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 추억팔이

응답하라 1988을 보고나니 그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 추억의 중심엔 올림픽이 서있는데, 온가족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텔레비전을 시청하며 마음을 졸이곤 했다. 올림픽 개막식 매스게임은 그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 이후 몇년동안 학교에서는 운동회마다 매스게임을 준비하곤 했는데 그게 얼마나 쿨하게 느껴졌던지. 지금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부채춤도 인기가 있었는데, 부채를 한손으로 펴는 방법을 배운 다음엔 여름마다 부채를 부칠 땐 그 기술을 열심히 활용하곤 했다.

아쉽게 은메달을 따는데 그쳤던 전병관 선수의 역도경기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지. 작기 때문에 그의 경기가 더욱 극적으로 느껴졌던지 지금은 관심도 없는 역도 종목이 마치 가장 재미있는 경기인 것 같았다.

탁구에 유남규, 현정화 선수, 양궁에 김수녕 선수 또한 기억에 남는다. 원래도 땀이 잘 나는 손이지만 경기를 보는 순간만큼은 유독 땀이 많이 흐르는 손을 꼭 쥐고 온가족이 함께 응원을 했다.

오랫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올림픽 개막식 노래 “손에 손잡고“가 생각나 그 당시 우리나라를 휩쓸었던 그 노래를 유튜브를 통해 다시 봤다. 지금도 느껴지는 그 마음의 설렘이라니. 오히려 지금 그 설렘이 유달리 크게 느껴지는 건, 그 전쟁같았던 폐허에서 일으킨 경제성장을 냉전시대중 가까스로 열린 올림픽을 통해 세계에 알렸을 때 그 성장의 주역, 우리 부모님 세대가 느꼈을 자랑스러움이 이제는 이해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나이가 들어가나보다. 이때만 해도 앞으로 항상 좋아지는 날만 있을 줄 알았는데. 한강의 기적이 백년천년 계속되지 않으리라는 걸 그 때는 몰랐지. 많은 어려운 요소들을 안고 있는 우리나라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짧은 시간 많은 것을 이뤄낸 것을 보면 참으로 자랑스럽다.

그저께 덴마크 공영방송 제1 채널에 프라임타임 뉴스의 마지막에 extended news의 형태로 한국 교육제도의 명암을 담은 내용이 방송되었다. 한국에 대해 요약설명을 하는 것으로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는데, 세계 15대 경제대국이라는 표현에서 옌스가 감탄을 표하더라. 우리나라가 나는 아니지만, 그 말에 쑥스럽지만 자랑스러움도 느껴지더라. 양극화를 비롯해 여러가지 내부적 갈등요소를 안고 있으며, 세태에 대한 탄식도 하게 하는 나라지만, 그 모든 것이 내 나라의 단면이 아니겠는가.

해외에 나와 살기에 더욱 나를 우리나라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 이곳에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이들에게 나는 한국에서 온 사람일 것이기에. 이런 저런 복잡한 모든 것을 포함해 나는 우리나라 사람인 것이 자랑스럽고, 내가 현재 갖고 있는 것을 누리게 해준 우리 부모님 세대에게 감사한다.

현재를 살기.

“덴마크인마저 여기 날씨를 싫어하던데, 넌 여기 날씨도 괜찮다면서 좋아하는게 참 신기해.”

대학원에서 알게 된 크로아티아 친구가 급작스레 찾아온 추위에 불평하며 말했다. 크로아티아에서는 맑은 날이 많고 흐리고 비가 오더라도 덴마크처럼 강풍을 동반하지 않아 여기처럼 우산을 써도 거센 빗방울이 얼굴을 때리는 일은 겪을 수 없으니, 그 곳에서 평생을 살다온 내가 여기 날씨을 좋아할 수 있겠느냐고. 일리가 있다. 델리의 날씨를 끔찍하게 싫어했던 바가 있기에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짧은 겨울이 지나고나면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오르기 시작해 4~5월이 되면 낮기온이 50도에 이르고, 습도가 높은 탓에 건물 밖으로 한발만 내딛으면 숨이 턱 막힌다. 에어콘으로 차갑게 유지된 공기속에 있다가 습하고 뜨거운 공기속으로 움직이면 갑자기 피부와 옷이 축축해지는 느낌과 함께 약간의 현기증마저 느껴진다. 2~3개월에 불과한 우기를 제외하고는 비는 오지 않아 땅은 항상 건조하다. 서쪽에서 간간히 오는 강풍은 그 건조한 흙을 훑으며 모래폭풍을 일으키는데, 열악한 건축마감 기술탓에 창문이 꼭 닫히지 않아 18층 아파트 실내까지 모래가 덮치곤 한다. 하루는 들판에서 내 차를 향해 불어오는 모래 바람이 보여 황급히 차창을 닫은 적이 있다. 창문을 다 닫자마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모래가 차를 덮쳤는데 순간의 안도감이 지나자마자 짜증이 나를 휘감는 기분이 들었다. 나무들은 더운 기후에도 생존할 수 있는 잎이 작은 활엽수가 주종을 차지하는데 그나마 있는 그 작은 잎사귀에 흙먼지가 뽀얗게 앉아 초록생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겨울 3개월을 제외하고는 밤낮에 상관없이 에어콘을 달고 살아야 했는데, 전기세가 비싼 건 차치하고서라도 적정온도를 찾기 어려워 밤에 잘 잘 수 없다는 것이 삶을 더 피곤하게 한다.

그곳을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기에 시간은 더디게 갔고 2년반이 10년의 세월만큼이나 길게 느껴졌다. 인도에 사는 외국인은 그를 사랑하거나 싫어하는 두 부류로 나뉜다는데, 나는 싫어하는 편에 속해있었고 여행은 몰라도 다시는 이곳에 살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다. 덴마크에서 평생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그녀 이상으로 인도에서 사는 것을 싫어했기에 말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것은 내 몫이었다. 내가 아무리 시간이 흐르기를 바란들 더 빨리 흘러갈 시간이 아니라면 그 순간을 잘 살든 못 살든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몫인데… 다시금 한국으로 돌아가기만을 바라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불쌍히 여기던 것은 아쉽다. 자주 여행도 다니고, 다양한 음식도 접하고, 언어를 배우고, 현지인과 교류하는 등 그 경험을 더 풍부하게 만들 수 있었는데…

머리로는 알지만 행하지못하는 것은 사실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현재를 살라, 갖고 있는 것을 감사하고 소중히 여기라, 어떤 감정을 느끼느냐는 것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지 타인에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 류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은 ‘나도 다 알아. 아느네 그렇게 하는 게 힘든 것을 어떡해?’ 였다. 같은 상황을 두고 누구는 웃고 넘어갈 수 있고 누구는 마음상할 수 있고, 누구는 화를 내고 누구는 용서할 수 있는 것처럼 결국 그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반응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이 결정하는 일이다.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내가 영향을 받을 때 부처나 예수가 아닌 이상 감정이 동하고 일희일비할 수 있지만 삶의 흐름이 외부에 빈번히 흔들리면 사는 것 자체가 피곤하고 힘들어진다.

우산장수와 부채장수를 아들로 둔 노모의 이야기처럼 매사를 걱정할지 아니면 기뻐할지를 선택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건 아무리 남이 이야기해준다 해서 바뀔 일이 아니고 동전의 양면과 같은 삶의 순간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을 때의 기쁨을 직접 느끼고나서 실천해가기 시작해야 바뀔 일이다.

