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스러움이란?

11월 말이 되니 Spotify에 캐롤 믹스가 넘쳐난다. Julesange du kender (Christmas songs you know)라는 믹스가 추천으로 떠서 틀어보니, 덴마크 크리스마스 노래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Jul-Det’Cool이라는 노래가 첫곡으로 나온다. 이젠 나이가 꽤나 든 덴마크 래퍼인 Mc Einar의 노래인데, 소비지향적인 크리스마스를 덴마크인 특유의 아이러니한 유머로 비꼰 노래다.

Jul-Det’Cool by Mc Ein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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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MC Einar. (Source: BT)

Det skete i de dage i november engang
at de første kataloger satte hyggen i gang

Det’ jul, det’ cool, det nu man hygger sig bedst
det’ julebal i Nisseland, familiernes fest
med fornøjet glimt i øjet, trækker folk i vintertøjet
til den årlige folkevandring op og ned ad Strøget
der bli’r handlet, pakket ind, og der bli’r købt og solgt
tøsne, snot i næsen, det’ pisse koldt
det er vinter, man forventer vel lidt kulde og sne
men det’ da klart at en såd’n sag må komme heuj bag på DSB
intet vrøvl har de forsvoret, det de helt sikre på,
men ved den første rim på sporet, går møllen i stå
folk de tripper, skælder ud, og ser på deres ure
og sparker efter invalide, ynkelige duer
der er intet, man kan gøre, de sure buschauffører
gør det svært at praktisere lidt julehumør
“Gå så tilbage for helvede” råber stodderen hæst
men det’ jul, det’ cool, det nu man hygger sig bedst

Det’ jul, det’ cool, gran og lirekasser
der er mænd, der sælger juletræer på alle åbne pladser
12 bevægelige nisser og en sort mekanisk kat
i et vindue ud mod Strøget trækker flere tusind watt
kulørte gavepakker i kulørte juleposer
selv i Bilka og i Irma og i alle landets brugser
er der ægte julestemning og gratis brune kager
der er hylder fyldt med hygge, der er hygge på lager
og hos damerne i Illum kan man få det som man vil
“Kontant eller på konto, hr.? Ska’ prisen dækkes til?”
de smiler og er flinke, mest for fruerne i minke
og gi’r gode råd om alt fra sexet undertøj til sminke
og vi andre fattigrøve, vi ka’ gå i Dalle-Valle
der er damerne så flinke, at de smiler pænt til alle
der er masser tøj i kasser, der helt sikkert passer
det’ jul, det’ cool, gran og lirekasser

Det’ jul, det’ cool, kig dig lidt omkring
15.000 mennesker i Magasin
de har våde lædersko, de har halstørklæder på
de har overfrakker, gavepakker, masser de ska’ nå
men de hygger sig, sel’fø’lig gør de det
plasikstjerner, plasikgran og plastiksne
sætter stemning i systemer, det’ så nemt og nul problemer
køb blot julestuens julesæt med fire fine cremer
eller sukkerkrukker, pyntedukker, pænt, mondænt og ganske smukt
søde sæt med proptrækker, glas og øloplukker
fra en skjult højtalerinstallation,
“Et barn er født i Bethlehem” i Hammondorgelversion
vi’ traditionsbundne folk, i traditionernes land,
så vi hygger os, li’så fint vi kan
og særlig uundværlig, det er Magasin,
det’ jul, det’ cool, kig dig lidt omkring

“Højt fra træets grønne top”
“Mød julemanden klokken 13, 15, og 17 på julestuen på 3. sal”
“Vores velassorterede vinafdeling kan tilbyde et komplet gløgg-sæt for kun 39.95”
“Lille Øjvind på fem år er blevet væk fra sin mor, han kan afhentes i kundeservice”

“Jamen du godeste er det allerede…”
Jul det’ cool sikke tiden den går, der er intet lavet om siden sidste år
det’ de samme ting vi spiser, det’ de samme ting vi laver
de samme ting i TV, de samme julegaver
samme pengeproblemer, det’ dyrt og hårdt
udelukkende overtrukne kontokort
overflod og fråds med familie og med venner
samvittigheden klares med en ulandskalender
det’ julefrokosttid, traditionspilleri, spritkørsel, utroskab, og madsvineri
vi har prøvet det før, vi ved præcis hvad der sker
slankekur i januar og alt det der
det’ et slid, men der er lang tid til næste år
det’ jul, det’ cool. sikke tiden den går

“Jeg drømmer om en hvid sandstrand,
med palmetræer og sommervejr
der vil jeg fejre julen
i swimmingpoolen
langt væk fra sne og juletræer”

옌스는 내가 이 노래를 좋아하는 걸 매우 웃기게 생각한다. 가사도 모르던 이 노래를 처음 좋아하게 된 계기는 크리스마스 시즌의 라디오 방송에서 자주 접하게 되면서부터다. 출근 길에 화장하면서, 운전하면서 라디오를 항상 들었는데, 거기서 이 노래를 정말 자주 틀어줬다.

옌스가 간혹 나보고 자기보다 더 덴마크인스럽다고 하는 것들이 있는데, 바로 이런 것들이다. 덴마크 캐롤을 좋아하는 것,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오면 Ris a la mande (프랑스 메뉴인 척 하는 덴마크의 크리스마스 디저트)나 Æbleskiver를 먹고 싶어하는 것, 덴마크식의 self-irony 유머를 즐기는 것 등 말이다. 사실 self-irony 유머는 그냥 여기에 와서 그런게 아니라 그냥 우연히 덴마크 문화와 맞아떨어진 개인적 특성일 뿐이지만…

그런데 막상 옌스는 덴마크인스럽지만 덴마크인스럽지 않은 사람이기도 해서 진짜 덴마크인스러운 게 뭔지는 집 안팎을 두루 관찰하고 이야기를 골고루 듣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실제 옌스는 전형적 덴마크인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곤한다. 남들끼리는 공감하는 이야기를 나는 공감하기 어렵고, 반대로 내 경험을 남들이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서)

덴마크인스럽지 않은 것들을 꼽아보자면… Rugbrød(독일이나 스칸디나비아에서 주로 먹는 호밀빵으로 점심때 먹는다.)은 가족과 점심식사를 함께 하는 행사같은 날 빼고는 안먹는 것 (자기는 어려서 평생 먹을 Rugbrød을 다 먹었다며…), 있으면 먹지만 Lakrids (감초)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각종 종교적 전통을 좋아하지 않는 점 (크리스마스때 선물 교환은 딱 조카들과 나에게만 하고, 가족들에겐 선물 안주고 안받는다고 못을 박아두었다.), 새로운 음식이나 새로운 문화, 언어를 배우는 것 등을 좋아하는 점, 덴마크를 좋아하지만 굳이 덴마크를 자랑스러워하거나 덴마크가 다른 나라보다 우월하다거나 그런 게 없다는 점, 그래서 내 문화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점, 덴마크 국기인 Dannebrog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 맥주를 안좋아하는 점 등이다.

덴마크인스러운 점도 물론 많다. 운동을 정말 좋아해서 하루라도 운동을 빼놓는 날이 없다는 점, 매사 성실한 점, 개인생활도 중요하긴 하지만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중시하고 가사분담 참여비율이 높다는 점, 직업 윤리가 투철하다는 점, 규칙을 잘 지키는 것을 중요시한다는 점, 집에서 밤에 불 밝게 켜는 것 싫어한다는 점 (현광등은 정말 질색팔색한다. 한국가서 한두달 지내려면 적응하느라 고생 좀 할 듯), 겨울에도 창문을 살짝 열어놓고 자야하는 점, TPO에 맞는 옷을 잘 차려입는 것 좋아하고 패션에 대한 자기 주관이 뚜렷한 점 (자기 것 쇼핑은 반드시 자기가 한다. 의견은 수렴하지만, 결정은 자기의 몫. ) 등

물론 이러저러한 특성을 굳이 덴마크인스러운 점과 그렇지 않은 점으로 나눴지만, 사실 외국인 남편과 그의 모국에서 살다보니 국민적 특성이란 것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지만, 개별특성의 스펙트럼이 평균으로부터 워낙 넓게 펼쳐져 있어 저 구분이 틀리다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이 또한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각자 자기가 교제하는 사람과 준거집단을 중심으로만 살펴보게 되서 덴마크인스럽다고 내가 이야기하는 것들이 다른 그룹의 사람들에겐 전혀 덴마크인스럽지 않은 것들도 많고, 내가 덴마크인스럽지 않다고 하는 것도 덴마크인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얼마전 친구를 초대해서 음식을 넉넉히 하다보니, 다음날 저녁에 데워서 먹을 만큼 넉넉히 남았었는데, 난 그에 곁들일 탄수화물로 빵을 굽고 있는데, 옌스는 밥을 달라고 했다. 서양음식인데 밥을? 이라는 나의 반응과 달리 옌스는 내가 해준 쌀밥이 덴마크 어느 식당에서 먹는 쌀밥보다도 맛있다면서 그걸 달라하고, 간장에 참기름을 달라해서 그 쌀밥위에 끼얹어 먹는걸 보면서 기함했다. Rugbrød위에 남들과 다른 컴비네이션을 얹어먹는 걸 봐도 크게 놀라지 않는 옌스인 걸 생각해보면 그만의 기이한 조합도 딱히 놀랄 일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요즘 방송에서 “진정한 덴마크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걸로 이것 저것 다양하게 다룬다. 토론, 뉴스, 다큐멘터리 등등… 옌스는 그런 토론 자체가 정말 피곤하고 언론에서 덴마크인이라는게 뭐 대단한 거고 그게 얼마나 통일성이 있는 것이고 독창성이 있는 거라고 그걸 그렇게 따지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민주주의와 사회공동체 의식, 개인주의 등 가장 핵심적인 가치만이 지켜진다면 사회는 항상 변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고, 개인마다 덴마크인다움에 대한 정의가 다 다른데 그걸 dansk함과 udansk함을 나누는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한다. 나에게도 “너는 한국인이고, 한국인 다움이 있지만, 이곳에서 살면서 이곳의 가치에 영향을 받으며 한국에서 갖고 있던 가치관이 달라지고 있는 만큼 너도 덴마크인이 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언젠가는 내가 한국인인 것만큼 덴마크인도 되어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그에게 나는 반박하지 않았다. 실제 내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과 함께 덴마크인의 행복함의 원천에 대해서 휘게와 기타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찾고 이를 홍보하고 수출하는 것도 피곤하다고 한다. 그냥 타인과 비교 별로 안하고, 현실감있는 목표를 정하고, 형식주의를 배격하고, 서열의식이 적고 자연환경이 좋은 편이어서 다른 나라사람들이 스트레스 받는 것보다 덜 받고, 그래서 행복한 거 아니냐고. 그게 우리에게 특별한 비결이 있어서가 아니란다.

