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보내는 저녁의 적막함

옌스가 출장을 간 날이면 그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진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일까? 내가 한국으로 여행을 간 때면 그 빈자리가 이렇게 느껴지지는 않으니 말이다.

이번 달엔 이번 주 한 주, 다음 주 한 주 건너 그 다음 또 한 주 이렇게 2주를 꽉 채워 집을 비우니 그 빈자리를 느낄 기간도 길다.

회식이나 친구들과의 모임이 별로 없다보니 카약이나 기타 취미활동 등으로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대충 10시 전엔 집에 들어오는 터라 이렇게 10시 반을 넘어가는 시간에 혼자 집을 지키는 일은 어색하다. 내 옆자리를 파고드는 보리도 없고.

이 기간이 길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늦은 시간 내가 원하는 음악을 켜고 공부를 하든, 글을 쓰든 일련의 활동에서 그 나름의 묘미를 찾는 것이지, 그게 아니면 이 저녁시간을 그렇게 즐기진 못할 거다. 해외에서 홀로 맞이하는 저녁의 적막함이 주재원 생활 중 가장 힘든 것이었으니까. 사실 보리를 한 가족으로 맞이한 것도 그런 적막함을 견디기 힘들어서였고. (물론 반대로 낮에 나를 기다리는 보리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나와 달리 옌스는 혼자 시간 보내는 것을 참 잘한다. 하루를 어떻게든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로 꽉 채우고자 노력하는, 24시간이 부족한 사람이니까. 되려 저녁에 졸음이 오더라도, 그 시간에 졸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될까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니까. (그게 자기 단점이라고 한다. 뭘 스트레스를 받기까지… 뼛속까지 경제학자다.) 그래서 내가 열흘간 한국 가 있으면 그게 꼭 나쁘진 않단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거 좋다고. 그래도 그게 긴시간이 아닌 거 아니까 좋은 것이지, 내가 집을 비울 때 내 존재의 크기를 새삼 크게 느낀다고 하는 것을 보면 나나 그나 별반 다르지 않다.

애가 태어나고 나면 옌스가 출장을 간다고 해서 혼자만의 시간 따위는 없을 거니까 사실 감사한 마음으로 즐겨야 한다. 석사과정의 무거운 리딩리스트의 압박에 짓눌려 이렇게 딴 짓 하면서도 스트레스 받지만, 이렇게 틈새를 노리는 딴 짓도 사치가 될 시간이 올 테니까.

왠지 센치해지네. 음악도 한 몫하고 있다. Spotify의 Reading soundtrack, 처음 들어본 플레이리스트인데, 아주 마음에 든다. 바로 저장. 가을의 감성을 한껏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게 강력추천한다. 읽던 건 대충 마무리 짓고 설겆이하고 자야지. 벌써 옌스가 보고싶다.

 

이제 절반이다.

어제부로 만 20주였으니, 이제 절반이다. 오늘 아침 잰 체중으로 보면 임신시점보다는 여전히 1kg이 빠진 상태지만, 임신 아주 초기에 입덧으로 몸무게가 준 경우는 그냥 그걸 임신 시점 몸무게로 봐도 무방하다고 하니, 3kg 찐 걸로 보면 되겠다.

배가 눈에 띄게 불러오고 있다. 헐렁한 옷을 입는 경우가 아니면 임산부인 것을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불러오는 배와 함께 뭘 먹어도 쉬이 포만감이 느껴져서 충분히 먹기가 힘들다. 입덧만 끝나면 식욕이 돌아올 거라 하더니만, 입덧이 끝난지 한달 반이 지났지만 폭풍식욕 같은 건 경험하기 어렵다.

그나마 이 체중을 늘린 것도 어거지로 열심히 먹어대서인 것을 생각하면 체중이 많이 늘어 고민하는 임산부는 어떻게 이 배부른 느낌을 견뎌내고 먹었을까가 난 되려 궁금하다. 아니면 이런 배부른 느낌도 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건강한 식단을 유지하며 체중을 늘리는 법을 고민하자 식단에 관심이 많은 여자 친구들로부터 이러저러한 조언을 얻었다. 아보카도, 렌틸콩, 견과류, 크림치즈 등을 많이 먹으라는 것. 안그래도 아침으로 자주 토스트에 아몬드 크림치즈를 듬뿍 얹어 먹으며 우유를 큰 걸로 한 잔 가득, 사과와 자두 등을 2~3개 먹고 있다. 뭔가 부엌에서 열심히 조리해야 하는 게 한껏 귀찮아진 요즘, 학교 구내식당에서 콩류 등도 열심히 먹고 있는데, 아보카도는 추가할 좋은 아이디어이다.

사다두고 잘 먹지 않고 있는 김치를 빨리 먹어 없애고자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먹었다. 정말 간만에 대 성공. 제일 쉬울 것 같은 김치볶음밥을 맛있게 만드는 게 어렵다니. 이상하게 고슬고슬한 볶음밥은 어떤 것이든 종류를 막론하고 참 어렵더라. 아무튼, 그걸 먹어서 그런가. 벌써 6시가 다 되어가고 있는데, 배가 아직도 빵빵하다. 저녁 식욕은 제로. 내 현재의 배 크기와는 상관없이, 그냥 느껴지는 기분으로는 배가 앞으로 터져버릴 것 같다. 내일부터 다음주 일요일 저녁까지 꽉 채워 1주일을 출장으로 집을 비우는 옌스는 집에서 밥하기 싫으면 나가서 한식당에 가더라도 저녁을 같이 하자고 하는데… 이 꽉 찬 배로…

아무래도 오늘 운동을 너무 안해서 그런 모양이다. 통학을 위해 매일 20km정도 자전거를 타는데 주말엔 아무래도 운동량이 줄어드니까. 출산 직전까지 다닐 학교가 일종의 내 임신 기간 중 트레이너인 셈이다.

오랫동안 쉬었던 발레는 지난 주부터 다시 시작했다. 오랫동안 안한 것도 있고, 너무 뛰는 센터워크는 좀 무리일 것도 같아 초급반으로 신청을 했다. 발레 선생님께 임신 사실을 알리고 났더니, 발레는 출산 전날까지도 해도 되는 운동인 거 아냐며, 오히려 골반을 열어줘서 아이를 쉽게 출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운동이니 끝까지 열심히 나오라고 한다. 나도 그 사실을 듣고 간거지만, 그렇게까지 이야기 하니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좀 이렇게 움직여줘야 소화가 되어 먹을 생각도 들고 몸무게도 조금이나마 더 늘릴 수 있겠지. 아흐레 있으면 볼 2차 초음파가 엄청 기다려진다. 애는 잘 자라고 있는건지…

“한국이 그리운가?”

몇 일 전, 여름과정 기말 프로젝트를 함께 하던 덴마크 친구가 물었다. “한국이 그립지는 않아?” 한 5초정도 고민을 하다가 (사실 대화 중 5초의 적막은 짧지 않다.) 그렇지 않다는 답을 해주었다. 사실 내가 그리운 건 한국이 아니라 한국에 두고 온 가족과 친구 등이지 한국이 그리운 건 아니라고 덧붙이며.

뭘 먹을 수 있을지조차 잘 모르겠어 한국 음식이 막연히 그립던 입덧 시기를 지나간 후에는 한국 음식 자체가 생각이 나지 않고 있다. 강한 냄새나 양념, 고기 등이 싫어지고 나니 그런 것 같고, 그나마 심각한 갈증을 느끼던 음식은 한국가서 몇 번 먹고나니 해갈이 되었던 모양이다. 또 엄청나게 그리워하던 음식들은 내 머릿속으로 그리던 음식 맛과 실제 맛 간의 괴리만 오히려 느끼고 나서 그 갈증이 싹 없어지기도 했고.

