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만에 덴마크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덴마크에 살기 시작한 지 거의 4년이 되었다. 만약 계속 코트라에 계속 다녔더라면 돌아가야 할 시점이었겠지.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껴지면서도 그것밖에 안되었나 싶은 모순된 감정이 가로지른다. 인생에 전혀 계획하지 못했던 일들이 무수하게 벌어졌으니 역시 살아봐야 아는 게 인생이구나.

 

앞으로 어떤 생각이 들런지는 또 지내봐야만 알겠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난 덴마크의 삶이 참 잘 맞는 사람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인도로 첫 발령받기 전까지 한번도 해외 거주 경험이 없었으니 참으로 토종 한국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뭔가 이방인 같은 느낌으로 살았었다. 여기와서 옌스를 만나고 결혼을 해 하나를 낳고 친구들도 생기고 하니, 나답게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고 그냥 자연스러운 느낌이다. 덴마크 사람들과 케미가 잘 맞는다고 해야할런지. 덕분에 뿌리를 내리기에 참 좋은 토양이다 싶다. 물론 옌스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덴마크 사회로 진입하기에 이런 가족과 같은 연결고리는 정말 중요하다고 들었는데, 경험해보니 정말 그렇다.)

 
출산하고 애를 키우며 지난 오개월 사이 덴마크어가 부쩍 늘었다. 학교 다니면 영어 쓰는 시간이 지배적이고 저녁에도 공부하느라 덴마크어가 소홀해진다. 그런데 애 보면서 토막나는 시간에 공부하기가 잘 안되니(조금 핑계같기도 하지만), 인터넷으로 방송 간간히 보고, 신문 읽고, 엄마그룹 모임 하고 했더니 몰입환경이 조성된 걸까? 듣기가 확 트이고, 어휘도 늘고 하다보니, 말문이 눈에 띄게 트였다. 물론 듣고, 읽고 이해하는 폭이 말하거나 쓰는 폭보다 넒기에 덴마크어로 보고서를 유창하게 써야 하는 일을 하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덴마크어 사용이 자유로워졌다. 방송시청과 신문 읽기가 어렵지 않아왔으니 말이다. 출산 시점을 돌이켜보면 그땐 영어로 하겠다고 했었는데 요즘은 밖에서 영어를 쓰는 일이 없다. 병원에서 의사를 만나든, 엄마그룹을 만나든, 뭔가 상담을 받든 말이다. 옌스와의 대화도 95% 정도는 덴마크어를 쓰니.

 
작은 나라라서 그런가? 말이 되면 엄청 좋아하고 환대해 주며 사회의 성원으로 빠르게 받아들여주는 점은 한국과 덴마크가 같다. 요즘 덴마크 사회에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을 부쩍 받는다.

 
논문이 끝나면 직장을 구해야 할텐데 이제 걱정은 한켠으로 접어두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환경경제쪽으로 직장을 꼭 잡고 싶은데 안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접었다. 내가 공부를 다시 한 목적은 직장을 잡는 자체에 있었고, 내가 덴마크에서도 경쟁력을 가진 사람임을 보여주는 수단이기도 했다. 물론 좋은 성과를 내고 졸업한다는 전제하에 그 기간동안 덴마크어도 가다듬고. 시간이 지나면서 어깨에 든 힘도 좀 빠졌나? 내가 앞으로 뭘 하든 밥값만 하면 되지, 꼭 좋은 직장 잡아서 잘 다녀야 하는 거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드니, 설마 직장 하나 못잡겠나 싶다. 내가 제공할 수 있는 밸류 프로포지션만 명확하면 직장은 잡을 수 있고, 운이 좋으면 마음에 드는 직장을, 아니면 그냥 밥벌이라도 하는 직장을 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아마 이 모든 느낌은 더이상 내가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드는 것 같다. 옌스 가족과 친구, 내 생활 반경 속 사람들에게 그냥 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나니 그냥 이대로 살면 되겠다는 생각이랄까? 한국에서 갖고 있었던 뿌리깊은 자기증명 강박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 내 부모와 가족, 친구가 멀리 있는 건 아쉽지만, 난 내가 뿌리내릴 토양을 지구 반비퀴를 돌아 찾아온 느낌이다. 나에겐 이제 고향이 두 곳이다. 둘이 같을 수는 없지만 다른 의미로 아주 중요한…

