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누이와의 관계 재정립

집안의 대소사에 여자들이 주 역할을 맡는데서 오는 정신적 부담을 멘탈로드라고 하던데, 우리집도 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이와 관련된 모든 일정을 옌스가 열심히 챙기지 않아 내가 챙기다보니 시댁 식구들과의 관계에서도 일정부분 주도를 해왔다. 아이의 생일이나 공연 초대, 시댁 방문 휴가, 시댁 행사 관련해서 음식 준비를 하거나 하는 것 등. 내가 할 수 있으니 한 것들인데, 그게 어느새인가 자연스럽게 당연히 내가 해야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시누이네는 아이가 셋이고, 부부 모두 바빠서 일정을 잡는게 쉽지가 않다. 우리는 뭔가 초대를 받으면 꼭 가려는 전제하에 일정에 무리가 있으면 조율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고, 그게 안되면 되는 사람만 간다든지 최대한 맞추려고 해왔다. 어쩌면 여기서부터 전제가 잘못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굳이 그걸 맞추려고 할 게 아니었는지도. 우리가 제안을 하면 그 날짜가 안된다고 하면서 다른 날을 찾아보면 좋겠다고 하되 또 다른 날을 제안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날을 물어보면 그 날도 안되는 경우가 많고. 하나의 생일을 축하할 겸 초대하려고 하는데, 날짜 맞추기가 너무 힘들어서 짜증이 확 올라와버렸다. 한 두번정도 날짜 조율이 안되면 차라리 그날 못간다고 미안하다 하고 즐겁게 축하하라 하면 되는데, 다른 날짜를 맞춰보자면서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이번 토요일에 하나 공연이 있는데, 그때 만나서 조율하자고 하는데 거기서 짜증이 확 올라오는거다.

짜증이 올라오던 순간 밖에 있었는데, 집에 돌아와서 옌스에게 앞으로 시누이네랑 일정 조정하는 거 당신이 하라고 했다. 왜 그렇느냐고 묻길래, 화가나는 포인트를 이야기해줬더니 시누이가 나쁜 뜻으로 그러는게 아니지 않는가, 애가 많아서 바빠서 그러는 거다 라는 거다. 그 말에 나는 짜증이 더 확 올라왔다. 그러면 그것에 짜증내고 있는 내가 나쁜 뜻이 있는거냐고 받아쳤더니, 그런 뜻이 아니란다.

모든 관계는 쌍방이지 않느냐. 내가 시누이네 애들, 시누이 생일 등 가족행사에 시간 내서 가는 것은 뭐 나라고 시간이 남아 돌아서 그 넘치는 시간 내서 가는게 아니다. 시누이네 행사 일정 조율할 때 우리가 이런식으로 힘들게 한 적이 있느냐. 나도 나쁜 마음 먹는 거 아니고, 앞으로도 가게 되는 행사 좋은 마음으로 갈건데, 애써 이렇게 일정 맞춰주려고 노력하지 않겠다는거다, 나도 안되면 그냥 그날 안된다, 대안 제시없이 수동적으로 그냥 다른 날 안되냐고 물어보겠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보다보니 결국 이렇게 되는 건 이 상황에 옌스가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아서라는 결론이 나왔다. 하나가 시누이네 가족과 가까운 연을 이어가고 있는데, 자신의 생일에는 시누이네가 오지 않고, 그쪽 생일에만 우리가 가니까 그게 아쉬웠던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생일 초대도 하려고 했던 것인데. 결국 이런 상황에 놓인 것은 당신이 적극적으로 하나와 시누이네 가족간의 관계에 역할을 하지 않아서 그런거 아니냐, 당신 시누이네 행사에 우리는 다 가는데 – 그것도 아이들이 세명이나 되는 그 집 행사에 모두 – 우리 행사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도 결국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그런건데 왜 우리만 그렇게 해야 하느냐라고 힐난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이런거 안하겠다. 그래서 하나가 시누이네를 초대하거나 뭘 같이 하거나 이런거 물으면 당신한테 물어보라고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시누이네랑 뭔가 행사가 없으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내말이 틀리냐고, 내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느냐고 불어봤다. 시누네 남편은 그룹채팅에도 없는데, 왜 나혼자 거기에 껴서 이런걸 해야 하냐고.

옌스도 그 말에 내 감정이 드디어 이해가 되었던 것 같다. 미안하다며 앞으로는 자신이 그 역할을 하겠다고 하더라. 크리스마스도 그간 그 집 조카들이 자기네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다고 해서 그 집에서 계속 보내왔는데 그것도 선물 교환때에만 하고 식사는 따로 하는 것으로 했다. 아직 통보하지는 않았지만. 음식준비를 우리에게 넘기지 않아, 우리가 초콜렛이나 뭔가 물질적인 것으로 역할을 할 수 밖에 없게 하면서도 그 스트레스를 크리스마스 식사 내내 뿜어내는 시누이 남편을 마주하며 받아온 스트레스가 너무 컸기에.

옌스는 그런 상대의 스트레스를 눈치채도 크게 스트레스 받지 않는 타입인데, 나는 상대의 불쾌함이 너무 많이 느껴져서 그게 나에 대한 게 아님에도 너무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듯한 상태가 된다.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가서 릴렉스하게 앉아있는 옌스는 괜찮은지 모르겠지만, 작년에 그 냉랭함이 유독 크게 느껴져서 올해는 정말 가고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옌스한테 여러번 시누이랑 이야기해서 음식 분담을 어떻게 해보든가, 아니면 식사는 따로 하든가 조율해보라고 했는데, 그걸 아직껏 이야기하지 않고 이번 주말에 얼굴 볼 때 이야기해보겠다는거다. 하나랑 시누이네 큰조카도 같이 있는데? 그걸 애들이 있는데서 이야기할 것은 아닌 거 같다고 하고 그냥 식사 따로 하자고 이야기했다.

