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통해 나도 다시 그 시절을 겪는다.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던 기억들도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지는 것처럼 어린 시절 기억들은 자주 떠올리던 기억이 아니면 잊혀지는 것이 많다. 내가 부모님에게 어떻게 어리광을 부렸는지, 어떤 감정을 겪었는지 등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 잊혀진 어린 시절을 하나를 키우면서 다른 방식으로 다시 경험한다. 아이가 아닌 부모로서, 나라가 바뀌어 새로운 맥락에서.

하나는 신체적 접촉을 매우 좋아한다. 부모가 쓰다듬어주는 것을 매우 좋아해서 자기 전 책을 다 읽고 나면 꼭 잠이 들때까지 몸을 쓰다듬어줘야 한다. 그런 연유로 만으로 거의 여섯살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한번도 우리가 아닌 누군가가 하나를 재워준 적이 없다. 아이의 부드러운 뱃살을 쓰다듬는 그 따뜻한 감촉을 우리도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일 거다. 또 길을 가다가 갑자기 “엄마, 안아주세요.”라던가, “엄마, 뽀뽀.”라면서 신체적 접촉을 원하는 때가 있다. 나는 어땠는가? 전혀 모르겠다. 그렇다고 나와 옌스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과의 신체적 접촉을 좋아하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친구들 중 하나에게 작별 포옹을 하겠다고 안아줄때면 소극적으로 안겨줄 뿐이지 적극적으로 안아주는 건 정말 내키는 경우 아니면 애착을 느끼고자 하는 접촉을 좋아하지 않는다. 꽤나 드문일이더라.

책장을 새로이 사주고 디스코 램프랑 인형집, 전축 등을 그 위에 이쁘게 놔줬더니 자기 방이 큰 애 방같이 느껴졌던 거 같다. 그 다음부터는 저녁엔 방 정리를 제법해서 더이상 전쟁통같은 방에서 재워야 하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때로는 같이 정리를 해야하기도 하지만, 정리하다가 딴짓하고 노는 것으로 새는 일이 줄어들면서 같이 정리하기도 수월해졌다. 그런데 어느날 그렇게 함께 정리를 하다가 머리카락 뭉텅이를 발견했다. 이게 뭐지? 싶어서 이게 뭐냐고 물었는데, 잘 모르겠단다. 음? 모른다고? 가위가 옆에 보이고, 가위로 싹둑 잘린 흔적이 보이는 머리카락인데? “내가 보기엔 네 머리카락 같은데, 아냐?”라고 재차 물으니, 씩 웃으면서 자기 머리를 어쩌다보니 자르게 되었다면서 죄송하단다. “네 머리카락이니까 미안할 일은 아닌데, 잘못해서 귀를 자를 수도 있고, 눈을 찌를 수도 있으니 머리카락은 엄마 없는데서 자르면 안돼. 그리고 다른 것보다 엄마한테 사실대로 이야기해야돼.”라고 말을 하자 “네.”라고 배시시 웃으면서 답을 한다. 왜 엄마한테 바로 이야기 못하고 모른다고 한건, 말하기 어려워서 그런거냐고 물어보니, 잘 모르겠단다. 자기 생각에 엄마가 하면 안된다고 하는 일일 것 같았던 거 같다. 나도 생각해보면 언젠가 앞머리를 바짝 당겨 눈썹 위로 잘랐던 일이 있었던 거 같다. 자르고 나서 머리가 짤뚱하게 올라갔던 기억도 나고. 다만 그래서 울었는지 뭘 어쨌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때 나도 몰래 했던 것 같은 기억만 어렴풋이 날 뿐. 아이가 잘못된 일이라도 나에게 언제고 솔직히 이야기해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어제 오늘 옌스가 취미활동을 하는 시간동안 이것저것 하나가 좋아할법한 일들을 하면서 여자들끼리 데이트를 많이 했다. “하나랑 같이 이렇게 데이트하니까 너무 hyggelig하고 좋다.”라는 내 말에, “자기도 딱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며 신나하는 모습에 나도 마음이 간질간질 따뜻했다. 엄마를 말이라면서 이름이 sommer에 성이 bacon이라고 작명도 해주고, 자기 수레를 끌으라고 이랴이랴 채찍질에 당근도 주고 하면서 그 큰 민속촌을 쏘다녔는데, 나이 든 엄마지만 그나마 이런 걸 해줄 수 있는 체력이 있는 것에 감사하면서 나도 덕분에 즐겁게 구경도 하고 놀다 왔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 또 이 나라의 학제도 덕분에 배우면서 학창생활이 어땠는지 되감아 가면서 생각해볼 수 있겠지. 초등학교 학창 시절 생각하면 3학년과 6학년의 담임선생님이 기억나는데, 특히 3학년때 담임선생님이 떠오른다. 다른 것도 아니고 쉬는시간에 선생님이 우리랑 놀아주시던 기억이다. 성함도 기억나지 않는데, 전두환씨처럼 머리가 벗겨지셨지만 또 얼굴만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이들지 않았던 선생님이었는데, 연배가 어떠셨는지 모르겠다. 그 선생님이 자기는 기마자세로 단단히 자세를 잡고 서서 옆에서 순서대로 달려오는 애들 배를 잡고 일종의 공중제비를 돌릴 수 있게 해서 반대편 옆쪽으로 다시 뛰어가게 세워주시는 놀이였다. 많은 애들이 했는지, 아니면 내가 해달라고 해서 해주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기억이 그렇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하나는 선생님과 어떤 관계를 쌓고 커갈지 궁금하고, 그걸 옆에서 간접적이나마 겪고 볼 걸 생각하니 설레기도 한다.

