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 섭섭 달콤 씁쓸 후련 : 이상한 날.

2개월 단기로 일하려던 곳에서 계약 기간의 반의 반절도 채우지 못하고 오늘부로 관뒀다. 3개월 미만의 계약은 노티스 없이 관둘 수 있어서 결정을 내리자마자 관둘 수 있었다. 내 사정에 의해서 계약기간의 두달에서 2주를 못채우고 빨리 관두게 되는 것이라 가급적 회사측 입장에 맞춰서 관두려고 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 사이에 괴리가 커서 최대한 빨리 관두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나무 다리를 건너며 지나간 다리를 태우는 것 같은 기분이라 피하고 싶었던 결정이었지만, 괜히 오래 있다가 괜히 감정만 더 상하고 나올 것 같아서 차라리 빨리 관두는 게 낫겠다는 결론이 들었다. 이렇게 정리하게 된 건 슬픈 일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정리하는 게 나에겐 더 나을 거였다.

친구네 조부모님이 픽업해서 같이 놀고 저녁까지 먹고 오기로 한 하나를 하나 친구네 집에 가서 픽업하고 돌아오는 길에 메일이 와서 보니 계약서가 도착해있었다. 지난주 금요일에 법적 구속력이 있는 잡 오퍼에 사인을 해서 연봉 합의를 했었는데, 그걸 토대로 계약서가 도착해있었다. 그에 서명을 해서 송부를 하는데, 앞으로의 프로세스를 메일로 간략히 오리엔테이션해주고, 업무 시작 얼마 전에 각종 참고할 자료를 보내준다는 것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일해본 덴마크 직장은 중앙정부기관이고 이번에도 그렇다보니 다른 곳은 모르겠어도 중앙정부기관은 이런 스탠다드 프로세스가 있다. 그런데 직원 고용규모로 보면 이런 두 기관에 비해 훨씬 큰 내 전 직장은 아직도 사람보다 숫자, 성과가 중요해서 그 숫자와 성과를 뒷받침하는 게 사람임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씁쓸했다.

사람은 내가 신뢰를 받고 내가 하는 일이 가치를 창출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조직과 일에 대한 열정이나 신뢰가 없어지고, 결국 조직 이탈이 이뤄지는 것일텐데.

오늘은 어찌되었든 간에 문을 하나 닫고 다음 문을 하나 여는 작업을 한 날이 되어버렸다.

번역일 하던 것도 초벌을 마무리지어서 내일 검토해서 보내는 일만 남았으니 그것도 좋았고. 시행령을 번역해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의외로 상업번역이 나에게 잘 맞는다는 생각을 했다. 해보고 나니 에세이나 소설 같은 걸 번역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다시 한번 느껴졌다. 상업 번역은 감정선을 살리는 미묘한 형용사와 부사가 난무하지 않으니 상대적으로 빠르게 번역할 수 있었다. 뒤로 갈 수록 문장의 형식과 내용에 익숙해지니 속도도 붙고.

어느새 3월도 거의 다 가버렸다. 새 직장으로 출근하기까지 한달여가 남았고, 이사까지도 한달 반정도 남았다. 남은 기간 열심히 여기저기 페인트질하고 청소하고 살 것 사고 옮기고 하면 또 다음 한 달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게 흘러있을 거 같다.

시원섭섭하고 달콤하고 씁쓸함과 후련함이 동시에 교차하는 이상한 날이었다. 날씨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 대비가 더 이상하게 느껴지는 그런 날. 잠을 자고 나면 내일은 그냥 상쾌한 새로운 하루가 되겠지. 인간에게 잠이라는 게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농업정책 패키지가 불러온 덴마크 정국 파장

덴마크 정치판이 새로 발표된 농업정책 패키지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환경식품부에서 발표한 농업정책 패키지가 논란의 주인공이다. 주무장관인 Eva Kjer Hansen(에바 키어 핸센, 소속정당 Venstre)은 불신임 투표의 대상이 될 지 모르는 상태이며, Venstre의 총수이자 국무총리인 Lars Løkke Rasmussen은 중요 정치인인 Eva를 불신임하느니 총선을 다시 하겠다고 나서면서 온나라가 시끄럽다.

참고 링크 덴마크 정당의 정치성향 스펙트럼예상과 다른 결과로 전국을 흔든 2015년 덴마크 총선 결과

논란의 배경은 이렇다. Venstre가 집권한 후 환경정책이 많이 퇴보할 것이라는 우려는 환경관련 학계에 이미 널리 퍼져있었다.  전통적으로 농민이라는 풀뿌리에 기반한 정당 Venstre는 농업 및 관련 산업계로부터  탄탄한 지지를 받고 있었고, 공약으로 농업진흥책을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업과 환경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에 있기에, 농업진흥책은 환경규제완화의 성격을 띌 수 밖에 없다.

