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도 끝나고 여름방학이다!

시험이 다 끝났다. 대학원 시작한 이래로 뭔가를 꼭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첫 방학이다. 덴마크는 학교마다, 학부마다 학기 시스템이 차이를 보인다. KU의 SCIENCE Faculty는 1년을 4개의 블록으로 나누는 블록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는데, 각 블록마다 2과목씩 듣고 시험을 본 후 한주의 방학을 갖는다. 혹시 재시험이 필요한 학생은 (최대 2번의 재시험 기회가 있다. Pass를 못했을 경우에 한해) 이 주간에 시험을 볼 수 있고, 다음 블록 수업은 미리 reading list를 제공하기에 학생들은 다음 블록 수업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따라서 방학이 방학이 아니다.

내 기우와는 달리 모두 12점을 받아, 이번 학기는 첫 시험을 7로 시작해 나머지는 모두 12로 마무리하는 만족스러운 성과를 냈다. 평생에 해본 적 없는 과탑을! 옌스 왈 내가 시험을 보는 스킬이 탁월한 것 같다고, 자기는 이런 성적표 못봤다고 한다. (자기가 봤을 때 공부를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지는 것 같지 않았다는 뜻인 듯. 할만큼 했는데…) 솔직히 KOTRA에서 오랜기간 근무한 게 도움이 되는 것 같다. written exam이야 이런 경력이 개입할 여지가 부족하지만 oral exam은 그간 무수히 많았던 발표, 고객과의 미팅 등에서 쌓은 경험이 큰 도움을 준다. 특히 해외무역관 근무할 때, 갓 부임한 무역관에서도 엄청 전문가인 것처럼 고객에게 신뢰감을 주도록 대화하는 훈련을 해온 것이 oral exam을 볼 때 설득력있게 전달되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준 것도 있는 것 같다.

한국에서는 딱히 성적에 집착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잘하는 것만 잘하면 된다는 주의였는데) 여기와서 이러는 이유는 사실은 남의 땅에 살면서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오기가 깔려있다. 단지 이민왔다는 이유로, 현지어에 있어서 원어민 수준이 아니라는 이유로 2등시민같은 처우를 받고 싶지 않기에 그렇다. 누군가가 나를 무시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그네들 마음안에 혹여나 나를 얕보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피해의식이 있는 모양이다. 교육을 통해 습득한 간접적 피해의식이겠지.

아무튼 절반을 무사히 마무리했고, 좋은 학우들과 이런 다시 올 일 없는 좋은 1년을 보내서 행복했다. 오늘 저녁엔 그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절반의 여정을 자축하기로 했는데 기대가 된다.

입덧이 다행이 많이 완화되었다. 이러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는데, 2주 혹독하게 하더니 좀 좋아졌다. 우유, 요구르트, 마늘 이런 것 빼고 속을 좀 이래저래 틈틈히 채워주면 심각한 미식거림은 찾아오지 않고 있다. 덕분에 오늘 아침 옌스와 커피(난 녹차) 데이트를 할 수 있었고, 이번주부터 시작되는 여름방학을 조금 여유롭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시험과 입덧 후 폭탄 맞은 것 같은 집도 정리할 수 있을 것이고. 학기 시작하고 나면 대청소는 하기가 어려운 관계로 버릴 건 미리미리 버리고 정리해야 나중에 애가 태어나도 관련 공간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방학엔 덴마크어도 다시 공부하고, summer course 시작전에 계량경제학도 다시 좀 보고, 책도 읽고, 집도 정리하고, 덴마크 땅도 좀 더 둘러보는 시간을 가지려한다. 오늘 아침 일어나면서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이제 한동안 시험도 없고 reading list도 없다!라고 신나서 소리를 지르니, 옌스왈 인생이 시험이야, 라면서 찬물을 끼얹는다. 후후. 당신은 참 엄하지만 공정해 (Du er hård, men retfærdig!, 독재자를 비꼬는 표현)라고 이야기해주니 참 좋아한다. 항상 현실에 발을 내딛을 수 있게 해주는 옌스. 우리 둘만의 마지막 자유로운 여름휴가 즐겁게 보내자!!!!

첫해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입덧으로 몸이 안좋다는 것도 분명 사실이지만 사실 지금은 막판 스퍼트를 낼 힘이 딸린다. 마지막 시험 과목은 literature list가 엄청 긴데, 수업에서 literature의 상당수는 몇개의 용어를 차용한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시험이 개인과제 30%, 그룹 프로젝트의 개인 발표 및 질의응답 30%, curriculum literature와 관련된 발표 및 질의응답 40%로 개인과제는 이미 낸 것이니 그렇다치고, 나머지 60%의 절반 이상이 이 literature관련 시험이다. 문제가 주어지고 나면 준비한 내용을 1분동안 훑어보는 형태의 partial open book 시험인데, 과목 평가때도 이에 대해 많은 학생들이 불평을 한 것처럼 나도 많은 불만을 갖고 있다.

