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28일

사회적 욕구가 강한 아이

어제에 이어 오늘도 상당히 힘들게 시작했다. 뭐 하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드러눕고 왁왁 거리며 울고 성질을 내는데 마음의 평정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똑바로 행동하지 않고 그렇게 성질을 부리면 엄마는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고 말을 했다. 엄마가 화가 날 대로 난 것을 눈치챈 아이는 그제서야 자기는 엄마와 이야기 하고 싶다며 울고 백기를 들었다. 사과할 준비가 되었냐니까 죄송하다며 옷도 갈아입고 머리 빗겨달라고 거울 앞에 가서 앉았다. 애써 화난 감정은 추스르고 이야기를 하는데, 애가 죄송하다고 말했다고 해서 그 감정의 앙금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건 아닌지라 딱딱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막상 집 문만 나서면 유치원을 가는 길은 매우 쉽다. 데려다 주는 건 주로 남편이 하는 일인데, 남편도 문을 나서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문을 나서면 그다음엔 쉽다고 했다. 유치원에 들어가서도 나를 한 번 포옹해주고 뽀뽀 한 번 하고 나면 손쉽게 헤어짐을 받아들인다. 어떤 날은 창문 앞에 서서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하고, 어떤 날은 쏜살같이 자기 반으로 들어가 친구들과 놀기도 한다. 친구라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한 시점부터는 유치원에 가는 걸 싫어한 적이 한 번 없고, 삼주간의 여름휴가 기간 중에는 친구들을 너무나 그리워해서 중간에 플레이데이트를 꼭 해야할 만큼 친구와 노는 걸 너무나 좋아한다.

친구 사귀는 것도 좋아하는데, 말의 호흡이 잘 맞아 대화가 통하고, 보육원/유치원에서 보편적으로 가르치는 사회적 규칙을 잘 지키는 아이라면 누구와도 잘 노는 편이다. 뛰고 넘어다니고, 기어오르고, 매달리는 식으로 노는 것도 좋아하고, 상상력을 활용해서 놀거나, 역할 놀이를 하는 것도 좋아한다. 친구와 케미가 맞지 않을 경우 혼자 떨어져서 일인 다역으로 대화를 하며 놀기도 하지만, 역시 친구와 함께하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오늘은 남편이 차고 앞 공터에서 외발자전거를 타며 클럽저글링을 연습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행인이 자기도 한번 타볼 수 있냐며 말을 걸어왔다. 개중 쉬운 외발자전거 한개를 그에게 내어주어 타보게끔 해줬는데, 그 전에 타본 적 있다는 그니는 두어번의 시도 끝에 다칠까봐 몸을 사리며 그만 타겠다고 하더라. 그 와중에 하나는 두발 자전거를 혼자서 온전히 탈 수 있게 되었고, 그 행인의 주변으로 자전거를 요리조리 타는 거다. 예전같으면 이름부터 다짜고짜 물어봤을 것 같은데, 요즘 크면서 예전보다는 (아주 조금이지만) 수줍음을 타는 탓인지, 이름은 물어보지 않고 대화만 하고 자전거를 타며 자랑을 하더라.

그 행인도 자기 갈 길을 가고 나도 하나와 장을 보러 동네 수퍼에 갔는데, 가는 길에 그 행인에 대해 하나가 나에게 이것 저것 물어봤다. 왜 그 사람은 아빠의 외발자전거를 타 본 건지, 아빠만큼 잘 못타는지, 어디 사는지, 이름은 뭔지 등등. 직접 물어보지 그랬냐고 했더니 잊어버렸단다. 이말을 믿지는 않는다. 그렇게 궁금한 것을 쌓아뒀다가 나에게 물어보는 자체가, 잊어버렸다는 말과 앞뒤가 안맞지 않은가? 이유는 불문하고, 나도 모르겠고, 다음에 그 사람을 만나면 꼭 물어보자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하고 있는데, 수퍼에 그 사람이 들어오는 게 아닌가?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얼른 물어볼 거 있으면 물어보라 했더니, 아이는 쌓아뒀던 질문을 던지고, 자기가 엄마랑 쇼핑하러 왔음도 이야기하고, 그사람은 거기에 왜 왔는지, 뭘 사러 왔는지 이것저것 묻고 대화를 나누더라.

사실 하나가 길에서 마주치는 많은 사람과 시시콜콜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까 나도 동네 길에서 자주 마주치게 되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예상치 못하게 대화도 많이 하고 이름도 기억하게 되는 등 과거에 안했을 경험을 하게 된다. 아이가 어른, 아이, 동물 가리지 않고 사회적 교류를 하는 것을 유독 좋아해서 말이다. 굳이 사회성을 두고 보자면 옌스보다는 내가 어렸을 적부터 사회적이었는데, 나도 이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다. 어른들과 이런 저런 대화를 많이 나눠서 그런가? 표정도 그렇고 대화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상대의 이름을 자주 부르기도 하는 등 내가 일부러 배우려 해온 테크닉들을 이 아이는 타고난 거 같아서 탄복을 하게 된다. 사람마다 재능이 다 다른 곳에 있지만 이 아이에게 있는 재능에는 사회성이 있구나 싶다. 아이를 보며 배운다는 말이 나는 아이의 실수를 통해 어른도 배운다는 뜻인 줄 알았더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 정말 애를 통해 내가 배울 일들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내 열정이 향하는 곳에 발레가 있다.

아마 직업이었으면 달랐을 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발레는 취미였으니까. 잘하고 싶은 마음은 있을지언정 압박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가정은 의미가 없다. 가족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에서 지금 나에게 내가 가장 열정과 애정을 품은 대상이 뭐냐고 묻는다면 지체할 바 없이 발레라고 답할 거다. 나에게 한 주, 한 주를 이끌어가는 그 열정의 원천은 발레니까.

탕듀부터 시작해 쥬테, 롱드잠, 프라페, 아다지오, 그랑바뜨망 등 서서히 템포를 올려가는 바부터 시작해서 가벼운 점프부터 왈츠와 같은 말랑말랑한 춤을 통해 큰 점프로 이어져가는 센터까지 구성 자체가 긴장감을 서서히 고조시킨다.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나간다 할까? 뭐랄까 쫄깃한 긴장감이 사람을 흥분시킨다. 그래서 힘들지만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아드레날린이 온몸에 퍼져나가는 흥분감이 막판까지 힘을 짜내어 뛰고 돌게 만든다.

