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 가지치기

인간관계는 유동적이다. 연안가에서 만나는 조류와도 비슷한 것 같다. 밀물과 썰물이 있지만 물이 완전히 빠져 없어지지는 않는다. 깊은 관계는 남아 있고, 가벼운 관계는 드나든다. 그 중엔 드나듦을 반복하는 얕은 관계도 있고, 한번 빠져 나가면 다시 들어오지 않는 관계도 있다. 깊은 관계도 긴 시간의 흐름 속에 변화가 생기기도 한다.

아직도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은 나이와 함께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나 한가지 느끼게 된 것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주고 받게되는 사람이 있다면 멀어지는게 좋다는 생각이다. 뭔가 주제에 미스매치가 있어서 같이 이야기하면 나도 상대도 뭔가 어색하다. 그 사람이 좋고 나빠서가 아니라 나와 합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엔 잘 몰랐던 부합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형태를 뚜렷이 드러낸 것이다. 부정적인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끊어내고난 후에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가 없어지는 걸 몇차례 경험한 후 앞으로는 더욱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렇게해서 생긴 시간과 에너지는 깊은 관계의 친구들뿐 아니라 가볍게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서서히 다져진 다른 관계나 다른 활동에 쓸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부정적 에너지 가지치기는 매우 중요하다.

En funktionel krop

En rigtig tynd krop. Det var min drømme krop, da jeg var ung. Min mor sagde, at det hverken er pæn eller sund, men jeg synes ikke, at det passede. Nu er jeg dog helt enig med hende. Jeg synes, det er vigtigt at have en funktionel krop, det vil sige, at kroppen kan give os et sundt liv samt yde det funktioner, som vi gerne vil opnå med vores krop.

Efter jeg er kommet over 40 år plus en fødsel, kunne jeg mærke tydeligt, at alle de små skævheder i kroppen vil udløse smerter ved heftige eller intense brug. Det er på en måde dårligt, fordi det gør ondt, men på en anden måde er det godt, for jeg kan få øje på de skævheder og undersøge, hvor jeg skal arbejde på for at rette op med dem.

Jeg har haft en skæv ryg i lang tid. Dog var det ikke sådant så dårligt. Måske har det hjulpet meget at danse ballet, for det kræver, at vi forlænge vores ryg, som retter ryggen op. Men min skæv ryg er begyndt at udtrykke sig gennem smerter, siden jeg begyndte at intensivere min klatretræning. Sikring af makker kræver at jeg kigger op på loftet i ca. fem minutter, og træningen kræver styrke og udholdenhed, samt maksimal kraft en gang i mellem. Det afslører alle de steder, hvor mine muskler er svækket og kompenserings mekanisme aktiveret. Det er ikke altid dårligt at få nogle belastningsrelaterede smerter i kroppen, for det indikerer, at jeg skal gribe ind med en anden måde at bruge kroppen på.

Fra nu af, allerede siden før, skal jeg bruge min krop på en god måde. Jeg er blevet meget mere opmærksom på kroppens signaler og har lært, hvordan jeg kan eksperimentere med at tilpasse mine bevægelser for at isolere mekanismer forbundet med de pågældende smerter. Men den bevidsthed har jeg lært vigtigheden af kroppens funktionalitet. Samt har jeg lært, at hvor skadeligt det er, når der skabes og udbredes sådan usunde og syge kropsidealer i samfundet.

Jo længere vi lever, jo vigtigere bliver det, at vi kan leve selvstændigt uden at få hjælp af andre ift. mobilitet. Det er direkte forbundet med livskvalitet. Jeg prøver at lære min datter at kende vigtigheden og glæden ved motion og sport og håber, at hun vil fortsætte sådan god en livstil som teenager og voksen.

Jeg bliver mere kræsen.

Det må gælde for alle, at man bliver mere kræsen med det hele over tid. Det sker i takt med, at man lærer sig selv bedre at kende ift. f.eks. hvad man kan lide, hvad man har brug for, hvad man vil komme til at bruge, mv. Måske afføder det, at man bliver konservativ med aldring. Ikke fordi man har lyst til at være konservativ. Mere fordi man er sikker på, at hvad man vil kunne lide eller blive tilfreds med.

Jeg på nogle punkter er meget selvsikker. Jeg ved, hvad jeg kan lide og ikke kan lide. Det er blevet endnu tydligere med tiden. Det kan for nogle virke, at jeg ikke vil prøve noget nyt, når de meget entusiastisk har anbefalet noget til mig, men jeg ville bare lytte og smile uden at sige, at jeg også ville prøve. Har jeg super meget tid og andre ressourcer, ville jeg nok prøve. Men når tiden og andre ressourcer er knappe, vil jeg hellere gøre noget, jeg selv har lyst til. Jeg har lyst til at høre om deres gode erfaringer og oplevelser, men lad mig selv bestemme over, om jeg også ville prøve det.

For venskab gælder det også, at jeg bliver mere kræsen. Lærer man nye venner eller bekendte at kende, tager det tid til at finde ud af, om den oprindelige kemi vil fortsætte eller aftage. Med tidens løb afsløres nogle gange, at det ikke fungerer. Jeg kan f.eks. ikke lide, når samtalens emner hele tiden vender tilbage til om andre mennesker, selvom jeg prøver at dreje det til noget andet. “Hvordan har XX det? Jeg hørte, at YY er, gør det eller har det sådan sådan.” Jeg kan heller ikke lide, når personen spørger hele tiden ind om noget, som personen selv kan tjekke på nettet, eller om noget som jeg laver og gør, som om personen også ville prøve det, hvis det er godt. “Har du prøvet det? Hvordan er det? Vil du anbefaler det til mig? Hvad skal man gøre med det eller det? Vil det gælde også for mig?” Det uendelige nysgerrighed for at berige sit liv i bekostning af min tid og energi gør mig utroligt træt. Jeg vil gerne have lidt mere afslappede relationer, hvor vi kan snakke om tingene eller vores liv uden at have en dårlig smag i munden efterfølgende.

