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내 남자친구(뭔가 아이들이 쓰는 말 같긴 하지만, 약혼자라는 말은 입에 영원히 붙지 않을 거 같다. 애인이라는 말도… 사실 연인은 친구의 기능도 매우 충실히 해야 하며, 나는 이성애자인 관계로 성별은 남자여야 하니, 남자친구란 말이 틀린 것도 없고.)는 남들이 보면 심심할 데이트를 한다. 동네 한바퀴나 코펜하겐 시내를 산책하거나, 근처 공원에 가서 각자 딴 일을 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커피숍(맨날 가는데만 가는 사람들…)에 가서 신문을 읽고 공부를 하면서 쉴 때 대화를 한다. 아마 같이 살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살림을 합치기 전에도 비슷한 생활 패턴이었는데. 주로 집에서 하는 데이트를 즐기게 된다. 영화를 보고, 와인을 마시고 뭘 해도 주로 집에서.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할 때, 문화적 차이와 개인적 차이를 구분해 내기란 참 어렵다. 하물며 한국과 같이 작은 나라안에서도 크게 다른 지역적 특성을 찾아볼 수 있고, 그 안에서도 무수히 다른 삶의 양태를 찾을 수 있는데, 뭔가를 덴마크인은 이렇게 한다, 인도인은 이렇게 한다(이 두 나라에서만 살아본 탓에…)고 쉽게 일반화시킬 수는 없으니…
그렇지만 주로 집에서 데이트를 하거나, 산책을 하는 것 등은 덴마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데이트 방식이다. 그러니 덴마크적 특성이라고 봐도 좋겠다. 많은 연애를 해봤지만(주로 짧은 데이트에 그치고 말았지만…) 대부분이 한국에서 있었던 일인지라, 두나라의 다른 데이트방식에 대해 비교를 하게 되는데, 뭐가 좋고 나쁘고를 따지긴 힘들고, 나에게 어떤게 잘 맞는지를 비교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데이트하면, 뭔가 코스가 필요했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닌데, 남자친구는 항상 좋은 코스를 찾으려고 노력했고, 그 코스를 밟아가면서 즐기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어떤 면에선 참 까다로운 나이지만, 우선 사귀기 시작한 남자친구에게는 크게 까다롭게 굴지 않는 나였기에 그 준비된 코스가 마음에 안들어서 싸우거나 그런 건 없었다. 착해서는 절대 아니고, 뭐가 되었든 마음에 안들어하면 손해보는 게 나라서 그런 실용주의적 마음에서 그런 것이었다.
형식적인 것을 배격하는 덴마크인의 실용주의는 사회 전반에서 발견된다. 이제 2년 가까이 살고 나니 그런 모습을 여기저기서 많이 느끼게 된다. 밖에 나가서 먹으면 돈이 많이 든다. 물론 어떤 데이트코스를 찾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조금 우아하게 먹고 마시자고 밖으로 나가면 억수로 돈이 깨진다. 예를 들어 일주년 기념으로 옌스가 좋은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여기 기준으로 분류하자면, 제일 비싼 미슐랭 스타급 고급 레스토랑 바로 아래급 레스토랑을 갔다. 5코스 식사 2인에 가장 낮은 가격대의 와인 한병, 식전 샴페인 가장 저렴한 것으로 한잔씩 해서 먹고 나니 60만원이 나왔다. 입이 떡 벌어질 가격이다. 이런 밖에서의 식사를 가능케 하는 것은, 한국에서 여러번에 나눠할 외식을 정말 일년에 손에 꼽을 정도로 몇번 안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주변에 커플들을 보아도, 외식은 잘 안한다. 사실 덴마크에서 외식 엄청하고 살면, 아주 부자가 아닌 한 파산하기 마련이다. 막대한 세금으로, 한달의 가처분 소득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비해 물가가 2~3배 비싸기 때문이다. 그러니 평소엔 다들 영화도 집에서 주로 보고, 와인도 집에서 마시고, 식사도 집에서 하면서 데이트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하기 참 힘든 것이, 결혼 전에는 주로 혼자 살지도 않고, 외식업이 발달해 있고 경쟁이 치열해서, 밖에서 사먹는게 집에서 비슷하게 해먹는 것보다 딱히 비쌀게 없고, 자주 요리 안해먹는 사람에겐 오히려 집에서 해먹는 게, 기본재료 갖추느라 더 비싸지기조차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에 누군가를 데려오는 건 결혼할 사람이나 데려온다는 집이 많아서(요즘은 좀 변하고 있으려나…?) 밖에서 봐야 하고…
그리고 한국보다는 남의 시선에서 자유롭다. 한국에 비춰진 것처럼 직업에 귀천도 없고, 남 시선 하나도 신경 안쓰고 그런 건 전혀 아니다. 비싼 물건들이 아니라서 그렇지, 여기도 3초백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자주 보이는 백팩(스웨덴산 Fjallraven, 한국에서도 엄청 메는 듯?)이 있고, 여자들이 많이 들고 다니는 DAY Birger et Mikkelsen 쇼퍼백이 있으며, ‘덴마크인처럼 보이는 법’이라고 덴마크인의 유행 사랑을 비꼰 글들도 있다. 그렇지만, 자기가 뭔가를 함에 있어서 어거지로 남들눈에 좋아보이는 일이라고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굳이 하지는 않는다. 경험의 측면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을 중시한다.
여자에게는 남자친구가 데이트코스를 짜줘야만 하고, 좋은 곳에서 밥을 먹어야 하며, 남들 보기 화려한 것을 해야하고, 남자가 가방을 들어줘야 하고, 뻑적지근한 선물을 받아야 하고, 데이트 비용은 주로 남자가 내줘야 한다면, 덴마크의 데이트라이프는 참 고달퍼진다. 남자가 대충 맛있는 사 먹이고, 처음에만 바짝 잘해주고 그다음엔 대충 편한대로 하고, 집안일 잘 못하고, 돈으로 떼우려고 하면 또 참 고달퍼진다. 덴마크에서 연애란 인간대 인간이 만나서 하는 것이다.
덴마크는 뭔가 엄청 가족파괴현상이 일어나고 결혼도 기피하는 그런 사회처럼 비춰지고 있지만, 곪는 관계를 속 썩여가면서 두지 않으려고 하고, 제도적인 것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에 따라 나라 밖에서 보기에 그리 보여지는 것 뿐이다. 가족과 보는 횟수는 더 적어도, 더 자주 연락하고 따뜻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많고, 가족간에 챙기는 마음이 한국과 다름 없거나 더하기도 하다. 부양이라는 문제가 가슴을 짖누르는 경우가 한국보다 적기 때문일 수도 있다. 최소한의 복지가 삶을 유지하는 데는 도움을 주니… 결혼 없이 동거로만 지내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게 한국에서 갖는 의무에서부터 자유로우려고 하는게 아니라, 굳이 나라에서 내 가족관계를 인증해줄 필요 없다면서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밀당같은거 못하고, 솔직하고 담백하게 연애하는 거 좋아하는 나에게 덴마크는 좋은 연애의 장이다. 결혼하면 연애가 끝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그리고 옌스와 함께라면 앞으로 남은 반평생, 혹은 생명연장의 시대에 사니 남은 2/3의 인생동안 계속 알콩달콩 유치하게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불편한 삶에 익숙해질 수 있다면, 나같은 사람에게 덴마크는 참 좋은 땅이다. (아… 비영어권이라는 거 하나 빼고…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