal jeg bruge min krop på en god måde. Jeg er blevet meget mere opmærksom på kroppens signaler og har lært, hvordan jeg kan eksperimentere med at tilpasse mine bevægelser for at isolere mekanismer forbundet med de pågældende smerter. Men den bevidsthed har jeg lært vigtigheden af kroppens funktionalitet. Samt har jeg lært, at hvor skadeligt det er, når der skabes og udbredes sådan usunde og syge kropsidealer i samfundet.

Jo længere vi lever, jo vigtigere bliver det, at vi kan leve selvstændigt uden at få hjælp af andre ift. mobilitet. Det er direkte forbundet med livskvalitet. Jeg prøver at lære min datter at kende vigtigheden og glæden ved motion og sport og håber, at hun vil fortsætte sådan god en livstil som teenager og voksen.

Kamp mod frygt

Når man klatrer op ad en høj klatrevæg, mens man skal sikre sig undervejs ved at klippe sit reb ind i karabinhager, kommer man en gang i mellem til at tænke på det værst mulige scenarie om fald. Hvad nu hvis jeg bliver flippet rundt og rammer hovedet eller kroppen i væggen eller grebet? Hvad hvis faldet er så voldsomt og hårdt med en pendulbevægelse, at jeg får min ankel eller fod forstuvet?

Præstation ved leadklatring bliver utrolig meget påvirket af mentalitet, hvordan man håndterer frygten, som løbende trænger igennem huden. Frygten opstår typisk lige der, hvor jeg står over for det sidste klip, eller jeg skal lige klippe. Mine håndoverflader bliver våde. De sveder. Åh, nej. Nej. Nej……

Efter de kommentarer, jeg har fået fra mange andre gode klatrere, har jeg prøvet at trække vejret dybere og sige til mig selv, “Det er okay. Min makker har mig. Jeg har øvet mig med at falde. Jeg har det! Jeg kan klare det!”

Der er ikke sket noget særligt hårdt på nær små skader i ankelen i starten af min leadklatreerfaring. Den gang var min makker markant tungere end mig, og han tog mig vist nok hårdt en del gange. Men jeg klatrer nu med andre makkere, som enten er gode til sikring eller ligger i samme vægtklasse, hvilket har løst problemet. Så reelt set behøver jeg ikke at være så bange og skal bare kaste mig ud i klatring, som mine trænere gentagne gange sagde, “I skal klatre til, I falder!”

Bangebuks er jeg stadig. Av, av, av. Efterhånden er jeg alligevel blevet bedre til at håndtere frygten. Det er blot en konstant kamp mod frygten. Frygten er der nok for at beskytte mig. Men den skal ikke tage over. Jeg har det. Det skal jeg bare huske på væggen.

Et kort skriv

I 2025 som mit nytårsforsæt har jeg besluttet mig at skrive hver dag et kort skriv på dansk. Hvad det skal være, har jeg ikke besluttet mig om endnu. Formålet er at få min skriveglæde tilbage, som lige nu er meget aftaget – nærmest forsvundet, samt at få min mentale barrier til at skrive på dansk ned. Her vil jeg gerne prøve at skrive varierende tekster end faglige tekster, som jeg er vant til. Forskellige sætningskonstruktioner vil jeg også gerne prøve dertil. For fokusset ligger i skriveglæden, vil jeg ikke tænke så meget på at skrive 100 pct. grammatisk korrekt. I stedet vil jeg prioritere at skrive et eller andet stykke skriv – i det mindste én sætning – om dagen.

그리움

보름달이 휘영청 뜬 밤, 발레에서 돌아오는 길, 고속도로에서 바라본 보름달과 때마침 스피커에서 흐르는 다소 드라마틱한 음악이 뒤섞이며 갑자기 한국에 계신 부모님이 보고싶었다. 그냥 보고싶은게 아니라 같이 앉아서 시덥지 않은 이야기도 나누고, 엄마가 시키시는 부엌일을 귀찮지만 몸을 일으켜 하는 순간, 아빠도 도우시라며 핀잔도 드리고, 티비에서 재미도 없는 명절특집 프로그램에 깔깔거리는 게스트들의 잡담이 배경음악처럼 깔리고 하는 그런 정말 명절일상. 그런게 그리웠다. 약간의 눈물이 눈동자를 가리려고 하는 것을 애써 다시 욱여넣고 곰곰히 생각을 해봤다. 왜 갑자기 눈물이 나지? 나 정말 잘지내는데.

그리움이 커지면 슬플까봐, 슬프면 잘 지내지 못할까봐, 그리움의 감정이 생길라치면 억누르고 있는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마음의 욕심이라는게 갈증을 하나 채워주면 더이상 같은 걸로 갈증이 채워지지 않고 더 뭔가 큰 것을 얻어야 갈증이 채워지는 것처럼 보고 싶은 것을 보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고, 또 보고 싶고, 만져보고싶고, 더 경험하고 싶어진다. 정말 충분히 봐서 일정 수준이상 만족도가 채워질때까지는 계속 더 원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것을 피하려고 음식도, 사람도, 자연도. 지금 갖고 있는 것에 감사하는 것으로도 부족한데, 또 더 원해? 욕심 아니야? 이런 생각에 스스로를 애써 억누르고 있는 느낌이다.

그립지만 너무 그리워하지 않고, 적당히 그리울 때 그를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균형. 그런 걸 내가 이미 갖고 있다면 한없이 좋으련만, 나는 적당히가 잘 없는 사람이다. 한껏 좋아할 때 흠뻑 빠졌다가 또 멀어졌다가. 어쩌면 그래서 내가 덴마크에 잘 적응했는지도 모르겠다. 덴마크가 좋을 때 언어고 뭐고 한없이 몰아붙여서 그 덕에 내것으로 온전히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일 수도. 하지만 그래서 그리움에 흠뻑 빠진다면 물을 한껏 머금은 스펀지처럼 아주 무겁게 가라앉을 것 같은 두려움이 크다.

너무 깊게 빠지지 말고 아주 잠깐 그리워하자. 덴마크와 한국, 덴마크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것, 한국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것, 모두를 한꺼번에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으니, 지금의 그리움을 잘 받아들이고 소화해 내가 갖고 있는 것을 감사할 수 있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