동기가 없으면 정말 몸이 강하게 저항을 한다. 물론 이걸 읽고 배우면 도움은 되겠지만, 뭐랄까, 마음에 평가 방식이 좀 불합리하다라는 생각이 한켠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집중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제대로 된 방학 없이 block사이 일주일씩의 휴식만으로 지난 1년을 끌고 왔으니 나도 지칠만큼 지쳤다.

늦깎이 공부를 하는 만큼 더 좋은 성과를 내야된다는 압박과 함께 유일한 동양인으로서 뭔가 쳐지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는 오기, 나이가 들어서 늘어난 이해력 등이 결합되서 그런지 다행히 지금까지는 첫 과목 빼고는 모두 12점을 받았다. 내 소논문 지도교수 왈, 내가 그간 몇년 가르쳐 본 중 가장 과정에 engage된 학생이라고, 모르는 거 절대 포기하지 않고 여러번 물어보고 이해해서 독립적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소논문을 통해서 보인 만큼 이대로만 하면 석사논문까지 잘 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아마 회사생활을 하면서 모르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얼굴 철판깔고 물어보고 배운 것이 도움이 되는 모양이라.

이제 마지막 시험 하나 남은건데, 잘 볼 자신이 별로 없다. 그룹프로젝트에 너무 진을 뺀 모양이다. 그렇게 열심히 한 그룹프로젝트는 30% 밖에 평가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 좀 억울하기도 하고…  결국 잘 못볼까봐 성적 잘 안나올까봐 두려워서 하는 핑계같기도 하고… 오늘 친구가 공유한 좋은 글귀에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은 두려움의 반대편에 서있다.”라고 되어 있었다. 그때, 내가 해야만 하는 것 또한 두려움의 반대편에 서있다는 생각이 들며 뜨끔했다. 이런 내 두려움을 들킨 것만 같아서.

모르겠다. 내일 하루 더 준비해서 금요일 아침 시험보고 끝나는건데, 과연 잘 할 수 있을지. 잘하든 못하든 그걸로 내 석사 첫 일년이 끝나고 방학이다. 내 치졸한 두려움을 열어보이고 나면 좀 더 후련하게 집중할 수 있을까 블로그에 글을 쓰는건데, 제발 그리되기를 바라며 마무리한다.

소논문 제출 완료

지난 6주간 나를 힘들게했던 소논문을 드디어 제출했다. 담당교수의 최종승인을 받고 제출했으니 이제 오럴 디펜스만 잘 하면 된다. 이 소논문은 7.5 ECTS에 불과한 작은 수업의 결과물이지만, 앞으로 다가올 30ECTS의 논문이 어떤식으로 흘러갈 지에 대한 감을 잡아주는 좋은 경험의 산물이다.

한국에서 했던 석사가 약간 가라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정식 논문을 쓰는 대신에 경제학 에세이를 쓰고 졸업시험을 쳐서 졸업을 했기 때문이다. 경제학 에세이는 내용이나 형식면에서는 차이가 없는데, 내 담당교수가 주심이 되어 그 주심의 승인만 받으면 되고, 논문으로 DB에 등록되지 않는다는데서 차이가 난다. 대신 이 차이를 졸업시험이라는 것으로 대체하는데, 시험을 선호하는 나에겐 이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 물론 나와 같은 길을 택하지 않고 정식으로 논문을 쓰고 디펜스를 한 사람도 있지만… 나는 주제를 늦게 잡아서 풀타임 직업이 있는 상태로 논문을 쓰기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이곳에선 그런 옵션도 없거니와 이제는 풀타임 학생이니 그렇게 할 이유도 없다. 한국에서 논문을 쓸 때 담당교수와의 관계는 지금과 매우 많이 달랐는데, 훨씬 많은 지원을 받았다. 그때도 수업을 들어서 알고 있는 교수님이긴 했지만, 이곳에서처럼 상시적인 토론과 질문 등을 통해 교수가 학생들 면면을 잘 알고 있는 일이 드물었다. 이번 내 소논문 담당교수는 나를 잘 알고 있는 교수였고, 좋게 평가해주고 있는 교수였기에 더욱 많은 지원을 받은 것 같다.

이해가 안되면 혼자 주구장창 붙들고 있는 나였지만 이번엔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초반에 중요 이론에 대해 내가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어서 교수의 조언과 내가 생각한 방향의 차이를 어떻게 메워야하는지 엄청 고민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미팅일정을 잡지 않은채로 시간이 흘러가니, 어떻게 되고 있냐고 메일로 확인을 하시는 거였다. 혼자 끙끙 앓다가, “그때 설명해주셨는데 여전히 이해가 잘 가지 않아 진척이 잘 되지 않고 있다. 정말 중요한 파트인데 내가 알고있는 바와 교수님이 말씀해주시는 게 달라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있다.”고 말씀드렸다.

황당해하실 줄 알았는데,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해하겠다면서 잘 설명을 해주셨고, 그게 해결되고 나니 나머지는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그 문제를 의논할 당시 프로젝트 관리가 잘 안된다고 상의하니, 그 스트레스 주는 역할 자기가 해주겠다면서 토픽마다 데드라인을 정해주시는 거였다. 아… 이런거 정말 좋아하는데. 누가 데드라인 정해주는 것…

정말 그 덕에 마지막까지 소논문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내 약점이 어디에 있는지, 다음 논문은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더 감을 잡을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다.

