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향한 인종차별

옌스의 누이 생일파티에 나는 아파서 참석을 못했는데, 거기에 다녀온 그가 거기서 듣고 온 인종차별이야기를 꺼냈다. 여동생 베프의 남편이 한국에서 입양된 덴마크인인데, 딸이 셋이다. 동양적인 느낌이 조금 더 강한 얼굴이지만 양쪽 인종의 특색이 다 드러나게 섞인 아이들로, 학교 생활 잘하고 공부며 운동, 노는 거 할 거 없이 다 참 뛰어나서 애들 건강하고 똑부러지게 잘 키웠다는 생각을 했었다.

파티하면 친구와 가족할거 없이 다 섞어 하는 덴마크인들인지라, 이 커플과 그 아이들을 알게된지도 어느새 십년이 넘었으니 따로 연락하고 가깝게 지낼일은 없다 해도 꾸준히 만나게되고 애들 커가는 모습도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들어왔었다. 그런데 인종차별 경험담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원래도 괜찮게 사는 집이었고, 그런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살던이들이었는데, 돈을 좀 더 많이 벌면서 아주 좋은 동네로 이사를 가 아이들도 학교를 옮기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거기에서 남자애들 몇몇이 아주 노골적이고 수위높은 인종차별적 언사를 하면서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는 학교생활하면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는지를 물었다.

아이들에 대한 인종차별 이야기는 십대 쯤 해서 경험하는 이야기를 가깝게는 아니고 “카거라”식으로 건너건너 들은적만 있다. 나도 인종차별을 경험한 것은 노르웨이 십대들한테 한번정도이고 그 이상은 없다. 편견의 존재를 경험하는 때가 있기는 하지만, 그게 때로는 유리한 편견일 때도 있었고, 아니면 그냥 그게 차별로 이어지지 않는 가벼운 종류의 편견에 그쳤었다. 두드러지지 않으니 얼마나 광범위하게 경험하게 되는 일일지 모르지만,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청소년 사회는 일종의 정글과도 같은 거친 시기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충분히 미루어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행동에 대한 책임의 결과가 어른이 되어서 한 같은 행동에 대한 책임의 결과보다 가볍기 때문에 학교라는 제도안에서, 사회에서 발생하는 일보다 거친 일들이 왕왕 발생하곤 하니까.

하나도 학교에서 방과후학교 시간에 잘 놀다가 괜히 시비를 거는 2학년생에게 배를 걷어차인 적도 있고, 수업시간중에 화장실 간다더니 교실문을 못여는 친구를 도와주려다가 다쳐가지고 온 적도 있었다. 사실은 그 친구가 괜히 주변의 관심끌려고 자기가 문을 잠그고 쇼를 하는 거였는데 그걸 하나가 방해했다며 얼굴을 팍 밀어서 칠판에 머리를 박고 큰 혹이 나버렸던 거다. 주변에 있는 교사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이미 이렇게 어린 나이부터 이런 아이들이 있는데, 아직 옳고 그름에 대한 윤리적 기준이 확고히 내면화되지는 않고 머리와 몸만 큰 청소년 아이들은 더욱 잔인하고 무서운 형태로 다른 아이들을 괴롭힐 수 있는 거다. 한국에 비해 학교 폭력, 따돌림 문제가 덜 심각한 덴마크이지만 어느 곳이나 사람 사는 곳이면 이런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인종차별이 더 큰 문제일지, 이런 학교에서 가해지는 폭력의 수위가 세졌을 때 그게 더 문제일지 사실 잘 모르겠다. 아이가 부모에게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다 자세히 이야기해줄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일 것이고, 그 다음 부모가 학교와 함께 어떻게 대응할지 잘 논의해가는 과정이 두번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여러 유형의 폭력을 당했을 때 마음을 단단히 먹고 다시 회복탄력성을 보일 수 있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이 된다.

어른이 되면 제도의 보호로 인해 오히려 수면으로 드러나지 않는 일들이 학생일 땐 제도가 문제아동들도 보호해야 해서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된다는 게 아이러니하긴 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냥 잘라버린다고 없어지는게 아니라 위치와 형태만 바뀌는 것이니 이를 제도 안에서 해결하려는 노력을 비난할 수 없고, 아무튼 어렵다.

국민연금도 덴마크 국세청에 신고해야…

영주권을 따면 영주권을 딴지 5년안에 국민연금을 일시반환금의 형태로 찾을 수 있다. 십년이 넘게 부었지만 채 4천만원이 안되게 부었던 국민연금은 굳이 만기까지 묵혀둔다 해서 덴마크에서 국민연금을 받을 때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가입기간 합산이니 뭐니 해도 차라리 내가 그돈을 가져와서 주식투자를 하지 싶은거다.

지금 직장에서 근무한지 3년이 되서 앞으로 4개월 정도 있다가 영주권 신청을 하려고 하는데, 국세청에 관련해서 미리 질문을 던져보려고 그전에 관련 규정을 대충이라도 찾아보려고 검색을 하다보니 이런 걸 찾게 되었다. Har du husket at fortælle SKAT om din pension i udlandet? 음? 국외 연금을 덴마크 국세청 SKAT에 신고했냐고? 거의 십년전에 유선으로 질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지금 타는 게 없는 연금이면 그냥 둬도 된다고 해서 그냥 묵혀두고 있었는데 올해 새로운 법이 올해 발효되어서 2024년 7월 1일까지 별지의 양식에 따라 신고를 해야한다 . 어머나. 별지양식인 Erklæring L (blanket 49.020) 을 읽어봤는데, 이게 국민연금도 해당되는지가 애매해서 국세청에 질의했다. 모르는 건 담당관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정확하니까. 국민연금의 납부 방식, 나중에 지급되는 연금의 형태 등과 내 납세의무가 어떻게 되는지 등을 장황히 곁들인 메일을 보냈더니 신고를 하란다. 일시반환금으로 받는 걸 여기 연금으로 묶어서 지금 찾지 않는 것으로 해 납세 시점을 은퇴시점으로 돌릴 수 있는지도 물었더니, 그건 신고서 제출하면서 추가질의하란다.

신고서를 다운받아 찬찬히 읽어보며 작성을 해보니, 이런 국민연금의 경우 매년 신고할 필요는 없고 한번 신고했다가 나중에 지급사유 발생 등으로 변동이 생기면 그때 신고하면 되는 거였다.