Hvad gør man, når kemien ikke er der længere, eller når forholdet skader mere end det gavner, mens den pågældende person ligger midt i min venskabskreds? Det har jeg stadig ikke fundet frem til. Jeg kom dog frem til, at jeg kan blive passiv-aggressiv i ageren over for dem, jeg har besluttet mig at holde afstand fra. Denne side af mig bryder jeg mig ikke om. Jeg blev nødt til at bestemme mig, om jeg skal tage en snak med personen og fortæller, hvad der ikke fungere imellem os, eller om jeg blot skal undgå at være sammen med personen i forskellige sammenhæng. Det lyder dog allerede passiv-aggressiv. Jeg ved det ikke…

부부관계

유튜브에서 우연히 이혼사유에 대한 동영상을 보았다. 섹스리스가 이혼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부분이는데, 사람들이 이혼을 하게 되는데 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 소위 성격차이 등을 이유로 헤어지는 경우에 그 기저에 섹스리스가 깔려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그걸 본격적인 이유로 꼽기는 주위의 시선 등 여러가지 까닭으로 저어하지만, 섹스가 부부관계의 역학에 미치는 영향력이 엄청 크다고 했다. 그렇다면 섹스리스가 이혼의 배경이 된 사람들은 왜 섹스를 하지 않게 되었을까?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아서 섹스를 하지 않게 되는 것인가? 그건 각자에게 너무나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특정한 답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면 반대로 성생활이 원활한 부부는 어떤것일까? 과연 배우자가 좋고 사랑해서 섹스를 하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섹스관계도 좋기 때문에 배우자가 계속 좋고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 동영상에서는 섹스관계가 좋으면 엄청 큰 문제가 아닌 이상 작은 갈등은 섹스를 통해 쉽게 풀 수 있다고 했다.

40대 중반의 나와 50대 초반의 옌스는 결혼 초기나 지금이나 성적인 욕구나 관계 빈도 그런 것들이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큰 갈등 없이 잘 지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반대로 원만한 성관계 덕에 갈등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과거의 관계들을 돌아보자면 성관계는 서로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 싶다.

과거의 나는 그닥 많은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 모든 연인관계에서 성관계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안할 수 있으면 안하는게 제일이고 해도 좋은지도 모르겠고, 더러운 느낌도 들고. 또한 그 좋지 않음 자체가 나의 결함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불안함을 안겨주었다. 굳이 좋지도 않은 것을 하고 싶지는 않으니 피하다 보면 그게 또 상대에게도 거절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하고 간혹은 상대의 수동공격적인 반응을 유도하기도 했다. 내가 원치않음을 받아들여주지 않는 상대에게 실망도 느끼고, 혹여나 그런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는 무드 조성을 피하게 하기도 하는 등 괜한 피곤함마저 생겼다.

나는 성적으로 청소년기에 트라우마가 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성관계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걸 이야기할만큼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서 이를 해소할 수 없었다. 옌스는 그걸 내가 털어놓을 수 있었던 첫번째 사람이었다. 사실 확신을 할 수는 없었다.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 내 잘못인 일도 아니었지만 트라우마라는 건 그런거 아닌가. 이성적이지 않은 반응일지라도 그게 갖는 의미나 영향력이 컸기에 이를 타인의 일처럼 객관적으로 보고 보듬을 수 없는 그런 것. 옌스는 나의 트라우마를 내 입장에서 잘 듣고 소화해줬고, 나를 보듬어주었다. 그 덕에 이 일이 더이상 트라우마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성관계가 더이상 더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성관계는 사랑의 언어가 되었다.

결혼 10년차 우리는 더이상 예전처럼 설레임에 두근거리고 그렇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서로를 아끼고 보듬고, 서로를 여전히 남자와 여자로 느끼고 원한다. 일상에 무뎌지지만 서로를 무뎌지지 않게 하는 것은 부부관계라는 사랑의 언어 덕인 것 같다. 나를 원하는 그를 보며 우리는 잘 지내고 있음을 확인하고, 상대도 나와 마찬가지의 감정적 상호 인정을 확인한다. 나의 무수한 결점을 그대로 드러내지만 사랑을 받고, 이는 상대도 마찬가지다. 나신을 보이고 살을 섞고 체액을 교환한다는 것은 가장 나약한 순간에 서로를 나와 하나로 받아들인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남자애라서 그래

간간히 남자애를 가진 한국엄마들에게 듣는 이야기다. 내가 “여자애”답지 않아서, “여성”스럽지 않아서 느꼈던 한국사회속 좌절을 상기시키는 말이라 그 말들이 귀에 꽂혔다. 거슬렸다가 정답인 것 같다. 그게 내 좌절을 다시금 곱씹게 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그때의 프레임을 떠올리게 했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용감하고 과감했으며, 씩씩했다. 활발하고 활동적이었으며, 무리를 주도하고 이야기의 중심에 서는 것을 좋아했다. 어려서는 “걔는 좀 남자같잖아”라는 게 나를 묘사하는 말이었으며, 그게 내 성별의 틀 안에서 벗어나는 이상함인 것처럼 인식되는 것 같아서 상처를 받았다. 성인이 되어서는 “좀 여성스러워져야 남자들이 덜 부담스러워하지. 너무 자신감 넘치고 씩씩하고 그러면 남자들이 부담스러워해.”라는 말로 내가 뭔가 잘못된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지금은 그게 아닌 것을 알고, 그냥 나는 나인 것을 잘 알고 있다. 아이에게도 여자는 어때야 한다거나 하는 말은 하지 않는다. 일부러 생각하고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과거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정리하면서 인간의 개성이 얼마나 넓은 스펙트럼을 보이는가, 또한 이런 프레이밍이 스펙트럼의 외곽에 있는 사람에게 스스로에 대한 의문을 던져줄 수 있다는 생각이 확고해져 자동적으로 그리 행동하게 되는 것 같다.

