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살의 아이는 여섯살의 아이다.

하나가 커가며 조금씩 내 손을 덜 탄다. 요즘은 물건을 사거나 음식을 주문하는 것 등을 직접하도록 가르치는 중인데 몇달전만해도 꽤나 쑥쓰러워했는데 요즘은 그런게 하나도 없이 잘 한다. 미리 할 말과 상황을 가르쳐주고 가서 직접 해봐 하면 변하는 상황에도 잘 대응해서 하고 온다.

자꾸 애가 할 줄 아는게 느니까 이정도는 혼자 할 수 있겠지 싶어 믿고 하게 뒀다가 낭패를 보는 일도 생기곤 한다. 주차장의 인도옆에 주차한 차 안에서 옌스가 기다리고 있고, 나는 계산만 하고 나서면 되는 길이었기에 아빠한테 먼저 가도 되냐는 하나에게 그러라고 했다. 어려운 길이 아니었다고 생각했고 잠깐 사이였으니까. 차에 갔는데 아이가 없다. 수퍼에서 몰 출구까지는 십미터에 거기서 십오미터면 되는 차까지 가는 길인데 어디서 사라졌지? 이 출구를 놓치고 다음 출구로 갔나 싶어서 얼른 뛰어 들어갔더니 다른 어른의 도움을 찾아 수퍼로 돌아오는 아이를 만났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고 아이를 안아주었다. 차분하게 오긴 했지만 놀랬을 터였다. 내가 좀 더 통제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아이에게 시도해볼 기회를 여러번 주고 연습이 충분히 된 뒤에 할 일이었던 거 같다.

수퍼마켓에서 수차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기에 혼자 탈 수 있을 줄 알았다. 혼자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오겠다고 했다. 워낙 한국에서처럼 엘리베이터가 많으면 잘 타겠지만 엘리베이터 탈 일이 별로 없는 이곳에선 흔히 타진 않으니 경험이 현저히 부족했다. 아마 버튼을 충분히 꾹 누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두층간을 오고가는 엘리베이터라 엘리베이터가 어디에 있는지 움직이는 중인지 등을 알 수 없는 엘리베이터인데 애가 안내려온다. 내가 갑자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 여기 있다고 외치고 내려오는 버튼을 눌렀다. 그럼 두대 중 하나가 먼저 내려오겠고 하나가 탄 게 아니면 한번 더 누르려고. 다행히 하나가 타있던 엘리베이터가 내려왔고 아이는 놀라서 눈물을 왈칵 터뜨렸다. 고장났는줄 알고 너무 무서웠단다. 무서웠구나. 한참 안아주고 진정을 시켰다. 아마 버튼이 다 안눌린 거 같다며 고장난 건 아니었으니 다음에 엄마랑 다시 해보자고 했다. 그땐 내가 버튼 제대로 누르는 것까지 밖에서 보고 내려가서 기다리겠다고. 그러면 무서울 거 없이 내려올 수 있을 거라고. 해보겠냐니 그러자고 한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혼자 있는데 고장나면 어쩌냐한다. 엘리베이터에서 혼자타는 연습을 할 땐 고장 버튼부터 가르쳐야겠다.

애가 할 줄 아는게 너무 많아지니까 너무 당연히 할 거 같이 느껴지는 것 같아 안가르치는 것들이 너무 많았던 거 같다. 이제 학교에 가면 더욱 혼자할 게 많아질테니 조금 더 신경써서 일상의 것들을 가르쳐야겠다.

독립.

기본 원칙은, 하나가 열여덟살이 되면 독립을 시킨다는 것이다. 돈도 모아서 자기가 살 집 보증금을 마련하고 다달이 월세를 내고 살림을 챙겨가며 혼자 살아가는 진짜 독립. 그러니 그 전부터 아르바이트도 하고 집안 수리하고 페인트칠하는 법도 배우고, 살림도 배워야 할 게다. 여기선 혼자 살아남기 위해 배워야 할 일이 많으니까.