원래 법이 있으면 그게 내 나라든 아니든 꼼수를 부리면 안되겠지만, 타국에 있으면 더욱 더 신경쓰이는 게 거주의 권리와 관련해서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더욱 내 신고의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세금을 회피할 목적으로 신고의무를 게을리하는 경우 벌금형 또는 1년 6개월 이하의 징역형을 받을 수 있고, 공무원은 특히 불법행위를 하지 않아도 윤리강령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면 직위해제될 수 있어 더 유의해야 한다. 나는 공무원이니까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최악의 경우 일시반환금을 그해 소득으로 모두 인정받아 다 과세하고, 이걸 내가 원하는 때 언제고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최선의 경우는 이를 모두 연금으로 묶어서 투자는 내가 원하는대로 하되 이를 연금에서 빼는 타이밍에 그 빼는 금액만큼을 그해 소득으로 보아 소득세 산청에 반영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최고 높은 소득세인 topskat를 내지 않고 있는데, 저걸 한번에 소득으로 산입하면 그해에는 topskat을 내야 해서 이를 피하고 싶은 것이다.

결론은 신고 자체는 까다롭지 않다는 것. 그리고 한번 하면 일시반환금 찾는 거 아니면 나중에 연금탈때까지 신경쓸 필요 없다는 점. 그리고 이제 7월 1일부로 신고 안했으면 불법이라는 것.

반덴마크인

덴마크 생활이 십년을 넘어섰는데, 어느날 곰곰히 생각해보니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생활한 나라, 한국/인도/덴마크 중 덴마크 생활 기간이 가장 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부하느라 정신없었던 유년시절과 학부시절에는 사회에 대한 큰 관심이 없던 시기였기에 그 이후 진정한 의미의 성인기의 가장 큰 부분을 덴마크에서 보낸 것이다.

학창시절에는 큰 일탈 없이 청소년기를 보내느라 소위 말하는 질풍노도의 시기로 불리게 만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을 새가 없었다. 그리고 부모님과 나를 분리해 독립된 성인으로 성장하는 시기를 만으로 서른이 넘는 시기에, 그것도 인도에서 경험했다. 집에 정해진 시간에 돌아오는 것, 외박하지 않는 것 등 처럼 부모님이 하지 말라고 하지만 전혀 위법할 것이 없는 것들 같은 거 말이다. 엄마는 처음 겪는 딸의 반항에 꽤 충격을 받으셨고, 그때서야 처음으로 나를 독립된 개체로 인정하는 첫발을 내딛으신 것 같다. 경제적인 것부터 여러가지 면에서 부모님과 분리를 이뤄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한국으로 돌아가 2년반을 지내고 덴마크로 나와 그대로 눌러앉아버렸다.

나는 다소 관찰자와 같은 시선을 유지할 수 밖에 없다. 내 모든 판단의 준거는 유년기를 통해 내안에 깊숙히 심어넣은 한국문화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덴마크의 가치관과 문화가 그 위에 덮어쓰여지며 어느게 아주 오래된 가치관인지 아니면 새로 덧씌운 가치관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졌다. 관찰하고 그 관찰한 결과를 주변인과 나누고, 그에 대해서 그들의 설명을 듣거나, 내 관찰을 근간으로 해서 벌어진 토론을 보며 새로운 인풋을 얻고 추가적으로 관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회사에 근무한다는 것은 대충 우리가 동질적인 집단에 속한 사람이니 일종의 편향된 문화적 인풋을 얻게 된다는 뜻이기도 할텐데, 그 안의 세분화된 다양성 속에서 나름의 다양함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경험속에서 관찰자의 시선은 서서히 참여자의 시선으로 바뀌어가는데, 이러한 동화과정이 매우 은밀히 일어나기에 나또한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 후 문득 내 가치관이 더이상 한국인의 평균의 가치관에서 많이 멀어져있음을 느끼데 된다.

현지어를 잘 하는 것은 이런 동화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언어가 매게가 되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이지만, 언어야말로 이 문화의 가장 중요한 매개이자 문화와 문화의 역사가 담겨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언어를 통해 외부인의 시각으로 번역되지 않은 현지의 날것을 직접 흡수할 수 있고, 그렇게 흡수할 수 있는 스펙트럼 자체가 워낙 넓어서 외국어의 안경과 스피커를 통해 보고 듣고 흡수할 수 있는 양이 다르다.

그래서 꼭 현지어를 잘 해야 하냐? 그런건 아니다. 현지어 안하고 영어만으로도 살 수 있는 나라이니까. 하지만 영어만으로는 내가 주체적으로 사회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기에 이방인으로서 살 수 밖에 없는데서 오는 단점이 존재한다. 오래 살면서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추측하고 넘어가는 것들이 사실과는 다른 경우도 많고, 그래서 오해도 하고, 답답도 하고, 불만도 쌓일 수 있다. 현지어를 잘 하게 되고 그걸 활용해 문화를 이해하고 그 사회에 동화된다는 것은 내가 더이상 나를 이방인으로 여기지 않게 된다는 것이고, 그건 나에게 편안한 마음을 가져다준다.

나는 내가 한국인이기에 남과는 다른 관점을 갖고 이 사회를 바라보고, 또 그래서 제공할 다른 가치가 있다는 점에서 그건 그거대로 장점을 인지하되, 내가 이방인이기에 움직임이 조심스럽거나 의도치 않게 오해를 한다거나 이런 게 없어졌고, 그게 좋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생기는 불만이 없어졌고, 그냥 어느 사회에나 있는 장단점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 덕에 볼 수 있는 방송이나 책이 늘어나는 점도 장점이고, 덴마크어가 늘면서 영어가 간접적으로 늘기도 한다. 영어와 덴마크어가 역사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많이 주고 받은 탓이다. 덕분에 뒤늦게 왜 어떤 표현이 특정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 어원을 알게 되면서 이해하게 되기도 하고.

하지만 일상을 현지어로 완전히 전환한다는데는 또 다른 이면이 있다. 내 아이에게 내 뿌리를 잘 설명해주기 어렵다는 것이다. 음식 문화 이외에 아이가 한국문화를 나에게서 크게 느낄 일이 없다. 아이가 두돌이 되기 전에 우리의 언어가 덴마크어로 서서히 교체가 이뤄졌으며 아이에게 한국어는 조금 알아듣는 외국어, 엄마의 말 정도로만 남게 되었다. 다행히 한글학교를 통해 요즘 한국어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배우고, 한국의 문화도 조금이나마 체험하기 시작했다. 덴마크인 선생님을 통해 이뤄지긴 하지만 이게 가능하다는 자체만으로도 감사하다.

