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스포츠 클라이밍

상체 근력이 약한 관계로 오버행 벽에서는 수직벽에 비해 난이도를 한단계 내려 타도 고생을 한다. 클린하게 한번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지난번엔 아무리 시도해도 못해 포기했던 벽을 오늘은 두번의 휴식을 포함해 완등했다. 다음의 목표는 휴식을 한번으로 줄이는 거다. 아예 쉬지 않는 목표는 너무 거창한 거 같고.

벽을 타다보면 여러가지 이유로 파트너가 바뀌게 되는데 – 파트너가 멀리 이사를 간다거나, 여자친구가 생기면서 등반 시간대를 옮긴가거나 – 그런 때를 대비해 새로운 인물과 기분을 열심히 쌓아두어야 한다. 왠지 혼자인 듯 한데 실력이 크게 차이나지 않는 것 같은 사람에 있다? 혼자 왔냐 묻고 파트너가 있는지 물은다음 없다, 상대도 누군가를 찾는다 이러면 바로 작업들어간다. 같이 타보겠냐고.

그렇게 만난 체코인 파트너와 클라이밍을 하고 탈의실에서 짐 챙기는 중 홍콩인을 만났다. 왠지 나를 흘끗흘끗 보는데, 말 거려나? 생각하며 손을 씻는데 입술에 묻은 초크가 너무 무서워서 실소가 터진다. 입술에 하얗게 자주 초크 바르고 다니게 되서 거울 보다가 깜짝 놀래곤 한다고 말의 물꼬를 텄다. 그러자 자기도 종종 그런다면서 나 리드 벽타는 거 구경했다는거다. 쉬다가 리드 타는 거 봤는데 잘 하더라, 하면서.

덴마크 온 지 두달 된 학생인데 파트너가 없어 혼자 클라이밍을 한다고 하길래 연락처를 주고 받았다.

친구랑은 또 다르지만 클라이밍이 은근히 소셜한 스포츠라서 이렇게 사람 만나는 재미가 또 있다. 벽 위에서는 혼자의 싸움같지만, 또 그 안전을 도모해주고 내려와서 담소를 나누고 취미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데에서 꽤나 소셜한 취미이다.

오늘 힘든 루트 두개 했더니 팔이 후들후들… 힘드네…

덴마크 친구들과 한국

발레를 꾸준히 오래 하다보니 이 바닥 좁은 덴마크 성인 취미발레계에 알게 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취미가 같다보니 할 이야기도 많고 다들 발레에 큰 열정을 갖고 있다보니 그 공통점에 가까워지게 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이번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나흘간 두시간반에 걸친 발레 여름캠프에 참가하면서 새롭게 알게된 사람도 있고 또 알던 사람과도 더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그 중에 사람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하나 있어서 저녁도 같이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며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알게되는 시간을 가졌는데 발레 공연도 같이 보기로 했다.

재미있는 건 전혀 K-pop이나 드라마의 팬이 아닌데 한국 음식과, 문화, 역사 등에 관심을 갖고 여행을 벌써 두어차례 다녀오고 요리도 레시피를 찾아서 해먹는 사람도 있고, 그냥 재미있을 것 같다며 한국 여행 가보겠다고 한국어를 자습하기 시작한 사람도 있다. 한국어 배우는 건 요즘 좀 힙한 일 아니냐며… 음? 뭐라고??? 언제 그랬지?

한국 요리를 나에게 배워보고 싶다는 말을 지나가는 듯이 한 적이 있는데, 그럼 한번 우리집에 초대할 테니 같이 만들어보자고 했다. 오늘 종강저녁을 같이한 친구들 모두 너무 좋다며 9월에 자리를 한번 마련하다고 하고 으쌰으쌰 마무리했는데 기대가 된다.

외국인인 것이 언젠가부터 덜 특별할 만큼 국제화 되어가고 있는 코펜하겐이지만 오히려 그게 친구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고 있음을 이제사 느낀다. 나때문에 영어로 모든 대화를 바꿔줘야 했을 땐 뭔가 내 스스로 장벽을 느꼈지만 이게 해결되고 나니 옌스가 말한대로 취미활동을 통해, 나만의 특이점을 통해 친구를 사귈 수 있게 되었다.

뭐랄까… 한국인이라 덕 봤다는 건 살면서 별로 느껴본 적 없는데 요즘 좀 느낀다. 이런 기분도 나쁘지 않구나.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했다는 뜻이겠지.

