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을 즐기기

나는 일을 해치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정해진 루트가 있고, 그걸 밟아가며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걸 빨리 해낼 수 있으면 가장 좋다. 어쩌면 인내심이 부족하다고 할 수도 있고. 살다보면 협업을 해야해서 타인을 기다려야 하는 순간도 있고, 여러가지 작업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하는 경우, 한 작업을 중간에 멈춰두고 다른 작업으로 넘어가 하는 동안 그 멈춰진 작업이 남겨둔 흔적이 끊임없이 머리속 뒤에서 괴롭힌다. 저것도 빨리 끝내야 한다고. 뭔가를 끝내는 데 초점을 맞추면 과정을 즐기기 어렵다. 여기서 즐긴다는 것은 정말 즐긴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일에 걸리는 시간과 그게 언제 끝나나를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그 순간의 작업에 집중하는 자체가 꽤나 어렵다.

내가 하는 일들이 대부분 긴 호흡의 프로젝트들이라 짧으면 몇달에서 길게는 일년을 넘어서는 일들이 많은데, 그런 긴 호흡이 주는 유연성의 장점을 좋아하면서도 그게 힘들게 다가올 때가 있다. 바로 언제 이걸 끝내나 하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이 찾아오면 그 과정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다보면 더 초조해지기도 하고. 그런 때면 의식적으로 초조한 마음을 조절해야 한다.

늦봄부터 집을 유지보수하는 여러가지 일들을 해오고 있다. 집 외관의 매지 부분을 미장하는 것부터 테라스 기름칠하기, 집 외부 벽과 담장 등 나무로 된 모든 곳을 페인트질 하는 것 등. 집안 구석구석 실리콘을 교체하는 작업도 남아있고, 자잘하게 손 볼 것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집안일의 특성상 이걸 해치운다고 끝나는게 아니고, 그 기간 중 살면서 쓰면서 새로이 유지보수할 것들이 조금씩 나온다. 이걸 한번에 다 해치워야 한다면 비용을 지불하고 외부의 도움을 빌리는 방법이 있을 것이지만 외부의 도움에 의존하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기회와 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자유를 박탈하는 것일 수 있다. 물론 돈도 들고. 또 한번에 해치운다 해도 언젠가 또 유지보수를 해야하고. 굳이 한번에 해치워야 하는 게 아니라면 천천히 시간을 들여가며 할 수 있다. 여기엔 많은 계획이 필요하고, 이를 시행함에 있어서 착오를 겪을 수도 있고, 과정이 진행되는 도중 정돈되지 않은 혼돈을 옆에 두고 살아야 할 수 있다. 혼돈 속에 사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게 주는 스트레스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이나 법적으로 전문가의 손을 빌려야 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가급적 우리가 다 하기로 했다. 큰 유지보수를 하다보면 그 과정에서 평소에 어떤 곳을 어떻게 유지보수해야하는 지 배울 수 있게 되니까 한번 고생하고 나서 그 다음엔 소소히 손을 보는 식으로 잘 관리할 수 있게 되기도 해서고, 워낙 외부 손을 쓰는 게 비싸기도 해서이다. 덴마크인이 핸디맨이 되는 과정을 이해한다고나 할까? 이렇게 부모가 관리의 노하우를 배우면 아이들도 가르쳐가며 세대를 따라 전수할 수 있게 되니까.