아마 앞으로 십년정도 더 살고나면 반덴마크 사람이 다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쯤 되면 한국이 너무 많이 바뀌어서 가도 뭔가 낯설어 집에 가는 것 같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시민권 취득에 대한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는 한국의 가족을 넘어서서 그게 나를 한국과 이어주는 끈처럼 느껴지는 것 때문인 것 같다. 시민권이 없어도 덴마크를 내나라나 다름없이 느끼고 있는 지금, 굳이 시민권으로 나를 묶지 않을 필요는 없다고 느끼기도 하고. 그때쯤에 나는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문득 궁금해진다.

배우는 게 별로 없는 덴마크 유치원?

한국을 다녀오면 유치원에서 하나에게 남은 시간은 보름도 채 남지 않는다. 방과후 학교로 넘어가 학교 입학까지 3개월의 시간을 보내는데, 여름 휴가 기간 3주를 제외하고 나면 2개월 정도 시간을 보낸 후 8월 초부터 0학년을 시작하게 된다. 왜 서구는 주로 가을에 학기를 시작할까 생각을 했는데, 아마 여름방학이 길고 연말연시 연휴기간방학, 겨울방학, 부활절 휴가기간, 가을방학 기간 등은 1~2주 정도로 짧게 쉬다 오는 것들이라 한 학년을 끊기에 애매한 기간이라 그런게 아닌가 싶다.

2023년 중에 만 6세가 되는 아이들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그 해에 0학년을 시작한다. 이보다 1년 먼저 일찍 시작하는 아이들도 있고 늦춰서 만 7세가 되어 시작하는 애들도 있다. 덴마크는 의무교육이 10년으로 정해져있는데, 이를 꼭 학교에서 해야하는 것은 아니고 가정에서 해도 무방하다. 즉 어디서 하든간에 0학년에 되는 시점부터 의무교육이 시작된다고 보면 된다. 글을 배우고 기초적인 산수와 과학, 예술, 체육활동 등을 하는데, 기존에 유치원에서 놀이처럼 배우던 것이 책상에 앉아서 좀 더 학습처럼 배우는 형태를 띄게 된다.

아직까지 학교에 애를 보내지 않아서 학교는 잘 모르겠지만 이제 덴마크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뭘 하는지는 좀 빠삭해졌다. 한국인 부모 중에는 덴마크 어린이집/유치원보다 한국 어린이집/유치원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는데 개인의 교육관과 취향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덴마크 기관이 내 교육관과 취향에 맞는다.

덴마크 기관에서는 0학년에 가기까지 앉아서 뭘 가르치지 않는다. 앉아서 뭘 하는 건 레고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뭔가를 오리고 붙이고 만들고, 밥 먹는 것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안과 밖에서 몸을 써 놀고, 운동하고, 노래하는 것이다. 특별한 스포츠를 하는 것도 아니고 운동이라고 하면 요가정도? 이 또한 아이들에게 체육 활동을 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시에 따라 조용히 움직이면서 흥분을 가라앉히고 내 신체에 일어나는 일에 집중을 하면서 조절기능을 향상하기 위해 시키는 거다. Mindfulness 시간을 가지기도 하는데, 그 시간에 뭐하냐고 물어보면 요가 매트 깔고 눕거나 앉아서 눈을 감고 호흡에 초점을 맞추고 내면의 평화를 찾는 거라고 한다. 그러다가 간혹 10-15분씩 파워냅을 하기도 하고.

그밖에 노는 건 정말 뛰어 노는 거다. 지금 유치원에는 실내 암벽이 없는데, 예전 유치원에는 앞에 두툼한 매트리스를 깐 실내 암벽이 있어서 이미 두돌 반 때부터 이 벽을 원숭이처러럼 타고 놀았다. 비가 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루에 한번은 꼭 밖에서 놀고, 비가 오는 날도 비가 그치면 나가서 논다. 그러면 옷이나 장화는 정말 진흙과 모래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어서 애를 데리고 올 때가 되면 그게 다 말라 붙어서 옷을 접으면 흙덩이가 부러져서 떨어져내린다. 그나마 말라있으면 다행이고, 그 진창 옷을 집으로 가져갈 때면 들고 가기도 정말이지 번거롭다. 자주 빨 수 있는 옷이 아니니까 집에 가서 말려 털어보내야 한다. 특별히 다칠만한 위험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이들은 대부분의 활동에 대해서 큰 제재를 받지 않는다. 따라서 다쳐오는 일도 종종 있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몸을 쓰는 법을 배우고, 건강하게 큰다.

운동이 아닌 활동은 소근육 발달을 위한 그림그리기, perler (한국에서는 펄러비즈라고 하던데, 판에다가 플라스틱 비즈를 끼워서 모양을 만들고 다림질을 해 이것저것 만드는 것으로 덴마크 기업이 만든 것) 판에 끼워 만들기, 부활절, 할로윈, 크리스마스 등 시즌에 맞춰 실내 장식할 때 뭔가 오리고 붙이고 만드는 공작 같은 창의력 향상 활동이 한 축을 이룬다. 또 다른 축으로는 아침에 모여서 조회시간에 노래 부르는 시간. 운율과 음율을 맞춘 동요가 많고, 학교에 가서도 운율과 음율에 많은 비중을 둬서 교육이 이뤄지는데, 같이 모여서 노래를 부르는게 조직내 소속감 등을 고양시켜준다고 해서 덴마크인들은 이를 교육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한다. 산수를 따로 배우지는 않는데, 뭔가 생활속에서 이런 저런 것을 배우는지, 2+2는 4, 4+4는 8, 8+8은 16, … 이런걸 나에게 와서 말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일상 속에 엮어 산수도 배우는 것 같다. 책을 읽는 것도 물론 빼 놓을 수 없다.

기타 공동체 생활을 위해 유치원에서 큰 아이들은 작은 아이들 옷입고 벗는 것을 도와줄 수 있는 상황에 돕게 한다거나, 식사 당번을 정해서 배식을 돕게 한다. 또 일주일에 한번 씩 왕따 방지 교육을 해, 뭐가 괴롭히는 것인지, 그럴 땐 어떻게 해야하는지 해당 당사자와 주변인의 역할 등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배운다.

유치원에서 뭔가 다양한 수업을 하지는 않지만, 어른들이 만드는 놀이나 학습에 애들이 참가하는 형태가 아니라서 아이들은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놀이를 만들고 노는데 익숙하다.

다만 애들은 좀 꾀죄죄하다. 옷이 더러워지고 헤지고 하는 것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애를 데릴러 갈 때 보면 애들이 죄다 꾀죄죄하다. 머리도 엉망진창, 얼굴과 옷도 여기저기 더러워져있고. 좋은 옷은 살 필요가 없고, 유치뽕짝이든 뭐든 애들 취향에 맞춰 대충 저렴하고 튼튼한 옷을 사주면 된다. 괜히 좋은 옷 입고 가서 더러워지고 찢어지면 아깝기나 하지.