시누이네 초대하고 다 좋은데, 먼저 되는 날짜 조율해서 대안 몇개 갖고서 나랑 그 다음에 조율하면, 음식하고 그런건 하면 되는 거니까 부르라고. 그런데 내가 나서서 부르고 그런건 앞으로 안하겠다고. 마음이 아주 편안한 것은 아니지만, 그 역할을 계속 맡는다고 봤을때 느껴질 불편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 그냥 그러기로 했다. 그리고나서 시누이에게도 우리 셋의 그룹챗을 나가겠다고 이야기해두었다. 우리 일정을 그들의 일정에 최대한 맞추려는 노력이 일정 조율을 너무 길게 늘어지게 해 나와 그녀 모두에게 스트레스가 되는 것 같아서 앞으로 옌스가 직접 일정 조율을 도맡아 하기로 했다, 그러면 일정조율도 좀 더 일관적이어질테니 말이다며. 이해해달라고 하고 나왔다.

불편함을 적극적으로 쳐낼 수 있어야 가족 관계도 오히려 건강하게 가져갈 수 있을 것 같다. 이렇다가 더 누적되서 아예 참여하기도 싫다는 상태까지 가는 것보다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게 좋지 않은가. 시누네 남편도 참여하지 않는 역할에 나라고 괜히 열심히 참여하다가 괜히 데이지 말고 물러날 때 적당한 선으로 물러나는게 좋다 싶다. 덕분에 올 크리스마스엔 좀 편한 마음으로 보내겠구나. 다행이다.

율 전통 (a.k.a. 크리스마스 전통)

12월 1일이 되기 전 집안을 크리스마스에 맞게 장식했다. 정확히 말하면 Jul. 예수 탄신인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에 기독교의 색깔이 덭칠해진 덴마크의 오랜 전통인 율, 동지 축제를 기념하는 것이다. 그래서 덴마크어로 보면 예수 탄신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지붕 밑 다락, 숲속 등에 사는 요정같은 Nisse이 전통의 핵심을 차지한다.

올해는 진짜 나무대신 가짜 나무를 사기로 했다. 나무를 매년 자르는 것이 좋지 않다는 하나의 의견에 따라 우리도 편하게 가짜 트리로 옮겨탔는데, 가짜를 할 거면 정말 가짜같은 것을 사야한다는 옌스의 의견과 그도 괜찮다는 하나의 의견을 수렴해 분홍색으로 주문했다.

집에는 문틀, 창틀, 선반 등에 장식을 했고, 작년에 이어 손수 리스를 만들어 집 앞을 장식했다. 작년의 경험을 토대로 올해는 짚으로 만들어진 틀에 작식을 꽂는 것으로 바꿔봤는데, 훨씬 더 수월하게 만들 수 있었다. 아이와 사슬고리를 만들어 창틀에도 달았고, 캘린더 촛대 장식도 만들어서 여기에 매일 불도 붙이며 율레휘게 (julehygge)를 내보고 있다.

굳이 안해도 된다 하고 하지 않던 것을 아이가 생기면서 하게 된다. 덴마크 사람들은 전통이라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데, 이게 어디서 내려온 전통을 중시한다기 보다는 우리만의 전통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아이가 좀 크면서 보니 아이들은 어떤 반복적인 것을 좋아하더라. 써프라이즈도 물론 좋아하지만, 그런 써프라이즈 마저도 한번 너무 좋았으면 다음에 또 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뭔가 좋아하는 것을 그 시기에 다시금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예측 가능한 즐거움을 좋아한다. 그래서 크리스마스가 되면 작년에 했던 똑같은 것들을 또 하고 싶어서 기다리게 되고. 그 중 하나는 바로 이 율레퓐트 (julepynt)다

격변의 시대에 자라왔던 나는 그 전통이 우리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가, 이를 간소화하자 이런 움직임을 귀에 못이 막히도록 들었기에 전통이 가지는 부담에 초점을 두고 커왔다. 그래서 나에게 그냥 일상 생활 속 전통은 갈수록 간소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거의 없어지다시피 한 것 같다. 해외에서 살면서 더욱 그래왔는데, 아이가 그런 전통을 좋아하고 우리만의 전통을 만들어하고 싶어하니 나도 어쩔 수 없이 이에 동원되었다.

그런데 하다보니 아이가 그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전통의 행사와 그 뒷정리에 익숙해지면서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된 것 같다. 물론 어둡고 칙칙한 겨울을 이겨내기 위함도 있고. 율과 신년을 지내는 기간 만큼은 이 어둡고 긴 겨울도 따뜻하고 밟게 느껴지니까.

아이와 율레베이(julebag)라고 율 기간에 먹을 과자를 굽는 것도, 율레퓐트를 만드는 것도 다 휘글리하게 느껴진다. 율레개우(julegave), 즉 선물은 아이에게만 주고 우리끼리는 주고 받지 않는데, 선물 사는 일만 제외하면 포장하는 것부터 다양한 전통들이 나름 기대되고 즐겁다.

겨울을 버티는 힘

겨울이 되면 해가 짧아져서 아쉽다. 하지만 정해진 환경을 불평하며 탓해봤자 좋아질 게 없으니 좋아할만한 것들을 찾아본다. 크리스마스에 가까워지며 틀게 되는 hyggelig한 음악, 따뜻하게 데워먹는 차와 겨울 음료들을 마시며 가슴 안으로부터 느껴지는 따스함, 간간히 내리는 눈, 포근한 스웨터, 분위기의 온도를 높여주는 작은 크리스마스 장식과 촛불,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과 나누는 담소, 담요를 덮고 책을 일거나 뜨개질하기, 겨울 간식의 따뜻한 단내. 그게 있어서 겨울을 버티는 것 같다.

