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의 진로 고민

성적증명서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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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이쪼가리를 시청에다가 보내면 자기네가 외국인/사회통합청에 사실여부를 확인한 후 가족비자에 딸린 보증금 일부를 돌려준다. 지난번 시부모님 오셨을 떄 이 증서 받으면 그 보증금 돌려받는 일 처리해야겠다고 했더니 옌스왈 그 보증금이라고 해봐야 자기 계좌 안에 못쓰게 묶어논 돈이고, 보증금에서 풀어서 다른 계좌로 옮겨놔도 이자 안나오는 거 마찬가지니 그런 일 번거롭게 할 필요 없단다. 시부모님도 나보고 이자 나오는 걸로 잘못 알고 있었냐면서 농을 던지시는데 머쓱. 아니 아주 조금은 나오지 않았나? 허허허. 뭐 안나오면 괜히 그런 일 할 필요 없는 걸로…

 

박사과정 지원 마감일이 이틀 남았지만, 지원은 안하기로 했다. 나를 아껴주시는 자원경제학 교수님이 자기가 추천이랑 그런 주변 서포트는 열심히 해주겠으니 지원하기로 약속하라고 하셨을 때, 그냥 나는 너무 쉽게 그러마고 답을 했는데… 박사는 뭔가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뭔가” 해보고 싶은 마음이 문제였다. 진짜 하고 싶은 건지를 모르겠다. 석사를 시작할 때만한 동인이 마음에 없다. 나는 뭔가 주제가 주어졌을 때 그걸 파고 이해하고 하는 걸 좋아하는 거지, 내가 파고 싶은 주제가 없었다. 석사과정을 하면서도 그게 가장 두려웠다.

석사 논문 주제 잡는 것도 다른 친구들처럼 오랫동안 써보고 싶다고 생각해온 게 없었다. 애가 있는 나로서는 서베이 같은 필드조사가 필요한 건 너무 변수가 심해서 안될 거 같았기에 데이터로 모델링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 중 수업을 들어보면서 해보고 싶었던 헤도닉 가격 모형을 선택을 했고, 주제에 대해서는 조금 막연하게 사람들이 해수면 상승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비하는 준비가 부족한 것 같아서 이에 대한 걸 써보고 싶다고 했더니 교수가 이런 저런 건 어떠냐 하고 제안을 해왔다. 거기에서 답을 찾아서 주제를 잡아서 다행히 쓰고 있는 중이다.

박사는 3년이란 프로젝트에 어느정도 지도교수의 조언을 받기는 해도 주제 부분이라던가 연구에 있어서는 석사 이상으로 자기 오너십을 갖고 접근해야 하는데, 영 그런 각이 안나온다. 논문 지도교수님은 예전에 박사과정에 합격한 사람들의 지원서를 보내니 참고해보라고 하시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해수면 상승분야에 펀딩 프로세스가 많이 진행되고 있어서 박사 자리가 날 것 같다고 하셨다. 나를 도와주신다는 교수님은 원래 다들 막연한 아이디어로 시작한다고 하면서 지도교수님에게 도움을 좀 더 받아보라 하시는데, 이건 영 아닌 거 같은 생각이 자꾸 드는 거다. 나를 도와주시는 교수님은 뭔가 약간 한국사람 같은 정이 넘치는 분이라 사람은 돕고 사는 거다는 정신이 강하신데, 내 지도교수님은 (나이가 나와 같은…) 나는 약간의 가이드를 해주는 거지 연구는 자기가 하는 거다 하는 쿨한 정신의 소유자이시다. (사실 이 말씀이 맞다고 생각한다.) 이런 교수님을 지도교수님으로 두면서 내 이 의존적이고 비자발적인 연구태도로 3년동안 내 프로젝트 4개를 끌고 나간다? 나의 부족한 self-discipline으로는 괴로운 3년이 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석사 논문 6개월도 이렇게 간신히 끌고왔는데, 이의 6배가 되는 시간을 이보다 더 큰 프로젝트들로 채워야 한다고? 아… No way…. 주변에 물어봤을 때, 박사는 네가 하고싶어서 해야해. 라는 말들을 들어왔다. 이게 거의 유일한 답이었다. 하고는 싶은데 뭘 하고 싶은 지 모르겠어라는 말에 그거 말고 하고 싶은게 뭐가 구체적으로 있어야하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받고 할 말이 참 없었다. 그래… 내 마음 깊은 곳에 답이 있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박사라는 타이틀에 관심이 갔던 것 같다. 취업시장은 어떨 지 영 아이디어가 없는데, 박사과정은 지원을 한다면 가능성이 보이는 상황이고… 괜히 솔깃했던거다. 지금 내 마음가짐과 태도로 시작했다가는 금방 벽에 부딪혀 좌절하고 포기할 게 불보듯 훤하다.