아침이면 15분 정도 침대에서 뒹굴며 잠을 깰 시간을 주고, 일어나서 옷 갈아입고, 머리도 자기가 빗고, 부엌에 내려가서 자기 먹을 아침식사 직접 챙겨다가 아빠랑 아침 식사 하고, 겉옷 챙겨입고, 도시락이랑 물통 가방에 챙겨 넣어 집을 나서고, 혼자 놀 땐 놀고, 도움을 필요할 땐 도움을 요청하고 등등 하나의 인간으로서 역할을 다 한다. 도시락이야 내가 싸주지만, 그나마도 내 옆에서 간혹 거들때도 있고, 빨래랑 밥해주고, 책읽어주고 조금 놀아주고 여기저기 데려다주는 역할 때면 내가 하는 게 진짜 별로 없어졌다. 자기 주도성, 스스로를 돕는 자조능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능력, 자기가 필요한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능력, 못하는 것도 연습하면 늘게 되어 있음을 알고 꾸준히 하는 것 등 물론 가정교육도 중요하겠지만 이런 것들이 유치원에서의 교육과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시간이 흐르고 보면 한국에 있는 아이들이 여기에 있는 아이들보다 더 많이 배워 좋은 삶을 사는 것도 아닌데, 그냥 애들이 즐겁게 놀고 어른의 과도한 통제 없이 적당한 상처도 입어가면서 보다 창의적으로 자신을 배우고 성장하고, 공동체 정신을 함양하면서 사회성 기르는 이곳이 나는 마음에 든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규칙을 잘 지키고 같이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데 더 초점을 두는 것도 마음에 들고. 결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키워내는 것이 우리가 아이들에게 해줘야 하는 것인데, 그 근간을 유치원에서 닦을 수 있는 것이 좋다. 내가 선행학습과 안맞았던 사람이라 아이에게 필요한 건 적당한 시기의 적당한 자극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공부야 학교 가서 하면 된다 싶다.

주변의 권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하여 개개인이 주도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일이야 말로 정말 가르치기 어려운 것 아닌가? 유형의 것으로 보여주기 어렵지만 아이의 매일을 통해 이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 말로 덴마크 공교육의 힘이 아닌가 생각한다.

해마다 돌아오는 MUS의 철이 왔구나.

1년에 한번씩 돌아오는 MUS (Medarbejderudviklingssamtalen, 직원계발면담). 쥐에 해당하는 단어인 mus와도 발음이 같아서 처음엔 조금 웃기다고 생각했는데, MUS는 덴마크 직장 생활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MUS와 mini-MUS, 임금협상*은 하나의 사슬처럼 얽혀서 굴러간다. 연초에 MUS를 하고나면, 반년뒤에 mini-mus가 있고 오래지 않아 그 뒤로 연봉 협상이 따른다. (*민간에서도 비슷하게 굴러간다하지만, 나는 덴마크에서 민간 경험은 없으므로 중앙부처에 해당하는 Staten만 보자면 우리 사무관급에 해당하는 Fuldmægtig는 거의 개별 협상을 하지 않는다. 수당 정도만 협상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속한 노조가 협상한 결과를 그냥 받아들인다. 자신이 특별하게 더 잘 받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경우라면 개별 협상을 물론 할 수 있고,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다. 난 딱히 내가 더 특별하게 잘 받을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 MUS는 Kompetencehjul이라는 툴을 통해 개인 역량 계발을 돕고자 하도록 하는데, 우리 조직같은 경우 구술커뮤니케이션, 서술방식 소통, 협업, 사회성 (사회성이 포함되어있다!), 직무전문성, 창조성 및 발명능력, 업무수행력, 생산성, 수용력 등 9개 분야로 계발분야를 설정하고 있다. 그러면 mini-MUS를 통해 반년 후 진행상황을 점검한다. 임금협상에서는 이걸 토대로 평균보다 잘하고 있을 경우 역량수당 분야에서 개별 협상을 할 수 있다.

먼저 개인이 매뉴얼 따라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나면 그걸 토대로 상사와 면담을하고, 내가 생각하는 중점 계발 분야가 뭔지, 상사가 생각하는 건 뭔지, 그걸 어떻게 계발할지 (연수, 업무 수행, 기타 구체적인 사항 등), 그걸 계발해서 어떤 효과를 기대하는지 등 양측에서 합의된 내용을 계발계획양식에 채워넣고 사인하고 나면 MUS가 끝난다.

예전엔 이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나 그런 생각을 했는데, 작년 MUS 이후 이를 내 일과에 적극 반영하고 난 후에 이게 중요한 툴이란 걸 알게 되었다. 작년에는 구술 및 서술방식 커뮤니케이션 분야와 직무전문성 분야의 계발에 중점을 두고 싶다고 했는데, 여기에 포함된 내 계발분야를 내 업무시간에 평소에 녹여넣으면서 커뮤네케이션 부분이 크게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부 교육도 내가 적극적으로 찾아서 가서 듣고, 평소에도 이를 활용하다보니 조직내에서 내 위치와 내 스스로 평가하는 내 모습이 같이 성장할 수 있었다.

나는 조직내 성장보다는 전문가쪽 역량을 키워가는 쪽으로 성장하고 싶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커리어 방향도 설정할 수 있었고, 내가 관심있는 직무에 대해서도 이야기함으로서 향후 기대되는 프로젝트의 참여에 대해서 나도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좋다.

한국의 인사고과는 정치적인게 컸다면 지금 소속된 조직에서는 MUS를 통해 자기가 능력을 계발, 성장하고 연봉의 형태로 그 보상을 받는 형태로 크게 정치적인 요소가 없다는데서 속이 아주 시원하다. 내가 남보다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내 현재에서 필요한 역량과 그에 맞춰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면 되는 거니까. 올해 농사를 또 잘 지어봐야지.

취학전 전환기 상담

반차를 내고 아이 유치원에 가서 취학전 전환기 상담을 하고 돌아왔다.

한국과 달리 덴마크에서는 0학년이라고 정규 과정 전 1년을 학교에서 운영하는 방과후 학교에서 보내게 한다. 0학년에서 보내는 시간은 시간의 양적 총량에 있어서 유치원에서와 다를 게 없지만 활동의 종류와 성격, 교사 1인당 배정되는 아이 인원수 등에서 차이가 꽤 난다. 덴마크는 보육원에서 유치원으로, 유치원에서 학교로의 전환 등에 있어서 그 과정을 체계적으로 지원한다. 학교에서 교사들이 인근 유치원을 몇차례 방문해서 아이들과 얼굴을 익히기도 하고, 반대로 아이들이 학교를 방문해 0학년의 생활을 간접 체험하며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을지 등을 미리 익힐 수 있게 도와준다. 유치원으로 올라갈때도 같이 올라가는 아이들이 훨씬 긴 기간동안 틈틈히 유치원을 방문하게 해 전환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불안함을 최대한 낮춰주려고 노력한다.