나는 독립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대학교 등록금을 대주신 이후부터 학비는 학자금 융자로, 용돈은 과외로 충당은 했다지만, 부모님이 마련하신 집에서 숙식을 해결했고, 내 방정리도 잘 안하고 다녔으니 말이다. 미루다보면 보다 못참은 엄마가 정리와 청소를 해주실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게다. 그 당시 핑계는 내가 할 건데 엄마가 너무 미리 해버리셨다는 거였지만 마음속 깊은 곳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청소야 주말에 간혹 청소기를 돌리거나 걸레질을 조금은 했어도 상시 엄마가 해두신 것에 주말에 간혹 한번 돕는 정도였으니 그냥 시늉이라고 해둬야겠다.

조금씩 독립의 연습을 하게된 것은 대학교 다닐 때 사촌인 민정이와 잠깐 같이 살았던 때와 직장생활 시작하면서 나 혼자 이모네 집 근처에서 원룸을 구해 살면서였다. 그렇지만 집 구하는 것도 엄마가 도와주셨고, 자주 엄마의 방문으로 반찬도 얻고 청소의 도움도 받았으며 그냥 사는 장소만 옮겼다 뿐이었지 정신적으로는 진짜 독립의 경험은 아니었다.

만 스물여덟이 되던 해였나? 2008년 해외 발령을 시작으로 해 인도에 나가 살면서 조금 더 독립에 가까워졌던 것 같다. 회사의 주택임차보조로 얻은 집이지만, 그 집은 내가 얻었다는 생각이 있었고 부모님이 이사를 오시기 전에 미리 내가 정착을 준비해두었고, 비자와 생활의 기반을 내가 마련한다는 점에서 독립에 많이 가까워졌던 것 같다.

아마 2010년이었던 것 같다. 당시 인도에서 사귀던 호주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남자친구와 만나 데이트하고 집에 열두시 다되어 왔는데 늦게 왔다는 걸로 엄마에게 혼이 났다. 만 서른의 나이에 외박도 아니고 늦게 오는 문제로 엄마에게 혼을 나야하는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엄마가 걱정하시는 남자와 자는 문제는 굳이 밤이 아니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 늦는 것을 막는다고 막아지는 일은 전혀 아니며, 내 주변 친구들 중 이 나이가 되도록 처녀인 애들은 손가락으로 꼽기도 어려우니 시대와 맞지 않는 걱정을 하시지 말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니 앞으로 외박문제는 터치하시지 말고, 앞으로는 외박을 하고 오는 일도 있을 수 있다 말씀드렸다.

엄마와 큰 갈등과 같은 부딪힘이었지만, 그런 큰 갈등을 서른이 되도록 빚어본 적이 없는 나였기에 아마 부모님도 그러려니 받아들여주셨던 것 같다.

막상 외박을 한 일은 손에 꼽고, 그 다음날 미묘하게 차갑고 다운된 기류를 느낀 것 이외에는 엄마도 나의 입장을 받아들여주셨고, 아빠는 엄마보다 항상 좀 더 느긋하게 받아들여주셨던 것 같다. 아빠 속이야 내가 알 수 있는 건 아니니 어쩌면 엄마보다 아빠가 더 걱정하셨고, 그걸 엄마에게 표현하셔서 엄마가 더 나서서 걱정을 표현하셨는지도 모른다. 그냥 표면 그대로 아빠가 더 잘 받아들여주신 것일 수도 있고. 누가 알테냐.

내가 옌스와의 미래를 그릴 때 가장 걱정이 된 건 부모님이었다. 과연 부모님과 떨어져 먼 이역땅에서 사는 게 괜찮은 일일까? 남겨진 엄마, 아빠의 마음은 어떨까? 나는 죄를 짓는 걸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도움이 필요한 일들이 생기실 수 있는데 나는 그 도움을 드리는 역할을 할 수는 없는데, 어떻게 해야하나? 용돈이라고 드리던 작은 돈도 내가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동안은 드리지 못할텐데 그건 괜찮을까? 많은 것들이 걱정되었다.

엄마, 아빠에게 그런 이유로 옌스와 미래를 그리는 게 걱정이 된다고 했을 때, 엄마 아빠는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씀해주셨다. 다 해쳐나가게 되어있다고. 너의 희생으로 우리가 살려는 거 아니라고.

