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초음파 검사 – It’s a girl!

두번째 초음파 검사가 예정되었던 오늘. 수업이 12시에 끝나는데 초음파는 1시 15분에 잡혀있었다. 수업이 5분 늦게 끝나서 열차 타고 버스 갈아타면 오히려 빙 돌아가 늦을 거 같은 위기감에 자전거로 가기로 했다. 끊임없이 미세한 오르막길을 꾸준히 올라가다보니 40분 걸리는 길이 엄청 힘들더라.

만 21주를 딱 채운 그저께부터 좀 늦게나마 태동도 느끼기 시작했기에 태아가 잘 크고 있을거라는 믿음은 있었지만, 그래도 2차 발달검사를 통해 혹시 있을지 모르는 여러가지 신체적 문제들을 확인할 수 있다니 긴장이 조금 되었다. 그리고 성별도 확인할 수 있을거라는 마음에.

옌스와 1시 5분에 진단실 앞에서 만나 기다렸는데, 의외로 오래 걸려서 1시 35분이 되어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반차를 냈지만, 2시와 3시에 회의가 있어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던 옌스는, 3시 회의는 놓치면 안된다고 초조해하면서 왜이렇게 오래 기다려야 하냐며 조바심을 냈다. 이번에도 우리 이름 안부르면 물어보자고 했는데, 우습게도 바로 우리 차례였다.

소노그래퍼와 악수를 하고 방으로 들어가 무엇을 검사할 지 등을 듣고 의자위에 앉았다. 바르게 앉아있는 아기. 태반이 자궁 앞쪽벽에 붙어있어 이게 쿠션역할을 하는 탓에 태동을 남보다 늦게 느낄 거고 약하게 느낄거라 알려줬다. 그러나 자궁경부로부터는 충분히 떨어져있어 안전한 곳에 착상이 되어있다고 한다. 그래서 남들보다 늦게 느꼈구나 싶었다.

40분에 걸친 초음파 검사를 통해 여기저기 샅샅이 검사하고 보여주었다. 중간에 아기가 자세를 바꿔줘야 하는데 잘 안바꿔줘서 좀 걸어다니고 배를 흔들어보라더라. 초음파 젤이 바지에 뭍지말라고 배에 수건을 하나 껴둔 상태로 걷고, 한발로 뛰기도 하고, 허리를 숙였다 폈다가, 배를 양옆으로 흔드는 등의 생 쇼를 한 뒤에 다시 자리에 가 앉았더니 애가 자세를 바꿨다. 애가 아직까지는 말을 잘 듣는다는 소노그래퍼 말이 웃겼다. 앞으로 내 말 안들을 날이 얼마나 많을지를 예고하는 징표같다고나 할까.

눈, 코, 입 위치, 척추뼈 개수, 심장 움직임과 생김새, 뇌 발달, 혈류, 내장장기, 뼈 발달상황, 등등 다양한 것을 보더니 모든 것이 정상이고, 체중은 398그램이니 임신 주차에 맞게 찰 크고 있다고 한다. (어떻게 무게를 아냐니까, 두개골과 허벅지 뼈, 기타 신체 둘레 등을 입력하면 체중이 계산되어 나온단다. 회귀분석으로 모델링을 하는 듯) 임신 초기에 빠졌던 4킬로가 이제야 거의 다 회복이 되었는데, 필요한 영양분 다 엄마 몸에서 빼다가 잘 크고 있으니 앞으로 잘 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임신 6~14주차의 8주간만 아니면 임신으로 크게 고생한 것도 없고 아주 잘 지내고 있기에 엄마 고생시키지 않고 쑥쑥 잘 커주는 아이가 고맙게 느껴졌다.

머리 생긴거 보는데, 옌스를 닮아서 그러는지 머리가 앞뒤로 확연히 긴 짱구머리다. 난 전형적 한국인 얼굴이라 앞뒤가 짧은데. 코도 오똑한 것 같고. 이 점은 성공한 듯.

