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날씨같은 날만 이어지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물론 그러면 가뭄으로 이 모든 풍경이 유지될 수 없겠지만. 동네 산책길에서 아름다운 길을 새로이 또 걸어보았다. 갠토프트 호수에서 항상 한쪽편만 걸었었는데 이번에 반대편을 걷다보니 작은 습지내 산책길이 있는 게 아닌가. 날씨가 좋으니 풍경도 아주 아름다웠다. 저녁 아홉시 열시 사이의 풍경. 이처럼 좋은 시기가 연중에 또 없다. 누리고 또 누려야지. 지금. 할 수 있을 때.




요즘 날씨같은 날만 이어지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물론 그러면 가뭄으로 이 모든 풍경이 유지될 수 없겠지만. 동네 산책길에서 아름다운 길을 새로이 또 걸어보았다. 갠토프트 호수에서 항상 한쪽편만 걸었었는데 이번에 반대편을 걷다보니 작은 습지내 산책길이 있는 게 아닌가. 날씨가 좋으니 풍경도 아주 아름다웠다. 저녁 아홉시 열시 사이의 풍경. 이처럼 좋은 시기가 연중에 또 없다. 누리고 또 누려야지. 지금. 할 수 있을 때.




키는 95센티미터 정도, 몸무게 15킬로그램. 나이 대비 매우 평균적인 아이이다. 머리크기는 잊었지만 이또한 평균. 먹는 것은 덴마크에서 한국 식생활의 중간쯤에 위치한다. 식탐이 없고 그렇다고 적게 먹는 것도 아니다. 신체적 성장의 면에 있어서 과하거나 부족함이 없는 평균을 유지하고 있다.
사회성이 탁웚하다. 모르는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대화를 시도하고 자기를 소개하고 상대에 대해 질문한다. 이름을 외우는 것을 좋아하고 이름을 포함해 대화를 통해 습득한 정보를 대화에 적극 활용한다. 타인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상호작용에 관심이 많아 상대가 무시하고 갈 경우 다소 상심도 하고 주변 어른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왜 상대가 자기를 무시했을지를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다행히도 그런 일을 훌훌 터는 걸 잘 한다. 주변의 친구와 어른에게 포옹 등 신체적 접촉을 통해 친밀감을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 친구와 같이 노는 걸 좋아하지만 아쉬움이 없이 잘 놀기 때문인지 헤어짐은 우는 것 없이 흔쾌히 받아들인다.
놀이를 잘 만든다. 상상력이 풍부해서 이러저러한 놀이를 잘 만들고 친구들을 놀이에 끌어들이는 것을 잘 한다. 장난감이나 사물을 본연의 모습이나 기능과 달리 사용하는데서 창의적임을 느낄 수 있다. 잠에서 혼자놀 때는 인형에 역할을 부여해 혼자 대화를 주고받는 역할 놀이를 많이 한다. 상황에 따라 부여하는 이름이 세트로 나뉘어있고 그 세트가 매우 다양하다. 사자 가족일 땐 엄마사자, 아마사지, 아기사자 이름이 뭐뭐고 고양이 가족일 땐 그게 또 다르고 그냥 아기일 땐 뭐고. 너무 많아서 이제는 내가 다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다.
노래는 좋아하지만 음정은 좋은 것 같지 않고 미술을 좋아하나 그건 내가 잘 모르겠다. 그냥 특별할 것 없이 그 나이 애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정도인 것 같다.