풀타임 워킹맘

아이를 제대로 케어하기 힘들어 엄마에게 죄책감을 갖게 한다는 풀타임 워킹맘의 위치. 덴마크의 엄마들은 대부분 워킹맘이고, 대부분은 풀타임으로 일을 하지만 다들 일상을 각자의 힘으로 굴린다. 우리도 시부모님이 멀리 사셔서 애가 아파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경우는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 일년정도였다. 아직 코로나 전이었었고, 재택 개념이 일반 회사원에겐 적용되지 않던 때라 도움이 너무 아쉬웠다. 그나마 그기간 중 애가 두돌가까이 되기 까지는 내가 대학원생이었어서 그냥 내가 석사 논문 쓰는 것을 못하는 정도로 넘길 수 있어서 유연하게 할 수 있었으니 망정이지. 두돌 지나고 나니 애가 그렇게 자주 아프지 않기도 하고, 중앙정부기관은 아이가 아프면 첫 이틀은 보육 휴가를 쓸 수 있어서 대충 넘긴 것 같다. 코로나 이후, 어디가 아프면 일하지 못할 정도엔 쉬고 (이건 원래 그랬고), 일할 정도긴 하지만 남에게 옮을만한 증상이 있으면 집에서 일하는게 보편화 되기도 했고, 상황에 따라 재택을 할 수 있는 제도가 도입되면서 풀타임 워킹 부모들의 일상이 조금 더 여유로워졌다.

덴마크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게 현실적으로 풀타임워킹맘의 일상을 쉽게해주는 것들엔 뭐가 있을까? (물론 이는 모두에 해당하는 건 아니다. 사무직이고, 내가 어느정도 업무시간을 조율하는데 재량이 있는 유연근무재도가 있는 회사에 다니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한 이야기이다. )


  • 유연한 근무시간

주당 37시간의 근무시간인데, 나는 중앙정부 공무원이라 30분의 점심시간이 근로시간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중에서 9시부터 2시 반까지는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근무를 해야 하고, 이 시간을 포함해 나머지 근로시간은 알아서 다른 시간에 배분할 수 있다. 매일 근무시간을 온라인 근로시간기록부에 기재하는데, 프로젝트별로 얼마나 시간을 할애했는지 시간을 기록하면 된다. 이 기록에 따라 초과근무한 시간을 모아서 다른 날 적게 근로할 수도 있고, 많이 모으면 휴가로 쓸 수도 있다. 이를 Flex timer라고 하는데 알아서 조절해서 쓰면 되니 어떤 날은 7시간 일하고 어떤 날은 8시간 일할 수 있다. 우리는 직장이 지방이전하면서 코펜하겐 시내에서 통근버스를 운행하는데, 여기서 일하는 시간도 근로시간으로 기록할 수 있고, 사무실에 나와서 일하는 경우, 한시간은 집에서 일해도 된다. 막상 통근버스가 있어도 주로 자차로 출퇴근을 하다보니 러시아워를 피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그러니 애를 픽업하고 나서 집에서 일을 더 해도 되고, 애를 데리고 어디 과외활동을 하러 가야하는 경우, 애를 기다리면서 일을 할 수도 있다. 발레학원 데려다주러 가면 거기서 일하는 부모들이 많다.

  • 한국밥상보다 상대적으로 간단한 저녁식사

평일엔 외식을 잘 안한다. 외식 자체가 비싸기도 하고, 배달은 배달비까지 (한국보다 배달비가 많이 비싸다.) 추가되니 다들 집에서 요리를 해먹는다. 하지만 한국처럼 반찬을 가지가지 해먹을 필요 없이 간단히 메인 요리 하나, 샐러드, 밥이나 감자, 빵 같은 것으로 탄수화물 쪽을 채워주면 되는거라 애 픽업해서 같이 장 봐와서 요리해 밥 먹기가 그렇게 번거롭지 않다.

  • 이른 등교시간

학교 수업자체는 8시에 시작하지만 돌봄교실이 7시정도에 연다. 요즘 예산부족으로 곧 7시 15분으로 조정될 것이긴 한데 학교에 따라서는 6시 반에 등교시킬 수도 있다. 딱히 뭔가 활동이 있는 건 아니고, 아이가 종이에 색연필로 그림을 그릴 수도, 책을 읽을 수도, 보드 게임을 할 수도 있다. 어른들이 있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말이다. 우리 집은 내가 저녁 요리 담당이라 (남편은 설겆이 담당) 회사에 통상 7시 15분 정도에 도착하게 출근을 해서, 남편이 자기 출근하는 길에 7시 반쯤 등교를 시킨다. 그러면 내가 회사에서 3시 좀 넘어서 퇴근하면 4시 좀 전에 픽업할 수 있다. 학교는 시마다 다른데, 우리 시는 – 같은 예산 부족 이슈로 5월부터 15분씩 단축되겠지만 – 월-목까지는 5시, 금요일엔 4시에 문을 닫는다. 수업이 한시까지 진행되고 방과후엔 오전과 달리 조금 더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도자기나 뭔가 만들기를 할 수 있는 곳도 있고, 밖에 나가 놀수도 있고, 아이들도 많으니 할 수 있는게 늘어난다.

  • 아이들의 독립성

어려서 아이들이 뭔가를 스스로 하게 해주는 것은 사실 아이의 의지가 없어서라기 보다는 그걸 허용할 수 있는 부모의 여유가 있느냐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 나도 내가 해주는 게 더 쉽고 빠르기에 애에게 기회를 주고 실패를 경험하고 여러번 시도해서 성공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은 나에게 꽤나 많은 인내심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을 들이고 나면 뒤로 가면 갈수록 아이도 부모도 수월해진다. 이미 두발자전거를 세돌 반이 되기 전에 마스터했는데, 그러기 위해선 수많은 넘어짐이 필요했고, 낮은 자전거를 뒤에서 잡아주느라 아빠의 허리가 고생을 많이 해야했다.