해가 짧아지고 비가 자주오고 바람이 몰아치는 계절이 되면, 해가 나오는 그 짧은 순간이 아름다워져서 좋고, 짙은 회색구름 틈새로 살짝 비쳐 보이곤 하는 파란 구멍을 발견했을 때 반가워서 좋다. 저녁이면 깜깜해져서 일찍부터 초를 키고 그 아늑함을 즐길 수 있어서 좋고, 비가 올 때면 땅이 촉촉해져서 좋다. 바람이 거세게 불면 상쾌하고 신선한 공기가 도시의 오염물질을 불어내줘서 좋고, 하늘의 구름이 빠르게 움직이는 생동감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몸이 젖어 으슬으슬하면 집이나 실내에 들어와서 몸을 녹일때 느껴지는 부르르하는 감각과 함께 찾아오는 온기가 좋다. 파랗던 나뭇잎이 단풍으로 색을 갈아입으면 그게 아름다워서 좋고, 떨어질 땐 그 아름다움이 좋다. 낙엽이 지고 앙상해진 나무는 수종마다 다른 가지의 구조를 알게 되어 흥미롭고, 나무 끝에 월둥준비를 하며 준비해 둔 새순이 피어날 날을 기대할 수 있어서 좋다. 봄이 오면 어느새 연녹색 새순이 터지며 하루가 다르게 짙은 색깔로 빈 공간을 채워가는 것이 놀랍다.

변하는 것은 변화에서 오는 새로움을 찾을 수 있어서, 변하지 안는 것은 그 항상성 때문에 좋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반대로 생각할 수 있다. 주변환경의 동력을 내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내가 좋은 대로 하면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에 끊임없이 불평한다면 내 삶이 불행해지는 것은 그간의 경험으로 충분히 느꼈다.

그 일이 얼마나 작고 크냐에 따라 그 변화에 내가 어떻게 적응하느냐와 그에 걸리는 시간과 노력은 달라질 것이다. 앞으로도 그 노력은 계속될 것이고 이를 행함이 어려운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머리로만이 아니라 경험으로 알고 있기에 그 방향으로 나를 이끌어갈 수 있고, 그렇게 믿는다.

시험 성적이 나왔는데 평균보다는 잘 했지만 내가 원한만큼 결과가 따라주지 않았다. 많이 속상했다. 그렇지만 속상한 마음은 그 날 저녁에 느낀 다소간의 울적함으로 충분하다. 이미 나온 결과에 승복하고 다음 과목 공부에 집중하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렇게 해서 성적을 잘 내야지 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냥 지금 하는 공부가 나에게 가져올 도전과 그 결과물로 쌓일 지식을 받아들이며 공부하면 난 이 순간을 즐길 수 있다.

현재 삶의 순간에서 작은 것을 발견하고 경험하고 느끼는 것, 그리고 그 순간을 살아내는 일이 소중하고 행복함을 느낀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감사하다.

엄마, 아빠. 사랑합니다.

엘니뇨 현상으로 올 겨울은 온화한 계절이 예상된다고 한 것을 들은 지 오래지 않았는데 갑작스레 북풍한파가 닥쳤다. 거센 바람과 함께 눈폭풍이 들이치기 전에 부모님이 타신 비행기는 한국을 향해 떴다. 아슬아슬하게 한파를 피해가신 탓에 늦가을의 끝자락을 겨울이 오기 직전까지 함께하고서야 돌아가신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무서운 눈폭풍이 가라앉고 난 뒤 통상 찾아드는 고요함과 함께 밝은 햇살이 겨울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부모님의 빈자리가 갑자기 느껴진다. 계신 동안 학교 수업이 시작되며 바빠져 제대로 마지막 한 주를 보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지만, 일상은 계속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엄마가 떠나기직전 남기고 가신 편지 한 장이 내 마음을 크게 울린다. 이를 쓴 엄마의 마음이 한 글자, 한 글자 온전히 마음에 다가오기에 이를 읽을때마다 눈물이 난다. 내 진짜 독립은 지금 이 순간이 아닌가한다. 이미 독립했다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또 다른 가정을 꾸려가야 하는 이 순간을 맞이해 나를 떠나보내는 마음과 인생을 살아가다 지칠 때 나를 다시 추스를 수 있도록 하는 그 글에서 더이상 내가 부모님 품 안의 자식이 아님을 느낀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고 날기 싫은 마음마저 갑자기 들지만, 그간 무수히 연습만 해왔던 비행은 앞으로 떠날 긴 진짜 여정의 시작이 되었다.

이 편지는 깊고도 소중한 곳에 묻어둔다. 언젠가 타국의 삶이 힘들고 나를 지치게, 주저앉게 할 땐 이를 꺼내 마음의 위안을 얻으리라. 지금은 그 마음에 울며 읽지만, 지금 알 수 없는 미래의 힘든 그 순간엔 이 종이 한 장이 참으로 따뜻한 마음의 울림을 주리라. 그리고 난 다시금 용기와 힘을 내어 그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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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꿈의 크기만큼 큰다.

사람은 꿈의 크기만큼 큰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신 이야기다. 앞글자 하나만 꺼내도 무슨 말씀 하실지 알만큼 반복되었던 이야기들은 잔소리같이 들려서 자꾸 듣기 싫었는데, 거의 세뇌라고 해야하려는지, 그 말들은 마음속과 머릿속에 새겨져서 지워지지 않는다. 각인이 될만큼 자주 하신 말씀들은 나의 삶의 앞길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언젠가는 책 한권을 쓰라는 말씀 – 아직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내지는 못했지만, 인생의 숙제와 같은 마음의 짐이다. – 을 포함해 몇가지 인생의 화두라며 던져주신 단어들. 또 말씀하시냐며 핀잔을 드리곤 했지만, 그 말씀이 옳으면서도 행하기 어려운 말씀이었기에 회피하고 싶어서 그랬던 듯 싶다.

내 꿈은 아직도 그 형상을 주무르고 있는 미완의 형태이기에 그 꿈만큼 컸다 아니다를 말하기엔 어렵지만, 그 꿈이 자라온 방향으로 나도 큰 틀에서는 자라가고 있는 것을 바라보기에 아버지의 말씀이 옳았다는 것을 느낀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나라이긴 했지만 덴마크에 와서 결혼을 하고 정착의 터를 닦고 있는 나를 보며 그 말씀의 힘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난 어려서부터 해외에서 살고 싶었다. 퇴사 후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난 한국 출장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어려서 해외에서 자란 자기는 항상 해외에서 정체성 고민을 많이 했기에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이 어려서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놀랍다고 했는데, 난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누가 뭐가 옳다 그르다는 것을 말해주기 전부터, 난 남녀 양성 불평등에 대해 아주 어려서부터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회사에서 사회인야구 감독을 맡고 계셨는데, 거기에 연년생 오빠를 데리고 가시기로 했었다. 한국 나이로 네살 때 이야기니 두돌 지나서 정도였던 것 같다. 그 장면은 나와 부모님 모두에게 매우 강한 인상을 남겨서 모두가 잘 기억하고 있는데, 왜 오빠는 데려가고 나는 데려가지 않느냐며 거의 지랄을 하다시피 울고불고 난리를 쳤었다. 엄마가 나를 안고 계셔서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나는데, 부모님은 얘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난리를 치나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나는 항상 오빠를 포함해 남자라는 대상과 꾸준히 경쟁을 했다. 엄마 친구의 자녀가 주로 아들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소꿉놀이보다는 공차기를 하고 놀았던 것이 그 대상이 남자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남녀의 역할을 어려서부터 구분짓는 것에 알게 모르게 반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알아주는 왈가닥이었던 나는, 항상 인기있고 이쁜 여자 친구들과는 스스로 비교가 되기도 해서 어차피 그들과 경쟁이 되지 않을 것 그냥 나 하던대로 하자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여성스럽고 싶은 마음과 그렇기 싫은 마음이 묘하게 섞여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던 것 같기도 하고.