165센치미터의 키에 56 킬로그램의 몸무게. 가볍지 않다. 체지방도 있기에 몸이 조각된듯한 근육질도 아니다. 그래도 오랜 기간을 투자해온 탓에 몸에 잔 근육들이 세세히 잡혀있다. 발레를 하지 않던 시기에 없던 그런 근육들말이다. 승모근과 삼각근, 갈비뼈를 둘러싼 코어근육과 그 위를 덮은 복근, 등판의 어깨뼈를 둘러싼 근육, 척추 옆 근육, 그밖에 다리 안쪽 근육, 다리를 들어올리는 근육, 엉덩이 근육 등 정말 많은 근육들이 달라졌다. 상체 44, 하체 66과 같은 불균형이 많이 사라져서 상하의 사이즈도 중간에서 만나게 되었다.

몸이 좋아지니 동작도 좋아진다. 상하체가 연결되어 손부터 발끝까지 긴장감으로 팽팽히 연결시키는 감각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빠른 템포로 움직이는 동작에서는 이를 다 세세히 신경쓰지 못하고 놓치는 것들이 생기지만, 느린 템포로 움직이는 동작에서는 최대한 온 몸의 유기적인 움직임을 느끼며 동작을 한다. 그런 유기적인 움직임이 느껴질 때면 거울에 비친 내 움직임도 썩 마음에 든다. 나아질 부분이야 좀 많겠냐마는, 또 그 와중에 좋은 것을 찾아낼 수 있어야 더 나아갈 마음이 생기지 않겠는가?

코로나 락다운을 계기로 집에서 파쎄 균형 잡기에 시간과 공을 많이 들였다. 춤이란 게 넓은 공간을 필요하고, 같이 상호작용을 할 사람이 있는 사회적인 운동이라서 그런지 혼자서 좁은 공간에서 하기엔 동기부여가 잘 안되더라. 그래서 좁은 공간에서 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균형잡기와 턴에 많은 공을 들였는데, 아하!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고나 할까. 아직도 끊임없이 교정하고 수정하지만, 근본적인 원리는 조금 알게 되면서 파세에 그전보다 큰 안정감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턴도 좋아지기 시작하고.

출산 이후 2년 정도의 공백이후 다시 시작했던 게 이제 대충 1년 반이 조금 넘는데, 그때 수업을 잘 따라가지 못해 헤매던 나였는데, 이제 틴 학생을 제외하고는 제일 잘하는 학생이 되었으니 그 성장이 크다 하겠다. 작년 10월 하순부터 시작된 포인트슈즈클래스에서 처음 포인트슈즈를 신었던 내가 피케 턴부터 시작해 지금은 5 번 포지션에서의 앙디올 피루엣을 하기 시작했으니까.

발레 선생님도 코로나 락다운이 풀린 6월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내 실력에 큰 변화가 있음을 느끼는 걸 내가 알 수 있었다. 그 전보다 세세한 부분에서 조언을 해주고 내가 바를 하고 있는 곳에 와서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해주는 데에서.

오늘은 더블 피루엣을 연습하라고 이야기해줬다. 그럴 탈렌트가 느껴져서 하는 이야기라며, 일부러 너무 컨트롤하며 박자에 맞춰 한번만 돌 필요 없다고. 덕분에 한바퀴 반이긴 하지만 더블을 시작했다. 아직 시선 처리가 안좋아서 모멘텀을 상실하는 탓에 두바퀴를 다 돌지 못하는 거다. 이제 그걸 좀 신경써서 연습해야 하겠다.

오늘 수업 이후 이 끓어오르는 아드레날린을 주체하지 못해서 이렇게 블로그에 앉아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다. 밤이 늦었으니 이제는 이 흥분을 내려가라앉히며 잠에 들도록 노력을 해봐야겠다.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뜨니까.

2020년 8월 27일

하기 싫다고 거부하는 일을 강제로 시키기

간혹 심하게 떼를 쓰는 날이 있다. 평균적으로 보자면 떼를 크게 쓰는 애는 아니지만, 떼를 쓴다고 하면 정말이지 너무 힘이 좋아서 다루기 힘들지경이다. 오늘 플레이데이트가 있어서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인 아이의 집에서 저녁까지 먹고 놀다 왔다. 볼로네즈 파스타를 한껏 먹었다고 하는 걸로 보아 평소보다도 많이 먹고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그 집 부모들과 잠시 담소를 나눈 후에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데, 이미 피곤해서 그런지 신발을 신는 타이밍부터 뭐하나 작은 거라도 자기가 원하는 바에서 틀어지면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오늘 유치원에서 야외활동을 하느라 걷기도 많이 했을 거고, 새로운 집에 가서 노느라 다양한 형태의 새로운 자극도 많았을 거다. 지금 나는 애의 훈육에 감정을 보다 배제하고자 의식적으로 더 노력하고 있는 터라, 그냥 그렇게 행동하면 안된다고 조용히 설명하고, 내가 해야할 일에만 초점을 맞춰 애를 안아 들고 차에 태워 집에 왔다.

뭘 하더라도 삐딱선을 타는게, 차에서 내려야 되는 데 카시트에서 내리지 않고 자겠다고 하고,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는 둥 이미 집 안에서 전쟁을 한바탕 할 것 같은 예감을 불러일으켰다. 전조가 보였다고나 할까.

아니나 다를까? 집에 들어가서 손 씻는 일이 전쟁이었다. 손을 안씻겠다고 베란다에 쳐둔 자기 텐트로 쏙 들어가버렸다. 남편이 손부터 씻으라고 여러번 이야기했는데도 따르지 않자, 애를 들쳐없고 화장실로 데리고 가고 있었다. 목욕은 안시키더라도 세수 시키고, 엉덩이, 손은 씻겨야 해서 옷을 벗겨야 하는데, 절대 협조하지 않겠다며 목욕탕 바닥에 드러눕는거다. 나는 올바로 행동하지 않겠다고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면서.