아이가 어려서 보육원에 다닐 때는 육아를 이렇게 하는 게 맞는건가, 이럴 땐 어떻게 해야하나 등에 있어서 하원길에 선생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때가 많았고, 유치원에 처음 올라가서도 계속 이어진 통합 유치원이라 선생님들과도 관계가 깊어지니 대화를 할 일이 많이 있었다.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와 시작한 처음 유치원에서는 어수선한 분위기에 다른 애들을 떼리고 소리지르는 아이들이 많아서 1년의 짧은 기간동안 하나가 너무 힘들어해서 이런 상황을 개선해보기 위해 상담을 할 일들이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이번 유치원에서는 내내 하나가 너무 잘 지내서 선생님과 가벼운 인사 정도 이외에는 크게 이야기를 할 일이 없었다. 중간 중간 잘 지내는지, 문제는 없는지 물어보기는 했어도 너무 잘 지낸다 하니 딱히 더 물어보기도 그랬고. 그런 연유로 이런 상담이 너무 오래간만이라 그간 하나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유독 궁금하고 살짝 긴장마저 되더라.

하나는 중간중간 짧게 들었던 피드백 그대로 너무 잘 지내고 있었다. 주변 상황을 잘 살피고, 민첩하고, 다른 사람을 돌볼 줄 아는 아이란다. 모든 발달 측면에서도 그 나이에 맞는 발달을 하고 있되 뛰어난 쪽에 속한다고 한다. 용감하고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데에 두려움이 없고, 시도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필요한 질문을 적절히 한다고 한다. 학교 선생님들이 와서 활동을 하면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 쭈뼛쭈뼛 위축되서 눈치만 보는 아이들도 있다면, 우선 당면한 과제에 바로 참여해서 질문을 해가며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한다.

타인과 큰 갈등 상황에 놓이는 경우가 없는데, 자기의 목소리도 낼 것은 내되 협상을 잘 하고 모두를 그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시키고, 양보할 때 양보하기 때문에 그렇다며, 삐져서 혼자 토라져 있는 형태로 갈등을 피하는 게 아니라 갈등 상황을 잘 해결한다고 한다. 그 점 참 마음이 놓이는 이야기였다. 살면서 수많은 갈등상황을 만나게 되는데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할 줄 안다는 건 큰 자산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규칙을 잘 이해해서 뭘 해야하고 하면 안되는지 잘 알아서 그를 잘 준수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누군가로 인해 분위기가 많이 안좋아지거나 위험하거나 등 하면 필요한 타이밍에 어른에게 알려준다고 한다. 그렇다고 고자질쟁이 같은 식으로 하는 건 아니고 제지할 수 있는 건 제지하고 크게 위해가 되지 않으면 어른이 개입할 때까지 개입하지 않고, 적당한 수준으로 도움을 요청한다니 내가 아는 하나가 맞다.

놀이를 만들어내는 창의성이 좋고 아이디어가 많은데 판타지 동물 이런식의 창의성은 아니라 현실성에 근간한 창의성을 보인다니 엄마 아빠의 드라이함이 반영된 부분이 있는 거 같다. 뭔가를 만들고 그리고 춤추고 몸을 써서 하는 활동에 특히 뛰어나다니까 그 점 많이 계발해주면 좋을 것 같다.

관찰력과 기억력이 뛰어난데, 거기에 질문을 잘 던져서 언제 저런걸 알아차렸지? 정말 좋은 질문인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때가 많단다. 그런 생각을 나만 하는게 아니었다. 그리고 지적 호기심이 뛰어나다고 한다. 어른이 하자고 하는 활동에 있어서 “나는 싫어” 라며 빠지는 것 없이 항상 적극적이고 밝게 참여해서 타인의 참여를 유발한다고 한다.

유치원에 두 반이 있는데 취학연령 아이들은 모아서 따로 큰아이 그룹을 일주일에 한두차례 운영하는데, 다른 반 아이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해서 많은 아이들의 사랑을 받는 인기있는 아이라고 한다. 본인이 사랑이 넘치는 아이라 어린 아이들도 잘 보살피는데, 하나가 있으면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하나가 있음을 알게끔 그 주변으로 많은 사람이 몰린다고 한다. 학교 가서 너무 잘 적응할거라고 하는데 참 마음이 놓이더라.

이제 이틀이면 하나 생일이고, 삼개월이면 학교를 시작하니 얼마나 시간이 빨리 흐르는지 모르겠다. 사랑이 넘치는 우리 아이. 타인에게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게 무엇보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이더라. 애를 데릴러 가야지 이제.

덴마크와 한국 직장생활의 차이점

은행에서 삼년 일한 초년생 시절을 제외하면 참 오랫동안 공공부문에서 일했다. 두번째 직장인 코트라는 공공부문에 일을 했지만서도 준정부기관에서 일한 탓에 그 애매한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공무원은 분명 아닌데, 또 사기업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준공무원이라고는 해도 이게 기업의 수출과 해외진출을 지원하는 업무였다보니까 보조적인 역할에 그치니 그 일을 통해서 내가 배우게 되는 것들을 빼면 일의 성과에서 내 발자국을 찾기가 힘이 들었다. 지금은 내가 하는 일이 실제 덴마크 에너지 인프라 정책에 아주 작은 점이나마 남길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조금 다르다. 내가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과 배울 수 있는 것이 많이 있다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자리에 남아서 계속 기여하고자 하는 동기부여를 해줄 수 있기에 중요하다 생각한다. 덕분에 감사하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니.

코트라를 나와서 일한 곳이라고 해봐야 덴마크 첫직장 취업 전 잠시 지도교수와 함께 단기로 참여한 컨설팅회사 프로젝트 한달반 정도 하나이고, 그 이후에는 중앙정부기관 두군데 뿐이니 덴마크 직장생활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경험은 물론 아니지만, 지금까지 내가 느낀 덴마크와 한국 직장생활의 차이점을 한번 정리해보고자 한다.


근무시간이 유연하다.