어떤 원인을 개인에게 돌리지 않고 그 개인이 속한 그룹에게 원인을 돌리는 일은 편견의 근간이 될 수 있고 책임을 회피하게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좋은 특성이 개인에게 기인하지 않고 그룹에게 속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좋은 성향이 특정 그룹에 속한다는 편견을 조장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나쁜 특성이 개인이 아니라 특정 그룹에 속한다고 생각한다면, 본인의 책임보다는 그룹의 특성이니 이해해야한다는 식의 책임감 회피성을 조장할 수 있다. 과장해 표현한 것이지만 기본적인 메커니즘은 그렇다.

그 이야기를 듣는 그 타이밍에 그 이야기를 딱히 하지는 않았다. 이게 어떤 의식적인 행동은 아니고 무의식에서 나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를 통해 내가 말하는 것에 들어있는 다른 방면의 프레이밍, 편견 등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얻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빠르게 정보를 처리하며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 끊임없이 구분하고 구분된 카테고리에 이름을 붙인다. 그래야 다음의 비슷한 상황에 빠르게 이를 적용하고 대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게 개개인의 머리속에 있는 프레이밍이다. 따라서 이 자체는 나쁜게 아니다. 다만 이에 대해서 스스로 사유하고 정보를 업데이트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의 능력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남자라서 그래”는 너무 단편적인 프레이밍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소통, 솔직함, 신뢰는 자유를 준다.

작년 심리상담을 마친지 어느 덧 일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지금도 마음 깊숙히 간직하고 있는 가르침/깨달음은 크게 세가지로 요약된다.

  • 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괜히 짐작하지 말라.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믿되, 혹여나 그게 전혀 상황과 맞지 않아 믿기 어렵다면 직접 물어보라. 그리고 그걸 믿어라. 각자가 말하는 내용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라. 그걸 말하는게 두렵다면, 그 조차도 표현하라.
  • 타인은 내 행위를 평가할 수는 있지만 나를 평가할 수는 없다. 나는 그 상황에서 그 타이밍에 판단한 바에 따라 행동한 것이고, 그게 나를 온전히 정의할 수 없다.

별거 아닌 것 같은 거지만 이걸 믿고 행동하는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걸 믿고 행동함에 따라 나를 좀먹던 불필요한 에너지가 사라졌다. 이곳에서 이렇게 행동해도 되나? 이런 불확실성이 사람의 에너지를 빨아먹는데, 그럴 것 없이 이렇게 해도 되냐고 주변에 물어보면 된다. 물어볼 사람이 없는 상황이라면 그냥 내가 판단한 최적의 행동을 하면 된다. 뭔가 진짜 문제가 된다면 누군가가 저지하거나 언질을 줄 것이다. 또 언질을 받는다면 부끄러워 할 것 없이 행동을 수정하면 된다. 나는 그 상황에 최적의 행동을 하고자 노력한 것이니까. 이런 말을 해도 되는가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대처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가지 전제가 있다. 우선 내가 상황과 상대방에 대해서 선한 의도로 내 가치에 비춰 부끄럽지 않게 행동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게 전제가 되면 나는 떳떳하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해야 하기 때문에 솔직함이 요구된다. 이에 더불어 상대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상대도 선한 의도로 접근한다고 우선적으로 믿는 것이다. 대화의 과정에서 선한 의도가 아님이 드러나면 그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거나 그에 맞춰 행동한다. 사실 이는 익숙해지기 전까지 꽤 많은 연습을 요구하는 과정이다.

우리가 대화에서 상처를 받거나 기분이 나빠지는 경우는 – 물론 상대가 일부러 상처를 주려는 경우도 있겠지만 – 나 스스로 내 안에 해소되지 않는 갈등이 있어서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내가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되지 않고 싶은 것,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내가 내가 되었다고 생각하거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괴리가 있어 내적 갈등이 있는데, 이를 누군가 어떤 형태로든 건드린 것 같다고 판단되는 순간 상처를 받거나 기분이 상한다. 사실 상대는 그걸 일부러 건드린 것도 아니고, 내가 마음에 갈등만 없었다면 크게 문제없이 넘길 수 있는 사안이었을수도 있는데 말이다.

해소되지 않는 갈등은 해결하던 상황을 받이들이던 하면 된다. 타인의 의도가 나쁜 것 같으면 속으로 기분나빠하지 말고 그런 의도냐고 물어보면 되고, 의도가 나쁜 게 아니었다면 그냥 내 생각을 답하면 된다. 답하기 싫은 거면 답하지 않으면 된다. 상대의 속을 읽으려는 노력을 높이 평가하는 “눈치”게임이 우리를 평생 힘들게 해왔다. 눈치를 버리니까 마음의 평화와 자유가 찾아오더라. 타인의 눈치를 안보고, 타인이 좋게 이야기하면 좋은게 좋은 거지가 아니라, 정말 좋게 생각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나는 남과 다르고 나라면 그렇지 않을텐데 하는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소통하자.