이제 우리도 한두번 한 일이 아니니 이력이 나지 않았겠는가? 내가 몸통을 딱 잡고 남편이 손과 얼굴을 씻기고, 남편이 양다리 부여잡고 내가 몸통을 잡고 엉덩이를 씻기고 몸에 물을 타올로 말렸다. 귀를 뚫고 갈 것 같은 날짐승의 포효같은 목소리로 자기가 씻겠다고 하는데 – 진작에 씻지, 다 씻기고 난 후에 또 이렇게 청개구리 짓을 한다. – 그걸 받아주면 또 난리칠 게 불 보듯 훤해서 방으로 들쳐없고 갔다.

의외로 얌전히 속옷은 입었지만, 잠옷은 안입겠다고 또 반기를 들기에, 그 옷 입기 싫으면 그냥 누구 주겠다고 경고했다. 진짜 안 입으면 누구 줄 생각이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옷인데, 그렇게 남 주고 나면 자기 손해지. 역시나 얼른 잠옷을 입었는데, 아직 분이 하늘 끝까지 뻗쳐서 식지가 않는 거다. 들짐승이 내는 으르릉 소리로 같은 소리를 음절 사이사이 끼워 넣으며 ”엄 으르렁 마 으르렁. 제 으르렁 손 으르렁 제 으르렁 가 으르렁… (엄마. 제 손 제가 다시 닦을 거예요!)” 이렇게 말을 하는데 남편이나 나는 너무 어이도 없고 뭐가 그렇게 분할까 싶어서 너털웃음이 나왔다. 나도 안다. 아직 감정을 잘 조절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 작은 일에도 이런 말도 안되는 반응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냥 그 머리속과 가슴속에 어떤 감정의 소용돌이가 돌고 있는 건지 이해하고 싶어도 상상할 수가 없어서 우스운 것 뿐이었다.

마지막 관문인 양치질은 생각보다 쉽게 넘어갔다. 자기도 알기 때문이다. 강제로 양치질을 하는 게 그닥 유쾌한 일이 아님을. 힘은 힘대로 썼는데 피할 수도 없고, 우리도 우악스럽게 힘을 써서 아이의 턱을 붙들어야 하니 턱도 아플 게 틀림없다. 대부분 10초 안에 굴복하고 입을 열었지만, 그 저항을 참 많이도 했었으니 우리나 애나 이골이 난 전쟁이다. 그래서 더이상 양치질은 큰 관문이 아니게 된 것 같다.

세살 반.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게 아직 훨씬 많은 나이. 해야하는 것은 해야하고, 해서 안되는 것은 하면 안되고, 하고 싶은 것도 하면 안될 게 많고… 그런 아이를 대상으로 우리는 감정을 싣지 않고 최대한 우리의 역할을 다하는 건데, 지금 여기에 오기까지 크고 작은 전투를 많이 치르면서 마음 속 갈등도 정말 많이 겪었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 이렇게 해도 되나? 이럴 땐 어떻게 해야하지? 그런 갈등. 때로는 유치원 선생님의 조언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육아서의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일련의 문제들을 해결하곤 하지만,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 부정적 인센티브를 결부시킨 훈육 – 예를 들어, 이렇게 행동하면 네가 원하는 일들을 해 줄 수 없다든가, 재우러 들어갔는데 애가 자지 않을 때 지금 잠자리에 누워서 잘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엄마가 그냥 나가겠다는 것과 같은 부정적 인센티브 설계 – 를 어떻게 배제할 것인가 하는 것이 있다.

나와 씨름을 해서 그런지, 오늘은 아빠가 재워주는 날이었는데도 꼭 엄마를 옆에 두겠다고 주장하여 우리 가족 셋 다 하나 방에 누워서 남편이 읽어주는 책을 들었다. 어른 둘이 누워 자리도 없는 매트리스에 엄마랑 같이 있겠다고 내 몸 위에 자기 몸을 겹쳐누웠는데, 솔직히 너무 무거웠다. 그래도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씨름을 한 뒤에 애와 살을 부비고 누우니 너무 좋은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재워도 되는데, 자기가 덴마크어로 책을 읽어줘야하는 날이라며 우기는 남편을 보며, 남편도 참 많이 바뀌었다 싶었다. 애가 어릴 때는 지금과 같은 수준의 감정교류가 어려웠던 탓에 내가 대신 애를 재우겠다 하면 냉큼 좋다고 바꾸고 나갔을 남편이었는데, 지금은 아이 재우는 게 너무 좋고, 중요해서 바꿔주지 않겠다니. 아무튼 그렇게 애는 잠이 들었다. 너무 피곤한 탓인지 7시 반에 재우러 들어가 9시 반이 되서야 잠이 들었다. 내일 고생하겠네. 오늘은 우리도 일찍 자야할 것 같다. 내일의 전투에 준비태세를 갖추려면…

2020년 8월 26일

부모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당당히 요구하자

남편과 나, 둘 다 가벼운 감기기운이 있어서 코로나 테스트 예약을 해두었다. 토요일에야나 테스트가 가능하다고 해서 남편이 사무실에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나야 집에서 일하니까. 학생들에게 연락해서 수업을 취소한다고 해두었다. 코로나라고 생각되기 너무 어려운 증상이지만 예방 차원에서. 애는 아무런 증상이 없어서 유치원에 보냈다.

친구가 유치원에 아이 언어 발달과 관련된 걱정을 진지하게 나눴더니 미팅을 잡아줬다고 했다. 어제 미팅을 했었을 것 같아 잘 했는지 연락을 했더니, 언어 발달 프로그램을 별도로 잡아준다고 했단다. 유치원 내부에서 다른 친구들과 함께, 또 외부 전문가를 통해 밖에서 개별적으로. 우는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은 한국 뿐 아니라 덴마크에서도 적용이 되는 모양이다. 예전에 하나 병원에 입원했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부모가 매사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곤란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아이에게 추가적인 자극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설 경우 적당한 시기에 부모가 개입을 해서 도움을 청하고 대응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선의를 믿고 움직이지 않으면 바쁜 일상 속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리곤 하는 게 여기서도 일어난다.