유지보수 프로젝트들을 통해 여러 건자재, 화학제품에 대해서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게 큰 힘을 주는 것 같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인가 아닌가 하는 불확실성 자체가 주는 마음의 부담을 많이 덜어주기 때문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라는 표현은 여기에 쓰기엔 너무 과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뭔가를 안다는 건 어느정도 자유를 주는 게 진정 옳다. 외부의 손을 빌어 대대적 프로젝트를 한다면 기간 중 집이 난장판이 될텐데, 우리가 하면 그 정도를 적당히 통제해가며 진행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는 혼잡함이 생긴다. 이를 보고 고통을 느낄 수 있는데, 최근의 프로젝트를 통해 이 혼잡함과 혼돈을 감내해가며 그 긴 과정을 받아들이고 서둘러 해치워가려는 게 아니라 그 과정에 집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특별한 배움이 있다기 보다는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그걸 거스르려다보면 문제가 생기거나 피로도가 과도해질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중간에 과정을 갈무리하고 휴식을 취하고, 또 다른 날에 갈무리한 지점부터 일을 시작하는 것, 그를 위한 정리와 준비과정 모두 시간 낭비라 생각하지 않고 하나하나 해내 가는 것이 마음에 안정을 준다.

이게 잘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괜한 마음의 불안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는데, 완벽하게 해내려는 것도 아니고, 안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향으로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믿음을 갖고 불안을 떨쳐내는 것이 중요함도 배운다.

과거였으면 싫었을 소위 내 몸을 써서 해야하는 힘든 일들을 직접 하면서 인생의 많은 지혜를 배운다. 이 지혜들은 이런 물리적인 작업 뿐 아니라 회사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들에도 적용되는 것이라 놀라울 뿐이다. 어떤 종류이든 일을 하면 배우는 게 생기고 인생을 해쳐나갈 힘을 얻는다. 그래서 오히려 힘이 나고 행복하다.

배움의 즐거움

부모님이 나에게 어려서부터 익히 말씀하신 건, 부모님으로서 주고 싶은 건 물고기가 아니라 물고기를 잡는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연배가 드심에 따라 이것 저것 주고 싶은 마음과, 주고 싶은 만큼 주지 못하심으로 인해 생각이 다소 변하신 바도 있겠지만, 나의 성장기동안에는 항상 그를 주지시키셨다. 그리고 나에게 여러 종류의 배움의 기회를 주셔서 그 과정을 통해 배움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배움에 대한 다소의 강박이 생겼긴 했지만, 그건 내 성격 탓이고. 

내가 하나에게 주고 싶은 것을 꼽자면 바로 그 배움의 즐거움이다. 배움에는 시기가 없고 배움의 종류에도 제한이 없다는 것도 함께. 

테니스와 배드민턴, 탁구 등 부모님과 함께 했던, 또는 부모님의 권유로 시작했던 (전혀 진지하지 않게 취미/가족 스포츠로서) 운동에서 운동의 재미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부모님의 권유로 시작했던 피아노에서 (한때는 속으로 몰래 싫어하면서 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참 긴 시간) 클래식 음악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사실 발레를 좋아하게 된 건 이런 것들이 다 결합된 취향일 지 모르겠다.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의 선율에 맞추어 정교한 몸의 움직임을 통제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발레라는 예술이자 운동이 나에게 얼마나 큰 배움을 주고 있는지 모른다. 끊임없는 노력, 미미하지만 끊임없는 발견과 발전, 나의 한계에 대한 인지,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넓히려는 또 다른 노력, 내 몸의 구조와 근육에 대한 이해. 내가 몸담고 있지 않은 예술 직종에 대한 간접적 노출과 이해 등… 

이에 더불어 부모님의 도움으로 일찍부터 시작한 영어나 중국어 학습을 통해 내가 언어에 평균보다 좋은 감각이 있다는 것도 알았고 그로 인해 새로운 언어에 대한 관심도 갖게 되었다. 그로 인해 찔끔찔끔 공부한 여러 유럽언어들이 다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지금 덴마크어를 공부함에도 도움을 주고 있기도 하고. 앞으로 덴마크어가 영어보다 더 유창한 언어가 되는 시점에는 또 새로운 언어를 공부하고자 하지 않을까 싶다. 배움이 주는 즐거움을 아니까. (물론 이게 인스턴트한 즐거움이 아니다보니 즉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리지 않게 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긴 하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해, 배움은 평생을 이어가도 닿을 수 없는, 영원이 풀어가야할 숙제임도 알고 있다. 이 또한 즐겁다는 것도.

