옌스의 누이 생일파티에 나는 아파서 참석을 못했는데, 거기에 다녀온 그가 거기서 듣고 온 인종차별이야기를 꺼냈다. 여동생 베프의 남편이 한국에서 입양된 덴마크인인데, 딸이 셋이다. 동양적인 느낌이 조금 더 강한 얼굴이지만 양쪽 인종의 특색이 다 드러나게 섞인 아이들로, 학교 생활 잘하고 공부며 운동, 노는 거 할 거 없이 다 참 뛰어나서 애들 건강하고 똑부러지게 잘 키웠다는 생각을 했었다.
파티하면 친구와 가족할거 없이 다 섞어 하는 덴마크인들인지라, 이 커플과 그 아이들을 알게된지도 어느새 십년이 넘었으니 따로 연락하고 가깝게 지낼일은 없다 해도 꾸준히 만나게되고 애들 커가는 모습도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들어왔었다. 그런데 인종차별 경험담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원래도 괜찮게 사는 집이었고, 그런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살던이들이었는데, 돈을 좀 더 많이 벌면서 아주 좋은 동네로 이사를 가 아이들도 학교를 옮기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거기에서 남자애들 몇몇이 아주 노골적이고 수위높은 인종차별적 언사를 하면서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는 학교생활하면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는지를 물었다.
아이들에 대한 인종차별 이야기는 십대 쯤 해서 경험하는 이야기를 가깝게는 아니고 “카거라”식으로 건너건너 들은적만 있다. 나도 인종차별을 경험한 것은 노르웨이 십대들한테 한번정도이고 그 이상은 없다. 편견의 존재를 경험하는 때가 있기는 하지만, 그게 때로는 유리한 편견일 때도 있었고, 아니면 그냥 그게 차별로 이어지지 않는 가벼운 종류의 편견에 그쳤었다. 두드러지지 않으니 얼마나 광범위하게 경험하게 되는 일일지 모르지만,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청소년 사회는 일종의 정글과도 같은 거친 시기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충분히 미루어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행동에 대한 책임의 결과가 어른이 되어서 한 같은 행동에 대한 책임의 결과보다 가볍기 때문에 학교라는 제도안에서, 사회에서 발생하는 일보다 거친 일들이 왕왕 발생하곤 하니까.
하나도 학교에서 방과후학교 시간에 잘 놀다가 괜히 시비를 거는 2학년생에게 배를 걷어차인 적도 있고, 수업시간중에 화장실 간다더니 교실문을 못여는 친구를 도와주려다가 다쳐가지고 온 적도 있었다. 사실은 그 친구가 괜히 주변의 관심끌려고 자기가 문을 잠그고 쇼를 하는 거였는데 그걸 하나가 방해했다며 얼굴을 팍 밀어서 칠판에 머리를 박고 큰 혹이 나버렸던 거다. 주변에 있는 교사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이미 이렇게 어린 나이부터 이런 아이들이 있는데, 아직 옳고 그름에 대한 윤리적 기준이 확고히 내면화되지는 않고 머리와 몸만 큰 청소년 아이들은 더욱 잔인하고 무서운 형태로 다른 아이들을 괴롭힐 수 있는 거다. 한국에 비해 학교 폭력, 따돌림 문제가 덜 심각한 덴마크이지만 어느 곳이나 사람 사는 곳이면 이런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인종차별이 더 큰 문제일지, 이런 학교에서 가해지는 폭력의 수위가 세졌을 때 그게 더 문제일지 사실 잘 모르겠다. 아이가 부모에게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다 자세히 이야기해줄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일 것이고, 그 다음 부모가 학교와 함께 어떻게 대응할지 잘 논의해가는 과정이 두번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여러 유형의 폭력을 당했을 때 마음을 단단히 먹고 다시 회복탄력성을 보일 수 있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이 된다.
어른이 되면 제도의 보호로 인해 오히려 수면으로 드러나지 않는 일들이 학생일 땐 제도가 문제아동들도 보호해야 해서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된다는 게 아이러니하긴 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냥 잘라버린다고 없어지는게 아니라 위치와 형태만 바뀌는 것이니 이를 제도 안에서 해결하려는 노력을 비난할 수 없고, 아무튼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