지도교수님에게 몇 주 연락없이 조용히 집에서 일을 했더니 메일로 안부와 프로젝트 진행여부를 물어오셨다. 이래저래 진행하고 있고 박사는 지원 안하기로 했다했더니, 이해한다며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니 자신의 마음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고 하시더라.

 

이제 남은 일은 열심히 논문을 써서 빨리 실업시장으로 나가는 것… 아… 컨퍼런스 발표도 남아있다. 프로그램이 나와서 이젠 정말 빼도박도 할 수 없다. 학계로 가는 게 아니라도 이런 경험이 나쁠 건 없고 또 이렇게 누구와 네트워크를 쌓을 지 알 수도 없는 일이니 성실하게 하도록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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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일기.

논문이 바빠지니 다른 것에 소홀해진다. 논문은 대충 첫번째 포스트에 도착한 것 같다. 원시적 모델링은 우선 되었으니 이제 이론 연구와 모델링을 병행하고, 그 다음엔 분석하고 논문을 써야한다. 그간 진행이 참 지지부진하다 싶었는데, 그래도 1차 모델링을 하고나서 보니 어찌어찌해 절반은 왔구나. 약간이지만 안도가 된다.  물론 아직도 반 이상이 남았는데 시간은 반이 흘렀으니 긴장이 되는 게 더 큰다. 내 논문 생활을 유리하게 만들어주는 게 하나 있다면 항상 크리티컬한 관점으로 내 논문을 비판해 줄 남편이 있다는 점이다. 오늘도 모델을 보여줬더니 이건 고려해봤느냐, 저건 고려해봤느냐, 이 건 왜 이런 함수형태를 취했느냐, 독립변수 선택의 전략은 어떻게 할 것이냐 하며 꼬치꼬치 묻는다. 아직 그 단계까지 안갔는데 쏟아지는 질문에 무방비로 폭격을 당한 기분이었으나 나혼자 하는 씨름에 타인의 신선한 인풋이 좋은 자극으로 다가왔다. 역시 연구는 남과 공유해야하는 법이다.

우리 학과가 속한 인스티튜트에서 박사과정 공고가 났다. 자금사정이 트인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매주 수요일에 있는 인스티튜트 아침식사시간에 같이 참여해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도교수에게 박사과정에도 관심있다고 했더니 지원서를 도와주겠다고 한다. 나를 많이 아껴주시는 교수님이 있는데, 그분께도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아무것도 보장되는 건 없지만 추천서만큼은 꼭 써주시겠다면서, 오히려 박사과정에 꼭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논문을 제외하고 학점이 10.9니까… 논문을 잘 쓰면 11점 정도로 학점은 마무리 할 수 있을 것 같다. 기라성같은 사람들이 완벽한 점수를 들이밀 걸 생각하면 아주 빼어난 점수는 아니라도 점수가 흠이 될 건 아닌 정도니 논문이 많이 중요하다. 사실 큰 기대는 못한다. 요즘 박사과정은 세계 각지에서 지원을 하니 경쟁률도 높고, 내가 원하는 연구방향과 인스티튜트에 가장 어필하는 방향이 매칭이 된다는 보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뭐든 해보지 않으면 될지 안될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을 늦게나마 배웠으니까 우선은 지원을 해봐야겠다. 뭐 되든 안되든 간에 내가 박사과정까지 생각하리라는 건 정말 상상도 못해봤고 공부는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는데, 역시 절대 안한다 못한다 이런 이야기는 함부로 하면 안된다.