그룹 보고서 말고 개인 프로젝트로 해서 교수의 수퍼비전을 받아가며 20페이지짜리 영문 보고서를 쓴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래저래 성취감이 큰 수업이었다. 시험만 잘 보면 될텐데… 아 긴장된다.

SU 받기

올 1월부로 소급해서 월 100만원 조금 넘는 돈을 덴마크 정부로부터 받게되었다. 고등교육을 받는 덴마크인 또는 일정 조건에 부합하는 EU시민권자, 덴마크인과 결혼을 통해 덴마크시민권자와 동등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은 SU를 받을 수 있다.

교육보조금(uddannelsesstøtte)라고 불리는 이 월급같은 돈은 인적자원이 중요한 개방형 소형경제 국가로서 고등교육을 받는 인력이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돈이다. 이것 때문에 교육을 받으려는 사람이 없는 이유는 뭐라도 다른 일을 하면 이 이상 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공부를 하려는 사람이 돈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지 않게 도와주는 것 뿐이고, 실제 이것만으로는 생활이 되지 않기 때문에 다른 파트타임 직장을 갖는게 일반적이다.

나야 옌스 살던 곳에 숟가락 얹고 사는 상황이고 모아둔 돈이 있어 굳이 일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어쩌면 그래서 이 추가적인 백만원의 돈이 더 크게 느껴진다.

이래저래 좀 꼬인 문제로 행정절차를 제 때 밟지 못해 초반 4개월은 돈을 날리나 했는데, 그런 것 없이 다 챙겨주니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런데 이 이야기하자마자 옌스는 그나마 내가 이돈을 받으니 조금 덜 속이 쓰리긴 하지만, 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막대한 세금이 들어가는지 아느냐면서 나중에 세금 내봐야 그 마음 이해할거라 한다.

그 마음 이해도 가고, 앞으로는 더 이해할 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이 사회가 이렇게 전반적인 행복수준이 유지될 수 있고 상대적으로 적은 빈부격차와 그에 따른 안정된 치안이 이런 시스템과 신뢰 아래서 생긴 것이라는 걸 생각할 땐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정말 별것 없는 한국 계좌에서 발생하는 이자소득(정말 달에 몇백원 할 것 같은…)을 세무신고때 해야하는 번거로움은 불평하고 싶지만 말이다. 아마 여기서 추가로 월에 몇 크로나 내야 할 것 같다. 이거 불평하니까, 옌스가 여기서 받는 정부지원을 생각하면 그거 불평하면 안된다고 한다. 께겡…

내 나라에서도 못받던 국가보조금을 여기서 받다니. 참 오래살고 볼 일이다.

소논문 프로젝트 시작

다음 블록에는 그간 배운 내용을 이용해 20페이지에 해당하는 소논문을 작성하는 수업이 있다. 수업은 8주간 진행되는데 전체 학생이 발표하고 디펜스 하는데 2주가 걸리기에 실제 작성은 6주간에 걸쳐 이뤄진다. 향후 논문으로도 연결될 수 있는 바, 써볼 수 있는 주제를 찾지 말고 자기가 쓰고 싶은 주제를 찾아오라고 한다.
 
난 재생에너지(핵발전 등 신에너지는 제외)에 관심이 있었지만 막연한 관심 뿐이었고, 이를 경제학적으로 풀만한 주제에는 어떤 것이 있을 지는 보다 막막했다. 지난 주말 옌스와 함께 카페에 가 앉아 뭘 쓰고 싶은지를 컴퓨터를 앞에 놓고 생각해보았다.
 
그간 공부하면서 관심이 있었던 주제는 뭐가 있는지를 곰곰히 생각해보니 재생에너지가 충분히 잘 보급됨으로써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규제와 인센티브 도입의 정책적 도구에 관심이 갔다. 이를 토대로 최적의 에너지 믹스를 위한 최적 정책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어떤지, 얼마나 주제를 줄이는게 좋을 지 등을 상의해보고 싶다고 교수에게 문의했다.
 
지도교수와 약속한 시간에 찾아가지 마침 재생에너지 정책을 전공으로 하는 다른 교수님과도 동석을 하게 되어 추가적인 아이디어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덴마크의 2050년 화석연료 제로 정책에 대한 소논문을 쓰기로 결정했다.
 
덴마크는 2050년까지 화석연료 사용을 완전히 없애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EU의 정책 목표보다 훨씬 야심찬 계획이다. 해당 정책의 목표와 경제학적 이점과 불리를 수학적 모델을 포함하지 않고 푸는 게 목표다. 기존에 있는 수리적 모델을 갖고 써내는 게 아니라 독립적으로 수행하는 프로젝트라 상당히 큰 도전이 될 것이라고 교수가 한마디 했다. 그러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추천하는 프로젝트니 열심히 해보라며, 대신 어려운 프로젝트이니 만큼 풀 서포트를 해주겠다고 했다. 
 
