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각자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사는 것일까? 각자 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 것일까? 인생에 있어서 어떤 시기라는 게 있는 걸까? 인생에 있어서 정답은 없다지만 비슷한 인생의 이벤트를 겪는 단계에서 비슷한 고민을 듣게 되는 걸 보면 타인의 고민에서 혜안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인터넷 카페에서 알게되었던 펀자이씨 (instagram id @punj_toon) 께서 공유하신 어머니의 이야기 중 한 부분이 마음 속에 탁 와닿았다. “부자라는 게 겉으로 화려하고 안정적인 것처럼 보여도 속사정은 그렇지만은 않아. 평화로울 날이 없지. 언제나 발버둥치고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오늘을 걸고 내일을 도박하지. 풍요로움 속 비신과 술수, 불안감은 친구처럼 따라다니지. 아버지는 내게 주셔야 할 것을 이미 다 주셨어. 자존감을 높여주셨고, 책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셨으니까.”
사실 부를 좆아온 인생은 전혀 아니었는데, 새로운 주거지를 천천히 물색하면서 – 꼭 이사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현재 지역 내에서 조금 더 큰 주거지로 옮겨보려는 생각 속에 기약없는 탐색 중이다. – 내가 가진 것을 부족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것을 느끼게 되었다. 하나에게 조금 더 풍요로움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 조금 더 넓고, 좋고, 편안하고 안락함을 더 느끼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이 커지면서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나도 모르게 폄하하고 있었나보다. 그런데 저 말씀을 읽는 데 무릎을 탁 치게 되더라. 아차. 내가 이미 가져야 할 것을 다 가지고 있었구나. 내가 더 많은 물질적 여유를 누리려면 그에 수반해 얻을 고통이 또 있었겠구나.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 중 분명히 포기해야 할 것들이 더 있겠구나. 마음의 고통도 있었겠구나. 그리고 하나에게 줘야 할 것은 물질이 아니고 어려움이 닥칠 때 이를 마주할 용기와 극복할 힘을 주고 자기 통제 밖에서 일어나는 난관속에서 불필요하게 자책하지 않을 수 있는 자존감을 주는 것이겠구나. 그리고 답을 찾아나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거나 그를 탐색해갈 수 있는 삶의 태도를 알려주는 거겠구나. 그리고 나도 이를 향해 전진해나가며 하나가 이를 볼 수 있게 해주는 거겠구나.
소유를 많이 할 수록, 도둑이 들까, 재난이 찾아올까, 이를 어떻게 더 가꿔가야하나 하는 여러 구속이 따르겠다 싶었다. 물론 그 안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겠지만 소유를 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희생이 더 크다면 내게 그 가치는 크지 않을 거다. 우리 동네 주택가를 걸어다니며 좋은 집들을 보고 좋은 환경을 흠뻑 느끼다가 생각한게 거기서 누리고 싶은 정원에서의 활동은 공원에서 해도 되고 넓은 공간이 필요할 땐 집의 물건을 정리하면 되겠다 싶었다. 그게 꼭 내 지척에 있어야 하는 것도, 매일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야 한다는 것 자체가 욕심이다 싶었다. 무리하지 않고 그를 얻을 수 있는 여건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고. 그리고 사실 내가 갖고 있는 것도 분에 넘치고 좋은 것들인데 말인데, 그보다 좋은 것을 바라보느라 내가 갖고 있는 것의 부족함에 초점을 맞춘게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이제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했더니 내 일생에 드라마는 없어졌다. 항상 내 인생을 여기저기로 끌어가던 모험에 대한 열망도 사그라들었고. 드라마가 없으니 남는 건 매일의 일상이다. 밥을 준비해 먹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회사일을 하고 애를 돌보고 남편과 수다를 떨고 운동하고 같이 취미활동하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차를 마시고. 반복되는 삶에서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 내린 결론은 이거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끼고, 내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럴 체력과 여력이 있음에 감사하고, 반복적인 일상이 무료해질만큼 안전함이 내게 있음에 감사하며 일상의 소소함을 지켜나가는 것, 배움을 놓지 않고 크든 작든 배움을 이어가는 게 내 인생의 의미라는 것. 그리고 무소유의 삶을 지향하지는 않더라도 소유에 대한 집착은 끊임없이 내려놓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잊지 말아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