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잡설 1

  1. 바람이 정말 많이 분다. 거센 바람이 거의 항상 분다. 과거 한반도를 강타했던 태풍 매미가 초속 30m의 바람을 동반했는데, 여기선 초속 20m로 바람이 부는 날이 흔하다.
  2. 겨울이 길다. 멕시코만류(난류)의 영향으로 본격적 겨울은 12월부터 시작되서 4월까지 간다.
  3. 비가 많이 온다. 강수량 자체가 많은 것을 아니지만 추적추적 자주 온다. 특히 가을부터 봄까진 흐린 날이 대부분이라 파란 하늘을 보면 감사하게 된다.
  4. 기온으로는 추워봐야 영하 5~10도로 크게 춥지 않지만 거기에 거센 바람과 습한 공기가 결합하면 참 춥다.
  5. 겨울엔 낮이 정말 짧지만 반대로 여름엔 낮이 정말 길다. 흑주, 백야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의 그에 준한다. 겨울엔 해떠있는 시간이 5시간 정도에 불과하고, 해도 매우 낮게 떠서 하루 종일 해질녘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6. 여름은 짧지만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멕시코 만류가 여름의 기운을 실어다 주기까지 시간이 걸려 여름 또한 7월 정도로 늦게 시작되지만, 9월정도까지 지속되는 여름은 참 아름답다. 기후가 안좋은 해에는 여름이 실종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여름이 실종된다는 것은 여름에도 최고기온 15도 내외로 비가 추적추적내리는 음습한 날씨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7. 촛불을 많이 켠다. 1인당 초 사용량 기준 세계 1위다.
  8. Hygge를 좋아한다. 겨울이 길고, 음습하고, 밤이 길지만, 집에서 촛불을 켜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모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커피나 차, 와인을 마시면 어찌나 아늑한지. 그 분위기를 일컬어 “Hyggelig”하다고 한다.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을 표현하는 동사로 “At hygge sig”가 있다. 다른 나라 말로 번역이 정확히 안되는 단어다.
  9. 커피를 정말 많이 마신다. 1인당 커피 소비량이 세계 5위안에 든다. 그러나 대형 커피 체인은 장사가 별로 잘 안된다. 독립 커피점이 잘 되는 나라다. 물론 집에서도 많이 마시지만.
  10. 코펜하겐 사람들은 날씬하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전반적으로 날씬하지만, 코펜하겐 사람들은 더 날씬하다. 자전거를 타고 다녀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도시가 운동에 꽂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길거리를 누비며 뛰는 사람도 많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철인을 보유한 것처럼 강인한 체력을 소유하는 것을 좋게 생각해서 그런 게 더 큰 것 같다. 날씬하고 건강한게 트렌디한 것이라. 지방으로 나가면 비만 인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맥주와 소세시, 돼지를 즐겨먹는 식문화에서 날씬한 사람만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11. 다른 코카시안에 비해 얼굴이 조금 더 밋밋하게 생겼다. 눈위 뼈가 도드라지지 않아 눈이 푹 파이지 않았으며, 코도 아주 높거나 크지 않고, 매부리코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하나하나의 얼굴 부위 특성을 따지면 아시아인의 얼굴같은 느낌이 있다. 물론 금발머리가 흔하고, 얼굴 색은 겨울엔 거의 창백하고, 여름엔 구릿빛이 되고(빨개지지 않고 잘 타는 편이라 다른 유럽인들이 부러워한다.) 파란 눈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점에서 아시아인같은 느낌은 전혀 없지만 말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 왈 덴마크인은 잘생긴 편이란다. 처음엔 그닥 공감하지 않았지만, 다른 나라를 갔을 때 공감했다. 덴마크인들이 크다는데 크게 공감하지 않다가 한국 돌아가서 공감한 것과 마찬가지로.