이기적인 마음이기도 했지만 너무나 감사했고 안도했다. 아마 나는 엄마, 아빠에게서 반쯤 독립만 했었던 것 같다. 내가 새로운 가정의 한축이 되어 진정한 의미의 독립을 하는 데에는 기존 가족이라는 둥지를 완전히 떠나는 게 필요했는데 그걸 못하고 있었던 거였다. 이 말씀으로 나는 둥지를 완전히 떠났다. 훨훨 날아서.

나는 하나를 열여덟에 독립시킬 것이다. 하나에게 언제고 기댈 수 있는 나무가 되어는 주겠지만 때가 되면 둥지에서 밀어내서 날아가게끔 하련다. 그게 가혹한 게 아니라 문화인 이곳에선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아마 나에겐 큰 훈련이 필요한 일일 거다. 앞으로 십육년도 채 남지 않은 일이다. 그 때 나는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모르겠지만 그때도 뭔가 열심히 배우면서 살고 싶다. 그래서 그 때 생길 빈자리를 채울 수 있도록…

논문 시작

수면교육을 시작한지 나흘째. 첫날이 가장 힘들었고, 그 다음부터 아주 조금씩이지만 쉬워지고 있다. 오늘은 저녁 먹을 시간에 늦은 낮잠을 잔 터라 막상 잠을 잘 시간에 잠이 깨서 그런지 옌스가 수면의식으로써 책읽어주기가 끝났는데도 영 상쾌해 침대에서 놀고 있었다. 잘 자라고 이야기하고 꺠어있는 하나를 뒤로한 채 옌스는 방을 나왔고, 저글링한다고 산책을 하러 나갔다. 그 사이에 하나는 혼자 놀기, 떠들기, 울기를 번갈아가며 반복하더니 어느새인가 잠이 들었다. 이와 함께 밤에 깨는 횟수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고, 밤중 수유도 줄어들었다. 건강방문사의 조언대로 배가 고파서 젖을 찾는게 아니라 습관이었던 것 같다.

11월 들어 학교에는 나가더라도 밤에 같이 하나를 데리고 자는 덕에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전혀 부족하지 않았는데, 학교도 나가고 하나도 스스로 자다보니 아이와 보내는 질적인 시간이 확 떨어졌다. 주말에 좋은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 먹을 때 독립적으로 먹으려 하는 것부터 해서 이제 앞으로 성인이 될 때까지 작고 크게 하나가 독립해나가는 일들을 경험하게 될텐데 그때마다 대견함과 서운함이 섞인 복잡한 경험을 할 것임을 벌써부터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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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이 부은 하나. 엄마가 가방을 메면 밖으로 나간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했다. “가방을 맡으면 저도 같이 가나요?”

학교를 나가기 시작하면서 옌스와 다툴일이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육아휴직 기간이 길어지면서 힘에 조금씩 부치기 시작했는지 간혹 다툴 일이 있었는데, 사촌이나 엄마가 해주신 조언도 받아들이기도 한 덕도 있지만 우선 온전한 나의 시간이 길게 확보가 되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게 가장 큰 이유이다. 옌스와 같이 한 지 어느덧 4년이 다 되어가는데, 이젠 진짜 겉과 속, 나의 가장 좋은 모습과 못난 모습 다 보여준 피를 나눈 것과 다름 없는 가족이 된 것이다. 서로 부딪혀가며 더 잘 이해하게 되고 결국 더 아끼게 되었으니 하나를 갖게 된 것은 그 자체로도 축복이지만 또 감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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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엔 동네 도서관 탐방도 간혹 하곤 한다. 잠깐씩 나가서 나만의 시간을 갖게 해주는 옌스. 육아휴직을 하더니 집안일도 더 돕고… 많이 늘었네.

 

논문이라는 건 듣기만 해도 뭔가 괴물같고 뿌옇게 시야를 가리는 안개처럼 느껴진다. 막상 쓰기 시작하기 전엔 더 그렇다. 사실 교수를 서둘러 만난 건 천천히 여유있게 하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는데, 이 괴물을 작은 단위로 해체하지 않으면 마음 속에 큰 짐으로 남아있을 것 같아 서둘러 시작했다. 나는 나를 잘 못믿기 때문에 교수가 어떻게 논문 지도를 해줄지 물었을 때, 중간 중간 진행상황을 점검하며 채찍질해달라고 부탁했다. 미니논문 쓸 때도 그렇게 하고나니 진행이 수월했고, 결과물을 제때 도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는 논문 계약서를, 오늘은 프로젝트 플랜과 dissertation statement를 보냈다. 처음엔 지난 1년동안 무뎌진 뇌를 닦고자 계량경제학 노트와 Economic valuation method와 CBA 노트를 읽어보고 그 다음 논문을 준비하려 했는데, 그렇지 않고 바로 논문에 뛰어들기로 했다. 목적없이 전체 노트를 리뷰하는 것보다 중간중간 필요할 때 리뷰하는게 더 집중하기 좋을 것 같아서이다.