한국의 자연이 그리울 때는 있다. 자주 가지는 않았어도 간혹 가고 싶을 때 오를 수 있는 산이 있었던 것이 가장 그립다. 지평선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여기저기 솟아있는 산은 한국에 사는 이상 그리워할 이유가 없는 너무나 당연한 존재였는데, 덴마크는 다 평지니까.

20대까지만 해도 서울이 정말 좋았다. 모든 것이 집적되어 있기에 음식, 공연, 전시, 쇼핑 등 내가 먹고, 보고, 하고 싶은 것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좋던지. 평균 한시간이 넘는 도시내 이동시간은 당연한 일이었기에 특별히 불편하다고 느낄 일도 없었고, 사람이 많은 거리는 도시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피같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런 인파를 뚫고서라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그런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동을 느꼈고, 미여터질듯한 유명 작가의 전시를 줄서서 볼 때면, 그 인파에도 불구하고 그런 전시를 볼 수 있는 기회가 감사했다. 교보문고와 같이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있는 큰 서점에 앉아서 사고 싶은 책을 천천히 읽어가며 고를 때면 도심 한복판의 여유가 더욱이나 소중하게 느껴졌고, 또 대형 오페라나 클래식 콘서트에 가면 그런 공연 저변이 별로 없는 지방에 살지 않는 것은 얼마나 다행이다 싶었는지.

인도에서 2년 반의 해외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던 2011년 그 해, 나는 역문화충격을 받았다. 길에는 차와 사람, 동물로 그 복잡함에 정신이 혼미해질 듯한 현기증을 자주 느끼곤 했지만, 쇼핑센터를 가던 식당을 가던 내가 돈을 내고 소비를 하는 공간에서는 한국에서와 같은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이미 길에서 느낀 피곤함으로 인해 한국과 다르다고 느끼지 못했고, 한국에 돌아가면 항상 지금의 이 생활보다 좋을 것이라고만 상상을 하곤 했던 것이다. 막상 돌아온 후에 느낀 건 인도보다 질서정연한 도로와 정리된 도심 이외에는 더 복잡하고, 더 피곤한 일상이었다. 어딜 가도 줄을 서야 하고, 물건을 사려고 해도 사고 싶은 건 사이즈가 없고, 뭘 보려해도 미여터지는 사람 구경을 해야 하는 것 등. 물론 인도에 없던 문화 저변에 대한 접근은 대단히 감사한 일이었지만, 내가 기억하던 것과 달리 서울이 정말 붐비고 지치는 도시라는 것을 인식하게된 큰 계기가 되었다.

덴마크에 오고 나니 이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더이상 내가 서울과 같은 대도시생활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난 아주 간혹 문화적 갈증을 해소해줄 수 있는 기회와 자연만 있으면 크게 여행을 다녀야 되는 것도 아니고, 맛있는 것을 찾아 먹어야 하는 사람도 아니고, 이것 저것 쇼핑을 하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 모르던 나를 알게 된 것이다.

이민이라는 게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새로이 직장을 구해야 하고, 언어도 배워야 한다. 이제 사전을 옆에 두면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일간신문을 읽을 수 있고, 왠만한 대화는 다 덴마크어로 할 수 있다. 직장생활을 덴마크어로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 뿐이지. 대학원을 원하는 대로 배우고 싶은 것들을 잘 흡수해 배우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는 목표를 향해감과 동시에, 내 가정도 잘 꾸려가고, 운동도 해가며 덴마크어를 배우는 등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저글링하듯 해야 한다. 마침 운동선수가 잘 맞는 매니저를 만난 듯이 나를 잘 이해하고 나와 비슷한 남편을 만나 여러모로 배우며 나 스스로를 잘 채찍질 할 수 있게 되었다. 페이스 조절 잘하며 장거리 레이스를 잘 할 수 있게끔 말이다.

이민자로서 느끼는 피로감을 느꼈던 시기가 있었고, 앞으로도 그런 시기가 다시금 닥쳐올 순간이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은 있다. 그래도 난 이제 덴마크의 삶에 충분히 적응을 했고, 이 곳의 삶이 내 라이프스타일과 잘 맞기에 오히려 더 내 집같은 생각이 든다. 언어가 편안해지면서 사회로부터 더욱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리고 물질적이든 자연 환경이든 소비를 하고 싶은 것들은 충분히 소비할 수 있는 저변이 되면서도 물질적 소비가 중심을 이루지 않는 사회문화, 가족 중심의 생활 패턴, 내가 뭘 어떻게 하든 사회의 룰을 지키는 범위안에서라면 서로 터치하지 않는 점 등이 좋다. 내가 가정을 꾸리며 처음으로 제대로 된 뿌리를 내리게 된 곳이 여기라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 막상 질문을 던진 덴마크 친구는, 자기는 덴마크를 뜨면 정말 덴마크가 그리울 것 같다며, 인도네시아에 정착해 현지인과 결혼해 10년 이상 살고 있는 자기 형처럼 나 같이 이민 생활하는 사람들이 대단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을 크게 그리워하지 않으며 살고 있는 내가 신기하다고. 3년을 살고 이런 일을 논하기엔 내 이곳 생활이 너무 짧은 것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7년을 더 살고 나면 난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의 차가운 단면

간혹 내가 참 차가운 사람이다 싶은 때가 있다. 감정이 완전 메마른 건 아니지만 머리가 감정에 앞서기도 하고. 사실 그 덕에 크게 누구와 다투거나 하지 않는 것 같다. 옌스를 만나고 사랑하고 또 잘 다툴 일이 없는 건 둘이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만약 옌스가 나와 반대의 사람이었으면 나는 정말 힘들었을 거고, 내가 현재의 나와 반대의 사람이었으면 옌스가 나를 견디지 못했을 거다. 감정이 상한 일이 있었으면 곰곰히 앉아 생각을 해보고 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이성적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내 감정을 전달하고 내가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범위 안에서 상황을 바꿀 만한 방법을 제시하고 해결하니 소리 높여 다툴 일이 없다.

그런데 삶은 나와 닮은 사람과만 함께 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런 저런 인생의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내 이야기에 서운해할만한 사람들이 꽤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무조건 내 편이 되어줬으면 하는 바램에서 하는 푸념을 들을 때라던가, 내가 생각하기엔 합당하지 않은 일인데 동의를 구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라던가. 원하는 답을 해주기가 너무 어렵다.

사실 내가 원래부터 이랬던 건 아닌데, 10년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참 많이 달라진 것 같다. 나이가 들며 외양도 달라지지만, 그보다는 내 알맹이가 정말 많이 달라졌다. 문득 드는 생각은, 해외생활이 나를 바꾼 것 같다. 혹시 내 깊숙한 속에 내밀하게 힘들어하는 나를 내가 숨겨두고 있는건지는 나조차도 알 수 없지만,  적응의 시기도 많이 지나고 더이상 그렇게 힘든 것 같지는 않다.

누가 잘해야만 한다고 한 건 아니지만 그간 시키지 않아도 한국에서 살아온 방식은 여기에 산다고 변하지 않기에 뭘 해도 그냥 열심히, 최선을 다해야 하고 그래서 잘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내가 정말 독립된 존재로 강인하게 살지 않으면 내 삶이 힘들어지니 최대한 빨리 홀로 서기할 수 있게 언어도 배우고, 학업도 열심히 하고, 체력도 기르려 한다. 뭘 하더라도 남편도움을 받는 일은 거의 없다. 어떤 문제에 대한 상의는 해도 실제 서류작업을 하거나 행정처리나 금융거래를 하든 사전을 찾든, 구글 번역기를 돌리든, 법전을 읽고 공문서를 읽어내서라도 다 직접 했다. 간혹은 남편에게 이민자로서 이렇게 뭘 하나 하려해도 다 어려운게 너무 힘들다고 푸념하기도 했지만 결국 언젠가는 내가 다 배워야 할 일이니 하겠다고 나서서 다 했다. 그러니 누가 나에게 그런 걸 다 빨리 잘해내는게 부럽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면 부럽거나 할 일이 전혀 아니고 그냥 열심히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열심히 하지 않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라는 원론적인 이야기밖에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무엇을 하든 그건 개인의 선택이라는 이야기를 해줄 수 밖에. 결국은 공감이 참 결여된 응답이다.