이럴 때 난 덴마크인이지만 덴마크인이기만 하지 않은 옌스와 결혼을 한게 참 안도가 된다고 할까? 안그래도 타국에서 살면서 적응할 게 많은데 그걸 강요당한다거나 기대를 받는다면 어땠을라나? 여기의 룰에 맞춰가야 한다는 기본 전제를 깔고 다름을 같음으로 맞춰갈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는 것과, 내가 다른 건 옌스가 다른 덴마크인과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당연히 다르다고 전제를 깔고,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무리 없이 편입되기 위해서 필요한 지식을 알려주고 적응을 도와주는 것은 엄청난 차이이다.

이번에 새로 주문한 한국어 책에서 (한권을 드디어 끝냈다. ㅠㅠ) “하다”동사를 활용한 한국어 동사변형의 여러가지 유형이 정리되어 있었다. 이걸 패턴드릴로 연습한다고, 몇가지 동사를 주면서 이걸 같은 형식의 테이블로 만들어달라고 해서 만들어줬더니, 다음날 회사에서 출력을 해갖고 온 것을 보여주며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한다. 사실 옌스랑 나는 주중엔 퇴근 후 30분정도 그날 있었던 이야기 좀 하고, 같이 뉴스 보고, 각자 할 일 하다가 소파에서 30분 정도 같이 앉아 쉬고, 또 각자 할 일 하다가 잠자리 들어서 조금 이야기 나누는 것 정도가 일상이다. 각자 할 일 하다가 시덥잖은 말 한 두마디 던지면서 낄낄대는 것 외엔 자기 할 일 할 때는 자기 것만 따로 하기에 각자의 시간이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 크다. 평일엔 저녁도 둘다 뉴스 보면서 각자 먹고 싶은 메뉴 간단히 먹으니까 더욱 그렇다. 그런데 그게 둘이 필요로하는 공통사항이라 서로 이를 존중해주는 것이 참 좋고 고마운 거다. 우리는 서로 뭐 배우고 하는 거 좋아해서, 같이 있지만 또 각자 저녁에 배움의 시간을 가진다는 점에서 닮아서 정말 좋다고 하니까, 인생의 목적은 배우는 데 있는게 아니냐고 한다. 항상 옌스가 강조하는게 general education의 중요성인데, 이걸 덴마크인스러운 것이라고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냥 옌스스러운 것이지.

이런 옌스와 살아서 딱히 문화충격을 받을 일이 없는 것도 있겠지만, 인도에서 겪은 문화충격이 워낙 커서 웬만한 다름에 충격을 크게 받지 않는 것도 있을 지도 모른다. 결국 어떻게 적응하고 사느냐의 문제로 인식하면 되는가 싶기도 하고. 또 곰곰히 뒤를 돌아봐 생각해보면 나름 여기서도 큰 문화충격을 받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 힘든 시간들이 대부분 잊혀지고 그냥 그 틀에 내가 녹아들어가 바뀌어 더이상 놀라울 게 크게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다시 들춰보며 과거의 추억에도 잠겨보고, 스스로의 과오나 성과에서 배워도 보려고 별거 아닌 이런 생각의 조각들을 그래서 그때그때 남겨두는 거니까… 몇 년이 지나서 지금을 반추해보면 그땐 또 무슨 생각이 들런지…

시가와 친정사이, 그리고 행복의 레시피

아무래도 남편네 나라에 살다보니 친정보다 시가와 자주 보게된다. 물론 연락이야 비교할 수 없이 친정과 더 많이 하지만 보는 주기는 시가가 훨씬 잦다. 시부모님과 연락은 주로 문자메세지로 이뤄지는데, 간간히 시어머니나 시아버지로부터 메세지를 받고 나도 두분께 메세지를 보낸다. 주로  두분을 수신자로 헤딩에 넣어 시어머니께 문자를 보내드리지만, 혹여나 그게 섭섭하실까봐 시아버지께 보내기도 한다. 전화는 주로 시어머니와 이뤄지는데, 내가 전화를 드리기도 하고 시어머니가 주시기도 한다. 주기로 보자면 한 2주에 한 번 정도?

옌스는 우리 부모님께 직접 연락을 드리지는 않고 내가 연락을 드릴 때 옆에 있으면 안부를 전하곤 한다. 영어로 아빠와는 대화를 할 수 있지만, 아직 옌스의 한국어 실력으로는 나 없이 부모님과 대화를 할 수 없기도 하고. 아마 이부분은 우리 부모님이 조금 섭섭해 하실 수도 있는 부분이긴 한데, 여긴 약간 자기 부모님에 대한 연락이나 그런건 셀프인 부분이 많아서 딱히 내가 뭐라 이야기하긴 애매하다. 시부모님께 연락 드린 것도 시부모님이 먼저 문자로 연락을 주셔서 답을 하다보니 나도 답을 하기 시작하고, 그러다가 ‘아, 내가 조금 너무했나?’ 싶어 전화로 한 번 연락을 드렸더니 그 다음부터 조금씩 전화로도 연락을 주신 거였다. 지금 쓰면서 생각해보니, 아마 내가 좀 역할이 부족했나 싶다. 양쪽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하면 그냥 내가 잘 지낸다고 양쪽에 전할 뿐이지, 안부를 물었다는 사실을 옌스에게 전하는 건 잘 안했다. 옌스는 누가 전화나 문자로 연락하며 내 안부를 물으면 꼭 나에게 그 사실을 전하곤 했는데. 그런 사실을 듣고 나면, ‘아. 그 사람이 내 생각도 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던 걸 떠올려보면, 나도 그랬어야 했었는데… 옌스가 괜히 우리 부모님은 자기 안궁금해하나 싶어하겠다는 생각마저도 든다.

국제결혼이라고 시가와의 갈등이 없는가 하면 그건 아니다. 사람 사는 곳이라는게 다 똑같다고, 여기도 가족간의 갈등이 다 있는 것이고, 국제결혼을 한 사람들도 집안 따라, 사람 따라, 국가별 문화 따라 갈등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그렇다. 다행히 난 나와 궁합이 잘 맞는 시댁을 만나 아무런 문제 없이 아주 잘 지내고 있는데, 항상 그걸 당연시 하지 않고 감사한 마음을 기억하고자 한다.

국제결혼은 양가의 문화가 만나는 것이라 나 뿐 아니라 시가 입장에서도 새로운 문화를 접하게 된다. 예를 들어 시부모님을 그냥 이름으로 부르는 이 곳의 문화를 내가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어머님, 아버님으로 부르는 우리 문화를 시부모님이 받아들일 것이냐 같은 작은 문제부터 그렇다. 옌스는 처음엔 이상할 것 같다고 했지만, 시부모님께 내가 우리 문화를 설명하고 그래도 되겠는지 여쭤봤을 때 시부모님은 매우 좋아하시며 (그런 문화냐고 놀라시긴 했지만) 그러라고 하셨고, 그분들 또한 나를 딸 해인이라고 불러주신다.

시가를 방문해서 집안일을 거드는 문제부터, 시부모님이 우리집에 오셨을 때 어느 방이든 편히 드나드시는 것까지 다 다르다. 이건 그냥 나라간의 문화차이에 집안 차이가 겹쳐 있어, 어느 까지가 나라의 문화고 가풍인지의 경계가 모호하고 나로선 구분해내기가 불가능하다. 간혹 내가 생각하는 시가와 며느리 사이의 경계를 넘어선 행동들에 살짝 놀라는 일이 있더라도, 그게 만약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하실 일에서 벗어나있지 않다면 그냥 별 의미없이 받아들이기로 하니 마음이 편해진다. 예전에 우리 집에서 모여 같이 이동하는 일이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기억이 정확히 안나지만 시어머니께서 옌스 옷인가 소품인가를 하나 챙기시려고 침실 옷장을 여셨던 일이 있었다. 순간은 놀랐지만, 나와 같이 살기 전까지는 매우 편히 드나드시던 아들네 집이니 뭐가 어디에 있는지도 잘 아실 것이고, 옷장을 여는 일이 갑작스레 터부시될 일도 아니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며 그냥 그러려니 했다.

내가 시부모님을 아무리 좋아하더라도 내가 우리 부모님을 생각하는 것과 같을 수 없듯이 시부모님이 옌스나 시누이를 생각하는 것처럼 나를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시부모님이 나를 딸과 똑같이 대하지 않으신다 해서, 아니면 옌스 생각을 하시는 것만큼 내 생각을 안하신다 해서 섭섭하지 않고, 섭섭해 하지 않으려 한다. (물론 그런걸 느낀 바도 없지만, 설령 그런 일이 생긴다해도…) 같이 사는 아들이 행복하기를 위해서이든 어떤 이유이든 내가 잘 지내고, 잘 지내길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운 일이기도 하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어찌 상대에게 기대하랴.

명절 스트레스도 없고, 연락 자주 안한다 타박하는 사람도 없고, 가정 대소사는 다 직접 챙기는 남편이 있으니 시가 문제로는 난 아주 땡잡은 기분이다. 내가 시부모님을 좋아하는 것처럼 옌스도 우리 부모님을 좋아하고, 특히 내년 한국에 방문해 우리 부모님과 지내며 혹여나 엄마와 단둘이 있는 순간이 생길 때에 대비하려고 옌스가 지금 바짝 한국어를 공부하는 걸 보면 참 고맙다.