마침 이달 초 덴마크 환경경제위원회가 연도별로 발표하는 정책제안보고서를 발표했는데, 덴마크의 2050 Fossilfri 정책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영문 요약이 있긴 하지만, 덴마크어로 되어 있는 본보고서를 꼭 읽어보기를 추천받았다. 소설이나 신문보다는 아무래도 보고서가 어휘면에서 반복되는게 많으니 내용이 어려워도 읽어낼 수 있을 거라는 있을 거라는 옌스의 말을 믿어보며 천천히 준비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생각만해도 머리가 저릿저릿하지만, 앞으로 계속 마주할 덴마크어 보고서를 조금 미리 마주한다고 생각하고 읽어보련다.
의외로 주제가 빨리 정해져서 정말 다행이다. 중간중간 어려움도 있겠지만, 불가능할 건 없다. 덴마크어 보고서가 한 50페이지정도 되는데, 옌스가 두페이지까지 어휘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도 해주었으니 열심히 해봐야지.

배움에 대한 두려움

내가 아는 것이 세상의 진리와 지식 중 티끌만큼도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아는 바를 삶의 매 순간에 지속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내가 알고 있는 바를 마치 모르는 것처럼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사람이다.

나는 새로운 것을 배움에 있어서 두려움을 느낀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은 원래 어려울 수 있고 따라서 배우는 것을 한번에 다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님을 머리로는 알지만, 술술 읽히지 않는 책을 접할 땐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유독 크게 느끼고 그 부족하다는 감정을 느끼기 싫어 아예 읽는 것을 피하기조차 한다.

자리에 진득하게 앉아 집중해 대여섯시간을 내리 읽어야 다음날 수업 준비가 될만큼 많은 읽을 거리가 주어지니 여유를 갖고 읽을 새가 없다. 수업시간이 주당 24시간의 수업과 덴마크어 수업 7시간을 제하고 나면 휴식을 취할 시간따위는 없다.

문제는 빨리 읽어내려가야 할 교과서나 논문이 술술 읽히지 않는다는데 있다. 물론 수업이 끝나고 나면 그 전날 가졌던 의문의 대부분이 해소가 됨에도 불구하고 매일 새로운 읽을 거리를 마주함에 있어서는 두려움이 있다. 최대한 의문거리를 줄이도록 깊은 사고를 하며 읽고 싶지만, 그럴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기에 질문 거리를 빠르게 체크하면서 읽어나가야 한다. 많은 질문거리를 쌓아내고 나면, 과연 내가 이것들을 충분히 이해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더 많이 이해했어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스스로에 대한 질책이 마음속에 휘몰아친다.

내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매일 피부로 느껴야 한다는 것이 부담이 된다. 그래서 미룰 수 있는 순간까지 최대한 읽는 행위를 미룬다. 주중엔 미룰 수 없으니 그렇다지만, 주말엔 일요일 오후가 되기까지 미루고 또 미룬다. 참 어리석다. 왜 조금 더 부지런하게 살 수 없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이게 나인가 싶다. 배움이 즐겁기도 하지만, 과연 내가 이 교육이 끝난 후 내가 원하는 바를 할 수 있을 만큼 다 흡수해서 성장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아예 중도에 안하면, “안해서 그랬어. 하면 다 할 수 있는데.”라는 변명을 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유치한 생각이 빈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전체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지만 매일, 매순간 무의식중에 그런 생각을 하기에 뒤로 미루기를 하는 것 같다. 회피의 순간을 지속적으로 찾는 나를 알기에 나 스스로를 설득하는 법도 배우게 된다. 미룬다고 달라지지 않거나 혹은 더 악화된다는 것, 조금이라도 더 하고 가는 것이 좋다는 것 등을 스스로에게 자꾸 이야기해 준다던가, 아니면 주중에 공부에 투자하는 시간이 50시간 이상 되니 금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읽을려는 노력이 실패해도 스스로를 비난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것 말이다.

이 모든 생각의 저변에는 난 사실은 이만큼을 해내야 해, 하는 자만심이 깔려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생각을 하면서 또 인간성이 덜 된 나를 질책하게 되지만, 그보다는 이 부족한 모습의 내가 나 스스로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받아들여야 할 지도 모른다. 앞으로 조금은 더 나아진 내가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첫 학기를 무사히 잘 마치고

마지막 남은 과목의 성적도 확인했다. 12점. A를 받았다고 이렇게 기뻐한 적은 학부때에도 없었는데. 학점 인플레가 없는 곳이라 A의 의미가 달라서 그런 것인가? 그런 게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보다는 내가 공부에 대한 절박함이 그전과 달라졌기 때문이라 그런 것 같다.

학부때 경제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것은, 고등학교 때 있었던 외환위기와 그에 따른 IMF 구제금융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외환위기를 야기한 최전방에 있었던 종금업계에서 근무하셨기에 많은 일들이 불거지기 전 미리부터 불길함의 전조를 건너 들을 수 있었고, 왜 그런 일이 생긴 것인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등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고등학교 공부에는 별로 필요도 없었던 매일경제신문을 매일 읽었고, 경제기사 읽는법이라는 책도 사서 읽었다.