숫자에는 큰 관심이 없다. 그냥 일부터 이십까지 세는 것 정도가 일상적으로 쓰게 되는 전부이고 시간에 대한 관념에도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매일 아빠가 읽어주던 라임책 덕에 두돌때 알파벳은 이미 읽을 수 있었지만 글자를 일고 싶어하는 욕구를 드러낸다거나 그런 건 보이지 않는다. 책은 좋아하는 것 같은 게 간혹 문닫고 조용히 있을 때면 앉아서 책을 들여다보고 집중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덴마크어는 또래 애들중에서 뛰어나다. 발달 정기검진에서도 언어나 신체조절능력이 많은 부분에서 평균보다 1년정도 빠른 것 같다고 나왔는데 실제 보육원에서 다른 아이들을 만날 때 느끼는 것도 비슷하다. 어려서부터 발음도 좋았어서 타인과 의사소통이 어려서부터 쉬웠다. 아무래도 공갈젖꼭지를 물리지 않은 것도 발음이 일찌기 좋았던 이유 중 하나인 것 같다. 오래 문 애들의 경우 이가 완전히 물리지 않아 발음이 새는 것을 보면. 그렇게 덴마크어가 뛰어난 것에 비해 내 노력의 부족탓인지 한국어는 부진하다. 요즘 좀 한국어 사용을 내가 늘리면서부터 한국어에 대한 관심도 늘고 있다. 자기도 자기 한국어가 뛰어나지 않은 건 잘 알고 있고 내 덴마크어가 완벽하지 않은 것도 잘 알고 있다. 이따금 다른 아이들 이름 발음을 교정해주기도 하고 문법을 교정해주는 것도 있다. 덴마크어애는 부정의문문에 긍정으로 답할 때는 Yes에 해당하는 ja를 jo로 바꿔 답해야 한다. 간혹 내가 그냥 이에 ja라고 하거나 실수로 ja라고 해야할 경우에 jo라고 답하면 정정해준다. 그리고 엄마 덴마크어는 나쁘지 않아 라고 이야기해주는 걸 보면 내 덴마크어가 모국어가 아님을 자기가 느낀다는 거다. 요즘은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갖고 와서 한국어로 읽어달라고 한다. 이해를 다는 못할 텐데 열심히 듣고 질문하는 거 보면 기특도 하다. 주도적 한국어발화는 많이 제한적이고 주로 내 요구에 의해 한국어를 말하는 경우가 거의 전부다. 생활속 레퍼런스가 떨어지는 게 한국어 실력 향상에 걸림돌이 된다.
성별 구분에 일찌기 관심을 가졌다. 여자, 남자 이렇게. 누가 가르친 게 아닌데 소방관처럼 그 끝이 영어로 하면 man으로 끝나는 단어일 경우 성별에 따라 자기가 단어를 변형해 woman에 해당하는 단어로 대체해 쓴다. 어느날 플레이데이트에서 애가 그렇게 단어를 쓰니 상대방 아이가 하나가 말한 게 맞는건가 싶어하며 다소 혼란스러워했는데 그 엄마 왈, 그런 거 내가 가르친 거냐 한다. 그런거 아니고 자기가 그냥 그런다고 했는데, 그 아이를 보면 남자냐 여자냐를 그렇게 따지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누가 시킨 게 아닌데 원피스, 공주, 악세사리 이런 거 엄청 좋아한다. 내가 그런 것도 아니고, 애한테 일찌기 중성적인 옷을 많이 입혀온 나인데.
운동기능이 뛰어나다. 체력 단련이 일상화된 게 우리집 발레바를 무슨 철봉처럼 메달리는데 쓴다. 매일. 팔다리, 코어가 모두 아주 단단하다. 봉을 타고 약간이나마 올라갈 정도니. 뛰어다니는 자세에 있어서도 어린 아이같은 어색함은 완전히 없어졌다.기어 올라가고 내려오고 높이에 대한 두려움도 별로 없다. 자기가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아기용 그네 같은 경우는 하늘높이 밀어도 두려움이 없으니 말이다. 그건 아주 어려서부터 그네를 태운 탓인 것 같긴 하다. 옌스가 애를 이래저래 많이 훈련을 시키는 것도 있어서 발달이 빠른 것 같다. 요즘은 두발자전거와 외줄타기도 연습중이다.
기저귀는 코로나 재택근무를 계기로 떼었는데 세상에 이렇게 편할수가. 여기는 대충 세돌 근처에 자연스럽게 떼는데 서너번 실수하고 더이상은 실수하지 않고있다. 밤엔 그냥 기저귀를 채우는데 거의 마른 기저귀가 대부분이다. 마르지 않은 경우 아침에 깬 이후에 눟는 경우가 주인 것 같다
예전에 지도교수가 세돌 반 지나면 거의 다 키운 거라더니 진짜 거의 그런 것 같다. 밥도 예전보다 덜 흘리고 먹고, 원하는 건 다 의사표현으로 구체적으로 표현해 해결하니까. 둘째를 낳을 생각은 없지만 이쯤 수월해지니 내가 한 5년정도 젊었으면 힘들었던 기억 이쯤에선 다 잊고 하나 더 낳았을 것 같다. 하지만 이 나이에는 우리 둘 다 하나로 족하다. 조카가 남자 사촌 하나 만들어 달라는 요청에 옌스가 꿈 깨라고 말해줬다. 하나면 족하지 아무렴.



겨울왕국에서 주인공의 부모가 죽는 장면을 본 이래로 하나는 죽음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혔다. 안그래도 좋아하던 아동용 드라마 주인공의 아빠가 주인공이 어릴 적에 돌아가셨다는 설정이어서, 땅속에서 자는 거다 정도로 이해해오던 거였다. 하지만 사고로 부모를 순식간에 잃게 되는 설정에서 죽음이 보다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 같다. 뒤이어 본 라이언킹에서도 아빠가 아이를 지키다가 사망하는 장면애서도 충격을 받았는데 후에 아들 심바가 돌아가신 아빠 사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마음 속 아빠와의 대화) 장면에서 죽음이라는 개념에 다소 혼선이 생긴 듯 싶다.