애를 키우면서 체력적으로 힘든 시기는 다 지나고 나니 애를 키우며 내가 겪는 많은 일들과 배움이 인생을 새롭게 채워주는구나 싶어서 이런 소중한 시간을 갖게 해주는 아이에게, 그 시간을 같이 행복하게 나누고 채워가주는 옌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부모에게서 받는 것과 또 다른 차원으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눠주는 아이라는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너무나 소중한 일이다. 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으랴.

나의 첫 미국행과 그에 얽힌 기억들

나의 고등학교 단짝친구는 나의 직장 동료이기도 했다. 이제는 회사를 관뒀으니 더이상 직장 동료는 아니다. 회사 생활 중 힘든 상황이 있을 때나 좋은 일이 있을 때 누구보다 상황을 더 잘 이해해줄 수 있었던 친구다. 우린 비슷하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닮았다. 많은 어려움과 행복함을 나눴던지라 더욱 소중하고, 서로 배려하는 따뜻함이 항상 느껴지는 그녀다.

그녀가 워싱턴 D.C.에 있고 내가 뉴델리에 있던 2008년,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24시간을 날아 그녀를 방문했다. 알았어도 갔겠지만, 그렇게 오래 걸리는 지 잘 모르고 계획한 여행이었다. 비행기의 연발로 공항에 늦게 도착한 탓에 새벽같이 암스테르담에서 나를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던 동기를 만나지 못하고 – 아직도 너무나 미안한 기억이다. – 게이트 앞에서 연결편 비행기를 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 승객이 다른 이에게 비행시간을 물어보니, 8시간이라고 대답하는 걸 들었다. 정확한 시간을 모르니 알아두면 나쁠 것도 없겠다 싶어서였는데, 너무 놀라서 대화에 갑자기 끼어들고 말았다. “4시간이 아니라?” 너무 황당한 질문이라서 그랬는지,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일이 너무 바빠, 간신히 일 마무리하고 비행기 잡아 타느라, 비행시간을 자세히 확인할 여력이 없었다.”고 멋쩍게 답을 하고 내 자리로 돌아앉아 머리를 쥐뜯었던 기억이 난다.

