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모님의 방문 단상

시부모님이 이틀밤을 주무시고 가시게 되었다. 원래는 하루였는데 이틀이 되었다. 사실 하루는 너무 짧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람이 너무 많이 들어 페리 타시는 게 힘드실 것 같다하여 하루 연장이 되었다. 하나가 시부모님 오시면 좋아하고, 우리도 우리끼리만 있는 일상에 사람이 늘면 대화도 늘고 간혹 도움도 받고 좋다. 물론 손님이 늘면 일이 늘어나지만 덜어지는 일도 생각하면 그냥 더 힘들 것도 덜 힘들 것도 없다. 그냥 사람이 늘어나서 일상이 풍성해지는 것 뿐.

어제는 다진 로즈마리와 올리브오일로 마리네이드한 아구를 팬에 구워서 새우와 팬에 살짝 볶은 시금치와 함께 냈는데 너무 맛있었고 반응도 참 좋았다. (레시피 링크) 오늘은 닭고기와 감자, 고구마를 오븐에 함께 구워내는 요리를 했는데 이 또한 좋아하셨다. 손님이 오시면 좋은 점은 그 참에 우리도 평소에 자주 안해먹을 요리를 해먹는다는 점이다. 특히 아구를 집에서 조리해본 적이 없어서 아구 필레를 보고도 한번도 사보지 않았는데 계속 벼르고 벼르던 것을 오늘 산 건데 너무 잘 했다.

시부모님이 설겆이를 하시는 동안 나는 하나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 다음, 하나 침대보를 새로 갈았다. 아침에 빤다고 빼두고 새로 껴두는 것을 깜빡했다. 그리고 옌스가 하나를 재우기 위해 방에 들어가 있는 동안 나는 블로그를 열었다. 시부모님이 부엌에서 설겆이를 하고 계시지만 이제 나도 적당히 시부모님께도 하실 일을 드릴 내공이 생겼다. 한국식 마음가짐으로는 그런 게 너무 불편했는데, 막상 내가 혼자 일을 도맡아 다 하면 시부모님도 마음이 불편하시니까 일을 드린다. 가족은 약간은 손님이지만 사실 완전히 손님은 아니지 않는가.

시부모님은 원래 토요일에 오셔서 하루 주무시고 가시기로 한 거였는데, 시누이의 시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이 금요일에 있던 탓에 거기 들렀다가 하루 먼저 오시기로 하셨다. 장례식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시누이 남편이 교회 장례식이 끝나고 간단히 다과를 나누는 자리에서 간단히 한마디 하다가 눈물을 흘렸다면서 이야기를 하시더라. 시누이 남편은 평소에 그런 개인적인 감정은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라 일상생활에서도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유지하는데, 시부모님도 그의 그런 모습은 처음 봤다하셨다. 시누이 시아버님은 피부암이 피부 겉으로도 보일 정도로 심해져서 마지막 1년은 너무 고생하셨던 터였다. 연말에 만났을 때 시누이 남편에게 당신은 어떻냐고 물었을 때도 괜찮다고, 아버지가 너무 고생하셔서 이제는 편안히 쉬셨으면 좋겠다며 담담히 터놓던 그였는데. 또 그렇게 한번 눈물을 한껏 흘리고 나서는 사람들과 기분 좋게 이야기도 나누고 간혹 농담도 주고 받았다고 한다. 여기서는 참 사람들이 우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다. 장례식에서조차. 상주가 안우는데 손님이 우는 건 오버같아서일까.

그에 비하면 결혼식 때 신부 스피치를 하며 엄마 아빠에게 감사를 표하며 울컥해서 눈물을 흘릴 뻔 한 나는 여기 기준으로는 감정을 잘 못 숨기는 사람일 지도 모른다. 아니면 여기는 눈물을 흘리는 학습된 기준점이 더 높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눈물을 흘리기 위한 감정의 역치가 높다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시부모님이 오시고 나니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든다. 우리 엄마와 아빠도 가까이에 계셨으면 이렇게 자주 왕래를 할 수 있을텐데 싶어서 아쉽고. 인생이란 게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게 이런 건가 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국땅 출신이다보니 부모님과의 거리가 멀어질 수 밖에 없구나. 어차피 코트라 다녔으면 해외생활이 길었을테니 그것과 엄청 다르지는 않을 거다 하면서 위로하는 수 밖에.

관계는 장담그듯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옌스의 3주간의 휴가가 거의 끝나간다. 나는 한 주 더 길게 썼으니 딱 한달이다. 4주간 정말 내 생애에 없을만큼 잉여로운 생활을 했다. 여행 다니며 먹고 쉬고 공부나 어떤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한달. 입덧 때문에 뭔가 열정적으로 할 여건은 안되기도 했고, 입덧과 함께 찾아온 피로로 하루에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방학이 때맞춰 찾아와준 것은 정말 축복이었다고 할 수 밖에.

