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결산

2016년이 하루밤 사이에 작년으로 바뀌어버렸다. 인간이 임의로 나눈 시간의 단위일 뿐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매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다. 작년을 결산해보자면 임신이라는 이벤트 외엔 큰 일이 없었던 한 해였다. 2015년엔 결혼, 2017년엔 출산이란 정말 큰 이벤트들이 있지만, 2016년은 2017년의 출산으로 향하는 중간과정 같은 기분이라 내 몸의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을지언정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래도 올해 한해를 잘 보내기 위해서는 좋고 안좋았던 일을 결산해 새로 반영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간 그렇게 새해를 맞아왔기 때문인 것 같다. 다른 가족은 모르겠지만, 우리집에서는 새해는 지나가는 해를 정리하고 오는 해를 준비하는 시간으로 삼았었기 때문이다.

  • 학업
    • 대학원
      • 상반기 정말 열심히 하고 하반기 설렁설렁하게 했다. 아무래도 어려운 과목일 수록 더 열심히 하게 되는 거 같다. 이해가 안되면 더 파고 들게 되고, 좀 이해가 되면 설렁설렁하게 되는 것은 내 전형적 행동양태이다. 장점을 개발하고 단점에 초점을 맞추지 말라는 말도 있는데, 그러면 어려운 것만 하면서 골머리를 섞어야 하는 것인가? 그것도 잘 모르겠다. 다른 건 몰라도 편한 길을 택하려 할 수록 삶에 대한 회의가 들 수 있다는 것이다. 꾸준한 지적 도전이 필요하다.
      • 연말부터 본격적으로 논문 쓰기 시작할건데, 그 전까지 데이터수집 및 관련 이론 공부를 육아와 병행해야 한다. 확 나태해짐 없이 꾸준히 할 수 있도록 스스로에 대한 채찍질도 필요하다. 계량경제학 리프레시가 필요한데, 애가 태어나서 초반에 모유 수유 등으로 꼼짝없이 묶여있을 때 유튜브 강의 등을 보면서 수동적인 방식으로나마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림질 같은 큰 두뇌회전이 필요없는 노동을 할 때 주로 쓰는 방식인데, 모유 수유 및 애 재우는 타이밍에 유용할 것 같다.
    • 덴마크어
      • 학원을 그만두면서부터 신문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을 늘리게 되었다. 듣기와 말하기가 비약적으로 많이 늘기는 했지만, 내가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실수를 체계적으로 고치는 일은 하지 않아서 이 부분을 개선해야 한다. 시간을 정해서 문법 공부를 다시 하고, 작문을 하고 옌스에게 교정을 받으면서 정교함을 다져야겠다. 신문, 텔레비전 등의 노출은 꾸준히 늘리고, 어휘를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외우도록 해야겠다.
    • 한국어
      • 옌스의 한국어 학습을 돕는 일이 포함된다. 하나에게 말할 때 찬찬히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어휘를 자주 적어줘야겠다. 옌스의 첫번째 책과 리스트 등을 조합해 이야기를 써주기로 했는데, 이 또한 꾸준히 해줘야겠다. 내 일에 우선순위로 밀려 해준다고 하고 올 해는 아직 이 태스크를 완수하지 못했다. 아이, 미안해라.
  • 가정
    • 청소
      • 집안 관리를 좀 더 잘 해야겠다. 하나가 이것 저것 물고 빨 거라 어른들 살던 정도로 청소해갖고는 충분하지가 않을 것 같다. 청소의 빈도를 늘려야겠다. 애 빨레에 애보기까지 정신이 없긴 하겠지만, 좀 정신이 나게 해놓고 살아야지, 안그렇고서는 진짜 삶이 혼미해질 것 같다.
    • 파트너십
      • 옌스와 지금까지 정말 잘 해왔지만, 앞으로 육아와 집안살림, 공부, 회사일, 취미생활, 체력단련 등 두 명의 개인 생활을 잘 섞어서 하려다보면 여러가지 이해가 충돌되는 일도 생길 것이고, 조율할 일도 많을 것이다. 서로 어떻게 해야할 지 미리 상의도 해보긴 했지만, 애가 생기고 맞닥뜨리고 보면 이상과 현실이 괴리되어 다시 플랜을 짜야한다 싶은 때도 많을텐데, 이런 어려움을 현명하게 잘 헤쳐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랑은 표현하는 만큼 는다는데 (연구결과로도 그렇단다.) 그런 어려운 순간에도 서로 배려하고 사랑하면서 앞으로 보낼 시간들을 더 행복하게 채워갈 수 있길 바란다.

다른 것들도 있지만 이것들이 가장 메인이다. 가족과 친지, 친구들과의 관계 등도 있고 하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하면 될 일인 듯 하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새로운 가족이 태어날 격변의 2017년을 맞이하여 좀 더 체계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덴마크 신년맞이 (Godt Nytår!)

빨래가 너무 많다. 겨울이라 빨래가 잘 마르지도 않는데, 우리와 하나의 침구류와 옷, 소재별, 색깔별로 빨려니 정신이 없다. 높은 온도에 빠는 것들은 세탁기에서만도 3시간이나 걸리는 데다가, 손빨래한 모직 소재 옷들은 좀 평평하게 펴야해서 빨래대에서 차지하는 공간도 많은지라 침구류를 다 다림질해서 말렸더니 어느새 저녁시간이 되어버렸네.

그래도 이제 빨 것도 거의 다 빨았고 해서 일주일간의 겨울방학이 끝나기 전 출산 준비를 다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주부터는 기말고사 준비와 그룹 프로젝트를 위해 데이터 수집과 R 프로그래밍, 보고서 작성 등으로 정신이 없을 터인지라 출산준비는 못할 것 같아서 말이다.