잘 따르는 선생님과의 작별

유치원 선생님 한 분이 이달 말을 기점으로 관두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좋으신 분으로 하나가 엄청 따르는 분이고, 우리 유치원에서 14년이나 일하신 분이라 왜 관두시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선생님을 마주쳐 관두시는 이유 여쭤봐도 되겠느냐 했더니, 작년에 새로 부임한 유치원장님과 맞지 않아서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우리 입장에서야 선생님들하고만 접촉하니까 원장님이 어떤지는 느낄 일이 없어서 어떤 면에서 맞지 않았는지 여쭤보니, 선생님들끼리 잘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 상의를 하면, 선생님들끼리 잘 결정하라고 한다는 거다. 본인은 어려움이 있을 때 책임을 지고 의사결정을 해줄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하다며, 그게 안되는 채로 시간이 흐르면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다는 거다. 그게 어떤 느낌인지 나도 과거 경험을 통해 알기에 이해한다는 말이 그냥 나왔다. 양쪽의 말을 다 들어본 건 아니지만, 선생님의 느낌은 또 본인의 느낌인 거니까, 둘 사이의 리더쉽 관점에서의 케미스트리가 매우 안맞았다는 건 분명하다. 누군가에겐 좋은 리더일 것이고, 누구에게는 안좋은 리더일 것이고. 아쉽다는 마음과 함께 보고 싶을 거다라고 이야기하는데 목이 잠기고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내 아이를 봐주는 선생님으로 믿도 맡기도 따라온 좋은 선생님이 리더와의 케미 문제로, 오래 일하신 직장을 떠나 다른 곳을 알아보신다니 마음이 엄청 상했고, 진짜 보고싶을 거였기 때문이었다.

아이도 선생님이 매우 보고 싶을 거다. 어느 타이밍인가에는 하나도 유치원을 졸업해서 선생님을 거의 보지 못하는 시기가 오긴 하겠지만, 그건 자기의 새로운 앞길에 대한 설렘과 겹치며 그 여파를 크게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넘어가겠지. 특히 미리 진학할 학교를 방문시키며 적응기간을 거치는 덴마크의 시스템 속에서는 더더욱. 하지만 자기의 일상이 지속되는 가운데 선생님이 관두는 건, 그것도 자기가 정말 많이 따르는 선생님이 관두는 건 조금 충격적인 일일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고 길게 아이를 돌봐주던 선생님들이 관두시거나 일하시는 건물을 바꾼 일이 몇차례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아이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덜 힘들어할 지도 모르겠다. 아직 세상을 삼년 반 정도밖에 살지 않은 아이지만, 정을 쌓고 작별을 하는 일에 적응하고 있다는 것에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나오시는 다음주 월요일에 하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별거 아니야, 라고 털 수 있는 능력

Pyt med det! Skidt, pyt! 라는 말이 있다. 안좋은 일인데, 별 거 아니라고 하고 넘어가자고 할 때 하는 말이다. 작은 일에 집착하는 것,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는 일이다. 작은 실패도 넘어가지 않고 개선을 하든, 정정을 하든 해서 상황을 바꾸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고, 그냥 넘어가도 될만한 일 하나하나에 집착해서 짜증을 자주 느끼거나, 실패하는 일에 크게 스트레스를 받게 될 수도 있다. 시간이 갈 수록 덴마크인들도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서서히 바뀌어 가는 것 같지만, 우리나라와 다르다고 여전히 느껴지는 건 어떤 일상의 불편함이나 실수, 실패 등에 있어서 ”Pyt med det!” 하고 말하며 툭툭 털고 가는 걸 잘한다는 거다.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이런 태도를 가르쳐주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포함해서.

우리도 하나에게 어떤 실수나 실패를 할 경우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하면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가 잘 못하는 일로서, 나 또한 이런 마음을 가지려고 실천하고 있는 바라 더욱 이를 가르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이제 하나는 두발 자전거를 평지에서 스스로 출발해서 페달을 밟아 주행하고 코너를 돌고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브레이크를 잡아 정지하는 것까지 모두 익혔다. 아직 잘 못하는 것들이 있지만, 우선 해낼 수 있는 단계까지 왔다. 그러기까지는 물론 무수히 많이 넘어지고 연습을 했다. 넘어질 때마다 아파하는 건 호호 불어주고, 피나면 반창고도 붙여주지만, 원래 그렇게 배우는 거라며 시도하게끔 도와준다. 하기 싫다면 강요하지는 않고. 동시에 아이 아빠나 나 모두 각자의 취미를 연마하는 과정에서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는 모습을 계속 보여준다. 또한 연습만이 실력이 좋아지는 유일하는 방법이라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해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Øvelse gør mester. (Practice makes perfect.)”, 이건 하나가 세살이 되기 전부터 이미 흔히 하게 된 말이다. 그래서 그냥 실패에 크게 속상해하지 않고 배우는 법을 이미 익힌 것 같다. 혼자서도 잘 일이 안풀리면, ”Pyt med det!”하고 이야기 하니 말이다.

물건과 관련되어서도 뭔가 잘못되었을 때, 그걸 해결하거나 크게 속상해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치려고 한다. 이미 꺠진 거 속상해봐야 달라지는 거 없으니까, 얼른 그 감정을 털어버리는 게 중요하다 싶다. 어제는 하나가 많이 기대하던 새 신발 두 켤레가 도착했다. 발이 커져서 새로이 신발을 장만해야 했는데 신발이 젖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여벌까지 해서 두 켤레를 주문했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색깔 취향 정도만 반영해 내 마음대로 나이키 등에서 활동성이 좋은 신발 중심으로 구입을 해왔는데, 이번엔 본인의 취향을 적극 반영해서 불이 들어오는 캐릭터 신발 – 내 취향이나 기준에는 별로 맞지 않지만 – 을 샀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한켤레의 불이 잘 안들어오는 거였다. 한짝은 아예 불이 들어오지 않고, 다른짝은 반절만 들어오는 거다. 막상 주문한 나도 속상한데, 반품하고 또 주문하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번잡했다. 내 거였으면 그냥 넘어갈만한 일이었는데 어떻게 할까…하는 갈등으로 찰나의 순간 마음 속이 동하고 있었는데, 하나가 “Pyt med det!”라며 괜찮다는 거다. 그래서 얼른, “신발 색깔이 이뻐서 불이 조금 안들어와도 마음에 들지?”라고 물어봤더니, 그렇다는 거다. 귀찮았던 마음을 한번에 해결해 준 하나의 태도에 고맙기도 하고, 귀찮음을 이겨내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고 다소 미묘한 마음속 갈등이 생겼지만, 그냥 그런 속상한 상황을 그렇게 넘길 수 있는 태도를 가진 하나가 대견해서 그거려니 넘겼다.