반대로 옌스는 굳이 그렇게 안해도 되는데 자주 시가에 연락을 하는 나에게 참 고마워한다. 자기 가족은 자기가 챙기는 셀프문화가 자리잡힌 이 곳에서 자발적으로 꾸준히 연락을 하고 가까이 지내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고마운 일이다. 연애 초기에, 자기 가족과 내가 만나는 자리가 몇번 있고 나서, 그들과 보내는 시간이 즐거웠으면 좋겠다며, “가족과 반드시 즐거워야 한다는 게 아니라, 같이 보내는 시간이 너에게도 좋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너는 나와 함께하는 것이지, 내 가족과 함께하려는 것이 아니다. 혹여나 내 가족과 너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하면 난 네 편이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 옌스이니 물론 내가 가족과 잘 지내길 기대했겠고, 나도 그들이 이미 마음에 들었지만, 저렇게 이야기해준 자체에 마음이 정말 든든해졌었다.

이런 고마운 감정이 조금씩 쌓이는 걸 모아두었다가 간혹 표현하곤 한다. 그러면 옌스나 나나 모두 이런 것들 당연시 하지 말자며 이런 소소한게 삶을 행복하고 감사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에 공감하는데, 이런 게 서로 잘 맞는다는게 참 감사하다.

이제 불과 3년밖에 안된 커플이지만 정말 큰 갈등없이 행복하게 잘 살아온 것에 대해 요인을 분석해보자면,

  1. 우선 라이프스타일이 잘 맞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 – 금전감각과 관리, 건강/체력관리, 가족과의 관계, 인생 전반에 걸친 목표와 생활 태도, 집안 관리 등등
  2. 서로에 대해 어떻게 해주길 기대하는 점이 없다거나, 딱히 기대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려는 점
  3. 서로가 하는 행동이 혹여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게 있다고 하더라도 서로를 마음 상하게 하려고 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
  4. 원하는 게 있으면 구체적으로 정확히, 또 솔직히 말하는 것
  5. 상대가 내 요구에 거절하더라도 이유가 합당하면 받아들이는 것
  6. 감사함과 사랑함을 작든 크든 꾸준히 표현하는 것
  7. 침묵 고문하지 않는 것 (이것은 절대 하지 않기로 약속한 바 있다.)
  8. 주말 하루는 꼭 둘만의 데이트 시간을 갖는 것 (하나가 태어나면 다른 형태로 바뀌겠지만)
  9. 서로가 각자의 취미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있어서 적당한 수준의 개인 공간/시간/자유를 주는 것
  10. 서로를 위해 상대의 문화와 언어를 배우는 것에 노력하는 것
  11. 우리 문화가 이렇다고 강요하지 않고 서로 대화를 통해 타협하는 것
  12. 우리의 현재 생활와 주어진 것에 대해 당연시 여기지 않는 것
  13. 이런 우리의 삶의 방식을 친정과 시가 모두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것

대충 이런 것 같다.

간혹 국제결혼해서 해외에 나가 사니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그런데 그게 좋을 수도 있지만 마음가짐에 따라서는 정말 더 힘든 게 될 수도 있다. 실제 그런 문제로 힘들어하는 커플들도 많이 있고. 사실 옌스를 만나서 한국의 문화 중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겪지 않아 좋은 대신에 한국 문화에서 내게 편하거나 득이되는 것들을 누리지 못해 좋지 않은 점도 있다. 그런데 그런 것 생각하면 끝이 없고 서로 자기 좋은 것만 주장하는 것으로 흐를 수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하고, 우리 둘이 합리적으로 판단해 공평하고 서로가 만족스러운 길을 찾아가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시누이의 박사 디펜스 방문기

덴마크의 박사과정은 3년이다. 연구가 늦어지거나 개인적 사정으로 쉬는 경우 이보다 길어질 수 있지만, 우선은 3년을 기준으로 프로그램이 설계되어 있고 펀딩 또한 이를 토대로 한다. 시누이는 5~6년 걸렸다고 들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게 어느새 2년 반 정도가 된 것 같은데, 남편의 인도와 러시아 주재에 동반하느라 나를 만나기 얼마 전에 덴마크로 돌아왔다고 했었다. 그러니 중간에 최소 4년 이상 쉰 것이다. 아이 셋의 엄마로 박사 과정을 마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잘 안간다. 물론 오페어를 하나 두고 있었다지만, 애들 픽업하고 생일 있으면 애와 어른 파티 따로 다 준비하고 명절때면 가족과의 모임을 자기네 집에서 하고 등등 정말 수퍼우먼같은 모습으로 산 것 같다.

시누이는 시어머니에게 자주 전화를 한다고 한다. 실제 시댁에 가 있으면 며칠동안 하루에 최소 한번은 전화를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짧은 통화가 주를 이뤘지만, 간혹 조금 긴 통화가 있을 때도 있었는데, 긴 통화 후 시어머니가 시누이가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많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내가 보는 시누이는 정말 멋진 여성이다. 항상 여름 햇살처럼 빛나는 환한 웃음을 갖고 있으며, 사람들을 챙기는 마음씀씀이가 얼마나 따뜻한지. 매사 최선을 다하는 것도 보면 참 대단하다 싶고. 그렇지만 엄마가 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 수가 있는게 시누이 남편이 해외 출장이 잦아 1년에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내는터라 시누이가 많은 부분을 희생해야 한다. 박사과정 중간에 해외로 나간 것도 그렇고, 애들을 학교에서 픽업하고 과외활동 하는 걸 지원하느라 같은 연구소에 있는 남자 동료들이나 양육의 문제가 없는 동료들처럼 연구와 커리어에 더 몰입할 수 없는 것 등 말이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연구원으로서 모든 일을 잘 해내려고 하는 그녀가 여러모로 힘든 것은 당연한 것 같다.

 

덴마크에서는 박사과정의 디펜스가 모두에게 열려있다고 한다. 따라서 수퍼바이저와 오포넌트 말고도 연구소 동료, 친구, 가족이 온단다. 그간 고생한 것을 치하하고,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좋은 선물도 준비하고. 옌스는 이번 주 또 출장을 가 못오게 되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오는 것을 몰랐을 땐 그냥 안타까워하는 옌스를 대신해 내가 가야겠다 싶었는데, 안갔으면 영 그랬겠다 싶다. 미리 내가 가겠다고 한 게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지갑을 하나 샀다.

디펜스는 바로 오늘 오후 2시 반. 시내에 있는 종합병원에서 있단다.덴마크의 가장 큰 병원인 Rigshospital 예방의학과에서 고환암을 연구하고 있는데, 바로 그 곳에서 디펜스를 한다고 한다. 시아버지가 경주용 자전거를 타다가 경추에 금이 가 본홀름에서 이곳으로 헬리콥터 후송되셨던 일이 있다. 이 곳에서 처음 시부모님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이번엔 시누이 일로 와보게 되었다. 여긴 시댁 일 아니면 올 일이 없는 병원인 모양이다.

본홀름과 스웨덴을 오고가는 페리 스케줄이 가을부터는 오전, 오후 두편만 있기에 아침 열시에 시부모님이 오신다고 했다. 지난 두주간 정신없이 바쁘고, 옌스가 출장을 두번이나 가 나 혼자 있었기에 집 청소를 미뤄두고 있었다. 사실 정리정돈 잘하고 설겆이 밀린 것 없이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기에 청소를 미뤄두고 있었는데, 시부모님 오신다니 싹 다 청소를 해둬야겠다. 어제 저녁에 못해서 아침 여섯시부터 일어나 식사하고, 엄마와 페이스타임 삼십분한 뒤, 청소하고 화장 끝내니 딱 도착하셨다. 항상 그렇시듯이 초콜렛이며 잼 등 작은 선물들을 갖고 오셨는데, 이번엔 특별히 아이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길 바라며 시어머니의 할아버지가 어딘가에서 발견하셨던 1700년대의 금화 한닢을 옌스에게 전달해달라고 하셨다. 박물관에서 볼 법한 것을 보다니 덴마크에 살면서 참 다양한 경험을 한다 싶었다.

임신상태의 경과를 포함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병원으로 향했다. 점심은 병원의 카페테리아에서 가볍게 하고 컨퍼런스룸으로 갔다. 40여명의 사람들이 와있었는데, 시누이의 45분 프레젠테이션을 포함해 오포넌트 2명의 오포지션까지 총 2시간 30분을 모두 꼼짝없이 조용하게 앉아있었다. 임신하고 이렇게 오랜 시간 같은 자리, 딱딱한 의자에서 움직이지 않고 앉아있던 적이 없던지라 허리도 좀 아프고 힘들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오랜 기간 연구한 성과를 듣는 것도 재미있었고, 실제 박사과정 디펜스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보는 것, 오포넌트가 어떻게 디펜스에서 논문에 챌린지를 하는지 보고 듣는 것, 다 흥미로웠다. 나중에 내 석사논문 디펜스에 대해서 감을 잡아볼 수도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애 셋을 돌보며 세개의 manuscript를 성공적으로 저널에 등재하고 (그 중 하나는 세계적인 저널에 등재되었단다. American Journal of Medicine이었나? 아무튼 옌스가 이 저널을 모르냐길래, 당신은 보건경제학자니 아는거고, 나는 환경경제학자라 모른다고 해줬다. – 환경경제학에서 유명한 저널이 뭔지도 난 사실 모른다. 흠흠.) 1년전에는 Young European Sceintist 상인가 뭐도 타서 유명 컨퍼런스에서 발표도 하고 그랬단다. 뭐랄까, 약간 허허실실한 타입이라 잘 몰랐는데, 그 상 탔을 때 이야기 들어보니 항상 열심히 하고 꼼꼼하고, 성과욕도 많아서 뭐든 잘한다고 한다. 사실 그러니 애들과 남편의 커리어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는게 얼마나 스트레스도 될까 이해도 된다.

발표도 여유있게 잘하고 디펜스도 정말 잘해서 누가 봐도 성공적으로 디펜스를 마무리짓는 것을 보았을 땐 얼마나 자랑스럽던지. 내가 박사학위 받는 것도 아닌데 내가 다 뿌듯해졌다. 이번에 고환암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계량경제학 때 배운 내용들이 회귀분석에 사용된 가정이나 방법론 등을 논할 때 다뤄지는 것을 보며, 이런 내용을 몰랐다면 강의를 들어도 크게 이해가 안되었을텐데, 하면서 배우는 만큼 세상이 열린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끼기도 한 고마운 순간이었다. 옌스에게 잘 끝났다고 문자를 하니, 큰 오빠가 자랑스러워 한다며 축하해주라고 하며 정말 기뻐하더라.