그래도 그 와중에 옌스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마사지 상품권을 이용해보려 한다. 시험 끝나고 하면 너무 막바지라 예약해놨다가 취소 불가기간에 취소하면서 돈을 날릴 가능성도 있어서 다음주에 수업 없는 날 가보는 것으로 예약했다. 패키지 중 임산부 마사지 프로그램도 있는데, 옌스가 직장 동료 및 베프의 공통된 추천을 받은 코펜하겐에서 제일 좋다는 마사지샵이란다. 70분 정도야 시간을 못빼랴. 학교 후배가 출장와서 딱 한번 로비만 들어가본 호텔에 위치해 있다. 이번엔 그냥 기웃거리는 게 아니라 이용을 해보겠다 싶어서 기대를 살짝 해본다. 스파라고는 동남아 여행가서나 해본 터라. (솔직히 동남아 리조트 스파가 더 내 취향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첫 세달 정도만 쓸 지도 모르겠지만, 역시 새해가 시작되면 새해 목표와 함께 다이어리를 사야하지 않겠나 싶어서 사왔다. 옌스가 읽을까봐 한국어로 쓰는데, 뭐하냐고 물어봐서 신년 목표 새운다 하니까, 목표가 뭐냐고 물어본다. 못지킬까봐 이야기해주지 못하겠다 하니까 그게 무슨 목표냐며 이야기하란다. 흑… 틀린 바가 없어서 이야기해줬다. 그래… 역시 목표는 공유해야 그나마 강제력이 생기지…

이번 연말 연시는 육체노동으로 점철된 시간이다. 옌스네 카약클럽 섬머하우스에서 하는 신년파티는 안가기로 해서 그나마 여유가 있긴 하지만, 우리끼리 만찬을 하기로 해서 고기 굽고 샐러드 만드는 거는 해야 할 것 같다. 거기 갈려면 음식도 해야지, 짐도 싸야지, 차도 빌려야지, 밤 늦은 시간까지 함께 하고, 다음 날 정리 및 청소까지 하고 돌아와서 차 반납하고 짐도 풀 생각하면… 안그래도 짧은 겨울방학에 출산준비까지 겹쳐 쓰러질 것 같았다. 옌스가 회사에서 샴페인 한 병 받아왔는데, 신년 만찬 하면서 그거 한 잔 마실 기회는 주시겠다고 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굽신거리며 받아야 할 것 같다. 한 잔을 모두 허할 거 같지도 않고, 나도 뭐 한 잔을 다 마실 마음까지는 없다. 출산하고 나면 꼭 한잔 마실 거라고, 좋은 것으로 한 병 준비해오라 했으니 병원에서 한 잔 쭉 들이키겠다는 마음으로 그 전까지는 그냥 맛 보는 것으로 감사해하리라.

덴마크 신년맞이는 아주 정형화되어있다. 6시에 (불필요하게 긴장한) 여왕의 송구영신 메세지를 들으며 샴페인을 마시고 (거의 전 국민이 이 송구영신 메세지를 듣는다. 공화주의자들의 군주 메세지에 대한 신봉이라니, 놀랍다.), 저녁 식사를 준비해 11시 정도까지 먹고 마시고, 신년맞이때 하는 게임 등으로 하며 놀다가, 식탁을 대충 정리하고서 TV를 튼다. 국영방송에서 중계하는 클래식 합창 공연 등을 보다가 12시가 몇 초 안남으면 테이블이나 의자 등 높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코펜하겐 시청의 시계의 초침이 12시를 가로 지르는 순간 바닥으로 뛰어내린다. 그러면 크란서케이어(Kransekage) 라는 마지판이 듬뿍 들어간 과자 같은 케이크를 먹고, 폭죽을 터뜨리러 밖으로 나선다. 폭죽놀이가 끝나면 들어와서 커피를 마시거나 와인을 더 마시면서 최소 2시까지는 놀다가 자러 들어간다. 사실 우리가 나이가 들어서 그렇지, 젊은 사람들은 집에 음악도 틀어놓고 춤도 추고 하면서 새벽 다섯시까지도 논다. 물론 정말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우리처럼 별장이나 집에서 파티를 하는게 아니라 밖으로 나서서 클럽 등에서 파티를 즐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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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진지하게 여왕의 2015년 맞이 송구영신 메세지를 듣고 있는 와중, 우리는 사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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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맞이 만찬 준비중. 우리는 준비가 끝났다. 집에서 만두피까지 손수 빚어 만든 군만두를 곁들인 매콤 새콤 간장소스 샐러드. 이거 빚느라 여기 가기 전에 막노동으로 고생했다. 가서는 편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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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맞이한 2016년은 내일 하루가 남았다. 이 날은 실컷 마셨더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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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코스 식사가 끝나고 담소를 나누는 중. 2015년 부활절 한국 방문시 사간 셀피스틱으로 모두를 담을 수 있었다. 다들 셀피스틱을 부담스러워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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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중에도 중간중간 폭죽에 불을 붙이고 게임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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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란서케이어 준비가 끝났다. 12시 타종 전에 폭죽에 불을 붙이면 all set!  케이크 옆에 놓인 은박캔디모양은 포장지를 양쪽에서 당기면 그 안에 왕관종이가 나온 사람이 왕이 되는 왕게임 도구다. 왕이라고 특별히 대접하는 건 없던데, 아마 원래는 뭔가 하는 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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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렇게 왕은 왕관을 쓴다. 2015년 맞이 파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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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종이 시작돼서 바닐려크란서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다들 의자위로 올라섰다. 2016년이 오기 몇 초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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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이 밝았다. 모두 2015년(의자 위)에서 뛰어내려 2016년(바닥)에 안착. 덴마크 국가를 부르고 있다. 물론 우린 안부르고 사진 찍고 있지만… 자막이 나와서 외국인도 따라 부를 수는 있다. 멜로디를 모르는게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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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일엔 안개가 자욱했다. 춥기도 추웠는데, 아무튼 우리는 큰 폭죽은 없어서 작은 폭죽으로 소소히 즐겼다.

아무튼 이 날은 정말 외식업계에는 대목인게, 밖에서 먹는 것 뿐 아니라 반 조리 된 레스토랑 음식을 1인당 7~8만원 선으로 맞춰 포장 판매를 하는데 이 시장이 엄청 크단다. 카약클럽에서도 한번 그렇게 했었는데, 조금만 더 조리하고 나면 레스토랑에서 먹는 것처럼 프레젠테이션까지 그럴 듯하게 해서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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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맞이 Cofoco에서 주문한 세트의 디저트. 우리 커플이 디저트를 담당했었다.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비쥬얼이다.

한국에 비하면 정말 소비주의가 팽배해있지 않은 나라라 해도, 크리스마스나 신년 같은 같은 명절이 갈수록 상업화되는 건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오늘자 일간지 베얼링스커엔 이런 소비주의와 상업화 세태를 따르기 싫은 한 기자가 자기의 이러한 태도를 변비에 비유하고, 상업화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뱃가죽이 늘어나는 지, 자기가 구토직전 한계에 도달하는 지를 인지하지 못하고 먹어 뱃속에서 꾸룩꾸룩 소리를 내는 사람들에 비유하며 재미있게 비꼰 컬럼이 실렸다.

