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누이와의 관계 재정립

집안의 대소사에 여자들이 주 역할을 맡는데서 오는 정신적 부담을 멘탈로드라고 하던데, 우리집도 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이와 관련된 모든 일정을 옌스가 열심히 챙기지 않아 내가 챙기다보니 시댁 식구들과의 관계에서도 일정부분 주도를 해왔다. 아이의 생일이나 공연 초대, 시댁 방문 휴가, 시댁 행사 관련해서 음식 준비를 하거나 하는 것 등. 내가 할 수 있으니 한 것들인데, 그게 어느새인가 자연스럽게 당연히 내가 해야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시누이네는 아이가 셋이고, 부부 모두 바빠서 일정을 잡는게 쉽지가 않다. 우리는 뭔가 초대를 받으면 꼭 가려는 전제하에 일정에 무리가 있으면 조율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고, 그게 안되면 되는 사람만 간다든지 최대한 맞추려고 해왔다. 어쩌면 여기서부터 전제가 잘못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굳이 그걸 맞추려고 할 게 아니었는지도. 우리가 제안을 하면 그 날짜가 안된다고 하면서 다른 날을 찾아보면 좋겠다고 하되 또 다른 날을 제안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날을 물어보면 그 날도 안되는 경우가 많고. 하나의 생일을 축하할 겸 초대하려고 하는데, 날짜 맞추기가 너무 힘들어서 짜증이 확 올라와버렸다. 한 두번정도 날짜 조율이 안되면 차라리 그날 못간다고 미안하다 하고 즐겁게 축하하라 하면 되는데, 다른 날짜를 맞춰보자면서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이번 토요일에 하나 공연이 있는데, 그때 만나서 조율하자고 하는데 거기서 짜증이 확 올라오는거다.

짜증이 올라오던 순간 밖에 있었는데, 집에 돌아와서 옌스에게 앞으로 시누이네랑 일정 조정하는 거 당신이 하라고 했다. 왜 그렇느냐고 묻길래, 화가나는 포인트를 이야기해줬더니 시누이가 나쁜 뜻으로 그러는게 아니지 않는가, 애가 많아서 바빠서 그러는 거다 라는 거다. 그 말에 나는 짜증이 더 확 올라왔다. 그러면 그것에 짜증내고 있는 내가 나쁜 뜻이 있는거냐고 받아쳤더니, 그런 뜻이 아니란다.

모든 관계는 쌍방이지 않느냐. 내가 시누이네 애들, 시누이 생일 등 가족행사에 시간 내서 가는 것은 뭐 나라고 시간이 남아 돌아서 그 넘치는 시간 내서 가는게 아니다. 시누이네 행사 일정 조율할 때 우리가 이런식으로 힘들게 한 적이 있느냐. 나도 나쁜 마음 먹는 거 아니고, 앞으로도 가게 되는 행사 좋은 마음으로 갈건데, 애써 이렇게 일정 맞춰주려고 노력하지 않겠다는거다, 나도 안되면 그냥 그날 안된다, 대안 제시없이 수동적으로 그냥 다른 날 안되냐고 물어보겠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보다보니 결국 이렇게 되는 건 이 상황에 옌스가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아서라는 결론이 나왔다. 하나가 시누이네 가족과 가까운 연을 이어가고 있는데, 자신의 생일에는 시누이네가 오지 않고, 그쪽 생일에만 우리가 가니까 그게 아쉬웠던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생일 초대도 하려고 했던 것인데. 결국 이런 상황에 놓인 것은 당신이 적극적으로 하나와 시누이네 가족간의 관계에 역할을 하지 않아서 그런거 아니냐, 당신 시누이네 행사에 우리는 다 가는데 – 그것도 아이들이 세명이나 되는 그 집 행사에 모두 – 우리 행사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도 결국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그런건데 왜 우리만 그렇게 해야 하느냐라고 힐난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이런거 안하겠다. 그래서 하나가 시누이네를 초대하거나 뭘 같이 하거나 이런거 물으면 당신한테 물어보라고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시누이네랑 뭔가 행사가 없으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내말이 틀리냐고, 내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느냐고 불어봤다. 시누네 남편은 그룹채팅에도 없는데, 왜 나혼자 거기에 껴서 이런걸 해야 하냐고.