디펜스 결과가 박사학위 수여 커미티에게 모두 만족스러웠다는 발표가 이뤄지며 디펜스가 마무리 되었으며, 대학교 측에서 준비한 리셉션을 위해 자리를 이동했다.

프리카델라, 샌드위치, 과일과 케이크 등 먹을 거리 뿐 아니라 여러명의 축사와 시누이의 감사인사말 등도 준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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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사 중 시누이네 가족

맛있게 먹으며 시누이네 이웃, 시누이 생일 때 만났던 시누이 어릴 적 친구와도 만났는데, 시누이 친구가 Dong energy에서 풍력발전으로 일을 한다길래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눴다. 그 친구는 아버지가 독일인이라는데, 뭔가 정말 반 독일인스럽게 더 직설적이고 시원시원했다. 여기서는 뭐하는 지 물어보고 직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사생활 침해가 아닌데, 상대도 나에게 그런 것을 물어보듯이 나도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는게 익숙해져서 더이상 취조당하는 느낌이 안든다. 처음엔 뭔가 동양에서 온 이방인으로서 나를 증명해야 하는 자리인가 하는 오해에 부담감마저 느꼈는데, 그냥 이들의 관습임을 알게되니 나도 남의 직업 탐방의 시간이 재미있기조차 하다.

내가 덴마크어를 잘 못할 땐 남들이 하는 말 중에 못알아듣는 것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꽤 되서 자꾸 질문을 해야하다보니 은근히 위축되고, 시간이 오래되면 스트레스를 받았다. 실제 뇌가 언어를 처리하느라 물리적인 스트레스도 받는데 덴마크어 학원을 쉰 지난 6개월간 오히려 덴마크어가 부쩍 늘었다. (공부를 따로 하지는 않았지만, 방학기간 중 덴마크어 드라마를 엄청 보고, 옌스와 덴마크어 사용 비중을 크게 늘려 90% 정도를 거의 덴마크어로 사용한 게 큰 도움이 된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더이상 덴마크어로 오랜 시간 이야기하는게 정신적인 부담이 안된다. 그 전엔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이런 자리에 나서야 빨리 말에 익숙해지고 적응할 수 있어!’ 라며 스스로를 밀어붙였다면, 이젠 그런 것 없이 설 수 있으니 정신적으로 얼마나 편안해지던지.

아무튼 그렇고 나니까 주변인들이 나를 챙기려고 부담감 느낄까봐 불편하던 마음도 없어지고 그냥 편해졌다. 그런 편안함과 함께 이방인의 느낌도 많이 없어지고. (그 방안에 동양인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었지만, 내 눈엔 내가 안보이니… 더욱 이질적인 느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흠.)

어느새 시간은 흘러흘러 6시. 시누이네 집에서 개인적으로 준비한 리셉션이 또 있단다. 핫도그 캐이터링을 불렀다고 하는데, 난 학교 친구 생일파티가 있다고 해서 못간다고 했다. 그런 게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해서 추가로 잡은 약속인데. 아쉽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그런데 막상 집에 와서 8시 파티에 가기전 조금 쉰다고 소파에 눌러앉은게 화근이었다. 피로가 몰려와서 한시간만 쉬고 나가려던게 그냥 마냥 소파 속으로 침잠해버렸다. 그리하여 이렇게 손가락만 놀려도 되는 블로그 포스팅을 하고 있다.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긴 시간을 포멀한 옷차림을 하고 소셜모드로 있었더니 영 피곤했던 모양이다. 혼자서 쉴 시간이 필요했다. 내일 옌스가 출장에서 돌아오는데다가 주말에 공부할 것도 많은데 이정도의 저녁 휴식시간은 필요하다. 이제 다 덮고 조금 일찍 자야겠다. 하나도 많이 피곤했을 것 같고.

덴마크 근현대 변화상을 보여주는 Matador

덴마크가 지금처럼 평등한 사회를 이룬 건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 남녀간, 사회계층간 차이가 명확했던 사회가 지금의 모습으로 어떻게 탈바꿈 했는지 쉽게 볼 수 있는 드라마가 있다. ‘마타도어 (Matador)’는 보드게임 ‘모노폴리(우리나라의 부루마블)’게임 또는 ‘실업계의 거물’, 두가지를 모두 의미한다. 실제 드라마에서 모노폴리 게임이 자주 등장하는데, 진정 의미하는 바는 Mads Skjern이라는 주인공의 사업이 성장해 해당 지역의 거물이 되는 일련의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덴마크가 어떻게 현대의 모습으로 바뀌어가는지를 그려낸다.

마타도어는 다음과 같은 24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있다.

  • Episode 1.     Den Rejsende / 1929
  • Episode 2.     Genboen / 1929
  • Episode 3.     Skiftedag / 1930
  • Episode 4.     Skyggetanten / 1931
  • Episode 5.     Den Enes Død / 1932
  • Episode 6.     Opmarch / 1932
  • Episode 7.     Fødselsdagen / 1933
  • Episode 8.     Komme Fremmede / 1934
  • Episode 9.     Hen til Kommoden / 1935
  • Episode 10.   I Disse Tider / 1935
  • Episode 11.    I Klemme / 1936
  • Episode 12.   I Lyst og Nød / 1936-1937
  • Episode 13.   Et Nyt Liv / 1937-1938
  • Episode 14.   Brikkerne / 1938-1939
  • Episode 15.    At Tænke og Tro / 1939
  • Episode 16.   Lauras Store Dag / 1940
  • Episode 17.   De Voksnes Rækker / 1941-1942
  • Episode 18.   Hr. Stein / 1943
  • Episode 19.   Handel og Vandel / 1944
  • Episode 20.  Den 11. Time / 1945
  • Episode 21.   Vi Vil Fred Her til Lands / 1945
  • Episode 22.   Det Går Jo Godt / 1945-1946
  • Episode 23.   Mellem Brødre / 1946
  • Episode 24.   New Look / 1947

허구의 도시인 Korsbæk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야기가 꽤나 빠르게 진행되어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다.

예전에 어떤 친구로부터 덴마크의 과거 남녀관계가 어떠했는지 단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자기 할머니가 젊은 시절, 몸이 안좋아 남편에게 물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했단다. 물을 들고 온 할아버지가 할머니 바로 앞에서 물잔을 뒤집어 물을 뒤엎으며, 본인에게 물을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노발대발 했단다. 나보다 10살 어린 친구이니 대충 할머니, 할아버지 연배가 지금 80대쯤 되었을 거다. 보수적인 율란 출신이니 아마 코펜하겐보다는 더했겠지만, 놀랍기 그지없다.

우리나라도 경제성장과 함께 여성의 경제적 자립이 증가하면서 남녀관계의 볂화가 갈등의 형태로도 더욱 강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유교의 남존여비적 사상이 향후 20년 뒤에는 거의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기대해볼 수 있을까?

 

 

 

 

 

루이지애나 미술관과 가을날씨

 

어제 저녁, 간만에 루이지애나 미술관에 다녀왔다. Daniel Richter라는 독일 작가의 회화전이 열리는데, 전시 안내 우편에 실린 작품의 색에 매료되어 날 좋을 때 다녀오기로 마음을 먹었다. 평일엔 저녁 10시까지 열기에 마침 외곽으로 이사를 갈 친구와 시간이 맞아 수업 끝나고 다녀왔다.

형광색과 비형광색을 절묘하게 섞은 강렬한 이미지의 그림이 많았다. 아노미적인 상황을 포착한 그림이 많았는데, 끔찍할 수 있는 상황을 묘사한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현란한 색과 사람들의 기묘한 표정 등으로 인해 보고 피식 웃게되는 경우가 있었다. 난민 보트가 밤바다위에서 표류하는 장면이나 폭동이 난 도시가 불타고 있는 장면 등을 담은 작품이 바로 그랬다.

덴마크는 미술관 뿐 아니라 많은 문화시설이 연간회원제를 운영하는데, 루이지애나 미술관도 마찬가지다. 1+1 멤버십을 가입할 경우 혼자 세번 가는 것에 못미치는 가격에 나 이외에 한 명을 동반해 연간 언제든지 갈 수 있고, 추가 2명까지는 50% 할인된 가격으로 동반할 수 있어서 손님 모시고 갈 때 참 좋다. 또한  안에서 먹고, 마시고, 쓰는 모든 것을 10% 할인된 회원가격에 살 수 있다. 뮤지엄 샵에서 살 수 있는 물건들은 대부분 백화점에서도 살 수 있는 것이기에, 같은 것을 산다면 미술관에서 사는 게 이득이다. 일년에 대여섯번은 가는 나에게는 이 멤버십이 최고이다.

어제는 덕분에 겨울에 쓸 베레모와 화려한 반지도 샀다. (사실 마음에 들어도 비쌌으면 안샀는데, 정말 놀랍게도 다 싸서 사버렸다.) 같이 간 친구 왈,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하얀 베레모를 쓰고 나타나서 놀랐다고 하는데, 난 다른 모자모다 베레보가 제일 잘 어울려서 이것만 쓰고 다닌다 하니 잘 어울린단다.

스웨덴이 바로 바다 건너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보인다. 해질녘 은빛으로 변한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명확히 나눠주는 건 스웨덴 땅이다. 산이 없어 얇은 띠처럼 보이는 땅이 하늘과 바다를 둘로 나눠주는데 그 풍경이 참 아름답다. 임신만 안했어도 와인 한 잔 사들고 그 바다를 보며 마시는 건데, 아쉽게도 임신을 한 탓에 그럴 수가 없다. 그런 여유는 내년 이후로 기약하며…

루이지애나 미술관은 나에겐 휴식과 같은 공간이다. 혼자 가도, 여럿이 가도 좋고, 가면 마음이 차분하고 풍요로워진다. 특히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둑어둑한 플랫폼에서 기차를 잡아 타고 돌아오는 길은 어쩐지 여행을 다니는 기분마저 자아낸다.

배가 눈에 띄게 커지고 있고, 그 무게도 이제 조금씩 느껴지지만, 임신 기간 중 몸이 제일 가벼울 기간이라고 하니 이 때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며 혼자의 여유를 즐기련다. 내년 1월만 지나면 이런 자유와도 작별이니까.