체육, 신체능력, 부모의 역할

엄마랑 통화를 하면서 들어보니, 체육을 엄청 많이 시키는 나를 보며 아빠는 아이가 체육쪽으로 가는 거 아니냐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그게 긍정적인 코멘트인지 아닌지는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약간은 우려를 하신게 아닌가 싶다. 사실 나는 아이가 체육쪽으로 가든 아니든 아이가 좋아하는 일이면 상관없다 생각한다. 우리가 길게 살게 되면 될수록 몸을 잘 관리해서 사는 건 중요하기에 신체의 계발과 관련된 쪽의 일에 종사하는 것은 좋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뭐라도 운동과 관련한 것에서 손을 완전히 놓지는 않았던 나지만, 그렇다고 한 종목을 진득하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내 몸의 사용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고 이를 어떻게 해야 더 잘할 수 있는지를 훈련 관점에서 생각해본 적은 한번도 없다. 그래서 내 몸의 사용법을 뒤늦게 배웠고, 잘못된 몸 사용법이 나중에 어떤 식으로 신체 능력에 영향을 미칠지, 부상과는 어떻게 연관될지 등과 같은 건 생각해보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버렸다. 그나마 30대부터 발레를 시작하고 오랫동안 훈련을 한 덕에 크고 작은 부상을 겪었고, 그래서 몸을 바로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공부하게 되었다.

발레와 실내 클라이밍에 더해서 수영까지 더한 요즘 각각 다른 종목의 근육 사용이 어떻게 다른지, 그러면서도 공통적으로 요하는 것에는 어떤것이 있는지, 그래서 그 종목을 오랫동안 해온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체형을 갖는지를 관찰하고 알아가면서 아이들때부터 이렇게 다양한 체육에 노출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된다.

사실 이런 이유로 이미 아기 때부터 아이의 체력 발달과 관련해 부모가 해줄 수 있는 부분들이 뭐가 있는지를 미리 관심있게 봐두었고 양육에 있어서도 초점을 두었다. 가장 중요한 건 코어 훈련. 갓난쟁이때부터 터미타임하기, 자력으로 앉을 수 있을 때까지 범보의자 같은 의자에 앉히지 않기, 바운서나 보행기 사용하지 않기, 아이가 W자로 앉을 경우 다리를 뻗어 앉도록 하기 등 별것 아닌 거 같지만 아이의 운동 능력에 아주 밀접하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들부터 시작했다. 아이가 W자로 앉는데 익숙해 코어가 안좋으면, 또는 코어가 안좋아 W자로 앉는 걸 선호해 코어가 계속 약한 상태로 유지가 되면 아이의 골반이 전방경사가 되며 코어의 조절이 중요한 운동을 잘 하기 어렵다. 뭔가 몸이 휘적휘적한 느낌이랄까?

매일 보육원, 유치원에서도 밖에서 놀고 했지만, 날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꼭 밖에 나가서 짧게는 삼십분에서 길게는 한두시간씩 아이와 적극적으로 놀아주는 것, 여러가지 체육 활동을 도와주는 것 등으로 신체 능력을 키워줬다. 나혼자 하면 못할 일이지만, 남편은 나보다 훨씬 외부활동에 적극적이고, 사람은 하루에 최소 한번은 야외에서 신체활동을 해야한다는 주의라 가능했던 것 같다.

지금은 학교에서도 적극적으로 놀고, 방과후에도 체조, 발레, 수영, 태권도도 하고 우리와도 밖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혼자서도 줄넘기나 훌라후프 등 여러가지 신체활동을 한다.

부모가 활동적인 라이프스타일을 갖고, 아주 어려서부터 몸을 쓰는 것에 익숙한 아이들은 거의 자동적으로 활동적인 라이프스타일을 갖게 된다. 실제 학교에 가서 어린 아이들을 보면 부모의 라이프스타일을 많이 따라가고, 체형도 그렇다. 사실 십대로 올라가면 또래에 영향을 받아 별도의 노력을 해서 부모와 다른 체형을 갖는 아이들도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성격이고 사소한 습관에서부터 부모의 유전자와 생활환경에서 많은 것을 물려받은데 체형도 이 두가지의 결합의 결과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 중 하나라 그럴 것이다. 거기다가 요즘 아이들은 예전보다 많은 IT기기의 사용으로 인해 정적인 환경에 더욱 익숙해지곤 하는데, 그러다보니 저학년부터 거북목인 아이들도 많이 보인다. 거북목인 아이들은 대부분 어디 기대 앉는 것을 좋아하고 골반이 후방경사인 아이들이 많아서 체중이 뒤로 실리니 뛰고 점프하며 이동하는 운동에서 기능을 잘 하기 어렵다.

나이가 들어서도 바꿀 수 있는 것이니 아이들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겠지만, 어리기 때문에 통증이 없어서 모르고 넘어가고 오히려 일찍부터 나쁜 자세가 시작되서 어른이 되어서 더 문제가 고착될 수 있기에 아이들의 바른 몸사용에 어른들이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러려면 어른부터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이를 라이프스타일로서 아이에게 보여주고, 아이도 적극적으로 동참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그냥 아이만 보내는 것으로는 아이가 운동을 하는 중요성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날씬한 몸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 높은 기능성을 갖는 몸에 대한 추구의 관점에서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물려주는 건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역할이다.

그리고 여기 애들 보면 체력을 엄청 길러서 공부는 고등학교에서 할 녀석들만 바짝 높은 강도로 한다. 대학교도 갈 녀석들만 가고, 가서는 우리 대학보다 훨씬 높은 강도로 한다. 그러니 이 공부를 할 수 있는 체력의 근간을 쌓는게 지금 하는 일중의 중요 요소이다. 한국에서 애들은 벌써 영어학원 다니고 수학학원 다닌다는데, 체육만 시켜서 되겠냐고 하는 걱정에 답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시대에 공부만이 길도 아니고, (이미 그렇지 않기도 하고) 체육 코치들이 정신과 의사가 가장 보기 어려워하는 환자 직업임을 생각한다면 체육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건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덴마크어 학습방법

팔꿈치 신경이 눌려서 새끼와 약지손가락에 살짝 저림이 생겨서 의사를 만나고 왔다. 팔꿈치 터널 증후군때문인데 클라이밍에서 난이도를 올리면서 내 현재 팔 인대가 감당할 이상의 부하를 준 탓인 듯 하다. 팔을 접고 옆으로 누워 자는 자세도 한몫 한 것 같고.

