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남은 과목의 성적도 확인했다. 12점. A를 받았다고 이렇게 기뻐한 적은 학부때에도 없었는데. 학점 인플레가 없는 곳이라 A의 의미가 달라서 그런 것인가? 그런 게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보다는 내가 공부에 대한 절박함이 그전과 달라졌기 때문이라 그런 것 같다.
학부때 경제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것은, 고등학교 때 있었던 외환위기와 그에 따른 IMF 구제금융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외환위기를 야기한 최전방에 있었던 종금업계에서 근무하셨기에 많은 일들이 불거지기 전 미리부터 불길함의 전조를 건너 들을 수 있었고, 왜 그런 일이 생긴 것인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등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고등학교 공부에는 별로 필요도 없었던 매일경제신문을 매일 읽었고, 경제기사 읽는법이라는 책도 사서 읽었다.
재미있긴 했는데, 막상 대학교에 가서 공부를 함에 있어서는 절박함이 없었던 것 같다. 대학교 가면 뭔가 삶도 더 많이 즐기면서 공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공부할 게 생각보다 많았고, 앞으로의 취직도 걱정해야 했기에 뭐하나 게을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해야되서 했고 배움에 대한 즐거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부에 대한 갈증 자체는 없었다.
학부초반때 경제학 공부가 재미있긴 했는데, 그 재미가 학년이 올라갈 수록 덜해졌다. 공부의 방향성 설정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남들 듣는 수업 찾아 듣다보니 왜 그 공부를 하는지 잘 모르는 채로 부유했다. 이것을 갖고 앞으로 뭘 할 수 있을지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경영학 이중전공을 했고, 실생활에 보다 적용하기 쉬운 경영학에 보다 큰 관심을 쏟으며 공부하고, 졸업했다.
회사생활을 한지 12년만에 모든 것을 관두고 다시 공부의 삶으로 돌아왔는데, 많은 것이 달라져있었다. 회사다니는 중간에 한국에서 석사를 한번 했지만, 졸업시험과 경제학에세이라는 것으로 논문을 대체한 나는 뭔가 가라로 석사를 한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학부 생활을 다시 한번 한 것 같은 느낌. 회사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한 것이라 한학기 한학기 떼우기 바빴던 시기였다. 다만 그 때 차이가 있다면 그간 나를 괴롭혔던 경제수학과 통계학과 한층 가까워졌던 시기였다는 것과, 내가 모르는 것을 이해하고 그 모르는 것을 질문으로 푸는 방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 부끄럽지만은 않다는 걸 회사생활을 통해 배우기도 했고, 내가 모르면 남들도 모를 수 있지 라는 생각으로 질문할 수 있는 배짱도 생겼다. 그때의 그 경험이 이번 석사과정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유학경험이 없었고, 영어로 하는 세미나에 앉아있으면 장시간 앉아서 집중해 듣는다는게 피곤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수업을 영어로 하고, 읽고, 시험을 보는 것을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을 꽤나 했다. 실제로 계량경제학은 그 컨셉 자체가 어려웠고, 내가 약했던 과목이었기에 더욱 어려웠다. 그래도 몇주가 지나면서 조금씩 수월해졌고, 자신감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기출문제를 입수해서 같이 모여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제한된 시간 자원속에 나는 혼자 개념 공부에 집중하기로 했다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C. 예상치 못했던 황망한 결과였기에 받고 우울해했다. 여기는 성적 분포표가 인터넷으로 공개되는데, 그게 평균 이상임에 놀랐으며, 그걸 알고도 C라는 글자에 우울해하는 나에게도 놀랐다. 옌스는 평균 이상을 받고 우울해하는 것은 자만이라고 이야기하기에 마음을 애써 추스르긴 했지만 말이다.
이미 지난번 블록때도 최선을 다해 공부했기에 딱히 이번 블록이라고 더 열심히 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는 두과목 모두 A를 받았다. 계량경제학에서 받은 C에 대한 설움에 보상이라도 받은 듯한 기분이다.
오래간 공부를 하지 않아서 그런지 새로운 지식이 머리로 들어오는 과정이 놀랍게도 재미있다. 물론 딴짓을 하면서 게으름을 피우는 날도 있지만, 내가 워낙에 한결같이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간의 삶의 시간에서(고등학교 이후…) 지금이 가장 자발적이면서도 꾸준히 공부의 길을 걷고 있는 때라는 것을 자신한다.
학부를 졸업한지 얼마 안되는 어린 학생들과 경쟁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는데, 같이 자원경제학 시험을 준비하는 도중 자신들과 나는 공부의 동기부여가 다르다면서, 자기들은 그냥 계속 하던 것을 하는 거라 지겨울 때도 있다는 동기들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마음을 달리 먹었다.
첫학기는 결과적으로 잘 마무리되었다. 그 과정도 즐겼고, 좋은 동기들도 얻었으며, 결과도 좋았다. 전체 석사과정 중 다음 학기에 가장 중요한 수업들이 진행된다. 1학기에 배운 내용을 갖고 실제 학계를 나가면 쓰게 될 내용들을 공부하게 되기에 가장 큰 도전이 될 과목들이 기다리고 있다.
어쩌다 보니 삶에서 공부 또는 배움이라는 것에서 멀어지지 않는 길을 계속 걷게 되었다. 학부를 졸업하면서 석사는 안할거라고, 경제학은 더이상 안할거라고 했던 내가 석사를 두번이나 하게 될 줄은, 또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박사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될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나. 그래서 절대…라는 말은 하지 말라고 하는가 보다.
한주간의 방학이 이제 거의 끝나간다. 다음주면 새학기가 또 시작이 되는구나. 긴장의 끈을 놓칠 새 없이 다시 달려야 한다는게 부담이 되긴 하지만, 설렘 또한 나를 반긴다. 다시 한번 잘 달려봐야지.
So proud of you!!!
Thank yo 언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