성별을 보려는데 다리로 얼마나 가리는지. 잘 못느끼던 태동을 팍팍 느끼게 해주며 초음파 검사에 항의하던 아기가 결국 자신의 private한 곳을 보여주었는데, 보여준 결과는 딸. 소노그래퍼가 딸이 shy한 것 같다길래, 아무래도 좀 privacy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고 답을 해주었다. 하하하. 난 사실 뭐래도 상관없어했기에 딱히 더 기쁘거나 실망할 일 자체가 없어서 덤덤했는데, 옌스는 아들을 조금 더 원한다고 했기에 어땠을런지. “딸이라도 축구는 같이 할 수 있어.”라고 이야기해주니 소노그래퍼가 웃는다. 그래도 옌스가 미니 해인이 나올 거라며 기뻐해주었다.

정상적이라 3차 초음파는 안봐도 된다고 해서 출산 전까지 아기를 만날 일은 더이상은 없다. 좀 아쉽기까지 하네. 고령출산이라 3차도 보나 하며 기대하고 있었는데. 흠흠.

옌스는 시부모님께 안부인사를 전하고, 나는 집에 와서 페이스타임으로 집에 연락을 했는데, 모두 기뻐해주셨다. 이제 이름 정하기 작업이 한결 수월해지겠다. 남자 이름은 리스트에서 지우고 여자 이름을 정해봐야지.

얼굴은 앞으로 19주 뒤에 보자, 아기야! 그 전엔 이름도 지어줄게. 😉

이제 절반이다.

어제부로 만 20주였으니, 이제 절반이다. 오늘 아침 잰 체중으로 보면 임신시점보다는 여전히 1kg이 빠진 상태지만, 임신 아주 초기에 입덧으로 몸무게가 준 경우는 그냥 그걸 임신 시점 몸무게로 봐도 무방하다고 하니, 3kg 찐 걸로 보면 되겠다.

배가 눈에 띄게 불러오고 있다. 헐렁한 옷을 입는 경우가 아니면 임산부인 것을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불러오는 배와 함께 뭘 먹어도 쉬이 포만감이 느껴져서 충분히 먹기가 힘들다. 입덧만 끝나면 식욕이 돌아올 거라 하더니만, 입덧이 끝난지 한달 반이 지났지만 폭풍식욕 같은 건 경험하기 어렵다.

그나마 이 체중을 늘린 것도 어거지로 열심히 먹어대서인 것을 생각하면 체중이 많이 늘어 고민하는 임산부는 어떻게 이 배부른 느낌을 견뎌내고 먹었을까가 난 되려 궁금하다. 아니면 이런 배부른 느낌도 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건강한 식단을 유지하며 체중을 늘리는 법을 고민하자 식단에 관심이 많은 여자 친구들로부터 이러저러한 조언을 얻었다. 아보카도, 렌틸콩, 견과류, 크림치즈 등을 많이 먹으라는 것. 안그래도 아침으로 자주 토스트에 아몬드 크림치즈를 듬뿍 얹어 먹으며 우유를 큰 걸로 한 잔 가득, 사과와 자두 등을 2~3개 먹고 있다. 뭔가 부엌에서 열심히 조리해야 하는 게 한껏 귀찮아진 요즘, 학교 구내식당에서 콩류 등도 열심히 먹고 있는데, 아보카도는 추가할 좋은 아이디어이다.