중학교때 아버지가 에리카 김 – 지금은 BBK 사건의 김경준씨 누나라는 사실로 더 알려져있다. – 이라는 사람이 쓴 “나는 언제나 한국인”이라는 책을 사들고 오셨다. 명일동에서 살던 그 시절, 서재에 배를 깔고 누워 하루만에 그 책을 다 읽었고, 뭔가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만 해도 여권 갖고 있는 것이 흔치 않은 일이었고, 환전하나 하려해도 여권 뒷면에 환전필이라는 도장과 환전 금액을 적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해외에 다녀온 사촌의 이야기나 친구들의 말이 안 통해 어렵기도 했던 이야기나, 힘들었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바다 건너서 저 먼 땅에서의 미지의 삶이 궁금했고, 소설책에 그려진 다른 나라의 삶을 나도 겪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오히려 더 동경하게 되었다.

여성의 성공기를 다룬 그 책에서 나는 나를 그녀의 모습에 투영하며 해외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게 되었다. 경제학, 경영학을 공부해서 미국으로 유학가고, 거기에서 터를 잡겠다는 생각은 완전히 이뤄지지 않고 커가는 과정 중 방향을 달리 하게 되었지만, 조금은 늦은 지금 덴마크에 와서 유학을 하고 있으며, 터전을 일구게 된 것은 그 때의 씨앗이 싹을 튼 결과이렸다.

창밖을 내다보면 한국에서 보던 것과 다른 생경한 풍경에 간혹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어쩌다 여기에 와있게 되었나?

아무런 행동이 없는 꿈은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해외에 살고 싶은 마음에 해외에서 살 수 있는 직업을 모색하게 되어 이를 일차적으로 이루게 되었고, 이나라 저나라를 노마드처럼 떠도는 생활을 접고 정착하고 싶은 마음 속에 나의 인연을 만나 그 땅에 정착하게 되었다. 직업도 그 당시의 내 고민을 푸는 방식으로 이동하다보니 내가 원하는 일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고 원하는 방향을 찾아 공부하며 옳은 길을 택했다는 생각과 함께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다.

이윤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돈 놓고 돈 먹는 은행에서 일하며 금융권은 내가 일할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뭔가 공익적인 가치를 위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과 유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속에, 유학은 아니더라도 해외에서 살면서 공공의 목적을 위해 일하는 공기업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는 타인의 사업의 가교 역할을 하는 주변인의 역할은 부족하고, 내가 열심히 일해봐야 누군가 돈을 더 버는 일은 내 가슴을 뛰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KOTRA에서 일을 하며 신재생에너지, 환경산업에 대해 자주 관여를 하게 되었는데, 막연하게나마 ‘저런 일을 하면, 일 자체가 사회에 작든 크든 근본적으로 기여한다는 생각이 들어 보람이 들텐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너리즘과 직장내 인간관계 갈등 등으로 직장 생활에 본원적 갈등이 커지고 있던 즈음, 왜 내 마음을 뛰게 하는 일을 하지 않는가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 당시 남자친구에게 이런 생각에 대한 조언을 구하니, 나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고 했다.

어떤 일에 대한 중대한 결단이 필요할 때, 쉽게 용단을 내리는 결단력은 어머니의 성품을 닮았다. 여러가지 중대한 순간, 마음을 굳게 먹고 결정을 내리고 일을 추진하시던 어머니를 보면서 이를 나도 모르게 배웠거나, 그 피가 내 몸안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리라.

중요한 것은 내가 꿈을 꾸는 만큼 내가 자랄 수 있다는 것이다. 원대한 꿈을 꾸지 않는 나이기에 그만큼 자라고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절대 늦은 순간은 없다는 것, 내 마음을 뛰게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걸 위해 뭐라도 한다면, 설령 거기에 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은 짧다면 짧은 내 인생 35년의 경험을 통해 얻은 가르침이다.

다시 커리어를 쌓아가야 하는 나이지만, 돌아서 왔다는 생각은 지금도 없다. 정해진 길이 없는 넓은 땅에서 내 앞길 구불구불하게 닦아가며 즐거우면 즐거운대로, 힘들면 힘드는대로 걸어가는 것이다. 나처럼 늦은 나이에도 새로운 길 개척해나가는 모든 영혼에게 화이팅을 외치고 싶다.

현지에서 배우는 언어의 학습곡선

언어는 그 말을 모국어로 하는 나라에 살면서 배우는 게 빠르다는게 맞다는 걸 거의 매일 실감하고 있다. 아직 그린카드비자로 변경이 완료되지 않아 수업료 내면서 비싼 수업을 듣고 있긴 하지만, 학원을 최근 바꾸고 모듈도 3으로 올라가면서 빠르게 늘고 있음을 느낀다. (사족. 요즘 그린카드 발급에 6개월 이상이 걸린단다.)

언어 배우는 것을 취미로 여겨온 터라 언어의 학습곡선은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그간 몸소 느껴오긴 했지만, 이번처럼 해당 국가에 직접 살면서 배워본 것은 처음인지라, 이를 보다 명확하고 빠르게 확인하게 되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초반에는 주변 모든 것에 흥미를 느껴 금방 이것 저것 조금씩 말하는 것이 가능해, 그 전에 하나도 말을 못하던 것에 비하면 빠르게 느는 것 같아서 흥분된다. 길에 보이는 싸인 하나하나도 새롭게 보이고, 그것을 이해하는 나를 보면서 흥분하게 된다. 그 신기함에도 익숙해지고 나서 그런 느낌이 사그라들고 나면 내 실력의 현주소를 다시금 무겁게 확인하게 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 모국어로 표현해내는 풍성한 내용인데, 나는 아주 어린 아이와 같은 수준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별로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크게 느끼고, 누군가에게 이 언어로 대화를 시도를 하기에 스스로도 답답하다보니 할 수 있는 언어로 전환하고 싶어진다. 공부를 열심히 해도 크게 안느는 것 같은 시기가 온다.

지리멸렬하게 반복되는 현지생활에서 단순하게 쓰는 말들이 익숙해진다. 물건을 사거나, 음식을 주문하거나 등 자주 반복되는 말은 크게 생각하지 않고도 말 할 수 있게 된다. 내 말을 알아듣기만 해도, 그리고 그 대답을 대충 짐작하고 답변하는 것으로 감동받던 시기는 어느새 과거가 된다. 막상 이런 단순한 대화는 늘었는데, 조금만 주제가 복잡해져도 대화가 삐그덕거릴 때 다시금 이 말은 언제 느는 것인가 하면서 스스로를 다그치게 된다. 내 말의 속도와 발음이 개선되면서 상대도 평상시처럼 대화를 하면, 다시금 대화가 어렵다고 느낀다. 그리고 방송과 전화 등 비대면 언어는 알아듣기 매우 힘들다. 분절되지 않은 소리의 덩어리가 뭉게져 스쳐지나간다. 웅얼거리는 것만 같은 소리. 또는 뭔가 들리는 것 같지만 그 소리를 머리에서 처리하기에 실제 소리가 전달되는 속도와 내 머리에서 언어로 재구성하는 속도사이에 격차가 너무 크다. 새로운 소리가 계속 흘러들어오는 탓에 새로운 말을 듣지 못하거나, 내용의 해독을 할 수가 없다. 매일 듣는 지하철 방송도 무슨 이야기인지 남에게 물어봐서 다 알고는 있지만, 그 소리가 나에겐 완벽하게 들리지 않는다. 매일 듣는 방송도 아직도 안들리다니, 하면서 도대체 언제 느는지 싶고 지친다.