오늘은 아침 잠시 시내에 다녀오는 길에 Østerbro 길을 자전거로 달렸다. 깔끔하며 조용하고 평화로운 동네라 좋아하는 곳. 해는 여전히 쨍하지만 간만에 바람이 많이 부는 오늘, 옷을 노랗게 갈아입기 시작한 나무들이 솨아…하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게 어찌나 상쾌하던지. Hyggeligt한 그 길의 정취와 가을 나무가 어우러져 마음을 포근하게 했다. 덴마크의 가을은 좀 우울하고 축축하지만, 오늘은 손에 꼽는 아름다운 가을날씨를 보인 것 같다.

마침 금요일이라 마음도 가벼운데 기분이 참 좋구나. 추석은 멀리 있지만, 그래도 외롭지 않은 그런 좋은 날씨다.

야외 오페라 극장 Opera Hedeland

2013년 7월 21일 덴마크에 도착했다. 늦여름부터 시작한 덴마크 생활을 시작부터 재미있게 열어주었던 것이 바로 이 야외 오페라 극장에서 본 나비부인이었다. 매년 8월에 한편을 세번에 걸쳐 상연하는 이 오페라 극장은 Hedehusene라는 곳에 위치한 Opera Hedeland이다. (홈페이지: http://www.operahedeland.dk/)

2013년 나비부인, 2014년 일 트로바토레, 2015년 코시 판 투티, 2016년 라 소남불라까지. 총 네편의 오페라를 봐왔는데, 이제 이는 옌스와 나의 연례가족행사가 되었다. 시작은 Expat 모임의 문화행사였는데, 야외오페라라고 해서 찾아보니 무대의 스케일이나 그 지형이 참 마음에 들어서 냉큼 참석하겠다고 했다. 피크닉을 준비해오라고 해서 이런 저런 먹을 것을 싸갖고 갔는데 맑은 여름 날 저녁 와인과 함께 많은 사람과 간단한 요기를 하며 담소를 나누는 게 어찌나 좋던지. 바로 그 다음 해부터 옌스를 만나 세번의 오페라를 함께 했다.

시부모님이 오페라를 좋아하셔서 따로 오페라 투어도 다니고 하시는 터라, 작년에는 시부모님을 초대해서 함께 관람했다. 역시나 좋아하시며 그 다음해엔 두분이 우리를 초대하시겠다 하여 서로 초대를 돌아가며 하는 시부모님과 함께 하는 연례행사로 확대가 되었다. 거긴 차 없이 가기 어려운 곳인데,회사를 관두고 작년에 차를 팔아 안그래도 차를 렌트해야하나 어째야 하나 했었다. 시부모님이 함께 가시게 되면서 그런 문제도 해결되고, 이런 건 사람이 많을 수록 더 좋으니 말이다.

예전엔 자막이 덴마크어로 나오니 미리 오페라 스크립트를 읽어가는 준비를 좀 꼼꼼히 해가야 했는데, 이제는 대충의 줄거리만 훑어보고 가서 자막을 보면 되니 외국어 오페라라 해서 부담느낄 것도 없다. 또한 해가 갈 수록 피크닉 준비 요령과 함께 해가 지고 난 시간의 추위를 해결하는 방법도 요령이 늘어 관람의 편의성도 크게 늘었다.

호수 및 인근 초원, 무대 이외의 원형극장 시설 (관람석)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야외라는 것을 이용해 헬리콥터나 말, 자동차 등 실내 무대에서는 동원할 수 없는 것들을 신선한 형태로 이용하는게 특별함으로 다가온다. 올해는 과거의 농촌 환경을 진흙과 물웅덩이를 활용해 조성하고, 오페라 오케스트라 룸 지붕 또한 무대로 활용해서 이렇게도 무대를 확장할 수 있구나 하는 놀라움을 또 자아냈다. 여름이라도 꽤 쌀쌀한 날이었는데 배우들이 춥지 않나 했는데, 나중에 페이스북 페이지를 보니 그 안에 wet-suit을 입어 추위에 대비를 했었다.

내년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 중의 하나인 라보헴을 상연한다는데, 그땐 애가 너무 어릴 타이밍이라 한 해 쉬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아쉬워라. 혹시 가능하다면 시부모님께는 애를 맡기고 나와 옌스만이라도 다녀오든가 하는 방법도 생각해봐야겠다.

상연 기간에 덴마크에 있고 오페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가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또 다른 한 쌍의 한-덴마크 커플 탄생

어제는 날씨가 하루종일 변덕스러웠다. 비가 오다 그쳤다, 흐리다 해가 떴다가, 바람이 불다 잦아들었다가. 정말 변화무쌍한 덴마크 여름 날씨의 전형이었다고 할 수 밖에. 덴마크에서 알게 된 친구의 결혼식이 예정되었던 어제, 교회 결혼식 후 운하 보트투어를 계획한 그들의 결혼식이 잘 진행될 수 있을지, 보트는 천장이 커버되는 보트인지 살짝 신경이 쓰였다. 덴마크에서는 나쁜 날씨는 없고 나쁜 옷차림만 있다는 이야기가 있기에,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우산에 더해 옌스는 우비 바지를 챙기고 나는 앞코가 막힌 플랫슈즈를 챙겼다.

우리도 결혼식날 비 오면 잘 산다고 하듯이 덴마크에서도 비 오면 잘 산다는 이야기가 있더라. 안 그래도 잘 살 것 같은 커플이었기에 비 오는 것 보면서 잘 살겠거니 싶었다. 우리도 비 오는 여름 날 결혼했기에 그게 꼭 크게 속상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계획에 차질이 빚어져도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즐길 커플인 것을 알았기에 마음 상하는 것 없이 그들이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실제 모두가 날씨에 상관 없이 아주 즐거운 결혼식을 즐겼다.

하이힐 신고 유럽의 돌길을 뛰는 것만큼 고역이 없다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옌스도 잘 알게 되어서, 여유있게 미리미리 출발해 교회로 향했다. 옌스네 조카 세명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는 크리스챤스교회 (Christianskirke)에서 식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교회 구조가 평균적인 교회와 조금 다르다 해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다른 면이 분명히 있었다. 신부에게는 다소 안타깝게도 복도가 짧고 좌우로 긴 교회였고, 신부가 미사 집전시 서는 연단이 복도 중간에 위치한 게 아니라 짧은 길이 때문인지 정면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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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대 위에 보이는 연단은 일반적으로 교회의 복도 중간에 측면에 위치해 있다. 결혼식에는 성직자가 저 위에 서지 않고 빨간 카페트 위에 선다. 세 번의 결혼식 중 두 번이 여성 성직자였고, 그 중 한 번은 아프리칸 혈통의 덴마크인 성직자였다. 루터교회라 우리나라의 천주교와도 개신교와도 절차적, 성직자의 역할적, 교회 건물의 구조적 측면에서도 다 차이를 보인다.

덴마크인 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온 커플의 친구들 비중이 커 대부분의 미사는 영어로 진행되었다. 간혹 덴마크어로 이야기한 경우에는 따로 이를 영어로 해석해 반복하지 않아서 덴마크어를 알아듣게 되니 결혼식 절차도 재미있게 와 닿았다. 특히 비가 와서 둘이 잘 살 거라며, 애를 많이 낳든, 돈이 많이 들어오든 복이 많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마 덴마크 가족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였는지 굳이 영어로 되풀이 하지 않았는데, 이는 이야기 해줬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살짝 해봤다. (나중에 한국에서 멀리 날아오신 그녀의 어머니께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고 살짝 말씀 드렸다. 행복하게 둘 잘 살 거라고.)

덴마크 교회결혼식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위 사진에 나온 의자의 좌석 배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원래는 4개만 놓이는데 (이 날은 신부 부모님 모두가 배석하기 위해 의자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원래는 신부 아버지만 동석한다.) 왼쪽에 신부와 아버지가, 오른쪽에 신랑과 베스트맨이 앉는데, 중간에 신랑, 신부만 일어나서 연단위에 선다. 혼인 서약과 반지 교환, 성혼 선언, 키스, 그리고 기도가 끝나면 이 둘이 왼편에 앉고 오른편엔 베스트맨과 신부 아버지가 앉게 되는 식이다. 이날은 의자 하나를 추가해 신부 어머님이 오른편에 앉으셨다.

결혼식 전 신랑이 그렇게 긴장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신랑을 자주본 것은 아니지만, 친구를 통해 들은 내용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본 내용을 토대로 형성된 그의 카리스마와 유머 넘치는 이미지와 매우 달랐다. 그 전에 옌스 동료의 결혼식에서도, 옌스 사촌의 결혼식에서도 엄청 긴장한 신랑의 모습을 봤는데, 역시 많은 하객들 앞에서 하는 결혼식은 누구에게나 긴장되는 순간인가보다. 베스트맨 증인 한 명만 두고 결혼한 우리야 딱히 긴장할 일은 없었기에 그냥 이런 타인의 긴장의 순간이 더 눈에 띄고 신선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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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한 신랑과 그의 베스트맨. 그녀의 신랑은 항상 여유가 있어보였는데, 이 날 그의 모습에는 긴장이 넘쳤다. 저녁 식사 때 베스트맨의 여자친구를 통해 들은 바, 너무 긴장해서 뭘 어떻게 준비해야할 지 몰라해, 베스트맨이 하나하나 챙겨줬다 한다. 항상 계획이 철저하고 뭘 해야하는지 명확하며, 효율적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그와 너무 달랐다고. 로맨틱하다.