사다두고 잘 먹지 않고 있는 김치를 빨리 먹어 없애고자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먹었다. 정말 간만에 대 성공. 제일 쉬울 것 같은 김치볶음밥을 맛있게 만드는 게 어렵다니. 이상하게 고슬고슬한 볶음밥은 어떤 것이든 종류를 막론하고 참 어렵더라. 아무튼, 그걸 먹어서 그런가. 벌써 6시가 다 되어가고 있는데, 배가 아직도 빵빵하다. 저녁 식욕은 제로. 내 현재의 배 크기와는 상관없이, 그냥 느껴지는 기분으로는 배가 앞으로 터져버릴 것 같다. 내일부터 다음주 일요일 저녁까지 꽉 채워 1주일을 출장으로 집을 비우는 옌스는 집에서 밥하기 싫으면 나가서 한식당에 가더라도 저녁을 같이 하자고 하는데… 이 꽉 찬 배로…

아무래도 오늘 운동을 너무 안해서 그런 모양이다. 통학을 위해 매일 20km정도 자전거를 타는데 주말엔 아무래도 운동량이 줄어드니까. 출산 직전까지 다닐 학교가 일종의 내 임신 기간 중 트레이너인 셈이다.

오랫동안 쉬었던 발레는 지난 주부터 다시 시작했다. 오랫동안 안한 것도 있고, 너무 뛰는 센터워크는 좀 무리일 것도 같아 초급반으로 신청을 했다. 발레 선생님께 임신 사실을 알리고 났더니, 발레는 출산 전날까지도 해도 되는 운동인 거 아냐며, 오히려 골반을 열어줘서 아이를 쉽게 출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운동이니 끝까지 열심히 나오라고 한다. 나도 그 사실을 듣고 간거지만, 그렇게까지 이야기 하니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좀 이렇게 움직여줘야 소화가 되어 먹을 생각도 들고 몸무게도 조금이나마 더 늘릴 수 있겠지. 아흐레 있으면 볼 2차 초음파가 엄청 기다려진다. 애는 잘 자라고 있는건지…

임신하면 괜히 섭섭하다더니 이런건가?

입덧이 시작한지도 어느새 일주일 반 조금 더 지나간 것 같다. 그 사이에 2kg이 빠졌으니 입덧이 꽤나 심하긴 한 모양이다. 시험은 다가오는데 먹은게 별로 없고 그나마 먹고 토하니 앉아있을 기운이 별로 없어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침대나 소파에 누워 지내고 있다. 조금 걷고나면 속이 울렁거려서 운동이라고 할 법한 것을 하기에도 어렵고, 혈압도 60:100으로 낮아지니 기력도 떨어지고 아침 활동도 저하된다.

화요일과 금요일에 시험이 하나씩 있는데, 주말 들어 옌스가 보는 주요 모습이 누워있는 것이다보니 걱정이 되었는지, 때로 내가 늘어져있는 모습을 볼 때 나를 좀 푸쉬해달라고 부탁했던 것 때문인지, ‘그래도 시험공부는 조금이라도 해야지. 핸드폰 볼 힘이 있으면 뭐라도 읽을 수 있잖아.’라며 서너번 이야기를 했다. ‘나도 안다고…’라고 답을 하다가 한번 울컥할 일이 있었다. 평소 주말에 함께 하던 커피데이트를 내가 못하게 되니 – 커피는 생각만 해도 속이 쓰려 못마시겠다. – 혼자라도 가겠다고 하며 뭐 필요한 거 없냐고, 그리고 힘든 거 아는데 공부는 조금이라도 해야한다고 하는 거다. 먹고 싶은게 생각나지도 않고 배는 그렇다고 안고픈 것도 아니고, 뭐라도 먹으라는 말은 하나도 도움이 안되는데다가 공부 해야되는 거 아는데 알고도 못하는 내 마음은 아는지 하는 섭섭한 마음에 ‘이런 때 도움 청할 엄마도 없고 내가 그나마 생각할 수 있는 음식은 이곳에서 쉬이 먹을 수도 없는 음식이라 제대로 먹을 수도 없는데, 내가 이미 공부해야하는 거 알고 있다고 했는데도 자꾸 말하면 너무 섭섭해’라고 쏘아붙였다. 그리고는 눈물이 찔끔 나오는데, 서럽기도 하고, 이런 걸로 눈물 흘리는 내가 좀 부끄럽기도 하고.