어느날 소리가 들리는 것을 느낀다. 뭉게져 들리던 소리뭉치가 깨끗한 음절로 분화되어 들리고, 라디오 방송도 들리기 시작한다. 집에 오던 광고 전화에 덴마크어 못한다고 초장부터 이야기하던 내가, 덴마크어로 대화를 끝마친다. 주로 왜 걸었는지 설명 듣고, 옌스가 집에 없고, 언제 올 것인지, 또는 내가 답해줘도 되는 전화이면 그 답을 해주는 정도에 그치지만, 장족의 발전이다.

귀가 뚤린다는 것은 어휘의 증가와 현지인이 말하는 말투에 익숙해지는 것, 내가 기존에 하던 말을 번역하지 않고 그나라 말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 다 결합되어 생기는 일인 것 같다. 언젠가부터 귀가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다. 방송에 나오는 말들이 무슨 말인지는 모르더라도 소리가 정확히 들리기 시작한다. 이제 덴마크어 배운지 9개월 거의 가 되어가고 있으니, 대충 만 8개월차부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나니 ARS 음성 안내가 더이상 스트레스가 되지 않고, 집에 간혹 전화가 오면 대화를 할 수 있다. 1년 정도면 귀가 뚤린다고 하던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겠다.

영어 공부의 경험을 토대로, 모르는 단어를 맥락으로 파악하고 넘기는 노하우와, 꼭 이해해야 하는 동사를 파악해서 사전을 찾는 노하우가 쌓인 덕에 신문도 이제는 대충 내가 아는 주제의 기사라면 집중해서 읽어낼 수 있다.

옌스와 덴마크어 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고, 한시간 대화는 큰 스트레스도 없다. 매일 무슨 일을 했는지, 수업에 무슨 공부를 했는지 설명을 하다보니 반복 학습도 되서 좋다. 덴마크어는 발음만이 아니라 영어와 조금 다른 문장상의 강세 표현이 중요한데, 옌스와 최근 들어 시작한 읽기 연습이 강세표현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게 말을 알아듣는데도 큰 도움을 주는 것 같다.

대학원 졸업하기까지 약 3년의 시간 동안 덴마크어가 지금과 같은 속도로만 늘어준다면, 앞으로 이곳에서의 삶이 참 좋을 것 같다. 주변에서 남친이나 남편이 자기의 덴마크어를 인내해주지 않아서 언어가 늘지 않는다고 푸념하는 사람이 많은데, 연습만이 숙달의 지름길이라면서 채찍질을 해주는 옌스에게 감사의 말을 (본인은 이 글 이해 못하지만…) 하고 싶다. 그리고 빨리 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나에게, 그러다가 또 잘 안되는 날이 오기도 하고, 그게 또 당연하다고 이야기해주는 게 참 고맙다.

물론 덴마크어가 영어와 많은 유사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속도의 발전이 가능하긴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곳에서 살지 않았다면 절대 경험할 수 없었던 학습곡선이다. 이곳에서, 한국에서 산 이상의 시간을 살게 되면 언젠가 영어보다 덴마크어가 편해지는 날도 있겠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제논의 역설이 성립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이것은 농담.)

덴마크 여왕 생일과 군대

덴마크 여왕의 75번째 생일

어제는 한국에서는 세월호 1주년 추모일이었지만, 덴마크에서는 덴마크 여왕의 75번째 생일이었다. 어느 하루가 누구에게는 애도할 날이되고 누구에게는 경축할 날이 된다는게 인생의 아이러니인 것 같다. 기억할 것은 기억하고, 애도할 것은 애도하되, 살아야 하는 것이 사람이니… 이러한 가슴아픈 날이 다시금 없었으면 좋겠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같은 대형 사건 이후 이런 일은 설마 또 없겠지 했는데…

덴마크에서 생일은 어떤 의미일까?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다는 컨셉은 없는 것 같다. 그냥 탄생 경축! 이런 의미인 듯 하다. 우리도 요즘은 거의 그렇게 바뀌었지만, 최소한 어렸을 때 학교에서 배우기에는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라는 내용이 꼭 들어있었고, 지금도 그러할 것이라 믿는다. 일반적으로는 Rounded Birthday라고 10년 단위의 순 개념을 크게 기념하고, 그 외에는 가볍게 가족끼리 식사하고 선물 주는 식으로 챙긴다. (역시나 애들은 제외… 항상 뻑적지근하게 하며, 우리와 달리 친구들만 초대하는 생일파티와 부모의 친구와 가족, 소수의 애들 친구를 초대한 생일파티 두번 정도 한다.) 그러나 여왕은 또 예외이다. 특히나 5년 단위로 조금 더 뻑적지근하게 하는 것 같다.

여왕 퍼레이드의 시작 (Photo credit: Peter Brodersen)

여왕 퍼레이드의 시작
(Photo credit: Peter Brodersen)

여왕 퍼레이드의 선봉, 왕실근위대 (Photo credit: Peter Brodersen)

여왕 퍼레이드의 선봉, 왕실근위대
(Photo credit: Peter Brodersen)

여왕 퍼레이드와 여왕(에메랄드색) (Photo credit: Peter Brodersen)

여왕 퍼레이드와 여왕(에메랄드색)
(Photo credit: Peter Brodersen)

여왕 퍼레이드이 잔재(말똥) 청소 (Photo credit: Peter Brodersen)

여왕 퍼레이드이 잔재(말똥) 청소차량
(Photo credit: Peter Brodersen)

어제 덴마크어 수업 말미에 덴마크어 선생님 Jørgen(요언)이 칠판에 이렇게 적었다.

“D. 9. april 1940 blev Danmark besat af tyskerne. D. 16. april 1940 blev princesse Margrette født. Hun bliver i dag 75 år og vi holder meget af hende!” (1940년 4월 9일, 덴마크는 독일에게 점령당했다. 1940년 4월 16일, 마르그레테 공주가 태어났다. 오늘 그녀는 75세가 되고, 우리는 그녀를 매우 좋아하고 아낀다!)

덴마크인의 인식속에 깊게 자리잡고 있는 평등주의를 생각하면, 왕실을 유지하는 자체와 여왕의 생일이라고 사람들이 국기(Dannebrog)를 걸고, 들고 흔들며 여왕에게 환호하는 모습 등이 잘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 덴마크에 사는 외국인들이 참 아이러니 하다고 하는 부분인데, Jørgen은 바로 이것을 설명한 것이다. 1940년 덴마크가 독일에게 점령당했을 때, 바로 몇일 이후 있었던 공주탄생은 우울한 덴마크인에게 기쁨을 가져다준 존재였으며, 지금과 왕실이 보다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었을 때 이러한 공주탄생은 행운의 상징같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장수하는 것에 대해 덴마크인은 기뻐하고, 75세가 된 것을 경축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Jørgen은 자기가 여왕을 지키던 사람이기 때문에, 더 특별한 의미를 갖는 날이라고 덧붙였다. 자기는 군대에 자원입대했다고. 그래서 네가 물었다. 뽑기에서 낮은 숫자를 뽑았냐고. 그랬더니 맞단다. 그래도 자기는 왕실근위대에 지원했다고 덧붙이면서.