 

우리의 신부는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부모님과 함께 입장하였다. 몸에 꼭 들어맞게 끈으로 졸라 맨 새하얀 웨딩드레스는 그녀의 피부색과 어우러져 그녀를 환하게 빛나게 해주었다. 어머니는 이미 눈물을 참느라 입을 굳게 다무셨는데, 결혼식 내내 흐르려는 눈물을 참느라 고생하셨다. 신랑, 신부가 연단에 서있는 동안 베스트맨이 휴지를 찾아 건낼 정도였으니. 타국에 딸을 시집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지고, 우리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등을 생각해보다 보니, 더 짠하게 느껴졌다. 붉어지는 눈시울을 참고 착석하시는 타이밍에 딸에게 눈물 안보이시려고 고개를 돌리시는데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냥 왠지 모르게 그래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안심하시라는 마음을 담아 환히 웃어드렸고, 어머님도 짧게나마 웃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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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신부 입장! 부모님을 양쪽에 모시고 입장했다. 양성평등에 있어 우리보다 앞서있다는 덴마크이지만, 결혼식 만큼은 아빠만이 동석하는 것이 일반이다. 국제결혼의 장점은 둘만의 스타일대로 바꿔도 그것갖고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 두 분과 함께 입장하는 그녀의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드레스도 정말 아름다웠지.

 

You may now kiss your bride. 그들은 성혼 선언이 끝나고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의 커플처럼 키스를 나눴다. 이 키스는 Closing the deal 같은 게 아닐까? 정말 둘이 결혼한 것을 확인하는 순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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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may now kiss your bride.”

 

장대비가 잠깐 그친 타이밍을 노려 배 타기 전 새로 탄생한 부부가 하객들에게 부부로 첫 인사를 나누는 리셉션을 위해 아페리티보를 즐기기 위해 야외로 이동을 했다. 부부는 같이 또 따로 하객들과 담소를 나눴고, 우리 모두 이 결혼을 축하하며 샴페인을 즐겼다. 간혹하는 와인 한 잔은 괜찮다는 의사의 말을 믿고 샴페인 한 잔을 하길 원했으나, 옌스의 강력한 주장으로 반 잔만 마실 수 있었다. 흑흑. 입덧 시작한 이후 역하게만 느껴졌단 레드와인과는 달리 샴페인은 여전히 싱그럽고 좋았다. 나는야 샴페인 p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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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 리셉션. 사실 완전 야외를 계획했다고 하나, 언제 비가 쏟아질 지 몰라 No. 2라는 레스토랑 테라스를 순식간에 빌려 이용했다. 다행히 그 와중엔 비가 한 방울도 안떨어졌다. 올 해 옌스 생일 때 갔던 곳으로 미슐랭 2스타의 영광에 빛나는 A.O.C. 주인이 같은 와인리스트로 약간 캐주얼한 파인다이닝을 위해 만든 곳이라 한다. 급작스런 요청에도 이런 리셉션 공간을 허해주어 어찌나 고맙던지. 괜히 다음에 또 한번 와야겠다 싶었다. 신부는 하객들과 환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우리 모두 준비된 샴페인을 마시며 즐거운 담소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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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샴페인은 옌스가 조금 뺐어 마셨다. 흑흑. 아기야. 너도 샴페인 한 잔 정도는 괜찮잖아? 그래도 우리는 마냥 신났다. 4개월만의 술

 

빗속의 보트 투어는 장소를 바꾼 리셉션의 연속이었다. 한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온 하객에게는 관광의 요소도 있었겠지만, 이 곳에서 온 우리에게는 신선한 리셉션이었다고나 할까?  다행히 우리는 비가 쏟아지기 전 보트에 올라탔지만, 신랑 등 많은 사람이 쫄딱 젖고, 신부의 드레스 자락도 비로 다 젖었는데, 모두 즐거워했다. 이 어찌 아니 행복할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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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서 드레스와 양복이 젖어도 우린 개의치 않아요. 저흰 지금 막 결혼했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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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마시고 즐깁시다.

웨딩 디너는 아주 오래된 고풍스러운 건물에 위치한 Bastionen og Løven이라는 레스토랑에서 진행되었는데, 여자는 자리가 정해져있고, 남자는 랜덤으로 뽑은 번호표에 따라 자리가 배정되고, 중간에 한번 테이블을 바꿔 앉는 식으로 테이블 팰리닝이 되어 있었다. 결혼식을 위해 만든 홈페이지와 청첩장 뿐 아니라 네임택조차 통일한 커플의 정서에 탄복했다. 사실 신부가 너무 바빠서 이런 준비는 신랑이 대부분 했다는데, 그의 세심함과 얼마나 정성스럽게 이들을 준비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우리 결혼때는 옌스가 손수 한장한장 이름을 칼리그래피로 써 넣었는데, 덴마크 결혼식에서 이 테이블 네임택이 갖는 중요성이 꽤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그래도 시어머니가 그런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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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세팅과 이름표. 이 꽃은 우리 집으로 가져왔다. 다 산거라며 신부가 집에 갖고가라고 귀띔을 해준 덕에 집이 화사해졌다.

 

해외에서 온 손님이 많은 결혼식이라 큰 틀에서는 덴마크 전통 결혼식을 유지하되 살짝 다른 모습도 볼 수 있는 재미있는 결혼식이었다. 특히 Hurra라고 뭔가 축하할 일이 있을 때 꼭 외치는 3번의 짧은 Hurra와 1번의 긴 Hurra를 들을 수 없었던 것이 신선했다. 난 당연히 가족들의 스피치 뒤에 이것이 따를 줄 알고 내 스피치의 마무리를 이로 준비했었는데, 오히려 내가 유일하게 이 건배사를 외쳤다. 이에 때맞춰 신랑의 친한 친구 중 한명이 Han skal leve라고 이 Hurra를 크게 외치는 노래를 뒤이어 부르기 시작해 홀 안이 Hurra로 가득차 어색함이 없어졌다. 해외 손님들이 이 Hurra가 어떤 건지 몰라 약간 어색함이 있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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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의 스피치. 사랑이 듬뿍 느껴졌다.

중간에 옆방에 가서 보니 gavebord라고 선물 테이블이 하객들의 선물로 꽉 차 있었다. 괜히 흐뭇해졌다. 우리나라의 축의금 문화와 달리 하객들은 선물을 준비하는데, 결혼하고 나면 하나하나 선물을 열어보며 선물명을 기록해 두었다가 이를 잘 쓰겠다며 고맙다는 답례카드를 보내곤 한다. 축의금과 달리 기억에 남고 좋더라. 초대 받아 정해진 RSVP 기간까지 온다고 답한 사람은 정말 어디 아파 쓰러지거나 집안에 무슨 큰 일 없으면 반드시 오고, 거의 하루 종일 낮부터 새벽까지 함께 즐기고 기뻐한다. 대신 초대한 사람은 참석자를 리셉션과 디너를 통해 하루 크게 대접한다는 방식이다. 따라서 축의금으로 대충 결혼 끝나면 수지가 대충 균형되게 끝나는 우리 결혼식과 달리 신랑, 신부의 지출로 식이 이뤄지게 된다. 왠만해서는 결혼 전 신랑, 신부를 다 만나 본 경우가 대부분이고, 직장 동료는 그 관계가 아주 오래되서 정말 친한 친구가 된 사람을 제외하고는 초대되지 않는다. 청첩장 돌려도 되는 사람인가 하는 부담을 느낄 필요도 없고, 하객 입장에서도 그리 가깝지 않은데 청첩장 받았다는 이유로 꾸역꾸역 가야하거나, 가지도 않을 애매한 거리인데 축의금 내야 하나 하는 고민 같은 것 할 필요가 없어 좋다. 대부분 결혼 계획을 아주 일찍 하기 때문에, 못 온다는 경우가 많지 않고, 애초에 초대할 만한 사람만 하기에 초대 받은 사람은 아주 기꺼이 온다. 자비를 내고 비행기를 타고서도.

내 결혼식에도 내 쪽과 옌스 쪽 하객 중 해외에서 온 손님들이 있었다. 오히려 한국-덴마크 든 국제커플 결혼할 때 난감한 상황은 한국식으로는 초대할 정도의 사람이지만 다른 쪽 관습으로는 초대할 만큼 가까운 사람이, “저 결혼식 불러주실거죠?”라고 물어오는 경우다. 어쩔 수 없이 상황을 설명하고 정말 가까운 사람만 초대한다고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지만, 실제로는 거절하기 정말 어려운 난처한 상황. 오히려 부르고 싶었지만, 우리 식으로는 비행기 표값을 대줘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신랑은 이해 못할 것이기에, 그리고 예산 문제로도 그럴 수 없는 상황) 한국식 짧은 휴가 문화 및 신랑, 신부가 따로 하객을 케어할 수 없는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초대하지 못하는 하객들도 많은데, 애매한 관계의 사람은 당연히 초대할 수 없다. (간혹 당연히 초대받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 중 초대받지 못하면 섭섭해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아무튼 초대 받으면 정말 고마운 것이고, 그래서 같은 나라에 있는 경우는 특별한 사유를 제외하고 (거의 그럴 일이 없다. 3~6개월 전에 초대하니까) 거절하면 사이가 약간 어색해지기에 대부분은 다 온다. 우리도 매우 감사하며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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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한가득 결혼 선물이! 우리 것은 한 복판의 핫핑크!

여느 덴마크 결혼식과 마찬가지로 많은 스피치가 있었으며, 친구와 가족들이 공연 등도 준비했다. 다만 다른게 있다면 흥이 많은 비 덴마크 하객들이 떼창을 부르며 공연을 얼마나 흥겹게 만들었던지. 옌스는 이런 웨딩 디너는 처음이었다며 즐거워했다. 각각의 결혼식마다 살아있는 특색이 결혼식 참석을 항상 즐겁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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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의 오래된 고향친구들이 공연을 준비했다.

신랑과 신부는 얼마나 행복해보이던지. 옆의 어머니도 이제는 눈물은 닦으시고 즐거이 식사와 담소를 즐기고 계셨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축복하는 결혼이니 잘 살겠지 하는 마음이 드셨을까? 영어로 진행되는 파티로 인해 다소 지루하셨을 것 같긴 하다. 새벽같이 준비 시작하셔서 다음날 새벽까지 진행되는 결혼이니 얼마나 힘드셨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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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이야기를 나누시길래 이렇게 다정한 눈빛을 나누시나요?

6시부터 시작된 길고 긴 저녁식사가 11시 즈음 끝나면, 테이블을 정리하고 춤을 출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꾼다. 12시가 되기 전 새로 탄생한 부부가 춤을 추는데, 이들을 삥 둘러싼 하객들이 전통 웨딩댄스 곡에 맞추어 한발 한발 다가서는데, 부부가 더이상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없어지면 춤은 끝나고 신랑 친구들이 모여들어 신랑의 양쪽 양말 끝을 가위로 자르는 것으로 모든 공식 일정은 끝난다. 그러면 자정부터 신나는 댄스파티와 술 타임이 새벽 5시 정도까지 이어진다.