힘든거 모르는 거 아니라며, ‘예전에 네가 그런 상황엔 꼭 좀 푸쉬를 해달라고 하기도 했고, 시험인 거 뻔히 아는데 계속 누워있으니까 걱정되서 그랬어. 나도 네가 원하는대로 푹 쉬면 좋겠지. 시험만 끝나면 그렇게 할 수 있잖아. 조금이라도 앉아서 하고 다시 쉬더라도 그렇게 하라는 거였어. 서운하게 해서 미안해.’라고 말한다.

마늘을 먹을 수가 없어서 뭐든 한식은 참 만들어먹기 어려운데 사실 해물수제비가 먹고 싶었다. 칼칼하며 시원한. 거기에서 마늘만 뺀. 당연히 해물수제비를 제대로 해먹을 수는 없지만, 집에 멸치라도 있으니 그냥 멸치 감자 수제비라도 해먹어봐야겠다 싶어서 – 면이 손칼국수 면이 아니라 그런가, 칼국수는 이상하게 안 땡긴다. – 커피 마시러 가기전에 고추와 애호박이나 사달라고 해서 애써 끓였다. 마늘을 아주 안넣으니 도저히 맛이 하나도 안나서 아주 아주 조금 넣었는데, 그게 맛을 확 바꿔주더라. 반죽이 질어져서 별로 반죽도 안넣고 감자랑 애호박, 고추를 듬뿍 넣어 만들었는데, 그런대로 먹을 만 해서 좀 먹었다. 먹고나서 그 조금의 마늘때문에 입에 남은 그 특유의 입맛때문에 남은 반나절을 고생했지만, 뭐라도 먹고나니 힘이 나서 앉을 수 있었다.

조금 울어서 그런가, 돌아오는 길에 크래커 등 내가 사다달라는 것을 정확히 찾아주기 위해 페이스타임까지 해가며 수박이니 뭐니 꼼꼼히 챙겨왔다. 아이고 착한 우리 남편. 그리고 애 낳으면 자기도 요리하고 이런 거 좀 더 배워야겠다고, 그래야 내가 요리할 수 없을 때거나 그런 타이밍에 애가 거르는 일 없이 요리할 수 있을거라면서. 이래저래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해 오히려 나보다 많이 생각하고 있구나 싶어서 훌륭하다 싶었다.

이렇게 또 한번의 다툼 아닌 다툼을 했다. 아마 임신하면 그렇게 다들 서럽다고 하던데, 이런 거 이야기하는 모양이다. 엄청 서러운 건 아니고, 평생 가져갈 기억도 아니지만 그래도 뭔지 약간 알 것 같다. 같이 원해서 생긴 아기인데 남편이 대리로 경험해줄 수 없는 힘든 일을 혼자 겪어야하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 아닐런지.

궁금한게 하나 있다면 대부분은 입덧이 아침에 심하다던데, 난 점심 조금 전부터 저녁까지 입덧이 있는 거 같다. 아침엔 꽤나 쌩쌩한데. 지금처럼. 아침에 일어나서 팀원들과 나누기로 했던 논문 요약본도 마무리하고 이렇게 블로그 글까지! 뭐지? 수박 사분의 일쪽과 크래커를 먹었음에도 배가 고프다. 속도 살짝씩 동하기 시작하고.