2주 반만 지나면 다음 시즌 발레가 시작되는데 너무 기대된다… 요즘 많이 늘어서 더 추고 싶은 발레… 이제 피루엣도 더블턴을 시작했고… 주 3회로 한번 더 늘려볼까?

동료가 동네친구로

동료와는 사적으로 만나는 일이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드문 이곳에서 옌스의 동료가 아닌 내 동료와 같이 사적으로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자기 일상이 바쁘고, 기존 친구 만날 시간이 더 중요하니까.

전 직장 동료와 비슷한 시점에 같은 동네로 이사한 사실을 알게되어 연락을 하고 애들과 함께 만나기로 이야기가 되었다. 밖에서 보려다가 우리 집에서 보는 것으로 계획이 좀 바뀌고, 잠깐 티타임만 가지려던 것이 밥도 같이 먹자고 즉흥적으로 바뀌어 그녀의 남편도 불러서 밥을 먹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와 그집 하나와 동갑내기 딸이 같은 유치원, 같은 반에 다닌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여기 유치원도 많고 유리 유치원에 반도 하나가 아닌데…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간 일상도 조금 업데이트하고, 요즘 나는 무슨일 하는지도 이야기하고 전직장 이야기도 하고. 하나가 잘 노는 친구의 엄마이기도 해서 더욱 마음이 좋은 게, 나도 좋아하는 동갑내기 동료였어서 같이 만나기도 마음이 참 편해서 말이다.

앞으로 좋은 동네친구가 생겼다. 남편도 말로만 많이 들었던 사람인데 드디어 얼굴도 직접 보고 이름에 매칭도 하고. 너무 좋구나~~~

해외생활 속 인간관계 맺기

나에게 인터넷에서 우연한 기회로 인사를 나누고 얼굴을 만나는 건 아주 드문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흔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만나고 나서 또 만나고 싶은 연이 되는 건 그보다 더 드물다. 한국에 살았더라면 그런 기회를 만드는 일조차 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해외에 살다보면 그 전에는 안 할 일도 하게 되고, 안 할 일도 하게 되서 그런지 그렇게 만든 연들이 지금의 내 주변을 촘촘히 채우고 있다. 하긴. 내 남편조차 인터넷에서 만났으니 제일 중요한 인연부터 인터넷이 이어주었구나.

해외생활을 시작하면서 내 주변 관계의 지도가 달라졌다. 한국에서 오래되었고 아주 가까웠지만 자주 연락하지는 못하며 마음에 곱게 담아 종종 생각하며, 매우 드물지만 만남이나 깊은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 적당한 거리의 관계로 온라인에서 즉흥적으로 가끔씩 댓글로 말을 주고 받지만 막상 더이상 만나는 일은 거의 없을 친구나 지인, 그리고 내가 사는 곳에 사는 사람들로 새롭게 사귄 친구. 모든 인적관계를 이 분류로 나눌 수는 없지만 큰 틀로 보면 대충 이렇게 나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시차가 있고 생활의 의무가 있다보니 한국에 사는 사람들과는 내 마음의 크기가 어떻든 제대로 된 연락의 빈도는 아주 크게 낮아졌다. 결국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의 사람을 새롭게 사귀어야 한다.

해외생활을 시작한 초기에는 이런 관계 지형의 변화가 씁쓸하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냥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다. 어떤 게 친밀함인가에 대해 내가 정의하는 방식이 바뀌었고, 관계의 변화가 내 거주지의 변동 때문이고, 그 와중에 각자가 많이 다른 길을 걷게 되서 낯설어진 이유도 있을 거다.

이제는 여기서 가까운 사람들을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는데 나이 들어 새롭게 마음에 맞는 친구 사귀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느리지만 차곡차곡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교제하고 있다.

온라인에 올라온 질문에 간단한 답을 하고 전화로 대화를 간단히 나눈 뒤 전격으로 바로 만나게 된 사람이 있다. 아직 한번밖에 보지 않은 친구지만 네시간의 시간이 너무나 훌쩍 흘러갈 만큼 반갑고 유쾌한 만남이었다. 살아온 경로가 다르지만 비슷한 고민을 해보고 비슷한 사고의 변화를 경험해본 그녀와의 만남에 신선한 자극도 되고 앞으로 쌓아갈 인연의 가능성을 생각해보며 설레이기도 했다.

코트라 다니는 동안은 해외에서 한국사람을 만나는 걸 꽤나 꺼려했더랬다. 한국에서도 아무나 친구가 되는 게 아닌데 단지 해외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알게 되고 지나치다보면 괜한 말이 도는 일도 생기고 그닥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재원이라는 입장과 교민이나 유학생의 입장이 다르다 보니 서로 생활의 준거집단이 다르고 생활방식도 달라서 오해나 감정이 쌓이는 일이 생기기도 한 것 같다.