덴마크 군대

덴마크 군대는 징집이 원칙이다. 만 18세가 된 덴마크의 모든 남성은 우선 징집 대상이다. 2014년 10월에 발간된 덴마크 징집위원회의 통계집에 따르면, 2014년 상반기에는 대상자 18,216명 중 48.05%가 적합대상자이며, 2015년 1월 발표된 덴마크 국방부 인사위원회의 통계에 따르면 2014년 총 4,159명이 징집되었다. 이중 자원입대율이 2014년에 97%에 달한다는 충격적 사실! 또한 전체 복무자 중 여자가 매년 다르지만 10~20% 정도의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이 눈을 끈다.

정부 민원서비스에서 소개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만 18세가 된 덴마크 남성은 국방의 날 행사에 소집을 명하는 편지를 받게된다. 이 날은 국방부와 국가재난재해 관리위원회와 교육 및 직무 기회에 대해 소개하고, 징집대상자의 복무적합도를 측정하는 날이다. 이는 덴마크 거주중인 모든 덴마크남성을 대상으로 시행된다. 여성의 경우에도 만 18세가 되면 국방의 날 행사에 참석할 수 있으며, 자원 입대 희망시 복무적합도 측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안내하는 편지를 받게된다.

여기서 재미있는 징집 방식! 복무 적합이 판정된 징집대상자는 번호표를 뽑아야 한다. 번호는 1번부터 숫자가 나열이 되어 있고, 조커와 비슷한 자유숫자도 있다. 연간 징집인원수가 크게 변동하지 않기 떄문에, 4천~6천명 정도가 간다고 보면 된다. 낮은 숫자를 뽑을수록 징집확률이 높아진다. 1번은 무조건 가는 것이고, 8천번은 안가는 것이다. 그런데 4천~6천번에 해당하는 번호를 뽑은 사람은 내가 징집이 될지 아닐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운이 좋으면 안가는 것이고, 운이 나쁘면 가는 것이다. (역시나, 대부분의 덴마크인도 군대는 안가고 싶어한다. 하하하.)

여기서 자원입대가 생긴다. 물론 그냥 자원입대를 신청하는 사람들도 꽤나 된다. 여성 복무자 모두는 자원입대자이니. 그러나 여기에선 정말 군대가고 싶어해서 가는 사람 말고, 의도치 않게 자원입대하는 사람을 이야기 해보자. 내가 갈지 안갈지 모르는 상황이든, 갈 것을 아는 상황이든 자원을 하면 배치에 있어서 자대배치에 있어서 입대자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해준다고 한다. (물론 꼭 존중되는 것은 아니다.) 상황이 이렇니, 입대가 거의 확실하다 싶으면 그 해의 배치인원이 발표되어 자기의 입대여부가 결정되기 전에 그냥 자원을 하는 것이다. 최대한 안가고 싶으면, 애매한 숫자를 뽑아도 버티다가 징집되면 가고 아니면 안가려는 사람이 있어서 비자원 입대자 비율이 10%를 밑도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정말 군대 가고 싶어서 가려는 자원입대자가 늘어난다고 한다.)

그전에는 평균 복무기간이 1년정도로 지금보다 길었는데, 요즘 일반 복무가 4개월에 불과하고, 경기병 연대만 12개월, 왕실요트 대네브로(Dannebrog, 덴마크 국기 이름)에 승선하는 부대와 국가재난재해 관리위원회는 9개월, 왕실 근위대는 8개월 복무한다. 우리보다 복무기간이 훨씬 짧기때문에 비자원입대자의 비율이 5% 미만으로 크게 줄었다. 그리고 대학교 진학이나 취업을 하기 전에 뭔가 다른 것을 하면서 진로를 고민하는 덴마크 학생들에게 군대가 꼭 불행한 옵션은 아니라고 한다. 새로운 경험이기도 하기 때문에 선택을 하기도 한다고…

덴마크 왕실 근위대 도열장면 (Photo credit: Angelangelv2, wikipedia)

덴마크 왕실 근위대 도열장면
(Photo credit: Angelangelv2, wikipedia)

자원입대가 어쩌구 저쩌구 해고, 결국 덴마크 군대는 뽑기부터 하고 간다는 결론이다. 국방수요가 낮으니 이런 일도 일어난다는 놀라운 사실. 그러나 최근 러시아 비행기가 스웨덴과 덴마크 영공을 돌다가고, 러시아 잠수함이 스웨덴과 덴마크 인근 해역을 오고가는 등의 사건이 발생하고, 크림반도의 불안정한 정정상태 등을 계기로 국방 규모와 예산을 늘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니, 어떻게 될 지 모르겠다. 그래도 전체적인 맥락에서 뽑기는 계속 유지되지 않을까 한다.

오늘은 덴마크 여왕의 75번째 생일. 여왕은 DU? DE?

덴마크어에 유일한 존칭이라면 De(2인칭 존칭대명사, 일반 대명사는 Du이다.)가 있다. 사실 이제는 거의 쓰지 않는다. 우리처럼 복잡한 존댓말이 없다는 것은, ‘다 반말하는게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나이나 여러가지에 상관없이 똑같이 대우해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말도 엄청 깍듯한 존댓말이 실생활에서는 거의 사장(진지 잡수셨어요? 춘추가 어떻게 되세요? 이런 말은 왠지 문어체처럼 들릴 지경이다.)되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덴마크에서도 1848년 사회혁명 이후 평등사회로 전환하면서, 신분과 상관없이 모두 존중받아야 한다며 De를 안쓰는 방향으로 사회가 바뀌었다. (이 당시 유럽을 휩쓴 사회 개혁 혁명이 덴마크에서도 일어나, 왕정 체제에서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이 되었으며, 따라서 그전 있었던 신분사회가 평등사회로 전환되었다. 세계 2차대전을 거치면서 실질적인 사회 변화가 많이 일어나, Hellerup, Klampenborg 등지에 뼈대있는 집안의 일부 몰지각한 Snobbish를 제외하면, 차별이 드문 평등사회로 큰 변화를 이뤄냈다.)

그러나, 아예 사용이 되지 않는 것은 또 아니라 배우긴 배워야 한다. 그래봐야 인칭 변형이 3인칭 복수와 같아서 어렵진 않다. 지난 화요일 수업에서 Du와 De의 사용에 대해 토의를 했는데, 결론적으로는 고령의 보수적인 사람중 소수는 Du 사용에 기분 상할 수도 있으므로, 뭐라 부를 지 물어보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결론이 났다.