내 사랑 커피는 땡기지도 않으니 아쉬울 건 없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즐기던 주말 커피 데이트는 그립다. ㅠㅠ

임신, 입덧, 덴마크 생활

요며칠 입덧이 심해서 하루에 1~200 그램씩 빠지는 것 같다. 최소한의 먹거리만을 먹고 버티고 있는데, 먹고 토하는 일이 잦아지니까 먹기도 살짝 겁나고 안먹자니 애한테도 좋지는 않을 거 같아서 최소한 먹는 것으로 버티고 있다. 시험은 코앞으로 다가와있는데, 공부도 요며칠 하나도 안하고 놀고 있다. 다행인건 스트레스도 별로 받는게, ‘아, 임신해서 몸이 안좋아서 시험 못치면 어쩔 수 없지.’ 뭐 이런 근거없는 생각 때문이랄까. 그나마 그간 성적을 잘 받아두어서 한두개 좀 못친다고 해도 크게 문제될 것도 없거니와 하나는 내가 쓴 페이퍼를 근거로 시험보는 것이라 이미 고생해서 낸 것에 대한 평가가 시험의 큰 몫을 좌우하기에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도 있다.

어느덧 임신 7주. 시어머니와 함께 임신 후 처음으로 병원을 다녀왔다. 멀리 Bornholm에 살고 계시지만 내일 새벽같이 시누이와 첫손녀와 함께 셋이서 떠날 2박 3일의 짧은 런던여행을 위해 Holte에 잠깐 와계셨다. 그 전에 병원 갈 때 혼자 가기 그러면 언제고 이야기해달라고 하셨는데, 비행기로 오셔야 하는 시어머니 일부러 오시라 하기 뭣해서 그냥 혼자가려고 했었다. 그러다가, 혹시 말씀은 드려보는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말씀드렸는데 잘 한 일이었다. 마침 와계시기도 했고 기뻐하시며 같이 가주신다 하셨다.

시어머니와 함께 간 것은 잘한 일이다. 남편 CPR번호도 기억이 안났는데, 시어머니가 기억하고 계셨고 (그런게 필요할 줄이야), 남편 가족 병력 등에 대해서도 문진을 했는데 그 또한 시어머니가 답변해주실 수 있었다. 쌍둥이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우리 가족에는 그런 이력이 전혀 없다 했더니, 시어머니가 자기네에는 이력이 있다 하신다.

앞으로의 병원 일정은 12~13주 중 다운증후군 검사 1차, 25, 32주에 있을 초음파 검사 및 기타 아이에 대한 상세 검진이 거의 다 인것 같다. 나머지는 나의 출산을 담당할 산파와 만나서 할 일들이 있고, 출산 교육 등이 있는 모양인데, 그건 산파가 나에게 연락을 준다고 하니 그냥 기다리면 될 일이다. 아, 의사가 덴마크의 모든 병원 기록이 다 전산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임신과 관련된 것만큼은 문자 그대로 Paperwork이 아직도 살아있다면서 노란 봉투에 관련 내 임신 정보를 기록해서 넣어주었다. 앞으로 모든 진료시 항상 지참하라며. 이 아날로그식이라니. 모든 정보가 다 전산으로 날아오다가 갑자기 이런 노란봉투를 받아드니 월급봉투라도 받은 듯한 느낌이다.

다음 병원 일정에도 시어머니가 가주신다고 하니 이번엔 그냥 마음의 부담 없이 부탁하련다. 같이 가주시면 기쁘겠다고 말씀드리니 Bornholm에서 날아오신다고. 아. 이 감사함. 이 먼 덴마크에 내 부모와 떨어져살며 한켠으로나마 기댈 시댁이라는 구석이 있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시누이가 시어머니께 엽산 꼭 챙겨먹으라고 알려주라 했다는데, 시누이도 뭔가 참견하는 듯하게 보일까봐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나보다. 🙂 궁금한 거 있으면 다 물어보라는데 사실 뭘 물어봐야할지 잘 모르겠고, 책이나 각국 정부 보건당국에서 제공하는 홈페이지도 워낙 자세하게 정보를 담고 있으니 아무래도 먼저 연락하게는 잘 안된다. 참 좋은 시누이인데도 괜히 폐끼칠까봐 어려운 건 한국인이라 그런걸까?