내가 이렇게 했다고 남들도 이렇게 해야하는 게 아닌데, 타인의 힘듦에 대한 하소연이나 고민을 들을 때면 내가 너무 내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답을 한 것 같다. 나도 십년전의 나였으면 지금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했을텐데. 좀 더 공감하고 이해해주지 못하는 내가 아쉽다. 물론 공감 잘 못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크게 바뀐 건 아니라 그건 내 본성이려니 싶지만… 내가 딱히 차가운 사람이 되려고 해서는 아닌데 조금 그런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해서 아쉬운 거다. 아기가 태어나고 내 모성애를 자극해주면 바뀔까? 아기가 태어난다고 내가 엄청 바뀔 것 같지는 않은데.

인생사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는 없는 거니까, 한켠으로 차가운 면을 가진 나를 받아주는 사람들하고 만이라도 잘 살아봐야지. 모두에게 사랑을 받으려하는게 아니라 미움받지 않으려는 것도 다 욕심이다.

 

마지막 나 홀로 한국여행

한국은 정말 가마솥 더위가 뭔지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서서히 올라가는 기온에 적응했다면 모르겠지만 조석으로 15~20도 사이의 기온과 함께 부슬비, 바람이 결합된 날씨에 적응되어 있던 나에겐 견디기 힘든 날씨였다. 도착하는 날은 오후 3시에 랜딩하고, 출발하는 날은 오후 1시 반에 이륙하기에 공항에서 집까지 이동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나면 여드레 반도 안되는 기간동안 머물러있었는데, 그게 짧으면서도 참 길게 느껴진 것 또한 이 날씨 때문이었다.

속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온 건 아니라 하루 한끼 이상은 제대로 먹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계획했건 음식들의 상당 부분을 먹을 수 있던 것은 참 다행이었다. 먹고 싶었던 갖가지 나물과 낚지 볶음, 칼국수, 만두, 각종 해물찜 등. 깻잎 씨앗과 콩나물 콩을 사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시간이 너무 없었다.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을 다 만나지 못했던 것도 아쉽지만, 이 또한 시간이 너무 없었다. 날이 너무 덥고, 배가 조금씩 나오면서부터 중간중간 쉬고도 싶어지는 탓에, 점심, 저녁 약속 모두 잡고 비는 시간을 떠도는 일정을 소화할 수가 없는 것, 주말이 한 번 밖에 없는 것도 모두 제약요소가 되었다.

한국에서 떨어져있던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한국이 낯설어지는 면도 늘어난다. 새로이 봐서 낯 선 모습도 있지만, 그간 보지 않아서 낯설어진, 원래는 익숙했던 모습도 있다. 주변에서 한국말만 들려오는 것, 시내 도심에서 다른 도심으로 가는데까지 한시간씩 걸리는 것, 더 거칠어진 듯한 사람들의 운전 습관 (도로 한복판을 가로막는 꼬리 물기는 정말 인상깊었다.), 지난번과 또 달라진 사람들의 메이크업 유행, 길이든 상점이든 식당이든 어딜가나 사람으로 붐비는 모습, 맛집 앞 길게 늘어선 줄 (특히 종로의 모밀집이나 강남역의 셰이크셱 버거), 줄 서서 걸어가는 듯한 강남대로의 인파, 여기저기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왕복 8~10차선 도로, 줄어든 성형외과 광고 (전에 한동안 어딜가나 성형외과 광고로 도배되어 있었는데.) 식당 테이블마다 놓여있는 번호벨, 소리 높여 사람을 부르는 식당 문화, 거리에 거의 보이지 않는 자전거, 교차로와 횡단보도의 긴 신호등, 낮은 세면대, 줄어든 길거리 흡연자 수 (거의 못 본 것 같다. 덴마크에서 훨씬 많이 찾아볼 수 있는 듯.), 임산부에게 몸 조심하라고 나보다 더 걱정해주는 사람들, 서로 계산하려고 경쟁하는 사람들, 점심시간에 쏟아져나오는 직장인 인파, 없던 사이 새로 생긴 많은 건물 등등.

낯설다는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했던 것들이 내 삶의 기본 환경이 달라졌다고 눈에 새롭게 띈다는 사실이 재미도 있고 사람이 얼마나 쉽게 새로운 것에 익숙해지는 지 간사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제 짐을 싸야겠다. 아침 8시 반엔 출발해야 하는데, 어느새 오후 6시가 넘었다. 내년의 한국방문은 이번과는 완전 양상이 다를 것이다. 나 하나 바라보는 어린 아기를 데리고 들어올 것이고, 남편도 한달 가까이 되는 기간 동안 머물며 한국 생활을 간접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을 것이고, 시부모님도 한국의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거다. 그래서 이번 여행이 더 특별했다. 내 홀몸 (뱃속의 태아는 아직 내 일부인 것으로 치고)으로 하는 마지막 여행. 이 여행을 끝내는 의식으로 짐을 싸고, 돌아가자마자 바쁜 리듬으로 시작될 덴마크의 생활을 미리 계획해보며 오늘을 마무리해야겠다.

또 다른 한 쌍의 한-덴마크 커플 탄생

어제는 날씨가 하루종일 변덕스러웠다. 비가 오다 그쳤다, 흐리다 해가 떴다가, 바람이 불다 잦아들었다가. 정말 변화무쌍한 덴마크 여름 날씨의 전형이었다고 할 수 밖에. 덴마크에서 알게 된 친구의 결혼식이 예정되었던 어제, 교회 결혼식 후 운하 보트투어를 계획한 그들의 결혼식이 잘 진행될 수 있을지, 보트는 천장이 커버되는 보트인지 살짝 신경이 쓰였다. 덴마크에서는 나쁜 날씨는 없고 나쁜 옷차림만 있다는 이야기가 있기에,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우산에 더해 옌스는 우비 바지를 챙기고 나는 앞코가 막힌 플랫슈즈를 챙겼다.

우리도 결혼식날 비 오면 잘 산다고 하듯이 덴마크에서도 비 오면 잘 산다는 이야기가 있더라. 안 그래도 잘 살 것 같은 커플이었기에 비 오는 것 보면서 잘 살겠거니 싶었다. 우리도 비 오는 여름 날 결혼했기에 그게 꼭 크게 속상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계획에 차질이 빚어져도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즐길 커플인 것을 알았기에 마음 상하는 것 없이 그들이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실제 모두가 날씨에 상관 없이 아주 즐거운 결혼식을 즐겼다.

하이힐 신고 유럽의 돌길을 뛰는 것만큼 고역이 없다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옌스도 잘 알게 되어서, 여유있게 미리미리 출발해 교회로 향했다. 옌스네 조카 세명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는 크리스챤스교회 (Christianskirke)에서 식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교회 구조가 평균적인 교회와 조금 다르다 해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다른 면이 분명히 있었다. 신부에게는 다소 안타깝게도 복도가 짧고 좌우로 긴 교회였고, 신부가 미사 집전시 서는 연단이 복도 중간에 위치한 게 아니라 짧은 길이 때문인지 정면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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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대 위에 보이는 연단은 일반적으로 교회의 복도 중간에 측면에 위치해 있다. 결혼식에는 성직자가 저 위에 서지 않고 빨간 카페트 위에 선다. 세 번의 결혼식 중 두 번이 여성 성직자였고, 그 중 한 번은 아프리칸 혈통의 덴마크인 성직자였다. 루터교회라 우리나라의 천주교와도 개신교와도 절차적, 성직자의 역할적, 교회 건물의 구조적 측면에서도 다 차이를 보인다.