  12. 장을 동네 슈퍼마켓에서 자주 본다. 미국식 대형 슈퍼마켓에서 대량으로 사와 쟁여놓는 분위기가 아니다. 그렇게 사먹으면 신선한 것을 못먹는다는 생각에서 그렇다는데, 그것보다는 장을 자주 볼 수 있을 만큼 여유있게 퇴근을 하거나, 아주 가까운 거리에 슈퍼가 충분히 있어서 그런게 아닐까 싶다.
  13. 빈번한 외식문화는 한국처럼 발달해있지 않다. 한국에서처럼 매일 사먹으면 가산을 탕진하기 때문이라 그런 것도 있고, 집에 와서 가족과 저녁을 함께 할 시간적 여력도 되기 때문에 그러는 것 같다. 외식도 자주 안해 버릇하니, 예전 한국에 있을 때처럼 이게 먹고 싶다, 저게 먹고 싶다 이런 생각 자체가 사라지는 기분이다.
  14. 전국민이 자전거를 탄다. 나이, 성별 따지지 않고 다 탄다. 그래서 보조 바퀴를 단 자전거를 볼 일이 없다. 눈비 가리지 않고 타는 그들을 보면 놀라울 지경이다. 추운 겨울엔 핸들바를 잡지 않고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고 타는 사람들도 흔히 볼 수 있다.
  15. 생산성이 높다. 일하는 시간이 짧은 대신에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 짧고, 업무강도가 높다. 점심시간은 최대 30분 정도 쓰고, 이 또한 그냥 자리에서 간단히 샌드위치를 먹는 것으로 대신하는 사람들도 많다.
  16. 무상복지 패키지는 별로 없다. 국민 연금은 많이 내도 적게 내도 받는 액수엔 큰 차이가 없다. 의료의 대부분은 나라에서 지원하지만, 의약품은 개인 부담이 우리보다 크고, 치과진료, 물리치료 등은 개인 부담이 크다. 대학교육을 제외하고는 보육부터 의무교육기간까지 추가로 학교에 내야하는 돈이 꽤 크다. 한국 사립학교 수준이다. 그렇지만 살림이 어려운 가정에게는 나라에서 추가로 보조해준다.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복지는 소득재분배 측면에서 옳지 않다는 것 때문이다.
  17. 잘 눈에 띄지 않지만 사회 계층의 차이가 있다. Hellerup, Rungsted, Chalottenlund 등지의 사람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갖고 있으며, 못사는 집 애들과는 놀지 못하게 하는 부모들도 있다. 겉으로 잘 보이지 않지만 이런저런 경험담을 덴마크인을 통해 듣다보면 사람사는 곳은 다 똑같다 하는 생각이 든다.
  18. 세금을 많이 낸다. 최고 평균 세율이 55%이다. 따라서 한계세율을 기준으로 보면 60% 넘게 내는 사람들이 있다.
  19. 1인당 가처분 소득은 세후 기준으로는 한국보다 1.5~2배정도 된다. 그러나 물가가 2배 정도 되기에 검소하게 살 수 밖에 없다.
  20. 전반적으로 다 깔끔하게 하고 다니지만, 그렇다고 명품을 든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명품브랜드가 한국에서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다양하지 않다.
  21. 녹지를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다른 나라의 도시 슬럼화 현상을 먼저 관찰한 후 도시계획을 잘 수립해 중심부가 슬럼화되지 않도록 잘 관리해왔으며, 녹지계획이 그와 함께 잘 수립되어 있어 녹화된 도시로 성장했다.
  22. 종교세가 있다. 국교인 루터교가 하나의 정부 부처로 설립되어 있으며, 종교세 1%를 과세한다. 교회에서 탈퇴하면 안내도 된다.
  23. 젊은 사람들은 영어를 참 잘하지만, 나이든 사람들 중에는 영어를 못하는 사람도 많다. 시부모님이나 시누이가 간혹 원하는 영단어를 찾아내지 못하는 경우, 괜히 미안해 한다. 영어를 잘 하셔서 오히려 감사할 일인데 말이다.
  24. 덴마크어의 발음 규칙은 복잡하다. 쓰인대로 읽지 않는다고 외국인들이 불평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쓰인대로 읽지 않는게 아니라 알파벳의 결합에 따라 읽히는 규칙이 다른 언어에 비해 복잡한 것 뿐이다. 영어와 독어를 잘 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쉽게 배운다. 동사 변형이 다른 유럽어에 비해 간단한 편이다. 발음 때문에 사람들이 청해에서 어려움을 느껴 언어 자체를 어렵게 느끼는 것이지, 언어 자체가 특별히 어려운 것은 아니다.
  25. 애플 제품을 정말 많이 쓴다. 대학교에서 맥이 아닌 컴퓨터를 찾는게 더 어렵다. 다른 나라와 달리 유독 애플에 대한 사랑이 크다고 한다. 아마 심플한 디자인을 좋아해서 그런게 아닐까.

