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에서 네번째 연말을 맞이하며

12월 22일. 동지가 지났다. 이제 해는 다시 길어질 것이고, 추위는 조금 더 절정을 향해 달리다 눈치채지 못하는 새 봄을 향해 달리겠지. 하나는 추위가 가장 기승을 부리는 1월 말 경에 태어날테니 이번 겨울은 뭔가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는 새에 지나가지 않을까 한다.

올 겨울 100년 이래 가장 추운 겨울이 될 거라고 하더만, 최소한 지금까지는 예보를 벗어나 유래없이 따뜻한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바람도 그다지 세차지 않고. 이러면 내년엔 병충해가 많이 돌텐데…

친구들을 불러 한국 음식을 차려 송년회를 했는데, 한 친구가 포인세티아를 사왔다. 살까말까하다 사지 않았던 크리스마스 느낌이 물씬나는 포인세티아. 들어갈만한 적당한 화분이 없어서 검정플라스틱 화분을 감싸고 있던 녹색 포장지를 적당히 구겨 집에 있던 검정 리본으로 둘렀다. 밑에 접시를 받혀 창가에 두니 완연한 크리스마스 느낌이다. 선인장류가 아니면 1년 내에 식물이 죽어나가는 우리집에서 얼마나 오래 살 지 한번 두고 볼 일이다. 죽어나가는 식물의 수가 늘어가는 만큼 경험의 축적과 함께 평균 생존기간도 늘어나니, 혹시 또 아나? 이 포인세티아가 우리와 한참을 함께할런지.

크리스마스 선물 쇼핑도 끝났고, 26일에 있을 2차 크리스마스 오찬에 선보일 한식 메뉴도 결정했다. 시아버지의 자매들과 그 아래 직계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큰 모임이라 포트럭 스타일로 각자 메뉴를 하나씩 준비해오는데, 덴마크 전통 크리스마스 오찬 메뉴가 있어서 거기에 적당히 어울리는 음식으로 가져가야 한다.

작년엔 김밥을 해갖는데 인기가 매우 좋았다. 애들도 좋아했고. 그러나 시간상 점심이고, 차로 한시간 반 정도 가야 하는 길 때문에 새벽같이 일어나 계란지단 부치고 오이를 소금에 절이고, 당근과 시금치, 고기 볶아 갓지은 밥에 마는 게 너무 힘들었다. 시간에 쫓겨 막판엔 집을 폭탄맞은 듯한 상태로 놔두고 갔는데, 집에 돌아와서 집안 가득한 참기름 냄새를 맡으니 피로가 어찌나 몰려오던지. 올해는 친구의 조언에 따라 새우전을 부치려고 한다. 전날 부쳐서 당일에 현장에서 데워 내면 되니까.

옌스네 가족 및 옌스 시누이네 가족과 함께 할 24일 메인 크리스마스 만찬은 옌스 시누이네서 하는데, 내가 합류한 이후에도 우리 집은 초콜릿과 디저트와인 등 돈으로 떼울 수 있는 쉬운 것을 맡고 있다. 명절에 돈으로 떼우는 게 쉽다는 건 해보니 알겠다. (머리로도 알긴 했지만, 해보니 정말 실감난다.) 그래도 한국식 생각해보면 정말 간단한 명절 준비다. 각각 집에서 큰 준비는 다 해와서 현장에서 데우는 식으로 해서 음식을 내니까. 올해는 원래 더 먼 Faxe Ladeplads로 가야했는데, 시고모님 팔이 부러지는 바람에 작년과 같이 로스킬레로 간다.

이번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 중 침대 조립하고, 유모차 조립/해체법에 익숙해지도록 연습 몇 번 해보고, 하나 양말 몇 개 사고, 아기 용품 빨래만 하면 하나를 맞이할 준비는 거의 다 끝난 것 같다. 어제 친구와 함께 아이들 옷과 용품을 중고로 내놓는 중고 상점에 다녀왔다. 장소를 대여하는 업체가 운영을 담당하고, 팔 물건이 있는 사람들은 매대를 대여해 제품에 태그를 붙여 비치하는 영구적인 벼룩시장이다. 여기서 옷가지 몇 개와 모유수유 책 한권을 사왔는데 참 저렴하더라. 첫 한 해에 입을 옷은 사이즈가 다양하게 있는 편이어서 앞으로 1년은 여기에 많이 의존할 예정이다. 굳이 하나에게 새 옷을 입혀야 하는 것도 아니고, 애들은 워낙 빨리 자라니 새 것을 필요한 양만큼 사기엔 낭비가 크니까.

내가 이 곳에 산지도 어느새 3년 반이 다 되어간다. 정말 별로 오래 안된 것 같은데 벌써 3년 반이라니… 다행인 건 이 나라와 나의 궁합이 잘 맞는다는 것이다. 아직 직장을 구하지 않았으니 완전한 정착을 한 건 아니지만, 그냥 일상생활 속에서는 이방인 스트레스를 거의 졸업한 것 같다. 여기 신문을 읽으면서 한국 신문에서 조금씩 멀어지게 되고 여기 물정에 더 밝아지게 된다. 물론 한국의 정치기사는 워낙 요즘 정치가 신묘하고 황당하게 돌아가다보니 관심을 끌 수가 없지만… 그 밖에 일에서는 조금씩 멀어지게 된다. 식사하는 방식이나 소소한 일상의 행동도 여기식으로 많이 바뀌었다. 임신이라는 경험과 출산 모두 이 곳의 방식으로 행동하고, 교육받고, 몸조리도 여기 사람들이 하는 대로 하게 될테니.