옌스도 그 말에 내 감정이 드디어 이해가 되었던 것 같다. 미안하다며 앞으로는 자신이 그 역할을 하겠다고 하더라. 크리스마스도 그간 그 집 조카들이 자기네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다고 해서 그 집에서 계속 보내왔는데 그것도 선물 교환때에만 하고 식사는 따로 하는 것으로 했다. 아직 통보하지는 않았지만. 음식준비를 우리에게 넘기지 않아, 우리가 초콜렛이나 뭔가 물질적인 것으로 역할을 할 수 밖에 없게 하면서도 그 스트레스를 크리스마스 식사 내내 뿜어내는 시누이 남편을 마주하며 받아온 스트레스가 너무 컸기에.

옌스는 그런 상대의 스트레스를 눈치채도 크게 스트레스 받지 않는 타입인데, 나는 상대의 불쾌함이 너무 많이 느껴져서 그게 나에 대한 게 아님에도 너무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듯한 상태가 된다.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가서 릴렉스하게 앉아있는 옌스는 괜찮은지 모르겠지만, 작년에 그 냉랭함이 유독 크게 느껴져서 올해는 정말 가고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옌스한테 여러번 시누이랑 이야기해서 음식 분담을 어떻게 해보든가, 아니면 식사는 따로 하든가 조율해보라고 했는데, 그걸 아직껏 이야기하지 않고 이번 주말에 얼굴 볼 때 이야기해보겠다는거다. 하나랑 시누이네 큰조카도 같이 있는데? 그걸 애들이 있는데서 이야기할 것은 아닌 거 같다고 하고 그냥 식사 따로 하자고 이야기했다.

시누이네 초대하고 다 좋은데, 먼저 되는 날짜 조율해서 대안 몇개 갖고서 나랑 그 다음에 조율하면, 음식하고 그런건 하면 되는 거니까 부르라고. 그런데 내가 나서서 부르고 그런건 앞으로 안하겠다고. 마음이 아주 편안한 것은 아니지만, 그 역할을 계속 맡는다고 봤을때 느껴질 불편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 그냥 그러기로 했다. 그리고나서 시누이에게도 우리 셋의 그룹챗을 나가겠다고 이야기해두었다. 우리 일정을 그들의 일정에 최대한 맞추려는 노력이 일정 조율을 너무 길게 늘어지게 해 나와 그녀 모두에게 스트레스가 되는 것 같아서 앞으로 옌스가 직접 일정 조율을 도맡아 하기로 했다, 그러면 일정조율도 좀 더 일관적이어질테니 말이다며. 이해해달라고 하고 나왔다.

불편함을 적극적으로 쳐낼 수 있어야 가족 관계도 오히려 건강하게 가져갈 수 있을 것 같다. 이렇다가 더 누적되서 아예 참여하기도 싫다는 상태까지 가는 것보다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게 좋지 않은가. 시누네 남편도 참여하지 않는 역할에 나라고 괜히 열심히 참여하다가 괜히 데이지 말고 물러날 때 적당한 선으로 물러나는게 좋다 싶다. 덕분에 올 크리스마스엔 좀 편한 마음으로 보내겠구나. 다행이다.

명절

한글학교에서 바자회를 했다. 한글학교는 수업료만으로 학교 재정이 굴러가지 않는 곳으로 학원이 아니라 공동체 같은 것이다. 내가 돈을 냈으니 애들 잘 가르쳐서 보내겠지, 이런 곳이 아니다. 코펜하겐 시의 재정지원을 받아야 하고, 수익사업을 통해 약간의 수익을 창출해야 한다. 코펜하겐 시의 재정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문화활동이 일정 비율 이상을 차지해야 한다. 아니면 어학원으로 인정되어 아무런 재정지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글학교는 운영진들과 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가정의 봉사활동에 어느정도 의존을 할 수 밖에 없고 바자회 같은 수익활동을 할 때 각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게 없으면 언젠가는 굴러가지 않을 것이다.

한글학교가 별것 아닌 것 같아도 하나와 같이 한국어 노출이 평소에 적은 한-덴가정 아이에게 한글학교는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한국어를 하기 싫어서 한글학교에 가고 싶어하지 않았던 순간도 있었고, 하고 싶어도 잘 되지 않아서 마음앓이를 하게 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또 엄마랑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모여 그 나라 말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나쁘지 않기도 하고, 자기나 엄마랑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랑 섞여서 놀고 한국어를 배우는 시간이 때로는 즐겁기도 했을 거다. 토요일이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당연히 한글학교를 가는 것으로 생각하니 그것이 하나의 정체성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내 시간과 에너지를 쓴다는 것이 꼭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걸 지키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어느정도는 할애해서 노력하겠다는 생각에 바자회 준비로 행사장 배치도 돕고 어묵탕도 만들어 팔고 뒷정리도 했다. 그 전에는 나도 뒤로 빠졌던 것이라면 이번엔 운영진에 참여하게 되다보니 그 이름에서 오는 책임감에 더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할 수밖에 없었다.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닌 일이지만, 그 공동체가 개개인의 참여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임을 이해하고, 아이가 그 공동체에서 누리는 것이 크다는 것을 알게되지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더라.

