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우리 팀 동료들을 괴롭게 했던 지난 일년간의 프로젝트가 대충 마무리 되었다. 프로젝트는 우리 손을 일단 떠난 상태고, 돌아오더라도 다른 팀이 손본 곳 중에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만 수정해서 마무리하게 되었으며, 그또한 프로젝트리더가 할테니 나는 더이상 그 일에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한동안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일이 손을 떠나고나자 Brain fog라고 말하는 집중력저하현상도 없어졌다. 역시나 이 모든게 스트레스 때문이었구나.
2년전부터 다른부서로부터 우리 부서가 넘겨받아 내가 1년에 한번씩 발간하는 연간보고서 프로젝트가 있었다. 첫해에는 그렇게 해왔다고 하고 이대로 하면 된다고 해서 발간했고, 작년엔 그거와 크게 다르지 않게, 다만 그 전해의 소소한 문제를 개선하는 정도로 발간을 했다. 그러면서 느낀게, EU 법령에 근간해 CEER이 만든 이 보고서의 작성 가이드라인과 우리 보고서가 서서히 괴리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매해 발간한다는 것은 매해 새 술을 담근다는 것이니, 이번엔 좀 새 부대에 넣어야 겠다고 느꼈다.
다른 부서들과의 발간 일정 조율 문제가 있어서 – 다들 바쁘니 – 센터장의 권위를 빌리고자 첫 2년은 센터장을 첫 미팅에 동행했는데, 이번엔 내가 홀로 해보겠다고 나섰다. 내가 주재하는 미팅에서 처음으로 무슨 말을 해야하는지 고민하지 않고 잘 하고 싶은 마음에서 오는 긴장감 같은 것을 내려놓고 내가 해야하는 말을 다 하고 질의응답도 하고, 일정 조율 문제에 있어서도 선을 그어야 할 곳에 잘 긋고 물러날 곳에서는 물러나기도 하며 잘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이미 덴마크어로 일을 한지 벌써 5년이 넘었는데도, 회의에서 발언하는 것이 편하지만은 않았는데, 그걸 완전히 무너뜨려본 첫 경험이었다.
내일 시민권 시험을 본다. 작년에 영주권을 땄고, 앞으로 이곳에서 계속 뿌리를 내릴 것으로 결정을 했기에 시민권을 따기로 마음 먹었다. 나의 뿌리가 한국에 있는 것은 변하지 않고, 한국을 사랑하지만 시민으로서 나의 가치관은 이곳에 정착하게 되며 바뀌어왔기에 내가 일군 가족과 같은 나라의 보호를 받기로 결정했다. 영주권을 받고 2년이 된 타이밍부터 시민권을 받을 수 있으므로 내년 여름에 시민권을 신청할 것인데, 그렇기 위해서는 시험을 미리 봐둬야한다. 국적부여는 1년에 두번, 국회에서 해당 사안을 법안으로 심의하는데, 내가 영주권을 받은 후 2년에 된 후에 심사되는 법안에 내 이름이 들어갈 수 있도록 신청을 해야한다. (법안에 국적취득자의 이름이 다 하나하나 명시된다.) 조건에 부합했는지 검토하는데 대충 빠르면 6개월, 길면 2년정도 걸린다는데, 나처럼 딸린 가족 없이 홀로 국적취득을 신청하는 케이스면 거의 6개월안에 심사된다고 한다. 시험은 너무 오래되면 다시 봐야 할 수 있으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번 시험을 봐두면 여러해 유효한데, 시험도 일년에 두번 치뤄지기 때문에 그냥 미리 봐버리기로 했다.
국적 취득을 하기로 마음을 먹는 상태로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것은 어폐가 있는 것 같아서 이번 대선에 처음으로 참여를 하지 않기로 했다. 내 권리의자 의무로서 꼭 선거를 해왔는데, 이번에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기로 하니 대선을 바라보는 시선도 좀 바뀌는 듯하다.
내가 덴마크인인 것처럼 나를 대하는 덴마크인 속에 섞여 덴마크어만 하고 살다보니 나도 서서히 덴마크인이 되어가는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도 국적은 유지하고 영주권만 따면 되지.”라고 생각했던 것도 서서히 바뀐 것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