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

사무관급에서는 연봉 협상이랄게 많지 않다. 기본적으로 정부와 내가 소속된 노조랑 임단협을 하면 내 임금단계에 맞춰 인상이 되기 때문이다. 임단협에 맞추지 않고 내가 직접 협상하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매우 드문 케이스이고. 나는 원래 주는대로 받자는 주의라 임단협에 묻어간다. 내가 아주 특별하게 뛰어났다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고.

단협을 받아들이든 자기가 직접 협상을 하든 그건 이미 본 협상 단계에 들어서서 할 일이고 그 전에 또 임금기대수준에 대한 대화를 하는 회의를 갖게 된다. 여기서 상사도 오퍼할 내용을 준비해 공유하고, 직원도 자기 나름대로의 기대수준을 이야기한다.

오늘 이 임금기대수준에 대한 회의를 했는데 사실 나는 잘 모르겠어서 잘 모르겠다고 했다. 임금정책에 대해서도 읽어봤지만 매우 원론적인 정책이라 그게 나에게 해당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고, 아직 이 임금협상이 익숙하지 않다고 했다. 마음 먹고 썰을 풀자면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이겠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원한 이상의 결과가 나왔는데 무엇보다 기뻤던 건 상사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상담을 받고 그 상담의 내용을 일상에 적용하고 하는 걸 벌써 두달 조금 넘게 했는데 그 사이에 정말 큰 변화를 본 거다. 상사의 좋은 평가나 이런 걸 덴마크에서 직장을 잦은 이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냥 좋게 말해주는 것 뿐이지, 나랑 일하는게 답답할 거다 이런 식으로 혼자 생각하고 덴마크어에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나에게 참 가혹하게 굴었으니…

심리상담 받느라 주당 근무 시간도 한두시간 줄이고 해서 평균을 넘는 임금인상은 기대도 안했는데…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또는 그냥 당연하다 생각했던 내가 갖고 있는 장점들을 꼬집어 내어 좋게 상사가 평가를 내리는 것을 보며, 타인의 여러 모습을 두루두루 살펴보고 그걸 꼬집어낼 수 있는 능력이 상사에겐 참 필요한 덕목이구나 싶었다. 세금 내고 나면 대세로 보아 큰 의미없는 임금 인상이지만 상징적 의미로 기쁜게 크지 않나 싶다.

덴마크 직장생활 만 4개월 평가

요즘 언론에 초점을 받는 업체들이 조금 있는데, 그와 관련해서 우리도 영향이 있을 거 같아서 주시하다가 사안을 조금 깊게 파고 들어봤는데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경영진의 관심이 쏠린 사안이라 급히 목요일 오후부터 금요일 오후까지 급히 작업을 해서 보고서를 만든 후에 경영진에 자료를 송부했다. 자료를 미리 보내둬야 주말에 경영진들도 자료를 읽고 월요일에 회의를 할 수 있으니까. 금요일은 그덕에 점심도 스킵하며 일하고 서둘러 퇴근했는데, 오늘 회의도 열두시 반에 잡힌 탓에 한시 반이 넘어 간신히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일이 커져서 그 일을 내가 본격적으로 담당하게 되었는데 재미있을 것 같다.

지난 4개월 조금 넘은 기간 동안 느낀 걸 몇 개 뽑아보니 참 신선하면서도 은근히 금방 익숙해지는 것 같다.

첫째로 보고서에 대해서 절대 막 수정하지 않는다. 보고서를 검토, 수정해서 나에게 보고서가 돌아올 때도, 그 분량이 많지 않고, 내용이 내가 의도하던 내용에 부합하는지 등을 확인하고 수정이 괜찮은지 봐달라고 표현하는 게 참 신선했다. 내가 외국인이니 나는 문법 틀린 거는 매우 환영하며 고쳐달라고 하는데, 그게 혹시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는지를 확인하는 것부터 좋은 의미로 얼마나 이상하던지.

그리고 잘 한 부분은 정말 열심히 칭찬해준다. 덴마크도 겸양을 중시하는 터라 칭찬에 반응하는 방법이 우리랑 크게 다르지 않은데, 칭찬은 적극적으로 하는 편인 것 같다. 우리 센터장이 특별히 그런 타입인 것 같긴 한데.