이렇게 조금씩 발을 딛고 나니 안개에 휩쌓여 있던 아주아주 큰 괴물같던 녀석이 생각보다는 크지 않을 것 같고 잘 토막을 내 뼈와 살을 발라낼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프로젝트 플랜을 보내고, midway deliverables는 나중에 업데이트하기로 했는데, 그러려면 세부 프로젝트 플랜이 나와야 할 거라서 우선 관련 논문을 닥치는 대로 읽어보며 본격적인 리서치를 하기로 시작했다. 몇개 논문을 읽어보다보니 빈옥명이라는 East Carolina 대학교 교수님께서 쓰신 연구가 연관성도 높고 정리도 잘 되어있어 읽기도 상대적으로 수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외에서 연구를 하며 해외 자료를 찾다가 한국인이 쓴 자료가 나에게 큰 등불이 되어준다는 것을 알게 되서 소소한 놀라움과 기쁨을 얻었다.

옌스가 오늘 좀 조용하다고, 괜찮냐고 묻는다. 나쁜 스트레스는 아니고, 앞으로 쓸 논문과 향후 진로 방향,  논문 뿐 아니라 덴마크어도 잘 공부해야하고 등등 생각하다 보니 그냥 약간의 긴장감이 돈 것 같다고 답했다. 정말 오랫만에 (거의 1년만에) 진득하게 앉아서 집중해야할 긴 읽을 거리가 생기니 좋은 긴장감이 든다. 주말은 잘 쉬고, 다음주엔 또 다음주의 할 일들을 열심히 해야지.

엄마, 아빠. 사랑합니다.

엘니뇨 현상으로 올 겨울은 온화한 계절이 예상된다고 한 것을 들은 지 오래지 않았는데 갑작스레 북풍한파가 닥쳤다. 거센 바람과 함께 눈폭풍이 들이치기 전에 부모님이 타신 비행기는 한국을 향해 떴다. 아슬아슬하게 한파를 피해가신 탓에 늦가을의 끝자락을 겨울이 오기 직전까지 함께하고서야 돌아가신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무서운 눈폭풍이 가라앉고 난 뒤 통상 찾아드는 고요함과 함께 밝은 햇살이 겨울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부모님의 빈자리가 갑자기 느껴진다. 계신 동안 학교 수업이 시작되며 바빠져 제대로 마지막 한 주를 보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지만, 일상은 계속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엄마가 떠나기직전 남기고 가신 편지 한 장이 내 마음을 크게 울린다. 이를 쓴 엄마의 마음이 한 글자, 한 글자 온전히 마음에 다가오기에 이를 읽을때마다 눈물이 난다. 내 진짜 독립은 지금 이 순간이 아닌가한다. 이미 독립했다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또 다른 가정을 꾸려가야 하는 이 순간을 맞이해 나를 떠나보내는 마음과 인생을 살아가다 지칠 때 나를 다시 추스를 수 있도록 하는 그 글에서 더이상 내가 부모님 품 안의 자식이 아님을 느낀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고 날기 싫은 마음마저 갑자기 들지만, 그간 무수히 연습만 해왔던 비행은 앞으로 떠날 긴 진짜 여정의 시작이 되었다.

이 편지는 깊고도 소중한 곳에 묻어둔다. 언젠가 타국의 삶이 힘들고 나를 지치게, 주저앉게 할 땐 이를 꺼내 마음의 위안을 얻으리라. 지금은 그 마음에 울며 읽지만, 지금 알 수 없는 미래의 힘든 그 순간엔 이 종이 한 장이 참으로 따뜻한 마음의 울림을 주리라. 그리고 난 다시금 용기와 힘을 내어 그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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