뭐 이 날을 어떻게 보내든 간에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새해는 친구들과 보내는 덴마크의 연말연시는 조용하지는 않다. 많이 먹고 마시고 가장 춥고 어두운 시기를 hyggeligt하게 보내는 것, 어떤 시대가 되든 이런 모습이 오래 지속되지 않을까?

매년 비는 뻔한 소원이긴 하지만, 새해엔 모든 이에게 더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길!!! 2017년, 곧 만나자!

 

2016년 크리스마스 가족모임 후기

일년에 한 번, 두 분의 시고모님 중 한 분의 댁에서 돌아가면서 두번째 크리스마스 오찬이 열린다. 덴마크에서는 25일과 26일을 각각 첫번째 크리스마스와 두번째 크리스마스라고 부르고, 첫번째 크리스마스 오찬과 만찬은 24일 이브에 하고, 두번째 크리스마스 오찬은 26일에 한다. 올 해는 Faxe Ladeplads의 첫째 고모님 댁에서 하는 거였는데, 막판에 고모님 손목이 부러지면서 작년과 마찬가지로 Roskilde에서 하게 되었다.

26일 저녁에 태풍이 예보되어, 페리를 타고 돌아가셔야 하는 시부모님은 참석을 못하시게 되었고, 따라서 우리도 열차를 타고 움직여야 되었다. 이번 오찬을 호스트였던 도리스 고모님과 크눌 고모부님은 칠십년대 히피의 삶을 사셨다는데 사실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그냥 봐서는 점잖은 보통의 어른들인데 히피셨다니. 옌스 왈 고모님네 서가에 히피의 삶에 대한 책도 꽂혀있다고 했다. 언젠가 두분의 소시적 사진을 보고싶다.

두분은 초반에 나와 별로 말을 섞지 않으셨다. 내가 마음에 안드시거나 영어가 편치 않으시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란 생각을 했으나, 그게 후자의 이유였음을 알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내가 덴마크어를 더듬거리며 하기 시작하자 조금씩 말을 걸기 시작하셨고, 어느 타이밍부터는 내가 영어로 말하더라도 덴마크어로 답을 하셨다. 그리고 크눌고모부님은 특히나 내 덴마크어의 변천사에 유독 관심을 많이 보이고 표현하셨다.

이 날도 나를 보자마자 몇마디 섞으시더니, 이제 정말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거의 없다하시며 놀라움을 표하셨다. 더이상 다른 가족들도 나를 위해 말을 천천히하거나 영어로 말하는 수고로움을 피해도 되게되니, 나 또한 부담스러움이 사라졌다. 다른 것보다도 이제 대그룹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포함될 수 있고, 대부분의 주제를 자연스럽게 다루고 이해하게 되어서, 소외감이나 지루함이 없어졌다. 꼬맹이들의 말도 알아듣고 그들과의 친밀도도 높아져서 그들이 나와도 놀기시작하고, 내가 준비한 명절 음식들도 항상 완판되니 소속감이 더 커진다고 할까?

올해는 새우를 다져 약간의 당근과 양파를 넣어 뭉쳐만든 새우전을 준비해갔는데, 여기 음식 중 피스크프리카델라라는 생전요리와 유사한점이 많아서 그런지 생소함 없이 사람들이 smørrebrød의 토핑으로 얹어먹더라. 한국에서도 애들이 새우전 좋아하는 것처럼 여기 애들도 좋아하더라.

각자 음식 한가지씩 또는 디저트나 음료 등을 분담해서 준비하고 나눠먹는 명절은 꽤나 유쾌하다. 집에 오면 하루가 다 가 피곤하기도 하지만, 자주 돌아오는 명절도 아니고 일년에 한 번 뿐이니 즐겁게 준비할 수 있다. 내년엔 하나가 나오니 또 느낌이 완전히 다르겠지. 돌 가까이 되는 타이밍이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정신없게 하겠지.

덴마크에서 네번째 연말을 맞이하며

12월 22일. 동지가 지났다. 이제 해는 다시 길어질 것이고, 추위는 조금 더 절정을 향해 달리다 눈치채지 못하는 새 봄을 향해 달리겠지. 하나는 추위가 가장 기승을 부리는 1월 말 경에 태어날테니 이번 겨울은 뭔가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는 새에 지나가지 않을까 한다.

올 겨울 100년 이래 가장 추운 겨울이 될 거라고 하더만, 최소한 지금까지는 예보를 벗어나 유래없이 따뜻한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바람도 그다지 세차지 않고. 이러면 내년엔 병충해가 많이 돌텐데…

친구들을 불러 한국 음식을 차려 송년회를 했는데, 한 친구가 포인세티아를 사왔다. 살까말까하다 사지 않았던 크리스마스 느낌이 물씬나는 포인세티아. 들어갈만한 적당한 화분이 없어서 검정플라스틱 화분을 감싸고 있던 녹색 포장지를 적당히 구겨 집에 있던 검정 리본으로 둘렀다. 밑에 접시를 받혀 창가에 두니 완연한 크리스마스 느낌이다. 선인장류가 아니면 1년 내에 식물이 죽어나가는 우리집에서 얼마나 오래 살 지 한번 두고 볼 일이다. 죽어나가는 식물의 수가 늘어가는 만큼 경험의 축적과 함께 평균 생존기간도 늘어나니, 혹시 또 아나? 이 포인세티아가 우리와 한참을 함께할런지.

크리스마스 선물 쇼핑도 끝났고, 26일에 있을 2차 크리스마스 오찬에 선보일 한식 메뉴도 결정했다. 시아버지의 자매들과 그 아래 직계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큰 모임이라 포트럭 스타일로 각자 메뉴를 하나씩 준비해오는데, 덴마크 전통 크리스마스 오찬 메뉴가 있어서 거기에 적당히 어울리는 음식으로 가져가야 한다.

작년엔 김밥을 해갖는데 인기가 매우 좋았다. 애들도 좋아했고. 그러나 시간상 점심이고, 차로 한시간 반 정도 가야 하는 길 때문에 새벽같이 일어나 계란지단 부치고 오이를 소금에 절이고, 당근과 시금치, 고기 볶아 갓지은 밥에 마는 게 너무 힘들었다. 시간에 쫓겨 막판엔 집을 폭탄맞은 듯한 상태로 놔두고 갔는데, 집에 돌아와서 집안 가득한 참기름 냄새를 맡으니 피로가 어찌나 몰려오던지. 올해는 친구의 조언에 따라 새우전을 부치려고 한다. 전날 부쳐서 당일에 현장에서 데워 내면 되니까.