자식을 키우는 일에 농사라는 표현이 이런 때 와닿는다. 하루하루의 작은 일들이 쌓여서 아이의 태도에 영향을 주니까. 물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 많아서 농사라는 표현을 쓰는 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직접 어떻게 발현할지 선택할 수 없는 유전자라는 씨앗이 가장 큰 일을 결정한다는 점에서도 말이다. 콩심은 데 콩나지, 팥이 나지는 않을 게지 않겠는가. 

2020년 8월 24일

아이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

주말에 친구 두명과 그들의 가족을 초대해서 오후 내내 놀고, 식사도 같이 하는 등 나름 큰 사회활동도 있었고, 여기저기 몇몇 놀이터를 돌아다니며 힘들게 놀아서 그랬는가, 하나가 오늘은 피곤했는가보다. 유치원에서 데리고 오는 순간부터 평소보다는 기운이 덜 넘쳐보였고, 작은 일에도 크게 성질을 내는 것이 피곤한 탓인 것 같았다.

아파트 현관문 앞에서 아빠가 집에 와있냐고 물어보길래, 아직 회사에 계신다고 했더니, 나보고 갑자기 사랑한다는 거다. 그 뒤를 이어, 아빠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덧붙이며. ”왜 아빠를 사랑하지 않아요? 그 이야기 들으면 아빠가 슬퍼하실 거 같은데요?”라고 물어봐도 그냥 아빠를 사랑하지 않는단다. 집에 올라오는 길에, ”집에 가면 가장 먼저 해야하는 일이 뭐지요?” 라는 질문에 입을 삐죽삐죽하며 ”손을 씻어야해요.”라고 답을 하더니, 그 루틴 마저도 다 못마땅한 듯,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서있기만 하고 손은 안씻는단다. 손 다 씻을 때까지는 화장실에서 나오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나는 빨래를 널러 베란다에 나가있는 도중, 손 씻는 소리가 들리더니 애가 거실로 들어오는 거다. 세면대 물 흐르는 소리는 계속 나는데.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언성을 높이면서 물을 잠그고 돌아오는데, 이 작은 반항꾼 얼굴엔 심통이 가득나 있다.

빨래를 계속 널고 있으니 나에게 말을 거는데, 이번엔 내가 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네가 태도가 영 엉망이라서 너랑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고 하니 자기는 엄마랑 이야기하고 싶다고 바르게 이야기하더라. 그래서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빨래 너는 것도 돕고, 다시 기분이 좋아졌는지 나와서 나와 놀자고 해서 힘껏 몸으로 열심히 놀아줬다. 이렇게 엄마랑 놀자고 하는 것도 몇년이나 갈까 싶어서. 좀 놀았다 싶었더니 그제사 아빠가 보고 싶다는 거다. 그 참에 왜 아빠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느냐 질문을 던지니, 아빠가 집에 없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고 서운했다는 거다. 아… 서운하면 미운거구나. 그걸 잊었구나. 평소에 아빠가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내가 데리고 오고 해서 아빠가 좀 늦게 오는 걸 당연히 받아들이는 줄 알았더니, 그게 서운하기도 하고 그래서 기분도 나쁠 수 있구나.

막상 아빠가 왔는데, 여전히 엄마랑 놀려는 아이를 보며, 그전엔 이런 아이의 나에 대한 집중과 큰 관심이 버겁기도 했던게 기억나면서, 힘들지만 즐기라는 주변의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어보았다. 정말 이게 얼마나 소중한 관심인가. 그리고 이 시간이 얼마나 짧은 건가. 막상 이러다가도 내가 발레 간다고 집을 나서면 쿨하게 바이바이 하는 아이가 대견하기도 하고, 살짝 서운하려고도 하는 거다. 이 이중적이고 복잡한 기분

오늘은 내 예상대로 애가 피곤했었는지, 평소보다 삼십분 정도 이른 여덟시에 이미 골아떯어졌다고 했다. 잠시 들어가서 자는 모습을 바라보니,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세상 남부러울 게 없는 가장 큰 보물을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괜히 애 이마를 쓰다듬었다. 한켠으로는  살짝 꺠어나 나에게 인사를 해줬으면 하는 마음 반, 다른 한켠으로는 푹 계속 잘 잤으면 하는 마음 반으로… 잘 자렴, 하나야.

2020년 8월 21일

화를 표현하는 방법

집에서 화난다고 문을 닫는 사람도 없고, 보육원에서도 같은 상황에서 문을 닫을 수 있는 여건도 아닌데, 화나면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가는 건 어디에서 배웠을까? 기분이 상했을 때 혼자있고 싶어하는 건 인간의 본능인걸까? 그렇다고 아무도 방을 들여다보지 않을 때 방문 밖으로 나오는 걸 보면, 혼자 있고 싶어하는 게 아니라 그 마음을 누가 보듬어달라고 대놓고 항의하는 걸까? 혹시나 후자일까봐 얼른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문을 닫고 나가라고 냅다 큰소리를 치는 것을 보면 꼭 그런 건 아닌 거 같다. 그냥 복합적인 마음인 것 같다. 혼자 있고 싶으면서 또 누가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얽히고 섥힌. 거기에다가 요즘흔 한 술 더 떠서 화가 난 순간 저리로 가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우리도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타이밍에는 말 또는 행동을 똑바로 하라고 목소리를 높여 엄포를 놓기도 하지만 평소에는 그렇게 행동하면 무시작전으로 일관을 한다. 그러면 제풀에 지쳐 방 밖으로 나온다. 화가 심하게 났거나, 자기가 꼭 하고 싶은 일을 우리가 못하게 한 경우에는, 나와서 소리를 또 지르거나 화를 내는 등 자기의 의지를 관철시키려는 행동을 한 번 더 하기도 하지만 – 그러면 같은 사이클을 반복한다 – 그 밖에는 아무일이 없던 척 하거나 안아달라고 와서 화해의 제스쳐를 보이기도 한다. 화해를 하러 우리에게 접근을 해오는 경우 알아서 굽히고 들어와 사과를 하기도 하지만, 그게 아닌 경우는 우리도 왜 잘못했는지를 설명해주고 사과를 요구하며, 사과를 해 오면 이를 받은 후 꼭 안아줘 화해를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준다. 그러면 언제 무슨일이 있었냐는 듯이, 또는 더 과장해서 좋은 일이 있었는 냥으로 신난 태도를 한다. 사랑스러운 녀석.