우린 1시 정도에 자리를 떴다. 춤도 삼십분 정도 열정적으로 췄겠다 (과거의 수차례의 경험으로 이번엔 플랫슈즈로 갈아신고 저녁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춤도 출 수 있었고) 음료를 마시며 시간을 조금 보낸 뒤 자리를 뜨기로 했다. 항상 우리는 나이드신 분들 뜨는 타이밍에 뜨는데, 이렇게 새벽까지 노는 게 익숙치 않는 나 때문이다. 그래도 커피까지 마시고 버텨 (입덧은 아마 거의 끝난 듯?) 1시까지 즐겁게 놀고 돌아온 나에게 대견하다고 칭찬을 해주고 싶다. 사실 이제 슬슬 나오기 시작하는 배가 은근히 뭉쳐서 더이상 서있기 피곤하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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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외까지 받아가며 연습한 덴마크 전통의 웨딩 댄스. 아름다웠어요!

내가 초대를 받아 커플이 참석한 결혼식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첫번째는 옌스네 친척, 두번째는 옌스 친구 결혼식이었으니 말이다. 덴마크식 스피치 문화를 알지 못해 신부를 위해 한마디할 사람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초대해준 그녀에게 정말 고맙기도 하고 해서 스피치를 준비했는데, 잘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식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이제 대충 아는 상황인지라 그 어떤 결혼식보다도 편안하고 즐겁게 즐길 수 있었다. 하객들도 다들 어찌나 유쾌하고 흥이 넘치는 사람들이던지. 6시 정도부터는 날도 개어 사진도 야외에서 잘 촬영할 수 있었고, 그들이 계획했던 결혼식이 큰 변동 없이 아주 잘 진행된 거 같아서 그들을 대신해 내가 다 기뻤다.

이 둘이 평생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작은 일에 기뻐하고 서로 사랑하며 해로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잘 살아!!!

 

 

 

 

 

 

 

 

 

 

관계는 장담그듯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옌스의 3주간의 휴가가 거의 끝나간다. 나는 한 주 더 길게 썼으니 딱 한달이다. 4주간 정말 내 생애에 없을만큼 잉여로운 생활을 했다. 여행 다니며 먹고 쉬고 공부나 어떤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한달. 입덧 때문에 뭔가 열정적으로 할 여건은 안되기도 했고, 입덧과 함께 찾아온 피로로 하루에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방학이 때맞춰 찾아와준 것은 정말 축복이었다고 할 수 밖에.

덴마크에서는 결혼을 해도 시부모님을 어머니, 아버지로 부르지 않는다. 그냥 이름을 부르는 것이 전부. 30년을 한국에서 살아 형성된 시선으로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하니 적응하기 어려운 것들이 몇가지 있는데, 시부모님을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다. 나는 내 문화를 설명하고 엄마, 아빠에 해당하는 mor, far로 호칭을 하기로 했다. 옌스는 처음엔 이상할 거라고 하더니, 막상 시부모님도 정말 좋아하시고, 나와 그분들이 살갑게 지내는 것을 참으로 좋아한다.

부담스러우리만치 잘해주시는 시부모님임에도 나에게 시부모님이라는 존재는 나만의 경험 없이도 그냥 당연히 어려운 존재였기에 항상 행동이 조심스러웠었다. 오덴세에 사시다 보언홀름으로 이사가신 분들이라 거기서 가족이 모이긴 어려워 주로 시누이네 집에서 모이는데, 거기서도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게 좋은지 몰라 최대한 편하게 지내고 오고자 노력했다. 예를 들면 점심, 저녁을 먹는 모임의 경우, 식사가 끝나고 정리를 얼만큼 돕는게 좋은 건지가 매우 애매했다. 손님이 너무 거드는 게 실례가 될 수도 있기도 하고, 또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하자니 애매하고, 부엌도 너무 많은 사람이 있으니 오히려 동선만 복잡해지고. 시댁 가서도 좀 돕자니 이것 저것 하지 말라 하시고, 아무것도 안하자니 마음이 불편하고. 옌스는 그냥 편히 쉬라는데 한국인인 내가 그렇게 하기엔 내 살아온 방식이 그렇지 않아 마음 한구석 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 모든 것은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린 것이 아니었다 싶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사람들이 같은 공간을 공유하다보면 적당히 서로 겹치는 방법을 깨닫게 되고 익숙해지는데, 시부모님이나 나도 그런 것이었다.

시부모님네 별장에 가서 3박을 하고 돌아왔는데, 주시는 음식을 적당히 거절하기 (이것 저것 권하시면 세번이상 거절이 어려워 적당히 먹었었는데, 옌스가 장기적으로 보면 사전에 거절하는 법을 잘 배워야한다며 거절 잘 못하는 나를 교육시킨 바 있다.), 우리가 먹은 것들 설겆이 하고 정리하기, 시부모님 생활습관 파악하고 그를 존중하기 (우리 집보다 깨끗하게 생활하셔서 그거 맞추려면 조금 더 신경 써야한다.), 그 밖에는 그냥 내 가족들 대하듯이 편하게 생활하기 등을 잘 실천하고 왔다.

입덧이 심해서 먹을 수 있는 거 제약이 많으니 알아서 해먹을 거니 내 거는 신경 쓰지 말라고 옌스가 미리 전화하는 것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이것 저것 내가 먹을 수 있는게 뭐 있을지, 아무것도 요리해주실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많이 물어보셨다. 첫날은 다 거절하지 못해 조금 먹다가 결국 토하고나서는 어려워도 아니다 싶은 것은 다 못먹겠다고 말씀드렸고, 한번 그렇게 하고 나니 거절이 쉬워졌다. 샤워하고 나서 샤워부스 건조시키는 일도 그렇고, 설거지 하는 일도 그렇고, 돕겠다고 여쭤보는 거 없이 바로 하겠다고 나서니 잠깐 말리시다가 그냥 놔두시더라. 결국 적극성의 문제였던 것도 있고, 시부모님도 나를 완전히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전까진 손님같은 생각도 드셨기에 그랬었나 싶다. 내가 편해지니 시부모님도 나를 더 편하게 대해주시고 모든 것이 조금씩 더 자연스러워진다.

결론적으로 보면, 가족처럼 되기까지 한 일년은 걸리는 거 같다. 정말 장담그는 것처럼 관계도 시간이 걸리는 것. 물론 임신하면서 관계의 역학도 조금 더 새로운 형태로 바뀌는 것도 있었던 것 같고. 일종의 계기같은게 아닌가 싶다. 우리도 내년에 애 낳고 한국가서 한달정도 (나는 두달정도…) 우리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지내다보면 옌스와 우리 부모님 사이도 조금 더 편해지고 가족같아지겠지.

입덧이라는 미명하에 내가 좋은 엄마는 못되고 있는 것 같지만 (비타민 챙겨먹는거나 등등…) 이제 좀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아마 임신초기에 나처럼 막지내는 엄마도 별로 없을 듯. 이제 배도 – 나만 알 정도지만 – 나오기 시작하고, 진짜 애가 있긴 있나보다. 다음주 초음파를 처음으로 보기전까진 별로 실감이 안날 듯. 손주까지 나오면 또 다시 흐른 시간에 더불어 피가 섞인 손주를 낳은 며느리니 더 가족같이 느껴지겠지. 이제 정확히 30주 남았다. 그 날이 오기까지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덴마크 여행단상