덴마크인 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온 커플의 친구들 비중이 커 대부분의 미사는 영어로 진행되었다. 간혹 덴마크어로 이야기한 경우에는 따로 이를 영어로 해석해 반복하지 않아서 덴마크어를 알아듣게 되니 결혼식 절차도 재미있게 와 닿았다. 특히 비가 와서 둘이 잘 살 거라며, 애를 많이 낳든, 돈이 많이 들어오든 복이 많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마 덴마크 가족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였는지 굳이 영어로 되풀이 하지 않았는데, 이는 이야기 해줬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살짝 해봤다. (나중에 한국에서 멀리 날아오신 그녀의 어머니께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고 살짝 말씀 드렸다. 행복하게 둘 잘 살 거라고.)

덴마크 교회결혼식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위 사진에 나온 의자의 좌석 배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원래는 4개만 놓이는데 (이 날은 신부 부모님 모두가 배석하기 위해 의자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원래는 신부 아버지만 동석한다.) 왼쪽에 신부와 아버지가, 오른쪽에 신랑과 베스트맨이 앉는데, 중간에 신랑, 신부만 일어나서 연단위에 선다. 혼인 서약과 반지 교환, 성혼 선언, 키스, 그리고 기도가 끝나면 이 둘이 왼편에 앉고 오른편엔 베스트맨과 신부 아버지가 앉게 되는 식이다. 이날은 의자 하나를 추가해 신부 어머님이 오른편에 앉으셨다.

결혼식 전 신랑이 그렇게 긴장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신랑을 자주본 것은 아니지만, 친구를 통해 들은 내용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본 내용을 토대로 형성된 그의 카리스마와 유머 넘치는 이미지와 매우 달랐다. 그 전에 옌스 동료의 결혼식에서도, 옌스 사촌의 결혼식에서도 엄청 긴장한 신랑의 모습을 봤는데, 역시 많은 하객들 앞에서 하는 결혼식은 누구에게나 긴장되는 순간인가보다. 베스트맨 증인 한 명만 두고 결혼한 우리야 딱히 긴장할 일은 없었기에 그냥 이런 타인의 긴장의 순간이 더 눈에 띄고 신선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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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한 신랑과 그의 베스트맨. 그녀의 신랑은 항상 여유가 있어보였는데, 이 날 그의 모습에는 긴장이 넘쳤다. 저녁 식사 때 베스트맨의 여자친구를 통해 들은 바, 너무 긴장해서 뭘 어떻게 준비해야할 지 몰라해, 베스트맨이 하나하나 챙겨줬다 한다. 항상 계획이 철저하고 뭘 해야하는지 명확하며, 효율적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그와 너무 달랐다고. 로맨틱하다.

 

우리의 신부는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부모님과 함께 입장하였다. 몸에 꼭 들어맞게 끈으로 졸라 맨 새하얀 웨딩드레스는 그녀의 피부색과 어우러져 그녀를 환하게 빛나게 해주었다. 어머니는 이미 눈물을 참느라 입을 굳게 다무셨는데, 결혼식 내내 흐르려는 눈물을 참느라 고생하셨다. 신랑, 신부가 연단에 서있는 동안 베스트맨이 휴지를 찾아 건낼 정도였으니. 타국에 딸을 시집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지고, 우리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등을 생각해보다 보니, 더 짠하게 느껴졌다. 붉어지는 눈시울을 참고 착석하시는 타이밍에 딸에게 눈물 안보이시려고 고개를 돌리시는데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냥 왠지 모르게 그래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안심하시라는 마음을 담아 환히 웃어드렸고, 어머님도 짧게나마 웃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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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신부 입장! 부모님을 양쪽에 모시고 입장했다. 양성평등에 있어 우리보다 앞서있다는 덴마크이지만, 결혼식 만큼은 아빠만이 동석하는 것이 일반이다. 국제결혼의 장점은 둘만의 스타일대로 바꿔도 그것갖고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 두 분과 함께 입장하는 그녀의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드레스도 정말 아름다웠지.

 

You may now kiss your bride. 그들은 성혼 선언이 끝나고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의 커플처럼 키스를 나눴다. 이 키스는 Closing the deal 같은 게 아닐까? 정말 둘이 결혼한 것을 확인하는 순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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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may now kiss your bride.”

 

장대비가 잠깐 그친 타이밍을 노려 배 타기 전 새로 탄생한 부부가 하객들에게 부부로 첫 인사를 나누는 리셉션을 위해 아페리티보를 즐기기 위해 야외로 이동을 했다. 부부는 같이 또 따로 하객들과 담소를 나눴고, 우리 모두 이 결혼을 축하하며 샴페인을 즐겼다. 간혹하는 와인 한 잔은 괜찮다는 의사의 말을 믿고 샴페인 한 잔을 하길 원했으나, 옌스의 강력한 주장으로 반 잔만 마실 수 있었다. 흑흑. 입덧 시작한 이후 역하게만 느껴졌단 레드와인과는 달리 샴페인은 여전히 싱그럽고 좋았다. 나는야 샴페인 p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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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 리셉션. 사실 완전 야외를 계획했다고 하나, 언제 비가 쏟아질 지 몰라 No. 2라는 레스토랑 테라스를 순식간에 빌려 이용했다. 다행히 그 와중엔 비가 한 방울도 안떨어졌다. 올 해 옌스 생일 때 갔던 곳으로 미슐랭 2스타의 영광에 빛나는 A.O.C. 주인이 같은 와인리스트로 약간 캐주얼한 파인다이닝을 위해 만든 곳이라 한다. 급작스런 요청에도 이런 리셉션 공간을 허해주어 어찌나 고맙던지. 괜히 다음에 또 한번 와야겠다 싶었다. 신부는 하객들과 환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우리 모두 준비된 샴페인을 마시며 즐거운 담소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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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샴페인은 옌스가 조금 뺐어 마셨다. 흑흑. 아기야. 너도 샴페인 한 잔 정도는 괜찮잖아? 그래도 우리는 마냥 신났다. 4개월만의 술

 

빗속의 보트 투어는 장소를 바꾼 리셉션의 연속이었다. 한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온 하객에게는 관광의 요소도 있었겠지만, 이 곳에서 온 우리에게는 신선한 리셉션이었다고나 할까?  다행히 우리는 비가 쏟아지기 전 보트에 올라탔지만, 신랑 등 많은 사람이 쫄딱 젖고, 신부의 드레스 자락도 비로 다 젖었는데, 모두 즐거워했다. 이 어찌 아니 행복할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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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서 드레스와 양복이 젖어도 우린 개의치 않아요. 저흰 지금 막 결혼했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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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마시고 즐깁시다.

웨딩 디너는 아주 오래된 고풍스러운 건물에 위치한 Bastionen og Løven이라는 레스토랑에서 진행되었는데, 여자는 자리가 정해져있고, 남자는 랜덤으로 뽑은 번호표에 따라 자리가 배정되고, 중간에 한번 테이블을 바꿔 앉는 식으로 테이블 팰리닝이 되어 있었다. 결혼식을 위해 만든 홈페이지와 청첩장 뿐 아니라 네임택조차 통일한 커플의 정서에 탄복했다. 사실 신부가 너무 바빠서 이런 준비는 신랑이 대부분 했다는데, 그의 세심함과 얼마나 정성스럽게 이들을 준비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우리 결혼때는 옌스가 손수 한장한장 이름을 칼리그래피로 써 넣었는데, 덴마크 결혼식에서 이 테이블 네임택이 갖는 중요성이 꽤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그래도 시어머니가 그런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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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세팅과 이름표. 이 꽃은 우리 집으로 가져왔다. 다 산거라며 신부가 집에 갖고가라고 귀띔을 해준 덕에 집이 화사해졌다.

