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주말근무/야근. 외노자의 두려움

뜨거운 감자인 정책을 위한 모델을 만드는 부서에 있다보면 덴마크라고 다를게 없구나. 금요일 늦은 밤에 메일을 보내 우리가 해야할 일은 뭐고, 주말동안 자신이 할 건 뭐고 자기 담당 파트는 월/화까지 준비되는 데 내 파트는 언제까지 될 수 있냐는 메일. 주말에 일을 해서 최대한 빨리 보내야겠다. 안그래도 이미 바쁜 다음 주인데… 겁나게 바쁘겠다. 좀 더 차분히 더 꼼꼼하게 준비하고 싶은데 또 장관님 생각은 다르신거지… 재택근무에 보육원도 닫아서 풀타임 근무하려면 아침 7시부터 6시까지 일하면서 중간에 애도 보고 밥도 해야하는데.

그래도 한국과 다른 건 진짜 응급한 상황이 아니면 야근이나 주말근무에 대한 직접적 요구는 없다는 것. 딜리버리만 맞추면 된다 이거지. 물론 중간중간 유연적 태도에 감사하다며 (미리) 떡밥이 깔리는 경우도 있다.

뭐 근로 문화에 불만은 없다. 그냥 여기에도 바쁠 때는 어쩔 수 없는 걸 아니까. 업무가 늘고 커버리지가 넒어질 수록 로드가 올라간다. 한국에서 일할 때보다 짧은 시간 일하지만 더 갈려들어가고 이 분야에는 내가 전문가가 되는구나 하는 걸 느낄 수 있으니까. 주변의 뛰어난 동료들에게서 많은 걸 배운다.

과거 논문 쓸 때는 그냥 분석만 하는 거였다면 이젠 이 내용을 매뉴얼로 만들어 남들이 다 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하고 실제 경제에 큰 영향이 가니까 두렵다. 큰 신뢰만큼 두로움도 커진다. 거기에 덴마크어로 일을 하는 것도 미묘하지만 끊임없이 두렵다. 매일 매일 직면하는 두려움이 스트레스이기도 하지만 아드레날린같기도 하다. 중앙부처에서 일한다는 건 그렁 그런 것 같다. 박봉이지만 영향력이 있는 곳에서 일함으로써 내가 한 일이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 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잘 헤쳐가야지…

작은 두려움의 연속

연봉협상 시즌이 돌아왔다. 작년 센터 성과는 좋았고, 나도 내 담당 업무의 목표를 달성했다. 공무원은 크게 협상 여지가 많지 않다는데 얼마만큼 해야하는데 아직 감이 잘 서지 않는다. 덴마크어로 일하는 데서 오는 생산성 손실을 다른 경쟁력으로 얼마나 메우고 있는지도 불확실한 터라 더욱 그렇다.

매일 매일 작은 불안함을 갖고 지낸다. 커뮤니케이션이 항상 큰 부담이다. 내가 원하는 바를 잘 전달하지 못할까봐서. 또 언어의 부족으로 인해,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의 부족으로 인해 의견의 강약 조절에 있어서 의도치 않게 실패를 할까봐서. 그래서 조직에 피해를 끼칠까봐. 그 결과로 타인의 시선과 단정적 평가를 받을까봐. 그래서 성과 협상은 더더욱 불안하다.

일년의 기간이 흘러 이제 나는 나대로의 위치가 정해졌고 업무 영역이 넓어졌다. 앞으로도 내 위치와 업무 영역은 크든 작든 변해가고 책임도 늘 것이다. 내가 적응을 한다 싶으면 또 변해가겠지. 그에 따라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기대도 높아진다는 게 두렵다.

사실 정 안되면 관두면 되지. 이런 마음으로 일하면 될 것 같기도 하면서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어쩌면 한국어로 했어도 가졌을 두려움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런 두려움은 앞으로도 계속 원치않는 친구같이 데리고 나아가야할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타인에 대한 단정적 평가가 왜 두려울까? 내가 가진 원래의 가치보다 낮게 보이는 게 두려운 걸까? 생각을 좀 해 볼 문제다. 내가 잘났다는 생각이 있는 걸까? 실제보다 못나보일까 걱정하는 걸까? 좀 못나보이면 어떤가? 남이 어떻게 평가하는 게 왜 나에겐 그렇게 중요할까? 어려서 높은 기대 수준 속에 내가 원하는 만큼의 인정을 충분히 받지 못한 게 지금도 여전히 내 속에 남아있는건가? 만약 그렇다면 그런 감정을 어떻게 해소하고 달래가야 하나? 많은 질문이 꼬리를 문다.