8 thoughts on “4년만에 덴마크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1. 깊이 공감해요~ 전 같은 마음으로 여기에 남고싶다는 생각 🙂

    오늘은 저녁에 조금 울적했어요.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공들여 만든 대구살야채죽을 시안이에게 거부당한거에요. 정말 공들였는데 한입만에 차였어요… 흐잉

    • 대구살야채죽!! 엄청 정성스러운 음식이었을 것 같아요. 항상 거부당할 수 있다는 걸 알아도 뭔가 좀 기분이 다운될 거 같아요. 흠흠…
      저는 오늘 처음으로 시판 사과/바나나죽을 몇숟가락 줬는데, 그 황당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네요. ㅎㅎㅎ 으윽… 하는 표정. 원래는 만들어줄 생각이었는데, 너무 힘빼지 말라면서 살살 시작하라는 남편 말에 그냥 샀거든요. 아마 정성스레 만들었으면 마음의 준비에도 불구하고 아쉬웠을 거 같아요.

      소화데레사님과 여기서 오래오래 같이 지내면 참 좋겠어요~~ 🙂

  2. 히히히 ❤

    참고만 해보시라고 조심스럽게 얘기해드리자면, 제가 딱 해인님 남편분 같은 생각으로 시판 이유식으로 사개월 좀 지나사부터 시작했는데요, (semper와 elli's 두 브랜드만 트라이 해봤지만 elli's 것이 전 맘에 들었어요. Semper보다 과일을 적게 쓴 맛 고를 스펙트럼이 그나마 더 넓었기도 하고, Øko이기도 했구요. 단맛이 가장 적을만한 걸로 골라골라 줬었거든요) 지금와서 드는 생각은 아무래도 처음부터 단맛을 많이 느껴서 집에서 만든 걸 거부하나 싶기도 하거든요. 대구살야채죽은 제가 만들었지만 정말 넘 맛났단말이죠 ㅠㅠ 호박과 양파에서 단맛도 좀 났구요. 브로컬리도 거부감없이 맛 봤던 거였는데.. 제가 다시 돌아간다면 초반에는 오히려 제가 더 만들어서 재료 본연의 맛을 더 배우게 하고 육개월 이후 과일 주기 시작하면서 (저희 간호사는 시작할 때부터 과일 주는 것은 피하라고 했어서) 좀 더 편하게 가끔 파는 거 먹이고 할 것 같아요.
    확실한 건 아니구요 제가 속상해서 이제 막 시작하는 해인님 침고만 하시라고요 ㅎㅎㅎ
    참 덕분에 오늘 børn og mad잘 샀어요!! 열심히 공부할거에요! 근데 우연히 Mai를 만났지뭐에요! 😀

    • 오홍~~~ 좋은 팁 고맙습니다~~~ 내일은 Grød을 만들어서 과일은 토핑으로 줄까 고민하고 있어요. 저녁에 저희 먹는데 옆에서 짜증 수치가 느는 하나에게 몇입만 다시 줘볼까 하고 냉장고에서 꺼내다가 바로 주는 실수를 했지 뭐예요? 바로 우는 거 보고, 아차, 실온으로 주랬지? 싶었어요. ㅎㅎㅎ 이게 책으로 읽은 것들이 아직 몸에 아로새겨지지 않아서 쉽지 않네요. Kvickly에서 Øko라고 되어있는 브랜드인지 뭔지 사다가 줬는데 하나가 열심히 안먹으면 그냥 제가 먹고 하나는 집에서 만들어주는 것도 생각해보고 있어요. 오늘 쌀가루, 메밀가루, 옥수수가루하고 뭐 다른 거 조금 사왔는데 말이죠. 하나가 안좋아하면 다 제가 먹어버릴거예요 ㅋㅋㅋㅋㅋㅋㅋㅋ ㅠㅠ

      근데 책에도 나오는 이야기지만 거부당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 속상해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너무 맛나지만 거부당하는 건 우리가 먹으면 되니까 속상해마셔요~ ㅎㅎㅎ 화이팅입니다!

      보언홀름 다녀와서 날 잡아 뵈어요~~ 여럿이 모이는 것도 좋지만 한국말로 애들 이야기하며 만나는 것도 오붓하고 좋으니까요 🙂

    • 고마워 승미야. 나도 승미 네가 참 좋아. 존경이란 말은 너무 무겁다. 누군가에게 존경받을 재목은 아니라. 🙂 그래도 그 마음은 정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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