재미있긴 했는데, 막상 대학교에 가서 공부를 함에 있어서는 절박함이 없었던 것 같다. 대학교 가면 뭔가 삶도 더 많이 즐기면서 공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공부할 게 생각보다 많았고, 앞으로의 취직도 걱정해야 했기에 뭐하나 게을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해야되서 했고 배움에 대한 즐거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부에 대한 갈증 자체는 없었다.

학부초반때 경제학 공부가 재미있긴 했는데, 그 재미가 학년이 올라갈 수록 덜해졌다. 공부의 방향성 설정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남들 듣는 수업 찾아 듣다보니 왜 그 공부를 하는지 잘 모르는 채로 부유했다. 이것을 갖고 앞으로 뭘 할 수 있을지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경영학 이중전공을 했고, 실생활에 보다 적용하기 쉬운 경영학에 보다 큰 관심을 쏟으며 공부하고, 졸업했다.

회사생활을 한지 12년만에 모든 것을 관두고 다시 공부의 삶으로 돌아왔는데, 많은 것이 달라져있었다. 회사다니는 중간에 한국에서 석사를 한번 했지만, 졸업시험과 경제학에세이라는 것으로 논문을 대체한 나는 뭔가 가라로 석사를 한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학부 생활을 다시 한번 한 것 같은 느낌. 회사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한 것이라 한학기 한학기 떼우기 바빴던 시기였다. 다만 그 때 차이가 있다면 그간 나를 괴롭혔던 경제수학과 통계학과 한층 가까워졌던 시기였다는 것과, 내가 모르는 것을 이해하고 그 모르는 것을 질문으로 푸는 방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 부끄럽지만은 않다는 걸 회사생활을 통해 배우기도 했고, 내가 모르면 남들도 모를 수 있지 라는 생각으로 질문할 수 있는 배짱도 생겼다. 그때의 그 경험이 이번 석사과정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유학경험이 없었고, 영어로 하는 세미나에 앉아있으면 장시간 앉아서 집중해 듣는다는게 피곤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수업을 영어로 하고, 읽고, 시험을 보는 것을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을 꽤나 했다. 실제로 계량경제학은 그 컨셉 자체가 어려웠고, 내가 약했던 과목이었기에 더욱 어려웠다. 그래도 몇주가 지나면서 조금씩 수월해졌고, 자신감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기출문제를 입수해서 같이 모여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제한된 시간 자원속에 나는 혼자 개념 공부에 집중하기로 했다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C. 예상치 못했던 황망한 결과였기에 받고 우울해했다. 여기는 성적 분포표가 인터넷으로 공개되는데, 그게 평균 이상임에 놀랐으며, 그걸 알고도 C라는 글자에 우울해하는 나에게도 놀랐다. 옌스는 평균 이상을 받고 우울해하는 것은 자만이라고 이야기하기에 마음을 애써 추스르긴 했지만 말이다.

이미 지난번 블록때도 최선을 다해 공부했기에 딱히 이번 블록이라고 더 열심히 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는 두과목 모두 A를 받았다. 계량경제학에서 받은 C에 대한 설움에 보상이라도 받은 듯한 기분이다.

오래간 공부를 하지 않아서 그런지 새로운 지식이 머리로 들어오는 과정이 놀랍게도 재미있다. 물론 딴짓을 하면서 게으름을 피우는 날도 있지만, 내가 워낙에 한결같이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간의 삶의 시간에서(고등학교 이후…) 지금이 가장 자발적이면서도 꾸준히 공부의 길을 걷고 있는 때라는 것을 자신한다.

학부를 졸업한지 얼마 안되는 어린 학생들과 경쟁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는데, 같이 자원경제학 시험을 준비하는 도중 자신들과 나는 공부의 동기부여가 다르다면서, 자기들은 그냥 계속 하던 것을 하는 거라 지겨울 때도 있다는 동기들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마음을 달리 먹었다.

첫학기는 결과적으로 잘 마무리되었다. 그 과정도 즐겼고, 좋은 동기들도 얻었으며, 결과도 좋았다. 전체 석사과정 중 다음 학기에 가장 중요한 수업들이 진행된다. 1학기에 배운 내용을 갖고 실제 학계를 나가면 쓰게 될 내용들을 공부하게 되기에 가장 큰 도전이 될 과목들이 기다리고 있다.

어쩌다 보니 삶에서 공부 또는 배움이라는 것에서 멀어지지 않는 길을 계속 걷게 되었다. 학부를 졸업하면서 석사는 안할거라고, 경제학은 더이상 안할거라고 했던 내가 석사를 두번이나 하게 될 줄은, 또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박사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될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나. 그래서 절대…라는 말은 하지 말라고 하는가 보다.

한주간의 방학이 이제 거의 끝나간다. 다음주면 새학기가 또 시작이 되는구나. 긴장의 끈을 놓칠 새 없이 다시 달려야 한다는게 부담이 되긴 하지만, 설렘 또한 나를 반긴다. 다시 한번 잘 달려봐야지.