의사에게 증상을 설명하는데, 저리다는데 쓰이는 표현을 søvnig라는 단어로 했는데, 약간 다른 sovende라는 단어로 표현했어야 했던 모양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졸려운”과 “자고 있는”의 차이인데 자고 있는에 해당하는 단어를 썼어야 했다. 의사가 정정을 해줘서 정확한 표현을 하나 알고 넘어가게 되었으니 하나의 수확. 아 대충 잠과 관련된 단어를 쓰는 것 같아서 søvnig로 썼는데, sovende였었냐며 알려줘서 고맙다고 했다.

진료가 끝나고 덴마크에서 산 지 얼마나 되었냐고 의사가 묻는다. 2013년 7월 말에 왔으니까 이제 9년이 좀 넘었다고 했더니, 놀랍다며, 진료하면서 보면 오랫동안 살아도 덴마크어 못하는 사람 정말 많은데 søvnig 아니었으면 몰랐을 거라고.

연극 보는 걸 좋아하는데, 그걸 혼자하는 것보다는 누군가와 함께할 때 더 좋다. 그런데 의사가 말한대로 오래 산다고 해서 덴마크어를 잘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걸 같이할만한 친구가 많지 않다. 발레 친구들은 발레 보는 걸 좋아하지 연극을 좋아하지는 않더라. 사실 난 덴마크어를 잘 못할때도 연극을 종종 봤는데, 배경 지식을 갖고 들어가면 그런대로 따라갈만했고, 또 그런 경험을 통해 덴마크어가 조금씩 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더욱 의식적으로 그런 활동을 찾았던 것 같다. 모든 것을 이해해서 온전히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좋지만, 다 이해하지 못할 때도 take away 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괜찮다는 어프로치로 감상하면 공부도 되고 문화생활도 되니 좋지 아니한가!

내 주변에 도대체 어떻게 덴마크어를 늘려갈까 고민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아이디어로서 영감을 주기 위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그래서 내 문화생활 파트너를 늘려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사심이 가득한 글.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재미있기도 하고 스트레스받기도 하는 일이다. 이미 영어로 생활이 가능한 사람이 비영어권 국가에 살면서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래서 더욱 쉽지 않다. 굳이 그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새로운 언어를 쓰고 배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말을 더듬어가며 바보같아 보여지는 상황에 나를 던져넣고 싶지 않고 싶은 건 대부분이 느끼는 심정일 거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 나를 던져 넣지 않고 책으로 영화로 말을 늘린다는 건 현실적으로 너무 어렵다. 능독적 활용 없이 수동적 인풋만을 활용하는 학습만으로는 능동적 활용능력과 수동적 활용능력의 갭이 갈수록 커져서 능동적 활용을 오히려 꺼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덴마크어처럼 빠르게 말하고 우리 기준에서 매우 미묘한 차이를 가진 다수의 모음 음가를 지닌 언어의 경우 일상생활에서 능동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경우 자신의 어휘와 독해 능력 대비 타인이 내 말을 알아듣게 하거나 내가 타인의 말을 알아듣는 능력이 상대적으로 크게 떨어지게 되서 시간이 갈 수록 자신감을 잃게 된다. 내가 쓴 시간에 비해 나아지는 게 크게 없다는 생각이 들 때 특히 자신감을 잃게 된다.

성인이 되어 비영어권에 나와 언어를 배워야 되는 상황이라 하면 어떻게 하는 게 빨리 배우는 방법이 될까?

우선 일상에서 그 언어를 최대한으로 사용하는 게 중요하다. 상대가 답답해서 영어로 전환하더라도, “내가 덴마크어를 배워야 돼서 덴마크어로 대화를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최대한 덴마크어로 하고 싶다. 도저히 이해가 안되거나 표현이 안되면 그때 영어로 일부 이야기하겠다.”라고 표현하면 여태까지 딱 한명 빼고는 다 기꺼이 덴마크어로 응대해줬다. 덴마크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바로. 음식을 주문하는데 필요한 표현, 상점에서 물건을 살때 가격을 묻고, 물건의 위치를 묻고, 결제 방법에 대한 대화 등 다양한 시나리오에 따른 대화 표현을 학원에서 배웠으니 그걸 바로 써보는 것이었다. 당연히 일상 생활에서는 예상치못한 추가 질문이 따라오기도 하고 그를 이해하지 못해서 재차 물어보다가 이해 안되서 영어로 바꾸게 되는 일도 있고, 실수를 해서 엉뚱한 결과가 생기기도 했다. 그런 에피소드들은 일련의 대화를 더욱 쉽게 기억하도록 한다. 실수했던 일이야 말로 잘 기억이 나게 되서 다음에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수준보다 조금 어려운 것이라서 처음 한 챕터 정도는 내가 마주하는 단어의 10% 정도를 사전에서 찾아야 하는 책 정도가 좋다. 소설이든 뭐든 대부분 어떤 주제나 장르상의 일관성이 있기 때문에 같은 단어가 여러번 나오게 된다. 단어장을 만들어서 그냥 그 단어를 찾은 결과를 적어내려가면서 읽다보면, 동사와 같이 문장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단어중에서 자꾸 기억이 안나 여러번 사전을 찾아야 하는 단어가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걸 왜 기억 못하지 하는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그냥 여러번 단어장에 기록을 한다. 그러다보면 어느 타이밍에는 기억이 된다. 시간이 지나면 처음엔 사전찾느라 정신없던 챕터 두어개가 지나고, 슬슬 좀 더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구간이 나온다. 책 한권을 다 끝내지 못해도 좋다. 그렇게 몇 챕터 읽고 다른 책을 또 읽고 하다보면 작가별로 다른 어휘나 문장의 사용형태에 노출이 되면서 어휘와 표현을 늘릴 수 있게 된다.