주재원의 틀을 벗고 나니 내 생각도 행동도 조금 더 자유로워졌고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하다보니 관심사도 생각도 많이 바뀌고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의 좋은 경험이 켜켜히 쌓이며, 한국사람 만나는 것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한국사람 모두와 교제할 생각도 없지만 한국사람이라는 이유로 멀리하는 것도 없어졌다.

덴마크에서 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한국음식에 대한 그리움도 줄어들고 내 모국어가 아닌 말로 생활하는 게 더이상 불편하지 않고 덴마크 사람이나 다른 외국 친구와 한국인과는 또 다른 주제로 다양한 대화를 하는 게 매우 즐겁고 좋다. 그런데 나와 맞는 사람이라면 한국사람과 만나는 게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사람과만 교제하며 사는 건 이제 답답할 것 같은데 그게 완전히 배제되는 것도 싫은 거다. 그래서 한국사람들과의 교제를 보다 능동적으로 찾게 되었나보다. 새로 만나 인사하고 서로를 탐색하는 시간이 때로는 피곤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처음에 만나 클릭하는 것 같은 느낌의 인연도 이런 시도 없이는 맺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또 이런 생각이 어떻게 변할지야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지금은 내 주변에 생긴 관계의 틀이 만족스럽고 삶을 풍요롭고 내가 일상을 끌어나갈 힘을 내게 해 준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타지에서 아플 때 – 친구가 너무나 고마운 순간

나는 전형적인 서울 깍쟁이다. 물론 살면서 도움 주고 받을 일 없겠냐만은 거의 도움을 요청해본 적이 없다. 스스로 어떻게든 버티거나 부모님에게 손 뻗는 거 외엔 도움 요청하는 일이 거의 없다. 4년전 옌스가 중국에서 옮겨다준 플루에 1차로 아프고 나서 2주 뒤 거의다 나았다가 신종 플루에 2차로 연속 감염되어 40도로 고열이 나고 합병증으로 급성기도염에 걸렸을 때도 응급실 여는 아침 7시에 맞춰 (내가 사는 동네 응급실이 24시간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기다렸다.) 간신히 운전을 해 병원에 갔더랬다.

이번의 독감은 다소 독했던 2주간의 목감기 끝에 찾아왔다. 진짜 힘들었지만 다행히 하나가 보육원을 시작했기에 어떻게 버텼는데, 바이러스성으로 추정되는 소화기관계열 감염이 찾아왔다. 토요일은 옌스와 하나가 고열로 시달리고, 나도 독감으로 힘든 와중에 간신히 애 돌보며 하루를 보냈더니 일요일은 나에게마저 증상이 찾아온 것이다. 그나마 옌스가 하루 꼬박 침상에 드러누워 앓고나서는 일요일엔 나와 바톤터치하고 하나를 봐줘서 다행이었다. 문제는 옌스가 요리를 못한다. 그간 독감으로 간신히 한끼 요리해서 가족들과 저녁식사 한 것 외에는 빵 등으로 간단히 끼니만 떼우며 살도 빠지고 기력도 떨어져있었는데 내가 완전 누워버리니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토요일, 마침 셸란 섬에 와계신 시어머니께서 시판 이유식과 오븐에 넣어 구워먹을 수 있는 음식 등을 사다주고 가셔서 그걸로 버티나 했는데, 막상 빈속에 구토를 해서 쓸개즙까지 보고 난 상황에 그런 씹어먹는 서양식은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았다. 옌스에게 죽을 끓여달라고 할 수도 없고. 괜히 쓸데 없이 감정이입해가며 서러워하지 말자는 나였지만, 갑자기 진짜 서러워지는 거였다.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그 서러운 마음을 전하고 나니 – 사실 걱정하실까봐 전화 안하고 싶었는데, 극한의 상황이 되니 엄마가 필요하더라. – 마음이 우선 진정이 되었다. 주변에 도움 청할 사람 없냐고, 이럴 때 사람이 도움의 손길을 요청할 줄도 알아야 된다며, 나중에 도움도 주고 그러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안그래도 친구에게 전화를 할까 말까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주말 안그래도 바쁜 거 아는 친군데 연락하기 그래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연락을 했는데,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정성으로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도움들을 주고 갔다.