양치질이 너무나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는데, 자기가 거부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강제적인 방식을 동원해서라도 꼭 양치질을 하고야 만다는 것을 알고, 또 그 경험이 유쾌한 것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한 후에는 조금 수월해졌다. 강제집행(?)의 단계로 가기 직전에 항복을 하면서. 이럴 때 보면 많은 게 쉬워졌다. 그렇지만 육아 선배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해 준 것이, 애가 크면 육체적으로는 덜 힘들고, 정신적으로는 더 힘들다는 것이었기에, 또 앞으로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와 긴장이 동시에 된다.

아이가 크니 일상이 또 바뀐다. – 플레이데이트

오늘은 하나 유치원 친구의 엄마가 하나를 함께 데리고 집에 가서 놀리고 저녁도 먹인다고 했다. 이제 대충 격주로 금요일마다 하는 행사가 되었는데, 그러면 남편과 나도 우리끼리 외식도 하고 오붓하게 산책도 할 수 있어서 흥이 넘친다. 언제 이렇게 컸는가 하는 생각에. 그리고 애를 데릴러 가서 아이 친구의 부모와 대화를 나누며 친교도 나누면서 인맥도 넓어지니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애의 친한 친구 숫자가 늘어나면서 유치원 밖에서의 친교를 나누고 싶어하는 숫자도 늘어나니 좀 복잡하기도 하고, 애의 사회적 활동이 우리 가족활동에서 차지하는 시간도 늘어나고 피곤해지는 단점이 있다. 정말 요즘 너무 바쁘다. 일과 집안일, 내 사회활동과 부부, 가족간 사회활동, 아이의 친교활동 등으로 달력이 꽉꽉 차간다.

예전에는 내가 항상 우선이었는데, 애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내 일이 밀리기 시작한다. 그런 엄마들을 예전엔 존경하기도 하고, 이해하지 못하기도 했는데, 지금 내가 그렇게 바뀌어 있으니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이런게 자연스러운 일이구나 싶기도 하다. 뭔가 대단한 희생이 아니라, 애가 기뻐하는 걸 보니 나도 모르게 바뀌는 변화. 그래도 나를 잃지는 말아야지. 애는 15년만 있으면 독립해 나갈테니 그 때 나도 나만의 것을 갖고 있어야 그 빈 자리를 너무 큰 상실감 없이 채울 수 있을테니까.

43개월의 하나

아이가 요즘 부쩍 컸다. 이제 세돌 반을 지난지도 거의 두 달이 다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큰다는 말을 하기엔 이제 조금 큰 게 아닌가 생각을 하던 요즘, 또 갑작스럽게 크는 바뀌는 일들에 다시금 깜짝 놀라게 된다.

오늘은 혼자서 잔다고 하는 거다. 그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책 읽는 시간을 가진 후, 우리를 방 밖으로 밀어내는 일들. 그러다가 잠에 들지 못해 우리를 다시금 불러들이던 일들이 그 전에도 수 차례 있었기에 크게 놀랍진 않았다. 다만 놀라웠던 건, 자기가 혼자 책을 읽고 자겠다고 하며 아예 처음부터 나를 밀어낸 것이었다.

에이, 뭐 그래봐야 곧 나를 부르겠지… 라는 내 어림짐작이 무색하게도 하나는 결국 혼자 잠이 들었다. 한번 나를 불러서 잠깐 들어갔는데, 잠깐 꿈을 꿔서 무서웠다는거다. 그럼 그렇지. 그런데 잠깐 배를 만져주고 났더니 이제 괜찮다면서 나를 다시 밀어내는 게 아닌가. 그래서 다시 나왔다. 혹시 잠이 들긴 했나, 뒤척거리고 잠이 들지 못했을 거 같아 들어갔더니, 잠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지만 혼자 자고 싶단다. 그러다가 정말 혼자 잠이 들었다.

최근에 몇번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자기 혼자서 잘 잔다고. 다 커서 밤에 깨서 엄마, 아빠가 보고싶어도 그냥 다시 혼자 잘 잔다고. 대견하다고 말하면서도 언제고 무서우면 엄마, 아빠한테 와달라고 해도 된다고 했는데 오늘은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구나.

하나가 이렇게 부쩍 크는 모습을 보여줄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엄마, 아빠는 매일 매일, 아이가 커서 독립하기까지의 시간동안 우리도 아이를 품안에서 놓아주는 연습을 매일 하는거구나. 저녁에 해야할 일이 많을 때, 애를 재우는 시간에 조급한 마음을 품었던 기억이, 뭘 그렇게 조급해 했나 하는 생각으로 바뀐다. 이렇게 금방, 혼자 잔다고 할 것인 줄 알았다면 더 많이 품어주고, 더 길게 그 시간을 쓸 걸.

우리가 불안해서 놓지 못하던 밤기저귀도 그냥 하지 말자 하니 그냥 떼버린 것도 그렇고, 변화는 그냥 순식간에 오는 것 같다.

아직 엄마를 많이 찾고 안아달라고 조르는 이 순간을 정말 흠뻑 느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요즘은 내가 안아주겠다고 자주 먼저 이야기하기도 하고.

우리 엄마는 다 커서 아이를 낳은 나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하실까? 아빠는 또 어떤 생각을? 옌스는 이런 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하려나.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건 내 인생을 부모의 입장으로 다시 살아보는 것과 같은 일이라 생각한다. 그때 부모님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그런 생각. 하나도 나중에 잘 맞는 배우자를 만나 아이를 낳아서 길러보는 행복을 경험해봤으면 좋겠다는 너무나 먼 상상을 한번 해본다.

발레 사랑

친교는 역시 공감대가 형성되는 게 있어야 하는 것일까? 발레를 통해 일주일에 한두번씩 꾸준히 만나는 사람들이 생기면서부터 그들과 사소한 잡담을 나누는 시간이 길어지고 그 중 한명과는 집에 가는 길을 함께 하면서 친분이 쌓이기 시작했다. 친구가 모자라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나와 같이 열정을 공유할 사람이 있다는 건 참 좋다. 아무래도 내 발레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발레를 하지 않는 다른 친구들이 진정으로 공감해주긴 어려울 것이지 않는가. 발레는 건강 뿐 아니라 나에게 정말 여러가지를 주는 것 같다.