 

오늘은 여기까지. 생각나는 건 많지만, 다음에 이어가기로 하고…

블록 1 수업을 모두 끝내고 시험을 준비하며 쓰는 잡설

8주간의 수업을 끝으로 블록 1이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시험 뿐. 한 수업이 15ECTS의 큰 과목이라 이 과목은 다음 블록까지 진행되며, 시험은 맨 마지막에 한번만 있다. 학생들 입장에서 공부를 중간중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은 모두 통과해야만 시험을 치를 수 있는 과제가 학기 중 쉴 새 없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첫 3~4주를 보내고 나서 적당히 딴짓을 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긴 것은 첫째로 덴마크어 수업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기로 한 결정과 요령이 늘었기 때문이리라.

다음주 목요일에 있을 계량경제학 시험은 총 4시간에 걸쳐서 치르게 되는데, 인터넷만 사용할 수 없을 뿐 책과 노트, USB에 담은 파일 등 모든 자료를 다 가지고 들어갈 수 있다. 컴퓨터로 진행되는 시험이지만, 수식, 그래프 등 손으로 그리는 게 더 편한 것은 디지털 펜을 이용해서 쓸 수 있다. 시험 프로그램에 익숙해지게 하기 위해 열린 오픈하우스때 테스트해봤는데, 정말 훌륭한 펜이었다. 디지털 펜용 종이에 쓰고싶은 만큼 쓰고 나서 펜을 거치대에 꼽으면 바로 데이터가 컴퓨터로 전송되는 방식인데, 쉽게 캡처해서 워드파일에 옮길 수 있다.

학사때 시절이야 현대의 IT 발전 속도를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물던 시절이라고 해도 무방할만큼 오래된 일이니 비교해서도 안되겠지만, 불과 몇년전 석사때를 생각해봐도, 한국에서 시험이라 하면 극히 제한된 몇 개의 오픈북 시험과정 – 난 겪어본 적이 없지만, 그렇게 치른 친구들이 있었음을 기억할 뿐이다. – 을 제외하고는 펜만 달랑 들고가서, 정해진 1시간의 시간동안 문제를 읽고, 종이에 손가락과 팔뚝이 아플만큼 빠른 속도로 많은 양을 쏟아내고 오는 것이었다. 중간에 손이 너무 아파서 탁탁 털어가며 시험을 치른 것이 추억이라면 추억일까.

오픈북 시험이라 함은, 컨닝할 수 없는 시험이라는 것이고, 지식의 중요성은 암기가 아니라 논리적 추론능력에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의 제한이 있기에 뭐가 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 책을 찾아가면서 풀 수는 없다.

덴마크에서 시험이 갖는 의미는 우리나라나 미국에서 갖는 의미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학생들이 무엇을 모르는지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아는지, 어떻게 추론해 낼 수 있는지, 어디서 추론을 못하는지, 전반적으로 학생들이 부족한 부분은 무엇인지 등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다음번 강의에서 어떤 점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지를 파악해 내고, 그런 결과로 실제 작년 학생들과 우리는 약간 다른 커리큘럼으로 배울 수 있었다. 계량경제학 1을 배운지 오래된 학생들이 기본 가정에 약해 허덕이는 것을 보고, 첫 주는 전 과정의 복습으로 시작한 것인데, 엄청 빠른 속도에 다들 힘들어했지만, 중요한 기초가 되었고 대부분 이점에 동의했다.