명절도 그런 것 같다. 한국에는 설과 추석 명절이 있다면 여기는 크리스마스 명절이 있다. 덴마크의 명절은 여자만의 희생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갈아넣어 만드는 것인데, 이제 우리 세대가 갈아넣어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여자들의 희생으로 치러지던 명절을 보면서 나는 어른되면 안해야지 했는데, 막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엄마와 같이 준비하던 기억들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남아있고, 그래서 명절을 치루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올해 크리스마스도 작년과 같이 시누네 집에서 치르겠지만, 이번엔 우리가 좀 더 음식 분담을 많이 하고자 하고, 26일 크리스마스 이튿날 대가족 모임을 우리집에서 갖기로 하면서 제대로 된 명절맛을 볼 것 같다. 하나에겐 그 모임이 딱 그렇게 재미있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우리집에서 모임을 한다니 좋아하는 아이를 보며, 그래서 이런 것을 하는구나 싶다. 특히 길고 어두운 겨울, 이런 뭔가 특별한 행사들이 없으면 아마 이 시기를 넘기기 어려워서 그런게 아닐까. 나도 힘들겠지만 막상 치루고 나면 뿌듯할 명절. 그래서 우리는 명절이라는 전통을 계속 이어가나보다.

길디 긴 명절이 끝났다.

24, 25, 26, 28일. 4일간에 걸친 뻑적지근한 가족행사가 모두 끝났다. 다행히 마지막 날이었던 오늘은 요리하는 거 없이 외식하는 거라서 크게 힘들 거 없이 즐기기만 하면 되었다.

원래 가까운 가족 율리아픈(Juleaften)은 24일 한번에 하는데, 올해만큼은 시누네 가족이 곧 돌아가실 시누이 시아버지와 함께 하기 위해 24일을 율란 시댁에서 보내고 우리와는 25일에 따로 보내고 싶다 해서 이틀에 걸쳐 하기로 했다. 24일 율리아픈에 먹을 네가지 음식을 위해 23일 디저트 만들기부터 요리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디저트로 먹을 리살라망(risalamande)을 만들기 위해 23일 밤 우유로 만드는 쌀죽인 리슨그뢸(risengrød)을 한시간동안 불옆을 지키고 서서 저어가며 만들어서 베란다에 밤새 내어놔 차갑게 만들어 두었다. 24일엔 오후 1시 반부터 저녁 6시 반까지 부엌에서 종종거리며 적양배추 무화과 샐러드와 생오렌지잼으로 글레이징한 오리가슴살구이, 삶아 손으로 살짝 으깨 꿀과 버터를 발라 오븐에 구운 감자요리, 미리 껍질을 벗겨둔 아몬드를 으깨고 생크림을 잘 휘핑해 바닐라씨앗과 함께 리슨그뢸을 잘 접듯이 섞어 리살라망도 만들었다. 그렇게해서 먹는 건 또 순식간…

그리고 25일은 일주일간 쌓인 빨래를 아침부터 바삐 돌려대고 구워가기로 한 루브뢸(rugbrød) 2개를 구워 하나와 함께 시부모님과 시누이네 별장에 갔다. 중간에 반죽하다가 옷에 쏟고 난리를 치느라 더 정신이 없었다. 여러가지 부엌내 소소한 사건사고가 많았던 날. 안그래도 바쁜데 말이다. 엎친데 덮쳐 옌스는 눈에 생긴 다래끼가 오래되어도 낫지를 않아 갑작스레 간신히 병원에 약속을 잡느라 아쉽게도 나 혼자 가게 되었다. 사실 나혼자면 가지 않을까 싶었는데 지하실 빨래 건조실에서 빨래를 널고 있는 나에게 시어머니가 따로 전화를 하셔서 시누네 애들이 하나 보고 싶다고 너무 아쉬워한다며 하나랑 나만이라도 가지 않겠냐 하시길래 못간다 하기 좀 그래서 다소 지친 몸을 이끌고 갔다. 즐겁긴 했지만 점심도 요기처럼 아주 간단히 하고 가서 저녁까지 기다려 밥을 먹은 거라 기력도 좀 딸리고 지쳤다. 하나가 시누네 애들과 너무 잘 놀고 저녁도 잘 먹어줘서 기쁘긴 했다.