어느새 5년이나 지난 기억이라, 그녀와 공항에서 어떻게 만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수선한 공항에서 공중전화를 찾아 그녀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해서 공항에서 잘 만났는데, 그게 나의 첫 미국방문이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간 것인지라 뭘 봐야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알아보지도 않았던 탓에 모든 것이 즉흥적이었다. D.C.에 둥지를 튼 친구 덕에 차로 뉴욕을 향했다. 그들은 2박을, 나는 3박을 했는데, 나는 하루를 더 묵고 열차를 타고 D.C.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돌아가는 길에 차에 문제가 생겨 새벽에 길 한복판에서 아기와 함께 세 식구가 덜덜 떨었다고 한다. 얼마나 춥고 걱정되었을지, 이 또한 첫 미국 여행에 얽힌 미안한 기억 중 하나이다.

많은 지구촌 여성들에게 그런 것처럼 나에게도 Sex and the City는 나에게 뉴욕 생활의 꿈을 그려줬던 드라마였다. 돈암동에 나가 혼자 살며 여의도 회사생활에 찌들린채로 MBA 가보겠다고 GMAT 책을 펴놓고 딴짓을 하던 나에게, 허황된 뉴욕에서의 – 가능하다면 월가에서의 – 삶을 꿈꾸게 해줬던 드라마였다. 결국 야근만 많이 하다가 이대로는 은행에 주저앉겠다 싶어 이직을 하고 MBA는 마음 구석 깊숙히 접어두었지만, 뉴욕에 대한 로망만은 마음 한구석에 항상 자리잡고 있었다.

그랬던 뉴욕에 가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Sex and the City의 Sarabeth에서 브런치를 먹게 되고, 뉴욕 공립도서관을 지나고 – 보지는 못했다. – 월가의 황소 뿔을 만져보게 되니 감격스러울 지경이었다. 로커펠러센터의 아이스링크를 저녁에 바라보니 내가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다만 인도에서 보던 릭샤가 뉴욕 타임스퀘어에서도 달리기 시작한 것을 보고, 잠시 잊고 싶었던 인도의 시간을 다시 떠올리게 되어 미간에 주름을 잡고 머리를 흔들며 이를 떨쳐내기도 했다.

뉴욕 공립도서관

그러나 사람은 역시나 현재의 노예임이 틀림없다. 인도에서 여러모로 치여살던 나에게 관광은 금방 사치가 되었고, 친구 부부가 D.C.로 떠나자마자 나는 쇼핑을 시작했다. 물건이 귀하고 같은 제품이면 높은 관세로 더 비싼 인도에서 살던 나에게, 세상의 물건이 집결하는 미국의 한복판은 쇼핑의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크리스마스 연휴를 앞두고 거대한 쇼핑장으로 변한 뉴욕에서, 준비없이 여행온 나는 그냥 물욕의 노예가 되어 옷가지를 주워담았다. 그때 산 옷과 신발을 7년이 다되가는 지금도 입고, 신고 있으니 완전 실패했던 쇼핑은 아니었다. 설마 이게 나의 마지막 뉴욕행이 되겠는가 하고 생각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올해 여름 다시 뉴욕을 가게 되었으니, 겨울과는 또 다른 얼굴의 그곳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새로 산 옷가지로 가득찬 무거운 트렁크를 낑낑대고 끌고 다니며, 부가세 환급을 위한 여러 절차까지 마친 나는 Penn station으로 가 D.C.로 갈 기차를 탔다. 준비없이 혼자하는 여행은 하루면 충분하다면서 자리에 앉았는데, 4명이 마주앉는 자리였다. 조금 있어 멀쑥하게 차려입은 두명의 남성이 앉아도 되냐길래, 그렇라고 하고 나는 곧 고개를 벽쪽으로 기대고 잠이 들었다. 덜컹임에 잠에서 깨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자기들 뭐 사마시려고 하는데 뭔가 필요하냐고 묻길래 괜찮다고 했다. 솔직히 낯선 사람을 믿고 살기 어려운 인도에서 6개월동안 치여온 나인지라, 낯선이를 믿을 용기가 없었기에 그렇게 답을 했다. 정말 괜찮냐면서, 뭐 사다주겠다고 하길래, 물을 마시겠노라 했다.  페트병에 담긴 물을 갖고 온, 멀쑥하게 입은 그들을 자세히 보니, 나에게 뭔가 사기를 칠 것 같이 생기진 않았다. 고급스러운 어휘와 유려한 말솜씨를 봐도 크게 걱정을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 고마워하며 마시기로 했다. 얼마냐고 하니 손사래를 치기에 굳이 어거지를 써가며 돈을 주지는 않기로 하고 지갑을 넣어두었다.