흰죽과 그와 함께 먹을 수 있는 짱아찌, 누룽지 끓여먹으라고 자기가 좋아하는 둥글레 향이 나는 누룽지, 생강차와 꿀과 이에 바로 넣어먹을 수 있게 손질한 레몬, 하나 먹으라고 호박고구마죽까지… 정말 양손 무겁게 양도 듬뿍 준비해왔다. 바로 갖고와서 죽은 아직도 뜨뜻하기까지… 미역 불려놨다며 다음날 보자더니 이튿날에는 미역국과 고추장아찌, 밥까지 갖고 왔다.

흰죽을 받아든 날 부엌에서 내용물과 쪽지를 읽어보고서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났다. 아. 이 따뜻한 마음이라니. 참 어떻게 이렇게 정이 넘치나 싶어서 고맙고 또 고마웠다. 너는 도대체 어떻게 생긴 녀석인데 이렇게 정이 넘치냐… 싶어서 그냥 고마웠다.

남편은 아플 때 다른 집안일로는 도움을 줄 지언정 요리로는 큰 도움을 줄 수 없어서 뭔가 사다주는 것으로 대체는 해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어렵다. 특히 자기도 아픈 때가 되니 하나도 있는데 나도 부탁하는 데 한계가 있어서 뭔가 사방이 다 막힌 것만 같았다. 엄마 말마따나 어려울 때 서로 품앗이를 할 수 있어야지 아니면 힘들 때 너무 힘들다. 그리고 이번을 계기로 남을 도울 때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었다. 내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일적인 도움 되에 이런 일상생활의 도움은 주는 것도 너무 몰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도 내 소중한 사람들의 어려움에 있어서 이렇게 선뜻 나서야겠다는 배움을 얻어간다.

이건 정말 평생에 갖고갈 고마운 일이다. 고마워, 윤하야.

부도 난 와인바

결혼식 선물로 받은 상품권 중 와인바 상품권이 있었다. 상품권은 빨리빨리 써야된다는 것을 알게된 오늘. 몇 달 전만 해도 잘 운영하고 있는, 품평이 좋은 와인바였는데. 이 상품권을 선물로 준 친구를 초대해 와인바에 가려고 주소와 상호 확인하려고 방금 인터넷을 뒤지니 부도가 났단다. 뭔지는 몰라도 수지타산이 안맞게 했던 모양이다. 좋은 와인을 과하게 저렴한 가격에 냈든 어떻게 했든간에 부도가 났다니 안타깝다. 미슐랭 별점을 받은 식당 상품권이 있는데, 이건 하나 태어나기전에 얼른 가야겠다. 무슨 이유든 문 닫으면 못쓰니까. 흠흠흠…

다음주엔 그냥 좋은 와인바 가서 마시는 것으로… Ved Stranden 10으로 결정. 임신한 내가 술을 마시면 한국에선 난리가 나겠으나, 일주일에 와인 한잔은 괜찮다는 덴마크 보건당국의 임산부 건강수칙에 따라 옌스의 보수주의를 더해 나는 샴페인 한 잔 시켜 옌스가 반을 마시는 것으로 했다. Ved Stranden 10는 웬만해서는 실패하지 않는 셀렉션과 좋은 분위기, 유쾌한 서비스 등으로 좋아하는 곳이다. 위치도 Holmens Kanal 옆으로 Nørreport 역에서 걸어가면 되서 편하다. Nørrebro에 있는 Vinhanen이라는 곳을 더 좋아하지만 거긴 우리가 만나기로 한 월요일에 문을 안연다. 늦게까지 여는 곳이라 주 2회 휴무를 하는 듯. Ved Stranden 10는 일요일 빼고는 다 여는데, 10시까지만 문을 연다. 바가 주 목적이라기보다는 바와 와인샵 기능이 동시에 중요해서 그런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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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hanen에서. 부활절 직전에 친구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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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d Stranden에서 친구들과의 모임. 이때는 입덧으로 주스만 들이켰는데… 사실 입덧이라 하기에도 애매할 정도로 약하던 것이 이 뒤로 며칠 지나 심각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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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바로 Ved Stranden 10. 무슨 패션 촬영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와인바와 바는 거의 다 이 친구들이랑만 갔었구나.