화장실에 가서 큰 볼일 보고 뒤처리를 함에 있어서도 – 위생을 위해 내가 개입하고 싶어도 – 언젠가 이를 아이에게 완전히 넘기지 않으면 독립을 시킬 수가 없다. 학교에서 0학년 (유치원반) 시작하기 1년전에 만 5세 정도에 화장실 완전히 혼자가는 훈련을 시키는데, 한 3개월정도 자기가 하고 우리가 검사하는 식으로 하니, 독립의 의미가 없어지는 거 같아서 결국 완전히 손에서 놔야 했다. 엉덩이가 가려워지는 경험을 해야 자기도 더 잘 닦게 되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준비를 하는 것도 다 알아서 한다. 옷을 혼자 찾아 입는 것은 이미 어린이집 다니면서 만 3세경부터 했고, 4세 경부터는 머리도 혼자 빗고, 5세부터는 자기 아침식사는 자기가 차려 먹는다. 뜨거운 밥과 국 이런것을 먹는 게 아니니까 가능하겠지만, 아침에는 그런것을 먹을 여유도 없다. 5시 40분에 일어나서 나도 내 준비해서 애 도시락까지 싸주고 6시 40분엔 문을 나서야 하고, 남편은 6시 반에 일어나서 자기 준비하고 내려와 일곱시 아침 식사할 때쯤이면 나는 이미 나가고 없으니까 애가 알아서 혼자해야하는 부분이 꽤 크다. 자기가 알아서 하니 뭐가 마음이 드네 안드네 할 일이 없다.

  • 완벽하지 않은 집안일

집안 청소는 일주일에 한번만 한다. 화장실 청소도. 그냥 정리만 하고 살다가 주말에 모든 집안일을 한번에 처리한다. 주방이야 항상 치우고 닦는 것이니 일주일 사이클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 외엔 다 그렇게 한다. 주택에 사는 것이라 소소하게 집안 관리할 일들도 있기에 그 이상 집안일을 자주 하고 살 수가 없다. 집안일의 퀄리티를 특별히 올리려거나 그런 거에 힘을 쏟기 어렵기 떄문에 꼭 해야 하는 일을 딱 필요한 수준으로만 하고 산다. 엄마가 워낙 깨끗하게 사셔서 나도 집을 지저분하게 두고 살 수는 없는 사람이지만 인테리어 잡지에 나올 것처럼 항상 깔끔하게 하고 살 수도 없고, 아이 방은 주말 한번 정리할 때 빼고는 엉망진창으로 어지러워져도 내버려둔다.

  • 명확한 규칙과 루틴

아이는 하루에 게임을 하던 텔레비전을 보던간에 30분의 스크린타임을 갖는다. 내가 대충 시간을 보고 있긴 하지만 자신이 타이머를 맞추고 한다. 평일에 친구네 집에 가서 놀 경우, 저녁식사를 위해 6시 전에는 집에 돌아온다. 학교에서 집에 오면 가방부터 풀어 도시락과 체육복 등 정리할 것부터 정리해야 놀 수 있다. 7시 15분엔 올라가서 목욕을 하고, 욕실을 건조시킨 후 (석회 때문에 스퀴지로 물기를 제거하고 타월로 깔끔히 물기를 닦아내야 한다.) 잠옷 갈아입고 양치질 한다. 우리가 양치질은 한번 더 시킨 후 – 덴마크에서는 충치방지와 모토릭 발달과정상 수준을 고려해 만 10세까지는 부모가 양치질에 개입하라고 권고한다. – 여덟시 쯤 침대에 들어가 남편이나 내가 책을 읽어준 후 여덟시 반이면 잠을 잔다. 이 부분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 지킨다. 일찍 자는 것 같지만 아침 5시 50분에 일어나 일과를 시작하기 때문에 8시 반에는 잠을 자야한다. 이 부분 때문에 가족이 다 같이 저녁에 어디가서 늦게까지 있다가 오고 이런건 현실적으로 하기 어렵다. 애가 10대가 되어야 취침시간이 좀 늦어지고 저녁시간 활용이 좀 더 다채로워지는 거 같다.

  • 신체활동 중심의 과외활동

아이는 주중에 발레와 체조를 다니고, 주말엔 한글학교를 간다. 한글학교는 거의 놀러가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느는 걸 보면 뭔가 배우긴 한다. 학교에서는 숙제도 내주지 않고 나도 딱히 공부를 시키지 않기에 아이는 그냥 노는게 일과다. 그림그리고 책 읽는 시간 빼면 친구랑도 혼자서도 잘 논다.


월화목토는 내 저녁시간, 수금일은 남편의 저녁시간이다. 스포츠를 하거나 공부를 하던 뭐를 하던 자기 마음대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 저녁시간을 갖지 않는 날에 아이를 재우는 담당을 한다. 저녁화목토는 내 저녁시간, 수금일은 남편의 저녁시간이다. 스포츠를 하거나 공부를 하던 뭐를 하던 자기 마음대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 저녁시간을 갖지 않는 날에 아이를 재우는 담당을 한다. 각자 스포츠를 하더라도 돌아오는 시간이 그렇게 늦지 않으니 우리끼리 시간은 그 남은 시간에 보내면 된다. 애가 하나만이라 가능한 것일 수 있는데, 주변에서도 워킹맘이라 힘들어하고 그런건 의사같은 특수 직종 빼고는 흔히 듣는 이야기는 아니다.

상대적으로 비유연한 근로시간때문에 한국에서 적용가능한 방식은 아니겠지만, 사회가 좀 더 유연하게 바뀌면 워킹맘도 조금은 수월해지지 않을까?

혼자 하교하는 아이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가면 아이의 20분 조금 덜 걸린다. 아주 먼 것도 아니지만 가깝지도 않은 거리. 가까운 곳에 사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이미 작년부터 혼자 집에 걸어가는 아이들이 있긴 했는데, 최근에 들어서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이도 집에 혼자 간다고 아이가 말을 해왔다. 그래서 자기도 곧 그렇게 하고 싶다고.

작년부터 연습을 하기로 했었는데, 그러려면 내가 집에 차를 데고, 걸어가서 아이를 데리고 와야 하는지라 겨울들어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날도 밝아지기 시작하고, 주변 친구들의 사례도 보고 하면서 슬슬 연습을 해야겠다 싶었다. 집에 오는 길에 왕복 4차선의 길을 횡단보도로 건너야 하는데, 거기에서 하나가 건너는 방향으로 우회전을 하거나 비보호 좌회전을 하는 차량들이 제법 되는 길이라 아이도 확인을 잘 하고 건거야 한다. 또 중간에 보행자 우선 횡단보도가 2개 있는데, 아무래도 신호가 있는 것은 아니니 아이가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어도 휙 지나가는 차들도 있고해서 이도 잘 보고 건너야 한다. 뒤에서 한 300미터 정도 떨어져 아이가 걸어가는데, 사실 애가 어떻게 건너는지 못보는 구간도 제법 있다. 애초에 내가 애가 건너는 걸 잘하는지 보고 감독하기 보다는,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뒤따라가면서 이를 볼 수 있다는 점, 아이도 내가 뒤에 있어서 든든함을 느낄 수 있고, 동시에 좀 더 자기의 보행환경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는 점 등 때문에 같이 거리를 두고 걸어가며 연습을 하고 있다.