2012년 봄에서 여름사이 어딘가였던 것 같다. 발레를 처음 시작한 게. 어느 학원에서 시작해야할 지 감이 안서서 당시 코트라 다니던 감각으로 우선 발레학원협회부터 찾아본게 시작이었다. 협회에 회원학원 리스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는데, 역시나 내 예상대로 그런 리스트가 있었고, 그 리스트의 무수한 페이지 중 첫 페이지에 국립발레단이 있었던 게 발레와의 첫 인연이었다. 국립발레단 아카데미에 성인취미반이 있었는데, 마침 코트라와 그리 멀지도 않았고, 당시 업무로드가 심각하지 않아 야근에 대한 압박이 크지 않은 부서에 있다는 것도 다 잘 맞아 떨어져서 초보로서 아주 좋은 곳에서 발레를 시작할 수 있었다.

스트레칭은 괴로웠지만 수업을 끝내고 나면 알 수 없는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을 정도로 신경 쓸 게 많은 동작들과 함께 온 몸을 땀으로 흠뻑 적시는 강한 운동수준이 버무려져서 복잡한 머릿속은 깨끗이 비워지고 몸은 한껏 달아올라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에너지로 충전된 상태.

주중 평일 2회 한시간 반씩 참석하던 수업이었는데, 주말 클래스에도 신청을 하며 주 4회가 되고, 중급반 참석도 허락받게 되며 평일에는 세시간씩 클래스를 들을만큼 몰입을 했더니 한달에 1킬로그램씩 빠지면서 한국 귀국 후 베이킹으로 찌운 살을 다 떨어냈더랬다. 덴마크에 와서 딱 나에게 맞는 수업을 찾기가 어려워 중간중간 수업을 다녔다 안다녔다 하기도 했지만 임신 후기 및 출산 후를 포함한 2년반 정도의 휴식기를 제외하면 손에서 발레를 완전히 놓은 적은 없었다. 그렇게 2020년 지금까지 해온 발레. 나에게 이렇게 오랜 기간 열정을 투자해온 일은 없었다.

지금도 끊임없이 고민을 하고 집에서 이래저래 연습을 해보고 배울 게 너무 많지만, 예전보다 테크닉적으로 훨씬 많이 늘고 이제 조금 춤을 춤답게 출 수 있어서 훨씬 더 즐겁다. 스트레칭도 예전처럼 괴롭지 않고 달아오른 몸을 약간 진정시키며 몸을 가다듬는다는 느낌에 시원하고 좋다. 상체와 하체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는지 느끼면서 몸의 근육이 눌린 스프링마냥 장력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꼭 튕겨나갈 것 같은 긴장감을 느끼는 것도 너무 좋다. 몸과 표정으로 그 긴장감을 표현해낼 수 있다는 사실도 쾌감으로 다가오고, 춤을 추는 그 순간만큼은 내가 내 무대의 우아한 주인공이라는 사실에서도 설레인다. 높고 딱딱한 토슈즈를 신고 움직이다보면 물집도 생기고, 물집이 생겼음을 알기도 전에 이미 터져있고 하는 통증도 있지만, 사실 그걸 알기도 어려울 만큼 동작 자체에 집중하게 되어 있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이게 직업이라면 다른 일이겠지만, 취미로서 접근하는 나에게 발레란 정말 아름다운 열정의 대상일 뿐이다. 끊임없이 추구해가는 그런 대상.

다음 시즌부터는 고급반에 등록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콤비네이션도 많이 길지만,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래서 이제 거기 등록할 예정이다. 요일이 내가 원하는 타이밍은 아니지만, 이번주 시즌 마지막 수업을 대타로 뛴 분이 고급반 담당 선생님이 될 분인데, 수업이 너무 즐거웠고 몸 뿐 아니라 두뇌적으로도 챌린징해서 희열이 느껴졌다. 이분이랑 다음주 월, 화, 수요일에 썸머 캠프 수업도 함께 할 예정인데 너무 기다려진다. 이제 주말만 지나면 바로네. 아…

이사 추진 포기, 집안 환경개선 사업 추진

졸업시즌이다. 트럭을 하고 다니면서 아무 걱정 없는 표정으로 소리 지르며 흥에 가득차 춤을 추고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졸업을 자축하는 그들을 보면 미래의 하나를 보는 것 같은 마음이 들어 나도 손을 마주 흔들며 축하의 인사를 날린다.

졸업시즌은 한해 중 해가 가장 긴 하지를 지나면서 바로 시작되는데 이 때의 저녁 아홉시가 어찌나 좋은지. 테라스에 앉아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와 뺨을 간질이는 바람을 즐기며 앉아서 책을 읽거나 핸드폰을 하거나 지금처럼 블로그를 쓸 수 있는데 그 순간이 그리 좋을 수가 없다. 사실 내 삶이 특별히 큰 이벤트로 가득차있지 않은데 감사할 일이 많은 것을 느낄 때면 나이가 예전보다 조금 더 들었기 떄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전 듬성듬성한 화분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가꾸기로 마음을 먹고 꽃들 사이 큰 빈공간에 제라늄을 심었다. 왜 우리 집에는 보라색 꽃만 있고 옆집 할머니가 갖고 있는 분홍색 꽃은 없냐고 묻는 하나의 말에, 그럼 우리도 분홍색 꽃을 심을까 하고 물었더니 너무나 기뻐하더라. 수국을 심었다가 바람에 꺾였던 기억에 제라늄이 잘 버틸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몇년 째 같은 제라늄을 잘 키우시고 계신 옆집 할머니를 보며 화분 네개를 들여 옮겨 심었다.

여러가지 우리가 내거는 조건에 딱 맞는 집을 찾기가 어려운 것도 있고 우리가 살고 싶은 곳에 집이 잘 나오지 않는 이유도 있어서 고민을 하다가 집 찾기를 잠시 중단하기로 했다. 대신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의 공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옌스가 살던 집에 내가 들어오고, 하나가 태어나며 니즈가 꾸준히 변했는데 크게 물건을 정리하고나 수납 방식에 대대적인 변화를 주지 않았던 게 쌓이고 쌓여 불편함이 커진 게 이사를 꿈꾸게 만든 이유였다. 그래서 그 이유를 없애지 않고는 이 집 생활이 더이상 만족스럽지 않을 것 같아 변화가 필요했다.