책이 지겹거나 공부하기 싫을 땐 영화나 티비 트라마, 리얼리티쇼,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장르별로 내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보면 된다. 자막 띄워 놓고 다 이해한다는 목표 의식은 옆에 접어 두고 즐기면서 보되, 반복되는 모르는 단어때문에 이해에 방해가 된다 싶은 건 사전을 찾아보면서 본다. 시간이 흐른 후에 실력이 조금 더 늘었다 싶을 때 또 한번 본다. 그러면 그 전보다 더 많이 들리고, 더 많이 이해된다.

영상의 경우 음성보다 영상에 의존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더 많은 음성 노출을 위해서는 라디오나 팟캐스트를 이용하는 것이 아주 좋다. 전적으로 음성에 의존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압도적인 양의 노출이 가능하다. 그리고 뭔가 읽으면서 해독할 수 있는 보조 매체가 없기 때문에 귀의 민감성이 고조된다. 쉐도윙을 하면서 굳이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따라 말하며 듣기도 하고, 굵직한 내용을 중심으로 따라가면서 관련 어휘들을 늘리는 것도 방법이다. 대부분 주제에 따라 반복되는 단어가 있기 때문에 그 단어를 모르더라도 소리를 따라할 수 있고, 그게 워낙 중요한 단어의 경우 소리 비슷하게 구글 검색해보면 오타가 나더라도 비슷한 추천단어 검색결과를 볼 수 있고, 매체의 프로그램 소개 내용을 통해 관련 내용을 검색해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관련된 글 등을 찾아 읽어보면 음성으로 들었지만 정확히 뭔지 몰랐던 단어를 눈으로 마주했을 때, ‘아, 이건가?’하는 생각과 함께 사전을 찾아볼 수 있고, 그 궁금증이 해소되었을 때 경험이 그 단어를 보다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게 도와준다.

연극을 보는 것은 영상과 또 다르다. 중간에 멈추고 사전을 찾아볼 수 없지만, 영상보다 또박또박한 발음을 들을 수 있다. 발성에 있어서 전문가인 배우들이 나와서 공연을 하기 때문이다. 미리 내용을 학습하고 가서 볼 경우 그걸 토대로 상당 부분 따라갈 수 있다.

잘 이해될 수 있을 때쯤 봐야지, 들어야지, 경험해야지, 말해야지라고 생각한다면, 반대로 보고, 듣고, 경험하고, 말해야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조언하고 싶다. 순서가 반대다. 공을 어떻게 차야하고 다루는 지에 대해 정말 잘 설명한 책을 자세히 읽는다 해도 축구를 직접 해서 몸에 익히지 않고서는 그 책에 기술된 내용을 다 이해할 수도 없고 그렇게 다 기술된 책을 찾을 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완벽하지 않게라도 일상생활을 덴마크어로 완전히 전환하는데까지 3년의 시간이 걸렸다. 학업이 영어로 이뤄졌기에 전문적 영역에서의 덴마크어 전환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면서 상황에 던져져서야 이뤄졌으니 정확히는 4년이 걸렸다고 할 수 있겠다. 어렵게 이력서를 써서 제출했기에 가능할지 어쩔지 모르는 상황에서 시작되었던 직장에서의 첫 한두달은 업무시간의 40%를 사전 찾는데 쓴 것 같다. 법전이며, 공문서, 리포트 등 읽을 게 태산이었는데다가 보고서를 쓰면서 정확한 표현을 쓰기위해 사전에 크게 의존해야했기 때문이다. 중간에 스트레스로 10개월 정도 쉬었던 기간에 다양한 텍스트를 읽고, 학원에 다시 나가 조금 더 인텐시브하게 공부한게 한단계 언어 수준을 끌어올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4년이 지난 지금은 한국어 다음으로 덴마크어가 편하다. 어휘는 덴마크어가 영어보다 부족할지언정 듣기능력에서는 덴마크어가 더 낫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실생활의 표현에 있어서 덴마크어 표현력과 이해력이 영어의 그것보다 낫다. 아무래도 영어 공부를 예전처럼 안하기도 하고 영어로 된 영화나 티비 시리즈를 안보는 이유가 한 몫 하는 거 같다.

오늘은 영어로 하고 다음에 덴마크어로 해야지, 덜 중요한 것일때 덴마크어로 해야지, 이런 마음은 옆에 고이 접어두고 이 말 빼고는 못한다는 마음으로 접근할 때 언어가 는다. 원래 쉬운 길이 있으면 그리로 가게 되어 있다. 그 두 길 다 가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말고 한 길은 공사중으로 닫아두고 언젠가는 가야 할 길로 지금 당장 가자. 훨씬 더 빠르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덴마크어 과외 편익 평가

덴마크어 과외를 시작한지도 거의 한달이 다 되어간다. 이번주만 하면 한달이다. 한달에 85만원… 비싸다… 워낙 비싸기 때문에 길게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고 대충 여름휴가 전까지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비쌈에도 옌스가 흔쾌히 과외를 하라고 한 이유는 기존 학원에서 선생님의 수업을 반년간 들으면서 실력이 훌쩍 늘은 것을 자기도 목도했고, 지금 수준과 목적에 맞는 수업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실제 이 시기에 내 PD3 분야별 점수가 평균 7점대에서 전분야 12점으로 올랐다.