집에서 보면 어느새 불쑥 큰 모습에 깜짝 놀래는 경우도 있고 하지만, 또 이렇게 뒤에서 아이가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큰 책가방에 비해 그닥 크지 않은 아이. 사람들 사이로 그렇게 작은 아이가 혼자 책가방을 짊어지고 걸어가는 모습 등을 보면 아직도 너무 작은 것 같고. 그러면서도 혼자 수행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는 아이가 대견하기도 하고, 앞으로 혼자 걸어나갈 연습을 하는 아이를 통해 나도 아이를 독립시킬 연습을 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약간 외롭기도 하고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내가 애를 위해 뭔가 해줘야 하는 기간이 정말 짧게 남은 것 같기도 하고, 보다 열심히 놀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더 크면 엄마아빠랑 보내는 시간보다 친구와 보내는 시간이 더욱더 중요해질텐데 말이다.

시누의 50살 생일파티

시누이 마흔살 생일파티에 초대받았던 게 엊그제 같았는데, 이번엔 쉰살 생일파티에 다녀왔다. 호텔에서 뻑적지근한 파티를 했는데,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듬뿍 받고 사랑을 받는 모습을 받는게 정말 좋아보였다. 사람들이 정성스레 준비한 스피치, 시누이에 맞춰 개사한 노래를 준비한 친구들, 친구들이 준비한 공연 등은 그들이 갖고 온 선물보다도 훨씬 감동적이었을 것이다. 시누네는 파티여는 것을 좋아하고, 멋진 파티를 기획할 줄 알고, 진정 파티를 즐긴다.

시누네와 우리는 성향이 여러모로 다른데, 옌스나 나는 큰 파티 이런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가서 적당히 즐겁게 시간을 잘 보낼 수는 있지만, 가기 전 약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오자고 마음을 다잡고 가야하고, 마음 편하게 붙들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 필요하다. 다행히 파트너를 찢어놓는 자리배치를 하지 않은 덕에 처음부터 끝까지 옌스와 함께 있을 수 있었다. 내가 아이를 맡기기 어렵다는 것을 핑계로 집에 남으면 어떻겠냐 했더니, 옌스도 나같은 성향인지라 가급적이면 나랑 가고 싶다고 하더라. 누가 말을 걸면 대화를 하는 게 어렵지 않지만, 직접 가서 먼저 말을 걸고 싶진 않다. 늦게 가면 내가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해야하니, 가급적 일찍 가서 남들이 인사를 오게 하려고 하고 피곤한 면들이 없잖아 있다. 그러니 우리 생일에 우리가 파티를 하고 싶지 않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냥 친구 몇이랑 밥먹고 이야기하면 그게 제일 좋다.

남들 댄스파티 시작할 때 우리는 집에 간다고 인사하고 돌아왔다. 집에 오니 열두시가 약간 넘은 시간. 와인 두잔. 취기가 느껴지지 않는 적절한 수준. 옆에 앉은 사람과 즐겁게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다행히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왔으며, 덕분에 기가 확 빨려 진이 다 빠진 일도 없었다. 다음달에 시누네 막네의 견진성사 때 파티 한번 하면 오랫동안 이런 파티는 없을텐데, 나도 파티에 쓸 수 있는 에너지는 이미 다 써버린 것 같다.

어른들만 초대받은 파티라 하나는 친구네 집에 가서 처음으로 밤을 보내고 돌아왔다. 이제 애가 많이 커서 밤에 깨지도 않거니와, 깨도 다시 혼자서 조용히 잠에 들 수 있는 나이라 마음 편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중간에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은 있었는데,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아이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지만, 자기도 파티에 갔었으면 좋았겠다고 한다. 워낙 늦은 시간이라 하나를 데리고 갈 수 없기도 했거니와 아이에게 지루했을 시간이라고 했지만, 자기는 지루해도 좋으니 엄마랑 같이 있고 싶다고 한다. 아이고… 이렇게 귀한 녀석.

덴마크 사람들 / 수다쟁이 츤데레

그린랜드 사람들이 덴마크로 넘어와 살게되면 받게되는 오해가 말수가 적다는 거란다. 그린랜드 래퍼가 그린란드의 문화를 자랑스러워하는 그런 노래를 발표했다며 라디오에서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한 말이다. (스톡홀름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처럼 그린랜드사람들은 덴마크 문화가 우월하다고 느끼며 그린랜드의 뿌리를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싫어하거나 하는 복잡한 심경을 갖는 사람들이 많기에 그린랜드의 문화를 자랑스러워하는 노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덴마크 사람들은 대화에 참여하는 대상이 말을 완전히 끝낸게 아닌데, 마침표와 다음 문장 사이에 빠르게 치고들어와서 말을 하는데, 상대의 말이 다 끝낼때까지 기다리는게 미덕인 그린랜드 사람들은 자신 이야기를 할 차례를 기다리다 주제가 바뀌어서 대화에서 조용하게 있는 경우가 많아 생긴 오해란다.

그러고 보면 그게 정말 맞다. 길에서 만나는 덴마크인들 참 시크한 것 같고 별로 말 많이 안할 것 같은데, 가까워지면 어찌나 수다스럽고 말하는 걸 그렇게 좋아하는지. 정말 별의별 주제로 대화를 다 한다. 그리고 대화에 낄려면 중간에 잘 치고 들어가야한다. 덴마크사람들 전반적으로 말이 빨라서 직장생활 초반 그게 참 힘들었다. 주제를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중간에 잘 치고 빠르게 비집어 들어가려면 내가 할말에 대한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걸 포기하고 듣는데에 집중하거나 아예 그냥 혼자만의 버블속에서 공상을 하기도 했더랬다. 물론 중간에 나를 참여시키기 위한 질문이라도 던져지면, 나는 맥락을 다 잘라먹고 있었기에 “뭐라고? 나 앞에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못들었는데?”라고 대답을 해야했다.