 

해외에서 온 손님이 많은 결혼식이라 큰 틀에서는 덴마크 전통 결혼식을 유지하되 살짝 다른 모습도 볼 수 있는 재미있는 결혼식이었다. 특히 Hurra라고 뭔가 축하할 일이 있을 때 꼭 외치는 3번의 짧은 Hurra와 1번의 긴 Hurra를 들을 수 없었던 것이 신선했다. 난 당연히 가족들의 스피치 뒤에 이것이 따를 줄 알고 내 스피치의 마무리를 이로 준비했었는데, 오히려 내가 유일하게 이 건배사를 외쳤다. 이에 때맞춰 신랑의 친한 친구 중 한명이 Han skal leve라고 이 Hurra를 크게 외치는 노래를 뒤이어 부르기 시작해 홀 안이 Hurra로 가득차 어색함이 없어졌다. 해외 손님들이 이 Hurra가 어떤 건지 몰라 약간 어색함이 있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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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의 스피치. 사랑이 듬뿍 느껴졌다.

중간에 옆방에 가서 보니 gavebord라고 선물 테이블이 하객들의 선물로 꽉 차 있었다. 괜히 흐뭇해졌다. 우리나라의 축의금 문화와 달리 하객들은 선물을 준비하는데, 결혼하고 나면 하나하나 선물을 열어보며 선물명을 기록해 두었다가 이를 잘 쓰겠다며 고맙다는 답례카드를 보내곤 한다. 축의금과 달리 기억에 남고 좋더라. 초대 받아 정해진 RSVP 기간까지 온다고 답한 사람은 정말 어디 아파 쓰러지거나 집안에 무슨 큰 일 없으면 반드시 오고, 거의 하루 종일 낮부터 새벽까지 함께 즐기고 기뻐한다. 대신 초대한 사람은 참석자를 리셉션과 디너를 통해 하루 크게 대접한다는 방식이다. 따라서 축의금으로 대충 결혼 끝나면 수지가 대충 균형되게 끝나는 우리 결혼식과 달리 신랑, 신부의 지출로 식이 이뤄지게 된다. 왠만해서는 결혼 전 신랑, 신부를 다 만나 본 경우가 대부분이고, 직장 동료는 그 관계가 아주 오래되서 정말 친한 친구가 된 사람을 제외하고는 초대되지 않는다. 청첩장 돌려도 되는 사람인가 하는 부담을 느낄 필요도 없고, 하객 입장에서도 그리 가깝지 않은데 청첩장 받았다는 이유로 꾸역꾸역 가야하거나, 가지도 않을 애매한 거리인데 축의금 내야 하나 하는 고민 같은 것 할 필요가 없어 좋다. 대부분 결혼 계획을 아주 일찍 하기 때문에, 못 온다는 경우가 많지 않고, 애초에 초대할 만한 사람만 하기에 초대 받은 사람은 아주 기꺼이 온다. 자비를 내고 비행기를 타고서도.

내 결혼식에도 내 쪽과 옌스 쪽 하객 중 해외에서 온 손님들이 있었다. 오히려 한국-덴마크 든 국제커플 결혼할 때 난감한 상황은 한국식으로는 초대할 정도의 사람이지만 다른 쪽 관습으로는 초대할 만큼 가까운 사람이, “저 결혼식 불러주실거죠?”라고 물어오는 경우다. 어쩔 수 없이 상황을 설명하고 정말 가까운 사람만 초대한다고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지만, 실제로는 거절하기 정말 어려운 난처한 상황. 오히려 부르고 싶었지만, 우리 식으로는 비행기 표값을 대줘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신랑은 이해 못할 것이기에, 그리고 예산 문제로도 그럴 수 없는 상황) 한국식 짧은 휴가 문화 및 신랑, 신부가 따로 하객을 케어할 수 없는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초대하지 못하는 하객들도 많은데, 애매한 관계의 사람은 당연히 초대할 수 없다. (간혹 당연히 초대받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 중 초대받지 못하면 섭섭해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아무튼 초대 받으면 정말 고마운 것이고, 그래서 같은 나라에 있는 경우는 특별한 사유를 제외하고 (거의 그럴 일이 없다. 3~6개월 전에 초대하니까) 거절하면 사이가 약간 어색해지기에 대부분은 다 온다. 우리도 매우 감사하며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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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한가득 결혼 선물이! 우리 것은 한 복판의 핫핑크!

여느 덴마크 결혼식과 마찬가지로 많은 스피치가 있었으며, 친구와 가족들이 공연 등도 준비했다. 다만 다른게 있다면 흥이 많은 비 덴마크 하객들이 떼창을 부르며 공연을 얼마나 흥겹게 만들었던지. 옌스는 이런 웨딩 디너는 처음이었다며 즐거워했다. 각각의 결혼식마다 살아있는 특색이 결혼식 참석을 항상 즐겁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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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의 오래된 고향친구들이 공연을 준비했다.

신랑과 신부는 얼마나 행복해보이던지. 옆의 어머니도 이제는 눈물은 닦으시고 즐거이 식사와 담소를 즐기고 계셨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축복하는 결혼이니 잘 살겠지 하는 마음이 드셨을까? 영어로 진행되는 파티로 인해 다소 지루하셨을 것 같긴 하다. 새벽같이 준비 시작하셔서 다음날 새벽까지 진행되는 결혼이니 얼마나 힘드셨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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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이야기를 나누시길래 이렇게 다정한 눈빛을 나누시나요?

6시부터 시작된 길고 긴 저녁식사가 11시 즈음 끝나면, 테이블을 정리하고 춤을 출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꾼다. 12시가 되기 전 새로 탄생한 부부가 춤을 추는데, 이들을 삥 둘러싼 하객들이 전통 웨딩댄스 곡에 맞추어 한발 한발 다가서는데, 부부가 더이상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없어지면 춤은 끝나고 신랑 친구들이 모여들어 신랑의 양쪽 양말 끝을 가위로 자르는 것으로 모든 공식 일정은 끝난다. 그러면 자정부터 신나는 댄스파티와 술 타임이 새벽 5시 정도까지 이어진다.

우린 1시 정도에 자리를 떴다. 춤도 삼십분 정도 열정적으로 췄겠다 (과거의 수차례의 경험으로 이번엔 플랫슈즈로 갈아신고 저녁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춤도 출 수 있었고) 음료를 마시며 시간을 조금 보낸 뒤 자리를 뜨기로 했다. 항상 우리는 나이드신 분들 뜨는 타이밍에 뜨는데, 이렇게 새벽까지 노는 게 익숙치 않는 나 때문이다. 그래도 커피까지 마시고 버텨 (입덧은 아마 거의 끝난 듯?) 1시까지 즐겁게 놀고 돌아온 나에게 대견하다고 칭찬을 해주고 싶다. 사실 이제 슬슬 나오기 시작하는 배가 은근히 뭉쳐서 더이상 서있기 피곤하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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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외까지 받아가며 연습한 덴마크 전통의 웨딩 댄스. 아름다웠어요!