옌스네 가족 및 옌스 시누이네 가족과 함께 할 24일 메인 크리스마스 만찬은 옌스 시누이네서 하는데, 내가 합류한 이후에도 우리 집은 초콜릿과 디저트와인 등 돈으로 떼울 수 있는 쉬운 것을 맡고 있다. 명절에 돈으로 떼우는 게 쉽다는 건 해보니 알겠다. (머리로도 알긴 했지만, 해보니 정말 실감난다.) 그래도 한국식 생각해보면 정말 간단한 명절 준비다. 각각 집에서 큰 준비는 다 해와서 현장에서 데우는 식으로 해서 음식을 내니까. 올해는 원래 더 먼 Faxe Ladeplads로 가야했는데, 시고모님 팔이 부러지는 바람에 작년과 같이 로스킬레로 간다.

이번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 중 침대 조립하고, 유모차 조립/해체법에 익숙해지도록 연습 몇 번 해보고, 하나 양말 몇 개 사고, 아기 용품 빨래만 하면 하나를 맞이할 준비는 거의 다 끝난 것 같다. 어제 친구와 함께 아이들 옷과 용품을 중고로 내놓는 중고 상점에 다녀왔다. 장소를 대여하는 업체가 운영을 담당하고, 팔 물건이 있는 사람들은 매대를 대여해 제품에 태그를 붙여 비치하는 영구적인 벼룩시장이다. 여기서 옷가지 몇 개와 모유수유 책 한권을 사왔는데 참 저렴하더라. 첫 한 해에 입을 옷은 사이즈가 다양하게 있는 편이어서 앞으로 1년은 여기에 많이 의존할 예정이다. 굳이 하나에게 새 옷을 입혀야 하는 것도 아니고, 애들은 워낙 빨리 자라니 새 것을 필요한 양만큼 사기엔 낭비가 크니까.

내가 이 곳에 산지도 어느새 3년 반이 다 되어간다. 정말 별로 오래 안된 것 같은데 벌써 3년 반이라니… 다행인 건 이 나라와 나의 궁합이 잘 맞는다는 것이다. 아직 직장을 구하지 않았으니 완전한 정착을 한 건 아니지만, 그냥 일상생활 속에서는 이방인 스트레스를 거의 졸업한 것 같다. 여기 신문을 읽으면서 한국 신문에서 조금씩 멀어지게 되고 여기 물정에 더 밝아지게 된다. 물론 한국의 정치기사는 워낙 요즘 정치가 신묘하고 황당하게 돌아가다보니 관심을 끌 수가 없지만… 그 밖에 일에서는 조금씩 멀어지게 된다. 식사하는 방식이나 소소한 일상의 행동도 여기식으로 많이 바뀌었다. 임신이라는 경험과 출산 모두 이 곳의 방식으로 행동하고, 교육받고, 몸조리도 여기 사람들이 하는 대로 하게 될테니.

한국에서 살면서 항상 튀어서 지적받고 했던 내가 여기에선 크게 유별나지 않은 사람이 되서 그런가. 이국의 땅에 있지만 이곳에 살면서 내가 이방인이라고 느껴지던 순간들은 한국에서 비슷하게 느끼던 순간들보다 적으면 적었지 더 많지 않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성인이 20대 후반까지 자란 사람이라 절대 이들과 동질성을 느끼는 사람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야 하지도 않고 그럴 생각도 없다.), 시간이 지날 수록 이 사회를 더 이해하게 되고 녹아 들어가면서 한국인과 덴마크인의 모습이 뒤섞인 사람이 되겠지.

옌스가 스케이트를 타러 아이스링크에 간 사이 크리스마스 캐롤 피아노곡을 들으며 혼자 글을 쓰고 있으니 왠지 감수성이 넘쳐흘른다. 열흘에 불과한 짧은 연말연시 연휴, 프로젝트도 하고 출산준비도 하며 바쁘게 달려갈 생각을 하니 오늘의 평화를 더욱 잘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밤이 깊어가니 쿠키를 곁들여 디카페인 커피 한 잔 하며 이 시간을 즐겨야겠다. 요즘 간혹 덴마크의 hygge가 소개되곤 하는데, 정말 별 것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내 곁에 없어도 되고, 꼭 촛불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나 혼자 온기가 느껴지는 포근한 시간을 보내면 그걸로 충분하다. Jeg skal hygge mig herhjemme alene lige nu!

임신 후기, 병원 방문 단상

임신 중기 이후, 굳이 심박이 느껴지는 곳에 손가락을 올리지 않아도 심박수를 셀 수 있게 되었다. 심박의 강도가 세졌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간혹 그 심장의 박동이 불편하게 느껴지면서 호흡이 불편해지고 오심이 날 때가 있다. 심박수는 대충 80과 90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있으니 특별히 문제가 될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지난번 방문 이후로 의사가 좀 이상하다 싶은 건 오라고 했기에 예약을 잡고 병원을 방문했다.

심박이 불규칙한 건 아니고 규칙적인데 불편한 정도로, 어렸을 때 별다른 심장 질환이 없었다면, 지금 검사한 정도로는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잠시 누워보라고 할 때 한 다리를 먼저 얹고 다른 다리를 끓어올리는데, 사흘 전부터 다시 시작된 치골통에 약간 신음을 하며 미간을 찌푸리니까 의사가 그렇게 움직이면 안된다고 한다. 양 다리를 벌렸다가 오므리는 활동은 치골통이 있는 경우 이를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니 반드시 두 다리를 모아서 동시에 움직이라고 한다. 또한 잘 때 다리 사이에 베게를 끼우고 자라길래, 그건 이미 하고 있다고 답했다.

출산 후 몇 주 안에 없어지는 통증인데, 지금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까 정 힘들면 파노딜같은 진통제를 먹으란다. 다 그렇게 한다고. 그런데 이런 치골통이 임신후기에 느껴지는 건 서서히 아이가 아래로 내려오면서 골반뼈가 양쪽으로 벌어지는 때문이라며 몸이 출산에 준비하는 신호이니 좋은 거라며 위로해준다. 오늘 치골과 그 반대편 허리아래편이 아프던데, 이제 서서히 준비하는 거로구나 싶으니 빨리 이런저런 출산 준비를 마무리해야겠다 싶었다.