26일은 시아버지네 가족들과 그 직계가족까지 24명이 모이는 날이었는데, 각자 한가지 요리를 해가기로 해서 나는 잡채를 해갔다. 시어머니도 음식 준비를 우리 집에서 하셔야 해서 그 전까지 요리해서 부엌을 비워드리려니 새벽같이 일어났어야 했는데 늦잠을 자서 9시까지 자버렸다. 으아… 그나마 잡채에 들어갈 고기는 미리 재어두었으니 망정이지. 간신히 11시 15분까지 자리를 비워드리고 나도 나갈 채비를 했다. 도저히 화장은 할 시간도 없고 힘도 없어서 패스. 애들이 많으니까 하나도 잘 놀아서 우리는 그냥 눈으로 감독하다가 하나가 계단 오르내리고 싶어할 때만 손잡고 이동하는 식으로 보면 되어서 옌스와 교대해가며 먹고 이야기하고 즐길 수 있었다. 5시 즈음 되어서 시부모님이 이제 가겠냐고 해주셔서 적당한 시간에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오고 나니 긴장이 풀려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머리고 아프고 몸살기운도 있어서 움직이기 참 힘들었다. 나는 배가 안고팠지만 저녁은 준비해야지 하면서 반조리된 빵을 굽고 그위에 얹어먹을 것들만 좀 팬에 데워 내고 나니 정말 몸 컨디션이 안좋아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대로 침대에 누워서 다음날까지 잤다. 중간에야 깨서 옌스와 잠깐 이야기도 하고 하긴 했지만 침대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렇게 27일이 찾아와서 여유로운 하루를 보내고 나니 28일. 11시 반엔 다 준비하고 나서야 했는데 아침 늦잠으로 8시 반까지 자고 나니 은근히 바빴다. 별로 한 것도 없지만… 그래도 호텔에서 하는 시부모님 금혼식 식사인데 화장이라도 잘 하고 가야할 것 같아서 말이다. 하나의 낮잠이 좀 꼬여서 한명이 밖에서 애 자는 동안 대기하고 한명만 식당에 들어가있는 식으로 첫 한시간은 이상하게 되었지만 1시부터 5시 반까지 이어진 점-저 같은 식사라 상관없었다. 시누 애들이 하나를 잘 봐주기도 하고 식사 도중엔 자기 식사 끝날 때까지 크게 어렵지 않게 잘 먹어주는 애이기도 해서 이제 이렇게 밖에 데리고 가도 어렵지 않고 괜찮다. 중간에 봐줄 사람이 많아진 셈이니까. 오늘은 요리하는 것도 없고 먹고 이야기만 하면 되다보니 크게 힘들건 없었는데, 그래도 끝나고 집에 오니 운동할 힘 따윈 남아있지가 않았다. 그런데 아차. 불고기 좀 재워둔다고 양지를 사왔었구나. 며칠 전에 사왔는데 자꾸 미루게되네. 아차. 내일 송년회가 하나 또 있구나. 사이드디쉬 하나 해가기로 했는데… 결국 다시 나가서 장을 봐와서 감자와 계란을 삶아두고 미뤄뒀던 불고기도 재워뒀다. 이제 정말 있는 에너지를 다 끌어모아 쓴 기분.

이렇게 길디 긴 명절이 끝났다. 아마 이렇게 에너지가 고갈된 건 아마 명절 전주 수요일에 만두피까지 밀어 만두를 빚고 (역시 만두피는 힘들다) 목요일에 치즈케이크를 만들고 금요일에 파티를 다녀온 탓일게다. 그 사이 빈 일정에 율 선물 쇼핑을 틈틈히 껴서 쉴틈없이 돌아다닌 것도 있을게지. 내일 파티 하나 다녀오고 31일 우리 세식구 송년만찬만 하고나면 이 한해도 끝난다. 그러면 3일부터 출근 시작이구나. 갑자기 뱃속이 간질간질한게 긴장이 되는가보다. 남은 며칠동안 신년계획 좀 세워봐야겠다. 아주 간결하게 한 세가지 정도만 말이다.