마침 월요일에 마르그레테 2세 여왕의 75번째 생일(남편인 헨릭은 뭐라 불리냐면, Prince Henrik이다. 우리 식으로 번역하면 이상해진다. 왕자. 왕의 아들… 음… 여왕의 아들이 아니라 남편이니… 흠흠…)을 맞이하여 기자회견이 있었다. 한 기자가 Du라고 여왕을 칭하며 질문을 던지자, “우리는 같은 학교를 다니지 않았는데?”라며 여왕이 대답했고, 주변 기자들이 웃었다.. 자신에게 Du 쓰지 말라는 이야기다. 상징적인 의미의 여왕이지만, 여왕에겐 De를 쓰는 것이 일반이다. 이 에피소드를 뉴스에서 다뤘던 게 마침 전날인데, 수업에 Du와 De 용처에 대해 논하니 웃음이 피식 나와서, “여왕에겐 Du를 쓰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같이 학교를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죠!”라고 답을 했더니 선생이 자기도 봤다면서 피식 웃더라. 그렇지만 우리와 같은 일반 시민간에는, 막상 누군가를 De로 호칭하면, 나이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부담스러워하면서 다 나를 Du로 부른다고, 너도 나를 Du로 부르라고 이야기해준다. (헷갈리면, Hey, dude.라고 불러보면 어떨까…? 음…)

생일이면 나와서 왕실 가족이 발코니에 나와 손을 흔든다. 제일 오른쪽 둘째 왕자 요아킴과는 대사관 행사 때 만나서 인사도 한번 해봤다. 인기는 별로 없는 왕자

생일이면 나와서 왕실 가족이 발코니에 나와 손을 흔든다. 제일 오른쪽 둘째 왕자 요아킴과는 대사관 행사 때 만나서 인사도 한번 해봤다. 인기는 별로 없는 왕자

여왕의 생일이면, 여왕이 왕궁 발코니에 나와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막대한 세금으로 유지되는 왕실은 언젠가 없어질 것이고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옌스가 출근 전, “오늘 여왕 생일이다.”라고 이야기하길래, “나도 나가서 여왕 손흔드는거 보면서 환호해야해?”라고 물어보니, “아니. 라면서 창밖을 가리키며, 저기서 내일 그렇게 해.”라는 거다. 음? 여왕이 이곳 Dyssegård까지 촘촘히 순방을?하는 생각에 갸우뚱 하니, 자기 생일이니 그렇게 하라는거다. 하하하. 내일 동네방네 부끄러워하게 해주겠다고 했는데, 정말 내려가서 해줄까 생각중이다. 우리는 황당한 커플이니까. 옌스도 은근 좋아할 듯?

여왕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왕실이 남아있지 않은 우리에게는 생소하고 신기한 것들이 있다. 여왕 신년사와 같은 것들인데, 이는 나중에 또 다뤄보고자 한다.

덴마크에서 친구 사귀기

덴마크에서 친구를 사귀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 중에 하나다. 특히 덴마크인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특히나 어렵다. 이는 덴마크로 이주해 온 외국인이 흔히 하는 불평중 하나다. 외국인을 위한 덴마크인 이해하기 강좌 등에 가보면, 덴마크인을 코코넛에 비유하곤 한다. 처음에 껍질을 깨고 그 내면으로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다. 스페인 등 남유럽쪽 사람들은 타인을 쉽게 친구로 맞이하곤 하는데, 사실 그 내면 깊숙한 곳에는 단단한 씨앗이 있어서 그 안으로 들어가는 건 매우 힘들다는 것을 이유로 복숭아 같다고하며 이 둘을 비교해 설명하는데, 다들 참 적절한 비유라고 이야기한다. (어학원에서 만난 포르투갈, 스페인, 그리스 등에서 온 남유럽 사람들 또한 매우 공감하던 이야기다.) 이는 꼭 덴마크에 온 외국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고, 다른 지역에서 거주하다가 새로이 코펜하겐으로 이사온 덴마크인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덴마크인과 가족이 되지 않고는 덴마크인의 주류 사회로 편입되기까지 어려움이 많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친구를 사귀는 길이라고. 그러나 사실 남자친구/남편의 가족은 가족이지만 또 친구와는 다르다. 가족이 있다고 해서 친구가 필요없는 건 아닌 것처럼. 또한 그의 친구는 그의 친구이지, 내 친구는 아니다. 물론 가깝게 지내고 소식 들으면 반갑고 언젠가는 정말 가까운 사람이 되겠지만, 그건 남자친구 또는 남편을 매개로 한 관계이기 때문에 따로 만나고 할 관계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

덴마크인은 다른 나라에서는 친구로 분류할 사람들을 아는 사람으로 분류할만큼 친구에 대한 정의가 참 까다롭다. 덴마크식 정의로 하자면, 내 친구중의 대부분을 아는 사람으로 쳐내야 할 정도다.

물론 대학생활을 같이 하는 경우는 다소 예외로 봐야 한다. 모든 나라를 가본 것은 아니지만, 감히 섣불리 예단하자면, 많은 나라에서 학생은 쉽게 친구가 되니까.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고를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인 것 같다. 직장은 내 입맛과 상관없이 조직이 원하는 대로 물리적으로 필요한 인간관계가 구성이 되고, 좋든 싫든 만나야 하는 사람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친구가 생기긴 하지만, 한국처럼 회식문화가 없는 덴마크에선 그렇게 되기 어렵다. 결혼식 때 직장 동료를 초대하는 경우가 드문 것도 그 때문이다. 가족 중심적인 덴마크 사회에선 근무시간이 딱 끝나면 여러가지 가정 내 의무와 책임을 위해 빨리 퇴근해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일 끝나고 한잔?’ 이런 것이 힘들다. 뭘 하려면 최소 1~2주 전에는 약속을 잡아야 한다. 그러나 친구를 사귀려는 관계 초반에 어찌 그렇게 플랜 잡고 하게 되나? 잘 안된다.

결국 외국인들은 주로 외국인을 많이 사귀게 된다. 외국인과 사귀는 게 나쁜 건 절대 아닌데, 정착을 하려는 사람이 아닌 경우, 다 친해지고 나면 떠나는 경우가 많다. 전 세계에 친구의 씨앗을 뿌리는 셈인데, 내 친구들도 이미 여기저기 전세계에 많이 흩어져 있는 탓에 이미 익숙은 하지만, 내 일상을 시차 없이, 얼굴 보고 만나서 부담 없이 수다를 떨 수 있는 친구 하나쯤은 자기 사는 도시에 갖고 싶은 것이 인간 마음일 것이다. 미리 몇일전에 약속 잡고 봐야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느 순간 생각나서 문자 한 통 보내거나, 전화 한 통 해서 얼굴 볼 수 있는 그런 사람.

덴마크어 학원을 다니면서 알게 된 한 명의 친구, Amanda. 그녀는 나의 이러한 갈증을 채워준 친구이다. 미국인 어머니와 덴마크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두가지 문화를 갖고 있으며, 미국에서 학부를 마치고 덴마크에서 살 생각으로 완전히 건너왔다. 지금은 수업을 같이 듣지는 않지만, 그 밖에 따로 만나서 저녁도 먹고, 차도 마시고, 수다도 떨며, 나중에 같이 아프리카 여행도 같이 하자고 이야기한 친구이다. 나와는 나이 차이가 거의 10살 가까이 나지만, 나이라는 숫자는 중요하지 않고, 참 성숙한 친구다. 공통점도 많고, 할 이야기도 많고, 참 마음이 따뜻해지는 친구이다. 과장이 없고, 담백한, 그리고 인생의 드라마를 만들지 않는, 자신에 대한 사랑도 충분하고, 타인에 대해 사랑할 수 있고, 혼자 설 수 있는 친구이다. 어렸을 적 사귀는 친구는 처음 케미스트리가 맞지 않아도 어린 날 다른 서로에게 고무찰흙처럼 서로 맞추어가면서 친해지고, 장단점 서로 끌어안고 가까워지기 좋지만, 나이가 어느정도 들어서 사귀는 친구는 초반 케미스트리가 맞지 않으면 가까워지기 어려운데, 그녀는 친구로서의 케미스트리도 맞고, 서로에게 수업을 같이 들은 다섯 달이라는 시간동안 서서히 맞춰가면서 성향도 잘 파악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아도 마음이 닿아있고, 항상 서로에 대해 궁금하고, 걱정해주고, 오랫만에 만나도 바로 엊그제 만난 것처럼 멀어지지 않는 절친한 친구들이 있다. 그들과는 다르지만, 그들 중 하나가 될 것 같은 그녀. 참 좋다. 지난 2년간 고생해서 친구 두 명을 얻고, 한명은 스위스로 떠나보냈지만, 그래도 한명은 앞으로 이 곳에 계속 남아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푸근하다.

