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화해

아직도 간혹 밤에 이유 모르게 하나가 거세게 울며 엄마를 찾는 날이 있다. 흔하진 않지만 간혹 그런 시기가 있는 것 같다. 18개월 이후 그런 게 심했던 시기가 있긴 했지만 빈도는 줄어들었다. 주로 엄마를 거세게 찾아서 옌스가 달래기 어렵고, 내가 달랜다 해도 우선은 울어내서 자기가 감정을 한템포 추스를 때까진 건드리면 안된다. 초반엔 달래본다고 안아도 봤는데 오히려 더 애의 감정폭발만 자극하고 말았다.

우선 건드리지 말고 옆에서 조금 달래주다가 하나가 저리 가라고 Gå væk! Lad være!를 외치면 (진짜 속된 말로 지랄한다는 말이 딱 맞을 상태로) 매트리스 깔고 누워서 자라고 달래는 말만 반복해준다. 그러고 자기가 감정을 추스르고 꾹꾹 소리내며 자는 가 싶으면 반드시 한번 또 일어나 서럽게 소리높여 운다. 아마 엄마랑 화해를 꼭 해야하는 거 같다. 이때는 안아달라고 하는 거 보면 말이다. 좀 안아주고 엄마는 하나 사랑한다 그런 말 나누고 다시 토닥여주면 쌓인 울움으로 여전히 끅끅하며 잠든다. 그리고 두어번 깨어나 짧게 소리높여 울고 달래주는 걸 반복하며 잔다. 이런 날은 나는 제대로 자긴 어려운 게 잠이 토막나기 때문이다.

다른 것보다 재미있는 건 그 화해의 프로세스이다. 이 나이의 아이도, 아니 이미 18개월부터 엄마와의 화해가 (나야 감정 상한게 없으니 하나 혼자만의 화해이긴 하지만) 필요하다는 것이 놀랍다. 내가 너무 아이라는 존재에 대해 과소평가를 해온 것 같다. 이렇게 놀라운 존재인데 말이다.

요즘은 why not에 해당하는 말에 꽂혔다. 안된다는 말에 대한 답이 아니라 하나의 웃긴 행동에 우리가 웃겨서 그걸 왜 그렇게 했냐고 묻는 질문에 하는 답으로 말이다. 내 긴 치마를 입는 모숨이 너무 웃겨서 물어보니 Hvorfor ikke? 이런다. 얼마나 웃겼는지.모른다. 앞으로 얼마나 우리를 더욱 웃게 만들련지 이 장난꾸러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