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 추억팔이

응답하라 1988을 보고나니 그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 추억의 중심엔 올림픽이 서있는데, 온가족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텔레비전을 시청하며 마음을 졸이곤 했다. 올림픽 개막식 매스게임은 그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 이후 몇년동안 학교에서는 운동회마다 매스게임을 준비하곤 했는데 그게 얼마나 쿨하게 느껴졌던지. 지금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부채춤도 인기가 있었는데, 부채를 한손으로 펴는 방법을 배운 다음엔 여름마다 부채를 부칠 땐 그 기술을 열심히 활용하곤 했다.

아쉽게 은메달을 따는데 그쳤던 전병관 선수의 역도경기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지. 작기 때문에 그의 경기가 더욱 극적으로 느껴졌던지 지금은 관심도 없는 역도 종목이 마치 가장 재미있는 경기인 것 같았다.

탁구에 유남규, 현정화 선수, 양궁에 김수녕 선수 또한 기억에 남는다. 원래도 땀이 잘 나는 손이지만 경기를 보는 순간만큼은 유독 땀이 많이 흐르는 손을 꼭 쥐고 온가족이 함께 응원을 했다.

오랫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올림픽 개막식 노래 “손에 손잡고“가 생각나 그 당시 우리나라를 휩쓸었던 그 노래를 유튜브를 통해 다시 봤다. 지금도 느껴지는 그 마음의 설렘이라니. 오히려 지금 그 설렘이 유달리 크게 느껴지는 건, 그 전쟁같았던 폐허에서 일으킨 경제성장을 냉전시대중 가까스로 열린 올림픽을 통해 세계에 알렸을 때 그 성장의 주역, 우리 부모님 세대가 느꼈을 자랑스러움이 이제는 이해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나이가 들어가나보다. 이때만 해도 앞으로 항상 좋아지는 날만 있을 줄 알았는데. 한강의 기적이 백년천년 계속되지 않으리라는 걸 그 때는 몰랐지. 많은 어려운 요소들을 안고 있는 우리나라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짧은 시간 많은 것을 이뤄낸 것을 보면 참으로 자랑스럽다.

그저께 덴마크 공영방송 제1 채널에 프라임타임 뉴스의 마지막에 extended news의 형태로 한국 교육제도의 명암을 담은 내용이 방송되었다. 한국에 대해 요약설명을 하는 것으로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는데, 세계 15대 경제대국이라는 표현에서 옌스가 감탄을 표하더라. 우리나라가 나는 아니지만, 그 말에 쑥스럽지만 자랑스러움도 느껴지더라. 양극화를 비롯해 여러가지 내부적 갈등요소를 안고 있으며, 세태에 대한 탄식도 하게 하는 나라지만, 그 모든 것이 내 나라의 단면이 아니겠는가.

해외에 나와 살기에 더욱 나를 우리나라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 이곳에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이들에게 나는 한국에서 온 사람일 것이기에. 이런 저런 복잡한 모든 것을 포함해 나는 우리나라 사람인 것이 자랑스럽고, 내가 현재 갖고 있는 것을 누리게 해준 우리 부모님 세대에게 감사한다.

추억의 크리스마스

어렸을 땐 그렇게도 오지 않던 크리스마스가 나이가 들어서는 자주 돌아온다. 차이가 있다면 더이상 산타할아버지를 믿지 않는다는 것.

남들보다 늦은 시기까지 크리스마스를 믿었는데 그 덕에 많은 에피소드가 생겼다.

잠에 들어야 산타할아버지가 오신다고 해서, 부모님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외출하신 사이에 불도 끄고 싶은 잠에 빠져버린 것은 우리만 몰랐던 아주 요란한 사건이었다. 안에 사람이 있을 때 밖에서 열지 못하게 하는 버튼을 눌러 문을 잠그는 게 습관이었는데, 연년생 오빠와 나는 그날도 그렇게 잠그고 잠에 든 것이다. 벨을 눌러도 문은 열리지 않고 열쇠로도 열리지 않는 탓에 부모님은 이웃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결국은 경비원 아저씨가 베란다를 타고 들어와 문을 열어주셨다고 한다. 이웃끼리 가깝게 지내던 시절이라 가능한 일이었는데, 산타할아버지 오시라고 창문은 열어둔 게 불행중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부모님은 애써 사오신 선물도 우리 머리맡에 두지 못하고 이웃집에서 잠을 청하셨겠지.