직군별 이동이 없다. 행정직은 행정업무만 한다. 행정직이 오래 근무를 했다 해서 전문직군 업무를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이코노미스트 (økonom) 포지션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해당 학위가 있어야만 한다. 이를 대체할만한 이력이 있으면 모를까 짧은 행정 관련 직무교육을 받고 비서로 계속 일한 사람은 같은 직장에 계속 있었다고 해서 이코노미스트 포지션에 앉을 수 없다. 각자 자기 자리에 앉아서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을 계속 파는 것 뿐. 부서를 바꿀 수는 있어도 크게 자기가 속한 커리어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공공부문이 이런 건 더욱 강한 것 같다. 민간이야 사실 그런 업무를 할 수 있기만 하면 교육 백그라운드가 중요한 건 아니고, 경력이 길 수록 교육의 의미야 흐려지기도 하니까.

회식은 진짜 없다. 다 각자 바쁘니까. 나도 바빠서 참여하기도 어려우니. 대신 1년에 한번 센터데이를 한단다. 업무시간 중 프로그램은 철저히 업무와 관련해서 짜더라. 우리 같은 경우 우리가 관리하는 하수처리 업체 중 하나를 방문해서 하수처리 프로세스도 보고 설명도 듣고, 예산 관련 애로사항도 청취하는 걸로 짰는데, 대신 저녁에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먹는 걸로 했다. 음… 기대기대. 놀라운 건 이 모든 어레인지를 센터장이 했다는 것. 이게 가장 센터데이에서 가장 놀라운 파트였다. 일정은 두달 전에 이미 전체 직원에게 일정을 물어봐서 조율한 거였다.

행정 업무가 일에서 빠져 있으니까 일에 대한 집중도가 얼마나 올라가는 지 모른다. 자기가 어떤 일을 맡을 줄 알고 지원해서 채용된 포지션에서 다른 이상한 잡무 안하고 관련된 일을 중심으로 담당하면 당연히 집중도가 올라갈 수 밖에 없는 거 아닌가. 가지수가 늘어나면 날 수록 데드라인 점검하는 것으로 머리가 복잡해지니.

직장생활에서 친구 사귀는 건 힘든 일인 건 맞는 거 같다. 내가 내 생활에 여유를 내줄 수 없는 것처럼 타인도 자기 생활의 여유를 내주기 힘들고 그나마 그걸 할 수 있는 젊은 사람들은 또 아침에 회사 헬스장에서 만나서 같이 운동하거나 같이 러닝클럽에서 뛰는 식으로 내가 맞추기 어려운 활동을 하더라.

금요일마다 직원들이 돌아가며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대충 사가는 품목은 큰 틀에서 정해져있지만 자세한 건 자기가 정하면 된다. 인원이 늘어나서 올 3월부터 2인이 분담해 해당 주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으로 바뀌었는데, 주스, 잼, 치즈, 버터, 햄, 과일, 빵, 패스츄리 등을 준비하면 된다. 은근 무겁다. 그래도 이렇게 금요일 아침에 30분 식사를 함께하며 담소를 나누고 센터회의를 뒤이어 하면 서로 공유할 정보도 나누고 친교도 나누고 좋다. 회식이 어려운 덴마크인에겐 회식같은 요소이다. 물론 점심도 있지만 점심보다는 회의실에 앉아서 하는 식사라 좀 더 친목요소가 더 있는 느낌?

4개월이니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지난 기간에 대한 평가는 대만족이다. 오히려 너무 대만족이라 두려운 듯. 상사가 갑자기 바뀐다면 어떨까 등등 이런 생각 말이다. 우리 팀장은 여자인데 내가 만나본 적 없는 유형의 여자 상사로 카리스마, 부드러움, 유머, 강단을 잘 버무린 사람 같다. 쓸데 없는 생각말고 일이나 해야지. 새로운 프로젝트가 하나 떨어졌는데 사안을 과거사부터 깊게 파봐야 하는 일이라 아주 재미있을 것 같다. 분석리포트도 재미있지만 두 프로젝트를 병행하는 것도 하나가 안풀릴 때 다른 걸 하는 식으로 돌릴 수 있어서 더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