병원을 나와 같이 커피한잔 (나는 초코우유 한잔)을 함께 하고 장을 본 뒤 각자 방향으로 향했다. 옌스랑 대화해도 쓰는 어휘가 한정되어 있는데, 병원에서 의사를 보거나 시어머니와 대화를 한다거나 할 땐 평소엔 잘 안쓰던 어휘도 쓰게 되서 좋다. 요즘 학원도 쉬다보니 듣기는 되도 뭔가 말은 퇴화하는 느낌이 조금씩 들고 있었는데, 역시 집중력의 문제인 것 같다. 꼭 써야된다는 생각이 없으니 요즘 다시 덴마크어 비중이 줄어 반반 정도 쓰는 거 같다. 복잡한 건 대충 영어로 이야기하고 일상 대화만 덴마크어로 하는? 집에서도 다시금 덴마크어 비중을 늘려봐야할 것 같다. 곧 방학도 하니 더욱…

뭔가 약간 퇴보하나 하는 불안이 드는 와중 하나 위안이 되는 건, 대학원 덴마크 친구가 자기는 지방 방언도 좀 심하면 못알아 듣는데 내가 하는 말은 다 알아듣겠다면서 나에게 억양이 별로 없다고 해준 것이다. 옌스가 너 발음 좋다 이렇게 이야기해줘도 뭔가 그냥 자기 아내니까 격려해주려 하는 이야기로 들리고 덜 객관적으로 들렸는데, 그렇게 이야기해주니 나의 덴마크어 미래가 전도유망하다는 착각을 더 하게 해줬다고나 할까? 흠흠.

시간이 지나면서 덴마크에 친구도 서서히 늘고, 이제 내 피를 나누는 가족도 곧 생기고 할테니 뭔가 정말 조금씩 뿌리를 내리는 기분이다. 아직도 나에게 내 나라는 한국이지만 이곳도 이제 내 나라가 될 것이니까.

입덧에 제대로 식사 못하는 아내를 위해 생일 아침상으로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을 차려주는 남편도 있고, 병원간다고 멀리서 와주시는 시어머니도 있고, 다 감사하다. 인생의 많은 일들은 그간 걸어온 일과 우연이 만나 얽히면서 생기는 놀라운 기록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을 떠나 일을 해보고 싶다 했던 아주 초등학교 3학년짜리의 꿈은 내 직장 선택에 있어서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그를 통해 이곳에 와있었고, 그간 잡다하게 해왔던 취미와 한국에선 드세다고 들어왔던 나의 적극적 성격은 옌스가 나에게 관심을 갖게한 동력이 되었다. 많은 연애 실패담은 사람을 볼 수 있는 눈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뭔지를 깨닫게 해주었고, 결혼생활은 어때야 한다는 가치관을 심어주게 되었다. 그리하여 만난 그는 나와 결혼과 인생관이 놀랍도록 흡사하게 닮아있었으며, 또한 다른 부분이 있어 서로 배우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부분이 있다. 우린 스스로의 자유를 갈망하면서 같이 함께 하고 싶은 욕구를 동시에 갖고 있기에 서로 잘 이해해줄 수 있고 지지해줄 수 있다. 애가 생겨서 인생의 많은 변화가 생기고 힘든 순간이 오더라도 잘 헤쳐갈 수 있다는 믿음과 신뢰가 있다. 일부러 상처를 주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 성격덕분에 문제를 차분히 잘 해결해나갈 수 있으니까.

정말 애를 가져도 좋겠다고 확신이 선 순간 이렇게 아이가 찾아와준 점 정말 고맙다. 앞으로 남은 기간 별 문제없이 건강하게 커주고 태어나주기만을 바랄뿐이다.

인생의 여러가지 변화

아침 해가 6시면 중천에 뜬 것 마냥 쨍한 요즘 6시 이전에 이미 눈이 떠지곤 한다. 그래서 이번주 화요일, 자명종이 울려서야 눈이 떠지고, 침대에서 비비적거리며 잘 못일어나겠던 때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야에 가까워지면서 잠을 설치지 않고 7시간을 내리 잔게 오랫만이었기 때문이다.