방학 아닌 1주간의 방학을 보내며

시험이 끝나고 한주간 있는 방학. 딱히 쉬기도 어려운 건 방학이 시작하기 무섭게 주어지는 읽을 거리때문이다. 수업 진행 방향을 미세조정하기 위해 수강생들의 수학배경을 확인하기 위한 설문조사도 이때 이뤄진다.

혹여나 해당 학기 이전에 통과하지 못한 시험이 있는 학생들은 이 주간에 재시험을 칠 기회가 주어진다. 재수강이라는 개념은 없어서 해당학기에 쳐야 할 시험에 이전 학기에 통과하지 못한 시험까지 쳐야하니 부담이 더해진다. 수업을 들은지 한참 지나서 재시험을 쳐야 하니 그것도 고통일 것 같은데, 원하는 결과가 안나올 것 같은 수업의 경우 일부러 시험을 안치고 재시험을 노리는 학생들도 꽤나 되는 것 같다.

읽을거리들을 출력하느라 도서관이 나왔더니, 예상한대로 별로 사람이 없다. 낯이 익은 사람이 다른 누구와 대화하며 재시험 치는 것 때문에 너무 걱정된다고 하는 것 보니, 나와있는 사람 중 몇몇은 재시험을 보는 학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갖고있는 강박중 하나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중요하지 않아 넘어가도 되는 부분에 사로잡혀 머리를 끙끙 싸매고 있는 경우가 왕왕 있다. 급박한 프로젝트가 있는 경우 그 완급을 조절해야 하는데 그를 잘 하지 못하고 도망쳐버리고 싶은 충동을 누르느라 많은 고생을 한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깊이 이해해야 하는지, 과거 다루고 넘어갔던 컨셉이 세세하게 기억이 나지 않을 경우 얼마나 자세히 복습을 해야하는지 등등을 결정하는 문제가 아직도 나를 힘들게 한다. 적당히 넘어가는 포인트를 찾는 것은 아마도 평생 내가 해결해야 할 숙제가 아닐까.

초반에 너무 열정을 투여할 경우 중간에 지쳐서 용두사미처럼 헤이해지기 좋기에 완급 조절은 필수다. 우리 단과대학처럼 제대로된 방학이 여름밖에 없는 경우는 더욱 그렇고, 주당 백페이지가 훌쩍 넘는 리딩이 주어지는 수업은 더욱 그렇다. 다 깊이있게 이해하고 넘어가려 해서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니 적당히 선택을 해야한다.

언어를 배움에 있어서는 이런 식의 학습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경험으로부터 어떻게 학습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으니 이런 문제가 없는데 – 간혹 받는 실력 향상에 대한 스트레스 빼고 – 일반 학습은 그게 잘 안된다.

긴 학기가 끝나고 쉬어야 하는데, 별로 쉬지 못하고 새로운 학기에 다시 진입하게되니 아쉽다. 그래도 오개월만 버티면 두달의 방학이 기다리고 있고, 그보다 먼저 두달만 버티면 한국에 잠시 다녀오게 되니 시간이 잘 갈 것 같다. 물론 한국 방문후 나를 기다리고 있는 시험도 있겠지만…

일찍 깬 시험날 아침 이런저런 생각

오늘 드디어 이번 학기의 마지막 시험을 치른다. 크게 스트레스를 받았던 생태학 시험을 그저께 성공리에 치르고 나니 자원경제학 시험은 좀 수월한 기분이다. 아침 9시부터 4시간 동안 머리를 굴려야 할 터라, 6시 반인 지금부터 괜히 뇌를 부리지 않으려 블로그에 들어왔다. 시험이라는 이유로 읽고 싶은 것, 쓰고 싶은 것 자유로이 하지 못했기에 많이 아쉬웠는데.

한학기동안 쭉 진행되었던 생태학 수업은 15 ECTS, 한국 3학점이 6ECTS로 환산되니, 8학점 쯤 되는 수업이다. 그걸 중간고사 없이 기말에 한번도 마주한 적 없는 구술시험의 형태로 진행하게 되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시험문제가 어떻게 나올지 감이 없었고, 교수 4명과 외부감독관 1명으로 구성된 시험관이 어떤식으로 학생들을 추가로 시험할 지 몰랐기에 불안했다. 막상 시험 문제를 뽑아보니, 어려운 문제.

학기중 총 9개의 모듈을 공부했는데, Carbon, Nutrient, Water, Biodiversity 등 4개의 모듈 관련 그룹보고서를 제출하고 세미나를 진행했다. 이 4개의 프로젝트에서 하나를 뽑기로 뽑고, 100개의 문제은행에서 그룹 보고서의 모듈과 다른 모듈의 질문을 하나 또 뽑기로 뽑은 다음, 별도의 룸에서 30분동안 준비한다. 그리고 나서는 프로젝트와 질문에 대해 각각 5분간 발표하고, 7~8분간 추가 질의응답을 하는 것을 통해 25분의 구술시험이 종료된다.

