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불생활

파트너때문에 해외로 이주를 하는 사람들은 파트너에게 행정 등에 있어서 많은 부분을 의지할 수 있다. 그걸 누군가가 외국인 카드를 쓴다고 표현하던데 재미있는 표현이다.

나는 외국인 카드를 써본적이 없다. 집안의 중요한 의사결정이나 행정 부분은 업무를 협의해서 분담하고 나 행정 관련은 내가, 남편 건 남편이, 아이 것은 주로 내가 하니까.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도움받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는 것은 의존이라 생각해 내가 꼭 처리하리라 마음먹을 것 때문이겠지. 인도와 덴마크 주재 정착 초기에도 동료의 도움을 최대한 받지 않고 처리하려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은 어떻게 하는지 내가 직접 아는게 힘이라 생각한다. 누구에게 사용하는 힘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내가 불안하지 않을 수 있는 힘 말이다.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힘.

어쩌면 내가 불안이 높은 사람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서류나 이런 것 처리에 있어서 다소간의 강박이 있는 것 같다. 대체적으로 서류를 낼 땐, 이게 처리가 안되면 그 다음이 여러가지로 꼬이는 일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규정과 절차를 세세히 이해해야 하고 그와 관련된 서류를 완벽히 준비해야 하며, 후속조치 등에 대해서도 미리 숙지해둬야 불안함이 없어진다.

누구한테 물어봤자 대부분 자기한테 해당되는 내용만 자세하게 읽어보고 나머지는 기억하지 못하기에 그 사람과 다른 사항이 다르게 적용될 수 있고, 담당자에게 물어봤다한들 같은 이유로 뭔가를 빠뜨리고 이야기해주거나 할 수도 있다. 책임은 내가 지는 것이기에 법령과 시행령 등을 세세하게 읽어보고 정확히 확인해야 할 경우 서면으로 질의한다. 그래서 이제는 누가 물어봐도 자세히는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각자가 처한 상황이 달라서 나와 준비해야 하는게 다는 사람에게 괜히 잘못된 정보를 전달해 줄 가능성도 있으니까.

누군가가 자연분만을 선불, 제왕절개를 후불이라 하더라. 고통이 다 따르기는 하는데, 그게 앞에 오느냐 뒤에 오느냐 하는 걸로 말이다. 외국인카드를 쓰지 않는다는 것은 선불하는 거 같다. 모든 걸 스스로 해둔다는 것은 앞으로 새로운 걸 처리해야 할 일이 있을 때 뭘 어떻게 봐야 하는지, 뭘 처리해야하는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수월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옳고 그른 건 없다. 그냥 나는 선불 생활이 좋고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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