내가 초대를 받아 커플이 참석한 결혼식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첫번째는 옌스네 친척, 두번째는 옌스 친구 결혼식이었으니 말이다. 덴마크식 스피치 문화를 알지 못해 신부를 위해 한마디할 사람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초대해준 그녀에게 정말 고맙기도 하고 해서 스피치를 준비했는데, 잘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식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이제 대충 아는 상황인지라 그 어떤 결혼식보다도 편안하고 즐겁게 즐길 수 있었다. 하객들도 다들 어찌나 유쾌하고 흥이 넘치는 사람들이던지. 6시 정도부터는 날도 개어 사진도 야외에서 잘 촬영할 수 있었고, 그들이 계획했던 결혼식이 큰 변동 없이 아주 잘 진행된 거 같아서 그들을 대신해 내가 다 기뻤다.

이 둘이 평생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작은 일에 기뻐하고 서로 사랑하며 해로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잘 살아!!!

 

 

 

 

 

 

 

 

 

 

관계는 장담그듯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옌스의 3주간의 휴가가 거의 끝나간다. 나는 한 주 더 길게 썼으니 딱 한달이다. 4주간 정말 내 생애에 없을만큼 잉여로운 생활을 했다. 여행 다니며 먹고 쉬고 공부나 어떤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한달. 입덧 때문에 뭔가 열정적으로 할 여건은 안되기도 했고, 입덧과 함께 찾아온 피로로 하루에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방학이 때맞춰 찾아와준 것은 정말 축복이었다고 할 수 밖에.

덴마크에서는 결혼을 해도 시부모님을 어머니, 아버지로 부르지 않는다. 그냥 이름을 부르는 것이 전부. 30년을 한국에서 살아 형성된 시선으로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하니 적응하기 어려운 것들이 몇가지 있는데, 시부모님을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다. 나는 내 문화를 설명하고 엄마, 아빠에 해당하는 mor, far로 호칭을 하기로 했다. 옌스는 처음엔 이상할 거라고 하더니, 막상 시부모님도 정말 좋아하시고, 나와 그분들이 살갑게 지내는 것을 참으로 좋아한다.

부담스러우리만치 잘해주시는 시부모님임에도 나에게 시부모님이라는 존재는 나만의 경험 없이도 그냥 당연히 어려운 존재였기에 항상 행동이 조심스러웠었다. 오덴세에 사시다 보언홀름으로 이사가신 분들이라 거기서 가족이 모이긴 어려워 주로 시누이네 집에서 모이는데, 거기서도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게 좋은지 몰라 최대한 편하게 지내고 오고자 노력했다. 예를 들면 점심, 저녁을 먹는 모임의 경우, 식사가 끝나고 정리를 얼만큼 돕는게 좋은 건지가 매우 애매했다. 손님이 너무 거드는 게 실례가 될 수도 있기도 하고, 또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하자니 애매하고, 부엌도 너무 많은 사람이 있으니 오히려 동선만 복잡해지고. 시댁 가서도 좀 돕자니 이것 저것 하지 말라 하시고, 아무것도 안하자니 마음이 불편하고. 옌스는 그냥 편히 쉬라는데 한국인인 내가 그렇게 하기엔 내 살아온 방식이 그렇지 않아 마음 한구석 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 모든 것은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린 것이 아니었다 싶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사람들이 같은 공간을 공유하다보면 적당히 서로 겹치는 방법을 깨닫게 되고 익숙해지는데, 시부모님이나 나도 그런 것이었다.

시부모님네 별장에 가서 3박을 하고 돌아왔는데, 주시는 음식을 적당히 거절하기 (이것 저것 권하시면 세번이상 거절이 어려워 적당히 먹었었는데, 옌스가 장기적으로 보면 사전에 거절하는 법을 잘 배워야한다며 거절 잘 못하는 나를 교육시킨 바 있다.), 우리가 먹은 것들 설겆이 하고 정리하기, 시부모님 생활습관 파악하고 그를 존중하기 (우리 집보다 깨끗하게 생활하셔서 그거 맞추려면 조금 더 신경 써야한다.), 그 밖에는 그냥 내 가족들 대하듯이 편하게 생활하기 등을 잘 실천하고 왔다.

입덧이 심해서 먹을 수 있는 거 제약이 많으니 알아서 해먹을 거니 내 거는 신경 쓰지 말라고 옌스가 미리 전화하는 것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이것 저것 내가 먹을 수 있는게 뭐 있을지, 아무것도 요리해주실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많이 물어보셨다. 첫날은 다 거절하지 못해 조금 먹다가 결국 토하고나서는 어려워도 아니다 싶은 것은 다 못먹겠다고 말씀드렸고, 한번 그렇게 하고 나니 거절이 쉬워졌다. 샤워하고 나서 샤워부스 건조시키는 일도 그렇고, 설거지 하는 일도 그렇고, 돕겠다고 여쭤보는 거 없이 바로 하겠다고 나서니 잠깐 말리시다가 그냥 놔두시더라. 결국 적극성의 문제였던 것도 있고, 시부모님도 나를 완전히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전까진 손님같은 생각도 드셨기에 그랬었나 싶다. 내가 편해지니 시부모님도 나를 더 편하게 대해주시고 모든 것이 조금씩 더 자연스러워진다.

결론적으로 보면, 가족처럼 되기까지 한 일년은 걸리는 거 같다. 정말 장담그는 것처럼 관계도 시간이 걸리는 것. 물론 임신하면서 관계의 역학도 조금 더 새로운 형태로 바뀌는 것도 있었던 것 같고. 일종의 계기같은게 아닌가 싶다. 우리도 내년에 애 낳고 한국가서 한달정도 (나는 두달정도…) 우리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지내다보면 옌스와 우리 부모님 사이도 조금 더 편해지고 가족같아지겠지.

입덧이라는 미명하에 내가 좋은 엄마는 못되고 있는 것 같지만 (비타민 챙겨먹는거나 등등…) 이제 좀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아마 임신초기에 나처럼 막지내는 엄마도 별로 없을 듯. 이제 배도 – 나만 알 정도지만 – 나오기 시작하고, 진짜 애가 있긴 있나보다. 다음주 초음파를 처음으로 보기전까진 별로 실감이 안날 듯. 손주까지 나오면 또 다시 흐른 시간에 더불어 피가 섞인 손주를 낳은 며느리니 더 가족같이 느껴지겠지. 이제 정확히 30주 남았다. 그 날이 오기까지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결혼 참 잘 했다고 느낄 때

8월 3일부터 아흐레동안 한국에 있을 계획이다. 지난 부활절 같은 불상사가 없기만을 바랄 뿐이다. 반짝 없어졌거나 줄어들었다고 생각했던 입덧이 돌아와서 과연 원하는 것들을 잘 먹을 수 있을지에는 적신호가 들어왔지만, 그래도 가족과 친구도 보고 싶기에 한국에 부쩍 가고 싶다. 그렇다고 그런 이야기를 딱히 옌스에게 이야기하지 않는 건 괜히 섭섭해할 수도 있을까봐서다. 나의 집은 자기와 함께 있는 이곳인데, 다른 곳을 그리워하고 그곳에 빨리 가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면 괜히 섭섭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랬다. 생각은 자유고 표현도 물론 자유지만 표현엔 책임감이 따른다고 생각하기에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될 일은 거르는 편이다.

오늘 시내에 산책을 나갔다. 뉘하운과 크리스찬스하운을 연결하는 자전거/보행자 다리가 개통을 했다고 해서 어제 가보려고 했는데, 속이 안좋아 그냥 집으로 향했기에 오늘 다시 한번 시도해봤다. 먼저 커피 한잔과 케이크 등을 먹자고 카페에 가 앉아있는데, 한국 언제 가냐고 그가 물어봤다. 8월 2일 출국이라고 하니까, 나를 대신해 (on behalf of me) 내가 한국가게 되어 참 좋다고 한다. 지난번 너무 짧게 다녀와서 마음이 안되었다며… 으흑. 이 감동. 난 서운해할까 싶어 이야기를 안했는데, 오히려 내가 제대로 못다녀온게 못내 아쉬웠다며 잘 즐기고 오란다. 자기가 있으면 제대로 못즐기는 것도 있지 않냐며. 틀린 말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을 해주니 참 고맙기 짝이 없다.