과외는 일주일에 한시간 반. 내가 쓴 보고서를 봐가면서 첨삭하고 내가 자주 헷갈리는 문법의 예외적 부분 등을 검토하거나 문법적으로 내가 약한 부분을 점검하고 있다. 과외를 하고보니, 이정도 레벨에 다라서는 학생이 자기가 필요한 부분에 맞도록 수업의 방향을 정하는데 있어서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가장 큰 초점을 보고서 작성에 맞추고 있는데, 그 짧은 한달도 안되는 시간 사이에 보고서 작성이 훨씬 수월해졌다. 계속 나를 괴롭히던 소수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나니 보고서 작성에 가속이 붙는다. 그리고 덴마크 공식문법사전에 수록된 문법과 예외 관련된 내용을 찾는 법을 배우고 나니 앞으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갈 방법의 실마리도 얻었다.

사실 상사도 내 보고서를 수정해주는데, 그게 실력향상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이유가 있다. 내가 작성한 보고서를 상사가 수정할 때는 내가 한국어로 보고서를 작성해도 상사가 보면서 고치 것처럼 조금 더 매끄럽거나 상사의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에 맞추도록 문장을 이리저리 매만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틀린 문법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예외 규정에 해당하는 부분들이었어서 ‘왜지?’하는 물음을 지울 수가 없기도 했다.

예전에 내 친구가 나에게 한 말이 있다. 나는 정말 교육에는 아낌없이 투자하는 것 같다고. 다소 낭비같은 상황도 많을 정도로. 나를 너무나 잘 이해한 말이다. 결국 시간이 지나서 느낀 건 다소 낭비같았던 투자도 사실 큰 낭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어디 갖다 버리는 게 아니고 다 내 머리에 쌓이는 정보이니까. 비자타입의 문제로 남들 다 공짜로 배우는 덴마크어를 1년 반 동안이나 한달에 70만원씩 내가며 학원을 다녔던 적이 있는데, 그 돈이야 말로 정말 훌륭한 투자였다. 그 때 덴마크어 기초를 닦지 않고 나도 공짜로 다니는 시기를 기다렸더라면 대학원 다니면서 취직 전까지의 수준으로 실력을 늘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 다니는 직장에 취직을 못했을 거다. 우리 전공이 주로 공기관에서 커리어를 찾게되는 것을 고려해보면 지금 다니는 직장 뿐 아니라 한동안 취업이 어려웠겠지.

과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너무 비싸다, 너무 큰 투자다라고 말하지만, 그건 편익을 따지지 않은 비용만 본 평가라 생각한다. 취업이라는 편익만으로도 이 투자는 빠른 시일내 회수가 가능한데다가 덴마크 생활에서 언어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스트레스의 저감, 보육원이나 학교에서 아이의 발달상황에 대한 충분한 대화, 덴마크 사회 안으로 빠르게 동화될 수 있고 주변 현지인과의 관계가 여러 방면으로 깊어질 수 있다는 점 등을 생각하면 그 비용은 미미하다. 그렇게 투자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것도 감사하지만, 여유를 떠나 그 투자에 적극적으로 지원해줄 수 있는 건 옌스가 이런 부분을 깊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나와 옌스는 생각이 참 비슷하다.

누군가가 덴마크어 과외 하는 것 어떠냐고 물어보면 자기가 열심히 한다는 가정하에 나는 정말 강추하고 싶다.

차별과 편견 사이에서

인종, 성별, 종교, 성적지향 등 여러가지 주제에 대해 차별과 편견에 대한 토론은 나라를 가리지 않고 뜨겁게 벌어지고 있다. 덴마크에서는 성별이나 인종과 관련한 편견을 넘어서 사실에 대한 표현을 포함해 이에 대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토론이 꾸준히 이뤄진다. 스웨덴은 그와 그녀라는 인칭대명사가 누군가에게는 부적절한 표현이 될 수 있다 해서 성중립적인 인칭대명사를 만들기도 했다. 심지어 크리스마스에 해당하는 단어인 율(jul)이 붙은 크리스마스빵, 크리스마스소세지, 이런 것도 비기독교인을 소외시키는 표현이 될 수 있다 해서 겨울로 단어를 바꾸는 일도 생기고, 그 또한 부적절하다면서 논쟁이 붙기도 하고 있다. 

덴마크식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에 대한 고민은 때로는 너무 멀리간 것 같다 생각한다. 옛날 노래에 쓰인 당시에 생각없이 쓰이던 인종차별적인 표현이 쓰인 노래를 새로운 개정판에서 아예 빼버린다는 사례가 있었다. 또 학교노래책에 나온 “덴마크 소녀는 금발머리 소녀”라는 표현이 금발머리가 아닌, 이민자나 이민자의 후손인 사람들을 소외시켰다 하여 해당 노래를 부르지 않게 하겠다는 어느 대학교의 발표 사례도 있었고. 또한 공공장소에 가족 구역을 표시하는 표시도안을 두고 남녀로 구성된 부모와 엄마 손을 잡고 있는 아이가 성적인 편견을 고착화시킨다며 문제시되는 사례도 있었다. 심지어 어떤 대학교에서는 학생이 법적 이름을 쓰는 것을 꺼릴 수 있으니 교수에게 수업 시작 전, 그런 예민한 사안에 대해 학생들과 미리 교감해서 실수하지 않게 하라거나, 여학생이나 남학생 표현을 써서 성별로 구분을 하지 말라는 지침이 나왔음이 알려지기도 했다. 옛날 노래에 나온 인종차별적인 표현은 잘못된 과거의 표현의 과오를 돌아보는 사례로 쓸 수도 있는데 무조건 덮는 것 같기도 하고, 차이에 대한 인식이 차별로 이어질까 두려워 미리 그런 기회조차 막으려는 게 나에겐 과하게 비쳐지기도 한다. 나뿐 아니라 이에 대해서는 양론으로 갈리는 듯 하다.  