근무시간은 주당 37시간이 평균이다. 근무 쉬프트가 중요한 직종 – 예를 들어 병원 의사, 간호사, 환경미화, 선생님, 경찰, 생산직 근로자 등 – 은 유연하게 일하기 어렵지만 일반 사무직종의 경우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사무실에 있어야 하는 정해진 시간텀을 포함해 그 앞 뒤로 시간을 붙여 일해 37시간을 일하면 되니까 언제 출근도장 찍었는지 감시하는 사람이 없다. 간혹 9시에 근태점검을 하던 시절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그 근태점검이 출입증을 태그하는 시간을 기준으로 해야하는 건지 사무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는 시간을 기준으로 해야하는건지도 갑론을박했었는데. 아무도 퇴근시간은 그렇게 챙기지 않았는데… 그렇게 밥을 먹듯이 넘겨도…

데스크 전화와 데스크탑 컴퓨터가 없다.

랩탑, 핸드폰은 입사시 지급되는 기본 IT기기이다. 도킹 스테이션과 모니터 두개, 위아래로 움직일 수 있어서 앉거나 서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디폴트라 자리를 바꾸는 경우 랩탑과 핸드폰만 들고 이동하면 된다. 데스크 전화는 없다. 민간은 좀 다를지도 모르겠는데, 정부기관은 기본이 그렇다. 전화에 전화번호관련 솔루션이 탑재되어 있어서 소속기관 전화번호부가 깔려있다. 카톡 등 개인것을 업무에 섞지 않는다. 물론 회사 전화를 개인전화로 쓸 수 있도록 허락하는 기관도 있다. 그럴 경우 복지혜택에 수급으로 판단해 세금을 더 내야한다. 지난번 근무 기관은 이게 허용이 되었는데, 지금 직장은 허용이 되지 않아 다들 전화를 두개씩 들고 다닌다.

헤드폰을 끼고 일해도 된다.

헤드폰을 요청할 수 있다. 소음차단이 되는 헤드폰을 달라고 해서 음악을 들으며 일을 해도 된다. 대부분 자기 자리에서 전화를 받지는 않지만 업무상 이야기가 아주 길어지지 않는 경우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꽤 되니까 집중에 방해가 되는 걸 피하려고 헤드폰을 끼고 일한다. 전화가 오는 경우 진동으로 되어 있어서 헤드폰 꼈다고 못듣고 그런게 아니니 피해줄 일도 없다.

타인 앞에서 깨지지 않는다.

피드백 할 게 있으면 따로 불러서 하고, 그걸 타 부하직원에게 공유하지 않기에 상사로부터 타인 앞에서 깨지는 일이 없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리더로서의 자격을 의심받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가 상사로부터 깨지는 걸 본 일이 없다. 좋은 일은 반대로 타인 앞에서 칭찬한다. 다행히 지금까지 깨진 일도 없지만, 깨지는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남들 앞에서 호되게 혼난다든지 하는 걸 걱정할 일이 없다.

복장 규정이 없다.

복장 부분은 많이 자유롭다. 문화가 있어서 각자 알아서 맞추는 분위기이나 간간히 안맞추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갖고 대놓고 뭐라 하지도 않는다. 물론 간혹 특별한 경우 뒤에서 놀랐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있을 수 있다. 그런 거 생각했다면 그렇게 튀게 입지 않을 사람들이기에 이러나 저러나 뭐라 하지 않는 거 같다. 언제 한번 배꼽이 보이는 탑을 입고 온 사람이 있었다. 나와 다른 직원 한명이 그녀를 구내식당에서 보고 큰 눈을 뜨고 눈빛을 교환한 뒤 놀랐다며 한마디씩 했다.

휴가 가면 연락이 안된다.

휴가 가는 기간 중 연락이 되어야 하는 경우는 정말 특별한 거 같다. 상사들은 조금 연락이 가능한데,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연락이 될 거라고 기대해서도 안되지만, 대부분은 이 기간에 연락을 극도로 피한다. 일반 사원급에서는 연락이 대부분 되지 않는다. 회사 전화도 컴퓨터도 두고 간다. 회사 전화의 VPN이 없으면 회사 시스템 접속 자체가 안되니까 연락이 될리가 없다. 따라서 휴가 기간에는 그냥 연락을 서로 하지 않는다.

회식이 거의 없다.

일년에 네번정도 회식이 있다. 두번은 팀빌딩 같은 걸로 세미나 같은 거 하고나서 저녁 먹는 거 하고, 두번은 여름 휴가 전에 파티 한번 하고, 겨울에 크리스마스 가까워서 연말 파티 한번 하는거다. 나는 한번 직원들 초대해서 식사 같이 한 적 있는데, 그때 다들 왔던 거 제외하고는 정해진 회식 외에는 따로 소규모 회식을 해본 적이 없다.

상사와 1대1 면담이 대충 한달에 한번정도 있다.

삼십분정도 할애해서 직속 상사랑 1대1 면담을 한다. 업무 관련 팔로우업도 하고, 주제는 없이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직원에게 일상의 애로사항이 있는지 등도 들어보고 한다.

사수 부사수 개념이 없다.

대부분 입사 후 1달정도 정착을 도와줄 버디를 정해주는데 회사내 일상 생활과 관련해서 알아야 할 것, 중요 규정들 어디서 찾아볼 수 있는지, 회사 건물 안내, 건물 안내시 다른 부서 직원들에게 새직원 소개 등을 해준다. 그거 외에 꼭 알아야하는 것은 인사팀에서 입사 전에 이미 읽어볼 규정들을 보내주기도 하고 인트라나 인트로 프로그램 등을 통해서 시스템적으로 배울 수 있게 되어있다. 사수 부사수 개념이 없고 모두 동료들이기 때문에 물어보면 친절히 다 알려준다. “누구씨. 이런거 꼭 말로 해줘야 알아요? 그정도는 학교에서 배우고 왔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하는 신경질적인 말투를 들을 일이 없다.

자기 발표는 자기가 준비한다.

필요한 자료와 관련 수치는 관련 담당자에게 요청을 한다 하더라도 최종 발표자료는 발표자가 준비한다. 상사의 발표자료는 상사가 만든다. 부하직원이 만들어가면 이렇게저렇게 만들라고 수정요구를 하고 다시 수정해 가져가면 또 수정하고 하는 무한반복을 안해도 된다. 심지어 청장들도 그렇게 한다. 자기가 만들어야 자기도 발표할 때 자신있게 발표할 게 아닌가! 이런데서 오는 생산성 향상이 엄청 크다. 낭비를 제일 싫어하니까.