터키 여행을 다녀온 그녀가 샐러드에 넣어 먹을 수 있는 향신료를 사왔다. 터키의 달달한 스위트도 먹어가면서 커피 한 잔 하는 일이 참 편안하고 즐거웠다. 집중력 저하에 대한 극복 방법 등 이런 저런 이야기 하면서 헤어지고 나니, 그간 뭔지 약간 부족한 듯 했던 마음 한켠이 탁 채워졌다. 내가 한국으로 1주 다녀오고, 그녀가 터키로 1주 다녀올 2주 동안 옌스와 가족 외엔 별로 이야기를 길게 나눌 일이 없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옌스가 아무리 좋고 그래도, 인간은 개인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덴마크에서 친구 사귀기는 앞으로도 계속 되겠지만, 좋은 친구 한 명 얻은 것이 어찌나 기쁜지… 오늘 하루 마음이 푸근하다.

덴마크에서 연애하기

나와 내 남자친구(뭔가 아이들이 쓰는 말 같긴 하지만, 약혼자라는 말은 입에 영원히 붙지 않을 거 같다. 애인이라는 말도… 사실 연인은 친구의 기능도 매우 충실히 해야 하며, 나는 이성애자인 관계로 성별은 남자여야 하니, 남자친구란 말이 틀린 것도 없고.)는 남들이 보면 심심할 데이트를 한다. 동네 한바퀴나 코펜하겐 시내를 산책하거나, 근처 공원에 가서 각자 딴 일을 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커피숍(맨날 가는데만 가는 사람들…)에 가서 신문을 읽고 공부를 하면서 쉴 때 대화를 한다. 아마 같이 살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살림을 합치기 전에도 비슷한 생활 패턴이었는데. 주로 집에서 하는 데이트를 즐기게 된다. 영화를 보고, 와인을 마시고 뭘 해도 주로 집에서.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할 때, 문화적 차이와 개인적 차이를 구분해 내기란 참 어렵다. 하물며 한국과 같이 작은 나라안에서도 크게 다른 지역적 특성을 찾아볼 수 있고, 그 안에서도 무수히 다른 삶의 양태를 찾을 수 있는데, 뭔가를 덴마크인은 이렇게 한다, 인도인은 이렇게 한다(이 두 나라에서만 살아본 탓에…)고 쉽게 일반화시킬 수는 없으니…

그렇지만 주로 집에서 데이트를 하거나, 산책을 하는 것 등은 덴마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데이트 방식이다. 그러니 덴마크적 특성이라고 봐도 좋겠다. 많은 연애를 해봤지만(주로 짧은 데이트에 그치고 말았지만…) 대부분이 한국에서 있었던 일인지라, 두나라의 다른 데이트방식에 대해 비교를 하게 되는데, 뭐가 좋고 나쁘고를 따지긴 힘들고, 나에게 어떤게 잘 맞는지를 비교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데이트하면, 뭔가 코스가 필요했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닌데, 남자친구는 항상 좋은 코스를 찾으려고 노력했고, 그 코스를 밟아가면서 즐기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어떤 면에선 참 까다로운 나이지만, 우선 사귀기 시작한 남자친구에게는 크게 까다롭게 굴지 않는 나였기에 그 준비된 코스가 마음에 안들어서 싸우거나 그런 건 없었다. 착해서는 절대 아니고, 뭐가 되었든 마음에 안들어하면 손해보는 게 나라서 그런 실용주의적 마음에서 그런 것이었다.

형식적인 것을 배격하는 덴마크인의 실용주의는 사회 전반에서 발견된다. 이제 2년 가까이 살고 나니 그런 모습을 여기저기서 많이 느끼게 된다. 밖에 나가서 먹으면 돈이 많이 든다. 물론 어떤 데이트코스를 찾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조금 우아하게 먹고 마시자고 밖으로 나가면 억수로 돈이 깨진다. 예를 들어 일주년 기념으로 옌스가 좋은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여기 기준으로 분류하자면, 제일 비싼 미슐랭 스타급 고급 레스토랑 바로 아래급 레스토랑을 갔다. 5코스 식사 2인에 가장 낮은 가격대의 와인 한병, 식전 샴페인 가장 저렴한 것으로 한잔씩 해서 먹고 나니 60만원이 나왔다. 입이 떡 벌어질 가격이다. 이런 밖에서의 식사를 가능케 하는 것은, 한국에서 여러번에 나눠할 외식을 정말 일년에 손에 꼽을 정도로 몇번 안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주변에 커플들을 보아도, 외식은 잘 안한다. 사실 덴마크에서 외식 엄청하고 살면, 아주 부자가 아닌 한 파산하기 마련이다. 막대한 세금으로, 한달의 가처분 소득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비해 물가가 2~3배 비싸기 때문이다. 그러니 평소엔 다들 영화도 집에서 주로 보고, 와인도 집에서 마시고, 식사도 집에서 하면서 데이트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하기 참 힘든 것이, 결혼 전에는 주로 혼자 살지도 않고, 외식업이 발달해 있고 경쟁이 치열해서, 밖에서 사먹는게 집에서 비슷하게 해먹는 것보다 딱히 비쌀게 없고, 자주 요리 안해먹는 사람에겐 오히려 집에서 해먹는 게, 기본재료 갖추느라 더 비싸지기조차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에 누군가를 데려오는 건 결혼할 사람이나 데려온다는 집이 많아서(요즘은 좀 변하고 있으려나…?) 밖에서 봐야 하고…

그리고 한국보다는 남의 시선에서 자유롭다. 한국에 비춰진 것처럼 직업에 귀천도 없고, 남 시선 하나도 신경 안쓰고 그런 건 전혀 아니다. 비싼 물건들이 아니라서 그렇지, 여기도 3초백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자주 보이는 백팩(스웨덴산 Fjallraven, 한국에서도 엄청 메는 듯?)이 있고, 여자들이 많이 들고 다니는 DAY Birger et Mikkelsen 쇼퍼백이 있으며, ‘덴마크인처럼 보이는 법’이라고 덴마크인의 유행 사랑을 비꼰 글들도 있다. 그렇지만, 자기가 뭔가를 함에 있어서 어거지로 남들눈에 좋아보이는 일이라고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굳이 하지는 않는다. 경험의 측면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을 중시한다.

여자에게는 남자친구가 데이트코스를 짜줘야만 하고, 좋은 곳에서 밥을 먹어야 하며, 남들 보기 화려한 것을 해야하고, 남자가 가방을 들어줘야 하고, 뻑적지근한 선물을 받아야 하고, 데이트 비용은 주로 남자가 내줘야 한다면, 덴마크의 데이트라이프는 참 고달퍼진다. 남자가 대충 맛있는 사 먹이고, 처음에만 바짝 잘해주고 그다음엔 대충 편한대로 하고, 집안일 잘 못하고, 돈으로 떼우려고 하면 또 참 고달퍼진다. 덴마크에서 연애란 인간대 인간이 만나서 하는 것이다.