이 정책은 비료사용상한량을 현재보다 20% 증가, 하천으로부터 9m 간격으로 설정되어 있던 농업완충지대(Randzoner)를 2m로 축소, 6만 핵타르에 해당하는 간작물 대상지 규제를 철폐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한다. 농업진흥책이 추진될 것은 알려져 있었지만 정책은 예상보다도 더욱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력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가 정책 근거로 삼은 자체용역 연구결과도 같이 발표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정책 추진이 환경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고 농업 생산성에 큰 기여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은 그간 자연과학계에서 정책예상안을 토대로 줄기차게 제기해온 문제의식과는 정반대의 결과이다. 학계가 지적해온 문제는 다음과 같다. 비료사용을 현재보다 증가시킬 경우 질소 및 인이 토양에서 용탈하고 인근 하천과 지하수를 오염시키게 된다. 하천, 호수, 피오르드, 인근 해역 등 각종 수체의 부영양화가 가속되고, 녹조현상을 유발해 용존산소가 부족해지고 심할 경우 어족자원이 폐사하는 등의 문제도 심화된다. 현재 덴마크가 준수하도록 되어있는 EU의 Water Framework Directive의 수자원 품질개선 목표에서도 오히려 퇴보하게된다. 농업완충지대를 2m로 축소할 경우 사실상 없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토양에서 용탈하는 질소, 인 등이 인근 하천과 호수, 늪지대 등으로 쉽게 유입될 것이다. 간작물 규제 철폐 또한 토양 영양분의 용탈로 인한 지하수 오염문제를 야기하며, 땅이 비는기간 중 광합성을 통한 CO2 배출 감축 가능성을 차단함과 동시에 알비도(태양 단파복사광선의 반사율)을 낮춰 지구 온난화를 가속화하는데 기여한다. 그리고 이는 아주 단편적인 영향만을 언급한 것이며 이러한 단편적인 영향이 종다양성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 등 여러가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할 경우 더욱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는 덴마크가 지난 8년간 추진해온 정책을 반대로 돌리는 행위이다.

학계는 정부가 근거로 삼은 결과가 그간 관련연구를 수행해온 학계 등에서 제출한 자료와 상반된 결과를 낸다는데 주목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등 로비활동을 벌였다. 해당 근거자료를 분석하니, 해당 자료가 정부 정책 추진을 유리하게 하도록 자료를 부적절하게 조작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다. 당초 현 여당진영인 Blå blok 정당은 모두 의견을 조율해 해당 정책을 지지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중 하나인 Det Konservative Folkeparti (6석 확보)가 근거수치에 대한 문제가 불거진 이후, 해당 장관인 Eva Kjer에게 해당 수치를 신뢰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고, 돌연 해당 법안 표결안 당일 해당 장관과 수치 모두 신뢰할 수 없다고 기자회견을 했다. (이 의견을 낼 수 있는 기간이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표결 당일에 이렇게 반대의견을 표시한 건 아주 극적이고 의아한 상황이다. 물론 관련 학계 및 환경론자들은 어찌되었든 반기고 있긴 하지만.)

야당진영인 Rød blok이 이미 이와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상황에 Konservative 정당이 돌아섰다는 것은 해당 장관의 경질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며, 경질을 하지 않을 경우 불신임 투표를 시행하겠다는 의미다. 그러나 Eva Kjer는 농부의 딸로 태어나 농부와 결혼한 여성으로 농업에 대해 깊이있게 이해하고 있고, 농업의 이익을 철저히 대변하고 있다. 농업계를 중요한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는 Venstre 입장에서는 그녀를 경질하는 것은 농업계를 등지는 것과 같은 선택이거니와 Eva Kjer가 그간 Lars Løkke 총리를 여러모로 어려운 순간 많이 도와왔기 때문에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안이다. 따라서 총리는 해당 장관 경질을 해야한다면 내각을 해산하고 총선을 다시 하는 것도 불사하겠다며 강경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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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Berlingske Facebook (링크) “네 놈들은 그녀를 데려가지 못한다! by Løkke”

덴마크 정치에서 “내가 멍청해서 수치를 잘 이해 못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용서의 대상으로 고려될 수 있지만, 신뢰를 깨는 행위는 용서받기 어렵다. 그래서 Konservative 정당이 “우리는 그녀를 신뢰할 수 없다.”고 하는 표현은 “그렇든지 말든지”하고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관련 뉴스 팔로잉하기: http://www.dr.dk/nyheder/tema/eva-kjer-hansen-sagen

덴마크에서는 신뢰가 일반 사회 뿐 아니라 정치의 가장 중요한 축이 된다는 것을 이번 사태에서 또다시 느낄 수 있다. 물론 반대로 이렇게 숫자를 조작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통해 이 사회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고 말이다.

우리 국회도 과거처럼 최루가스가 터지고 육탄전이 벌어지는 부끄러운 모습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이 곳의 정치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정말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또한번 느낀다. 그리고 우리의 (참담한) 4대강 사태를 보며 환경 정책이 가야할 길이 얼마나 먼지, 정책이 추진되는 과정이 투명하게 바뀌려면 얼마나 힘이 들지 등 또한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