그래서 그런지 죽음을 끊임없이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때로는 그게 너무 슬프기도 하고 때로는 자연스러운 일인냥 받아들이기도 하고. 이런 경우에 이런거냐 저런경우에 저런거냐 하며 자기딴에 설정한 상황을 나에게 제시하며 죽음을 이해해보고자 한다. 나와 옌스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설명에 어찌나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던지. 지금 죽는 건 아니라니 안도를 하면서도 여전히 슬퍼하며 말이다.
이름 외우는데 귀신인 하나는 동네 주민들 이름을 다 꿰고있고, 만나서 대화할 때마다 이름을 문장 사이에 적절히 넣어가며 친밀함을 쌓아가는 스킬을 벌써부터 구현하고 있다. 엄마, 아빠도 잘 못하는 걸. 그런데 여기에 죽음의 토픽도 들어간다. 나이든 주민은 부모님과 살지 않으니 그들의 부모 존재 여부에 관심이 생기는 모양이다. 오늘은 우래 윗집에 사는 이웃에게, 부모님이 돌아가셨냐고 물어보더라. 엄마가 치매에 아버지도 몸이 안좋으시다고 알고 있던 그녀의 부모님이 작년에 돌아가셨더는 것을 덕분에 오늘 알게 되었다. 늦었지만 조의를 표한다고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앞으로 좀 더 가까이 지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나의 당황스러운 질문 덕분에 그녀와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친분을 쌓을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아직 죽음이 뭔지 정확히는 이해하진 못하지만, 더이상 대화를 나눌 수 없고 영원히 잠드는 거라고 이해한 그녀, 나도 많이 경험하지 못한 그 일이 그녀애겐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런 궁금함에 나도 어떻게 더 잘 설명해줄 수 있는지 한번 찾아봐야겠다.
남편과 크게 싸우는 일은 없어도 간간히 짧게 투닥거릴 일은 생긴다. 주로 내가 팩 하고 성질을 내는 경우이다.
곰곰히 생각을 해봤다. 왜 성질을 내나. 이는 자격지심과 동서양의 커뮤니케이션 방식 차이의 버무림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 내가 부족하다 스스로 느끼는 부분에 대한 주제를 (내가 느끼기에) 내포하고 있을 때, 그리고 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뭔가 시사점이나 의도를 (역시 내가 느끼기에) 내포하고 있을 때 나의 방어기제가 작동하며 팩 성질을 부리게 되는 것 같다.
나의 이기적인 마음. 옌스라고 이기적인 생각이 없겠느냐만 이는 대체로 이타와 중립을 선택함에 있어서 중립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음에서 이기적인 거고, 나는 중립과 이기의 선택에서 이기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음에서 이기적인 것이기에 둘 간에는 차이가 있다. 이 이기적인 마음을 나라고 좋아하는 건 아닌데, 상황에 따라 자기합리화도 해가며 이기적인 선택을 하곤 하니 이는 내 숨기고 싶은 성격이다.
오늘 좋은 날씨, 시주모님과 함께 아파트 정원의 테이블에서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테이블이 딱 두개가 있는데 혹여나 이 좋은 날씨에 자리가 채일까봐 약간 부족한 찬거리를 장보러 가기전에 자리를 맡고자 했다. 삼십분 후면 상을 차릴 거라 크게 무리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고. 옌스가 하나랑 잠시 화장실에 들르러 집에 돌아온 김에 테이블보와 살라미를 썰어먹을 도마릉 미리 갖고 내려가라고 했더니 그렇게 미리 갖고 가기 그렇다는 거다. 이 말을 듣자마자 내 머릿속에는, ‘내가 너무 이기적으로 미리 테이블을 맡으연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짜증이 확 치밀어올랐다. 어쩌면 그런 마음이 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걸 갖고 한 몇분 투닥거려도 결국 매번 그렇듯 옌스의 화해의 제스쳐로 별 일 아닌 듯 일은 마무리 되었다. 옌스는 바람도 많이불고 그 남은 삼십분동안 자기와 하나, 시부모님은 놀이터가러 자리를 비울텐데 그것만 거기에 덩그러니 두기 그래서 그랬다 말하는데, 그것까지 듣고 났더라면 그렇게 팩 하지 않았을 것을 나혼자의 자격지심에 갈등을 만든 것 같아 마음이 좋진 않았다.