잘 모르겠다. 내 인생이 힘들다는 것도 아니고 직장생활이 불행하다는 것도 아니다. 다 좋고, 감사한데, 그냥 서서히 그런 두려움을 안고 가는 내가 이해가 안된다. 이해를 하려 하는 이 과정이 두려움을 맞이하는 길이 되겠지. 우선은 덴마크어 공부도 하고 업무도 열심히 하는 등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가면서… 올 한해 큰 모델 마무리 짓고 보고서고 발안하고, 입법안 초안도 내고 기타 운영업무도 하면 한 해가 흘러가 있겠구나.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덴마크어로 취직을 하기까지

덴마크어를 공부하기 시작한지 4년 4개월. 정말 언제 늘까 하던 덴마크어로 벌써 직장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불과 작년 3월인가 4월인가 대학원 졸업생을 대상으로 하는 Graduate program (싼 값에 대학원생을 고용해서 2년정도 국내외로 이동시키며 다양한 업무경험을 시킨 뒤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프로그램이 가장 일반적이다.) 에 덴마크어로 처음 지원서를 썼던 게 시작이었다. 영어로 먼저 지원서를 써서 이를 덴마크어로 바꾸어 번역한 뒤 옌스의 첨삭을 받았더랬다. 어찌나 오래 걸렸는지… 하루 꼬박 걸렸던 것 같다.

그리고 논문을 쓰던 와중에 거의 막바지 들어 한두개 정도 지원서를 내봤는데, 이렇게 저렇게 작성양식을 바꿔가며 이력서와 지원서를 써봤다. 그때만 해도 내 문장에 정말 자신이 없었고, 한문장 써내려가는게 너무나 힘들었다.

졸업을 하고 1개월 정도 프로젝트 알바로 아주 바쁘던 시기와 한국 방문시기만 빼고 1주일에 한개 정도씩 이력서를 냈는데, 두어개를 내보고나니 지원서 쓰기도 조금씩 손에 익었다. 6월까지 덴마크어 수업도 열심히 듣고 8-9월 중 한달간 바짝 들었던 수업이 그렇게 도움이 많이 되었던 걸까? 첫번째 인터뷰에서 덴마크어로 인터뷰를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문제없이 하고 나서 나 스스로도 너무 놀랐는데, 덕분에 경쟁소비자청 면접에는 덴마크어에 대한 불안을 상당부분 잠재우고 갈 수 있었다. 논문을 쓰면서 문제제기 부문을 작성하고 관련 정부 정책을 살펴보기 위해 덴마크어 자료를 많이 읽은 게 도움이 은근 되었던 거 같은게 일련의 전문용어는 그런 자료를 읽는데서 습득했기 때문이었다.

머리가 쥐가 나는 것 같은 경험은 대학원 1학기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그땐 수업시수와 과제만으로도 치였던 계량경제와 생태학에 덴마크어 수업까지 동시에 들으면서 쏟아지는 자료를 읽다가 머리가 쥐가나는 것 같았다. 지금은 경력직으로 들어가 (낮은 레벨이긴 하지만) 신규 업무를 익히는데 그걸 덴마크어로 해야하다보니 머리에 쥐가 나는 것 같다. 회의에 들어가서 설명을 들으면서 질문도 해가며 이해해야해서 그렇다. 엄청난 자료 더미를 받았는데 그걸 제대로 이해하려다보니 그냥 대충 이해하고 넘어갔던 단어도 제대로 확인하고 넘어가야해서 시간이 배로 걸린다. 다행인건 페이지를 넘길 수록 이미 찾은 단어가 다시 반복해 나오고 불확실한 단어나 모르는 단어의 빈도가 줄어드는 것이다. 이렇게 읽고 이해한 데에 그친 단어면 내 능동적 활용단어에 포함시키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이걸 미팅에 들어가서 내용을 설명듣고 질문하는데 쓰다보면 머리에 빠르게 남는다. 나에겐 일을 하는 거이자 무료 덴마크어 수업을 받는 거다. 물론 이메일 쓰고 공문 쓰고 하는 일은 심적으로 큰 부담이긴 하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맞닥뜨려야만 한다는 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9월, 덴마크어 수업을 끝으로 수업이고 뭐고 내려놓고 본격적 덴마크어 공부도 손에서 잠시 논 후 잘 다져왔던 문법적인 디테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는 것 같았는데, 지난 며칠 사이에 이런 모든 게 다 빠르게 돌아오는 기분이다. 결국은 이런 도전의 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그 때 정체되어 있던 언어습득이 한단계 더 도약할 수 있다. 물론 이제 도전의 시작일 뿐이다. 이제 앞으로 내 분야에서 내가 전문가가 되어 덴마크어로 내외부 커뮤니케이션을 해나가야 한다는 게 두렵기만 하지만 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차근히 일을 해나가는 수밖에. 직장 동료들도 자기들이 외국에 가서 영어가 아닌 그나라 말로 취직하려면 너무 힘들 거 같은데 어떻게 4년여 시간동안 덴마크어로 일자리를 구했느냐고 묻는다. 왕도는 없다. 그냥 무조건 부딪히고,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러다보면 어느새 조금씩 조금씩 늘 거다.