물론 개인차는 있다. 그중 유독 대화를 지배하며 너무 말이 많은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조용한 사람도 있다. 조용한 경우는 순발력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중간에 치고들어오는게 부담스러운 사람들.

아이가 있는 사람들은 주중에 대부분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다. 일 끝나고 회식같은 거 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친구와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고. 한국회사생활처럼 끝나고 한잔, 이런건 안하고, 팀빌딩 일년에 몇번 할 때 식사하며 술 한두잔 곁들이는 것이나, 프라이데이바 (금요일에 회사 끝나는 시간 쯤 회사 안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 에서 잠깐 시간 보내는게 대부분이다. 그래도 회사내 사회생활이 부족하지 않은 것은 짧은 점심시간, 탕비실에서의 커피챗 등으로 정말 많은 대화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일상, 가족, 취미, 집에서 진행중인 프로젝트, 관심사, 정치 등 정말 다양하다. (덴마크 사회의 정치적 스펙트럼은 우리나라처럼 양극단의 폭이 넓지 않기도 하고, 아무래도 academic한 사람들을 채용하는 중앙정부기관 사람들의 정치적 스펙트럼은 그중에서도 그닥 넓게 퍼져있지 않아서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는게 그닥 위험하지 않다.) 서로 배우자, 아이들, 반려동물 이름도 다 알고, 집에서 뭐하는지 등등 서로 잘 알고 지낸다. 정말이지 숟가락, 젓가락 개수마저 다 안다고 할 것 같다.

한국에서 살 때는 덴마크인들의 이런 직장사회생활 문화를 상상할 수 없었는데. 아니, 덴마크 직장생활을 하기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는데, 정말 다르다. 직장 동료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누가 이야기했던가? 정말 긴 시간을 함께 보내며 서로를 속속들이 알게 되고, 업무 시간 이외에도 보고 연락하게 되면 그게 친구지. 시간이 걸리는 것 뿐이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 오히려 더 인정이 느껴지는 덴마크 생활 덕에 이방인으로서의 삶도 그닥 팍팍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 같다.

덴마크 직장 점심식사

내가 있었던 곳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전체 공공부문에 해당되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중앙정부는 점심시간 30분이 근로시간에 포함된다. 구내식당은 회사의 지원이 어느정도 있어서 1인당 대충 6천원 언저리를 내면 나머지는 회사가 부담하는 형식이고, 집에서 도시락을 싸오는 사람도 꽤 된다. 여기서 도시락이라 함은 꼭 다 완성된 음식을 싸오는 것 뿐 아니라 오이, 당근, 토마토, 햄, 치즈, 아보카도, 후무스, 버터 등을 회사 냉장고에 두고 자리에 둔 호밀빵을 가져다가 필요한 것을 얹어 먹는 식의 것도 포함한다.

우선 점심시간이 30분에 불과하기도 하고, 이 시간이 근로시간에 포함되기도 하니 대부분 구내식당에 내려가서 같이 먹는게 일상이다. 별의 별 이야기를 다 나누는데 각자 일상에 대해 아주 잘 알게 된다. 배우자와 파트너 이름과 직업, 아이들 이름, 나이, 취미는 뭐고, 주말엔 뭐 했고, 뭐 할 거고, 휴가엔 뭐할 건지 등등 서로 시시콜콜 다 안다. 한국같았으면 ‘어떻게 이런걸 물어보지?’ 싶은 것을 물어보기도 하고, too much information이라고 할법한 것도 이야기해준다. 아마 이런 시간이 “회식”이라는 것 없이도 직장생활의 단합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전직장에서는 간혹 이 점심시간이 부담스러웠다. 정말 밑도 끝도 없이 다양하게 다뤄지는 주제들이 난무하는 점심시간은 당시 큰 구내식당의 엄청 울리는 어쿠스틱과 함께 덴마크어 리스닝 시험과 같은 스트레스를 줬기 때문이다. 내 왼쪽을 바라보고 이야기하던 왼쪽 사람이 갑자기 오른쪽에 앉은 나를 보며, 나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기라도 하면, “음… 나 소리가 잘 안들려서 뭔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네?”라고 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왼쪽 오른쪽, 맞은편 사람들 사이에서 여러 공을 튀기듯이 무질서한 탁구같은 대화를 하는 상황에 나는 뭐를 받아쳐야할 지 몰랐다.

일이 바쁘던 때면 간혹 점심을 책상에 갖고 와서 식사하던 센터장을 보면서 나도 간간히 그랬고, 그게 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두번은 그렇게 식사를 갖고 와서 책상에서 먹곤 했다. 그당시에만 해도 뭘 물어봐도 되는지, 뭘 물어보면 안되는지를 몰랐기 떄문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뭘 물어보면 안될지 생각하지 말고 그냥 다 물어보면 되는 거였다는 생각이다. 서로에 대해 시시콜콜이 다 알고 있는 그들에게 그게 사석에서 친해서 그런건지, 아닌지 모르겠어서 나는 안물어봤는데 그게 지금 생각해보면 아니었던 거다. 간혹 내가 생각하기에 안물어보는게 맞을 것을 물어보는 그들을 보며 취조당하는 기분도 가졌는데, 같은 질문을 지금 들었으면 아마 그런 생각 안하고 흔쾌히 다 답을 해줬을 것 같다.

즐거운 점심 식사/수다시간. 특별히 회의가 겹치거나 하지 않는다면 함께할 것을 기대받는 시간이기도 하다. 처음 경험하는 이들에게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시간이지만, 익숙해진다면 사실 동료들과 정말 가까워질 수 있는 좋은 시간이다.