요즘은 예전보다 좀 더 먹을 수 있긴 한데, 걸어다니면 엄청 미식거리고 자꾸만 토한다. 여기선 먹고 싶은게 너무 제한되어있다고 궁시렁거린 것 때문인지, 한국가서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만큼 잘 먹고 오란다. 이미 리스트는 쫙 뽑아놨는데, 과연 가서 실제로 이것들을 먹고 싶을 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기회가 주어진다는 자체는 감사하다.

이런 소소한 순간들을 맞닥뜨릴때면 내가 참 결혼 잘 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요즘 참 잠이 많아지고 게을러져서 조금 먹고 내내 자는 거 외엔 별로 하는게 없는데, 나 방학해서 참 다행이라고, 일하면 어쩔뻔 했냐고, 두명분 잘 자고 잘 쉬라는데 정말 고맙다. 옌스가 이렇게 나처럼 퍼져있었으면 그렇게 이해해줬을까 싶은 생각도 들고… 반대로 생각하면 이런 기회를 통해 배운대로 그런 기회가 왔을 때 나도 옌스처럼 이야기해줄 수도 있겠지. (물론 이제 옌스가 슬슬 조여들어오고 있다. 계량경제 한번 다시 들여다보기로 하지 않았냐고, 덴마크어 좀 더 보기로 하지 않았냐고. 흠흠. 옌스를 이런 것으로 조일 기회는 내게 없을 듯.)

만난지 이제 한 이년 반 지났구나. 딱 이년 반 되었다. 아직도 날 만나서 행운이라고, 내 인생의 사랑이라고, 내가 귀엽거나 아름답다고 하는 이 콩깍지 씌인 남자를 만난 건 나에게야 말로 행운이고 행복이다.

(막 이걸 쓰면서 실실 웃음을 흘리고 있는데, 내가 이렇게 웃는 걸 보면 정말 행복하다면서, 우리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생각하면 정말 기쁘단다. 단서로, 내년 2월 애가 태어나기 전까지만 그렇겠다면서. 시아버지가 시어머니께 말씀하셨던 것처럼 자기도 “나는? 나에게도 관심을 가져줘!”하면서 시위할 거란다. 옌스가 이런 사람인 건 회사 동료들은 모르겠지. 허허허.)

덴마크 여행단상

  • 덴마크가 오랫동안 잘 살아온 선진국이라는 것을 느낀 것은 이번 여행을 통해 전국 구석구석 잘 닦인 포장도로를 보면서다.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은 잘 관리가 되어도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곳은 자원을 충분히 투입하기 어렵기에 속속들이 관리하기 어려운데, 개인의 집이 낡고 낙후된 지역은 있을지언정 그를 연결하는 인프라가 낙후된 곳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 시골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 교회는 정부 종교부에서 관리를 하는데, 교회와 그 묘지, 인근 도로며 주차장까지 얼마나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있던지.
  • 율란을 여행하며 덴마크가 풍력의 나라임을 명성 뿐 아니라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할 수 있었다. 드넓은 평원과 농지엔 어김없이 풍력발전기가 세워져 있었고 바람의 땅 답게 거센 바람이 그들을 쉬지 않고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 율란사람들이 무뚝뚝할 것이란 편견과 달리 시골인심이 더 좋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나라나 비슷하구나.
  • 옌스가 18살이 될때까지 자랐던 집에 처음으로 가봤다. 구글 스트리트뷰로만 봤던 곳이었는데. 다음에 한국에 가면 내가 자라면서 살았던 동네들을 가보고 싶단다. 내가 어떻게 자랐는지 더 알고 싶다고.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계속 한자리에 살고 계신 외할머니댁을 방문했을 때, 내 삶을 더 잘 느낄 수 있었다고. 옌스가 스케이트보드를 타던 공터, 10학년까지 다녔던 학교, 시부모님이 운영하시던 치과, 옌스와 여동생이 크면서 방과 독립된 출입구를 따로 주기 위해 증축했던 부분의 흔적을 보는 일은 마치 과거를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 난 어렸을 때 살 던 곳을 가면 상전벽해라는 표현이 딱 맞다고 느낄만큼 너무 많이 변해서 추억을 더듬기 어려운데, 그래도 다음엔 그 흔적들을 찾아 보여주고 싶다.
  • 덴마크 사람들은 속도를 꽤나 내는 편이다. 정속으로 맞추고 크루즈로 주행하려면 마지막 차선에서 조용히 달려야 한다. 대부분은 시속 10~20킬로미터 정도 초과한 속도로 달린다. 독일인에 비하면 덴마크인은 규제에 적응하는 방식이 평균적으로는 유연한 것 같다.
  • 에벨토프트에 가서는 유명한 정치인을 봤다. Radikal Venstre라고 중요 보수당 중 하나인 정당의 당수다. KBS 다큐에서 자기 애를 사무실에 데리고 온 모습이 잠시 비춰진 적이 있는데, 그 딸과 함께 1800년대 전함을 보러 왔더라. 매우 유명한 정치인임에도 아무도 아는 척 하지 않는게 역시나 인상깊었다. 매번 유명한 사람 보면 아는 척하는 사람은 나고, 옌스는 티내지 말라고 한다. 사생활은 존중해줘야 한다고.
  • 콜드하와이라고도 불리고 파도가 서핑하기에 좋아 사람들이 몰린다는 서해안가 Klitmøller라는 곳에 다녀왔다. 바람이 불고 날도 흐리고 비가 와 추웠는데, 샵들이 문을 닫는 시간 막판까지 서핑과 스탠딩 패들링 보드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았다. 영어로 대화하고, 액센트가 여기 것이 아닌 점으로 보아 미루어 짐작하길 덴마크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았다. 겨울에도 서핑을 즐기는 지역이라 하니 지금 즐기는 사람이 있다 해도 이상할 건 아니겠지만, 역시 내 눈엔 놀랍게 보였다.
  • 산업화된 어업이 발달된 어촌을 방문했는데, 정말 생선 냄새가 진하더라. 어부들은 그 냄새를 돈냄새라고 한다던데, 돈냄새 한번 진하게 맡고 왔다. 바다도 비린듯한 바다 특유의 짠내가 나던데, 역시 대양에 접한 바다에 가야 이런 냄새가 나는구나 싶었다. 우리네 삼면의 바다에서 나는 그 짠내가 코펜하겐에선 나지 않아 바다가 바다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대서양을 접하는 서해안은 우리네 바다와 닮아있었다.
  • 세계 2차대전 기간 중 덴마크는 독일에 점령당한 아픈 기억이 있다. 금방 항복을 했기에 큰 피해는 없었지만, 내 나라의 주권을 잃은 슬픔이야 어느나라고 다를 바 있겠나. 연합군이 덴마크 연안을 통해 침공을 해올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독일군은 서해안가에 무수히 많은 벙커를 지었다. 이는 서해안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었는데, 콩크리트가 부식되며 무너지고 그 안에 날카로운 철근이 드러나는 등 애들에게 위해요소가 되고 있다고 한다. 경관을 해치는 것은 당연하고. 이를 철거하는 비용을 독일이 대야 한다는 등 논란이 계속 있다고 한다. 앞으로 어떻게 바뀌려나? 전쟁의 기억을 위해 놔두는 것도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 구조물을 해체한다고 기억도 해체되는 것이 아니며 아름다운 경관을 해하는 구조물은 없애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다.
  • 한국음식이든 다른 아시아음식이든 빵이 아닌 메뉴를 오래 못먹으니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원래 빵만 먹고도 일주일 버티는 것은 일도 아니었는데, 입덧 덕에 버터나 유제품을 많이 못먹는 관계로 힘들었다. 마트에 뭐 사러 들어가면 나는 빵집 버터냄새로 인해 몇차례나 구토감을 느꼈다. 중간에 태국 식당을 하나 발견해서 볶음밥을 먹고나니 얼마나 살 것 같던지.
  • 다니다보면 건물들 관리상태에서 못사는 지역과 잘사는 지역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Udkantsdanmark (울캔츠덴마크) 는 조세수입보다 지출이 큰, 사실상 경제가 죽어있는, 잘 못사는 지역을 일컫는 단어다. 갈수록 경제가 큰 도시들로 집중되다보니 이런 지역들도 늘어나는데, 일할 의욕도 없고 나라가 주는 돈보다 더 벌 능력도 없는 사람들 중에 이런 지역으로 이주오는 사람들이 많아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나라에서 주는 돈은 똑같은데 집세가 낮고, 사회복지를 수령하는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으려는 노력을 나라에서 강제하는데, 일자리가 없어 일을 하라고 등떠밀릴 일이 없는 지역이기에 이사를 온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면 지방세수가 부족해 해당 지방정부는 지역사업에 투자할 예산이 부족해지고 사람들도 집 관리를 잘 안하니 도시가 우중충해지고 좋은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으려는 지역으로 변해가게 되어 악순환이라고. 조금만 가꿨으면 좋았을 도시들이 우중충하게 바뀌어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 마지막 여정을 위해 선택한 (호텔이 다 예약이 차서) Bed & breakfast에선 기이한 집주인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만 65세가 되어 은퇴를 한 그는 피아니스트 와이프와 이혼을 하며 2백만 크로나를 주고 데려온 전처의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어깨에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유수의 콩쿠르도 나가며 바이올린을 연주했다는데, 그의 바이올린 선율에서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좀 뜬금없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음에도 그 집을 예약한 이유는 그 집 사진에 있는 그랜드피아노 때문이었는데, 피아노 연주도 수준급이었다. 바이올린을 그만두고 유럽내 상업항공사의 파일럿을 했던 그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얼핏 들으면 허풍처럼 들릴 수 있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냈던 그였지만, 이야기를 통해 느껴지는 그의 해박한 지식들과 마침 놀러온 동네 주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이야기가 진실임을 알 수 있었다. 다음에 또 그 곳에 갈 일이 있다면 그의 집으로 또 방문을 할 것 같다. 남유럽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기에 그랬을까? 쉽게 사람에게 마음을 내어주고 품어주는 느낌에 마치 남유럽사람을 만난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 4박 5일의 짧은 일정동안 즐겁게 여행하다 돌아왔다. 중간중간 입덧 때문에 오후스는 거의 보지 못하고 라틴쿼터만 돌아보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는데, 그래도 다른 지역들도 돌아보고, 옌스 친구와 내 친구, 옌스네 친척도 만나면서 좋은 시간 보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여기서 말하는 친구란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된 한-덴마크 커플중 여자분인데, 한-덴마크 커플이기에 공유할 수 있는 여러 이야기와 경험을 공유할 수 있었던 점, 참 따뜻하고 유쾌한 사람들이란 점에서 이번 여행을 또 다른면에서 알차게 해준 시간이었다.
  • 집으로 오는 길은 항상 길다. 600킬로가 넘는 거리를 주로 고속도로로 달리다보니 지루하기도 하고 해서 열심히 달려왔다. 옌스가 나보고 속도악마 (speed devil) 란다. 시작은 나도 여유롭게 달리고 싶었는데,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속도에 대한 감각도 흐려지고, 인내심도 서서히 바닥을 보이며 막 달렸다. 집에 오니 시체가 되어 침대에 널부러져있었는데, 역시 집이 최고인 것 같다. 물론 이런 여행을 해야 집이 최고라는 것을 느끼게 되곤 하지만.
  • 오후스에서 만난 친구와도 이야기한 바이지만, 이 나라가 진정한 의미에서 내 집이라고 느껴지려면 얼마나 살아야 할 지 잘 모르겠다. 막상 한국에 돌아가면 또 이질적인 감정을 느끼게도 되긴 하지만, 그 곳에선 삶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고, 여기선 그렇지 않기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 같다. 우리가 커오면서 너무나 당연히 아는 사실과 관습이 사실은 얼마나 오랜 기간에 걸쳐 꾸준히 학습을 해온, 어렵게 체득해온 것인지를 인지하기엔 해외에서 살아보기 전까진 모른다. 아마 앞으로 30년을 살아도 새롭게 배우는 것들이 있을 거다. 그래도 그땐 내 집이라고 정말 느껴질까?