옌스의 1주년 기념 선물 Matador DVD와 포장에 써준 사랑스런 메세지

옌스의 1주년 기념 선물 Matador DVD와 포장에 써준 사랑스런 메세지

덴마크는 뭔가 엄청 가족파괴현상이 일어나고 결혼도 기피하는 그런 사회처럼 비춰지고 있지만, 곪는 관계를 속 썩여가면서 두지 않으려고 하고, 제도적인 것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에 따라 나라 밖에서 보기에 그리 보여지는 것 뿐이다. 가족과 보는 횟수는 더 적어도, 더 자주 연락하고 따뜻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많고, 가족간에 챙기는 마음이 한국과 다름 없거나 더하기도 하다. 부양이라는 문제가 가슴을 짖누르는 경우가 한국보다 적기 때문일 수도 있다. 최소한의 복지가 삶을 유지하는 데는 도움을 주니… 결혼 없이 동거로만 지내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게 한국에서 갖는 의무에서부터 자유로우려고 하는게 아니라, 굳이 나라에서 내 가족관계를 인증해줄 필요 없다면서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밀당같은거 못하고, 솔직하고 담백하게 연애하는 거 좋아하는 나에게 덴마크는 좋은 연애의 장이다. 결혼하면 연애가 끝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그리고 옌스와 함께라면 앞으로 남은 반평생, 혹은 생명연장의 시대에 사니 남은 2/3의 인생동안 계속 알콩달콩 유치하게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불편한 삶에 익숙해질 수 있다면, 나같은 사람에게 덴마크는 참 좋은 땅이다. (아… 비영어권이라는 거 하나 빼고… 하하하.)

덴마크어 공부하기

덴마크어를 한국에서 배우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교재를 구하기도, 과정을 찾기도 어렵다. 영어로 된 교재를 찾는 것도 어려운데, 한국어로 되어 있는 교재를 찾는 것이 쉬울리가 없다.

그러나, 기쁘게도 영어로 되어 있는 교재는 늘어나고 있다. 아이북스를 통해새도 덴마크어 책과 동사변형 책, 문법 책 등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몇가지 온라인 교재가 있는데, 이를 공유하고자 한다.

  1. http://onlinedansk.ventures.dk/ – 온라인댄스크(온라인 덴마크어). 어디선가 링크를 옮겨타다가, 정부가 운영하는 사이트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찾아보니 어디에서 이를 봤는지가 기억나지 않는다. 학원에서 모듈체게와 EVA체계로 배우는 내용을 순서대로 담았다. 이런 사이트는 없었던 것 같은데, 매우 좋은 사이트라고 생각한다. 예전 모듈 복습할 때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2. http://basby.dk/ – 배스뷔(덴마크 성 중에 하나). 문법과 발음에서 엄청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Studieskolen이라는 코펜하겐 소재 어학원(현재 나는 모듈 2까지 다른 학원에 다니다가 지난 주부터 이곳으로 옮겼는데, 최고의 학원이라고 할 만 하다고 느꼈다. 그간 수업시간 문제로 집근처 어학원에 다니다가 영 안맞아서 옮겼는데, 구관이 꼭 명관은 아닌 모양이다.)의 선생님인 Anders Basby(애너스 배스뷔)가 운영하는 페이지인데, 아주 훌륭한 사이트다.
  3. http://lexin-billedtema.emu.dk/billedtema/sprog/dansk.html – 렉신 빌를테마(어휘-사진테마). 덴마크 어휘 학습에 탁월한 사이트다. 그림과 함께 단어를 학습할 수 있고, 덴마크에 많이 거주하는 나라 언어를 중심으로 번역된 내용을 제공한다. 영어로 학습하면 충분하다. 사실 영어로도 모를 단어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고, 그림으로 잘 표현되어 있기에 굳이 영어로 번역해서 볼 필요도 없다.
  4. http://www.alfabetaforlag.dk/ – 알파베타포레이(알파베타 출판사). 덴마크어 교재 출판사 홈페이지다. 책마다 듣기와 영상파일, 해당 파일에 대한 텍스트를 무료로 제공한다. 듣기 공부에 참 좋은 것이, 온라인댄스크는 외국인 학습자에 맞추어 발음을 정확하고 천천히 해주는 데 반해, 이 사이트에서 제공되는 파일은 일상 대화와 같이 주어진다.
  5. https://www.duolingo.com/ – 듀오링고.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듀오링고는 모바일 앱으로도 쉽게 이용할 수 있어서 덴마크어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적합하다. 그러나 어느정도 학습이 이뤄진 다음에는 부족하다고 느껴질 수 있다.

이전 포스트에서도 썼지만, 덴마크어는 영어 및 독일어와 유사한 점이 많이 있다. 덴마크어는 북게르만어군, 영어는 서게르만어군에 속하며, 게르만어는 독어이기 때문이다. 중간에 분화된 형제 언어라 다르긴 하지만, 문법이 상당히 유사해, 두 언어간 문법적 차이를 발견하는 것이 재미있다. 직역을 했을 때 의미가 상당히 전달되는 경우가 많아, 오히려 이 때문에 비영어권 국가 중 가장 영어를 잘한다는 나라 중 하나인 덴마크에서만 발견되는 특이한 표현들도 있다. 이것은 나중에 다뤄볼 예정이다. 그래서인지 구글 번역이 쓸만하게 작동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덴마크어를 배울 때 중요한 것은 발음이다. 덴마크인은 유독 발음에 까다롭다. 정확한 위치에 단어 상의 강세와 문장 상의 강조를 지키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한다. 부드러운 D는 처음 배울 때는 토하는 발음이라고 표현하곤 했다. Rød grød med fløde(크림을 얹은 빨간 그뢸(횔과 뢸의 중간발음, 콩포트류의 덴마크 과일 조림)은 덴마크어를 배운다고 하면 간혹 해보라고 시키는 문구중 하나이다. 덴마크어 초급 때 저 발음 하려면 진짜 구토할 것 같다. 목 뒷쪽을 쓰는 소리라 그렇다.

Rød grød med fløde

Rød grød med fløde

따라서 덴마크어에서 발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영어를 배울 때 발음에 집착하던 나에게 유난을 떤다고 하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덴마크어는 선생님들 조차도 간혹 학생들의 발음을 잘 못알아듣곤 한다. 이러한 발음에 대한 집착은 덴마크어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좋은 학습 기반이 될 것이다.

오늘 학원 수업을 마치고 S-tog (일종의 광역도시간 열차 정도 되겠다.)를 기다리는데, 하필 배차시간이 10분에서 20분으로 늘어나는 시간대에 막 열차가 출발하자마자 도착을 해서 뭔가를 할 짬이 났다. 덴마크어 동사변형을 외우려고 앱을 열고 중얼중얼하다가, 아… 앞으로 10년은 해야 원어민처럼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약간 힘이 들기도 했다. 삼십대 중반에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그러나 다시금, 이건 내 선택이고, 원래 언어 배우는 거 좋아하잖아. 하는 생각과 함께 스스로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한국가서 옌스와 이야기 할 때, 남들이 못알아 듣게 이야기하고 싶은 건 덴마크어로 이야기를 하니 우리만의 비밀언어가 생긴 거 같아서 재미있었다. 유치한 우리 커플에겐 이런 소소한 거리들이 참으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되는데, 그런 건 또 적어봐야겠다. 시간이 지나도 보면서 다시 웃을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