몸이 엄청 힘들었던 것과는 달리 마음은 그냥 내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인 마냥 즐겁고 편했다. 나도 그들을 잘 알고, 그들도 나를 잘 아니 뭘 이야기해야할 지 생각하느라 뻘쭘한 것도 없어지고. 조카들도 나를 아주 편하게 여기고 장난도 치고. 내년에는 또 더 가까워지겠지. 가랑비에 옷 젖듯…

크리스마스 준비

드디어 이번 주말만 지나면 크리스마스다. 부활절도 명절이긴 하지만 덴마크에서 가장 중요한 명절이라 하면 역시 크리스마스를 꼽는다. 사실 크리스마스는 동지를 기념하는 Germanic 계열 인종들의 축제를 기독교에서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로 택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덴마크에서는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쓰지 않고 율 (Jul) 이라고 한다. 하지는 Sankt Hans Aften으로 기념하듯 동지는 Jul로 기념한다.

아무튼 가장 큰 명절이니만큼 안그래도 서로 집으로 초대하기 바쁜 덴마크인의 일상은 11월부터 엄청 바빠진다. 회사, 친구, 친지, 가족 등 서로 초대해서 커피를 즐기든, 밥을 먹든, 파티를 하든 할 일이 많다. 나처럼 옌스의 네트워크와 나의 대학원 네트워크처럼 좁은 인간관계만 유지하는 경우에도 옌스의 보스의 보스로부터 가족단위 초대를 받아 꽤나 시끌벅적한 캐주얼한 저녁에 다녀왔고 (우린 8시 전에 애를 재워야 하는 관계로 간단하게 식사 전에 먹은 æbleskiver만 먹고 왔다. 우리네 호두과자에서 호두속을 뺀 빵같은 거라고 할까? 아니면 팬케이크를 그런 모양으로 구웠다고 해야하려나? 옛날엔 사과를 속에 넣었어서 æbleskiver라고 했다는데 요즘은 아무것도 안넣고, 베리류 젬과 파우더설탕을 뿌려 먹는다.) 대학원 친구들 파티를 포함해 이것저것 다녀왔으니 네트워크 넓은 사람은 정말 정신없이 바쁘다. 한국사람들 연말 연시 바쁜 것과 다를 바 없는 분위기인데 서로 오고가는 집 초대가 주를 이룬다 생각하면 다들 그 요리와 집 정리 및 청소까지 얼마나 바쁠 것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OMG…

우린 24일 우리집, 25일 시누이네 별장 (두바이 주재중이라 집은 세를 줘 덴마크에 잠시 돌아올 때면 별장에 머문다), 26일 둘째 시고모님네 집에서 명절을 치르고 28일 시부모님의 금혼식 파티가 있다. 헉. 24일은 풀코스 요리 준비가 있고, 25일과 26일엔 각자 나눠 맡은 음식만 하면 된다. 25일은 아직 메뉴 결정이 안되었고 (아직도!) 26일엔 잡채를 하기로 했다. 오늘 고기를 양념에 미리 재워뒀으니 26일엔 나머지 일만 하면 된다. 좁디 좁은 우리집 부엌에서는 손님 두 명이면 딱이다. 이번에 큰 팬을 사서 네 명까지 커버 가능은 한데, 이상적인 건 두 명 손님.

재료는 오리가슴살만 빼면 다 샀다. 오늘 간 수퍼마켓 두 군데엔 가슴살이 다 팔린 걸로 봐, 통오리의 오븐요리가 (나중에 있을 오븐 청소로 인해… 기름이 엄청 많은 오리고기) 부담스러운 사람이 꽤나 되는 게 아닌가 추측해본다. 내일 가보고 없으면 냉동고기를 사는 걸로 해야겠다. 지난번 해보니 냉동도 나쁘진 않았으니.

요리는 미리 할 수가 없으니 뭘 할 수 있나 하다가 아몬드 껍질을 까야겠다 싶어서 유튜브를 찾아봤다. 껍질을 미리 깐 아몬드도 파는데, 원래도 비싼 아몬드 가격이 확 뛰길래 그냥 직접 해보기로 했다. 시어머니께서 그게 어렵지 않다고 하셨던 기억이 있어서. 진짜 간단했다. 1분정도 끓는 물에 넣고 끓인 뒤 껍질이 살짝 들뜬 것 같으면 이를 꺼내서 둥근 부분을 잡고 조금 힘을 줘 누르면 아몬드 속살이 뾱 하고 빠져나온다. 이걸 그렇게 비싸게 받다니!