덴마크 사람들은 딱 계약서에 써 있는 만큼만 일하려 한다. 성장하려는 욕구가 없다. 이기적이다. 개인적이다. 등등 덴마크 사람들의 근로 문화를 두고 이를 비판하는 한국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반대로 놓고보면 우리가 “주인의식”이라는 미명하에 알아서 계약서로 합의된 이상으로 스스로를 갈아넣는 것에 너무 익숙한 거 아닌가 싶다. 실용주의가 뼛속까지 박힌 이들은 형식에 크게 얽메이지 않고 서로를 인간대 인간으로 대하며 각자 할일 하는 것에 집중하는 걸 제일 중시한다. 완벽하다는 게 아니다. 모든 일에는 동전의 양면같이 단점이 따라오지 않는가. 그런 단점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고 나면 이 문화가 인간의 정신건강에 크게 도움이 되는 건강한 면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될 뿐이다.

덴마크에서 주당 37시간 이상 일하면 정말 안될까?

덴마크에서 주당 37시간 이상 일했더니 국제채용 및 통합청 (Styrelsen for International Rekruttering og Integration, SIRI)에서 경고 서한을 받았다며 ‘무슨 이런 천국이 있냐?’ 또는 ‘이렇면 사회가 발전을 할 수 있나?’ 등등의 이야기가 나오곤 한다. 그러면 정말 덴마크에서는 주당 37시간 일하면 안되나?

절대 그럴리가 없다. 주변에 주당 37시간 근무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데 아무도 경고를 받지 않는다.

가까이는 사기업에 다니는 남편부터 그렇다. 밀린 이메일을 처리한다고 주말에도 간간히 일하는 남편은 평일에 평균 9시간정도 근무를 한다. 주당 근로시간이 50시간 좀 안되게 일하고 그런 일상적 야근은 이미 임금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며 별도의 추가 수당은 존재하지 않는다. 휴가떄도 이메일이 쌓이면 복귀후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틈틈히 이메일을 체크한다. 연간 6주의 휴가가 제공되지만 항상 조금씩 남겨서 다음해로 이월하는데, 이렇게 이월할 수 있는 한도가 제한되어 있고, 사용하지 못한 휴가는 휴가비로 지급되지도 않는다. 예전엔 휴가비로 지급받을 수도 있었던 모양인데 요즘은 그렇게 안된다고 한다.

나는 공무원이라 조금 다른데 우리나라의 사무관에 해당하는 fuldmægtig로서 주당 37시간의 근로시간을 지킬 수 있다. 근로시간을 매일 시스템에 기록하는데, 하루 기준 7,4시간에서 어떤 날은 더 많이, 어떤 날은 더 적게 근무할 수 있다. 9시부터 2시 반 사이에만 사무실에 있으면 되고 이 시간에 앞뒤로 시간을 추가해 평균 7,4시간을 일하면 된다. 마이너스 한도와 플러스 한도가 있는데, 마이너스 한도는 이틀정도 되고 플러스 한도는 영업일로 10일 정도에 해당하는 시간이었던 거 같다. 이 한도를 넘겨 일하면 휴가를 써야 하고, 너무 바빠서 휴가를 쓸 수 없는 경우에는 승인을 받도록 한다. 이걸 flekstimer라고 해서 근로시간 시스템에서 밸런스를 보면서 알아서 자기 근로시간을 관리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나중에 직원이 이를 한꺼번에 몰아서 자기가 가고 싶은 기간에 휴가를 왕창 몰아서 써서 근무에 차질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함이 하나 있고, 상사의 권한 남용으로 직원이 과다하게 일만 하고 자기 권리인 휴가를 못쓰게 되는 상황을 막기 위함이 또 하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승진을 해서 다음 직급으로 올라가면 flekstimer에 제약이 많이 걸린다. 그래서 쌓아놓고 날리는 flekstimer가 많다. 이 시스템은 직급이 올라가면 갈 수록 어느정도 야근은 할 수 있다는 걸 전제로 깔고 있는 거다. 부서장급은 flekstimer의 컨셉이 없다. 그냥 휴가 딱 쓰는게 끝이다. 그나마 공무원은 이런게 가능한데 사기업은 그렇지 않다.

우리 집 이야기 말고도 많다. 컨설턴트나 법조계 사람들은 야근을 밥먹듯이 한다. 그렇지만 아무도 경고서한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 왜 외국인에게는 이렇게 경고 서한이 날라오는 걸까? 이건 모든 외국인에게 오는 경고서한은 아니고 근로비자로 와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따라서 외국인청(Udlændingestyrelsen)에서 비자를 받아 와 있는 사람에게는 해당사항이 없고, 국제채용 및 통합청에서 비자를 받아 와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다. 근로비자로 오는 사람에게는 근로시간과 급여 등 여러가지 세부정보가 국제채용통합청에 다 통보되고 이를 준수하지 않을 경우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덴마크 국내 고용시장을 보호하기 위해서 경고를 하는 것이다. 정해진 급여만 주고 과도하게 외국인 노동력을 착취하면 덴마크 노동력을 채용하지 않을테니까. 그러면 같은 급여만 준다 쳤을때 외국인을 고용하려는 인센티브가 커질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국인을 다수 채용하는 기업을 대상으로는 국제채용통합청에서 관리감독을 한다. 근로 여건이 근로 계약에 부합하는지를 대상으로 말이다. 영주권을 따면 더이상 그런 경고는 받지 않는다.

덴마크 사회도 끊임없이 발전을 한다. 그래갖고 어떻게 회사가 굴러가나 싶은 제도들이 많지만 많은 기업들과 조직들이 우리나라보더 훨씬 적은 인력으로 같은 일을 수행한다. 생산성이 높은 거다. 한국처럼 일이 빨리 돌아가지 않는데! 라고 불평한다면 같은 일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고용인원이 훨씬 적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1인당 생산성은 높다. 그러려면 불필요한 절차를 최소화하고 핵심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런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예를 들어 공무원 조직은 민원인과 접촉하는 전화시간, 방문 시간 등이 우리보다 짧게 잡혀있어서 일하는 중간중간 오는 전화에 업무 리듬이 흐트러지는 것을 막는다. 이걸 잘 모르는 외국인들은 “공무원은 일을 안하나? 일찍 퇴근한다” 라고 생각하는데, 그냥 민원상담시간을 따로 정해둔 것 뿐이다.

그래서 결론은, 덴마크에서 주당 37시간 이상 일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거다. 근로비자 받고 일하는 외노자 아니면…

옷으로 보는 덴마크 내 근로문화가 차이

나라마다 근로문화가 다르듯이 분야마다도 근로문화가 다르다. 나는 중앙부처 중에서도 정치적 독립성이 보장된 감독기구에서 일하기 때문에 정권에 따라 장관이 새로 바뀐다한들 우리의 일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장관이 우리에게 일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라고 지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일을 우리에게 요청할 수 있지만, 그 결과물은 전적으로 우리가 전문적으로 판단한 결과에 따라 제출할 뿐, 정치적 색깔에 따라 원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할 수 있게 장관이 결과를 틀 수 없게 되어있다. 이러한 정치적 독립성은 업무 추진에 있어서 짧은 의사결정 채널, 명확한 업무추진방향 등을 확보할 수 있게 해주는 큰 장점이 있다. 물론 덕분에 중앙정부기관 지방이전을 할때 다른 많은 정치적 중립 기관들처럼 외곽으로 밀려났다는 단점이 있긴하지만… (우리 부 산하에서 유일하게 우리만 이전되었다.)

