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간히 남자애를 가진 한국엄마들에게 듣는 이야기다. 내가 “여자애”답지 않아서, “여성”스럽지 않아서 느꼈던 한국사회속 좌절을 상기시키는 말이라 그 말들이 귀에 꽂혔다. 거슬렸다가 정답인 것 같다. 그게 내 좌절을 다시금 곱씹게 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그때의 프레임을 떠올리게 했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용감하고 과감했으며, 씩씩했다. 활발하고 활동적이었으며, 무리를 주도하고 이야기의 중심에 서는 것을 좋아했다. 어려서는 “걔는 좀 남자같잖아”라는 게 나를 묘사하는 말이었으며, 그게 내 성별의 틀 안에서 벗어나는 이상함인 것처럼 인식되는 것 같아서 상처를 받았다. 성인이 되어서는 “좀 여성스러워져야 남자들이 덜 부담스러워하지. 너무 자신감 넘치고 씩씩하고 그러면 남자들이 부담스러워해.”라는 말로 내가 뭔가 잘못된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지금은 그게 아닌 것을 알고, 그냥 나는 나인 것을 잘 알고 있다. 아이에게도 여자는 어때야 한다거나 하는 말은 하지 않는다. 일부러 생각하고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과거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정리하면서 인간의 개성이 얼마나 넓은 스펙트럼을 보이는가, 또한 이런 프레이밍이 스펙트럼의 외곽에 있는 사람에게 스스로에 대한 의문을 던져줄 수 있다는 생각이 확고해져 자동적으로 그리 행동하게 되는 것 같다.
어떤 원인을 개인에게 돌리지 않고 그 개인이 속한 그룹에게 원인을 돌리는 일은 편견의 근간이 될 수 있고 책임을 회피하게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좋은 특성이 개인에게 기인하지 않고 그룹에게 속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좋은 성향이 특정 그룹에 속한다는 편견을 조장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나쁜 특성이 개인이 아니라 특정 그룹에 속한다고 생각한다면, 본인의 책임보다는 그룹의 특성이니 이해해야한다는 식의 책임감 회피성을 조장할 수 있다. 과장해 표현한 것이지만 기본적인 메커니즘은 그렇다.
그 이야기를 듣는 그 타이밍에 그 이야기를 딱히 하지는 않았다. 이게 어떤 의식적인 행동은 아니고 무의식에서 나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를 통해 내가 말하는 것에 들어있는 다른 방면의 프레이밍, 편견 등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얻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빠르게 정보를 처리하며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 끊임없이 구분하고 구분된 카테고리에 이름을 붙인다. 그래야 다음의 비슷한 상황에 빠르게 이를 적용하고 대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게 개개인의 머리속에 있는 프레이밍이다. 따라서 이 자체는 나쁜게 아니다. 다만 이에 대해서 스스로 사유하고 정보를 업데이트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의 능력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남자라서 그래”는 너무 단편적인 프레이밍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