나는 출산이 두렵지 않다.

어제 사람들과 만나서 점심을 했다. 중간에 출산이 무섭지 않냐는 질문을 받았다. 내 답은 아니라고 했는데, 아직 출산이 임박하지 않아서 그런 거다, 아니면 잘 몰라서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내가 출산이 무섭지 않은 이유는 그런 게 아니다. 사실 그 순간엔 정확히 왜 그런지는 몰랐다. 그렇지만 그냥 출산이 임박한 순간에도 그 고통이 무섭지 않을 거란 것은 안다. 물론 긴장은 되겠지만.

곰곰히 생각을 해 보았다. 왜 그런걸까?

고통은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물리적 고통 자체를 두려워한 적은 없었다. 어떤 기약없는 고통을 감내해야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건 두려워할 것 같다. 그러나 누구나 감내할 통과의례적 고통으로 어떤 특정 기간만 견뎌내면 되는 고통은 괜찮다.

내가 무서워하는 건 고통이 아니라 어떤 결과다. 내가 정신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어떤 결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거나 하는 종류의 결과 말이다.

물론 출산과정 중 애가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이 마음 한 켠에조차 없진 않다. 그러나 난 기본적으로 사람을 믿고, 사람들의 직업윤리를 믿고, 어떤 실수가 있더라도 그걸 만회할 정도의 상황이 되리라 믿기에 그 두려움이나 불안함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그럴 확률 또한 낮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할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삶이 한결 쉬워진다는 게 나의 믿음이다. 그게 나이브한 생각이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믿음은 그런 거 아니던가? 타인이 생각하는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간혹 읽기 또는 공부하기가 싫어지는 이유

간혹 읽기가 싫어질 때가 있다. 물론 날이 좋아 놀고싶은 마음이 들어서인 경우도 있지만, 그런걸 떠나서 읽기위해 앉는 자체가 싫은 날.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왜 그런지. 지금처럼 읽을 거리가 많은 때 미뤄봐야 돌아오는 건 스트레스일 뿐인데.

두려움 때문이다. 정해진 시간 안에 다 못 읽을까봐. 읽어도 충분히 이해가 안갈까봐. 또는 나와 다른 입장을 가진 텍스트가 설득력있게 다가와 혼란에 빠질까봐. 두려움의 근원은 다양하지만, 결국은 두려움이 나를 막는다. 얼마전 읽은 글에서 두려움을 나의 일부로 생각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맞서 대항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라고 했는데, 내가 읽기 싫은 게 아니라 두려움이 나를 못읽게 하는 것이다. 내가 완벽하지 않은 사람인 것을 또 한번 알게 되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 내가 평생 싸워야 할 괴물이다.

난 완벽주의자로 살아왔다. 내가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라 매사에 완벽을 추구하고, 완벽하게 하지 못할 것 같은 건 쉬이 포기했다. 그렇게 하면 완벽하지 않은 내가 내 선택에 의해 이런 모습으로 구현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내 학부 성적표가 A와 C로 대부분이 채워진 것을 들 수 있다. 딱 봐서 A가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과목은 재미가 없다는 말로 포장하며 관심을 주지 않고 최소한의 것만 해 C가 나오게 하는 것이다. 내가 못해서가 아니라 재미가 없어서 그렇다는 이유를 들며 포기의 여지를 주었다. 이러한 완벽주의는 일종의 정신 질환이다. 물론 아주 심각한 완벽주의를 정신 질환으로 분류하는 것이고 내 완벽주의의 정도가 딱히 심각한 것이 아니기에 실제 병으로 분류될 만한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 그러한 성향이 있음을 언젠가부터 인지해왔다.