옌스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인 밥 딜런이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또 오는 모양이다. 어제 자기전 침대에 누워 신문을 보다가 광고를 발견했다. 문화면을 꼼꼼히 챙겨보는 건 그래서이려나.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들 안놓치려고. 4월 초에 오는 일정이다. 내일 회사에 가 있는 중 예매가 시작된다며 좋은 자리를 예매하고 싶은 그가 시무룩해졌다. 그러다가, “너 내일 학교 안가지?” 라며 반색을 한다. 두 장 예매할 거 맞냐고 물어봤는데, 물어보나마나다. 당연히 혼자 가는 건 싫으니 친구를 데리고 가겠지. 시부모님을 불러 애를 맡기고 가야하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가서 조느니 (꼭 공연 전 마시는 와인 한잔 때문에 난 어떤 공연을 가도 존다. 지난번엔 엄청 시끄러운 락 공연 가서도 졸았다.) 옌스가 함께 열광할 친구와 가서 신나게 즐기고 오는게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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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바비! 웰컴 투 덴마크!

이 공연은 와인바처럼 부도가 안나겠지. 아니, 혹여나 공연 기획에 뭔가 차질이 생겨도 돈은 돌려줄테니. 쩝. 와인바 부도는 매우매우 아쉽지만 (따라서 선물이 공중분해…) 친구를 만난다는 것과 맛난 샴페인 반 잔 마실 생각으로 아쉬움을 달래며 밤이나 삶아먹어야겠다. 금요일엔 대학원 친구들 두커플 불러서 한국메뉴로 크리스마스 디너를 하기로 했는데 그걸 생각하며 남은 며칠 잘 보내봐야겠다. 흠흠… 뭘 먹여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나려나…

주말 손님 초대상

지난 주말 손님을 초대했다. 커플 저녁. 친구의 출산 예정일이 그 다음 주인데, 출산 중 첫째애를 돌봐주기로 했다하여 혹시나 그 날 출산하게 되면 갑작스레 못올 수도 있다고 이야기해준 상황. 실제 그 날 낮에 애가 태어나 저녁 식사가 한시간 뒤로 밀렸으나 운이 좋게도 출산이 빠르게 진행되어 계획한 날 만날 수 있었다.

아주 유쾌했던 저녁. 8시부터 12시까지 네시간 동안 계속된 담소가 즐거웠다. 내 커플 인간관계가 옌스의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주로 이뤄지는데, 그 중심이 커플 당사자의 양쪽에 어느정도 분배가 되어야 장기적으로 좋다고 생각한다. 내가 상대의 인생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둘의 인생이 만난다는 걸 인간관계 형성에서도 느낄 수 있기에. 특히 내가 이민생활을 해서 그런게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내가 자라온 환경과 역사, 문화를 공유하는 친구가 있는 건 의미가 또 다른 것 같다. 그래서 국제커플간의 만남은 나에게 있어 중요하다.

후무스와 화이트브레드칩, 크렘프레시와 딜로 버무린 연어를 넣은 핑거파이쉘을 에피타니저로 준비하고, 갖은 채소로 만든 바질페스토 쿠스쿠스 샐러드와 모과드레싱과 토스티드 호두를 넣은 사과 윈터샐러드를 곁들여, 감자/고구마를 밑에 깔고 오븐에 구운 닭다리 요리를 메인으로 준비했다. 디저트로는 옌스의 크렘브륄레와 오렌지 소르베에 이어 달콤한 디저트와인과 칸투치니를 내었다. (주 1회 한잔은 괜찮다니까, 나도 한잔. 😉 임산부의 음주라는 사치는 덴마크니까 가능하다. 흠흠. 좋네.)

배가 터지게 먹을 걸 알고 있어서 아침, 점심 간단히 해결했지만, 여전히 배는 터질 것 같았다. 약간 음식을 여유있게 준비했기에 다음 날 저녁 요기거리가 될 만큼이 딱 남았다.

손님을 초대하면 좋은 점이 사치스럽다는 생각 없이 꽃을 집에 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냥 나혼자 보자고 꽃을 사올 때면 괜히 아까운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이런 날엔 자신있게 한다발 집어들고 들어올 수 있는 것. 그리고 손님이 갖고 오는 선물도 기대가 된다. 그날 같이 마실 와인이나 초콜렛이 될 수도 있고, 꽃이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이날과 같이 예상하지 못했던 서프라이즈 선물을 받을 수도 있는데, 집에서 직접 담근 맥주와 김치의 맛이 어떨지 기대가 된다.