아무튼 오늘까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내일 저녁엔 우유쌀죽을 끓이고 그 다음날엔 요리 세가지. 사실 그렇게 보면 크게 차리는 건 아닌데 그래도 뭔가 나도 즐기면서 요리도 하고 하려다보면 미리 준비할 것도 많고 타임플랜도 잘 해야하니까 은근 마음 한자락에 부담이 된다.

그래도 이 부담이라는 게 내가 잘 하고 싶어서 그런 거고 아무도 시키는 사람도 없으며 (시부모님은 와서 같이 하자고 하시기도 하고 실제 오셔서 같이 도와주실 거다.) 나도 즐겁게 즐긴다는 점에서 한국에서 며느리들이 느낀다는 명절스트레스와는 많이 다른 스트레스다. 다들 손님차림 멋드러지게 해내니까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서 생기는 부담이라고나 할까? 그나마 다행인 건 손님초대도 하면 할 수록 는다는 것.

내일 하루만 더 보내면 창문에 쌓인 선물을 트리 아래로 내리고 (지금 내리면 하나가 다 뜯어볼 것이기에) 선물을 개봉하며 기뻐하는 하나를 볼 수 있겠구나. 나도 옌스가 올 해 내 선물은 몇달이나 미리 샀다는 데 뭔지 도대체 알 수 없어 궁금하다.

껍질을 벗긴 아몬드와 껍질의 잔해
Julestemning i vores lille lejlighed

덴마크 명절 단상

덴마크에 와서 보니 가족 모임이 한국에서보다 훨씬 잦다. 그리고 모였다 하면 밖에서 외식하는 거 없이 대부분 집에서 모여 식사를 하고, 점심, 저녁까지 두끼는 기본이다. 모이는 장소는 자녀의 집에 처가, 시가 식구가 함께 모이는 경우부터 처가나 시가로 때에 따라 바꿔가며 방문한다. 딱히 정해져있는 건 없다. 음식도 나눠서 해가고 뒷정리도 다 같이 한다. 중요한 차이점은 남녀 모두 일을 한다는 점이다. 아니, 오히려 남자가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최소한 우리 시댁은 그렇다.
 
손님을 집에서 치르는 일이 잦은데, 서로 오고가며 그리 하다보니 조금씩 손님맞이가 익숙해지고 좋아진다. 뒤늦게 치우는 일이 조금 번거롭긴 하지만, 부부가 같이 정리하면서 그날의 저녁에 대해 담소를 나누는 일도 즐거움의 일부다.
 
불만은 한쪽이 일을 부담할 때 생긴다. 덴마크의 이런 남녀 평등이 찾아온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여성의 참정권 확보가 불과 100년전이고, 1950년대를 전후로 해서야 여성의 경제참여 비중이 늘어나고 여성의 역할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 학생운동을 시점으로 한 변화가 지금의 사회 모습의 초석이 되었으니 꽤나 최근의 일이다.
 
우리가 덴마크에 비해 민주화나 근대에 들어선 발전의 시작이 늦기는 했으나, 그 시간의 격차가 아주 큰 것은 아니다. 아직도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양성간의 차별은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전통의 이름으로 이러한 차별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도 한다. 
대가족간의 모임이 예전같지 않고 갈수록 핵가족 되어가는 현상이 아쉽다. 현대화가 교류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텐데. 우리 명절 문화가 변화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아주 많이 부족하다. 이제 막 첫 발걸음을 떼는 수준이라 생각한다. 이제는 남자들이 조금 돕는 정도가 아니라 획기적으로 모두가 함께 일하고 먹고 즐기는 기회가 될 때가 충분히 되었다. 불만이 사라지면 교류에서 찾을 수 있는 과실이 눈에 보인다.
집안일을 추가로 더 하더라도 이곳의 명절은 즐거운 날이 되었다. 서로 위해주는 가족들을 만나게 되고, 나 또한 그 일원이 된다는 것, 그리고 미래에 내 아이들에게도 더 큰 가족을 안겨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피로 섞인 내 가족이 아니기에 그와 같을 수 없다하더라도 그건 당연하다. 내가 그들에게 가족과 똑같은 애정을 부어주기엔 우리가 아는 시간이 아직 짧고 아직 더 가까워질 거리가 많이 남았기에 말이다.
물리적인 거리와 언어 문제 등으로 인해 한국의 내 가족과 옌스가 내가 이곳에서 동화되는 만큼 가까워지지 못함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문제일 뿐, 양쪽의 문화를 모두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더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멀지 않은 시기에 나도 우리의 2세를 가질 수 있고, 그 2세에게 두개의 다른 문화와 가족속에서 자랄 수 있게 해주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