옷 입는 것만 봐도 중앙부처간에 차이가 보인다. 장관이 있는 부를 보면 다들 정장을 입는다. 20-40대 속하는 남자들을 보면 마치 맞춤정장인냥 몸에 딱 붙는 정장을 입고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 매우 전형적이게도 하얀 셔츠에 검색 수트를 입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무래도 예기치 못하게 갑자기 장관 보고를 들어가야할 경우가 생기기도 하고 권력에 가까운 곳에 일하다 보니 보수적이어서 복장도 보수적이라고 한다.

부(Ministeriet) 아래에는 세부 정책을 담당하는 국?정도로 번역할까 싶은 Styrelse 들이 있고, 우리처럼 법령에 따라 정치적으로 독립성을 보유한 감독기구와 국가가 지분을 보유하는 국유 기업이나 기관 등이 있다. Styrelse들을 보면 복장이 조금 더 자유롭다. 중요한 회의가 있으면 복장을 조금 더 갖춰입고오기도 하고 하는데 부와는 뚜렷하게 차이를 보인다. 예전에 근무했던 경쟁소비자청은 Styrelsen 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독립성을 인정받는 부서가 일부 있어서 좀 더 자유로운 것 같았지만 그래도 스마트캐주얼 정도 되는 드레스코드가 있는 분위기였다.

우리처럼 정치적으로 독립된 기구는 또 좀 다른게, 드레스코드가 없고 전적으로 개인에게 달린 느낌이다. 추리닝을 입고 일하는 사람이야 없지만 대학교에서 연구만 하는 너드같은 복장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꽤 된다. 정말 평상복 느낌. 외부 회의가 있어도 같은 복장이다. 부서장은 다른게 부서장들은 항상 정장이나 스마트캐주얼을 입는다. 옷은 조직간 문화의 차이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하나의 수단으로 일의 수행방식에서도 이러한 차이가 부처의 종류에 따라 드러난다.

같은 조직 내에서도 부서마다 업무의 성격 또는 상사에 따라 근로문화가 꽤나 다르다. 우리 부서는 연구부서라 끊임없이 배울 수 있는 환경이다. 학계로부터 새로운 연구방식을 꾸준히 수혈받아 그게 규제 감독에 도입될 수 있게 하는 하는 역할도 있는지라 대학교에서 일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있다. 업무 자율성이 높고, 프로젝트 호흡이 짧은 것도 있지만 일년을 넘는 단위의 프로젝트도 많아서 업무 강도가 유동적으로 변하면서 좀 바쁜 시기가 오더라도 직원이 과한 일정으로 지쳐 나가 떨어지지 않게 유지하기 좋다. 이와 함께 주제에 대한 토의/토론이 매우 장려돠는 분위기이다. 이는 옷차림에서도 드러나는데 진짜 편안한 분위기.

덕분에 나도 맨날 입는 옷만 입고 다녀서 더이상 옷을 살 필요가 없어졌다. 여성 정장용 백팩도 그냥 유니섹스 백팩으로 대체되었고, 항상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다닌다. 깔끔하게는 입지만 포멀하지는 않게. 구두 안신은지는 백만년된듯한 기분이고 핸드백은 그냥 아켓에서 산 나일론 카메라백 하나로 얼마를 들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아주 닳아서 떨어질 때까지 들고 다닐 듯.

한국 전 동료들의 정장 사진을 보면 그게 익숙해서 이상하지 않은데 지금 동료들이 정장을 입고 출근하면 무슨 일 있냐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어볼 거다. 이런 상황인지라 사무실에 빼입고 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오히려 포멀한 옷은 옷장에서 썩을 정도.

공영방송 인터뷰를 한다해도 따로 옷을 더 차려 입지 않고 그냥 나서서 인터뷰를 하는 덴마크인들을 티비에서 보면서 덴마크 이주 초기 문화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나니 나도 얼마나 변했는지 새삼 놀랍다.

평가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

사무관급에서는 연봉 협상이랄게 많지 않다. 기본적으로 정부와 내가 소속된 노조랑 임단협을 하면 내 임금단계에 맞춰 인상이 되기 때문이다. 임단협에 맞추지 않고 내가 직접 협상하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매우 드문 케이스이고. 나는 원래 주는대로 받자는 주의라 임단협에 묻어간다. 내가 아주 특별하게 뛰어났다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고.

단협을 받아들이든 자기가 직접 협상을 하든 그건 이미 본 협상 단계에 들어서서 할 일이고 그 전에 또 임금기대수준에 대한 대화를 하는 회의를 갖게 된다. 여기서 상사도 오퍼할 내용을 준비해 공유하고, 직원도 자기 나름대로의 기대수준을 이야기한다.

오늘 이 임금기대수준에 대한 회의를 했는데 사실 나는 잘 모르겠어서 잘 모르겠다고 했다. 임금정책에 대해서도 읽어봤지만 매우 원론적인 정책이라 그게 나에게 해당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고, 아직 이 임금협상이 익숙하지 않다고 했다. 마음 먹고 썰을 풀자면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이겠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원한 이상의 결과가 나왔는데 무엇보다 기뻤던 건 상사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상담을 받고 그 상담의 내용을 일상에 적용하고 하는 걸 벌써 두달 조금 넘게 했는데 그 사이에 정말 큰 변화를 본 거다. 상사의 좋은 평가나 이런 걸 덴마크에서 직장을 잦은 이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냥 좋게 말해주는 것 뿐이지, 나랑 일하는게 답답할 거다 이런 식으로 혼자 생각하고 덴마크어에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나에게 참 가혹하게 굴었으니…

심리상담 받느라 주당 근무 시간도 한두시간 줄이고 해서 평균을 넘는 임금인상은 기대도 안했는데…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또는 그냥 당연하다 생각했던 내가 갖고 있는 장점들을 꼬집어 내어 좋게 상사가 평가를 내리는 것을 보며, 타인의 여러 모습을 두루두루 살펴보고 그걸 꼬집어낼 수 있는 능력이 상사에겐 참 필요한 덕목이구나 싶었다. 세금 내고 나면 대세로 보아 큰 의미없는 임금 인상이지만 상징적 의미로 기쁜게 크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