때론 이 완벽주의로 삶의 모든 분면에서 버둥거릴 땐 삶이 참 힘들어졌다. 뭐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데 꽉 쥔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 흘러내리면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연연해 하지 말라는 말이 이런 순간에 큰 위안이 된다.  발에 쉬이 걸려차일 듯 널리고 널린 흔한 말일지언정 정말 중요한 말이다. 완벽을 추구하며 결과에 집중하며 스스로를 한정지을 것이 아니라 실패해도 도전하고 노력해서 그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첫 시험 이후로 줄곧 12점을 받아온 터라 이젠 잃을 것만 있는 것 같고 두려움 마저 든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옌스는 꼭 최선만 다해서 네가 네 스스로에게 떳떳하면 되지, 결과에 연연해 할 필요가 어디에 있느냐고 한다. 거기에 내가 최선을 항상 다하는 것은 참 힘든 일이라고 이야기 하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힘들지 않은 삶이 어디있냐고. 삶은 항상 힘든 것이라고. 또한 그게 당연한 것이라는 걸 알면 고통스럽지 않거나 그 고통이 덜해진다고. 삶이 힘들지 않다고 생각하는 데 힘든 일이 생기면 그게 이상한 거고 마음이 고통스러운 건데, 누구나에게 삶은 힘든 것이라 생각하면 그건 당연히 다뤄야 하는 일이 되고, 고통스럽지 않다고.

옌스의 말과 어떻게 보면 같은 맥락이기도 하고, 다른 맥락일 수도 있는 말인데, 어디서 본 말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삶은 공평하지 않다는 글귀를 본 적이 있다. 지금은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소화한 바로는 이렇다. 사회적 성공이나 타인의 인정 같은 건 내가 노력한다고 꼭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떤 순간에는 참 불공평한 것 같다는 분노가 들 때도 있지만, 그거에 분개해봐야 달라지는 것이 아닌 것이 참 불공평하지만 그게 현실이라고. 그러한 불공평함에 맞서 싸운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이 보다 공평한 방향으로 흘러왔고, 앞으로도 그러리라 믿는다. 그러나 그런 불공평함에 싸우는 것 뿐 아니라 우리에게는 현실을 살아야 하는 또 다른 역할이 있기에 그 불공평함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때로는 그 불공평함이 나로 하여금 타인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부여하기도 하고. 이 글귀를 읽고 타인에 대한 부러움이나 그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자격지심 등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오히려 내가 갖고 있는 것들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마음을 잊고 간혹 이런 두려움이 찾아오는 순간이 많다. 내가 노력을 했는데도 안될까봐, 그러면 불공평하다고 느끼고, 아니면 스스로에게 실망할까봐. 그런 때면 다시금 그 두려움은 괴물이라는 걸 생각하며 극복해야 한다.

첫해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입덧으로 몸이 안좋다는 것도 분명 사실이지만 사실 지금은 막판 스퍼트를 낼 힘이 딸린다. 마지막 시험 과목은 literature list가 엄청 긴데, 수업에서 literature의 상당수는 몇개의 용어를 차용한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시험이 개인과제 30%, 그룹 프로젝트의 개인 발표 및 질의응답 30%, curriculum literature와 관련된 발표 및 질의응답 40%로 개인과제는 이미 낸 것이니 그렇다치고, 나머지 60%의 절반 이상이 이 literature관련 시험이다. 문제가 주어지고 나면 준비한 내용을 1분동안 훑어보는 형태의 partial open book 시험인데, 과목 평가때도 이에 대해 많은 학생들이 불평을 한 것처럼 나도 많은 불만을 갖고 있다.

동기가 없으면 정말 몸이 강하게 저항을 한다. 물론 이걸 읽고 배우면 도움은 되겠지만, 뭐랄까, 마음에 평가 방식이 좀 불합리하다라는 생각이 한켠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집중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제대로 된 방학 없이 block사이 일주일씩의 휴식만으로 지난 1년을 끌고 왔으니 나도 지칠만큼 지쳤다.

늦깎이 공부를 하는 만큼 더 좋은 성과를 내야된다는 압박과 함께 유일한 동양인으로서 뭔가 쳐지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는 오기, 나이가 들어서 늘어난 이해력 등이 결합되서 그런지 다행히 지금까지는 첫 과목 빼고는 모두 12점을 받았다. 내 소논문 지도교수 왈, 내가 그간 몇년 가르쳐 본 중 가장 과정에 engage된 학생이라고, 모르는 거 절대 포기하지 않고 여러번 물어보고 이해해서 독립적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소논문을 통해서 보인 만큼 이대로만 하면 석사논문까지 잘 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아마 회사생활을 하면서 모르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얼굴 철판깔고 물어보고 배운 것이 도움이 되는 모양이라.