덴마크어 필기 시험도 한달이 채 안남았고, 구술은 그 뒤 한달뒤로 다가왔는데, 시험은 큰 걱정이 되지 않는다. 선생님을 잘 만난 덕에 쓰기가 후반으로 갈 수록 느는 게 느껴졌다. 알듯말듯한 몇가지 문법이 자꾸 발목을 잡는 느낌이었는데, 내 고민을 정확히 이해하고 딱 꼬집어 지적을 해주는 선생님을 만나면서 많이 좋아졌다. 작년 말 시험으로 모의시험을 쳐보니 읽기는 12, 쓰기는 약한 12 또는 강한 10이라한다. 말하기는 한달 시간이 있기도 하고, 읽기와 쓰기의 중간정도의 자신감을 갖고 있는 부문이라 대충 10~12 사이로 모든 부문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해보고 있다. 모듈 6를 하게 될지 아닐지는 지금도 결정하지 못했지만, 항상 옵션을 갖고 있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니까 우선은 그대로 해보련다. 덴마크어 교육도 갈수록 팍팍해져가고 있고 그러다보면 교육의 질이 떨어질 수도 있는데, 더 미루지 않고 올해 초 다시 시작하기로 한 건 아무래도 잘 한 결정이란 생각이다.

하나는 쑥쑥 자라고 있다. 이제는 제법 아가씨 태가 난다. 잔디밭을 뛰어다니면서 겁이 없어져서 그런지 위험한 일들을 서슴없이 해서 조금 걱정이다. 집에서 놀다가 살짝 휘청한 것 같았는데, 금속 바구니 테두리에 부딪혀서 앞니가, 그것도 윗니가 살짝 깨졌다. 다행히 신경은 안건드린 거 같긴 한데, 우선은 지켜봐야한다. 옌스도 같은 이가 부러진 적이 있다하니 젖니 깨먹는 건 이 집안 내력인가 한다. 이일로 나는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고, 아픈 하나를 보기위해 마침 휴가를 내고 있었던 옌스에게 애를 맡기고 나가면서 그 스트레스로 인해 구역질이 났다. 열차를 타고 가면서도 구역질이 계속 나는데, 그걸 멈추기 위해서 산책을 해야했다. 원래 스트레스에 민감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신체적으로 반응이 올 만큼 스트레스를 받는 건 내가 아닌 아이 일이라서 그렇다. 누가 있었어도 생겼을 일이었기에 나를 자책하는 건 아니지만, 그냥 애가 더 크게 잘못되었으면 어쨌나 하는 두려움에서 오는 구역질. 더 큰 사고가 나도 차분함을 가지기 위해서는 마음을 정말로 단단히 먹어야한다.

하나는 참 씩씩한 아이다. 웬만해서는 넘어진 거나 부딪힌 걸로 울지 않는다. 시부모님도 그렇고 보육원 선생님들도 인정하는 씩씩한 아이인데, 그렇다고 튼튼한 건 아닌 것 같다. 감기나 설사 같은 걸로 자주 아픈편이고, 폐렴 입원도 그렇고 천식성 기관지염을 앓는 일이 꽤 잦은 것 같다. 오늘도 그로 인해 응급실을 다녀왔으니… 물론 이번엔 응급했다기 보다는, 일반 GP, 스페셜리스트로 올라가는 시스템을 이용하기에는 응급했다고 봐야하는 거니까, 그냥 적기의 진료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겨울 아기로 겨울 초입부터 보육원을 시작해서 그런 것도 있다지만. 다행인 건 씩씩한 아이라 잘 견뎌준다는 것. 나도 생각해보면 어려서 자주 아팠던 것 같다. 항상 건강체질은 아니었고 초등학교 1~2학년 때는 자주 배가 아파서 학교를 많이 쉬었던 기억이다. 엄마도 내가 씩씩했었다는데, 지금도 꽤 씩씩한 거 생각하면 하나도 그런 면에서는 강한 아이일 것 같다.