하나에게 물려주고 싶은 건 바로 이러한 배움의 즐거움을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그리 해주셨듯이. 남들보다 잘해야 하는 게 아니라 어제보다 더 잘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연습밖에 없다는 것. 배워봐야 좋고 싫음도 알 수 있다는 것을. 작은 실패와 성공이 자기에게 어떻게 힘이 되는 지를. 얼마나 내가 이걸 잘 알려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뭘 알려주고 싶은지 아는 것만으로도 좋은 출발이라 생각해본다.

배움에 대한 두려움

내가 아는 것이 세상의 진리와 지식 중 티끌만큼도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아는 바를 삶의 매 순간에 지속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내가 알고 있는 바를 마치 모르는 것처럼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사람이다.

나는 새로운 것을 배움에 있어서 두려움을 느낀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은 원래 어려울 수 있고 따라서 배우는 것을 한번에 다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님을 머리로는 알지만, 술술 읽히지 않는 책을 접할 땐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유독 크게 느끼고 그 부족하다는 감정을 느끼기 싫어 아예 읽는 것을 피하기조차 한다.

자리에 진득하게 앉아 집중해 대여섯시간을 내리 읽어야 다음날 수업 준비가 될만큼 많은 읽을 거리가 주어지니 여유를 갖고 읽을 새가 없다. 수업시간이 주당 24시간의 수업과 덴마크어 수업 7시간을 제하고 나면 휴식을 취할 시간따위는 없다.

문제는 빨리 읽어내려가야 할 교과서나 논문이 술술 읽히지 않는다는데 있다. 물론 수업이 끝나고 나면 그 전날 가졌던 의문의 대부분이 해소가 됨에도 불구하고 매일 새로운 읽을 거리를 마주함에 있어서는 두려움이 있다. 최대한 의문거리를 줄이도록 깊은 사고를 하며 읽고 싶지만, 그럴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기에 질문 거리를 빠르게 체크하면서 읽어나가야 한다. 많은 질문거리를 쌓아내고 나면, 과연 내가 이것들을 충분히 이해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더 많이 이해했어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스스로에 대한 질책이 마음속에 휘몰아친다.

내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매일 피부로 느껴야 한다는 것이 부담이 된다. 그래서 미룰 수 있는 순간까지 최대한 읽는 행위를 미룬다. 주중엔 미룰 수 없으니 그렇다지만, 주말엔 일요일 오후가 되기까지 미루고 또 미룬다. 참 어리석다. 왜 조금 더 부지런하게 살 수 없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이게 나인가 싶다. 배움이 즐겁기도 하지만, 과연 내가 이 교육이 끝난 후 내가 원하는 바를 할 수 있을 만큼 다 흡수해서 성장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아예 중도에 안하면, “안해서 그랬어. 하면 다 할 수 있는데.”라는 변명을 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유치한 생각이 빈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전체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지만 매일, 매순간 무의식중에 그런 생각을 하기에 뒤로 미루기를 하는 것 같다. 회피의 순간을 지속적으로 찾는 나를 알기에 나 스스로를 설득하는 법도 배우게 된다. 미룬다고 달라지지 않거나 혹은 더 악화된다는 것, 조금이라도 더 하고 가는 것이 좋다는 것 등을 스스로에게 자꾸 이야기해 준다던가, 아니면 주중에 공부에 투자하는 시간이 50시간 이상 되니 금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읽을려는 노력이 실패해도 스스로를 비난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것 말이다.

이 모든 생각의 저변에는 난 사실은 이만큼을 해내야 해, 하는 자만심이 깔려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생각을 하면서 또 인간성이 덜 된 나를 질책하게 되지만, 그보다는 이 부족한 모습의 내가 나 스스로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받아들여야 할 지도 모른다. 앞으로 조금은 더 나아진 내가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