뭘 좀 확인할 게 있어서 공공메일 온 것을 확인하려고 로그인을 하니 시스템에 내 이름이 바뀌어있었다. 처음에 외교단 비자로 와서 다른 비자로 바꾸니, 비자 바꾸는 문제부터, 결혼식, 이름 바꾸는 것까지 여러모로 예외적인 케이스에 해당되어 속을 많이 썩었는데 그래도 이름 바꾸는 문제는 크게 오래걸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큰 일이다. 아무리 한국에 등록된 내 이름이 바뀌지 않는다 해도 앞으로 이곳에서 살아갈 나의 정체성에 큰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살아가면서의 편의(구직 활동 중의 편의 등)를 위해 성을 추가하고 내 본래성을 미들네임으로 돌렸다. 그래도 미들네임으로 내 성을 유지했으니까 큰 변화는 아니야 라고 스스로에게 항변을 했지만, 간혹 미들네임을 기재할 공간이 없는 서류 제출시나 신청서 작성시 내 본래 성이 자리를 잃어버리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니 당혹스러운 느낌도 갖게 되었다.

이런 느낌은 남편 성을 따라가지 않는 우리네 문화 때문일 것이다. 여기선 성을 바꾸는 거나 한 가족의 형제 자매가 아버지나 어머니, 조부모 등의 성을 따로 갖는 경우가 흔해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에게 성은 한번 정해지면 그대로 평생동안 간직하는 것이기에 그 무게와 의미가 남다른 모양이다. 그래서 왠지 부모님이 서운해하실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죄송함도 버무려져서 내가 왜 이 성을 택하는지를 애써 변명하게된다. 묻는 사람이 없어도.

이런 복잡한 기분은 둘째로 치고, 계획하던 행정적 절차가 처리되어 홀가분해진 마음에 옌스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나니 어찌나 기뻐하던지. 이 곳에서도 역시 성이 갖는 의미가 있음을, 그리고 자기의 성을 따르기로 결정한 그 무게가 느껴짐을 알고 묘한 안도감도 들었다. 배우자가 내 결정의 무게를 알아준다는 사실은 나에겐 중요한 문제니까.

무척이나 덥던 날이었다. 친구와 헤어지고나서 안되겠다 싶어 반바지를 두개 사들고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많은 사이트에서 말하던 소위 “착상혈”이라는 것을 보고 나서 아침에 느꼈던 그 이상함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인생에 있어 나중에 “그게 그래서였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그런 작은 순간들이 있지만 그 당시에 모르는 것처럼, 그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집에 오는 길에 테스터기를 두세트 사들고 와서 바로 확인해보았다. 희미한 줄이 보였다. 역시…

계획을 하고 있었지만, 설마 한번에 이렇게 아기가 찾아와줄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기에 놀라움이 컸다. 물론 기쁘기도 했지만, 사실 막 엄청 기쁘다기 보다는 얼떨떨하고 정말 이게 확실한가 싶은 마음에 놀라움이 가장 지배적인 기분이었다. 예정일이 논문 학기 전 마지막 시험의 바로 다음주라 한달 미룰까 했었는데 그냥 뭐 설마 한번에 되겠느냐 싶어 시작한 임신계획이 예상을 뒤엎고 임신으로 결론이 나서 깜짝 놀랐다. 대부분 6개월 정도 계획하고 애를 갖는다고 들었는데 말이다.

