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덴마크인

덴마크 생활이 십년을 넘어섰는데, 어느날 곰곰히 생각해보니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생활한 나라, 한국/인도/덴마크 중 덴마크 생활 기간이 가장 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부하느라 정신없었던 유년시절과 학부시절에는 사회에 대한 큰 관심이 없던 시기였기에 그 이후 진정한 의미의 성인기의 가장 큰 부분을 덴마크에서 보낸 것이다.

학창시절에는 큰 일탈 없이 청소년기를 보내느라 소위 말하는 질풍노도의 시기로 불리게 만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을 새가 없었다. 그리고 부모님과 나를 분리해 독립된 성인으로 성장하는 시기를 만으로 서른이 넘는 시기에, 그것도 인도에서 경험했다. 집에 정해진 시간에 돌아오는 것, 외박하지 않는 것 등 처럼 부모님이 하지 말라고 하지만 전혀 위법할 것이 없는 것들 같은 거 말이다. 엄마는 처음 겪는 딸의 반항에 꽤 충격을 받으셨고, 그때서야 처음으로 나를 독립된 개체로 인정하는 첫발을 내딛으신 것 같다. 경제적인 것부터 여러가지 면에서 부모님과 분리를 이뤄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한국으로 돌아가 2년반을 지내고 덴마크로 나와 그대로 눌러앉아버렸다.

나는 다소 관찰자와 같은 시선을 유지할 수 밖에 없다. 내 모든 판단의 준거는 유년기를 통해 내안에 깊숙히 심어넣은 한국문화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덴마크의 가치관과 문화가 그 위에 덮어쓰여지며 어느게 아주 오래된 가치관인지 아니면 새로 덧씌운 가치관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졌다. 관찰하고 그 관찰한 결과를 주변인과 나누고, 그에 대해서 그들의 설명을 듣거나, 내 관찰을 근간으로 해서 벌어진 토론을 보며 새로운 인풋을 얻고 추가적으로 관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회사에 근무한다는 것은 대충 우리가 동질적인 집단에 속한 사람이니 일종의 편향된 문화적 인풋을 얻게 된다는 뜻이기도 할텐데, 그 안의 세분화된 다양성 속에서 나름의 다양함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경험속에서 관찰자의 시선은 서서히 참여자의 시선으로 바뀌어가는데, 이러한 동화과정이 매우 은밀히 일어나기에 나또한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 후 문득 내 가치관이 더이상 한국인의 평균의 가치관에서 많이 멀어져있음을 느끼데 된다.

현지어를 잘 하는 것은 이런 동화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언어가 매게가 되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이지만, 언어야말로 이 문화의 가장 중요한 매개이자 문화와 문화의 역사가 담겨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언어를 통해 외부인의 시각으로 번역되지 않은 현지의 날것을 직접 흡수할 수 있고, 그렇게 흡수할 수 있는 스펙트럼 자체가 워낙 넓어서 외국어의 안경과 스피커를 통해 보고 듣고 흡수할 수 있는 양이 다르다.

그래서 꼭 현지어를 잘 해야 하냐? 그런건 아니다. 현지어 안하고 영어만으로도 살 수 있는 나라이니까. 하지만 영어만으로는 내가 주체적으로 사회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기에 이방인으로서 살 수 밖에 없는데서 오는 단점이 존재한다. 오래 살면서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추측하고 넘어가는 것들이 사실과는 다른 경우도 많고, 그래서 오해도 하고, 답답도 하고, 불만도 쌓일 수 있다. 현지어를 잘 하게 되고 그걸 활용해 문화를 이해하고 그 사회에 동화된다는 것은 내가 더이상 나를 이방인으로 여기지 않게 된다는 것이고, 그건 나에게 편안한 마음을 가져다준다.

나는 내가 한국인이기에 남과는 다른 관점을 갖고 이 사회를 바라보고, 또 그래서 제공할 다른 가치가 있다는 점에서 그건 그거대로 장점을 인지하되, 내가 이방인이기에 움직임이 조심스럽거나 의도치 않게 오해를 한다거나 이런 게 없어졌고, 그게 좋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생기는 불만이 없어졌고, 그냥 어느 사회에나 있는 장단점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 덕에 볼 수 있는 방송이나 책이 늘어나는 점도 장점이고, 덴마크어가 늘면서 영어가 간접적으로 늘기도 한다. 영어와 덴마크어가 역사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많이 주고 받은 탓이다. 덕분에 뒤늦게 왜 어떤 표현이 특정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 어원을 알게 되면서 이해하게 되기도 하고.

하지만 일상을 현지어로 완전히 전환한다는데는 또 다른 이면이 있다. 내 아이에게 내 뿌리를 잘 설명해주기 어렵다는 것이다. 음식 문화 이외에 아이가 한국문화를 나에게서 크게 느낄 일이 없다. 아이가 두돌이 되기 전에 우리의 언어가 덴마크어로 서서히 교체가 이뤄졌으며 아이에게 한국어는 조금 알아듣는 외국어, 엄마의 말 정도로만 남게 되었다. 다행히 한글학교를 통해 요즘 한국어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배우고, 한국의 문화도 조금이나마 체험하기 시작했다. 덴마크인 선생님을 통해 이뤄지긴 하지만 이게 가능하다는 자체만으로도 감사하다.

아마 앞으로 십년정도 더 살고나면 반덴마크 사람이 다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쯤 되면 한국이 너무 많이 바뀌어서 가도 뭔가 낯설어 집에 가는 것 같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시민권 취득에 대한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는 한국의 가족을 넘어서서 그게 나를 한국과 이어주는 끈처럼 느껴지는 것 때문인 것 같다. 시민권이 없어도 덴마크를 내나라나 다름없이 느끼고 있는 지금, 굳이 시민권으로 나를 묶지 않을 필요는 없다고 느끼기도 하고. 그때쯤에 나는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문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