우리가 아주 즐겁고 유쾌한 저녁을 보낸 것처럼 그들도 그런 시간을 보냈다고 하니 앞으로 있을 교류가 더욱 기대된다. 이제 임신도 30주차에 접어들었는데,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해서 장 보고, 청소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것까지 하루에 바삐 움직이며 다 처리하는게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임신 전에도 항상 토요일 손님초대 = 빡빡한 일정, 이런 공식이 성립되서 다음 날엔 뻗곤 했는데, 이젠 요령이 늘어 다음 날 뻗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냥 배도 좀 뭉치고 힘들더라. 출산 전까지 누군가를 더 초대한다면 (그러려는 계획이었는데) 좀 더 가벼운 디너를 준비하거나 출산 뒤로 미루든가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준비한 만큼 보람이 있었던 즐거운 저녁이었다.

 

타국에서 새로운 친구 사귀기

한국에 살았으면 지금처럼 새로운 친구를 열심히 만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미 오랜 시간 쌓아온 친구들만으로 새로운 사람을 채워넣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겠지.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말에는, 그들을 생각하는 나의 마음만 생각하면 동의하진 않는다. 그러나 거리와 시간이 멀어지는 만큼 공유하는 순간이 줄어들고 감정을 공유할 기회가 줄어들기에 내 상활속에 그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드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새로운 생활의 터전이 생긴만큼 사람도 새로 만들어가야 한다. 회사에 다니는 동안은 주재원이라는 위치에 나 스스로 얽매여있었다. 업무를 하는 과정에 내 상식과 업무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교민 한명과 부딪힐 일이 생기며, 주재원으로 있는 동안은 교민과는 거리를 두는게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인도에 있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여기도 별반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내가 직장을 관두고 일반 교민이 되면서 그렇게 따로 거리를 둘 이유도 없어졌기에 입장도 바뀌었다. 대학원과 어학원을 통해 비한국인 친구들은 충분히 생겼는데 한국인 친구는 없었기에 교민 친구들도 생겼으면 했다.

마침 회사를 관두기 전 알게 된 한-덴 커플로 이주를 온 한명과 우연찮게 교류를 하며 친구가 되었고, 그게 연이 되어 친구 한명이 두명이 되었다. 또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된 이웃이 덴마크로 이주를 오며 또 친구가 되었고, 그렇게 알게 된 오후스의 지인과 어찌어찌해 또 얼굴을 보고 만나게 되었고 휴가 때는 내가 가서 만나기로 했다. 페북을 통해 알게 된 사람과도 친해지게 되었고, 대학원에 1년 차이로 인접 프로그램에서 공부하는 사람과도 알고 지내게 되었다.

한국을 떠야겠다고 결심해서 온 사람들이 아니라 결혼 상대자가 여기 사람이라서 온 사람들과는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기에 빨리 친해지고 공감할 일이 늘어난다. 또 꼭 그렇게 온 사람이 아니라도 이래저래 공감대가 형성되고 나면 쉽게 친해지게 되더라. 나이들면 친구 사귀기 어렵다더니,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아마 그전에 그렇게 느꼈던 것은 내가 굳이 친구를 더 사귈 필요도 없고 여유도 없어서 내 마음을 충분히 열지 않았기에 그랬던 것 같다.

사람을 헐뜯거나 평가하지 않는 사람들이라 좋다. 만나서 가십을 나누는 것만큼 소모적이고 피곤한 일도 없는데, 그런 사람들과는 알게 되었다가도 거리를 두게 되서 멀어지니 지금 만나는 사람들은 그런게 없어서 좋다. 각자 자기가 관심있는게 뚜렷하고 자기 삶 잘 사는 사람들이라 만남이 편안하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좋은게 나도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자극이 되서 그렇다. 각자 자기만의 강점이 있고 그게 환히 빛나니, 굳이 내가 그걸 배우거나 가질 수는 없어도 다른 나의 장점을 더 갈고 닦고싶어진다고 해야할까?

작은 교민사회지만 그렇게 좋은 사람들 알고 가까이 지낼 수 있다는 건 참 행운이다. 여름 휴가엔 좀 더 여유있게 교류하고 지낼 수 있겠지. 🙂

나의 첫 미국행과 그에 얽힌 기억들

나의 고등학교 단짝친구는 나의 직장 동료이기도 했다. 이제는 회사를 관뒀으니 더이상 직장 동료는 아니다. 회사 생활 중 힘든 상황이 있을 때나 좋은 일이 있을 때 누구보다 상황을 더 잘 이해해줄 수 있었던 친구다. 우린 비슷하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닮았다. 많은 어려움과 행복함을 나눴던지라 더욱 소중하고, 서로 배려하는 따뜻함이 항상 느껴지는 그녀다.

