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오래 전이 아니었던 거 같다. 위암 수술 이후 간암으로 전이되었음을 확인하기 전이었던 듯. 아직도 기억나는 건 내 태극기함을 만드는 걸 도와주러 오셨다는 거다. 그 때 살던 아파트 베란다에서 거실에 연결된 부분에 사각형으로 된 마루조각을 깔았었는데, 그 남은 조각으로 태극기 함을 만들어준다 하셨다. 오빠도 그 한해 전에 만들었는데 오빠는 문방구에서 사왔던 표준화된 태극기함을 만들었더랬다. 난 그게 조금 부러웠었다. 남들이 다 만들던 것이라 그랬었을까? 결국은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셨던 내 태극기함은 우리집에서 오랫동안 쓰였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참 좋은 원목으로 만들어진 튼튼하고 좋은 함이었다. 그땐 지금의 안목이 없었으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불평하지 않았던 건 내가 좋아하던 할아버지가 일부러 와서 내 태극기함을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다. 난 못질이나 조금 도왔으려나?
내가 할아버지를 참 좋아했던 건 할아버지가 누구보다도 나를 이뻐하셨기 때문이었다. 이는 꽤 오랫동안 지낸 탓이 큰 것 같다. 아주 어려서 아빠가 독일에 1년동안 업무상 파견나가 계셨는데, 돌도 안된 나를 포함해 연년생 두 남매를 혼자 케어하기 어려웠던 엄마가 나를 외탁하시고 매일 외갓집으로 출근하시며 지냈었다. 그 덕에 나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제일 좋아했었고. 아마 그 때는 간간히 나를 훈육하는 엄마보다 나를 항상 싸고 도시는 두 분이 더 좋았던 거 같다. 엄마가 간혹 서운해하셨을 정도였으니. 두분에 대한 사랑을 아낌없이 표현하는 손주인데다가 일정 기간 직접 키우셨으니 그 정이 오죽했을까? 하도 내가 내 할아버지, 할머니다 라고 해대니 외가사촌들이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인 줄로 착각했을 정도로 양방향의 관계는 참으로 돈독했다.
외가집은 버스로 대여섯정거장이 될 정도로 가까웠다. 명일동과 천호동이었으니. 할아버지는 우리 동네에 있는 약수터에서 물을 길어가신다며 우리 집에 자주 오셨고, 자전거 뒤에 묶은 물통 위에 나를 얹어 태우시고 동네 한바퀴를 태워주곤 하셨다. 그때 타일은 요즘과 달리 정사각형의 큰 타일이었다. 네개의 타일을 두개씩 정방형으로 붙이면 큰 원이 그려지게끔 디자인이 된 거였는데, 멋진 여성들은 일자로 걷는다며 타일의 선을 따라 걷는 연습도 시켜주셨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신체 자세에는 참 안좋은 걸음걸이다.) 나보고 항상 여사감이라면서 커서 뭐가 되도 될 거라 하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뭐가 된 건 아니지만 쉬지 않고 뭔가 배워나가는 사람이 되었으니 기대하신 바에는 못미쳐도 나쁘진 않게 된 것 같다.
외할아버지와 관련되서는 내가 초등학교때 돌아가셨는데도 아주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많을 정도로,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나에게 너무나 특별한 분이었다.
해병대를 다녀오시고 그걸 엄청 자랑스럽게 여기셨다는 할아버지. 엄마와 이모들, 삼촌 모두 해병대 군가를 속속들이 외울 정도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해병대, 용맹함 이런 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나에게야 그냥 따뜻한 할아버지일 뿐이었지만 또 그 할아버지는 아버지로 두신 분들에겐 다른 기억과 다른 감정이 있겠지.
그랬던 할아버지가 태극기함을 만들기 위해 톱질과 못질, 사포질, 락카칠을 하시며 풀어내신 이야기 보따리에는 엄마가 태어나서 한번도 듣지 못했던 일제시대때 참전 이야기가 있었다. 엄마에게 직접 하신 이야기가 아니라 베란다에 오빠와 나와 함께 앉아 일을 하시며 우리에게 해주신 이야기를 엄마는 거실에 앉아 귀동냥하신 거였지만.