덴마크에서 먹고 사는게 힘든 이유

덴마크에선 한국인으로서 간혹 먹고 사는게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1.

해산물이 귀하다. 흔히 구할 수 있는 생선은 대구와 가자미과의 납작한 흰살 생선의 필레. 새우 쭈꾸미같은 작은 오징어류와 관자 등의 냉동 해산물을 팔긴 하지만 조개류라고는 주로 냉동 홍합이 다다. 해산물 전문점은 좀 사는 동네에 가거나 토우어헬러너(Torvehallerne)라고 gourmet 식재료 파는 광장시장에 가야나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좋은 식자재는 얼마나 비싼지. 한국에선 그냥 아무 마트나 가도 사는 건데. ㅠㅠ

너무나 봉골레 스파게티가 먹고싶었다. 여기저기 파스타집 메뉴를 인터넷으로 검색해 샅샅이 뒤져 봉골레 스파게티를 찾아봐도 좀처럼 찾기가 어려워서 결국 만들어 먹기로 했다. 조개의 옵션은 큰 모시조개나 작은 바지락. 큰 모시조개를 선택하기로 했다. 1킬로그램에 180크로나! 한 35000원 하는 금액이다. 와인 작은병 하나로 50크로나, 플랫 파슬리가 집에 다 떨어져서 화분하나 25크로나 파스타면 20크로나 토마토 20크로나 대충 300크로나가 나왔다. 흐미. 5만원이 넘네. 물론 한번에 이 조개를 다 소화하고 싶진 않았지만 내일부터 4박 5일의 여정으로 휴가를 가기에 냉장고에 이를 둘 수는 없었다. 옌스는 조개 등 해산물을 그닥 좋아하지 않고.

봉골레 스파게티는 재료가 좋고 비율만 잘 맞춰주면 실패하기가 어려운 스파게티라 맛은 있었지만, 집에서 해먹는 것 조차도 이렇게 비싸지면 자주 해먹기 힘들다. 여태껏 조개를 한번도 안사봐서 몰랐는데, 이렇게 비싸니 식당에서 안 팔수밖에. 파스타에 이렇게 비싸면 누가 파스타를 사먹나. – -;;

덴마크는 잡히는 해산물의 대부분을 해외로 수출한단다. 자국내에서 먹히는 해산물이 제한되어 있어서 그런 모양이다.

2.

콩나물이 아주 귀하다. 한번 콩나물을 본 적이 있었다. 딱 한번. 그나마 얼마나 콩나물대가 약하던지. 친한 후배가 사다준 콩나물 기계로 키워보았으나, 이상하게 잘 안크더라. 아마 기후가 안맞아서 그러는 모양이다. 숙주랑 콩나물은 아주 달라서 대체가 되지 않는다. 한국에선 그렇게 싼 콩나물인데, 이 어찌나 귀하신 몸이더냐.

3.

낙지가 없다. 문어는 있고 오징어는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낙지는 없다. 왜 낙지는 없을까. 미더덕도 없다. 내 사랑 미더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