필라델피아 소재 로펌에 근무하는 그들은 업무 회의차 뉴욕에 들렀다가 집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한명은 딸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아직도 사지 못했다면서 크리스마스 직전까지 일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라고 했고, 다른 한명은 약혼녀를 크리스마스 쇼핑에 홀로 내보냈다며 구박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어디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려고 여행하는 길인지 물었다. 그 날이 아마 이브날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때까지 일을 하다니, 역시 로펌이라는 생각에 웃음이 샜다.

어쩌다 대화가 그렇게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그 당시 미국에서 매우 인기가 높았고, 나도 좋아했던 The Grey’s Anatomy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면서 중요한 남성 캐릭터였던 McDreamy와 McSteamy중 누가 나의 남성상이냐는 질문에 뭐가 좋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했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다면서 30초 안에 고르라고 재촉을 하길래 McDreamy를 골랐던 기억이 난다. 그 답에 그가 놀라했던 기억이 나는데, 왜 놀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런 저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덕분에 아주 유쾌한 시간을 보냈는데, 그들이 필라델피아에서 내릴 때 아쉬울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즐거운 기억이다. 그간 낯선이와 대화가 그리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껏 이렇게 자세히 기억이 나는 모양이다.

친구네 집에서 친구네 가족과 크리스마스를 보낸 것도 처음이었다. 미국 여행은 참으로 많은 첫기억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그 기억의 순간을 나의 소중한 그녀와 함께할 수 있어 기뻤다. 월마트에서 끝도 없이 진열되어 있는 상품의 종류와 양에 기함을 했던 것이나 돌아오는 편에 이민가방을 가득채워 화물을 싣는 과정에 중량 문제로 고생을 한 것, 공항에서 짐을 스캐닝하는 과정에 내 짐에 있는 햄을 보고 공항직원이 박장대소하는 것에 쑥쓰러워했던 것, 미국에서 사온 네스프레소를 인도에서 사용하자마자 전압이 맞지 않아 바로 퓨즈가 날아간 것 등 무수히 많은 소소한 기억들. 순간순간에는 여러가지 감정이 섞였겠지만, 지금 뒤돌아 시간을 되짚어보면 그냥 다 즐겁고 웃음이 나는 작은 기억의 파편들이다.

올해 미국을 방문하면 그녀는 그곳에 있지 않다. 지금은 먼 싱가포르에 있어 과연 언제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항상 내 마음속에 있고 언제고 마음 먹으면 방문할 수 있고, 기술이 우리를 이렇든 저렇든 마음을 전할 수 있게 연결해주기에 서운하지만은 않다. 대신 또다른 친구가 그곳에 있기에 그녀와 다른 추억을 쌓아올 수 있을 것이다.

어제 카톡으로 그녀와 잠깐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한시간도 넘게 이야기를 했다. 마음의 크기만큼 시간은 빠르게 흐르는 것 같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가 피부로 느껴지는 대화시간이다. 잠깐의 대화를 통해 마음 한구석 장롱 한구석에 보관해두었던 추억 한보따리를 꺼내 열어보게 되니 기분이 좋다. 벌써 20년지기 친구이니, 우리가 몰랐던 시간보다 알고지낸 시간이 이제는 더 많아졌다. 그런 친구를 내 마음속에 두고, 그 친구의 마음속에 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렇게 있어줄 수 있었던 그녀가 소중하고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