할아버지는 관동군으로 차출되어 2차대전에 끌려나가셨는데 소련군의 탱크가 줄줄이 남하하고 있는 와중 젊은 청년병인 할아버지는 폭탄을 끌어안고 탱크 아래로 들어가 폭탄을 터뜨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폭탄 옆에 바짝 누우면 살 수 있다는 일본 장교의 거짓말을 들었지만, 그걸 누가 믿는단 말인가. 조선징용군인에게 자살폭탄을 터뜨리라는 명령을 한 것이지. 할아버지는 그 명을 들어도, 안들어도 죽는 입장이었기에 폭탄을 들고 탱크로 다가갔지만 도저히 너무 무서워서 그 아래로 뛰어들 수가 없었고 그대로 기절을 했다. 그리고 깨어났더니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있었다더라.
그리고 얼마 후 일본은 항복을 선언했고, 소련군은 포획한 관동군 포로들을 모두 소련으로 데리고 가기 시작했다. 머리와 옷에 이가 들끌어 너무너무 가려웠는데 잡아도 잡아도 해결되지가 않고, 어찌나 많았는지 옷을 탈탈 털면 이가 날렸다고 한다. 배는 너무나 고팠는지. 할아버지는 이대로 소련땅에 끌려가면 언제 돌아올 수 있을 지, 살아 돌아올 수는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에 탈출의 기회를 끊임없이 보았다. 중간중간 대소변을 볼 수 있게 해주었는데, 어느 날은 작물의 키가 제법 커진 – 벼인지 보리인지 뭐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 들판에서 볼일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단다. 여기에서 도망가지 않으면 언제 더 좋은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싶어 얼른 그 아래로 숨어 그 들판 근처에 보인 똥통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 이유인즉슨 포로수를 다 일일이 셀 수 없었던 상황이라 그런 휴식시간이 끝나고 나면 들판에 총을 드르륵 갈기고 갔었기에 몸을 보호해줄만한 거라곤 똥통 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다. 온몸에 똥독이 올랐지만, 그렇게 포로신세는 탈출했다. 그러고는 달구지에 숨어들고 등등하여 38선으로 나뉜 북녘땅을 통과해 월남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때만해도 물리적인 군사분계선이 없던 때라 정확히 어디가 남한땅인지 알 수 없었지만 멋진 선글라스를 끼고 할아버지를 향해 휘파람을 불며 인사를 하던 연합군 병사를 봤을 때 할아버지는 여기가 남한 땅이구나 하며 그간의 긴장이 사르르 풀렸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 못돌아온 사람들은 지금도 시베리아 등지에서 살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때 할아버지가 탈출하지 않으셨다면 나는 존재하지도 못했을 뻔 했던 것이다.
왜 그 이야기를 그때까지 한번도 안하셨을까? 할아버지에게 그건 수치스러운 일이었을까? 평생의 트라우마로 죽기전에 한번쯤은 이야기하고 가야한다고 생각하셨던 일이었을까? 엄마는 할아버지가 떠나신 후 거실에 앉아, 평생을 해병대 전우를 외쳐온 할아버지에게 이런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고 그걸 이제서 우리에게 이야기하신 것도 너무나 놀랍다 하셨다. 나도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처음 하셨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었기에 놀라웠었고.
어쩌다 나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시부모님이랑 지난 주 저녁 식사 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 이야기가 나왔는데, 아마 그게 할아버지에게는 지우고 싶고, 있었던 일인 것조차 기억하기 싫은 힘든 기억이었을 거라고 시부모님이 이야기하셨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결혼하신 것도 할머니의 위안부 차출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하니 너무 놀래시며 후세를 위해서는 공유가 필요한 이야기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나도 너무 오래간만에 떠올린 기억이라 언젠가 하나에게도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을 거 같아 기록해두려고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