다음 주말 크리스마스엔 시부모님이 오셔서 우리 가구 움직이고 하는 거 도와주시겠단다. 난 이제 무거운 거 들면 조산할 수 있어서 안된다며. 칠순이 넘으신 시아버지가 괜히 힘쓰시다가 아파지시는 거 아닌가 걱정이 되더라. 차라리 옌스 친구를 부르는게 낫지 않나 싶기도 한데, 도와주신다니까 우선 알겠다고 말씀은 드렸다.

배가 급격히 나오고 있다. 물론 이틀간 연이은 크리스마스 디너에 변비가 겹쳐 배가 더 나온 것도 있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도 이미 배가 좀 급격히 나왔었다. 11월 하순 이후로 체중은 더이상 안늘고 있는 것 같다. 거의 한달 정도 되었는데. 아무래도 조금만 많이 먹어도 배가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냥 임신 전과 다를 것 없이 먹게되는데, 그래서 그런가보다. 그 기간중 애는 1킬로는 늘었을텐데, 내 몸에서 1킬로 정도가 빠진 모양이다.

나와 예정일이 같나, 하루차이인가 하는 지인은 양수가 부족해서 37주에 유도분만이든 뭐든 해서 애를 낳을 거 같다고 한다. 여기에선 딱히 양수를 검사하는 건 아닌데, 촉진을 통해서 자궁 크기와 아기 크기를 판단하니까, 그 두 개가 정상이면 양수도 정상이라고 판단하는 건지 뭔지 모르겠다.

이제 이번주 수요일이면 모유수유 교육이 있다. 그게 끝나면 부부를 대상으로 하는 3주의 부모준비교실이 끝나는데, 사실 안가도 출산하고 수유하면서 배우게 되겠지만, 미리 알아두면 우리가 뭘 아는지 모르는지를 알 수 있게 되서 조금 더 준비하기 수월해지는 것 같다. 또 책에 써있지 않지만 우리가 궁금해하는 병원의 프랙티스에 대해서는 따로 질문을 통해 배울 수 있고, 다른 부모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질의응답을 통해 들으면 우리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고민해 볼 수 있어서도 좋다.

이제 6주도 채 안남았는데, 크리스마스 명절에, 프로젝트 제출 및 시험도 있고 하니 정신없이 지내다가 덜렁 애를 낳을 것 같다. 시간이 어찌나 쏜살같이 흘러가는지. 오늘 병원에서 내 진료차례를 기다리며 여러 꼬마 아기들을 많이 봤는데, 저게 내 미래구나 싶어 새삼 두근거렸다. 흠흠…

부도 난 와인바

결혼식 선물로 받은 상품권 중 와인바 상품권이 있었다. 상품권은 빨리빨리 써야된다는 것을 알게된 오늘. 몇 달 전만 해도 잘 운영하고 있는, 품평이 좋은 와인바였는데. 이 상품권을 선물로 준 친구를 초대해 와인바에 가려고 주소와 상호 확인하려고 방금 인터넷을 뒤지니 부도가 났단다. 뭔지는 몰라도 수지타산이 안맞게 했던 모양이다. 좋은 와인을 과하게 저렴한 가격에 냈든 어떻게 했든간에 부도가 났다니 안타깝다. 미슐랭 별점을 받은 식당 상품권이 있는데, 이건 하나 태어나기전에 얼른 가야겠다. 무슨 이유든 문 닫으면 못쓰니까. 흠흠흠…

다음주엔 그냥 좋은 와인바 가서 마시는 것으로… Ved Stranden 10으로 결정. 임신한 내가 술을 마시면 한국에선 난리가 나겠으나, 일주일에 와인 한잔은 괜찮다는 덴마크 보건당국의 임산부 건강수칙에 따라 옌스의 보수주의를 더해 나는 샴페인 한 잔 시켜 옌스가 반을 마시는 것으로 했다. Ved Stranden 10는 웬만해서는 실패하지 않는 셀렉션과 좋은 분위기, 유쾌한 서비스 등으로 좋아하는 곳이다. 위치도 Holmens Kanal 옆으로 Nørreport 역에서 걸어가면 되서 편하다. Nørrebro에 있는 Vinhanen이라는 곳을 더 좋아하지만 거긴 우리가 만나기로 한 월요일에 문을 안연다. 늦게까지 여는 곳이라 주 2회 휴무를 하는 듯. Ved Stranden 10는 일요일 빼고는 다 여는데, 10시까지만 문을 연다. 바가 주 목적이라기보다는 바와 와인샵 기능이 동시에 중요해서 그런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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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hanen에서. 부활절 직전에 친구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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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d Stranden에서 친구들과의 모임. 이때는 입덧으로 주스만 들이켰는데… 사실 입덧이라 하기에도 애매할 정도로 약하던 것이 이 뒤로 며칠 지나 심각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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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바로 Ved Stranden 10. 무슨 패션 촬영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와인바와 바는 거의 다 이 친구들이랑만 갔었구나.

옌스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인 밥 딜런이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또 오는 모양이다. 어제 자기전 침대에 누워 신문을 보다가 광고를 발견했다. 문화면을 꼼꼼히 챙겨보는 건 그래서이려나.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들 안놓치려고. 4월 초에 오는 일정이다. 내일 회사에 가 있는 중 예매가 시작된다며 좋은 자리를 예매하고 싶은 그가 시무룩해졌다. 그러다가, “너 내일 학교 안가지?” 라며 반색을 한다. 두 장 예매할 거 맞냐고 물어봤는데, 물어보나마나다. 당연히 혼자 가는 건 싫으니 친구를 데리고 가겠지. 시부모님을 불러 애를 맡기고 가야하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가서 조느니 (꼭 공연 전 마시는 와인 한잔 때문에 난 어떤 공연을 가도 존다. 지난번엔 엄청 시끄러운 락 공연 가서도 졸았다.) 옌스가 함께 열광할 친구와 가서 신나게 즐기고 오는게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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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바비! 웰컴 투 덴마크!

이 공연은 와인바처럼 부도가 안나겠지. 아니, 혹여나 공연 기획에 뭔가 차질이 생겨도 돈은 돌려줄테니. 쩝. 와인바 부도는 매우매우 아쉽지만 (따라서 선물이 공중분해…) 친구를 만난다는 것과 맛난 샴페인 반 잔 마실 생각으로 아쉬움을 달래며 밤이나 삶아먹어야겠다. 금요일엔 대학원 친구들 두커플 불러서 한국메뉴로 크리스마스 디너를 하기로 했는데 그걸 생각하며 남은 며칠 잘 보내봐야겠다. 흠흠… 뭘 먹여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나려나…

임신 전엔 몰랐던 임신에 관한 것

임신 전엔 임신에 대해 참 잘 몰랐다. 출산하고 나서는 또 출산에 대해 참 잘 몰랐다는 것을 또 배우겠지. 임신에 대해 나도 많이 물어보지 않았고, 물어보지도 않는데 굳이 이야기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일찍 애를 가진 친구들은 뭐 다 그렇게 낳는거지 하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했고.

