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냄새 나는 이곳

 오래간만에 인스타그램을 컴퓨터로 들어가서 내 계정을 훑어내려갔다. 타일처럼 나열된 사진들을 훑어내리며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난 듯 했다. 덴마크로 넘어와서 정말 많은 경험을 했구나. 이렇게 많은 것을 경험해도 아직도 경험할 게 새로이 많구나. 한국에 있었어도 새로이 경험할 일이 많았겠지만, 외국에서 경험하는 것이다보니 간접경험의 폭도 적어서 더욱 새롭고 이국적으로 느껴진다.

이제는 새로이 집을 사면서 매매절차와 더불어 이사가는 것에 수반된 부대절차와 챙길 일들이 있어 이와 관련된 경험을 하고 있다. 오늘은 나에게도 옌스에게도 신선한 일이 있었다. 오후에 이메일 알람 진동이 드르륵 와서 발신자를 보니 우리가 산 집의 현재 주인인거다. 집 주인이 벌써 우리에게 연락할 일이 뭐가 있지? 해서 열어보니 집을 아직 보지 못한 나를 위해 가구 빼기 전에 집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제안이었다. 한국에서 옌스에게 부동산 물건을 찾아서 한 번 가서 보라고 하고, 옌스가 마음에 든다고 하자 집을 사자고 제안한 건 나지만, 막상 덴마크에 돌아오기 전에 계약이 다 끝나서 나는 집을 본 적이 없었던 거다. 귀국 이후 동네에 찾아가서 집 주변과 동네를 둘러보긴 해도 안은 볼 수 없어서 참 아쉬웠는데 말이다.

테라스쪽 전경 / 정원은 없는 집이지만, 바로 뒤편에 공터가 크게 펼쳐져 있어서 이를 그냥 정원삼아 누릴 수 있다.
테라스 쪽 공터 전경 / 비가 많이 오면 하수구로 바로 빠지지 않고 지표면에서 물을 지연시킬 수 있는 저장공간으로 활용되는 지역인가 보다. 시에서 여기는 주택용지로 지정하지 않은 지역이다. 탁 트인게 좋다.
공터에는 작은 그네도 있다. 그냥 애들 뛰어다니기에 좋은 곳이다.

매도자인 부부는 옌스보다는 젊고 나보다는 나이가 많은, 즉 우리 또래 부부고 아이들은 조금 더 큰 것 같은데 알고 보니 우리 건너편 집에서 다섯집만 더 가면 나오는 집으로 조금 더 넓혀 이사가는 거였다. 즉 동네 이웃으로 남는 거였다. 이메일에는 동네 이웃으로 만나게 된다는 내용과 함께 우리 집 왼쪽 오른쪽편 집 주민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주고 그 중 한집이 참 오랫동안 레보베이션 하느라 시끄럽게 했으니 이사오면서 조금 시끄럽게 하는 걸로는 신경쓸 필요 없다는 팁도 알려주었다. 더불어 우리가 이사가게 될 즈음에 자연이 어떻게 되어있을지, 동네 분위기는 어떤지도 알려주고 말이다.

무엇보다 좋은 건 우리가 먼저 이야기 하지 않았는데 열쇠를 실제 부동산 인수일보다 먼저 넘겨줄 수 있다는 제안을 해온 것이다. 그럴 수 있다는 건 알았지만, 옌스가 굳이 그걸 걸어서 계약을 복잡하게 하지 말라고 하기도 해서 상대가 아무 말이 없는 이상 그냥 내버려두었다. 4월 1일 열쇠를 넘겨받기에 부활절 연휴에 이사를 갈 거 같은데 정확한 일정은 몰라도 다 이사짐을 빼고 나면 열쇠를 넘겨줄 수 있다는 거다. 우리야 그래주면 이사 전에 저녁과 주말 시간을 빼서 집도 청소하고 페인트칠도 미리 완료하고 깔끔하게 이사할 수 있으니 너무 좋은데 말이다.

나쁜 경험은 빨리 잊어버리는 편리한 뇌를 가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덴마크에 와서 나쁘거나 불쾌한 일을 겪기보다는 즐겁고 유쾌하고 따뜻한 경험을 많이 하는 것 같다. 내가 여기가 내 땅이 될 곳이라 결심하고 마음을 열었기에 그렇게 느꼈는지, 아니면 그렇게 느꼈기에 마음을 연건지는 이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람 냄새가 나는 경험으로 가득 채우는 이곳이 나에겐 더욱 집과 고향처럼 느껴지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첫 데이트 5주년

오늘은 우리가 첫 데이트를 한지 5년이 되는 날이다. 사실 27일에 우리가 무슨 관계냐며 이야기를 주고 받았기에 그날을 기념일로 하는데, 그래도 또 첫 데이트는 첫데이트 대로 좋은 기억이라 떠올리면 항상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서로 메세지만 주고 받다가 백화점 1층에서 만나 어색하게 포옹을 나누며 인사를 했었는데… 옌스가 좋아하던 단골 카페에 나를 데리고 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중간에 공짜로 나눠주는 초콜렛들도 받아가며 걸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발렌타인데이 전날이라 초콜렛의 상업성이 정점을 찍는 타이밍이었던 거 같다.

한참을 이야기하며 옌스는 커피를, 나는 차를 마셨었는데 공통점이 있는 부분도 많고 유머코드도 잘 맞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더랬다. 사실 두번째 데이트는 그날 핸드폰도 잃어버려 다시 사고 좀 기분이 안좋았던 날이라 서로 상대가 자기가 마음에 안들었나 긴가민가했었지만.

내가 무슨 복이 있어서 이런 남자를 만났나 싶을만큼 훌륭한 남자지만 내가 항상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함으로써 옌스도 나와 만난 걸 항상 기쁘게 생각할 수 있게 하려한다.

난 별로 로맨틱한 사람은 아니라 옌스에게 간간히 핀잔도 듣는데 로맨스가 많이 사라진 애를 둔 부모라도 역시나 이런 기념일에 꽃을 챙기는 옌스덕에 로맨스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다. 그런데 선물을 준비한 건 반칙. 우리 기념일은 27일인데다가 기념일엔 아주 작은 선물만 하기로 해놓고. 시부모님 오셨을 때 시어머님의 도움을 받아서 목걸이를 샀단다. 그리고 오늘 준 건 그래야 나를 놀래켜줄 수 있어서였단다. 콩알만하지만 다이아몬드도 박힌. 선물의 가액이나 그런건 전혀 중요하진 않지만 나를 생각하며 선물을 샀다는 것과, 지난 5년이 자기 삶에서 가장 행복한 5년이었다며 앞으로의 50년도 이렇게 보내자고 적은 작은 쪽지가 너무 좋았다.

지난 5년이 어찌 보면 너무 후딱 간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한 것 같은데 5년 밖에 안갔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내 인생에 이렇게 누군가가 깊게 파고들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랍다. 앞으로 50년이라. 그 긴 시간도 어느샌지 모르게 훅 지나가 있을 거 같다. 그 사이 경험할 많은 일들과 함께 나눌 희로애락, 모든 것이 다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