요즘 얼마나 놀이터 생활을 즐기는지. 날이 좋아지면서 아파트 앞 잔디밭에서 놀리게 되니 동네 아이들과도 교류가 조금씩 생기고 있다. 한 때 비명을 고래고래 지르던 아래층 이웃 아이는 아직도 간혹 그렇긴 하지만 그런 게 줄었고, 그 아이의 오빠와 둘다 다정한 애들로 컸더라. 이제 곧 7살이 된다는 베어트람은 하나를 유독 이뻐해주고 쓰다듬어주고 (아마 여동생을 데리고 지낸 경험에서 우러나는 듯) 4살 여동생인 딕터도 다정한 미소를 머금은 아이었고, 둘다 하나와 함께 놀아주더라. 하나가 갖고 나온 공을 갖고 잔디밭에 삼각형으로 둘러 앉아 셋이서 공을 미는 놀이를 하는데 (그나마 하나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놀이로 배려해 준 베어트람이 놀랍다.) 곧잘 노는 게 신기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놀라고 나는 빠져있는 건데 내가 중간에 괜히 옆에서 개입했나 싶었다. 말못하는 하나를 대변해준답시고, 아직 애가 이해를 못해서 그래, 하나야 앞으로 밀어봐, 이러면서 옆에서 참견을 했다. 그냥도 잘 했을 거 같고, 아니어도 오빠와 언니가 적당히 반응해가며 놀았을텐데 말이다. 앞으로는 다른 아이가 충분히 큰 경우 내가 조금은 더 뒤로 빠져서 지켜보는 역할에 그치는 것으로 해봐야겠다.

다음주에는 두바이에 주재중인 시누이네를 시부모님과 함께 방문하는데, 출산 후 거의 바로 이주한 시누이가족과는 하나가 처음으로 제대로 교류하게 될 거라 기대가 많이 된다. 조카들이 동생 만나서 놀아줄 기대로 부풀어있어서 더욱 기대된다. 수영복도 사고 이래저래 준비를 했는데 아픈게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

오늘 해가 엄청 쨍하고 더웠는데, 하나 데리고 오전에 응급실에서 3시간 씨름하고, 가장 해가 쩅한 시간에 나와 낮잠에 든 애를 두시간 반이 넘는 시간동안 밀고 싸돌아다녔더니 몸에 화기가 든 기분이다. 아마 피부가 많이 탄 모양이다. 밤에 잠이 잘 안올 것 같다. 나는 못자도 애가 좀 잘 자줬으면 좋겠다. 기침을 덜하는 걸 보니 오늘은 잘 자려나? 역시 병원에서 천식약 흡입한 게 도움이 많이 된 모양이다. 딱 쓰고나니 기침하네. 흠… 역시 입초사인가…

임신 때보단 육아가 훨씬 힘들긴 한데, 출산 후 100일이 제일 힘들었던 거 같다. 지금은 다른 차원의 힘듦이지만, 육체적으로는 애가 어릴 때 더 힘들었던 거 같다. 얼마전 출산한 사람, 앞으로 출산할 사람 등 주변에 애 참 많이 낳는데, 신생아 냄새가 생각날 듯 하면서 그립기도 하지만 또 낳을 생각은 안난다. 다 잊혀져서 애를 또 낳는다는데, 힘든 기억은 잊혀졌지만 힘들었다는 사실이 기억나지 않는 건 아니니까… 내 애는 그만 낳고 남들 애기 보면서 신생아 이뻐하는 건 그걸로 끝내야겠다. 아… 신생아 볼 생각에 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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