결론적으로 말하면 불편한 점이 있긴 하지만 잘 관리하고 운도 따라주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고, 불편할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또 예상하지 못했던 점에서 불편하기도 하다.

대부분은 이래저래 들어서 알고 있던 어려움들인데, 아래 두가지는 몰랐던 일이다.

  •  배가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을 종종 받는다.

복근, 피부 이렇게 안밖으로 따로 또 같이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자궁이 커지면서 임신 초기에 아랫배에 콕콕 또는 쿡쿡 찌르는 느낌이 난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피부가 찢어질 것 같다는 이야기는 별로 못들어봤다. 너무 당연해서 이야기를 안해줬나보다. 1년 새 10킬로 찌거나 빠진 경험이 다수 있어 그거와 크게 다르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그 안에 묵직한게 들은 채로 배에 집중해서 체중이 증가할 경우 다를 거라는 것을 몰랐다. 살에 한줄 튼 살이 생겼는데, 실제 이렇게 찢어지는 느낌을 받는 거겠지.

  • 치질이 생긴다.

변비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치질 이야기는 잘 못들었고, 변비 없이도 치질이 생길 수 있다는 건 몰랐다. 치질은 변비나 화장실에 오래 앉아있는 습관때문에 생기는 것인 줄 알았는데, 임신으로 증가한 복압으로 생길 수도 있었다. 애 낳고 대부분은 좋아진다는 말에 기대하고 있다. 좌욕을 하기엔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건 임신 중 아이에게 좋지 않다해서 패스하고…

소위 후기에 많이 발생한다고 들었던 치골통이나 기타 문제들은  중기에 오히려 미리 겪고, 대부분은 여러가지 대처법을 통해 극복했는데, 저 위의 문제들은 어떻게 해결이 안되고 있다. 막판까지 계속 저럴 듯. 7주 동안 또 무슨 일들이 있을 지 모르겠지만, 이젠 정말 막바지다.

옌스가 오늘 아침, 처음으로 하나를 만나는 순간을 꿈으로 꿨다는데, 눈을 잘 못떠서 애써 눈을 뜨려고 용을 쓰는 표정을 보았다고 한다. 이젠 실감이 정말 나나보다. 이번 주 토요일이면 하나 침대도 들어오고 이것저것 수납용품 등이 배송되는데, 그거 정리하면 진짜 실감날 듯. 식탁도 거실로 나오고… 집에도 대변화가 예상된다. (미니멀한 집은 안녕)

이웃집과의 소소한 기싸움

우리 아랫집의 맞은편에는 어린 아이가 둘인 싱글맘이 산다. 삶에 항상 찌든 듯한 표정을 보면 다소 안타깝기도 해서 가만히 있었지만, 거의 이사온 지 1년이 다되가는 지금까지 여러모로 참은 것들이 쌓여서 작은 대응을 시작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애를 자꾸만 공용 복도로 내보내고 자기네 집 문은 닫아 잠근다. (여기는 닫으면 잠기는 구조) 둘째 애가 이제 만 세살 조금 안된 것 같은데 복도에서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곤 한다. 한두살 차이나 보이는 오빠가 조용히 하라고 하는데, 그냥 애가 소리 지르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처음엔 우는 소리인가 했더니 신나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우리 라인에 이 집만 이런 애가 있었던 게 아닌데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어째야 할 지 잘 모르겠더라. 영국 친구들은 애랑 엄마를 같이 마주치면 “네가 그 목소리가 큰 애구나!” 또는 “여기가 너네 집 안방인 줄 몰랐구나!”라고 살짝 비꽈주라는데, 애만 밖에 내어두니 그럴 기회가 잘 없었다.

한달 정도 전부터는 더이상 놔둘 수가 없었다. 출근하고 나가버리는 다른 집 사람들은 괜찮다쳐도 학교 안가고 집에서 공부하는 날들이 있는 나에겐 오전 9시~10시 경에 신나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는 아이를 더이상 참기에 인내심이 남아있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는 아이네 집 앞으로 내려가 여기는 너네 집이 아니라 공용공간이고 소리를 질러서는 안된다고 차분히 타일렀다.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왜?”를 반복하는 아이에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자 집 안에서 애 엄마가 불쑥 나오면서 애를 집 안으로 들이는 일이 몇 번 있었다. 애를 집안에서 소리지르게 놔둘 인내심은 부족했던 엄마지만, 남에게 애가 잔소리 듣는 일은 싫었던 모양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애를 복도에 풀어두는 일은 눈에 띄게 줄었고, 어디 나가기 전에 잠깐 애 먼저 나가게 해서 소리지르는 경우에만 국한되는 것 같았다. 이 이야기를 옌스에게 하니, 사람들이 애들을 갈 수록 버릇없게 키우면서도 남들이 자기 애에게 한소리 하는 건 다들 싫어하는 것 같다고 한다. 하나가 나중에 어디 가서 버릇없이 행동해서 남에게 피해를 준 경우, 상식적인 선에서 남이 타이르는 것에 대해선 받아들일 거라면서 이 부분을 잘 못하는 부모가 늘어나는 게 아쉽다고.

두번째는 우리 아파트 라인의 출입구앞에 자전거와 유모차를 항상 두는 것이었다. 아파트 복도가 넓지 않고 소방안전 등의 문제가 있어서 복도와 출입구 앞에 물건을 적재하지 못하도록 되어있다. 처음엔 한두 번이었는데, 누가 딱히 제제를 하지 않으니 6~7개월 정도 전부터는 항상 그곳에 두기 시작했다. 가을이 지나서는 쓰지도 않으면서 거기에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자전거와 유모차를 주차해 두었다. 먼지도 쌓이고 그 안에 빈 병 같은 것도 놓이기 시작했다. 공간이 작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에서 유모차를 집으로 올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은 자전거와 유모차를 위한 지하 주차공간에 두는데, 우리처럼 새걸 사는 경우는 집에 올리거나 자기 창고 안에 넣어둔다. 거기가 조금 좁아서 주차하고 빼오기가 불편한 경우가 있는데, 자리가 없는 건 또 아니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어디 나갈 때 일찌감치 여유있게 내려가서 챙겨야 한다는 것만 생각해두면 큰 불편은 아니다.