이래저래 스스로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관계에서 내가 갈등을 초래하는 일이 생기는 것 같아서 조금 더 조심하고 적극적으로 소통을 해야겠다 느낀다. 넘고짚고 오해하고 불필요하게 상처받고 주는 일은 줄여야겠다. 가까운 사람일 수록 부대끼는 시간도 많고 서로 잘 안다하는 생각에 더 넘겨짚고 오해하게 되는 것 같다. 더 조심하고 아껴야지. 주의하자.
사람들은 각자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사는 것일까? 각자 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 것일까? 인생에 있어서 어떤 시기라는 게 있는 걸까? 인생에 있어서 정답은 없다지만 비슷한 인생의 이벤트를 겪는 단계에서 비슷한 고민을 듣게 되는 걸 보면 타인의 고민에서 혜안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인터넷 카페에서 알게되었던 펀자이씨 (instagram id @punj_toon) 께서 공유하신 어머니의 이야기 중 한 부분이 마음 속에 탁 와닿았다. “부자라는 게 겉으로 화려하고 안정적인 것처럼 보여도 속사정은 그렇지만은 않아. 평화로울 날이 없지. 언제나 발버둥치고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오늘을 걸고 내일을 도박하지. 풍요로움 속 비신과 술수, 불안감은 친구처럼 따라다니지. 아버지는 내게 주셔야 할 것을 이미 다 주셨어. 자존감을 높여주셨고, 책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셨으니까.”
사실 부를 좆아온 인생은 전혀 아니었는데, 새로운 주거지를 천천히 물색하면서 – 꼭 이사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현재 지역 내에서 조금 더 큰 주거지로 옮겨보려는 생각 속에 기약없는 탐색 중이다. – 내가 가진 것을 부족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것을 느끼게 되었다. 하나에게 조금 더 풍요로움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 조금 더 넓고, 좋고, 편안하고 안락함을 더 느끼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이 커지면서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나도 모르게 폄하하고 있었나보다. 그런데 저 말씀을 읽는 데 무릎을 탁 치게 되더라. 아차. 내가 이미 가져야 할 것을 다 가지고 있었구나. 내가 더 많은 물질적 여유를 누리려면 그에 수반해 얻을 고통이 또 있었겠구나.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 중 분명히 포기해야 할 것들이 더 있겠구나. 마음의 고통도 있었겠구나. 그리고 하나에게 줘야 할 것은 물질이 아니고 어려움이 닥칠 때 이를 마주할 용기와 극복할 힘을 주고 자기 통제 밖에서 일어나는 난관속에서 불필요하게 자책하지 않을 수 있는 자존감을 주는 것이겠구나. 그리고 답을 찾아나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거나 그를 탐색해갈 수 있는 삶의 태도를 알려주는 거겠구나. 그리고 나도 이를 향해 전진해나가며 하나가 이를 볼 수 있게 해주는 거겠구나.
소유를 많이 할 수록, 도둑이 들까, 재난이 찾아올까, 이를 어떻게 더 가꿔가야하나 하는 여러 구속이 따르겠다 싶었다. 물론 그 안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겠지만 소유를 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희생이 더 크다면 내게 그 가치는 크지 않을 거다. 우리 동네 주택가를 걸어다니며 좋은 집들을 보고 좋은 환경을 흠뻑 느끼다가 생각한게 거기서 누리고 싶은 정원에서의 활동은 공원에서 해도 되고 넓은 공간이 필요할 땐 집의 물건을 정리하면 되겠다 싶었다. 그게 꼭 내 지척에 있어야 하는 것도, 매일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야 한다는 것 자체가 욕심이다 싶었다. 무리하지 않고 그를 얻을 수 있는 여건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고. 그리고 사실 내가 갖고 있는 것도 분에 넘치고 좋은 것들인데 말인데, 그보다 좋은 것을 바라보느라 내가 갖고 있는 것의 부족함에 초점을 맞춘게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이제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했더니 내 일생에 드라마는 없어졌다. 항상 내 인생을 여기저기로 끌어가던 모험에 대한 열망도 사그라들었고. 드라마가 없으니 남는 건 매일의 일상이다. 밥을 준비해 먹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회사일을 하고 애를 돌보고 남편과 수다를 떨고 운동하고 같이 취미활동하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차를 마시고. 반복되는 삶에서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 내린 결론은 이거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끼고, 내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럴 체력과 여력이 있음에 감사하고, 반복적인 일상이 무료해질만큼 안전함이 내게 있음에 감사하며 일상의 소소함을 지켜나가는 것, 배움을 놓지 않고 크든 작든 배움을 이어가는 게 내 인생의 의미라는 것. 그리고 무소유의 삶을 지향하지는 않더라도 소유에 대한 집착은 끊임없이 내려놓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잊지 말아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