어느 해에는 산타 할아버지가 베란다 창문으로 들어와서 내 방으로 가시는 순간을 잡아 얼굴을 직접 봐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거실에서 잠을 청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숨어있으면 모를까 싶어서 그렇게 잠이 들었는데, 순간 빨간 장화가 옆으로 지나다는 것을 보았다. 그 발목을 잡을까 말까 하다가 혹시나 잡으면 선물 안주시고 도망가실까봐 그냥 말았다. 물론 꿈이었겠지. 그렇지만 그 당시의 나는 그게 너무 생생해서 꿈이라고 생각조차 못했고, 남들이 모르는 나만의 증거가 있었기에 아무리 다른 친구들이 산타할아버지는 없다고 해도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까지 그게 사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어느날 부모님께 남들이 그러던데 정말이냐고 여쭤봐 그렇다는 답을 듣고 마음의 상처를 조금 받기 전까진 쭈욱 그랬다.

이제 충분히 자랐고, 다른 어린이들을 챙겨줘야 해서 이제부터 크리스마스 선물을 못주신다는 카드를 받았을 때가 4학년 정도 되었던 거 같다. 한 살 많은 오빠는 나보다 왜 일년이나 선물을 더 주셨는고 하며, 나이 많은 오빠때문에 난 선물이 일년 일찍 끝났다며 억울해했다. 오빠는 일찍 아빠의 독특한 필체로 금방 알아챘다고 했는데 나의 상상을 깨주지 않은 거 보면 참 착한 오빠였다.

의외로 아주 옛 기억도 일부 남아있는데 몇년에 걸친 기억이 다 뒤섞여 있어 어느 해의 기억인지는 모르겠다. 두돌 지난 나는 일자 앞머리와 버섯머리를 하고선 노란 튜브형 고무줄을 두르고 천기저귀를 찼는데, 장식장 위에 앉아서 엄마, 오빠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아마 아빠가 찍어주셨겠지. 이 모습은 내 기억이 아니라 꾸준히 본 사진속의 내 모습과 그 당시 내가 주변의 형성이 뒤섞여서 결합된 이차적 기억일 것이다.

언젠가부터 크리스마스를 별달리 챙기지 않았지만, 내 기억이 있는 시작부터 산타할아버지의 존재를 믿었던 순간까지는 크리스마스가 특별한 날이었고, 매년 그 날을 기다리며 집안을 꾸미는 것을 돕곤 했다. 도움이 안되었다해도 의도는 최소한 돕는 거였으니. 그때는 뒤틀린 꼬임의 트리장식이 유행했는데, 반짝 반짝 빛나던 플라스틱 트리장식과 지금은 램프에나 쓸만한 큰 크기의 유색 꼬마전구 장식을 플라스틱 트리에 열심히 둘렀다. 엄마는 벽에도 금색으로 코팅된 플라스틱으로 Merry Christmas라 쓰여진 리스를 걸어두셨고. 거기엔 브론즈색을 입힌 솔방울 장식과 빨간 크리스마스 나무 열매도 달려있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길고 구불구불한 머리를 하고 있던 앳된 엄마와 지금 모습에서 시계의 태엽만 거꾸로 감은 듯이 크게 변하지 않은 아빠의 얼굴도 같이 떠오른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밝아진 거리의 모습을 보니 과거 어린 시적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오르며 웃음을 짓게 한다. 우리 집에도 촌스럽게 작게나마 트리장식을 했다. 작년에 엄마와 함께 이곳에서 꾸몄던 진짜 크리스마스 전나무와 이쁜 장식은 아니지만 아무 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작게나마 뭐라도 꾸미니 포근한 느낌이 든다.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