덴마크에서는 결혼을 해도 시부모님을 어머니, 아버지로 부르지 않는다. 그냥 이름을 부르는 것이 전부. 30년을 한국에서 살아 형성된 시선으로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하니 적응하기 어려운 것들이 몇가지 있는데, 시부모님을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다. 나는 내 문화를 설명하고 엄마, 아빠에 해당하는 mor, far로 호칭을 하기로 했다. 옌스는 처음엔 이상할 거라고 하더니, 막상 시부모님도 정말 좋아하시고, 나와 그분들이 살갑게 지내는 것을 참으로 좋아한다.

부담스러우리만치 잘해주시는 시부모님임에도 나에게 시부모님이라는 존재는 나만의 경험 없이도 그냥 당연히 어려운 존재였기에 항상 행동이 조심스러웠었다. 오덴세에 사시다 보언홀름으로 이사가신 분들이라 거기서 가족이 모이긴 어려워 주로 시누이네 집에서 모이는데, 거기서도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게 좋은지 몰라 최대한 편하게 지내고 오고자 노력했다. 예를 들면 점심, 저녁을 먹는 모임의 경우, 식사가 끝나고 정리를 얼만큼 돕는게 좋은 건지가 매우 애매했다. 손님이 너무 거드는 게 실례가 될 수도 있기도 하고, 또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하자니 애매하고, 부엌도 너무 많은 사람이 있으니 오히려 동선만 복잡해지고. 시댁 가서도 좀 돕자니 이것 저것 하지 말라 하시고, 아무것도 안하자니 마음이 불편하고. 옌스는 그냥 편히 쉬라는데 한국인인 내가 그렇게 하기엔 내 살아온 방식이 그렇지 않아 마음 한구석 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 모든 것은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린 것이 아니었다 싶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사람들이 같은 공간을 공유하다보면 적당히 서로 겹치는 방법을 깨닫게 되고 익숙해지는데, 시부모님이나 나도 그런 것이었다.

시부모님네 별장에 가서 3박을 하고 돌아왔는데, 주시는 음식을 적당히 거절하기 (이것 저것 권하시면 세번이상 거절이 어려워 적당히 먹었었는데, 옌스가 장기적으로 보면 사전에 거절하는 법을 잘 배워야한다며 거절 잘 못하는 나를 교육시킨 바 있다.), 우리가 먹은 것들 설겆이 하고 정리하기, 시부모님 생활습관 파악하고 그를 존중하기 (우리 집보다 깨끗하게 생활하셔서 그거 맞추려면 조금 더 신경 써야한다.), 그 밖에는 그냥 내 가족들 대하듯이 편하게 생활하기 등을 잘 실천하고 왔다.

입덧이 심해서 먹을 수 있는 거 제약이 많으니 알아서 해먹을 거니 내 거는 신경 쓰지 말라고 옌스가 미리 전화하는 것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이것 저것 내가 먹을 수 있는게 뭐 있을지, 아무것도 요리해주실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많이 물어보셨다. 첫날은 다 거절하지 못해 조금 먹다가 결국 토하고나서는 어려워도 아니다 싶은 것은 다 못먹겠다고 말씀드렸고, 한번 그렇게 하고 나니 거절이 쉬워졌다. 샤워하고 나서 샤워부스 건조시키는 일도 그렇고, 설거지 하는 일도 그렇고, 돕겠다고 여쭤보는 거 없이 바로 하겠다고 나서니 잠깐 말리시다가 그냥 놔두시더라. 결국 적극성의 문제였던 것도 있고, 시부모님도 나를 완전히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전까진 손님같은 생각도 드셨기에 그랬었나 싶다. 내가 편해지니 시부모님도 나를 더 편하게 대해주시고 모든 것이 조금씩 더 자연스러워진다.

결론적으로 보면, 가족처럼 되기까지 한 일년은 걸리는 거 같다. 정말 장담그는 것처럼 관계도 시간이 걸리는 것. 물론 임신하면서 관계의 역학도 조금 더 새로운 형태로 바뀌는 것도 있었던 것 같고. 일종의 계기같은게 아닌가 싶다. 우리도 내년에 애 낳고 한국가서 한달정도 (나는 두달정도…) 우리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지내다보면 옌스와 우리 부모님 사이도 조금 더 편해지고 가족같아지겠지.

입덧이라는 미명하에 내가 좋은 엄마는 못되고 있는 것 같지만 (비타민 챙겨먹는거나 등등…) 이제 좀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아마 임신초기에 나처럼 막지내는 엄마도 별로 없을 듯. 이제 배도 – 나만 알 정도지만 – 나오기 시작하고, 진짜 애가 있긴 있나보다. 다음주 초음파를 처음으로 보기전까진 별로 실감이 안날 듯. 손주까지 나오면 또 다시 흐른 시간에 더불어 피가 섞인 손주를 낳은 며느리니 더 가족같이 느껴지겠지. 이제 정확히 30주 남았다. 그 날이 오기까지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