물론 여기도 학점이 나오고, 이로써 학생들을 나래비 세운다. 다만, C에 해당하는 점수가 나오지 않은 경우는 총 2번의 재시험의 기회가 주어진다. 바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고, 다음 블록이 끝나고 주어지기에 추가로 공부할 수 있는 두달의 시간이 생기는 셈이다. 이런 학점은 PhD 등 후속 학업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중요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학점이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고, 영 준비가 안되었다 싶으면 포기하고 다음 시험을 치를 수 있기에 학생들이 성적을 낼 수 있도록 기회를 준다. (개인적으로는 다른 과목 공부하기도 바쁜 데 추가시험까지 치르긴 싫기에 죽이되든 밥이되든 그 학기에 끝을 보는게 더 좋다는 생각이지만, 개인적 사유로 그리 할 수 없는 경우라면, 이 제도가 숨통을 틔워줄 것이다.)

매 주 우리가 배울 내용이 무엇인지, 읽어와야 할 범위와 초점을 맞춰야 하는 부분, 수업 전에 알아두고 와야할 내용 등이 수업 전에 게시되고, 모듈이 바뀔때마다 배운 내용을 30분 정도를 할애해 복습하는 점, 학생들에게 “멍청한” 질문이 없음을 꾸준히 설파하고 질문을 장려하는 점,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변 중 부족한 부분은 추가 자료로 배포하는 등의 모습은 한국에서 공부한 16년 반 동안 한번도 겪어 본 적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교육시스템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동유럽 학교들도 우리처럼 교수의 지식 전달에 초점을 맞추는 모양이다. 그런 익숙함에서 벗어나, 교육 목표에 맞는 스스로 학습과 참여가 중요한 체제에 들어오는 것이 불편하거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학제는 안맞는 옷과 같다. 수업시간은 길지만 그 수업시간 중 연습시간이 차지하는 비중이 꽤 되기에, 배운 것을 실생활에 접목하는 실습을 어떻게 진행해야하는지 몰라 헤메는 사람들은 멍하게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또한 순수 강의 시간에 수업이 진행되는 속도는 빠르기에, 한번 놓치면 허덕이게 마련이고, 아예 포기하고 프로그램을 떠나는 사람도 적지만 있다.  모든 사람을 안고 갈수는 없지만, 최대한 많은 사람을 안고가려는 덴마크 교육시스템은 본인이 노력하고, 참여하면, 그만큼 얻어갈 수 있다. 그렇지만 떠먹여주는 것이 별로 없기에 떠다가 입에 넣어주는 학습방식에 익숙해져 있으면 초반 적응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이 나라의 교육도 요즘 많은 진통을 겪고 있다. 덴마크 정부가 교육예산을 대폭적으로 삭감하고, 교육개혁을 실시하면서, 학생들의 교육 선택의 자유도 예전보다 줄어들고 있으며, 인문학 등 투자대비 효과가 떨어지는 전공은 폐지의 길을 걷게 된다. 어제만 해도 시내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미래의 대학교육 수혜자가 될 중고등학교 학생들도 참여했는데, 우리나라 같으면 정학 등 여러가지 조치가 취해졌을 것이고, 교직원이 참여했으면 징계 처분 등이 있었을 것임을 생각해보면서 씁쓸한 생각도 들었다.

시험기간이 되니 또 이렇게 잠깐 딴짓을 하게 된다. 해야할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오히려 책상정리하고 방정리하는 것과 같은 일이랄까? 이제 일주일만 있으면 시험도 끝나있을 것이고, 부모님도 오실 거고, 또 한주가 지나면 내 웨딩디너파티가 열리겠지. 시간 참 잘 간다. 스피치 써야하는데, 반도 못썼다. 옌스는 뭘 썼을까? 부모님들은 어떤 것을 쓰셨을까? 그리고 앞으로 내 앞날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긴장도 되지만 설렌다. 스트레스를 받는 날도 있겠지만, 성취의 날도 있을 것이고. 공부를 하다보니 박사과정에도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졸업하고 취업의 길을 택할지 공부를 더하는 길을 택할지는 지금 생각하기엔 너무 이른 일이지만, 어떤 길을 택하더라도 옌스는 내 결정을 지지하겠다고 했으니 오롯이 앞으로 남은 기간 공부하면서 잘 생각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