반덴마크인

덴마크 생활이 십년을 넘어섰는데, 어느날 곰곰히 생각해보니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생활한 나라, 한국/인도/덴마크 중 덴마크 생활 기간이 가장 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부하느라 정신없었던 유년시절과 학부시절에는 사회에 대한 큰 관심이 없던 시기였기에 그 이후 진정한 의미의 성인기의 가장 큰 부분을 덴마크에서 보낸 것이다.

학창시절에는 큰 일탈 없이 청소년기를 보내느라 소위 말하는 질풍노도의 시기로 불리게 만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을 새가 없었다. 그리고 부모님과 나를 분리해 독립된 성인으로 성장하는 시기를 만으로 서른이 넘는 시기에, 그것도 인도에서 경험했다. 집에 정해진 시간에 돌아오는 것, 외박하지 않는 것 등 처럼 부모님이 하지 말라고 하지만 전혀 위법할 것이 없는 것들 같은 거 말이다. 엄마는 처음 겪는 딸의 반항에 꽤 충격을 받으셨고, 그때서야 처음으로 나를 독립된 개체로 인정하는 첫발을 내딛으신 것 같다. 경제적인 것부터 여러가지 면에서 부모님과 분리를 이뤄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한국으로 돌아가 2년반을 지내고 덴마크로 나와 그대로 눌러앉아버렸다.

나는 다소 관찰자와 같은 시선을 유지할 수 밖에 없다. 내 모든 판단의 준거는 유년기를 통해 내안에 깊숙히 심어넣은 한국문화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덴마크의 가치관과 문화가 그 위에 덮어쓰여지며 어느게 아주 오래된 가치관인지 아니면 새로 덧씌운 가치관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졌다. 관찰하고 그 관찰한 결과를 주변인과 나누고, 그에 대해서 그들의 설명을 듣거나, 내 관찰을 근간으로 해서 벌어진 토론을 보며 새로운 인풋을 얻고 추가적으로 관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회사에 근무한다는 것은 대충 우리가 동질적인 집단에 속한 사람이니 일종의 편향된 문화적 인풋을 얻게 된다는 뜻이기도 할텐데, 그 안의 세분화된 다양성 속에서 나름의 다양함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경험속에서 관찰자의 시선은 서서히 참여자의 시선으로 바뀌어가는데, 이러한 동화과정이 매우 은밀히 일어나기에 나또한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 후 문득 내 가치관이 더이상 한국인의 평균의 가치관에서 많이 멀어져있음을 느끼데 된다.

현지어를 잘 하는 것은 이런 동화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언어가 매게가 되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이지만, 언어야말로 이 문화의 가장 중요한 매개이자 문화와 문화의 역사가 담겨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언어를 통해 외부인의 시각으로 번역되지 않은 현지의 날것을 직접 흡수할 수 있고, 그렇게 흡수할 수 있는 스펙트럼 자체가 워낙 넓어서 외국어의 안경과 스피커를 통해 보고 듣고 흡수할 수 있는 양이 다르다.

그래서 꼭 현지어를 잘 해야 하냐? 그런건 아니다. 현지어 안하고 영어만으로도 살 수 있는 나라이니까. 하지만 영어만으로는 내가 주체적으로 사회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기에 이방인으로서 살 수 밖에 없는데서 오는 단점이 존재한다. 오래 살면서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추측하고 넘어가는 것들이 사실과는 다른 경우도 많고, 그래서 오해도 하고, 답답도 하고, 불만도 쌓일 수 있다. 현지어를 잘 하게 되고 그걸 활용해 문화를 이해하고 그 사회에 동화된다는 것은 내가 더이상 나를 이방인으로 여기지 않게 된다는 것이고, 그건 나에게 편안한 마음을 가져다준다.

나는 내가 한국인이기에 남과는 다른 관점을 갖고 이 사회를 바라보고, 또 그래서 제공할 다른 가치가 있다는 점에서 그건 그거대로 장점을 인지하되, 내가 이방인이기에 움직임이 조심스럽거나 의도치 않게 오해를 한다거나 이런 게 없어졌고, 그게 좋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생기는 불만이 없어졌고, 그냥 어느 사회에나 있는 장단점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 덕에 볼 수 있는 방송이나 책이 늘어나는 점도 장점이고, 덴마크어가 늘면서 영어가 간접적으로 늘기도 한다. 영어와 덴마크어가 역사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많이 주고 받은 탓이다. 덕분에 뒤늦게 왜 어떤 표현이 특정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 어원을 알게 되면서 이해하게 되기도 하고.

하지만 일상을 현지어로 완전히 전환한다는데는 또 다른 이면이 있다. 내 아이에게 내 뿌리를 잘 설명해주기 어렵다는 것이다. 음식 문화 이외에 아이가 한국문화를 나에게서 크게 느낄 일이 없다. 아이가 두돌이 되기 전에 우리의 언어가 덴마크어로 서서히 교체가 이뤄졌으며 아이에게 한국어는 조금 알아듣는 외국어, 엄마의 말 정도로만 남게 되었다. 다행히 한글학교를 통해 요즘 한국어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배우고, 한국의 문화도 조금이나마 체험하기 시작했다. 덴마크인 선생님을 통해 이뤄지긴 하지만 이게 가능하다는 자체만으로도 감사하다.

아마 앞으로 십년정도 더 살고나면 반덴마크 사람이 다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쯤 되면 한국이 너무 많이 바뀌어서 가도 뭔가 낯설어 집에 가는 것 같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시민권 취득에 대한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는 한국의 가족을 넘어서서 그게 나를 한국과 이어주는 끈처럼 느껴지는 것 때문인 것 같다. 시민권이 없어도 덴마크를 내나라나 다름없이 느끼고 있는 지금, 굳이 시민권으로 나를 묶지 않을 필요는 없다고 느끼기도 하고. 그때쯤에 나는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문득 궁금해진다.

집 관리하기: 무지의 두려움과 싸우기

늦은 봄부터 초여름인 지금까지 가뭄이 지속되고 있다. 가뭄의 무서움을 알지만서도 특히나 춥고 비가 많이 오던 봄을 지나고 맞은 햇살 좋은 기간이라 개인적으로는 좋기도 하다.