  • 덴마크가 오랫동안 잘 살아온 선진국이라는 것을 느낀 것은 이번 여행을 통해 전국 구석구석 잘 닦인 포장도로를 보면서다.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은 잘 관리가 되어도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곳은 자원을 충분히 투입하기 어렵기에 속속들이 관리하기 어려운데, 개인의 집이 낡고 낙후된 지역은 있을지언정 그를 연결하는 인프라가 낙후된 곳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 시골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 교회는 정부 종교부에서 관리를 하는데, 교회와 그 묘지, 인근 도로며 주차장까지 얼마나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있던지.
  • 율란을 여행하며 덴마크가 풍력의 나라임을 명성 뿐 아니라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할 수 있었다. 드넓은 평원과 농지엔 어김없이 풍력발전기가 세워져 있었고 바람의 땅 답게 거센 바람이 그들을 쉬지 않고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 율란사람들이 무뚝뚝할 것이란 편견과 달리 시골인심이 더 좋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나라나 비슷하구나.
  • 옌스가 18살이 될때까지 자랐던 집에 처음으로 가봤다. 구글 스트리트뷰로만 봤던 곳이었는데. 다음에 한국에 가면 내가 자라면서 살았던 동네들을 가보고 싶단다. 내가 어떻게 자랐는지 더 알고 싶다고.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계속 한자리에 살고 계신 외할머니댁을 방문했을 때, 내 삶을 더 잘 느낄 수 있었다고. 옌스가 스케이트보드를 타던 공터, 10학년까지 다녔던 학교, 시부모님이 운영하시던 치과, 옌스와 여동생이 크면서 방과 독립된 출입구를 따로 주기 위해 증축했던 부분의 흔적을 보는 일은 마치 과거를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 난 어렸을 때 살 던 곳을 가면 상전벽해라는 표현이 딱 맞다고 느낄만큼 너무 많이 변해서 추억을 더듬기 어려운데, 그래도 다음엔 그 흔적들을 찾아 보여주고 싶다.
  • 덴마크 사람들은 속도를 꽤나 내는 편이다. 정속으로 맞추고 크루즈로 주행하려면 마지막 차선에서 조용히 달려야 한다. 대부분은 시속 10~20킬로미터 정도 초과한 속도로 달린다. 독일인에 비하면 덴마크인은 규제에 적응하는 방식이 평균적으로는 유연한 것 같다.
  • 에벨토프트에 가서는 유명한 정치인을 봤다. Radikal Venstre라고 중요 보수당 중 하나인 정당의 당수다. KBS 다큐에서 자기 애를 사무실에 데리고 온 모습이 잠시 비춰진 적이 있는데, 그 딸과 함께 1800년대 전함을 보러 왔더라. 매우 유명한 정치인임에도 아무도 아는 척 하지 않는게 역시나 인상깊었다. 매번 유명한 사람 보면 아는 척하는 사람은 나고, 옌스는 티내지 말라고 한다. 사생활은 존중해줘야 한다고.
  • 콜드하와이라고도 불리고 파도가 서핑하기에 좋아 사람들이 몰린다는 서해안가 Klitmøller라는 곳에 다녀왔다. 바람이 불고 날도 흐리고 비가 와 추웠는데, 샵들이 문을 닫는 시간 막판까지 서핑과 스탠딩 패들링 보드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았다. 영어로 대화하고, 액센트가 여기 것이 아닌 점으로 보아 미루어 짐작하길 덴마크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았다. 겨울에도 서핑을 즐기는 지역이라 하니 지금 즐기는 사람이 있다 해도 이상할 건 아니겠지만, 역시 내 눈엔 놀랍게 보였다.
  • 산업화된 어업이 발달된 어촌을 방문했는데, 정말 생선 냄새가 진하더라. 어부들은 그 냄새를 돈냄새라고 한다던데, 돈냄새 한번 진하게 맡고 왔다. 바다도 비린듯한 바다 특유의 짠내가 나던데, 역시 대양에 접한 바다에 가야 이런 냄새가 나는구나 싶었다. 우리네 삼면의 바다에서 나는 그 짠내가 코펜하겐에선 나지 않아 바다가 바다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대서양을 접하는 서해안은 우리네 바다와 닮아있었다.
  • 세계 2차대전 기간 중 덴마크는 독일에 점령당한 아픈 기억이 있다. 금방 항복을 했기에 큰 피해는 없었지만, 내 나라의 주권을 잃은 슬픔이야 어느나라고 다를 바 있겠나. 연합군이 덴마크 연안을 통해 침공을 해올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독일군은 서해안가에 무수히 많은 벙커를 지었다. 이는 서해안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었는데, 콩크리트가 부식되며 무너지고 그 안에 날카로운 철근이 드러나는 등 애들에게 위해요소가 되고 있다고 한다. 경관을 해치는 것은 당연하고. 이를 철거하는 비용을 독일이 대야 한다는 등 논란이 계속 있다고 한다. 앞으로 어떻게 바뀌려나? 전쟁의 기억을 위해 놔두는 것도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 구조물을 해체한다고 기억도 해체되는 것이 아니며 아름다운 경관을 해하는 구조물은 없애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다.
  • 한국음식이든 다른 아시아음식이든 빵이 아닌 메뉴를 오래 못먹으니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원래 빵만 먹고도 일주일 버티는 것은 일도 아니었는데, 입덧 덕에 버터나 유제품을 많이 못먹는 관계로 힘들었다. 마트에 뭐 사러 들어가면 나는 빵집 버터냄새로 인해 몇차례나 구토감을 느꼈다. 중간에 태국 식당을 하나 발견해서 볶음밥을 먹고나니 얼마나 살 것 같던지.
  • 다니다보면 건물들 관리상태에서 못사는 지역과 잘사는 지역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Udkantsdanmark (울캔츠덴마크) 는 조세수입보다 지출이 큰, 사실상 경제가 죽어있는, 잘 못사는 지역을 일컫는 단어다. 갈수록 경제가 큰 도시들로 집중되다보니 이런 지역들도 늘어나는데, 일할 의욕도 없고 나라가 주는 돈보다 더 벌 능력도 없는 사람들 중에 이런 지역으로 이주오는 사람들이 많아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나라에서 주는 돈은 똑같은데 집세가 낮고, 사회복지를 수령하는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으려는 노력을 나라에서 강제하는데, 일자리가 없어 일을 하라고 등떠밀릴 일이 없는 지역이기에 이사를 온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면 지방세수가 부족해 해당 지방정부는 지역사업에 투자할 예산이 부족해지고 사람들도 집 관리를 잘 안하니 도시가 우중충해지고 좋은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으려는 지역으로 변해가게 되어 악순환이라고. 조금만 가꿨으면 좋았을 도시들이 우중충하게 바뀌어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 마지막 여정을 위해 선택한 (호텔이 다 예약이 차서) Bed & breakfast에선 기이한 집주인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만 65세가 되어 은퇴를 한 그는 피아니스트 와이프와 이혼을 하며 2백만 크로나를 주고 데려온 전처의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어깨에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유수의 콩쿠르도 나가며 바이올린을 연주했다는데, 그의 바이올린 선율에서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좀 뜬금없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음에도 그 집을 예약한 이유는 그 집 사진에 있는 그랜드피아노 때문이었는데, 피아노 연주도 수준급이었다. 바이올린을 그만두고 유럽내 상업항공사의 파일럿을 했던 그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얼핏 들으면 허풍처럼 들릴 수 있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냈던 그였지만, 이야기를 통해 느껴지는 그의 해박한 지식들과 마침 놀러온 동네 주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이야기가 진실임을 알 수 있었다. 다음에 또 그 곳에 갈 일이 있다면 그의 집으로 또 방문을 할 것 같다. 남유럽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기에 그랬을까? 쉽게 사람에게 마음을 내어주고 품어주는 느낌에 마치 남유럽사람을 만난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 4박 5일의 짧은 일정동안 즐겁게 여행하다 돌아왔다. 중간중간 입덧 때문에 오후스는 거의 보지 못하고 라틴쿼터만 돌아보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는데, 그래도 다른 지역들도 돌아보고, 옌스 친구와 내 친구, 옌스네 친척도 만나면서 좋은 시간 보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여기서 말하는 친구란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된 한-덴마크 커플중 여자분인데, 한-덴마크 커플이기에 공유할 수 있는 여러 이야기와 경험을 공유할 수 있었던 점, 참 따뜻하고 유쾌한 사람들이란 점에서 이번 여행을 또 다른면에서 알차게 해준 시간이었다.
  • 집으로 오는 길은 항상 길다. 600킬로가 넘는 거리를 주로 고속도로로 달리다보니 지루하기도 하고 해서 열심히 달려왔다. 옌스가 나보고 속도악마 (speed devil) 란다. 시작은 나도 여유롭게 달리고 싶었는데,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속도에 대한 감각도 흐려지고, 인내심도 서서히 바닥을 보이며 막 달렸다. 집에 오니 시체가 되어 침대에 널부러져있었는데, 역시 집이 최고인 것 같다. 물론 이런 여행을 해야 집이 최고라는 것을 느끼게 되곤 하지만.
  • 오후스에서 만난 친구와도 이야기한 바이지만, 이 나라가 진정한 의미에서 내 집이라고 느껴지려면 얼마나 살아야 할 지 잘 모르겠다. 막상 한국에 돌아가면 또 이질적인 감정을 느끼게도 되긴 하지만, 그 곳에선 삶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고, 여기선 그렇지 않기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 같다. 우리가 커오면서 너무나 당연히 아는 사실과 관습이 사실은 얼마나 오랜 기간에 걸쳐 꾸준히 학습을 해온, 어렵게 체득해온 것인지를 인지하기엔 해외에서 살아보기 전까진 모른다. 아마 앞으로 30년을 살아도 새롭게 배우는 것들이 있을 거다. 그래도 그땐 내 집이라고 정말 느껴질까?

덴마크에서 먹고 사는게 힘든 이유

덴마크에선 한국인으로서 간혹 먹고 사는게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1.

해산물이 귀하다. 흔히 구할 수 있는 생선은 대구와 가자미과의 납작한 흰살 생선의 필레. 새우 쭈꾸미같은 작은 오징어류와 관자 등의 냉동 해산물을 팔긴 하지만 조개류라고는 주로 냉동 홍합이 다다. 해산물 전문점은 좀 사는 동네에 가거나 토우어헬러너(Torvehallerne)라고 gourmet 식재료 파는 광장시장에 가야나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좋은 식자재는 얼마나 비싼지. 한국에선 그냥 아무 마트나 가도 사는 건데. ㅠㅠ

너무나 봉골레 스파게티가 먹고싶었다. 여기저기 파스타집 메뉴를 인터넷으로 검색해 샅샅이 뒤져 봉골레 스파게티를 찾아봐도 좀처럼 찾기가 어려워서 결국 만들어 먹기로 했다. 조개의 옵션은 큰 모시조개나 작은 바지락. 큰 모시조개를 선택하기로 했다. 1킬로그램에 180크로나! 한 35000원 하는 금액이다. 와인 작은병 하나로 50크로나, 플랫 파슬리가 집에 다 떨어져서 화분하나 25크로나 파스타면 20크로나 토마토 20크로나 대충 300크로나가 나왔다. 흐미. 5만원이 넘네. 물론 한번에 이 조개를 다 소화하고 싶진 않았지만 내일부터 4박 5일의 여정으로 휴가를 가기에 냉장고에 이를 둘 수는 없었다. 옌스는 조개 등 해산물을 그닥 좋아하지 않고.

봉골레 스파게티는 재료가 좋고 비율만 잘 맞춰주면 실패하기가 어려운 스파게티라 맛은 있었지만, 집에서 해먹는 것 조차도 이렇게 비싸지면 자주 해먹기 힘들다. 여태껏 조개를 한번도 안사봐서 몰랐는데, 이렇게 비싸니 식당에서 안 팔수밖에. 파스타에 이렇게 비싸면 누가 파스타를 사먹나. – -;;

덴마크는 잡히는 해산물의 대부분을 해외로 수출한단다. 자국내에서 먹히는 해산물이 제한되어 있어서 그런 모양이다.

2.

콩나물이 아주 귀하다. 한번 콩나물을 본 적이 있었다. 딱 한번. 그나마 얼마나 콩나물대가 약하던지. 친한 후배가 사다준 콩나물 기계로 키워보았으나, 이상하게 잘 안크더라. 아마 기후가 안맞아서 그러는 모양이다. 숙주랑 콩나물은 아주 달라서 대체가 되지 않는다. 한국에선 그렇게 싼 콩나물인데, 이 어찌나 귀하신 몸이더냐.

3.

낙지가 없다. 문어는 있고 오징어는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낙지는 없다. 왜 낙지는 없을까. 미더덕도 없다. 내 사랑 미더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