Carbon 모듈 프로젝트를 뽑고 질문을 뽑았는데, 아싸! Biodiversity 중에서 쉬운 질문이다 생각한 순간, “그 문제는 네 Carbon 프로젝트가 Biodiversity를 연관해 아우르는 프로젝트라 다시 뽑아야 해.”라는거다. 다시 뽑은건 Water… Hydrology와 Nutrient cycle을 연결해서 묻는 질문이었는데, 처음엔 질문도 잘 이해가 안가더라.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하고서 준비방으로 갔는데, 내가 원하는 정보가 출력하지 않는 논문에 있어서 인터넷을 하려하니, 내 컴퓨터 인터넷이 먹통… 패닉되려는 순간 마음을 다잡고 이건 치우고 다른 내용에 초점을 맞추자 싶어서 진정하고 준비했다.

프로젝트는 4개 모두 집에서 발표를 준비하고 내용도 꼼꼼히 다 읽어봤던 터라 자신있는 것부터 시작하는게 기선제압에 좋겠다 싶었는데, 전략이 유효했다. 문제에 대한 발표는 프로젝트보다 덜 매끄러웠지만, 질의응답에 나름 잘 대응했고.

시험이 다 끝나고 방 밖으로 나가 평결을 기다리는데 (구술은 즉각 성적을 알려준다.) 그 3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긴장이 되서 창가에 설치된 예술품을 보며 사진도 찍고 이런저런 딴짓을 해가며 시간을 보냈다.

성적이 결정되면 성적과 함께 시험에 대한 평가, 약점, 강점 등을 설명해준다. 약간의 weakness는 있지만, 전체 수업 내용을 다 이해하고 복잡하게 연결된 생태 문제를 잘 풀어낼 수 있도록 모듈 간 지식 융합과 연결을 잘 할 수 있어서 12점을 준다고 했다. 이번 수업에 두명만 만점이었는데, 내가 그 중 하나가 되다니. ㅠㅠ

나보다 옌스가 더 기뻐해줘서 더 기뻤다. 가장 부담되었던 생태학이 잘 끝났으니, 이제 조금 있다가 학교가서 마지막 시험 잘 봐야지.

대학원 첫 시험을 치르고

홀가분하다. 한 주 후에 다시 시작될 과목을 준비할 것을 생각하면 마냥 홀가분해할 수는 없겠지만, 이번 주말만큼은 친구들과 와인을 앞에 두고 시끌벅적 떠들고, 한국에서 오는 가족들과 상봉도 하고, 산책도 하며 마냥 즐기리라.

시험 전날부터 서서히 시험에 대한 무게가 어깨를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초조함. 시험기간이 되니 괜한 손톱만 괴롭히게된다. 오후 두시. 시험까지 23시간이 남았는데, 아직 미처 읽지 못한 챕터가 남아있고 작년과 제작년 시험문제는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했다. 제한된 시간 내 전체 이론을 충분히 숙지하고 시험을 볼 것이냐, 과년도 시험문제를 중심으로 공부할 것이냐로 고민을 하다가 이론 공부를 우선순위로 택했는데, 프로그램내 다른 학생들은 다들 과년도 시험문제를 푸는 것을 중심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남과 다른 선택을 할 때면 불안함이 엄습한다. 과연 내가 옳은 선택을 한 것인지 확신이 없기에. 그러나 그간 세번의 과제를 무리없이 제출했으니, 시험이라고 다를 바 있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 불안함을 가능한한 멀리 밀쳐둔다.

오전부터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으니, 잠시 산책도 하고 장도 봐오자 싶어 밖으로 나왔다. 오전내내 자욱했던 안개는 사라지고 축축하리만치 이슬이 잔디에 잔뜩 내려앉았다. 조금 걷고나니 신발이 다 젖어버렸다. 넓은 잔디에 사람은 없고 갈매기와 비둘기만 보인다. 바닷가라는 생각은 안하고 살지만, 사실 바다에서 매우 가까운 곳이라 나라 어디에서고 갈매기를 볼 수 있는데, 그게 아직까지도 나에겐 낯설고 신기하다. 아주 큰 갈매기는 거의 매같은 느낌이지만, 작은 갈매기는 다리도 가늘고 길쭉한 게 흰색 깃털로 빼입어 괜히 아는 채 하고 싶어진다.