좁은 창고에 불뚝나온 배를 안고 들어가 유모차 주차 공간을 만드려고 먼지 들이키며 정리 및 청소를 하고, 자전거 빼올 때마다 많은 자전거 해치며 씨름을 하더라도 남들과 마찬가지로 아파트의 규칙을 지키려는데, 갈수록 더 규칙을 안지키고 주변을 어지럽히는 이웃이 참 신경이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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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후 창고. 유모차는 이곳에 주차할 수 있겠지.

결국은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메일로 불평을 여러차례 했다. 담당자가 이웃에게 경고서한만 발송하며 6주가 넘도록 해결을 잘 안해주길래, 그녀의 보스를 참조로 넣어, “이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문제를 해결 안해주면 이게 새로운 규칙인 줄로 이해하고 앞으로 자전거니 뭐니 우리도 다 출입구에 주차하겠다”라고 메일을 넣었다. 다음날 새벽 6시 반에 답장이 와서, 바로 주민과 전화해보겠다며 절대 주차하면 안된다고 보스에게서 답장이 왔다. 복도 규정공고문에 붙어 있듯이 이런 건 주차하면 안된다고.

이런 공식적인 불평에 더불어 비공식적이나 적극적인 대처를 추가하기로 했다. 공식적 항의서한을 보낸지 한달이 조금 넘은 시점부터는 이게 과연 이렇게 해결될지 확실하지 않아 뭔가 해봐야겠다 싶었다. 그녀의 유모차와 자전거를 사진으로 찍어 우리 라인 전체사람에게 쓰는 공고문처럼, “자전거, 장난감, 유모차는 공용공간인 출입구 앞에 비치해서는 안되고, 지하실 전용공간에 두어야 한다. 이 사진은 하면 안되는 행동의 대표적 예시다. 모두가 규정을 잘 지켜야 한다.”고 덴마크어로 써붙였다. 규정 공고문 바로 아래에. 안그래도 그걸 붙이겠다고 했던 이야기를 들었던 옌스가 집에 와서 웃더니, 몇 개 문법을 수정해야지 아니면 네가 붙인 거 알겠다고 한다. 그리고 문법은 틀리지 않았어도 너무 딱딱하고 공식적인 것 같은 표현은 수정을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빨간펜으로 수정을 해주었다.

다음 날, 학교가는 길에 보니 그 공고문은 사라져있었다. 옌스가 퇴근한 이후에 사라진 것이니 청소부가 뗀 것은 아니고. 수정한 문서를 붙이고 떼는 숨바꼭질 같은 일이 일주일여간 지속되더니 유모차가 사라졌다. 그리고 공고문이 남아있었다. ‘아하… 유모차 치운 것으로 떳떳해졌군! 그런데 자전거는 안치워도 떳떳한 건가?’ 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공고문에 자전거 부분을 강조해서 “자전거는? (Hvad med cyklen?)” 이라고 손으로 쓴 뒤 다시금 붙였더니 이틀 만에 자전거도 사라졌다. 열흘 정도 씨름을 하고 나니 해결이 되었구나.

진작 얼굴보고 불평했으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안되었을 수도 있는데, 뭔가 이사온 초반부터 안맞는 이웃이었다. 인사를 여러 번 해도 씹고 (지금은 그 집이 먼저 인사하기 전엔 나도 인사 안한다.), 애가 뭘 복도에 엎으면 남들같으면 치우는데 치우지도 않아서 다음주 청소부가 걸레질을 할 때까지 복도를 엄청 끈끈해진 채로 놔두고, 뭐 빌린다고 불쑥불쑥 와서 강한 율란 억양으로 빠르게 이야기하고, 내가 외국인이라 그러니 천천히 이야기해달라고 해도 자기 하고 싶은 말만 두르륵 이야기 하고 가는 등… 발코니에 남이 보이도록 뭘 적재하면 안되도록 되어있는데 (이건 참 신기한 규정이다. 밖에서 보이는 아파트가 지저분해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규정이니.) 이사온 지 일년이 지나도록 그 집 발코니는 안이 거의 안보일 정도로 뭔가 쌓여있다.) 그거 안지킨다고 옌스가 여러번 지적하더라. 아무튼 뭔가 상식이 통하는 집은 아닌 거 같아서 얼굴 보고 불평하며 얼굴 붉히기 싫었다. 그래서 이런 치사한 방식으로 해결을 한 거다.

공고문을 붙이는 순간부터는 더이상 이 일이 짜증나기보다는 누가 이기는지 한번 해보자, 숨바꼭질 같아서 재미있네, 이런 생각이 들어서 오기를 부렸다. 해결되고 나니 십년묵은 체증이 사라지는 기분이다. 다시금 아파트 주변 환경도 깨끗해지고. 애들도 소리를 안지르고. 옌스가 나중에 하나 태어나면 그 집 앞에 가서 소리를 지르게 해봐야 하는게 아니냐 할 정도였는데. 🙂

논문 프로젝트 시작

출산 및 육아휴직때문에 논문의 공식적 시작은 2018년 2월부터지만 교수의 너그러운 배려 덕분으로 Contract sign 없이 미리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 첫 미팅은 잘 끝났다. 이렇게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논문을 쓸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의외로 주제 뽑는 문제가 스르륵 풀려버려서 이제는 데이터 수집하고 준비해서 쓰기 시작하면 된다. 덴마크어로 된 자료 수집도 필수불가결한 거라, 교수가 덴마크어 어느 정도 하는지 물어봤는데, 사전 써가며 신문 읽을 정도 된다고 하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한다. 정부 보고서가 덴마크어로만 된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

논문 키워드는 헤도닉 모델, 홍수이다. 계량경제학, GIS, 헤도닉 모델을 열심히 파게 될 것 같은데, 하나가 얌전한 아기로 잠을 많이 자주면 조금 더 미리 많은 것을 할 수 있어 홍수피해방지책에 대한 CBA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하고 있다. 그러나 우선 그 건 번외로 하고 논문은 범위를 조금 더 줄여서 컴팩트하게 가려고 한다.

쿨한 교수와 함께 하게 된 것도 좋은데, 교수가 이 주제대로 나오면 정말 cool할 것 같다고, 덴마크에 없는 자료를 만드는 것이니 여러 지방정부에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서 더 좋았다.