그녀가 워싱턴 D.C.에 있고 내가 뉴델리에 있던 2008년,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24시간을 날아 그녀를 방문했다. 알았어도 갔겠지만, 그렇게 오래 걸리는 지 잘 모르고 계획한 여행이었다. 비행기의 연발로 공항에 늦게 도착한 탓에 새벽같이 암스테르담에서 나를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던 동기를 만나지 못하고 – 아직도 너무나 미안한 기억이다. – 게이트 앞에서 연결편 비행기를 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 승객이 다른 이에게 비행시간을 물어보니, 8시간이라고 대답하는 걸 들었다. 정확한 시간을 모르니 알아두면 나쁠 것도 없겠다 싶어서였는데, 너무 놀라서 대화에 갑자기 끼어들고 말았다. “4시간이 아니라?” 너무 황당한 질문이라서 그랬는지,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일이 너무 바빠, 간신히 일 마무리하고 비행기 잡아 타느라, 비행시간을 자세히 확인할 여력이 없었다.”고 멋쩍게 답을 하고 내 자리로 돌아앉아 머리를 쥐뜯었던 기억이 난다.

어느새 5년이나 지난 기억이라, 그녀와 공항에서 어떻게 만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수선한 공항에서 공중전화를 찾아 그녀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해서 공항에서 잘 만났는데, 그게 나의 첫 미국방문이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간 것인지라 뭘 봐야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알아보지도 않았던 탓에 모든 것이 즉흥적이었다. D.C.에 둥지를 튼 친구 덕에 차로 뉴욕을 향했다. 그들은 2박을, 나는 3박을 했는데, 나는 하루를 더 묵고 열차를 타고 D.C.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돌아가는 길에 차에 문제가 생겨 새벽에 길 한복판에서 아기와 함께 세 식구가 덜덜 떨었다고 한다. 얼마나 춥고 걱정되었을지, 이 또한 첫 미국 여행에 얽힌 미안한 기억 중 하나이다.

많은 지구촌 여성들에게 그런 것처럼 나에게도 Sex and the City는 나에게 뉴욕 생활의 꿈을 그려줬던 드라마였다. 돈암동에 나가 혼자 살며 여의도 회사생활에 찌들린채로 MBA 가보겠다고 GMAT 책을 펴놓고 딴짓을 하던 나에게, 허황된 뉴욕에서의 – 가능하다면 월가에서의 – 삶을 꿈꾸게 해줬던 드라마였다. 결국 야근만 많이 하다가 이대로는 은행에 주저앉겠다 싶어 이직을 하고 MBA는 마음 구석 깊숙히 접어두었지만, 뉴욕에 대한 로망만은 마음 한구석에 항상 자리잡고 있었다.

그랬던 뉴욕에 가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Sex and the City의 Sarabeth에서 브런치를 먹게 되고, 뉴욕 공립도서관을 지나고 – 보지는 못했다. – 월가의 황소 뿔을 만져보게 되니 감격스러울 지경이었다. 로커펠러센터의 아이스링크를 저녁에 바라보니 내가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다만 인도에서 보던 릭샤가 뉴욕 타임스퀘어에서도 달리기 시작한 것을 보고, 잠시 잊고 싶었던 인도의 시간을 다시 떠올리게 되어 미간에 주름을 잡고 머리를 흔들며 이를 떨쳐내기도 했다.

뉴욕 공립도서관

그러나 사람은 역시나 현재의 노예임이 틀림없다. 인도에서 여러모로 치여살던 나에게 관광은 금방 사치가 되었고, 친구 부부가 D.C.로 떠나자마자 나는 쇼핑을 시작했다. 물건이 귀하고 같은 제품이면 높은 관세로 더 비싼 인도에서 살던 나에게, 세상의 물건이 집결하는 미국의 한복판은 쇼핑의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크리스마스 연휴를 앞두고 거대한 쇼핑장으로 변한 뉴욕에서, 준비없이 여행온 나는 그냥 물욕의 노예가 되어 옷가지를 주워담았다. 그때 산 옷과 신발을 7년이 다되가는 지금도 입고, 신고 있으니 완전 실패했던 쇼핑은 아니었다. 설마 이게 나의 마지막 뉴욕행이 되겠는가 하고 생각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올해 여름 다시 뉴욕을 가게 되었으니, 겨울과는 또 다른 얼굴의 그곳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새로 산 옷가지로 가득찬 무거운 트렁크를 낑낑대고 끌고 다니며, 부가세 환급을 위한 여러 절차까지 마친 나는 Penn station으로 가 D.C.로 갈 기차를 탔다. 준비없이 혼자하는 여행은 하루면 충분하다면서 자리에 앉았는데, 4명이 마주앉는 자리였다. 조금 있어 멀쑥하게 차려입은 두명의 남성이 앉아도 되냐길래, 그렇라고 하고 나는 곧 고개를 벽쪽으로 기대고 잠이 들었다. 덜컹임에 잠에서 깨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자기들 뭐 사마시려고 하는데 뭔가 필요하냐고 묻길래 괜찮다고 했다. 솔직히 낯선 사람을 믿고 살기 어려운 인도에서 6개월동안 치여온 나인지라, 낯선이를 믿을 용기가 없었기에 그렇게 답을 했다. 정말 괜찮냐면서, 뭐 사다주겠다고 하길래, 물을 마시겠노라 했다.  페트병에 담긴 물을 갖고 온, 멀쑥하게 입은 그들을 자세히 보니, 나에게 뭔가 사기를 칠 것 같이 생기진 않았다. 고급스러운 어휘와 유려한 말솜씨를 봐도 크게 걱정을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 고마워하며 마시기로 했다. 얼마냐고 하니 손사래를 치기에 굳이 어거지를 써가며 돈을 주지는 않기로 하고 지갑을 넣어두었다.