우리 동네의 잔디밭은 매우 넓지만, 아파트로 잘 숨겨져있어 잘 보이지 않는다. 가장 넓은 쪽으로 걸어들어갔는데, 역시나 나밖에 없어 방해받을 게 없는 기분이다. 아차. 내가 거기에 있는 새들에게는 방해꾼이겠구나 싶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한국보다 위도가 높은 이곳에선 가을부터 해가 아주 낮게 누워서 지나간다. 두시면 해가 눈을 향해 바로 들어와 석양 직전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 때문에 겨울엔 햇볕을 쬐도 추위에 큰 도움이 안되는 듯 하지만 그래도 그 빛깔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시험기간이라고 안에만 처박혀있었더니 낙엽이 많이 져버렸다. 부모님이 오시면 그 끝자락 남은 것 보실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비바람이 남은 기간 남은 단풍을 다 쓸어가버리지 않기만을 빌어봤다. 덴마크에서 많이 보는 수종이 우리와 다른 것도 있고, 나이가 다르고, 가지치기를 하는 방식도 달라서 가로, 잔디밭, 숲에서 보는 상당수의 나무는 밑둥부터 아주 굵고 키가 아주 크거나 옆으로 넓게 퍼져있다. 그래서 잔디밭에 몇그루의 큰 나무가 낙엽을 소복히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녹색 위에 노랗고 빨간 빛깔이 켜켜이 내려앉아 한 폭의 그림과 같은 풍경을 그리곤 한다.

30분의 산책동안 신발은 흠뻑 젖었고, 스트레스로 인한 나의 흥분도 조금은 가라앉았다. 시험기간이라고 라면만 먹지 말고 좋은 음식도 먹어야 뇌도 활동하지, 시험 전엔 좋은 음식을 먹어야겠다 라는 생각으로 동네 수퍼마켓에 들러 특가 할인하는 쇠고기 스테이크를 사갖고 돌아왔다.

마지막 챕터는 가장 최근에 배운 것이고 수업 중 잘 이해를 했으니, 목차만 읽어보고 나머지 시간동안은 과년도 문제를 훑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한 시험세트당 4시간 분량이니 모두 샅샅이 보고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할 수 있는 것만큼만 하기로 했다. 저녁 9시, 더이상은 읽을 수가 없었다. 공부 더이상 못하겠다고 스트레스 받는다고 하자, 옌스는 어차피 지금 모르는 건 읽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거 없으니, 스스로 여태까지 해온 것을 믿고 푹 쉬라고 한다. 기억도 나지 않는 쓸데없는 농으로 나를 박장대소하게 했고, 그 덕에 나는 마음 편히 공부를 접을 수 있었다.

시험 당일, 4시간 동안 집중해서 문제를 풀어야 하니 공부는 안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챕터 소제목과 정리노트를 눈으로 가볍게 훑어내린 후 모든 것을 덮었다. 오픈북 시험이니만큼 관련 자료를 바리바리 쌓긴 했지만, 4시간 동안 약 30문제를 과연 얼마나 자료를 보고 쓸 수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도 몇번은 아주 요긴하게 활용할 거란 생각에 소중하게 챙겨뒀다.

컴퓨터 시험인데, 내 디지털 펜이 시험시간 5분전에서야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일부러 미리가서 다 세팅도 하고 준비했는데, 왜 펜 테스트는 안했지 하는 자책감도 들었지만, 컴퓨터를 리부팅하고 펜이 작동하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시험 폴더가 컴퓨터에 나타났다. 데이터와 배경 상황만 거의 반페이지가 넘는데, 난 반도 미처 못읽은 상황에 컴퓨터 타자소리가 홀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금방 타닥타닥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괜히 초조함만 가중되었다. 마침 갖고 온 귀마개가 생각나 이를 귀에 꼽고나니 소음이 가라앉으면서 마음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도 금방 시험에 몰입해들어갔다. 갖고 온 자료도 많이는 아니더라도 몇가지 공식과 가정 등을 확인하는 중요한 순간에 요긴하게 써먹었고, 내가 다 읽지 못한 챕터에서 많이 출제되었지만, 한문제 빼놓고는 무리없이 풀어냈다. 네시간 동안의 시험동안 대부분의 학생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문제를 푸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6시, 못풀었던 문제를 풀려고 하는 순간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닫힌다. 제출 버튼을 누르고 일어나니 각자의 얼굴에서 희비가 갈린다. 학생들 모두 나름의 기준과 기대를 갖고 오늘의 시험에 임했으리라. 누구는 통과만 하기를 바라며 본 사람도 있고, 누구는 좋은 성적을 받기를 바라며 본 사람도 있다. 어차피 성적이 앞날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에 점수에 일희일비할 것도 없지만, 혹시나 나중에 공부를 더하려고 하면 성적도 중요하니 초조한 마음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시험 전날 마지막까지 집중하지 못하는 나를 보고 실망스러움도 일면 들었으나, 그게 나인 것을 받아들여야지 어쩌나 하며 넘어갔다.

7시. 내가 제출했던 시험의 pdf 사본이 메일로 날아들었다. 어떻게 썼는지 읽어보려고 했지만, 집중도 되지 않아서 접어두었다. 혹여나 성적이 영 이상하면 그때 다시 열어나봐야지 하며 보관함으로 넘겨버렸다.

시험은 대충 잘 본 것 같다. 시작이 반이라는 마음으로 첫 스타트를 잘 끊어야겠다 싶어 더욱 열심히 했다. 혹여 결과야 어떻든 내가 그리 싫어했던 과목인 계량경제학을 스스로 만족할만큼 공부하고 이제는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매우 큰 수확을 했으니, 겸허히 받아들여야겠다.

오늘부터 주말은 (밀린 집안일 빼고)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