그러나 이는 사회 전체적 차원의 고민이고 개인적 수준에서는 이런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높은 감수성과 상반된 상황을 간간히 접할 수 있다. 인종에 대한 편견이나 아시아에 대한 무지 등으로 인해 빈정상하는 상황 말이다. 덴마크인의 냉소적인 농담은 자기 비하를 담는 경우도 많고 농담일 경우 우리 모두는 동등하게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평등의식하에 조롱성 농담의 대상에 성역이 없어서 정치인, 종교적 지도자 등 할 것 없이 다 조롱성 농담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농담에 성역이 없다는 의식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농담이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예를 들어 백인이 기독교인에 대한 조롱성 농담을 하는 것처럼 특권을 가진 사람이나 평소 편견의 대상에서 배제되는 사람이 자기에 대해서 아니면 비슷한 상황의 사람에 대해 조롱성 농담을 할 경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백인이 무슬림에 대한 조롱성 농담을 하면 문제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생김새가 다르기 때문에 대우상 차별을 받거나 놀림을 당한다거나 하는 두드러지는 차별적 상황이 있다. 이처럼 편견과 차별이 다 얽혀있는 경우 상황이 명료하다. 하지만 애매한 경우도 종종 생긴다. 아시아인이라고 무조건 중국어로 인사를 한다거나, 두 손을 모아 합장하는 인사를 한다거나, 아시아인은 이렇지? 라며 어디서 유래한 건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한다거나. 국제커플이 가입한 카페에 근근히 올라오기도 하고 지인들에게 듣기도 하는 기분 나쁜 상황들. 이게 기분나쁠 일인지, 아닌지, 짜증이 약간 나는데 현지 서양인 지인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싶어 물어봤을 때 그들이 그냥 친밀감의 표현이라 넘기면 팔은 안으로 굽는건가, 아니면 내가 예민한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오랜시간 곰곰히 생각해본 결과 편견은 편견이고 차별과 구분해야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차별과 편견을 혼용해서 쓰면 논점이 흐려지고 토론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는 일이 생길 것이고, 실제 이런 일은 왕왕 벌어진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편견에 부딪히게 되고 그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한다. 편견은 좋지 않은 것이고 바꿔갈 노력이 필요하지만 편견 자체가 차별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편견 자체는 사람의 머리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이를 바꾸도록 강제할 방법이 없지만 차별은 시정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 채널이 존재할 수 있다는 데에서 차이를 갖는다.

내가 아시아인이라 아시안누들과 간장소스, 밥 등을 좋아할 거라 상대가 믿는 건 편견이다. 내가 아시아여자라 순종적일 거라 생각하는 것도 편견이다. 내가 아시아인이니까 수학을 잘할 거라 믿는 것도, 영어를 못할 거라 믿는 것도 편견이다. 여자는 밥을 잘할 거라 믿는 것도 편견이다. 여자는 히스테리컬하다고 믿는 것도 편견이다. 아시아 여자는 여성스럽고 작고 내 말 잘 듣고 착할 것 같아서 아시아 여자만 좋다는 것 (소위 옐로우 피버)도 편견이다. 

하지만 이건 차별이 아니다. 차별은 일련의 편견으로 인해 남들과 달리 나에게 어떤 권리나 기회가 배제되는 경우를 말한다. 따라서 내가 아시아인이라 영어를 못할 것이라 믿어 서류 검토도 안하고 이력서를 옆으로 재껴두는 것, 아니면 자기가 만난 아시아 부인에게 상대가 서양인이었으면 요구하지 않았을 부당한 것을 당연히 요구하고 이에 불응시 불이익을 주는 것이다. 

물론 차별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 편견을 가질 때 문제의 발생 가능성이 높아진다.

사회적으로 편견이 널리 퍼져있을 경우, 그게 차별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편견을 깨려는 노력을 한다. 하지만 편견을 가진 모든 사람을 나쁘다고 할 수 없다. 그게 그 사람이 받은 교육의 수준일 수 있고, 주변 상황에서 오는 한계 때문일 수 있다. 시골에서 살면서 딱 한번 외국인을 만나보고 그 외에 보고 들을 일이 없었으며, 일반화의 오류 등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 한명의 외국인에게서 가진 편견을 다른 외국인에게 적용한다 하면, 그걸 교육받지 못한 당신 탓이고 나쁘다, 이렇게 말하기 어렵다는 거다.

외국살이하면 편견을 겪을 일도 종종 있고 굳이 그렇지 않아도 한국은 편견이 넘치는 사회라 이를 경험할 일이 많은데 이 편견 모두를 차별이다 라고 외치는 것도 잘못이라 생각한다. 편견에서 상처를 받는 건 사실 어찌보면 내 선택이다. 편견을 편견으로 치부하고 남의 머리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왈가왈부하지 않겠다고 하고 갈 수 있는 일을 자기가 상처받겠다고 선택한 거란 이야기다. 편견을 해소하는데 일조할 수 있다면 물론 더 좋지만, 그 편견에 차별이라 외치며 혼자 상처받을 필요도 없다.

상처받거나 싸우는 건 차별에 초점을 맞추자. 나와 남의 권리가 편견으로 인해 제한되었을 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