논문이란게 이렇고 시작하다가도 여러가지 장벽을 만나 꼬여 방향을 틀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지만, 사람들이 한결같이 우선 쓰기 시작해야 한단다. 그래야 고칠 게 있지, 쓴 게 없으면 고칠 수도 없단다. 맞는 말이다. 지난 번 소논문 쓸 때도 쓴 게 없으면 지도교수도 도와줄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것을 강조했고, 실제 그를 피부로 느꼈다.

아직 하나가 나올 때까진 시간이 있으니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야겠다. 읽을 거리들도 읽어두고, 뇌도 계속 깨워두고.

교수가 카페에 데려가 옆에 재워두고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라떼 아기”이면 미리 일하기 수월할 것이고, 그게 아니라 끊임없이 소리지르고 우는 아이면 애를 보육원에 보낼 때까지 일하는 건 거의 포기해야 할 것이란다. 그래서 한국 갔다와서 한 9~10월때쯤 애를 보육원에 보내려한다 했더니, 자기네도 9개월 때 보냈다며 그때 보내기 괜찮은 때 같단다. 애가 스스로 기어다니기 시작하면서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하는 타이밍이라 그런대로 보낼만 하다고. 그전에 보내면 그런 소통 자체가 어려우니 혼자 거의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좀 많이 안쓰럽다고. 그렇게 애를 보내기 시작하면 좀 본격적으로 일 할 수 있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도 해준다. 중간에 언제고 연락하고 찾아오란 말을 더하며.

마음이 편해졌다. 집에 오는 길에 우체국에 들러 연하장도 부치고 나니 뭔가 한 해를 거의 마무리한 느낌도 들고. 하나가 좋은 타이밍에 와줘서 삶이 조금 더 예측가능한 방향으로 움직이는구나 싶어 고맙기도 하고 좋다. 비가 와 날은 참 우중충하지만, 바나나와 아몬드, 고지베리를 넣고 따끈하게 오트밀을 끓여먹었더니 마음도 푸근하다. 조금 있다가 오후에 옌스와 함께 산모교실도 다녀오고 하루를 잘 마무리해야겠다.

겨울아침 잡생각

아침 8시. 해는 아직 뜨지 않았고, 새벽녘의 어스름으로 하늘은 잿빛이 되었다. 따뜻한 글뢱 한잔을 곁들이며 K-pop을 듣고 있다. (글뢱 – Gløgg, 독어 Glühwein (글뤼바인)의 glüh와 같은 어원의 단어 – 은 와인에 계피, 팔각, 카다몸, 오렌지 등을 넣어 뭉근히 끓인 것으로, 프랑스에서는 Vin Chaud(뱅 쇼)라고 한다. 가족을 위한 글뢱이라고 와인대신에 사과즙을 넣어 만든 걸 팔길래 사왔다.) Spotify가 장르중의 하나로 K-pop을 따로 구분해놨길래 그 중 그나마 아침에 들어볼 만한 것으로 OST를 골랐는데, 다는 아니라도 들을 만한 것들이 있다. 굳이 아침에 딱히 어울리는 믹스는 아니다. 그냥 다른 거 들어야겠다. 한국분위기 내볼까 했는데 영 실패.

얼마전에 옌스가 왜 K-pop을 안듣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내가 좋아했던 한국가수가 많지 않은데, 전람회, 이적, 토이, 박정현 등 발라드 가수 일부를 좋아했던 게 전부였던 것 같다. 학창시절엔 그나마 길거리 음반가게에서 음악도 많이 틀어줘서 관심가는 노래가 생기면 듣기도 하고, 애들이 들려준 거 좋으면 찾아 듣기도 하고 했는데, 이제는 그럴 사람도 없어서 더 그런 것 같다. 서양 음악이라고 해도 내가 좋아하는 취향이라는 게 이미 거의 정해져서 그런지 자꾸 듣다보니 Spotify의 discover가 내 취향을 정말 잘 파악할 정도가 되었다. 놀라운 알고리즘.

어제 저녁에 피곤함이 심해서 다리가 아플지경이었다. 딱히 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오전수업하고 자켓 하나 사느라 쇼핑한 게 전부인데. 10시 반에 침대에 누워 딴짓을 하다가 11시에 불을 껐고, 12시 전에 옌스에게 잘 자라는 말을 한 것을 마지막으로 뻗어버렸다. 아침엔 또 어찌나 일어나기 힘든지… 깊게 못자고 잘 깨는 나답지 않았다. 특히 태동이 심해져 하나가 뱃속에서 온갖 아크로배틱한 동작들을 해댈 때면 한참 다시 잠에 들지 못하곤 했는데. 중간에 불편해서 한 번 깨고는 그냥 쭉 잤다. 물론 꿈자리는 사나웠지만. 남들이 말하던 임신 후기의 피곤함이 9개월차 들면서 느껴지는 것인가보다.

어제는 겨울파카를 사왔다. 안사고 버티려다가 안에 입는 옷을 조금만 두껍게 입어도 지퍼를 잠글 수 없음에 짜증이 밀려와 정신건강에 좋지 않겠다 싶어 벼르던 옷을 샀다. 앞판에 자크가 양쪽으로 달려있는 긴 패치가 있어 출산 후엔 이 패치를 떼어내 슬림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이다. 사실 지금 겨울이라고 해도 유래없이 따뜻하고 비도 안오는 기이한 날씨를 보이고 있지만, 지구 온난화로 인해 북풍 한파가 몰려올 경우엔 확 추워지기 때문에 그런 날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주엔 딱 한번 영하 5도까지 내려간다하는데, 그것도 하루 이틀에 불과하고… 백년에 한번 오는 추위가 온다 해서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실망마저 든다. 겨울은 추워야 하는 법. 그래야 겨울에 마땅히 죽어야 할 양의 병충해의 근원이 죽어 다음해의 나무와 작물이 잘 클 수 있는데.

하늘이 흐려서 언제 해 뜨는지도 모르게 해가 뜨려나보다. 하늘이 밝은 회색으로 변했다. 곧 해가 뜨려나보니 나도 채비를 하고 집을 나서야겠다. 오늘은 논문 지도교수와의 첫 면담이 예정되어 있는 날. 기대가 된다. 두근두근. 오늘 결혼하는 친구도 있는데 나때와 마찬가지로 비가 오려나. 행복하게 잘 살 모양이다. 출산교육도 저녁에 예정되어 있으니 뭔가 이벤트가 많은 날이네. 좋은 하루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