우리 옆집에 할머니가 여기서 애를 낳아 길러 독립을 시키시고 그 장성한 아들이 옌스랑 비슷한 나이일만큼 오래 사셨으니 애 하나에 못살 집은 아니렸다. 애가 십대때 충분한 사생활을 보장해줄 수 없음에 불편함을 다소 느끼신 거 외엔 큰 불편함이 없으셨다는데, 삼십평 집에 세식구 못산다 하면 사실 배부른 소리가 맞다. 그러니 이 집을 잘 아끼고 가꿔서 써야하겠다 싶었다.

지난 주말과 평일 저녁을 할애해서 많은 물건을 정리했다. 그간 불편함을 느꼈던 부분들을 크게 개선했고 휴가때 할 일들을 리스트업해서 그때 사용할 자재들을 주문해서 일부는 도착하고 일부는 기다리고 있다. 가장 큰 프로젝트는 베란다 마루를 물청소하고 사포질해서 오일처리하는 일이다. 사흘에 걸쳐 할 일인데 이게 끝나면 수납을 위해 사용하던 플라스틱 상자들을 처분하고 벤치처럼 앉을 수 있난 야외 가구형 수납가구를 들일 계획이다. 그리고 셔츠와 같은 빨래를 널기 위해 쓰던 옷걸이를 정리하고자 한 벽에 설치하고 필요할 때마다 댕겨서 반대편 벽에 걸어 쓸 수 있는 옷걸이를 샀다. 이제 드릴질 해서 설치할 일만 남았네.

부엌은 높은 벽에 선반을 설치해서 수납 공간을 추가로 확보하려 하는데, 큰 요리용기들을 사서 자주 쓰는 재료는 그 안에 모아서 사용하기 쉽게 정리할 예정이다. 그러면 지금 그런 재료가 차지하는 공간을 다른 것에 할당하고 부엌 선반에 뭐가 너저분하게 늘어있는 상황을 없애려고 한다. 그리고 계속 마음에 안들던 싱크대 보울을 바꾸려고 한다. 그간 적립해온 환경개선비용을 활용할 수 있다면 임대주에게 요청해서 그걸 활용하도록 하고, 그게 안된다 하면 자비를 내서 하려한다. 여기서 사는 시간을 잘 사는 게 중요하니까.

우리 침실에서는 옷걸이로 전락한 발레바를 베란다로 내오고 옷장이든 오픈식 시스템 옷걸이를 설치하든 수납을 좀 달리하기로 했다. 그와 함께 나중에 내 피아노를 돌려올 공간을 만들기 위해 침실에 있던 낡은 오디오시스템과 CD, DVD가 가득한 장을 정리하기로 했다. 여기서 빼오는 CD와 DVD는 거실에 한쪽 벽을 가득 메울 책장을 새로 사 설치하면 거실 오디오장에 꼽혀있는 책과 하나 물건을 다 옮겨내고 그 빈 공간으로 옮기기로 하고.

거실에 책장벽을 설치하고 나면 잡스럽게 굴러다니는 소품을 다 안보이게 정리할 수 있어서 청소도 쉬워질 것 같고 눈을 거슬리게 하는 게 줄어들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올 것 같다.

그와 함께 지하실도 더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그렇기 위해서 버릴 건 정리해 버리고 그곳에도 선반을 설치해 더이상 물건을 테트리스처럼 쌓는 일이 없도록 하기로 했다. 물건을 테트치스처럼 쌓아 정리하면 그 아래 들어간 물건은 거의 쓸 일이 없어지기 때문에 죽은 물건을 들고 있는 셈이 되고, 쓸 수 있는 것도 안쓰게 되니 정말 큰 공간낭비, 공간을 빌리는 돈 낭비다.

그간 옌스의 저항으로 대대적 정리와 변화를 꾀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 이사 추진 및 중단을 계기로 내가 우리 공간에 대해 생각하는 문제를 조금 더 잘 생각해서 말할 수 있기도 했고, 옌스도 그 필요를 이해하기도 해서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번 휴가의 첫주는 이런 대대적인 가사일의 한 주로 계획되었다. 힘도 들겠지만 내가 원하던 변화를 드디어 실행에 옮기는 시기라 두근거리고 흥분된다.

Min fars krig

Jeg synes, at DRs nye tv-serie, Min fars krig, er en fint lavet dokumentarfilm. Filmen omhandler en forfærdeligt sørgelig, men samtidig vældig modig historie, der baserer sig på virkeligheden. Det gjorde ondt på mig at se de omstændigheder, man var lagt under krigen, og hvor umenneskelig og ond eller modig, men traumatiseret, man kan da blive dermed.

Vores bedsteforældres generationer i Korea har også oplevet det samme under besættelsen af Japan, blot værre og meget længere end det – omtrent et halvt århundrede – der oplevedes i Danmark den gang under besættelsen af Tyskland. Så jeg kunne på en måde forholde mig tættere til filmens fortæller, der følger efter sin fars spor i modstandskamp mod tyskerne under den anden verdenskrig ved hjælp af DR, Rigsarkivet, mf.

Men det gik op for mig, at jeg ikke har tænkt på, at modstandsfolk også havde familien og deres kære, som de aldrig ville gøre ondt eller komme til at skade, og at de også var pisse bange. De gjorde alt det med modstandskampen med de risici, at de slet ikke ville kunne se deres kære, dvs. deres kone/mand, børn, forældre, eller at de kunne miste dem på grund af sin kamp. Jeg så dem indtil nu som et historisk objekt, men ikke som det samme menneske, som jeg er. Det gik simpelthen op for mig. Hvor har jeg været ikke-empatisk!

Nu har jeg min datter. Kan jeg mon gøre det samme, som de modstander har gjort, fordi jeg ville give et frit land til min datter ved at risikere at miste hende og livet sammen med hende? Hvor er det hamrende svært. Nej. Måske ville det ikke være så svært for mig. Jeg tror ikke, at jeg vil kunne gøre det.

Jeg skal huske og aldrig glemme de store indsatser, de modstandsfolk mod Japan har gjort for mig og mine kære, også dem mod Tyskland, da ellers ville jeg, Jens og Hannah ikke kunne have været sammen her og nu. De var modige og de var vores hel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