필라델피아 소재 로펌에 근무하는 그들은 업무 회의차 뉴욕에 들렀다가 집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한명은 딸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아직도 사지 못했다면서 크리스마스 직전까지 일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라고 했고, 다른 한명은 약혼녀를 크리스마스 쇼핑에 홀로 내보냈다며 구박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어디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려고 여행하는 길인지 물었다. 그 날이 아마 이브날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때까지 일을 하다니, 역시 로펌이라는 생각에 웃음이 샜다.

어쩌다 대화가 그렇게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그 당시 미국에서 매우 인기가 높았고, 나도 좋아했던 The Grey’s Anatomy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면서 중요한 남성 캐릭터였던 McDreamy와 McSteamy중 누가 나의 남성상이냐는 질문에 뭐가 좋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했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다면서 30초 안에 고르라고 재촉을 하길래 McDreamy를 골랐던 기억이 난다. 그 답에 그가 놀라했던 기억이 나는데, 왜 놀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런 저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덕분에 아주 유쾌한 시간을 보냈는데, 그들이 필라델피아에서 내릴 때 아쉬울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즐거운 기억이다. 그간 낯선이와 대화가 그리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껏 이렇게 자세히 기억이 나는 모양이다.

친구네 집에서 친구네 가족과 크리스마스를 보낸 것도 처음이었다. 미국 여행은 참으로 많은 첫기억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그 기억의 순간을 나의 소중한 그녀와 함께할 수 있어 기뻤다. 월마트에서 끝도 없이 진열되어 있는 상품의 종류와 양에 기함을 했던 것이나 돌아오는 편에 이민가방을 가득채워 화물을 싣는 과정에 중량 문제로 고생을 한 것, 공항에서 짐을 스캐닝하는 과정에 내 짐에 있는 햄을 보고 공항직원이 박장대소하는 것에 쑥쓰러워했던 것, 미국에서 사온 네스프레소를 인도에서 사용하자마자 전압이 맞지 않아 바로 퓨즈가 날아간 것 등 무수히 많은 소소한 기억들. 순간순간에는 여러가지 감정이 섞였겠지만, 지금 뒤돌아 시간을 되짚어보면 그냥 다 즐겁고 웃음이 나는 작은 기억의 파편들이다.

올해 미국을 방문하면 그녀는 그곳에 있지 않다. 지금은 먼 싱가포르에 있어 과연 언제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항상 내 마음속에 있고 언제고 마음 먹으면 방문할 수 있고, 기술이 우리를 이렇든 저렇든 마음을 전할 수 있게 연결해주기에 서운하지만은 않다. 대신 또다른 친구가 그곳에 있기에 그녀와 다른 추억을 쌓아올 수 있을 것이다.

어제 카톡으로 그녀와 잠깐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한시간도 넘게 이야기를 했다. 마음의 크기만큼 시간은 빠르게 흐르는 것 같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가 피부로 느껴지는 대화시간이다. 잠깐의 대화를 통해 마음 한구석 장롱 한구석에 보관해두었던 추억 한보따리를 꺼내 열어보게 되니 기분이 좋다. 벌써 20년지기 친구이니, 우리가 몰랐던 시간보다 알고지낸 시간이 이제는 더 많아졌다. 그런 친구를 내 마음속에 두고, 그 친구의 마음속에 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렇게 있어줄 수 있었던 그녀가 소중하고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