학기 중에 애를 나면 골치가 아파진다는 생각에 그 전엔 임신을 일찍 하나 싶어 걱정을 했는데, 바로 이달부터는 고령임신이라 안생기면 어쩌나 하고 바로 한달을 간격으로 고민의 주제가 180도 뒤바뀐 것이 우습다. 아무튼 그 많은 걱정과 달리 계획대로 움직여준 아기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사실 오늘부로 두달째에 들어선 거라 아직은 불안정한 시기이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이를 잃는 일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일이 생기면 그건 우리가 감당할 일이니 혹시나 생길지 모르는 불운을 대비해 기쁨을 기념하고 즐기지 못할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에게도 알리고…

옌스가 꽃을 한다발 사들고 집에 왔다. 순간 내 머릿속에는 ‘어떻게 내가 임신한 걸 알았나? 이 꽃은 뭐지? 그냥 사온건가?’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빨간 장미. 매번 이러저러한 꽃다발을 사오다가 한번 친구가 거의 빨간색에 가까운 진한 분홍의 장미를 내게 선물한 적이 있었는데, 자기가 빨간 장미 꽃다발을 먼저 선물할 기회를 빼앗겼다며 서운해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이건 아주 진한 분홍장미야~ 빨갛지는 않네.”라고 귀띔해줬더니 그 기회가 남았을 때 빨간 장미를 사온 것이었다.

“왠 꽃이야?” 하며 기뻐하는 나에게 “여러모로 군거가족의 일원이 된 것을 다시한번 축하해!”라며 꽃을 내밀었다. 임신이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지. 나도 몰랐는데.

“또 소식이 하나 있지~”라며 대수롭지 않은 듯 이야기하니 “뭔데?”하며 평이하게 물어본다. 불쑥 테스터기를 내밀었더니 이게 무슨 뜻이냔다. “글쎄?”라는 답에 “임신????!!!”하면서 어찌나 놀래던지. 애가 떨어지겠다는 표현은 바로 이 순간에 쓸 것이다.

이 날 저녁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 할 때, “이미 우리는 평생을 함께 할 배우자지만, 이 아이가 생김으로써 우리는 다른 의미로 평생에 끊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는거야.”라는 말을 불쑥 했다. 항상 장난스럽고 로맨틱하지 않은 나에게 그가 있기에 로맨틱한 감성이 사라질 수가 없는 모양이다.

바로 몸조리 잘하고 몸조심하라는 우리 가족과 하던 운동들 그대로 계속 하고 지내던 대로 계속 지내고 술담배만 안하면 된다(술도 간혹 작은 글라스 한잔은 되는 것으로 덴마크 보건당국이 권고사항을 바꿨다며..)는 시댁 가족들. (하루 한잔 커피는 당연히 오케이!) 의사인 시누이는 애들이나 짐을 싣고 다닐 수 있는 아주 무거운 크리스챠니아 자전거에 애들 둘을 태우고 셋째 임신기간 중 내내 데리고 다니고, 출산 때 조차도 자전거 타고 갔다고 한다. 오히려 그런 활동이 건강한 임신과 출산에 도움이 된다면서. 승마 등 몇가지 운동만 안하면 된다고 하는데, 그것만 아니면 일상 생활을 유지하는 중에 생기는 유산은 그냥 배아의 유전적 결함에 따른 것이지 그 생활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면서 전혀 생활을 바꿀 필요가 없다고 강조를 한다.

물론 이 나라에도 다양한 가족들이 있기에 순수 유기농 제품만 쓰고 입고 먹는다든지 하며 여러모로 조심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운동에 대해선 다 비슷하게 강조하는 것 같다.

굳이 일상생활을 유지하겠다고 생각해도 몸가짐이 조심스러워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나는 그냥 학교 공부하던대로, 운동 하던대로 하면서 살기로 했다.

이제 이번 여름이 애가 없는 마지막 여름이라며, 이 여름을 불사르겠다는 남편과 벌써 이름을 지어보겠다고 이름 책을 사들고 우리 둘은 이 변화의 시기를 벌써부터 즐기고 있다. 입덧만 너무 심하지 않기를 빌며 이 변화의 순간을 아주 잘 즐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