이제 마지막 시험 하나 남은건데, 잘 볼 자신이 별로 없다. 그룹프로젝트에 너무 진을 뺀 모양이다. 그렇게 열심히 한 그룹프로젝트는 30% 밖에 평가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 좀 억울하기도 하고…  결국 잘 못볼까봐 성적 잘 안나올까봐 두려워서 하는 핑계같기도 하고… 오늘 친구가 공유한 좋은 글귀에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은 두려움의 반대편에 서있다.”라고 되어 있었다. 그때, 내가 해야만 하는 것 또한 두려움의 반대편에 서있다는 생각이 들며 뜨끔했다. 이런 내 두려움을 들킨 것만 같아서.

모르겠다. 내일 하루 더 준비해서 금요일 아침 시험보고 끝나는건데, 과연 잘 할 수 있을지. 잘하든 못하든 그걸로 내 석사 첫 일년이 끝나고 방학이다. 내 치졸한 두려움을 열어보이고 나면 좀 더 후련하게 집중할 수 있을까 블로그에 글을 쓰는건데, 제발 그리되기를 바라며 마무리한다.

배움에 대한 두려움

내가 아는 것이 세상의 진리와 지식 중 티끌만큼도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아는 바를 삶의 매 순간에 지속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내가 알고 있는 바를 마치 모르는 것처럼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사람이다.

나는 새로운 것을 배움에 있어서 두려움을 느낀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은 원래 어려울 수 있고 따라서 배우는 것을 한번에 다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님을 머리로는 알지만, 술술 읽히지 않는 책을 접할 땐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유독 크게 느끼고 그 부족하다는 감정을 느끼기 싫어 아예 읽는 것을 피하기조차 한다.

자리에 진득하게 앉아 집중해 대여섯시간을 내리 읽어야 다음날 수업 준비가 될만큼 많은 읽을 거리가 주어지니 여유를 갖고 읽을 새가 없다. 수업시간이 주당 24시간의 수업과 덴마크어 수업 7시간을 제하고 나면 휴식을 취할 시간따위는 없다.

문제는 빨리 읽어내려가야 할 교과서나 논문이 술술 읽히지 않는다는데 있다. 물론 수업이 끝나고 나면 그 전날 가졌던 의문의 대부분이 해소가 됨에도 불구하고 매일 새로운 읽을 거리를 마주함에 있어서는 두려움이 있다. 최대한 의문거리를 줄이도록 깊은 사고를 하며 읽고 싶지만, 그럴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기에 질문 거리를 빠르게 체크하면서 읽어나가야 한다. 많은 질문거리를 쌓아내고 나면, 과연 내가 이것들을 충분히 이해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더 많이 이해했어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스스로에 대한 질책이 마음속에 휘몰아친다.

내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매일 피부로 느껴야 한다는 것이 부담이 된다. 그래서 미룰 수 있는 순간까지 최대한 읽는 행위를 미룬다. 주중엔 미룰 수 없으니 그렇다지만, 주말엔 일요일 오후가 되기까지 미루고 또 미룬다. 참 어리석다. 왜 조금 더 부지런하게 살 수 없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이게 나인가 싶다. 배움이 즐겁기도 하지만, 과연 내가 이 교육이 끝난 후 내가 원하는 바를 할 수 있을 만큼 다 흡수해서 성장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아예 중도에 안하면, “안해서 그랬어. 하면 다 할 수 있는데.”라는 변명을 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유치한 생각이 빈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전체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지만 매일, 매순간 무의식중에 그런 생각을 하기에 뒤로 미루기를 하는 것 같다. 회피의 순간을 지속적으로 찾는 나를 알기에 나 스스로를 설득하는 법도 배우게 된다. 미룬다고 달라지지 않거나 혹은 더 악화된다는 것, 조금이라도 더 하고 가는 것이 좋다는 것 등을 스스로에게 자꾸 이야기해 준다던가, 아니면 주중에 공부에 투자하는 시간이 50시간 이상 되니 금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읽을려는 노력이 실패해도 스스로를 비난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것 말이다.

이 모든 생각의 저변에는 난 사실은 이만큼을 해내야 해, 하는 자만심이 깔려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생각을 하면서 또 인간성이 덜 된 나를 질책하게 되지만, 그보다는 이 부족한 모습의 내가 나 스스로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받아들여야 할 지도 모른다. 앞으로 조금은 더 나아진 내가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