한국에서 살면서 항상 튀어서 지적받고 했던 내가 여기에선 크게 유별나지 않은 사람이 되서 그런가. 이국의 땅에 있지만 이곳에 살면서 내가 이방인이라고 느껴지던 순간들은 한국에서 비슷하게 느끼던 순간들보다 적으면 적었지 더 많지 않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성인이 20대 후반까지 자란 사람이라 절대 이들과 동질성을 느끼는 사람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야 하지도 않고 그럴 생각도 없다.), 시간이 지날 수록 이 사회를 더 이해하게 되고 녹아 들어가면서 한국인과 덴마크인의 모습이 뒤섞인 사람이 되겠지.

옌스가 스케이트를 타러 아이스링크에 간 사이 크리스마스 캐롤 피아노곡을 들으며 혼자 글을 쓰고 있으니 왠지 감수성이 넘쳐흘른다. 열흘에 불과한 짧은 연말연시 연휴, 프로젝트도 하고 출산준비도 하며 바쁘게 달려갈 생각을 하니 오늘의 평화를 더욱 잘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밤이 깊어가니 쿠키를 곁들여 디카페인 커피 한 잔 하며 이 시간을 즐겨야겠다. 요즘 간혹 덴마크의 hygge가 소개되곤 하는데, 정말 별 것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내 곁에 없어도 되고, 꼭 촛불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나 혼자 온기가 느껴지는 포근한 시간을 보내면 그걸로 충분하다. Jeg skal hygge mig herhjemme alene lige nu!

늦가을이 물러갈 채비를 하면…

드디어 영하로 기온이 떨어지는 날이 찾아왔다. 비소식이 있는 내일과 주말동안에 다시 영상으로 올랐다가 그 다음주엔 또 영하인 날들이 지속될 전망이다. 가을이 서서히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날이 추워지긴 하지만, 이런 때 내가 덴마크 삶에 익숙해지고 있다고 느끼는 건, 아직까지 별다른 난방 없이 잘 살고 있다는 것. 난방으로 더워진 공기를 신선하지 못한 공기와 동일시 하며 따뜻한 실내를 참지 못하는 옌스와 살다보니 그런 것도 있지만, 굳이 옌스가 아니더라도 덴마크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춥게 지내는 것 같다. 난방비가 비싼 것도 무시 못하는 요소다. 주택에서 살던 첫 해, 멋모르고 난방하다가 난방비 폭탄으로 몇백만원 낸 기억이 있다. 요금 정산이 전년도 평균을 납부한 후 증감분을 다음해에 사후정산하는 시스템인데, 전 입주자보다 더 많이 썼다가… (사무실과 같은 공간은 난방을 잘 하고 얇게 입고 지내는 게 보통이다.)

집에 있다가 끼니 사이 좀 추워지는 타이밍엔 스웨터를 하나 더 입고, 차나 커피를 한잔 마시고, 그래도 추우면 약간의 맨손체조를 하며 몸을 덥힌다. 스쿼트가 최고.

부활절에 한국 다녀올 때, 미리 엄마한테 모과차를 부탁했었다. 시중에 파는 건 모과 향만 나는 설탕물이니 과일로 담궈달라고. 끝물이라 모과 찾기가 쉽지 않아 많이 담그지 못했다며 주신 작은 두 병중 한병만 후딱 먹고 한 병은 놔뒀다. 아주 얇게 채를 썬 모과를 보며 느껴지는 정성. 오늘 날이 추우니 딱 생각나더라. 모과차. 사실 모과차엔 한과가 딱인데, 한과는 없으니 제껴두고… 그냥 모과차를 끓였다. (샐러드 드레싱에도 아주 유용한 모과청!!!)

20161103_183412.jpg

추울 땐 역시 모과차. 여름엔 생각이 전혀 안난다.

한국보다 온도는 높지만 습하고 제주도 바람보다 거센 바람이 자주 부는 겨울은 유독 견디기 쉽지 않다. 무엇보다 해가 짧고 어두운데다가 4월까지 길게 늘어져서 그럴 거다. 그나마 올 해, 학교내 정원을 가로질러 다니며 2월 초부터 피어나기 시작하는 봄 꽃을 관찰하며 시간의 변화를 조금씩 느끼다보니 어떻게 봄을 기다릴 수 있는지 나만의 방법을 하나 체득하였다.

다음주는 시험인데, 이번 시험은 다소 망했다. 이미 예감이 온다. 열심히 하지 않았는데, 좋은 성적이 나오는 것 만큼 사기는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무서워서 공부를 자꾸 미루다가, 에이 좀 망치면 어때! 이런 생각이 드니 다시 공부할 마음이 조금 든다. 내일부터 시험 공부 바짝해서 현재 기준으로 가능한 좋은 성적을 받도록 노력하기로 하고, 초조한 마음은 덮어두기로 했다. 최악의 슬럼프에서만 헤어나왔을 때, 한 블로그 이웃분께서 나보고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좋은 의미로) 슬럼프에 빠졌을 때 하나씩 차근히 해보려고 하라고 조언을 해주셨는데, 그게 참 힘들었다. 맞는 말씀인 것 경험으로도 알고 있고, 그게 맞는데, 그걸 이행하기까지 힘든 순간이 있는 것 같다. 그래도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데 그런 이야기가 도움이 많이 되었다.

아무튼 너무 늦은 건 없으니까 최선을 다해보고, 그리고 다음 블록 한과목 잘 해서 석사과정 수업들을 잘 마무리해보도록 해야겠다.

블로그도 이런 슬럼프 속에 접어두었는데, 그간 쓰려다가 접고 저장만 해둔 아이들도 보고 시험 끝나고는 다시 열심히 기록을 남겨야겠다.