해가 쨍쨍하게 좋은 기간이 오기 전에 할 일이 있다. 바로 테라스에 기름칠하기. 해가 쨍쨍하기 전에 해야하고, 비가 오지 않는 기간에 해야하기에 대충 부활절 기간이 기름칠하기가 제일 좋은 때인데, 이때 한국에 다녀온지라 돌아와서 해야했다. 최적의 날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하긴 했다. 이제 벌써 세번째 하는 거라서 일이 얼마나 걸리는지, 어떻게 해야하는지 손에 익었다. 오랫동안 관리안한 테라스를 관리하는 건 힘들지만, 관리가 잘 된 테라스를 관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것을 이번의 작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아파트에서 한번, 새로 이사와서 한번 기름칠 할 때 고생을 많이 했는데, 작년에 힘들게 하고 나니까 올해는 훨씬 빠르게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집을 소유한다는 것은, 특히나 지어진지 오래된 집을 소유한다는 것은 살면서 여기저기 손질할 곳이 생긴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지붕도 갈아야겠지만, 이처럼 크고 보험을 들기위해 자격증을 소유한 사람을 고용해서 해야하는 것은 빼고 나머지는 직접 할만한 일들이 많다. 한국같으면 무조건 남에게 맡겼을 일이겠지만, 인건비가 특히나 비싼 이곳에서는 할 수 있는 건 자기가 하는 경우가 많다. 덴마크와서 처음 해본 것 중 하나는 미장일이다. 정원에 두줄짜리 낮은 블록이 우리집 테라스와 공유지 사이 공간을 나누고 이 공유지가 장미과 나무로 된 담장으로 시작된다. 뿌리들의 부피가 커져서 블록을 테라스쪽으로 밀면서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이 블록들 사이를 채우던 모르타르가 이 힘을 못견뎌 블록들이 더이상 같이 붙어있지 않고 따로 떨어져 있게 되었다. 아이가 밟고 돌이 굴러 넘어질 수도 있고 해서 이를 고쳐야했는데, 그게 내 첫 미장 작업이었다.

미리 배합된 모르타르를 사서 작업 했는데, 빠르게 마르는 모르타르를 산 것이 흠이었다. 나의 낮은 작업속도를 생각하면 그렇게 빨리 마르는 것을 사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물을 얼마나 배합하면 되는지 써있긴 했는데, 이게 대략 얼마다 이렇게 나와있고, 작업하는 표면이 너무 젖어도, 말라도 안된다는데, 그게 얼마인지도 잘 모르겠고. 결국 시행착오끝에 잘 하긴 했는데, 대충 어떻게 해야한다는 느낌을 알듯말듯한 정도의 경험을 쌓았다. 그 다음 작업은 우리 카포트 기둥을 바치는 밑돌이 금이가 있었다. 호미로 막을 것 가래로 막아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얼른 작업을 했는데, 금속과 블록을 결합하는 수리에 필요한 것을 모르타르를 사다가 작업했다. 거푸집을 만들고 했어야 하는 작업이었던 것 같다. 결국 거푸집 없이 원하는 결과를 내긴 했지만 이상적이지는 않은 작업과정이었다.

이번에는 나무로 된 외벽과 벽돌벽 사이의 매지를 교체하는 작업. 오래된 매지를 제거하는 것도, 이를 채우는 작업 모두 큰 작업이었다. 채우는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절반정도 끝나서 이 일에 필요한 경험치를 많이 쌓을 수 있었다. 종류가 다른 자재 사이에서 이를 묶어주는 재료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이 매지가 다른 것보다 빨리 수선을 요하게 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 일은 제거하는 작업도 그렇고, 채우는 작업까지 모두 생각만으로도 스트레스 받는 작업이었다. 물론 일도 힘들지만 머릿속으로 아직 발생하지도 않은 실패 가능성을 생각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았다. 수직으로 매지를 채우는 작업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처음엔 중간에 포기하고 전문가를 불러야하나 생각을 하기도 했는게, 잘 붙지도 않고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모르타르에 수분 함량이 조금 너무 많았고, 작업을 아래부터 해 올라가야 했는데, 위에서부터 해서 내려오려고 했던 점이 초기 난관의 원인이었다. 옌스에게 아무래도 전문가를 불러야할 것 같고, 벽돌 사이 몇군데 매지를 수선해야 하는데, 그것이나 하겠다고 말했다. 이 작은 수리작업을 통해 세로 매지 작업에 대한 이해를 조금이나마 할 수 있었고, 포기하기 전에 한번 다시 해보자 하고 한 게 성공이었다. 작업을 통해 깨끗이 작업하는 방법을 조금씩 배우리 시작했고, 모르타르가 그렇게 위험한 자재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혹여나 어디 튀고 떨어지면 물로 닦아낼 수도 있고 또 염산을 이용해서 닦아낼 수도 있다. 애초에 어디에 튀지 않게 하고 깨끗하게 작업을 할 수는 없고, 정리해가며 작업을 할 수 있었다. 뭔가에 대해 잘 모를때면, 이 무지가 초래할 결과도 잘 모르니, 그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 대상 자체가 무서워지곤 한다. 모르타르가 무서운 건 그래서였다. 흙도 잘 모를 땐 무서워했는데,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흙에 대해 덜 무서워하게 된 것처럼 모르타르도 비슷하게 되었다.

우선 자세히 연구를 하자.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면 시작하자. 잘 안되면 어때. 다시 하지뭐. 안되면 그땐 전문가를 부르자. 무서움은 무지에서 시작된다. 알면 덜 무서워진다.

집은 내가 가꿀 수록 구석구석 더 좋아지는 모양이다. 매지를 바꿨더니 바꾼 매지마저 좋아하게 되니 말이다. 사실 작업이 꽤나 힘들었는데, 내가 아주 나이들어 이런 걸 못하게 되는 때가 아니라면 이렇게 조금씩 배워가는 스킬로 집을 가꿔가면서 더 손떼 묻은 사랑이 넘치는 공간으로 만들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